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범술(崔凡述, 1904년 5월 26일 사천 ~ 1979년 7월 10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불교 승려이며 제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초명은 영환(英煥), 당호는 금봉(錦峯), 법호는 효당(嚆堂)이다.

생애 편집

출생과 출가 편집

경상남도 곤양군 서부면 금진리 율포(現 경상남도 사천시 서포면 금진리 율포)에서 아버지 최종호(崔鐘浩)와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구평리 주막거리에 이사를 하고 1910년 7세에 양포사립개진학교에 다녔지만 동맹휴학을 모의하다 주모자로 지목되어 퇴학처분 받았다.

그 후 곤양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고 1915년에 졸업하고 다음 해 사천 다솔사로 출가했다. 1917년 4월 해인사지방학림에 입학하고, 환경선사에게 수계를 받았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최범술 편집

3·1운동이 일어나자 경기고보 유학 중이었던 재종질 최원형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합천, 의령, 진주, 사천 지역에 배포하고 해인사 인근에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22년 6월 일본에 유학하여 1922년 8월박열과 서로 만나게 되었으며, 1923년 4월 도쿄 릿쇼중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고, 1933년 동경의 다이쇼 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23년 박열·박흥곤·육홍균 등과 불령선인사(흑우회)를 조직하여 ≪불령선인지≫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박열의 일본천황암살계획을 돕고자 상해로 잠입하여 폭탄을 운반하여 왔으며, 대역사건에 연루되어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29일씩 피검당하기를 3년 동안 하였다. 1932년 김법린 등과 비밀결사인 만당을 조직하였고, 1933년 조선불교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해에 명성여자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1942년 7월 김범부·김범린 등과 해인사, 다솔사 등에서 한글을 가르치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교육자와 승려로서의 최범술 편집

또한, 일본유학 시절 인도승 달마바라로부터 전하여 받은 불사리 3과를 범어사에 기증하여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는데, 이는 달마바라가 붓다가야의 대탑을 수리하고 그 탑 중의 불사리 약간을 나누어 받아 세계 여러 나라에 전한 것 중의 일부이다.

1934년 사천에 광명학원을 설립하였고, 1936년 다솔사불교전수강원을 설립하였다. 이 무렵 김법린·김범부 등이 다솔사에 머무르며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7년 고려대장경을 인경하였고, 1943년 9월부터 13개월 동안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상남도경찰국에 구검되었다.

1946년 중앙 불교교무원 총무부장으로 재직 중 경상남도 불교교무원장 박원찬에게 고성 옥천사 사답 13만 5천평을 부산대 설립기금으로 희사해 줄 것을 지시해 부산대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이 대가로 경상남도 불교교무원은 경상남도로부터 부산에 6년제 해동중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적산(입정(立正)상업학교 교사)을 불하받았다.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대한불교단체대표에 피임되었고, 그 해에 해인사 주지가 되었으며, 국민대학을 창설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의 5·10선거 당시 사천·삼천포에서 출마하여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1년 해인중학교해인고등하교를 창설했다. 국민대학에서 신익희를 쫓아냈다 학생들의 큰 반발을 사자 국민대학 운영권을 학생에게 빼았겼고 1948년에 마포에 국민대학관을 재건하였다. 국민대학관을 1952년에 해인사로 옮겨 해인대학으로 고치고 이사장 및 학장에 취임하였다.

1960년 이후 다솔사의 조실(祖室)로 원효교학 및 다도 연구에 전념하였고,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79년 7월 10일 입적하자 다솔사에 부도를 봉안하였고, 1986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학문적 관심은 원효(元曉)·의천(義天)·초의(草衣)·만해(萬海) 등에 많았다.

평가와 비판 편집

긍정적 평가 편집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 원효대사의 사상을 연구하고, 사천에 차밭을 가꾸어서 ‘반야로’라는 정제증차를 만들기도 했고, 한국 다도의 입문서인 《한국의 차도》를 집필하여 그동안 다수 소실되었던 한국의 다도를 복원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부정적 평가 편집

그가 국민대학교 이사장을 지낼 당시 신익희 총장 해임을 주도하여 반발을 샀다. 독립운동도, 친일행각도 분명한 사람이지만 역사에선 친일파냐 독립운동가냐 호불호가 갈리고, 불교계에선 대처승이라는 이유로 비판 받고 있다.

논란 편집

친일의혹설 편집

그는 1937년 여름에 중일 전쟁이 발발한 뒤 그해 12월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북중국 지역에 출정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조직한 친일 불교 단체인 북지황군위문단의 단원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만당을 들기 이전 삼십본산연합사무소의 기초의원이었으며, 관동군에 위문행렬을 열고 일본 승려들과 다솔사에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었다.

약력 편집

저서 편집

  •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 ≪한국의 다도≫

가족 관계 편집

  • 처 : 용산 박씨(龍山 朴氏, 1924 ~ 1964)
    • 장녀 : 최연경(崔連卿, 1943 ~ )
    • 차녀 : 최채경(崔埰卿, 1949 ~ )
  • 후처 : 채정복(蔡貞福, 1946 ~ )
    • 아들 : 최화정(崔和丁, 1972 ~ ) - 동국대학교 교수
    • 삼녀 : 최화인(崔和人, 1974 ~ )

역대 선거 결과 편집

실시년도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1948년 총선 1대 국회의원 경남 사천군 무소속 16,685표
34.96%
1위   초선
1950년 총선 2대 국회의원 경남 사천군 대한국민당 3,430표
7.17%
6위 낙선

같이 보기 편집

참고자료 편집

  • 《대한민국 의정총람》, 국회의원총람발간위원회, 1994년
  • 최범술 - 대한민국헌정회
  • 임혜봉 (2005년 3월 1일). 〈최범술 : 불령선인회와 만당에서 활동 그리고 친일〉. 《친일 승려 108인》. 서울: 청년사. 309~330쪽쪽. ISBN 978-89-7278-3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