존 루이스 (정치인)

미국의 인권운동가, 정치인 (1940–2020)

존 로버트 루이스(John Robert Lewis, 1940년 2월 21일 ~ 2020년 7월 17일)는 1987년부터 2020년 자신의 사망까지 애틀랜타의 대부분을 포함한 조지아주 제5선거구를 위하여 하원을 지낸 미국민주당 정치인이자 민권 운동 지도자였다. 자신의 재직 기간 때문에 그는 하원에서 민주당의 당수는 물론 조지아주 의회 대표단의 위임장이 되었다.

존 루이스
John Lewis
미국의 조지아주 제5선거구 미국 하원 의원
임기 1987년 1월 3일 ~ 2020년 7월 17일
전임 위치 파울러
후임 콴자 홀

미국의 애틀란타 광역 제18선거구 시의회 의원
임기 1982년 1월 1일 ~ 1985년 9월 3일
전임 잭 서머
후임 모리스 핀리

미국의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 (SNCC) 제3대 의장
임기 1963년 6월 ~ 1966년 5월
전임 찰스 맥듀
후임 스토클리 카마이클

신상정보
출생일 1940년 2월 21일(1940-02-21)
출생지 미국 앨라배마주 트로이
사망일 2020년 7월 17일(2020-07-17)(80세)
사망지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
학력 아메리칸 침례교 신학교 (BA)
피스크 대학교 (BA)
정당 민주당
배우자 릴리언 마일스 (1968년 결혼, 2012년 사망)
자녀 1
종교 침례교
서명
상훈 대통령 자유 훈장 (2011년)

루이스는 미국에서 합법화된 인종 차별을 종식시키는 데 민권 운동과 그 활동들에서 많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1963년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을 결성한 "빅 식스" 지도자들 중의 하나였다. 국내적으로 그는 앨라배마주 셀마에 있는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를 걸쳐 600명의 행렬자들을 자신과 동료 활동가 호지어 윌리엄스가 지도한 1965년 3월 7일 셀마 몽고메리 행진에서 자신의 현저한 역할로 알려졌다. 루이스는 사회에 자신의 많은 공헌들로 매우 인정을 받아 대통령 자유 훈장을 포함한 다수의 명예 학위들과 상들을 받았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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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버트 루이스는 앨라배마주 트로이의 외부에서 에디 루이스와 윌리 메이 (카터)의 10명의 자녀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앨라배마주이 시골 파이크군에서 분익소작인들이었다.

소년으로서 루이스는 설교자가 되기를 열망하였고 5세의 나이에 그는 자신의 가족의 농장에 들에게 설교하고 있었다.

어린이로서 루이스는 백인들과 거의 상호작용이 없었다. 사실 그가 6세때 무렵 루이스는 자신의 일생에 2명 만의 백인들을 보았다. 자신이 나이를 먹으면서 그는 가족과 함께 자신이 트로이에 있는 공공 도서관 같이 인종 차별과 분리를 경험했던 타운으로 여행들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루이스는 북부의 도시들에 살았던 친척들이 있었고 그는 그들로부터 북부는 인종적으로 합쳐진 학교, 버스와 기업들이 있었다는 것을 배웠다. 루이스가 11세때 그의 삼촌은 그를 뉴욕주 버펄로로 데려가 트로이의 인종적 분리를 더욱 절실히 깨닫게 하였다.

1955년 루이스는 처음에 라디오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듣고 그해 후순에 킹 목사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에 가깝게 따라갔다. 15세의 나이에 루이스는 자신의 첫 공개 설교를 했다. 17세때 루이스는 로자 파크스를 만나고 18세때 처음으로 킹 목사를 만났다. 앨라배마주에서 트로이 대학교로 입학이 거부된 것에 관하여 킹에게 글을 쓴 후, 루이스는 회의로 초대되었다. 루이스를 "트로이에서 온 소년"으로 언급한 킹은 인종 차별로 대학을 고소할 것을 의논했으나 루이스에게 그렇게 하다가 트로이에 있는 그의 가족에게 위험이 될 것을 경고하였다. 자신의 부모와 의논한 후, 루이스는 테네시주에 있는 작고 역사적으로 흑인들의 단과 대학에서 자신의 교육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루이스는 내슈빌에 있는 아메리칸 침례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침례교목사로서 성임되었다. 그러고나서 그는 피스크 대학교로부터 신앙과 철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루이스는 세노나 클레이턴에 의하여 주최된 신년전야 파티에서 릴리언 마일스를 만났다. 그들은 1968년에 결혼하였다. 함께 그들은 존-마일스 루이스라는 단 하나의 아들을 두었다. 릴리언 여사는 2012년 12월 31일 사망하였다.

2019년 12월 29일 루이스는 자신이 췌장암의 4번째 단계와 진단되었던 것을 공고하였다. 그는 치료를 위하여 워싱턴 D. C.에 남아있었다. 루이스는 "난 내 전체 인생 가까이 자유, 평등, 인권을 위하여 어떤 종류의 싸움에서 싸워왔다. 난 지금과 같은 싸움을 겪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2020년 7월 17일 루이스는 애틀랜타에서 지병과 6달간 싸운 끝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 민권 운동 활동가 C. T. 비비언과 같은 날이었다. 루이스는 최종 생존 "빅 식스" 민권 우상으로 지내왔다.

학생 활동과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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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으로서 루이스는 민권 운동으로 헌신적이었다. 그는 내슈빌에서 인종적으로 분리된 점심 카운터에서 농성을 결성하였고 내슈빌 학생 운동의 일부로서 다른 민권 활동들에 참가하였다. 내슈빌 농성 운동은 다운타운 내슈빌에서 점심 카운터의 인종 차별 대우 폐지를 위한 책임이었다. 루이스는 도시의 다운타운 지역에 인종 분리를 폐지하는 비폭력 운동에서 수많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이 시간 동안 루이스는 변화를 달성하는 데 "좋은 문제, 꼭 필요한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있고 자신이 일생을 통하여 명언과 정서에 보유되었다는 것을 표현하였다.

학생이었던 동안 루이스는 제임스 로슨 목사와 켈리 밀러 스미스 목사에 의하여 클라크 메모리얼 유나이티드 감리교회에서 열린 비폭력 작업에 참석하는 데 초청되었다. 거기서 루이스와 다른 학생들은 자신이 일생을 나머지 동안 실행한 비폭력의 규율과 철학으로 헌신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자유의 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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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적인 방법으로 워싱턴 D. C.에서 뉴올리언스버스를 타는 데 결심한 6명의 흑인과 6명의 백인들이 있었다. 당시 몇몇의 남부의 주들은 대중 교통에 흑인과 백인이 서로 옆에 앉는 것을 금지한 법률을 집행하였다. 화해의 펠로우십에 의하여 시작되고 제임스 파머와 인종 평등 회의에 의하여 부활된 자유의 기수 (Freedom Rides)는 인종적으로 분리된 주립 버스 여행이 비헌법적으로 선언한 보인턴 대 버지니아 (1960년)에 미국 대법원의 결정을 집행하는 데 연방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데 시작되었다. 자유의 기수는 또한 법을 준수하는 시민들에 대한 폭력을 향한 정부의 수동성을 드러냈다. 연방 정부는 기수들을 보호하는 데 악명 높게 인종 차별주의자 앨라배마 주립 경찰을 신임했으나 미국 연방 수사국 대리인들이 알아차린 것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나서 케네디 행정부는 자유의 기수에 지급 유예와 함께 계획 철회 보증 기간을 요청하였다.

남부에서 루이스와 다른 비폭력 자유의 기수들은 화가 난 폭도들에 의하여 매를 맞고 체포되었다. 21세의 나이에 루이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록힐에 있었던 동안 폭력을 당하는 데 자유의 기수들 중의 첫 인물이었다. 자신이 백인 전용의 대합실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2명의 백인 남성들이 그를 공격하여 그의 얼굴을 부상을 입히고 그의 갈비뼈를 걷어찼다. 그럼에 불구하고 불과 2주 후에 루이스는 미시시피주 잭슨으로 가는 자유의 기수에 가입하였다. 루이스는 폭력 행위를 따르는 자신의 인내에 관한 자신의 일생의 종말을 향하여 "우리는 어떤 폭력 행위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놔두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우리는 돌아서지 않기로 결심하여습니다."라고 말했다. 루이스는 자유의 기수 활동에 참가한 후, 선플라워군에 있는 미시시피 주립 교도소에 40일간 투옥되었다.

자유의 기수 40주년 동안 CNN과 인터뷰에서 루이스는 자신과 다른 12명의 오리지널 자유의 기수들이 견뎌낸 폭력의 정도를 이야기했다. 버밍햄에서 기수들은 야구 방망이, 쇠사슬, 납관과 돌로 매를 맞았다. 그들은 테네시주로 들어가는 경계를 건너는 데 지도하여 풀어준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그들은 재결성하고 자신들이 더욱 많은 폭력과 만난 몽고메리로 버스를 탔는 데 루이스는 나무 상자로 머리에 맞았다. 루이스는 "그것은 매우 난폭했다. 난 내가 죽을 줄 알았다. 난 몽고메리에 있는 그레이하운드 버스 정류장에서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었다."고 말하며 사고를 기억하였다. 인종 평등 회의가 폭력 때문에 자유의 기수에 포기했을 때 루이스와 동료 활동가 다이앤 내시는 내슈빌의 학생들이 그것을 인수하여 성공적으로 결론을 내리도록 마련하였다.

2009년 2월 자유의 기수가 있던 동안 그레이하운드 정류장에서 피를 흘린지 48년 후에 루이스는 백인 남부인이자 전 쿠 클럭스 클랜 단원 엘윈 윌슨으로부터 전국적으로 방송된 사과를 받았다.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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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행진의 지도자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루이스

1963년 찰스 맥듀가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의 의장으로서 물러났을 때 그 조직의 창립 회원들 중의 하나였던 루이스가 차지하는 데 선출되었다. 그 점에서 루이스의 경험은 이미 널리 존중을 받았다. 화해와 비폭력의 철학으로 그의 용기와 끈기있는 부착은 그를 지도자로서 등장하게 만들었다. 그는 1966년까지 의장을 지냈다. 그의 재직 동안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는 자유의 학교들을 열고, 미시시피주 자유의 여름을 발포하고 1965년 셀마 선거권 캠페인 동안 어떤 투표 등록 노력을 결성하였다.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의 의장으로서 루이스는 1963년 민권법으로 반응에 연설문을 썼다. 계획된 연설은 그것이 경찰 폭력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보호하거나 그들에게 투표하는 권리를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안을 비난하였고 그것을 "너무 약간 그리고 너무 늦었다"고 묘사하였다. 그러나 연설문의 복사들이 8월 27일 분배디었을 때 행진의 다른 의장들이 그것이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프로그램이 있던 동안 제임스 포먼이 링컨의 동상 뒤에 있는 작은 대기실에서 휴대 타자기로 루이스의 연설문을 다시 썼다.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의 시초적 역설 "우리는 민권 법안을 진심으로 지지할 수 없다"는 "우리는 좋은 예약으로 그것을 지지한다"와 대체되었다.

1963년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의 의장으로서 루이스는 휘트니 영, A. 필립 랜돌프, 제임스 파머로이 윌킨스와 더불어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저명한 "〈I have a dream〉" 연설의 행사인 워싱턴 행진을 결성하고 있었던 "빅 식스"의 하나로 임명되었다.

1963년의 거대한 워싱턴 행진에서 킹 목사의 "I have a dream" 연설을 들은 똑같은 엄청난 관중에게 연설한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으ㅣ 의장 존 루이스는 바른 의문점을 묻는 데 준비되었다:'연방 정부는 어느 쪽인가? 그 문장은 케네디 행정부를 불쾨하지 않게 하는 데 행진의 다른 결성자들에 의하여 그의 연설로부터 탈락되었다. 루이스와 그으 동료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 업무자들은 남부의 폭력의 표면에서 연방 정부의 수동성을 경험하였다.

루이스는 마지못해 자신의 연설에 변화를 받아들여 그날 최종 연설자로 지낸 킹 목사에 의한 "I have a dream" 연설에 앞서 그날 4번째 연설자로서 편집된 연설문을 발표하였다.

 
1964년의 루이스

1964년 루이스는 남부를 걸쳐 흑인 투표인들을 등록하고 남부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생활의 위험에 전국의 대학생들을 노출시키는 캠페인 "미시시피 자유 여름"을 위하여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의 노력을 조정하였다. 루이스는 전국을 여행하여 합중국에서 가장 반항적인 주인 미시시피주에서 주민들이 투표하는 데 도움을 주는 데 시도한 자신들의 여름 휴가를 보내는 데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았다. 루이스는 "피의 일요일"오 알려질 날 - 1965년 3월 7일 자신과 동료 활동가 호지어 월리엄스가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에드먼드 페터스다리를 건너는 데 600명 이상의 행렬자를 지도했던 셀마 몽고메리 행진에서 자신의 두드러진 역할 동안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다리의 끝에서 자신들에게 해산하라고 명령한 앨라배마 주립 경찰대와 만났다. 행렬자들이 기도하러 멈추었을 때 경찰은 최루가스를 방출하였고 그들을 탑재하여 시위대를 기소하여 곤봉과 그들을 구타하였다. 루이스의 두개골이 부러졌으나 그는 운동의 본부로 지냈던 셀마에 있던 교회 브라운 예배당으로 다리를 건너 탈출하였다. 루이스는 자신의 일생의 나머지 동안 사건으로부터 자신의 머리에 상처가 있었다.

필드 재단, 남부 지역 위원회와 유권자 교육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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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루이스는 필드 재단의 부이사로 직업을 택하는 데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남부 지역 위원회의 공동체 기구 프로젝트를 지휘하는 데 애틀랜타로 돌아오기 전에 거기에 1년 조금 넘게 있었다. 남부 지역 위원회와 자신의 시간 동안 그는 피스크 대학교로부터 자신의 학위를 완료하였다.

1970년 루이스는 자신이 1977년까지 보유했던 직위인 유권자 교육 프로젝트의 이사가 되었다. 시초적으로 남부 지역 위원회이 프로젝트였어도 유권자 교육 프로젝트는 1971년 독립적인 조직이 되었다. 루이스의 재직 기간 동안 유권자 교육 프로젝트는 운영되었던 유권자 동원 순회를 포함하여 그 임무를 확장시켰다. 1973년-1975년 불경기에 의하여 일으켜진 어려움들에 불구하고 유권자 교육 프로젝트는 루이스의 리더십 아래 투표에 4백만명 가까운 소수 민족 유권자들을 추가하였다.

정부에서 초기 업무 (1977년-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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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 대통령과 함께 (1979년)

1977년 1월 현직 민주당 의원 조지아주 제5선거구의 앤드루 영지미 카터 대통령 아래 유엔 주재 미국 대사가 되는 데 사임을 했다. 그의 의석을 채우는 선거에서 루이스는 애틀랜타 시의원 위치 파울러를 상대로 출마하여 패하였다. 이 비성공적인 입찰 후, 루이스는 VISTA 프로그램, 퇴직 연장자 지원자 프로그램과 포스터 조부모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 책임이 있던 ACTION의 부이사로서 카터 행정부와 함께 직위를 받아들였다. 그는 2년 반 세월 동안 그 직업을 보유했으며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접근하면서 사임하였다.

1981년 루이스는 애틀랜타 시의회에 넓은 의석을 위하여 출마하였다. 그는 승리하여 1986년까지 시의회에 복무하였다.

미국 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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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부부와 인사하는 루이스 (1987년)

미국 하원 의원으로서 9년 후, 파울러는 미국 상원을 위하여 성공적 출마를 일는 데 의석을 포기하였다. 루이스는 제5선거구를 위하여 출마하기로 결정하였다. 8월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그는 주의 하원 줄리언 본드에게 좁게 패하였다. 결선에서 루이스는 본드에게 화를 내며 그를 꺾었다. 11월 총선에서 루이스는 공화당포리티아 스콧을 꺾었다.

루이스는 16번이나 재선되었다. 그는 1996년, 2004년, 2006년, 2008년 그리고 2014년과 2018년 반대없이 출마하였다. 그는 1992년과 2008년 두번이나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도전되었다. 1992년 그는 조지아주 하원 메이블 토머스를 꺾었다. 2008년 마켈 허친스도 경주에 나간 것은 물론 토머스는 다시 루이스를 도전하기로 결정하였다. 루이스는 허친스와 토머스 둘다를 꺾었다.

재직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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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의 공식 사진

루이스는 국가에서 가장 일관된 민주당 선거구들 중의 하나인 조지아주 제5선거구를 대표하였다. 1845년 그 공식화 이래 선거구는 그 역사의 대부분에 민주당원에 의하여 대표되어 왔다.

루이스는 디프사우스에서 선거구를 대표하는 데 가장 자유주의적 하원들 중의 하나이자 가장 자유주의적 의원들 중의 하나였다. 루이스는 자신을 강하고 단호한 자유주의자로서 자신을 특정지었다. 루이스는 확고한 자유주의자 플로리다주 상원이자 이후의 하원인 클로드 페퍼를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동료로 꼽았다.

루이스는 자신의 정치의 일부로서 민권 운동에서 자신의 역사적 연루를 끌어들였다. 그는 자신이 역사적 전국 산책로 프로그램의 일부를 만드는 데 일했던 통로로 셀마 몽고메리 행진에서 자신의 행렬한 통로를 회고하는 데 앨라배마주로 연례 순례를 이루하였다. 하지만 다음의 세월에 신앙·정치 학회는 각각 최소한 2만 5천 달러를 위하여 원외 활동가들에게 여행 중 좌석들을 판 것으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시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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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월 루이스는 자신의 애틀랜타 선거구에 머물면서 조지 W. 부시의 취임식에 보이콧을 했다. 그는 부시가 진실로 선출된 대통령이었다는 것을 자신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선서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2003년 3월 루이스는 이라크 전쟁의 시작 전에 반전 시위가 있던 동안 오리건주에서 30,000명의 관중에게 연설하였다. 2006년과 2009년 그는 수단 대사관 외부에서 다르푸르에서 일어난 인종 말살에 대항하는 시위를 벌인 것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이민 개혁을 위하여 주창하는 데 미국 국회의사당의 서부 근처에 농성을 벌인 동안 체포된 6개의 주에서 온 8명의 하원들 중의 하나였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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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버에서 열린 2008년 민주당 전국 대회에서 연설하는 루이스

2008년 대선의 예비 선거에서 루이스는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면서 시작하였다. 하지만 2008년 2월 14일 그는 자신이 클린턴으로부터 자신의 지지를 철회하는 것을 숙고하고 있었고 대신 버락 오바마를 위하여 최고 대표 투표할 것을 공고하였다 -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국민들은 그 위대한 도약을 우하여 준비되었고 준비가 되었다." 2월 27일 루이스는 형식적으로 자신의 지지를 바꾸고 오바마를 지지하였다.

오바마가 대통령을 위하여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후, 루이스는 "만약 누군가 내게 이것이 이제 생길 것을 말했다면 난 그들에게 그들이 미쳤고, 정신이 나갔고 자신들이 뭘 이야기하고 있었는지 몰랐던 것을 말하려 했다 ... 난 그냔 다른이들이 이날을 보는 데 있을 것을 소망한다 ... 매를 맞고 투옥된 사람들은 자시니들이 투표하는 데 등록하는 것을 전혀 응답할 수 없었던 의문들이 의문되었으니 굉장하다."고 말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대통령으로 선서된 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선거가 .. 킹 박사의 꿈의 이행인지 의문한다면 난 "아니요, 그것은 그냥 계약금이요"라고 말합니다. 거기에는 아직도 50년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아직도 소외되고 남겨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오바마의 선서식이 있던 후, 루이스는 이벤트의 기념 사진에 서명하는 데 오바마를 의문하였다. 오바마는 "존, 당신 때문이여요. 버락 오바마"라고 서명하였다.

2016년 총기 안전 입법 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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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2일 루이스와 매사추세츠주 하원 캐서린 클라크에 의하여 지도된 민주당 하원들은 올랜도 나이트클럽 총기 난사 사건의 여파로 하원 의장 폴 라이언에게 총기 안전 입법에 투표를 허용하라고 요구한 농성을 시작하였다. 당분간의 의장 대니얼 웹스터는 쉬는 시간으로 하원을 명령하였으나 민주당원들은 거의 26 시간 동안 회의실을 떠나는 데 거부하였다.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인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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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마 몽고메리 행진 50주년 기념식이 있던 동안 포옹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루이스 (2015년)

1988년 자신이 미국 의회로 선서된 지 1년 후에 루이스는 워싱턴 D. C.에서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인 박물관을 창조하는 법안을 제출하였다. 법안은 실패하였고 15년 동안 그는 각각의 새로운 의회와 함께 지속적으로 그 법안을 제출하였다. 각각의 시간에 그것은 상원에서, 대부분 가끔 보수적 남부 상원 제시 헬름스에 의하여 막아졌다. 2003년 헬름스는 퇴직하였다. 법안은 초당적 지지를 얻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위치를 설립하는 데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섭정위원회와 함께 박물관을 설립하는 법안에 서명하였다. 워싱턴 기념탑 옆에 위치한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문화 박물관은 2016년 9월 25일 그 개관식을 거행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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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에서 열린 2017년 여성 행진에서

루이스는 2016년 민주당 대통령 예비 선거들에서 버니 샌더스를 상대로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였다.

루이스는 자신이 도널드 트럼프는 진실로 선출된 대통령이 아니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트럼프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내가 의회에 지내온 동안 이래 내가 놓친 첫 취임식일 것입다. 당신은 틀리거나 옳지 않다고 느끼는 어떤 것을 가지고 집에 있을 수 없다."

사실 루이스는 또한 자신이 부시도 또한 당당하게 선출된 대통령이 아니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2001년 부시의 취임식에 참석하는 데 실패하였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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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이 효과적으로 민주당 후보 지명을 확보하기 하루 전인 2020년 4월 7일 루이스는 대통령을 위하여 바이든을 지지하였다. 루이스는 바이든을 그의 러닝메이트로서 유색 인종의 여성을 고르는 것을 추천하였다.

저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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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속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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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도소와 함께 저서한 루이스의 1998년 자서전 〈바람 속을 걷다 - 운동의 회고록〉은 로버트 F. 케네디 도서상, 애니스필드-울프 도서상, 크리스토퍼 상과 릴리언 스미스 도서상을 수상하였다. 수많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등장한 그 책은 뉴욕 타임스 "올해의 유명 도서"로 선발되었고, "올해의 논픽션 도서"로서 미국 도서관 협회에 의하여 임명되었으며 뉴스위크 잡지의 "우리 시대를 위한 50권의 책들"의 2009년 명단 중에 포함되었따. 그 책은 워싱턴 포스트가 "민권 운동의 결정적인 설명"으로 부르면서 비판적으로 주장되었다.

그의 일생은 또한 젊은이들을 위한 2002년 책 〈존 루이스:자유의 기수에서 의원으로〉의 주제이다. 2012년 루이스는 엇갈린 리뷰로 〈그 다리를 건너다〉를 발간하였다.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그 최고에 책은 사회 운동에서 비폭력의 권력으로 유언장을 제공한다 ... 그 최악에 그것은 확장된 캠페인 연설들을 닮았다"고 썼다.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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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에서 자신의 그래픽노블 자서전의 첫권 〈행진〉 1편 (2013년)의 복사들에 서명하는 루이스

2013년 루이스는 민권 운동에 관한 흑백 만화 삼부작 〈행진〉의 발표와 함께 그래픽노블을 쓰는 데 첫 의원이 되었다. 2권과 3권은 각각 2015년과 2016년에 발간되었다.

〈행진:1권〉은 그래픽노블들을 위하여 뉴욕 타임스의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명단들에 1년 이상을 보냈다.

〈행진:1권〉은 어린이들의 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저자를 영예하는 미국 도서관 협회의 2014년 코레타 스콧 킹 상으로부터 "저자 영예" 상을 받았다. 그 책은 또한 로버트 F. 케네디 도서상을 수상하는 데 첫 그래픽노블이 되어 2014년 "특별 인정" 흉상을 받았다.

〈행진:2권〉은 2015년에 발간되어 즉시 그래픽노블들을 위하여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16년 8월에 〈행진:3권〉의 발행은 연속적 6주 동안 그래픽노블들을 위하여 전체 3권을 뉴욕 타임스의 베스트셀러의 3개 자리들의 정상으로 가져왔다. 3편은 젊은 성인 문학에서 최고로 2017년 프린츠 상, 코레타 스콧 킹 상, 논픽션에서 최고를 위한 YALSA 상과 청년 문학에서 2016년 국립 도서상과 2017년 1월 미국 도서관 협회의 연례 한겨울 모임에서 시버트 메달을 수상하였다.

행진 삼부작은 2017년 보조 (7-12 등급) 분류에서 카터 G. 우드슨 도서상을 받았다.

루이스는 2013년, 2015년, 2016년과 2017년에 참석한 가장 두드러지게 샌디에이고 코믹-콘에서 자신의 그래픽노블을 흥행하는 데 코믹 회의들에 참석하였다. 2015년 회의가 열린 동안 자신의 그래픽노블 공편자들 앤드루 에이딘네이트 파월과 더불어 자신이 피의 일요일에 입었던 똑같은 옷을 입었던 동안 어린이들과 즉홍적으로 셀마 민권 행진곡을 팔에 안고 지도하여 참가하는 데 수천명의 사깃꾼들을 확보하였다. 이벤트는 2016년과 2017년에 되풀이 되었을 때 매우 인기있게 되었다.

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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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루이스와 앤드루 에이딘은 〈달리며〉의 타이틀을 가진 〈행진〉시리즈로 속편으로서 또다른 그래픽노블을 함께 저서하였다. 그 그래픽노블은 민권법의 통과 후에 루이스의 일생에서 이벤트들을 포착하였다. 저자들은 그 책을 위하여 상을 받은 코믹북의 삽화가 아푸아 리처드슨과 함께 팀을 이루었다. 〈행진〉을 삽화한 네이트 파월도 또한 예술에 공헌하였다.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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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오바마 대통령에 의하여 대통령 자유 훈장이 수여된 루이스

존 루이스는 미국에서 합법화된 인종적 분리를 끝내는 데 민권 운동에서 많은 주요 역할과 그 활동들을 수행하였다. 그러고나서 그는 미국 하원에서 17개의 기간들을 지내 하원에서 민주당의 당수가 되었다. 2011년 루이스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은 그의 용기와 정의로 흔들리지 않는 헌신으로 루이스를 "미국 의회의 양심"으로 불렀다. 루이스는 자신의 장례식이 열렸던 날에 뉴욕 타임스에 의하여 발행된 대국민 논평을 썼다. 그것에 그는 정의를 위하여 업무를 지속하고 증오를 종식시키는 데 젊은 세대들을 요청하였다.

세계의 지도자들, 정치인들과 유명 인사들 같은 사람들이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에 이 민권 우상에게 유료를 경의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루이스의 사망으로 응답에 정부 청사 건물에 조기 계양을 지시하였다. 스웨덴스테판 뢰벤 총리와 프랑스에마뉘엘 마크롱 등으로부터 온 진술들을 포함한 국제 사회의 애도는 루이스를 "민권, 평등과 자유를 위하여 투쟁한 거인"과 "민권 운동의 우상, 우리 모두에게 영웅이자 영감"으로 기억하였다. 아일랜드마이클 D. 히긴스 대통령은 "존 루이스는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 그의 유산은 포용을 추구하고 촉진한 의미와 함께 채워진 인생이었다. 세계는 그가 있기에는 더 좋은 곳이었고 그의 유산이 계속 살아 있기를 바란다"라고 썼다.

루이스를 영예하는 공개 행사는 인종적 분리 때문에 1957년 그에게 입학을 거부했던 그의 고향에 있는 트로이 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행사드은 그러고나서 앨라배마주 셀마에 있는 역사적 브라운 예배당 AME 교회에서 열렸다. 2020년 7월 26일 이 끄는 케이슨에 의하여 들어진 그의 관은 몽고메리에 있는 앨라배마 주립 의사당에서 누워 있기 전에 셀마 몽고메리 행진으로부터 피의 일요일이 일어났던 동안 자신이 걷던 다리를 건너 같은 길을 갔다.

루이스의 관은 7월 27일과 28일 비공개 예식 후 당일 공개 관람으로 진행되면서 미국 국회의사당의 원형 홀에서 누워지는 데 워싱턴 D. C.로 돌아와 그렇게 영예를 받는 데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입법자였다. 건강의 문제들은 자신들의 존경심을 표하는 데 관을 지나 제출하는 원형 홀에서 평소 사람들의 줄이라기 보다 진행 중이었던 코로나19 범유행이 공개 관람 시간 동안 동쪽 앞 계단에 관이 전시될 결정으로 이끈 것으로 관련되었다.

7월 29일 루이스의 관은 미국 국회의사당을 떠나 조지아 주립 의사당에서 하루간 누워졌던 애틀랜타로 도로 옮겨졌다. 애틀랜타의 에베니저 침례교회에서 그의 최종 장례식에서 저명한 연설자들 중에는 추도사를 했던 전직 대통령들 -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버락 오바마가 있었다. 자신의 나이 때문에 코로나19 범유행 동안 떠날 수 없었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장례식 동안 낭독될 성명을 보냈다. 루이스의 안치는 애틀랜타의 역사적 사우스뷰 묘지에서 장례식을 따라갔다.

영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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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대학교로부터 명예 학위를 받은 루이스 (2012년)

1997년 루이스는 예술가에 의하여 봉납된 애틀랜타에서 폰세 데 레온 애비뉴와 프리덤 공원에 놓인 손턴 다이얼에 의한 조각상 〈다리〉에 의하여 영예를 받았다. 1999년 루이스는 민권과 인권의 방어에 자신의 용기적 일생 헌신의 인식에 미시간 대학교로부터 발렌베리 메달이 수여되었다. 동년에 연설의 자유로 네 자유상을 받았다.

2001년 존 F. 케네디 도서관 재단은 루이스에게 그의 "민권에 특별한 용기, 리더십과 헌신"으로 용기 상에서 프로필을 수여하였다. 다음해 그는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로부터 스핑건 훈장이 수여되었다.

2004년 루이스는 아메리칸 아카데미 오브 어치브먼트의 황금 접시 상을 받았다.

2006년 그는 제퍼슨 상에 의하여 해바다 주어진 상인 선출 혹은 임명된 공무원에 의하여 거대한 공공 서비스로 미국 상원 존 하인즈 상을 받았다. 2007년 9월 루이스는 캔자스 대학교애소 로버트 J. 돌 정치 연구소로부터 돌 리더십 상이 수여되었다.

2010년 루이스는 린든 B. 존슨 재단에 의하여 퍼스트 LBJ 자유·정의 상이 수여되었고 다음해 오바마 대통령에 의하여 대통령 자유 훈장이 수여되었다.

2016년 루이스와 동료 셀마 행렬자 프레더릭 리즈는 셀마 행렬자들의 "보병"들에게 수여된 의회 금메달을 받아들였다. 동년에 루이스는 국립 헌법 센터에서 자유의 메달이 수여되었다. 2020년 루이스는 웨인 주립 대학교, 전미 자동차 근로자 연합과 로이터 가족에 의하여 월터 P. 로이터 인도주의자 상이 수여되었다.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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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1977년 재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95대 민주당      37.58% 32,732표 2위 낙선
1981년 선거 시의원 (조지아 제18선거구) 2대 무소속      68.18% 52,997표 1위  
1985년 선거 시의원 (조지아 제18선거구) 3대 무소속     83.17% 39,903표 1위  
1986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00대 민주당      75.31% 93,229표 1위  
1988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01대 민주당       78.20% 135,194표 1위  
1990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02대 민주당      75.59% 86,037표 1위  
1992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03대 민주당       72.13% 147,445표 1위  
1994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04대 민주당       69.13% 85,094표 1위  
1996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05대 민주당   100.00% 136,555표 1위  
1998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06대 민주당       78.51% 109,177표 1위  
2000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07대 민주당        77.18% 137,333표 1위  
2002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08대 민주당   100.00% 116,230표 1위  
2004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09대 민주당   100.00% 202,216표 1위  
2006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10대 민주당        99.95% 122,380표 1위  
2008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11대 민주당        99.95% 231,368표 1위  
2010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12대 민주당      73.72% 130,782표 1위  
2012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13대 민주당      84.39% 234,330표 1위  
2014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14대 민주당   100.00% 170,326표 1위  
2016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15대 민주당      84.44% 253,781표 1위  
2018년 선거 하원의원 (조지아 제5선거구) 116대 민주당   100.00% 275,406표 1위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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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 시의회 제18선거구
1982년 1월 1일 ~ 1985년 9월 3일
후임
모리스 핀리
전임
와이체 파울러
조지아주 제5선거구 연방 하원의원
1987년 1월 3일 ~ 2020년 7월 17일
후임
콴자 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