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킴(ᠴᠢᠩᠭᠢᠮ, 중문명:眞金 첸진, 키릴 문자 Чингим, 1243년 ~ 지원(至元) 22년 12월 10일(1286년 1월 5일))은 몽골 제국원나라의 황족이었다. 그는 쿠빌라이차브이의 차남이었다. 쿠빌라이 칸의 황태자였으나, 부왕보다 일찍 사망했다. 집사의 페르시아 어 표기로는 (چيم كيم )이다. 청나라 때는 첸지안(진친, 珍戩)으로 불렸다. 그는 충렬왕(忠烈王)의 처남이기도 하다.

유년기에 중국식 성리학교육을 받고 성장했고, 병약한 형 타르지의 요절후 태자로 책봉되었다. 아버지 쿠빌라이 칸을 대신하여 중서성을 맡아보면서 정무를 주관하였으나, 색목인 출신 아흐메드와 갈등하였다. 만년에 아버지 쿠빌라이 칸의 의심과 견제를 받던 중, 알콜중독으로 1286년 부왕보다 앞서 사망했다. 1293년 2월 명효태자(明孝太子)의 시호를 받고, 1294년 정비 코코진 소생 셋째 아들 원 성종(元成宗)] 즉위 후 추숭하였으며, 묘호는 유종(裕宗), 시호는 문혜명효황제(文惠明孝皇帝)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쿠빌라이 칸과 그의 정비 차브이 카툰(Čabui, 察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이름은 북부 중국의 저명항 불교 승려 하이윤(海雲)이 친킴(眞金)이라 지어주었다.

유년시절 아버지 쿠빌라이 칸은 중국인 출신 유학요추(姚樞), 두묵(竇默)을 초빙하여 그에게 성리학을 배우게 했고, 소년 시절에 그는 효경 내용을 암송할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 쿠빌라이 칸의 형이자 친킴의 큰아버지 몽케 칸의 통치기간 중, 몽케 칸쿠빌라이를 견제하면서도 중국 공략을 맡겼다. 그는 쿠빌라이 칸의 중국 정벌군 본부격인 내몽고의 도시 개평부에서 요추를 비롯한 쿠빌라이 칸의 중국인 브레인에 둘러싸여 자랐다.

1261년 그는 연왕(燕王)에 봉해졌다가, 아버지 쿠빌라이 칸이 관제를 중국식으로 개편하면서 영중서성사(領中書省事)를 겸직했다. 병약했던 친형 타르지1263년 요절하면서 쿠빌라이칸의 후계자로 지정되었다. 1264년에는 판추밀원사를 겸하여 군정 기관 추밀원도 장악하고, 중국 북부의 정치, 행정을 장악하였다. 1273년 2월 21일 황태자로 진봉되고 중서성을 통할하게 하였다. 형 타르지가 미혼에 상속인이 없이 사망하여, 당대의 몽골인들은 친킴을 쿠빌라이 카안의 장남으로 취급하였다. 그해 4월 2일 태위(太尉)직을 겸직했다.

태자 책봉과 조정 장악편집

그는 어려서부터 한인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있었다. 친킴은 중급, 하급 관료들 중 중서성에 모인 한인 출신 관료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중서성의 고관인 승상 안톤은 친킴의 어머니 차브이 카툰의 사촌 동생이며, 쌍방의 외가인 옹기라트 부족을 필두로하는 몽골 귀족층 역시 친킴을 지지하였다.

그는 코코진(Kökejin, 闊闊眞)과 결혼하여 원 성종 테무르(鐵穆耳)를 낳았다. 그녀는 곤기라트(Qonggirad, 弘吉剌) 부족 출신으로 쿠빌라이의 차남 친킴의 처로 받아들여져 1263년에서 1265년까지 3년간 아들 카말라(Kammala, 甘麻剌), 다르마발라(Tarma Balā, 答剌麻八剌), 테무르를 얻었다.

1267년에서 1279년 기간 중 쿠빌라이 칸남송 원정 전쟁에 출정했을 때 친킴은 부황을 대리하여 정무를 관장하였다.

1280년 원나라의 조정은 친킴을 지지하는 파벌과 아흐메드를 지지하는 파벌 간 권력 다툼이 발생하고, 1282년에 친킴 파의 한인 관료에 의해 아흐메드가 자택에서 암살되었다. 아흐메드의 사후 더 이상 황태자 친킴의 권한에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거의 사라졌다.

1281년에 모후 차브이가 사망하며 군주 후·비의 궁과 소속 영지 및 재산은 동일 부족 출신의 후·비가 상속하는 몽골의 전통을 따라 생전의 차브이가 모은 막대한 재산을 코코진이 상속하였다. 차가타이 칸국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사로잡혔다가 풀려났는데, 이 일로 부황 쿠빌라이 칸의 미움을 받고 한때 북방 몽골고원으로 추방되었다. 친킴은 이를 불쾌히여겼다. 1285년 어사대에서 쿠빌라이 카안에게 친킴에게 양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쿠빌라이 카안의 분노를 샀다. 그러나 어사대 관료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친킴에게도 아무런 불이익이 가해지지 않았다. 그해 아흐메드의 측근인 타지코(塔即古)가 어사대쿠빌라이 카안에게 친킴 태자에게 양위하라는 주장(奏章)을 올렸다. 그러나 친킴이 당시 중국 한인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은 것을 알게 된 쿠빌라이 칸은 황태자 친킴을 불쾌히 여기면서도 두려워했다. 친킴은 전전긍긍했고, 지병이 악화되었다.

술을 좋아했던 그는 1286년 1월 5일알콜중독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친김 태자가 쿠빌라이보다 먼저 죽고, 원나라에 의해 최고의 권력과 재산이 있는 세력이 있는 황태자부의 관리 권한은 코코진에게 넘어갔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쿠빌라이 칸에게 회한과 타격을 주었다 한다.

사후편집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쿠빌라이 칸에게 회한을 남겼다. 쿠빌라이 칸은 바로 다르마발라를 황태손에 책봉했지만, 다르마발라 역시 병으로 요절하고 테무르황태손으로 세웠다. 1293년 2월 25일 쿠빌라이 칸은 그에게 직접 명효태자(明孝太子)라는 시호를 추서했다.

1294년 5월 10일 원 성종 테무르는 즉위 직후 반포한 조서에서 아버지 친킴을 황제로 추존했다. 6월 3일에는 원 성종은 그에게 유종(裕宗)의 묘호와 중국식 시호로는 문혜명효황제(文惠明孝皇帝)라는 시호를 추서했다. 추존된 칸호에 대해서는 미상이다.

청나라 때 그의 이름은 진친(珍戩)으로 불리다가 청나라 멸망 후 원래 이름대로 되돌려졌다.

가족 관계편집

조부모와 부모편집

  • 조부 : 추존황제 예종(睿宗) 툴루이(拖雷)
  • 조모 : 헌의장성황후(顯懿莊聖皇后) 케레이트씨(怯烈氏)
  • 부친 : 원나라 초대 황제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
  • 모친 : 소예순성황후(昭睿順聖皇后) 옹기라트씨(弘吉剌氏)

후비편집

  • 휘인유성황후(徽仁裕聖皇后) 옹기라트씨(弘吉剌氏): 추존황후(追尊皇后)
  • 안진미실 비자(安眞迷失 妃子)

황자편집

(모두 휘인유성황후 소생.)

  1. 진헌무왕(晉獻武王) 카말라(甘麻剌) - 태정제 즉위 후에 현종(顯宗)으로 추존.
  2. 추존태자 다르마발라(答剌麻八剌) - 무종 즉위 후에 순종(順宗)으로 추존.
  3. 황태손 테무르(鐵穆耳) - 원나라의 2대 황제 성종(成宗)

황녀편집

  1. 조국공주(趙國公主) 홀답질미실(忽答迭迷失)
  2.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남아불랄(南阿不剌)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