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르칵타니 베키

소르칵타니 베키 카툰(몽골어: ᠰᠣᠷᠬᠠᠭᠲᠠᠨ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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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qoqtani Beki Khatun, 페르시아어: سرقویتی بیگی‎ Sūrqaqtanī Bīkī, , 한국 한자唆魯合貼尼妃 可敦 사로합첩니 비 가돈, 1190년 ~ 1252년 2월 12일 또는 3월 11일)는 몽골 제국의 황족이자 추존황후로 칭기스 칸의 4남 툴루이의 아내이며, 뭉케, 쿠빌라이, 훌레구, 아릭 부케의 어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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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르칵타니 베키 카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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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이와 소르칵타니.
툴루이와 소르칵타니.
지위
몽골 카툰
이름
소르칵타니 (몽골어: ᠰᠣᠷᠬᠠᠭᠲᠠᠨᠢ
시호 현의장성황후 (顯懿莊聖皇后)
신상정보
출생일 1190년
사망일 1252년 2월 12일 또는 3월 11일
왕조 몽골 제국
가문 케레이트
배우자 툴루이 칸
자녀 뭉케, 쿠빌라이, 훌레구, 아리크부카
기타 친인척 삼촌 옹 칸
종교 네스토리우스파

툴루이의 급사 후, 귀위크와 재혼시키려는 오고타이 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귀위크주치가문의 바투의 갈등을 이용, 킵차크 한국바투와 교류하며 오고타이 가문의 동태, 몽골 본국 내부의 정보를 바투에게 제공했으며 바투 등과의 동맹을 체결, 몽케의 즉위를 지원하였다. 1266년 10월 태묘가 건립되면서 장성황후에 추존되고, 1310년 현의의 시호가 추가되어 현의장성황후가 되었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그녀는 케레이트족으로 케레이트 부족의 지도자였으며, 칭기즈칸의 의부였던 옹 칸의 질녀로 그의 동생 자하 캄보의 셋째 딸이다. 소르칵타니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였으며 현명하였다. 네스토리우스교파 기독교인이면서도 무슬림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옹 칸이 칭기스 칸과 대립하다가 패하고 같은 기독교도였던 나이만인에게 살해당했다. 그녀는 툴루이에게 시집갔다. 언니 이바카 베키는 칭기즈 칸의 후궁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 자하 캄보는 처음에는 칭기즈 칸에게 항복했으나 칭기즈 칸의 먼 친척인 주르체데이의 반란에 호응했다가 체포되고,세력은 와해되었다.

소르칵타니는 상당히 똑똑한 여성이라는 평을 받았다. 라시드 알딘은 소르칵타니를 칭기즈 칸의 어머니 호엘룬에 비교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 둘 다 자녀를 키웠고,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자녀들은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사서 집사에 의하면 툴루이 칸의 카툰들 중에서 최상위하고 가장 사랑받은자는 그녀였다(بزرگترين و محبوب ترين خواتين تولوی خان او بود) 한다. 집사에는 소르칵타니 베키는 호엘룬보다는 좀 더 융통성있고 탄력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라시드 알딘은 그녀를 총명하고 능력이 있으며, 강인한 인물로 세계의 여성들 사이에 우뚝 선 인물이라는 인물평을 남겼다.

칭시스 칸의 사후 쿠릴타이에서 몽골 족장들은 톨루이를 새로운 대칸으로 선출하였지만, 톨루이는 그것을 거절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그의 형 우구데이에게 양위하였다. 몽골 족장들은 막내 아들이 아버지를 계승한다는 전통에 따라 이와 같이 결정하였으나, 톨루이가 당시 가장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톨루이보다 소르칵타니로부터 얻은 그의 네 아들로 이루어진 톨루이 가문 사람들은 몽골 제국의 운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아들은 뭉케와 쿠빌라이, 훌레구, 아릭 부케였다. 뭉케는 제4대 이 되었고, 쿠빌라이는 제5대 카안 되었다.

남편 사후편집

그녀의 남편 툴루이는 동몽골과 북중국을 울루스로 하였는데 41세에 과음으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소르칵타니는 집정이되었고 우구데이는 그의 아들 구육을 그녀와 결혼시키려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하고 이 결정은 몽골제국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것중의 하나로 판명되었다. 뒤에 구유크와 갈등하던 킵차크 한국바투느는 소르칵타니에게 몽케에게 울루스 대신 대칸 위에 올릴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1246년 구유크가 칸위에 오른 뒤, 소르칵타니와 그녀의 아들들을 칭찬하였다. 이는 1242년 이후 자기 의지를 억제하고, 몽골의 관습 야사를 철저하게 지켰다는 것이 이유였다. 주치가문의 바투와 소르각타니 베키는 구유크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서로 긴밀하게 연락하였다. 1248년 봄, 구유크는 이틸 해안의 기후가 건강에 좋다는 구실로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서부로 갈 계획을 세웠다. 소르칵타니는 구유크가 그의 오랜 적 바투와 전쟁을 결심했다고 의심, 비밀리에 바투에게 알려주었다.

일설에는 소르칵타니 베키에게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공격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은 바투1248년 4월 귀위크 칸비수바리쿠 근처에서 암살했다는 설이 있다.

생애 후반편집

소르칵타니는 바투와도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오고타이 일족의 동태와 몽골 본국의 정황을 바투에게 수시로 알리기도 했다. 귀위크 칸바투에게 소환령을 내렸지만, 소르칵타니는 구유크가 그를 치려 한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바투는 본국의 상황을 알고 대군을 이끌고 왔다. 귀위크는 바투를 치러 군사를 일으키던 중 사마르칸트에서 사망했다. 1251년의 쿠릴타이에서 바투 등의 지원을 얻은 그의 아들 몽케가 대칸이 되었다.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인 소르칵타니는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 에게 보호와 호의를 제공했다. 그녀는 부하라 에있는 카니야 마드라사(이슬람 신학교) 건설에 은색 발리쉬 천 은화를 기부하였고, 유명한 셰키 세이프 알 딘 바하르지(Sheikh Seif al-Din Baharzi)에게 그의 수탁자로 지정했다. 그녀는 또한 여러 마을에 마드라사를 짓는 데에도 기부하였다.

몽케 칸 즉위 후, 몽케칸의 즉위를 반대하던 오굴 카미시 카툰의 처형을 지시하였다. 소르칵타니는 뭉케 칸의 즉위 몇달 후인 1252년 2월 12일 혹은 3월 11일 몽골의 신년 축제 중에 병으로 죽었다.

사후편집

그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였으므로 시신은 감숙성 장예시(張掖市)의 교회에 안치되었다.[1] 페르시아계 사서 집사에 의하면 소르칵타니는 칭기즈 칸의 네명의 아들처럼 국가의 네 기둥이 된, 존귀한 네 아들의 어머니라고 평하였다. 존호는 장헌성태후(莊獻聖太后), 시호장성황후였다가 1310년 1월 7일 원 무종 카이산 칸이 현의의 시호를 가상하여 현의장성황후(顯懿莊聖皇后)가 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 남편 : 툴루이(拖雷)
    • 장남 : 몽케(蒙哥)
    • 3남 : 홀도도 대왕(忽睹都 大王), 요절 : 일설에는 생모미상 또는 다른 여성 링군 카툰 혹은 링구움 카툰 소생이라는 설도 있다.
    • 4남 : 쿠빌라이(忽必烈)
    • 6남 : 훌라구(旭烈兀)
    • 7남 : 아리크 부케(阿里不哥)
      • 장녀 : 노국대장공주 야속불화(魯國大長公主 也速不花) - 홍길랄 알진(弘吉剌 斡陳, 보르테 우진 카툰의 친정 조카)에게 하가(下嫁)
      • 차녀 : 독목간 공주(獨木干 公主) - 홍길랄 섭고태(弘吉剌 聶古台, 알라카이 베키와 그의 두번째 남편 오구트 부 진구의 아들)에게 하가(下嫁), 섭고태 사후 그의 동생 홍길랄 찰홀(弘吉剌 察忽)과 재혼

관련 항목편집

주석편집

  1. Peter Jackson, Mongols and the West (Longman, 2005). p.101
전임
보르테 카툰
몽골 제국 황후(임시)
1227년~ 1229년
후임
보락친 카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