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기자조선

활성화된 토론

기자조선 역대 왕 관련편집

1929년 김광이 저술한 《대동사강》과 비교해 보니 차이가 있어서 《대동사강》의 내용으로 바꿔놓습니다. 변경 이전의 내용이 옳은지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2006년 10월 3일 (수) 19:56 (KST)

주장의 근거편집

본문에 덧붙여진 내용 중에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있어 이 곳에 옮겼습니다.

우리나라에 왕이라는 칭호를 쓰게된 때는 적어도 기원후이다. 그러나 기자조선의 역년표를 보면 기원전 1000년부터 왕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는것으로보아 후대의 위작이라고 볼수있으며 왕의 이름들도 600년 이후에나 볼수있는 한자식 이름이 많이 있으며 얼핏보기에 조선왕들의 이름처럼 보인다.

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따르자면 기자는 은의 제후입니다. 은나라에서 왕의 칭호를 썼으니 기자조선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초기에 왕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후대에 고쳐불렀을 수 있습니다. 용비어천가의 경우도, 왕이 아니었어도 선대에는 모두 '종, 조'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24일 (일) 12:05 (KST)

왕의 명칭도 중세조선왕이나 고려의 명칭으로 보여지며 이는 후대의 위작입니다. 문성, 경순, 창덕 등등 모두 조선이나 고려시대의 한자식 이름입니다.
죽서기년에 의하면 기자는 조선에 오지 않았습니다. —이 의견을 2006년 12월 25일 (월)에 쓴 사용자는 66.72.160.235(토론 | 기여)이나, 서명을 하지 않아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문장의 끝에 글쓴이를 나타내는 '~'x4를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체 왕의 명칭이 조선이나 고려의 명칭으로 보여진다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 고려시대 부터는 '왕' 대신 '종.조'가 쓰였습니다. 왕의 명칭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고, 최소한 전국시대 중기의 나라들은 유사한 왕의 명칭(양애왕, 혜문왕, 경민왕, 경양왕, 고열왕 등)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죽서기년에 '기자는 조선에 가지 않았다'라 설명한 내용이 정말 있다면 부정론 쪽에 제시하면 됩니다. jtm71 2006년 12월 25일 (화) 20:58 (KST)

기자조선의 역대왕이 나오게 된 경위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사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족보에서 출발한 것으로 태우선우씨세보에서도 가덕왕 이전의 왕들은 실제왕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족보는 고려시대에 들어와 만들어진 것이며 태우선우씨세보도 그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왕의 명칭이 삼국시대 이전에도 있었다는 근거를 말하시기 바랍니다. 중국 사서에 나타난 칭왕이라는 것은 통치자를 왕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라를 독립된 국가로 자기 자신들이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즉, 싸움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뜻입니다. 전국시대가 어느시기인지 모르겠네요. 우리나라는 전국시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양애왕은 어느나라 왕인지 모르겠군요.

왕의 명칭은 기자가 칭왕할 때에 고쳐질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제시한 내용입니다. 후대의 통치자가 왕이 되면 그 선대도 왕으로 부르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제후의 명칭을 후대에 왕으로 고쳤다고 해서 기자나 역대 통치자들이 없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기자조선은 은에 기원했고, 국경 지역에 위치했으니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29일 (토) 23:22 (KST)

선대로 해서 1대나 2대정도 왕이로 부르기는 합니다. 그러나 태원선우씨세보에 나오는것처럼 선대로 해서 40대를 왕으로 부르지는 않죠. 조선때에 사대사상으로 인하여 기자조선의 존재를 꾸미기 위해 40대나되는 조상들을 왕이라고 추존한것이지요. 그리고 추존된 왕들은 통치자가 아닙니다. 그냥 기후의 조상들을 말하는겁니다. 태원서우씨세보에도 추존왕이라고 말하고 있는것을 대동사강에서 그 추존된 왕들을 기본으로 기씨조선기를 만든것입니다. 추존왕을 만들어낸 위작에다 역사적 사실인 살을 붙인것이라 할수있죠. 그 사실도 무엇을 근거로 만들었는지는 알수없지만요. --68.254.148.179 2006년 12월 31일 (일) 00:12 (KST)

그렇다면, 전국시대의 기자의 신하들이 따라야 할 '전례'라는 것이 있기나 했던 건가요 ... 이는 개인적인 억측입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일) 13:30 (KST)

주장의 근거2편집

한편 가한(可汗)이란 명칭은 기자가 중국의 혈통이 아니라 북방 민족의 혈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대체 이 주장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 가한이라는 것은 고구려의 풍습을 설명하는 글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석탈해 이사금을 탈해왕으로 칭하는 것은 거짓입니까 ... jtm71 2006년 12월 25일 (화) 20:55 (KST)

말그대로 가한이란 북방민족의 왕 호칭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이사금과 탈해왕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가한이란 전통적인 북방민족의 통치자에 대한 명칭입니다. 고조선에서는 진한(辰韓)이라 불렀고, 고구려는 개 또는 해(諧)라고 불렀습니다. 백제는 어라하 또는 건길지라고 했습니다. 신라는 이사금, 거서간, 마립간 이라 했죠. 공통적인 말이 뭐냐면 한, 해, 하 모두 비슷한 발음입니다. 금 간 개 모두 비슷한 발음입니다. 참고로 거란족이 가한이라했습니다. 도수희 교수님 책을 읽어보시면 될겁니다.

후에 그 땅을 차지한 이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적은 것 아닌가요 ... 우두머리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당시에도 그렇게 불리웠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jtm71 2006년 12월 29일 (토) 23:23 (KST)

그렇지 않습니다. 좀더 통치자들의 명칭과 옛 우리말의 이두식 표현에 대해서 알아보시면 좋겠군요.--68.254.148.179 2006년 12월 31일 (일) 00:02 (KST)
삼국사기의 원문을 봤더니 "기자가한"에게 제사를 지낸것이 아니라 일신 기자신 가한신들에게 제사를 지낸것이군요. 가한에 대한 북방민족기원사항을 삭제했습니다. --Breathejustice 2006년 12월 31일 (일) 06:24 (KST)

여기서 따질 일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라는 의미를 설명해 보시지요. 대체 뭐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까 ...jtm71 2006년 12월 31일 (일) 13:27 (KST)

문제의 해결편집

어쨌거나, 양측의 의견이 맞서고 있다면 동등하게 제시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인 듯합니다. 하지만, 근거가 있더라도 학설이 아닌 개인의 추측에 근거한 내용을 그대로 적는 것은 자제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인용하신 책('고기 ...')도 전공이 아닌 분이 쓴 책이라 해당 내용의 출처를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추가된 내용은 해당 내용에 맞추었고, 기존 항목에 해당되지 않는 내용은 별도로 분류했습니다. 내용의 공정성은 스스로 평가하여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2006년 12월 30일 (토) 00:50 (KST)

현재 기준으로 고대를 생각하면 오류편집

현재 왕이란 개념은 주나라 이후에나 가능한 개념, 상나라 시대는 그것 보다 훨씬 느슨한, 큰 마을 공동체 수준, 씨족 마을 단위에서 왕이 머무는 곳은 큰 마을은 대읍, 다른 마을은 족읍 그냥 씨족 촌장 수준입니다. 씨족 혈연 문중 제사를 모시는 종가 중심으로 꾸려졌고, 종손=왕 규모는 다르지만 비슷하게 혼용 됐다 생각하고,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왕 개념은 기자 조선 초기에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 해석 과정에서 왕으로 해석했을 뿐일겁니다. 제사 문화는 제사와 관련된 시示가 포함된 정황을 고려하면 중국 주나라 문화가 아닌 조선 상나라 문화로, 자기 조상 '신'으로 모시는 혈연 문화입니다. 시示 문자 형태가 말뚝에 동물 사체를 걸어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형상으로, 농경민족인 주나라에서 발생 가능성 낮은 상나라 갑골문자 흔적입니다.

남방계열 고인돌, 북방계열 석관묘가 공존하는 것은 기자 조선 시기에, 북방 스키타이, 흉노 , 선비족 지역 진출 교류 있었기 때문에 혼재하는 것.

상나라와 주나라 왕 개념이 다른 이유는, 상나라는 혈족 중심 씨족 형태로 혈통 구분 가능한 제후국을 형성했다면, 인구 15만쯤 됐던 주나라는 거대한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서 분할했고, 희성 친족들을 50개 지역에 왕으로 분봉했고, 20개 지역은 토착 호족과 공신들을 분봉했습니다. 국가 구조가 봉건왕조는 같지만 혈연적으론 전혀 다르죠? 일반 백성과 왕과의 관계도 전혀 다른 것은, 상납 형태는 비슷하지만, 정전제 농민, 농사짓는 세금 노예가 주나라 본질, 다른 씨족에 바치는 것인데 비해서, 상나라는 족읍, 같은 문중 형제들이 조상 제사를 모시는 종가 종손에게 바치는 형태로, 상납 구조 기분이 같은 혈통에 자율적으로 바치는 것과 다른 혈통에 타의에 의해 바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단군조선-상나라 흔적은 조상 신을 모시고, 점을 치고, 옥기 유물, 랴오닝성, 많은 공통점 갖고 있고, 상나라 유민중엔 왕족 미자 계 송나라 분봉있었고, 그 후손들은 중국 조상이라 말할 수도 있는 한중 공통 분모입니다. 단군조선=상나라, 갑골문자=한자, 랴오닝성 지역에서 발생한 민족이 중국에 문자를 전파했고, 주족=한족이 더 잘 활용했을 뿐인, 같은 풍습과 문화 유물을 갖고 있는 우리 조상의 문자 입니다. 현재 중국 사회 지도층 주류는 주족 성씨 후손들, 스키타이 남하로 발생한 만주족 국가 성씨는 중국 주류는 아니죠? 중국은 큰 국가라 여러 혈통 종족 자치로 구분 할 수 있지만, 한국은 작은 국가라, 4~5가지 혈통 종족 달라도, 근접 교류 오랜 시간 흐르면서, 제3 종족인 민족으로 구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민족 구분 가능한 시점을 한민족, 매우 짧은 역사를 기준으로 생각하니까, 많은 오류가 발생하는 겁니다. 내 친척들은 경상도 전라도 모두 존재하는데, 경상도 전라도 지역 감정 싸우는 것을 보는 느낌과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합니다.

BC 2,333년, 단기 4,352년 단군조선 시작이나 이전 환국 초기는 몰라도 후기는, 단군조선 계통 상나라 갑골 문자를 썼다는 점에서, 그 존재가 지역 환경과 지명, 성씨, 국명에 문자 흔적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기자조선편집

사용자토론:Allen R Francis에서 옮김

기자조선을 기록한 책을 보여주시지요. --Breathejustice 2006년 12월 29일 (금) 14:26 (KST)

그쪽은 기자조선이란 것을 어떻게 알고 있지요? 어디서 들었나요? 어디서 보았나요? -- Allen 2006년 12월 29일 (금) 14:28 (KST)
중간에 끼어들게 되어 두 분 모두에게 죄송합니다만, 위키백과는 "기록"하는 곳이지 사실 여부를 따지는 곳이 아닙니다. 기자조선의 부존에 대해 증빙하고 싶으시면 위키백과가 아닌 한국 사학계에 연락해 주세요. - χε 아이리디 (토론) 2006년 12월 29일 (금) 14:29 (KST)
제 말이 그 말입니다. : ) -- Allen 2006년 12월 29일 (금) 14:30 (KST)
고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나뉜다는 것이 정사라고 기록한 책을 보여달라는 것이지 기자조선의 실존 여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조선은 전조선 후조선 위만 조선으로 나누는 것이 중립적인 사학입니다.
Dubious tangram? 참고문헌 제시를 하지 않은 것은 그 쪽입니다. -- Allen 2006년 12월 29일 (금) 14:34 (KST)
고조선을 전조선 후조선 위만 조선으로 나누는 것이 Original Research인 이유는 1) 그렇게 사용하는 공신력 있는 단체나 저술이 거의 없습니다. 2) 무엇보다 현재 한국 사학계는 이러한 분류방법을 적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3) 무엇보다 그렇게 변경하신 근거를 권위있는 학자나 또는 저술에 근거하지 않고 Breathejustice님의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 χε 아이리디 (토론) 2006년 12월 29일 (금) 14:36 (KST)

좀 생뚱맞지만, 이 토론 끝나면 지우지 마시고 토론:기자조선으로 옮겨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면 지금 토론:기자조선에서 논의를 하셔도 좋고요. --Puzzlet Chung 2006년 12월 29일 (금) 14:38 (KST)

몇몇의 대학교 사학과에서 주장하는, 그리고 그들이 식민사학자라고 질책를 당하는 이론이 위키의 문서를 대표해야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위키는 백과사전입니다. 모든 주장에 대하여 모두 설명해야 합니다.--68.254.148.179 2006년 12월 31일 (일) 00:09 (KST)

교수 중에 그분들을 식민사학자라고 하는 이가 있던가요 ... 말투에서 편견이 느껴집니다. 기자동래설이 앞에 놓인 것은 그것이 가장 주목받았던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래설 내에서도 찬.반 이론이 모두 서술되어 공정성에 있어서의 문제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 문서를 대표'한다는 것은 무엇을 지칭하는지요 ... jtm71 2006년 12월 31일 (일) 13:53 (KST)

님의 편집은 우선 BC12세기 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나서 그 이외의 설을 설명하고 있으니 NPOV위반입니다. 모든 설을 동등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신채호의 의견은 소수의견일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의견은 충분히 공정하게 설명되었습니다. 오히려, 첫번째, 두번째 ... 로 순서를 매기는 것이 더욱 공정하지 않은 것 아닐까요 ...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1:16 (KST)

--Tol6560 (토론) 2019년 3월 29일 (금) 18:01 (KST) 역사 학자들이 어떻게 분류하고 규정하는지 상관없이, 2000년도 넘은 사마천 사기 문자 기록은 기자가 유민을 이끌고 조선 평양(랴오닝성)에서 나라를 세웠다.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서는 BC1122년 무렵에 지역 주민 이동 유물로 발굴 됐다는 것, 2가지는 '사실' 아닙니까? 이 무렵에 씨족 혈통을 증명하는 유전자 이동 역시 발생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주 무왕 희발이 조선후로 봉했다고 해석하던, 기자가 스스로 세웠던, 아무것도 세우지 않고 그냥 기존 주민과 함께 살았던, 그런 해석은 최종적으로 내용을 읽는 독자가 하는 것이지, 역사 학자들이 결정하는 것은 자기 주관 주입식 교육, 역사가 아닌, 현재 내가 본 '사실'을 기자들이 기사 쓸 때 '사실'쓰는 것이 아닌, 타의에 의해 자기 주관 쓴 결과가 '세월호' 보도, 이런 것은 내가 직접 볼 수 있었던 '사실'들은, 기자=역사학자, 해석 오류를 바로 지적 할 수 있지만, 역사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전문가 영역인 역사 학자는 '사실' 전달에만 충실, 그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은 최종 독자들이 판단 할 수 있도록, 참고할 수 있는 '사실' 모두 볼 수 있어야 위키피디아 쓰는 장점이라 생각합니다.

기자조선2편집

사용자토론:Airridi에서 옮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 조선으로 보는 근거가 무엇인지 말해보시지요. 위키는 한국사학회의 대변인이 아닙니다. 모른 사학계의 의견을 대표해야지 백과사전이지요.--Breathejustice 2006년 12월 29일 (금) 14:36 (KST)

다른 사학계의 의견을 대표하시고 싶으시다면, 그 사학계가 어느 사학계이며 그 사학계의 어떤 저술에서 그러한 내용이 있는지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 χε 아이리디 (토론) 2006년 12월 29일 (금) 14:37 (KST)
제가 먼저 요구 했으니 먼저 말해보시지요.
우습군요. 아이리디님이나 나나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저와 그는 단지 중립적 시각 위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위키백과는 한국사학회의 대변인이 아니라고 했습니까? 그럼 그 쪽의 생각은 어느 나라 사학계의 정설입니까? -- Allen 2006년 12월 29일 (금) 14:41 (KST)
기자조선에 대해서 모르면 편집에 참여하지 마시지요. 알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중립적인 시각이 무엇인지 알수있나요? 자기모순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알지도 모르니깐 제가 편집한것을 다시 돌려놓으시는군요. 저의 편집은 지우거나 더하거나 하지 않고 예전의 편집한 문서를 목록별로 분류하여 정리한 것이어서 더 읽기 편하고 쉬운데도 다시 예전의 어려운 편집으로 돌려놓으시는군요.
기자조선에 대해서 모르시면 편집에 참여하시 마세요 제발!--68.254.148.179 2006년 12월 31일 (일) 00:37 (KST)

기자조선은 몰라도 위키백과는 압니다. 결국 질문에는 답을 안하는군요. -- Allen 2006년 12월 31일 (일) 00:39 (KST)

무엇을 답하라는것인지 모르겠군요. 본문을 우선 읽어보세요 거기 참고문헌이 다 나와 있으니 누가주장하는것인지 쉽게 알수있습니다. 기자조선에 대해서 모르니 본문에 누구 주장이라고 써있는데도 이렇게 황당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제발 다시 말하는데 기자조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 편집에 참여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68.254.148.179 2006년 12월 31일 (일) 00:43 (KST)
Allen님께서 분명히 님이 추가한 POV를 rv하셨는데도 님은 또 그 행동을 임의로 해석하면서 자신의 편집으로 rv를 하시는군요.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_- 그런 중립적이지 않은 걸 추가하는 건 위키백과의 질을 오히려 떨어뜨릴 뿐입니다. 제발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 -- Alpha for knowledge (토론 / 기여) 2006년 12월 31일 (일) 03:31 (KST)[수정: 2006년 12월 31일 (일) 03:34 (KST)]
자세히 읽어보고 말씀하십시오. 저는 기자조선에 대한 3가지 관점인 부정론, 긍정론, 제후국론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다시 정리하였을뿐입니다. 그런데 Allen께서 저의 편집을 다시 예전의 편집으로 돌려놓은거죠. 예전의 편집은 알기 어렵게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힘듭니다. 제발 편집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제대로 보고 말씀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무작정 편집이 바뀌었다고 예전편집으로 다시 돌리는 것이야말로 위키 문서의 질을 떨어뜨립니다. 편집의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하는 님의 행동도 위키의 문서의 질을 떨어뜨립니다. ----Breathejustice 2006년 12월 31일 (일) 03:40 (KST)

개인 임의대로 문서를 뒤바뀌고 있는데, 논란이 있는 내용이라면, 사학계의 공론을 먼저 제시하고 각 주장을 순차적으로 정리한 후, 개인적인 의견 없이 기타 참고자료를 덧붙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서적으로 출간되었다고 무조건 사실인 것처럼 인용되기도 하는데, 해당 자료의 공신력 문제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일) 13:35 (KST)

공론이라는것이 참 정의하기 힘듭니다. 이기백으로 대표되는 사학의 이론을 공론이라고 말씀하시는것 같은데.. 이기백의 학설이 왜 공론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이기백의 이론이 사실인것처럼 먼저 서술하고 다른 이견에 대해 서술하는 것은 NPOV위반입니다 왜냐하면 기자조선은 아직까지 그 정설이 확립되지 않았기때문입니다. BC12세기 건국설은 공론이 아닙니다. BC4세기 설도 있고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설도 있으니 모두 대등하게 서술해야합니다.

그렇다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기자조선' 문항을 참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은 충분히 대등하게 설명되었습니다. 시기가 문제라면 표현을 고치도록 하죠.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1:04 (KST)

지금 편집이 NPOV위반인 이유가 무엇인지요. 왜 고칠려고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주세요. 님이 편집한 모든 내용을 다 첨가하였습니다. 단 규원사화가 BC12세기에 단군조선이 망하므로 기자조선의 건국을 뒷받침해준다는 추측에 의한 구절은 삭제했습니다.

그 내용은 추측에 의한 내용이 아닙니다. 이상시의 주장이죠. 어쨌든, 문서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지 않고 되돌리게 되었습니다만, 필요 없는 충돌은 원치 않으니, 맞지 않는 부분만 수정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번 부터는 문서를 수정할 때 수정 내용을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문서의 틀을 바꾸면서 IP 로그인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1:26 (KST)

이상시의 주장이군요.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본문 내용 중에서 ...편집

'전형적인 춘추필법'은 무엇이며, 그 근거는 또한 무엇입니까 ... 출전은 어디입니까 ... 응답이 없으면 해당 항목을 삭제하겠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1:30 (KST)

내용을 약간 수정해야겠군요. 찾아보니 춘추필법이라고 한 것은 없군요. 문장 자체가 모순입니다.

기존 사서의 기록 ...편집

보기 편하게 고친다면서 더 불편해진 것 같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기자조선의 출발점이 되는 사서의 기록은 별도로 취급하는 것이 옳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1:43 (KST)

언급한 중국사서에 1천년간 지속됐다는 기록이 있나요? 제가 알기로는 없는데... 답변 없으시면 삭제하겠습니다.

이상시의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에 의하면, '위략'에 기자조선을 언급하면서,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가 ... 포악해지니... 진에 이르러 ... 한에 이르러 준왕이 위만에세 습격당하여 패망'이라는 글이 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를 근거로 주나라 무왕 ~ 진.한 교체기로 1천 년을 산정한 듯합니다. 권근의 기자가 1천 년을 지냈다는 근거도 어딘가 있었을 것이고요.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2:37 (KST)

연구서의 내용 말고 1차사료의 내용을 말하는건데요. 기자가조선에 봉해졌다고 서술한 상서대전이나 사기 그리고 한서 등지에 기자가 조선에 가서 조선을 세운후 1천년 동안 다스렸다는 내용이 있냐고 물어본거에요. 제가 알기로는 아마 없을겁니다. 1천년간 나라를 다스렸다는 내용은 조선시대 이르러 사대사상이 강한 유학자들이 쓴 사서에 등장하게 될겁니다. 이건 제 사견입니다만,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의 계보를 이었다는 것은 유학자들에 의한 역사왜곡에 해당하는거죠. 상서대전 사기 한서에 나오지 않은 내용을 조선시대에 이르러 만든거죠. 태원선우씨세보처럼요. 그전에는 사서의 기록에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또 그 이전에 상서대전 사기 한서등은 죽서기년에도 나오지 않는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것을 만들었죠.

한정된 자료를 가지고 그분들을 '사대사상'이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으로는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을 정통으로 계승하지도 않았고, 한국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해도, 그들은 한국에 포용되었습니다. '1천 년 간 다스렸다'는 내용이 문제가 된다면 '있는 그대로' 적으면 되겠죠. 중요한 것은 '자기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아니라, 옳은 내용이 남는 것입니다. 기자조선에 대한 예우는 고려시대(또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습니다. 기간이 1천 년이라는 것도 앞서 설명한 기록으로부터 추론이 가능한 것이고요. 사대주의 의식에서 만들어낸 역년이 아닙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3:22 (KST)

제가 말을 중구난방으로 했군요^^. 상서대전, 사기, 한서 등 1차사료에 기자가 나라를 세워 1천년간 지속되었다라고 기록하였는가가 가장 주된 질문이었습니다.

상서, 사기는 수천년전에 쓰여진 기록물이고, 그것을 해석하는 옛날 학자나 우리나 그 시대 사람이 아니긴 마찬가지, 우리가 그 사람들 보다 더 좋은 환경인 것은, 인터넷을 통해 훨씬 많은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 물론 부정확한 정보들도 있지만, 다양한 분야 많은 내용을 읽다 보면, 큰 흐름이란 것이 보입니다. 어떤 주장과 해석을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사실'들을 기억하면서 자료 흐름을 보면, 옛날 역사가들 보다 더 좋은 환경,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역사가들 해석은 '사실' 참고만 하고 읽고 지나가야 합니다.

조선후란 관점은 중국 중심으로 쓰는 관점, 주나라 5관작중 2번째인 제후'후'는 강씨 시조에 나와있습니다. 강후, 다른 내용에서 설명했는데, 그것은 사람 이름이 아닌 지역 성, 희성 강씨 + 5등급 관작 '후' 입니다. 주 무왕 희발이 조선후로 봉한 것은 기자가 아닌, 동생인 희 봉 둘째 아들 희 중모(아명)=강후, 기자조선 기자 서여 관련 내용 어디에 '후'란 관작명 없습니다. 기자조선 왕= 자 서여, 강후는 건국 공신으로 임명됐고, 따라서, 주 무왕 조선후 분봉은 실패했고, 기자조선은 주나라와 무관한 독립국으로 주나라와 교류 한 겁니다. 우리가 미국과 교류한다고 해서 미국은 아닙니다.

BC 1122년을 1046년으로 바꿨던데, 1122년은 단군 때부터 쓰던 우리 단기를 서기로 기록된 것이고, 중국이 동북공정 바꾸는 것은 참고만 하면됩니다. 수천년전 역사가들 기록이 요즘 우리처럼 딱딱 맞아 떨어질 순 없는, 참고만 하고, 고정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상서가 공자가 쓴 것이라 더 오래된 것이고, 죽서기년도 그런 기록이죠? 사기는 그것 보다 나중 기록이지만, 기록 방식이 현재에도 정확성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조선후가 포악했다는 표현은 '사실'처럼 느껴집니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킬 때, 제신 주왕 역시 포악하게 묘사 됐고, 삼촌이나 형제, 호족들을 잔인하게 분해 심장을 꺼내는 것을 보면, 포악한 것은 맞는데, 그런 생각은 주관적인 생각으로, 북방계 유목 기마민족은 동물을 취급하고, 남방계 농경민족은 농사짓는 초식동물 아닙니까? 사자나 호랑이를 포악하다 생각하는 것은 초식 동물들 주관이고, 객관적으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역사를 논하는데 있어서, '사대 사상' 운운하는 자체가 국가나 혈통 주관 개입된 것으로, '사실'만 증명 할 수 있는 증거를 바탕으로 논증 해야 하고, 100% 확신 할 수 없는 가능성 높은 참고적 '사실'은 그냥 읽고 넘어가야 할 일, '사대주의' 운운은 '빨갱이' 운운과 비슷한, 자기 주장을 관철 시키려는 프레임입니다.

궁금한 내용이 있는데 ...편집

  • 규원사화에서는 단군의 고조선에 이어 치우의 자손의 나라인 남국(藍國)이 고조선을 이어 해대와 회대 지역으로 불리었던 중국의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까지 확장하고 한때에는 빈과 기라고 불리었던 황하강 상류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이 기자조선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3:32 (KST)

규원사화에 따르면 단군조선을 이은 국가는 기자조선이 아니라 남국이라고 서술되어 있어요. 남국이 모든 제후국을 거느린다고 기록되어있죠. 만설에 기자는 열국중 하나인것처럼 기술하고 있죠. 정확히 말해 기자동래설의 부정이지 기자조선의 부정은 아닙니다.

남국후는 43세 물리임금 때에 회대에 진출하고, 엄국과 서국을 세운 후 46세 보을 때에 제후들을 거느립니다. 이후 약 50년 간 단군조선이 유지되었고, 47세 고열가의 기록에도 '이 자리를 물려주려 하나 자손들을 두루 보아도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자의 설명으로도, 단지 '제후 중 남후만이 뛰어나서 군후를 거느렸다'는 내용 뿐입니다. 남국은 후에 선모국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대동사강에는 선모국이 선비국으로 기록되기도 하고, 중국측 기록에 선모국의 행방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서국은 후에 주나라를 위압하고 주변국을 아우르는데, 결국 주나라에 멸망합니다. 어쨌든, 남국의 행방은 요.금.청의 행방과 유사하여, 단군조선의 계승국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3:51 (KST)

남국을 선비족이라 보기도 하고 연나라로 보기도 하지만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기에 보면 남이를 정벌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즉, 이것은 남국의 세력이 주나라때에 이르러 지금의 하북성이나 요녕성쪽으로 밀려났나고 볼수도 있습니다. 남국이 망했다고는 볼수 없죠. 말하다보니 original research같군요. 지우셔도 상관없습니다.

단군조선=상나라=기자조선,랴오닝성 공통분모, 이것을 생각하고 유물, 유전자, 역사서를 살펴 보면, 흐름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치우는 조선 상나라 계통 민족을 의미하고, 빈과 기는, 주족인 주나라 희성 조상 계보인 은본기에 보면 언급됩니다. 현재 '기'는 기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삼국지 게임할 때 장안=시안 성 북서 산맥 아래에 '기산'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태공이 주족 주나라를 건국한 곳이고, 태공이 그곳으로 이주하기전 수도가 '빈'인데, 현재 빈 위치를 검색하면, 뭔가 맞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유목민 농작물 약탈 때문에 도망간 것인데, 유목민들 기마민족 아닙니까? '기산'에서 '빈' 거리가 너무 가깝습니다. 큰 강을 2개 건넜다는데, 현재 빈에서 기산까진 큰 강 2개가 없습니다. 위키에서 '서주' 검색하면 보다 분명해집니다. 황하가 장안헤서 북쪽으로 올라가다 사막 후이족 자치구를 돌아가죠? 장안에서 북쪽으로 황하가 올라가다 왼쪽으로 도는 지점에 화북=오르도스가 있습니다. 그 지역은 이후에도 몽골 유목민과 농경 중국이 자주 부딛히던 곳으로 주나라 주족 발상지입니다.

조선 상나라는 랴오닝성에서 시작했지만, 탕왕 때 하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중원 패권을 차지했고, 수도는 조가는 현재 복양성 인근에 있고, 기마 유목 계통 세력이 서북쪽에 있는 주나라 주족에게 영향 미치는 것은 당연한, 주 문왕은 상나라 3단계 관작 공 후 백 중에서 가장 낮은 '백' 벼슬, 서백 희창으로 불렸고, 상나라 다른 제후국 숭후호=후관작 숭나라, 호가 제신 주왕에게 모함했을 때, 잡아다가 복양 인근 '유리'성에 가뒀고, 모함은 주나라 관점이고, 상나라 입장에서 주변 제후국 세력이 커지는 것 보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살려줬더니, 결국 세력 키웠고, 역성혁명 상나라가 망하고 랴오닝성으로 돌아가 기자조선 시작한 것입니다. 상나라 때 제후국은 주나라처럼 분봉 하는 것이 아닌, 혈족 성씨 단위 마을 형태 국가, 유목민족이 농경민족 잡아오는 것은 어렵지 않은, 분봉하진 않았지만, 상나라 영향권에 있는 씨족 국가라 서백 벼슬 군신관계 형성했던 것입니다.

기자 조선 부정하는 근거가 될만한 흐름이 없습니다.

선비족은 기자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BC 600년 경 스키타이 유입, 500년 소 빙하기 영향 북쪽 기마민족 유입 종족, 북쪽 기마민족이 지속적으로 유입 추가 되는 지역이 랴오닝성, 남방계와 북방계가 만나는 지역으로 생각됩니다.

저도 궁금한게 있는데....편집

현대에 사학자중 기자조선 긍정설은 누가 주장하는건가요? 참고문헌좀 봤으면 좋겠는데요...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에 기자조선설이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이기백도 기자조선을 요서지방에 있다고 주장하니 누가 주장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학계의 중론은 일부인정에서 부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현재는 '약간의 긍정'을 표시하는 정도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소극적인 의견으로는, '과거의 고려, 조선 시대에 실재했다고 믿었던 기자조선의 영향을 무시하면 안된다'는 것이고, 유적을 중심으로 부정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대표적인 분은 이형구 교수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미 작고하셨지만 이상시 변호사도 기록을 신뢰하는 입장입니다. 기자의 출신이 동이족이라는 것도 기록을 통해 추정한 것이고요. 결국 은나라도 동이족 계열이라는 것입니다. 천관우 교수도 결국은 기록에 기초한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8백 년 간의 기록은 공백이니 그 사이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고요.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조선시대와는 달리 그 영역을 요서 일대로 비정하고 있습니다. 이덕일 교수(공저인데 직접 쓴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네요.)도 최근 출간된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라는 책에서 기자조선이 요서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주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참조할 자료들은 참고자료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월) 23:57 (KST)
은나라가 동이족 계열이 아니라 당나라 때 쓰인 자치통감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않던가요? 아니면 제가 잘못 알았나요? --Knight2000 2007년 4월 25일 (수) 10:41 (KST)
'자치통감'에 관련 내용이 있다면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L모 교수가 자신있게 주장하는 것을 보면 어디엔가 근거는 있어 보입니다. jtm71 2007년 4월 28일 (토) 14:32 (KST)


은나라가 동이족 계열이 아니라는 내용이 당나라 때 쓰인 자치통감에 있다해도, 현대 사회는 그때보다 과학 기술이 훨씬 발달했고, 혈족 흐름 표지 문자인 성씨 유전자 계보 자료 통합 확인할 수 있는 내용, 그것 때문에 하는진 알 수 없지만, Y 계통 성씨 유전자 분류 하는 곳도 있습니다. 중국은 활발하고, 우린 성씨 보단, 그냥 암 조기 발견 위해서 유전자 확인 할 때, 비용 조금 더 추가하면 성씨 유전자까지 확인 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역사서에 나와있는 내용들은 참고적 '사실' 변하지 않는 고정된 '사실' 아닙니다. 큰 흐름에 맞지 않는 것은 검증을 통해 '허위' 걸러 내는 과정은, 역사가도 전문 기자도 아닌 본인 자신입니다.

기자조선의 역대왕과 사대사상편집

그저 저의 헛소리입니다. 본문과는 관련 없어요. 기자조선은 사대사상과 관련이 깊습니다. 기자조선이 왜 생기게 됐는지 보면 알수 있는데...

  • 기자를 처음으로 기술한 죽서기년등에는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말도 없습니다.
  • 그후 중국을 진나라가 통일 한 후, 중국땅에 살던 동이족들이 다 쫓겨납니다(쫓겨난 것은 중국사서에 나오는데 지금 정확히 생각이 안나내요). 이 후에 한나라가 세워진 후에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애매한 말을 남깁니다.
  • 그러다가 고려가 이성계에 의해 쿠테타로 망한 후 국명에 대하여 이성계는 중국에 가서 묻죠. 화령과 조선중 어떤 것을 택하면 좋겠냐고... 중국의 왕은 조선으로 하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의도가 있는데요...
    • 우선 조선이란 국명은 중국이 우리나라를 얕잡아보는 국명에 해당합니다. 동이족이라는 명칭과 비슷하죠. 朝는 아침으로 동쪽을 뜻하고 鮮은 설문해자를 보면 貊족에서 나왔다고합니다. 鮮은 신선하다는 뜻으로 날고기를 먹는 맥족에서 나온거죠 즉, 조선이란 명칭은 동쪽에 있는 오랑캐로 날고기를 먹는 맥족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조선이란 국명의 원음과 비슷한 朝鮮을 선택한겁니다.
    • 두번째로는 기자조선과 연계하여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즉, 원래 기자는 조선을 건국했는지 안했는지 기록이 없지만 후대에 왜곡되고 명나라에 사대사상이 강했을때 중국 사서에 나온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느 내용을 더하여 그 역년을 만든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자의 역대 왕들은 조선때 만들어진 기자실기, 태원선우씨세보 이외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규원사화 단군기에는 분명 '조선'의 명칭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나라 이름은 '단국'이었죠. (단군은 단국의 임금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또 다른 고대사서인 부도지에는, 조선의 이름은 아침에 제사를 지낼 때에 신선한 고기를 사용한 것에서 유래된 것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이 그대로 전달된 것인지에는 현재로서는 의문이지만요. jtm71 2007년 1월 1일 (월) 00:04 (KST)
그랬군요. 규원사화 읽을때는 그냥 읽어서 몰랐는데... 어쩐지 조선이랑 국명이 수상했었습니다. 명나라가 이성계보고 조선이라 이름하란것도 수상하고... 단국이군요.... 환단고기는 "신국 혹은 진국(辰國)"이라고 말하고 있죠. 재야사학자들은 한반도에 있었던 마한 진한 변한의 원조를 진국으로 보는 것은 틀렸다고 말하죠. 고조선은 만주에 진국은 한반도에 있었다고 말하는 교과서의 내용은 틀렸고 고조선과 진국은 같은 나라라고 말하죠. 이와 더불어 사기 조선전에 나오는 진국은(위만이 한나라와 진국의 무역을 방해했다고하는) 바로 고조선이라는 거죠.
규원사화 단군기에서 단군이 '박달임금' 또는 '백달(白達)임금'이라 하였으니, 단국은 박달국 또는 백달국이 될 것입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단국, 배달국, 환국 모두 동일한 명칭이라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jtm71 2007년 1월 1일 (월) 10:04 (KST)
언어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한"과 "배달"이 서로 다른 언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불"(뿌리/배달)이라는 낱말은 투르크 게열(우랄어 계열)의 낱말인데, "한"(하나/하늘)은 몽골 계열(알타이어 계열)이라네요.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환국과 배달국은 현대 한국인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리적 분석을 하더라도 환국이나 배달국의 중심지는 저 멀리 몽골 고원이나 그보다 북쪽일 가능성이 높으니, 당시로서는 현대 한국 지역은 변방입니다. ㅡㅡ; --Knight2000 2007년 4월 25일 (수) 10:38 (KST)
앞에서도 제시했듯이, 규원사화에서의 배달국은 단국으로, 단군조선을 의미합니다. '환'은 하늘이 아니라 환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출처를 밝히지 않았으니 이러한 주장이 북애자 자신의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환'이 하늘이라든지, '배달'이 뿌리라든지 하는 해석은 규원사화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거대한 연방국으로서의 '환국'이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桓國'이라는 명칭 조차도 1904년 발간된 동경제국대학본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것이 최초입니다. jtm71 2007년 4월 28일 (일) 17:06 (KST)

한국인이 무엇이다 규정하려면, 한국인 유전자 분포가 기본적으로 하나 뿐이거나, 여러 개가 있더라도 50%를 넘는 핵심 유전 계통 있어야 하는데, 현재 한국인 유전자 관련 내용들을 보면, 크게 4~5가지 종류가 분포하고 있고, 50%를 넘는 유전 종족은 없습니다. 발상지 랴오닝성 지역이 북방 기마민족과 남방 농경민족이 만나는 지역이고, 우리를 거쳐서 일본으로 전파되는 구조라, 당연히 중국인과 일본인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혈통 민족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잘 달래 봅시다.

대동사강 관련 ...편집

1920년대에 경성에서 출간된 대동사강의 저자는 기자조선이 난하 유역의 수백리에서 시작하여 차차 세력을 키워 북호의 땅 1천 리를 빼앗고, 그 영토가 평양까지 이른다고 보았던 듯합니다. 당시로서는 요서 지역의 유적이 처음 발굴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는데,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들로 추정한 시대에 따른 세력의 변화와 그 기록이 부합되는 점은 무작정 꾸며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수백 리'라는 기록은, 기자조선이 아닌 단군조선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됩니다. 기자는 단군조선에 망명했고, 마지막 임금인 고열가는 기자에 서쪽 땅을 나누어 주고 아사달로 사라집니다. jtm71 2007년 1월 1일 (월) 10:16 (KST)

대동사강 기씨조선편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않은데요. 고조선의 수도인 요동성에서 서쪽으로 2천리 떨어졌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영토는 동서가 5천여리요 남북이 칠천여리였다. 대동사강에서 기록이 다른데 두가지를 설명하는게 나을것 같은데요. 좀더 토의를 해보죠...

보충설명을 따로 하면 좋겠지만, 여기에 대한 연구실적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키 지침이 개인적인 연구가 허용되지 않으니 있는 그대로의 자료를 제공할 수 밖에는 없겠네요.

단군조선도 그렇지만, 태조의 설명에는 왕조 전체의 설명이 포함되는 경우가 있을 듯합니다. 대동사강의 기씨조선의 경우, 단씨조선으로부터 수백 리를 할양받았다고 적혀 있고, 동서 5천리.남북 7천리의 기록은 태조왕 4년보다 앞선 시기에 적혀 있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입니다. 실제로, 이후로도 제후와 관련된 기록은 없고, 왕이 나라를 순행하는 단위도 군.현입니다. 하지만, 조공의 기록이 있어서 이러한 내용이 김광이 여러 사서와 야승을 취합하다가 내용이 중복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앞서의 넓은 영토에 비견할 만한 세력으로서 자리잡게 된 것은 최초의 조공 기록이 등장하는 효종왕(기원전 7세기)이후의 일로 여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이는 유적으로 검증된 요서 일대의 세력들(하가점 상층문화)의 확장과 부합합니다. 기씨조선이 스스로(해당 부족들은 동의하지 않더라도) 조공(아마도 무역조공)을 받는 범위를 그 영토로 여겼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jtm71 2007년 1월 2일 (화) 11:08 (KST)

기자조선긍정론과 대동사강 관련하여편집

기자조선 긍정론 부분에 기자조선을 서술하고 있는 여러가지 사서를 집대성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문서는 대동사강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군요.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은 여러가지 사서에 나타나고 있으니 사서별로 정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Breathejustice 2007년 1월 3일 (수) 03:55 (KST)

대동사강의 진개 침략기사편집

진개는 연나라 소왕시대 인물로 BC 311~279에 침략해야됩니다. 그러나 본문에 진개의 침략이 연나라의 멸망연대인 BC221년 근방에 있으므로 틀린것 같군요. 아무리 대동사강에 그렇게 적혀있다 하더라도 이는 틀린것이며 위키에 기록하지 않는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아무래도 대동사강이 진개의 침략기사를 환단고기 북부여기에서 베낀것 같습니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에는 진개가 BC221년에 북부여를 침략하여 만번한을 경계로 삼았다고 나옵니다. 대동사강은 이를 연대에 맞춰 기자조선에 기록한것 같습니다. 진개침략기사는 연대가 틀렸습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27일 (일) 18:42 (KST)

환단고기는 1979년보다 앞서 존재했다는 것 조차도 증명되지 않은 책입니다. 대동사강이 환단고기에서 인용했다는 것은 추측에 불가합니다. 진개의 침략기사를 따진다면, 다른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분류도 '긍정론'으로 되어 있는데, 진.위를 따진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요 ...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의견이 있다면 본래의 내용을 삭제하지 말고 본문에 별도로 그 내용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2007년 1월 28일 (일) 07:05 (KST)
추론이긴 하지만 너무 정황이 확실해요. 이유립이 환단고기만들면서 동사강목을 참고로 한것 같은데 이때 실수한것 같습니다. 보시죠.
동사강목
-왕(王) 비(否)가 진에 복속하고서 곧 죽고,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조선이 왕을 칭하자, 그 뒤로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하여졌다.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전에 동호(東湖)에 볼모로 가 있을 적에 동호가 그를 매우 믿었는데, 돌아가서는 동호를 엄습하여 격파하고 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1천여 리의 땅을 차지하고서 만번한(滿潘汗)까지를 경계로 삼으니, 조선이 비로소 약해졌다.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어서는 비가 진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진에 복속하였으나, 조회(朝會)하려 하지는 않았다. 비는 기자의 40세손인데 곧 죽고,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
환단고기
-경진 19년(B.C.221)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도록 하였다. 연 나라는 장수 진개(秦開:제나라의 장군으로 동호 즉 조선에 인질로 잡혀있다. 나중에 돌아가 조선을 침범하여 조선이 양평에 에 성을 쌓아 국경으로 삼았다.)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비록 한글로 번역된거지만 ㅋㅋ 보세요 너무 똑같죠(제가 동사강목원본이없어요). 동사강목에서는 진개기사를 과거의 기사로 쓴것인데 환단고기에서 이유립이 실수한거죠. 이밖에도 보면요 환단고기 북부여기의 초기기록은 동사강목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요...
동사강목
-연(燕)ㆍ제(齊)ㆍ조(趙)의 백성이 투탁(投托)하여 왔다.
환단고기
-임진 31년(B.C.209), 진승(진나라 말기의 농민반란 지도자)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려웠다. 이에 연나라.제나라.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명 이나 되었다.
동사강목
-한과 패수(浿水)로 경계가 되었다. 한이 천하를 평정하고 나서,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삼고, 연이 쌓은 장새(障塞)가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요동(遼東)의 옛 장새를 수리하고서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환단고기
-기해 38년(B.C.202),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오늘날의 난하이다.

보면아실겁니다. 환단고기 저자는 연왕(燕王)이 한나라 제후였다는것을 몰랐나봅니다. BC221년 진개침략기사는 동사강목을 참고하면서 계연수나 이유립이 실수한겁니다. 그것을 또 대동사강은 환단고기를 참고하면서 똑같은 실수를 범한거죠. 그리고 BC221년 진개침략기사는 삭제해야하는데 이유는 아무도 그 기록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거에요. 재야사학자도 동의하지 않고, 아마추어 비전공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의하는 학자가 단 한명이라도 있으면 게시하는게 좋겠지만 완전히 틀린기사에요.

아래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학자의 동의와 위키백과에 실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모든 판단은 읽는 이들이 내리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내용을 임의로 삭제하는 것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2007년 1월 29일 (월) 12:06 (KST)

우리말에 대한 이해편집

같은 것은 같고, 다른 것은 다른 것입니다. 어떻게 같으면서도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까 ... 다른 부분이 있다면 '유사하다'라 표현되는 것이 맞습니다.

1923년에 수집된 사서와 야승을 토대로 출간된 《대동사강》에도 36세 가덕왕 이전은 추존왕인 태원선우씨세보와 유사한 왕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대동사강의 위덕왕(威德王)과 창덕왕(昌德王)이 태원선우씨세보에는 성덕왕(盛德王)과 덕창왕(德昌王)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이 다르다.). ==> 1923년에 수집된 사서와 야승을 토대로 출간된 《대동사강》에도 36세 가덕왕 이전은 추존왕인 태원선우씨세보와 같은 왕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단, 대동사강의 위덕왕(威德王)과 창덕왕(昌德王)이 태원선우씨세보에는 성덕왕(盛德王)과 덕창왕(德昌王)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만 다르다.).

이렇게 바꾸는 것이 맞는 것입니까 ... jtm71 2007년 1월 28일 (일) 07:25 (KST)

그렇게 바꾸죠. 좋습니다.

문서수정의 방향편집

여기는 정설만 소개하는 학계가 아닙니다. 여러 의견이 대립한다면 같이 제시하는 것이 옳습니다. 문서수정의 방향은 빼는 쪽이 아니라 더하는 쪽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기 문서도 한.두 줄만 남기고 모두 삭제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기술이 될 것입니다. jtm71 2007년 1월 28일 (일) 07:25 (KST)

BC221년 진개 침략은요..... 대립된 의견이라기보다는 틀린거에요... 어느사학자도 저 기록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습니다. 대동사강이 환단고기를 이용하여 상고사를 편집하면서 수정없이 기록하다보니 실수가 나온거에요. 진개의 침략을 BC221년 근방으로 보는 학자가 있으면 말씀해보세요. 재야사학자나 비전공사학연구가나...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라도 저 기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진개기사를 저 시기에 넣으려면 적어도 한명의 학자가 동의를 해야지 Original research가 아닙니다.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게 한 BC221일걸요. 근데 그때 연나라가 침공했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틀린거죠. 더군다나 진개는 연나라 소왕(BC 311~279)때 사람으로 종통왕때는 살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68.254.218.167 2007년 1월 28일 (월) 22:01 (KST)

학계의 논란거리가 안된다고 쉽게 판단을 내리는 권위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 개인적인 생각이 아닌, 저 기록에 동의하는 사학자가 없다는 근거를 제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학자의 유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1929년에 출간된 역사서라는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현상을 두고 여러 의견이 있을 때에, 가능하면 일반적인 주장에 가까운 내용을 소개하고, 나머지는 부연설명으로서 덧붙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엄연히 그러한 내용이 있는데 기재자의 임의 판단에 의해 더하고 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비록 사실과 틀리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이상, 본래의 내용은 그대로 두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니혼쇼기의 내용에 틀린 곳이 있다고 해도 역사의 연구에 참조가 될 수는 있는 것입니다. 다른 주장이 있다면, 또 다른 의견으로서 제시되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여기는 사학계의 게시판이 아닙니다. jtm71 2007년 1월 29일 (월) 11:59 (KST)

한번 서점에 가서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책을 보세요. 진개의 침략 BC221년이 사실로 써놓은 책이 있나... 제가 한권이라도 찾으면 진개기사를 써넣은것에 동의하겠습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0일 (화) 03:42 (KST)
그리고 사서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들 중에 서로 다르게 기술하고 있는것을 그대로 써 넣는것은 original research에 해당됩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1차 사료에 나오는 혼동되는 기록들을 동의하는 학자, 혹은 재야학자가 쓴 책에 기록되어야죠. 진개침략 BC221년은 한단고기와 대동사강에만 나와요. 위키는 사학계의 게시판이 아니지만 original research를 그대로 적어놓는 열거식사전은 아닙니다. 백과사전에요. 원전에 나오는 내용을 현재 학자(재야사학자도포함)들이 어떻게 연구하였고 그 결과를 기록하는 백과사전이란말입니다. 원전을 열거하려면 http://www.wikisource.org 로 가세요. 다른 의견이라고 하셨는데... 진개침략 BC221 년을 누가 주장하나요? 아무도 없습니다. original research에요.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0일 (화) 03:46 (KST)

최소한 대동사강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기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환단고기가 출간되기 5년 전인 1974년에도 재출간되었습니다. jtm71 2007년 4월 28일 (일) 16:58 (KST)

인식의 변천편집

현재의 저작물을 이용하여 인식의 변천을 작성해주세요. 백과사전은 과거의 저작물을 열거하는 사전이 아니에요. 과거의 저작물을 토대로 현재에 연구한 학자들의 저술을 알기쉽게 목록화하는것이 백과사전입니다.

기자조선의 인식은 변천은 original research입니다. 그 당대에 편찬된 사서 몇개를 가지고 저렇게 표현할수 없습니다. 사서가 그 당대 모든 사람의 의견을 대표하지는 않아요. 참고로 중세조선 16-17세기 경에 쓰인 계곡만필 2권에서는 기자조선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저렇게 인식이 변천되어왔다는 근거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만 보더라도 적어도 세종이전까지는 조선의 제후로 기자를 인식하고 있고, 세종대왕도 "기"는 나라이름이고 "자"는 작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합당한 출처를 밝히지 못한다면 삭제하겠습니다.--Breathejustice 2007년 1월 30일 (화) 04:29 (KST)

계곡만필 권2 史記微子世家曰 武王封箕子於朝鮮 後人因其說而不能辨 余常疑之 方殷之將亡也 箕子與微子,比干各論其心事曰。商其淪喪。我罔爲臣僕。欲以此自靖而獻于先王。殷旣亡。箕子只爲武王一陳洪範而已。若受武王之命而享其封爵。是遂臣於周而變其初志也。微子之受封。爲存宗祀。 猶有 可諉者。若箕子受朝鮮之封。於義將何據也。況朝鮮是時。未嘗服屬中國。武王安得取其地而封拜諸侯乎。史遷此說。明是謬妄。漢書地理志曰。殷道衰。箕子去之朝鮮。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此語甚有理。蓋箕子去中國而入朝鮮。鮮民共尊以爲君。亦猶泰伯適蠻荊而遂君其地也。昔年余次姜詔使曰廣弔箕子賦。謂箕子非受武王之封。而自來朝鮮。趙丈持世頗疑其無據。不知正用班固意也。

조선왕조실록 세종 12년 山川壇巡審別監鄭陟啓 平壤箕子廟神位 書曰 朝鮮侯箕子 請削箕子二字 上曰 然箕國名子爵也 不可以爲號 然泛稱朝鮮 亦似未安 稱後朝鮮始祖箕子若何 令詳定所議啓 左議政黃喜右議政孟思誠贊成許稠等以爲 宜稱後朝鮮始祖箕子 摠制鄭招以爲 宜稱朝鮮始祖箕子 從喜等議

저 내용은, 후조선의 시조인 기자는 이름이 아니라 나라이름일 뿐이므로, '후조선 시조 기자'로 명시하자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후조선의 시조가 기자라면 후조선은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이라는 것이죠. 이후로도 '기자조선'이라는 명칭은 종종 쓰입니다. 문장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jtm71 2007년 3월 19일 (화) 17:42 (KST)
계곡만필의 '漢書地理志曰。殷道衰。箕子去之朝鮮。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此語甚有理'는, 기자의 동래에 대해 매우 긍정하고 있습니다. 인용하기 전에 내용은 읽어본 것입니까 ... jtm71 2007년 4월 28일 (일) 17:49 (KST)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을 듯 하네요. 관리자의 조정이 있다면 그에 따르겠습니다. jtm71 2007년 1월 30일 (수) 16:05 (KST)
대응을 할 필요가 없는것이 아니라 못하시는거겠지요. 님이 추가한 기자조선인식의 변천은 근거가 없고 단지 몇개만의 1차사료를 Jtm71님이 해석한 의견이므로 original research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기자조선의 인식의 변천"은 삭제하겠습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0일 (수) 18:31 (KST)
스스로 찾아보려는 노력은 하시는 건가요 ... 관련된 근거는 참고문헌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jtm71 2007년 1월 30일 (수) 18:42 (KST)
정확한 책이 뭡니까. 저리 두리뭉실 달아놓으면 누가 알죠? 참고문헌 다는 방법 모르세요? 그리고 참고문헌에 기자조선에 대한 역사적 인식에 대한 내용은 없는것 같군요.
참고문헌은 박광용 교수의 글입니다. jtm71 2007년 1월 30일 (수) 21:34 (KST)
저런책은 뭐죠? 서점에는 없고 도서관에도 없군요. 어디서 구했습니까? ISBN 말해보세요 찾아보게. 출처가 부정확한 책입니다. 서지사항이 아주 불명확하군요. 단군기자조선의 시대적 변천은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출처가 부정확한 책으로는 본분의 중요한 핵이되는 시대적변천과정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좀더 권위있는 저작물로 설명하세요. 그렇지 않을 시에는 삭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있습니다. 찾아보세요. jtm71 2007년 1월 30일 (수) 21:56 (KST)
ISBN을 말해보라니가요. 그런책 찾기 힘듭니다. 별로 권위있는 책이 아닌가보군요. 출판사를 보니 서울대출판부인데... 서울대교내학회지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0일 (수) 22:25 (KST)
그건 모두가 판단할 일입니다. 박광용 교수가 어떤 분인지는 알고 계시나요 ... 그리고, 도서관에도 없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료의 권위는 어느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출간한 곳이 얼마 만큼의 권위를 가졌느냐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서울대학교는 연구기관으로서는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서울대학교 학회에서 발행된 논문집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그 주장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jtm71 2007년 1월 31일 (수) 05:52 (KST)

흠...

학자들에게 권위가 어떤 것인진 모르겠지만, 현실에서 필요한 권위는 제시하고 있는 것이 '사실'과 얼마나 일치 되는 지가 기준입니다.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은,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 되고, '사실'을 아는 데는 저자의 주관 따윈 최종적으로 읽는 독자에겐 참고 사항일 뿐, 그 저자가 얼마나 권위 있는 사람인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수긍하고 믿을만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최고의 권위입니다. 역사 사실은 우리가 가 볼 수 없지만, 현재 사실은 직접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는 사실인데도, 신뢰받던 권위있는 언론 기관이 사실 외면 왜곡 했습니다. 사실을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에게 그런 권위는 전혀 통하지 않지만, 직접 확인 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은 증거 보단 권위가 더 통용되나요? 저에게 필요한 지적 호기심은, 권위도, 주관도 아닌, 그냥 진실, 진짜 사실 그 자체 입니다.--Tol6560 (토론) 2019년 3월 29일 (금) 22:51 (KST)

춘추필법편집

네이버사전의 의미를 따르면, 춘추필법의 특징은, '비판적인 태도로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만 입각하여 기록하는' 것입니다. 춘추필법으로 없던 기자조선이 지어질 수는 없습니다. jtm71 2007년 2월 1일 (금) 22:28 (KST)

춘추필법은 "지나인의, 지나인에 의한, 지나인을 위한" 서술법입니다. 한족이 이민족에게 사대를 했다면, 춘추필법에 따른다면, 당연히 공정하게 서술해야 합니다만, 실제로는 이민족을 깔아뭉개거나 비하하는 서술(적어도 이민족을 높이지는 않는 서술)을 합니다. 춘추필법은, 비판적인 태도는 맞지만,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춘추필법은 한족을 위해서는 침소봉대를 해도 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흉노는 전쟁에 나가는 젊은이에게 부족 늙은이들이 두꺼운 옷을 벗어주는 관습이 있었는데(칭기스칸 시절에도 비슷한 풍습-쓰던 무구를 주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한나라 사신이 "흉노는 노인을 천대한다"라고 말합니다. 이게 올바른 필법입니까? 그 다음에 그 사신이 "형사수취"를 들먹이며 예의가 없다느니 합니다. 흉노 대신이 그것을 인정하면서, 한나라에서는 예의를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위아래가 서로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쓸데없이 명품이니 하는 사치를 부추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예의를 잘 안다는 "조공사"가 흉노 선우 앞에서 저딴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격조로 본다면 한나라 황제보다 흉노 선우가 더 위인데 말입니다. 저런 "비례"에 대해서는 사서에 아무런 말이 없죠. 객관적 사실을 썼다면, 그것이 비례임을 밝힌 뒤, 한나라의 "자긍심"이라거나 "자존심"이라거나 하는 말을 했어야 옳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춘추필법은 이미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입니다. --Knight2000 2007년 4월 25일 (수) 10:25 (KST)

글의 요지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음 중 어느 것에 해당되는지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 1. '춘추필법'은 나쁘다.
  • 2. '기자조선은 춘추필법에 의해 창작되었다'
  • 3. '춘추필법'에 대한 설명이 틀렸다.

'춘추필법'이 간단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조선왕조실록의 사용 예를 보면 '대의명분에 의거한 역사의 판단' 정도로 여겨집니다. (무슨 일인지 네이버에서 참조하는 국립국어원 설명이 최근에 바뀐 듯하네요.) jtm71 2007년 4월 28일 (토) 14:48 (KST)

춘추필법의 뜻은 네이버사전에 나온 대로입니다. 그런데 그 뜻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춘추필법'이 나쁘다는 뜻도 아니며, '춘추필법'에 대한 설명이 틀렸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기자조선'과 관련하여 적어도 '조공국 조선'이 있었고, '기자'가 그곳 왕으로 봉해졌다는 사실까지만 진실입니다. 문제는 '조선'이 '주나라'보다 먼저 있었을 수도 있고(주나라는 은(상)의 제후국 가운데 상당히 늦게 생긴 나라입니다), 아니면 '기자'에게 땅을 떼어주면서 그곳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이때 문제는 이미 '조선'이라는 다른 나라가 있었다는 점이겠죠.). 이미 있는 나라에 제후를 봉한 경우는 뒤에도 자주 나옵니다. 예를 들어 신라나 발해라는 나라가 있는데, 느닷없이 당나라 신하 가운데 "신라후"가 나오거나, "발해공"이 나옵니다. ㅡㅡ; 아니면 "신라왕"이나 "발해왕"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기자"에 대한 기술을 실제로 "조선국"에서 "통치행위"를 한 군주 "기자"가 있었다는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주나라가 조선에 사대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흉노에 대한 기술(후한 이전에는 흉노에 사대했으면서 오히려 흉노가 예로부터 중국(주, 진, 전한)에 사대를 한 것처럼 기술함)을 보면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Knight2000 2007년 4월 29일 (월) 15:17 (KST)
춘추필법에서 말하는 '비판적인 태도'는 '대의명분에 비추어본 비판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비판적인 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대의명분'이라는 것이 중국의 '지나인'에게서 나온 것이고, '농경문화'와 '중국식 왕조체계'를 중심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지나인'에게 유리하게 되죠. 그리고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만 입각하여 기록하는'이라는 부분은 오늘날에도 통용됩니다. 이때 유의할 점은 어떤 사실에 대해 관찰자마다 다르다면 그들의 견해를 모두 기록하거나, 아니면 그 가운데 유력한 견해를 기록하는 것을 "객관적"이라고 보았습니다. 위키백과의 "중립적 시각"과 비슷하죠. 이러한 "춘추필법"을 가장 잘 따르는 역사서는 "조선왕조실록"입니다. --Knight2000 2007년 4월 29일 (월) 15:26 (KST)

긴 설명을 하셨음에도 주장의 요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짐작하기로는, '사마천은 단지 기자가 조선 땅으로 갔고, 주 무왕이 조선 땅으로 간 기자를 제후로 봉하였다는 것만 기술하였을 뿐이며, 이외의 부분은 창작되었을 것이다'라는 주장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

이에 대한 인식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있어왔습니다. 이미 주나라를 피해 달아난 기자가 다시 주나라로 갈 이유도 없고, 그 경로 또한 은의 도읍을 지나게 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고, 사기에 기자세가가 없는 것도 제후 책봉이 명분 뿐이었다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기자조선이 실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본문에서는 기자조선의 존재와 관련된 양측 주장이 모두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글의 시작은, '기자조선이 춘추필법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내용에 대한 지적이었습니다. 주장하시는 것과 같이 춘추필법이 중국인에 유리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없는 내용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군신 사이의 예절은 공자가 아닌 단군이나 기자의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조선왕조의 일반적인 견해였다는 점도 지적해 둘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jtm71 2007년 4월 29일 (월) 17:21 (KST)

“없는 내용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것”은 조금 이해하기 힘듭니다. 앞서 말한 흉노의 예에서 보듯이 무례한 사람은 한나라 사신이지 흉노의 재상이나 선우가 아님에도 사마천은 사기에서 “참람”이라느니 하는 말을 써가면서 흉노가 무례하다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없는 사실”을 적었죠(처음부터 춘추필법이 나쁘다거나, 기자조선이 춘추필법으로 창작되었다거나 춘추필법에 대한 설명이 틀렸다거나 하는 예시는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비판적인 태도”로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만 입각하여 기록하는 춘추필법대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비판적인 태도는 오로지 한족에게 유리할 때에만 그렇게 했으며, 객곽적인 사실도 한족에게 유리할 때에만 그렇게 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기자조선 기사가 “한족에게 유리한 내용만 객관적으로 적는(불리한 내용은 마음대로 바꿔 적는)” 춘추필법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심증은 다분합니다. 진짜로 기자가 봉토를 받았다면(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봉토를 받은 제후는 기자와 주공뿐입니다) 적어도 그 위치만이라도 제대로 적어 주었어야 합니다. 창작이 아니라면 그 위치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할 까닭이 있을까요? --Knight2000 2007년 7월 6일 (금) 09:34 (KST)

개인적으로 사전적인 의미 외에는 '춘추필법'이라는 말의 정확한 정의를 알지는 못하지만, '춘추필법'은 '술이부작'과 비슷한 의미로, '서술은 하되 창작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지키기 어렵기에 강조하는 것이고, 모든 사서들이 이 원칙을 지켰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춘추필법에 의해서 없는 사실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단어의 정의가 그러한 이상 틀린 명제입니다. '춘추필법'이 '대의명분을 세우는 서술 방법'이라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비판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였기에 옳지 않을 수 있겠지만, 대의명분으로 없는 내용이 만들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조정에서 편찬된 역사서의 서술은 모두 '춘추필법'에 의거하여 이루어졌는데, 그렇다면, '춘추필법이 없는 사실도 만들어낸다'는 것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대의명분에 따라서 없는 사실도 지어 내었다는 주장과 같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jtm71 2007년 7월 6일 (금) 21:33 (KST)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에 그치면 다행입니다. 주나라 건국 후 실제로 봉토를 받은 제후는 주공과 기자뿐인데, 사기와 춘추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에서는 대부분 봉토를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죠. 사마천의 사기도 예외는 아닙니다. 차라리 없는 사실을 만들었다면 나았을는지 모릅니다. “대의명분”(‘봉토는 천자가 내린다’라는 명분)에 따라 있는 사실을 고쳐 기록한 부분이죠. 춘추필법에 뜻이 “ 《춘추》와 같이 비판적이고 엄정한 필법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죠. “대의명분을 밝히어 세우는 역사 서술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 대의명분에 어긋나면 몰지각이든 사실에 반하든 중요하지 않게 되죠. 그래서 조공사가 흉노 선우에게 무어라 한 일은 지극히 옳은 일이고, 흉노 선우가 조공사를 꾸짖은 일은 참람한 일로 바뀌게 되죠(대의명분에 따르면 흉노는 한의 제후국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도 일본이나 여진에 대한 기록은 지극히 조선이나 명나라에 유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설령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논조는 중립적이지 못하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게 되면 여진이나 일본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갖게 할 우려도 있습니다. 차라리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치면 다행입니다.

주장하시는 내용은 '춘추필법이 없는 사실을 지어냈다'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 듯합니다. 어쨌든, 그러한 내용은 위키백과를 편집하는 입장에서 판단할 만한 내용은 아닌 듯하고, 개인적인 견해가 아닌 충분한 근거가 있고 문서에 포함시킬 만한 내용이라면 출처를 명시하고 덧붙여 주시면 되겠습니다. jtm71 2007년 7월 8일 (일) 12:36 (KST)

군신 사이의 예절은 공자가 아닌 단군이나 기자의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생각입니다. 유물 출토 내용, 상나라는 랴오닝성 서북쪽 홍산문화 유적, 랴오닝성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 북방계 유목민, 주나라 주족은 화북=오르도스에서 농경 생활하던 민족입니다. 주나라에서 온 예절은 농경민족에 필요한가요? 거친 유목민족에게 필요한가요? 뺏기고 수탈 당하는 것은 농경민족 전유물, 예절이 필요한 존재고, 사람이 사람에게 해야 할 도리, 예 입니다. 상나라와 주나라가 500년 이상 함께 삶은 공유하면서, 죽은 조상 '신' 을 섬기는 제사를 공유하게 됐지만, 제사를 지내는 종가, 종손 문자에 남아있는 문자 '시'는 말뚝에 동물을 걸어놓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잔인한 형상입니다. 이런 제사가 농경민족인 주족에게서 시작 됐을리 없는, 거친 유목 근본인 상나라 근본있는 행사일 겁니다.

군신 사이의 본질적인 예절은 힘에 대한 복종에 근본 있는 것으로, 농경 민족인 주나라에겐 유목 계통 상나라 행동들이 사람의 도리가 아닌, 잔인하다 느꼈겠지만, 유목 생활 본질이 동물 살상 아닙니까? 잔인 할 수 밖에 없고, 부족 할 땐, 농경민족 약탈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따라서 북방계통과 남방계통이 만나는 길목에 있는 랴오닝성에 뿌리를 둔, 단군조선과 상나라에게 예절이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예절과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트럼프와 같을 겁니다.--Tol6560 (토론) 2019년 3월 29일 (금) 23:14 (KST)

기자조선에 대한 주장의 순서 ...편집

상식적으로나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에, 긍정-부정-기타의견이 오는 것이 옳습니다. 사실 '제후국론'이라는 주장은 인터넷으로도 검색되지 않는 명칭으로, 긍정/부정의 긍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jtm71 2007년 3월 22일 (목) 12:14 (KST)

저는, 특정 분야 전문가는 아니지만, 여기 기자 조선에 집착하는 이유는, 특정 분야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큰 흐름을 보는데 가장 많이 활용하는 것이 위키 검색, 상세한 내용은 관련 유물 기사나, 다른 툴 이용해서 보고 있습니다. '기자조선' 내용은 위키에서 그시대 검색되는 연관 검색어 링크와 일치 돼야, 위키 다운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위키 검색해보기 전까진, 연나라 진개가 랴오닝성 공략하고 청천강 유역까지 진출한 사실 몰랐습니다. 위키 검색+구글 연관 키워드 검색하고 읽다가 연나라 진개 공격 시기에 많은 다른 분야 변화가 발생하는 것을 전문 기사들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기자조선'은 그런 큰 흐름 위키 내용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해 되지 않는 부분도 많습니다. 단군조선이 랴오닝성에서 시작됐다는 생각하려고 한것이 아니라, 위키 검색 할 때, 한자도 함께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구글 어스 검색이나 여러 도구 통해 살피면서 든 느낌입니다. 단군 '단' 박달나무를 뜻하는 한자인것과, 그 박달나무가 주로 분포하는 지역이 랴오닝성과 한반도 우연? 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단군 전에 존재했던 환국 환인 '환' 문자 지명이 랴오닝성에 남아있는 것, 북방 기마민족 연합 형태 유동적인 국가 환단고기 내용은 소설이라고 생각하려해도, 유사한 다른 내용이 자꾸 보입니다.

상나라=동이족 이란 내용은 중국에서 인정하는 내용인진 모르겠고, 유물은 은허유적과 랴오닝성 홍산문화 유적 공통점과 한국인 생활 풍습 유사점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튼 기자조선 위키 검색 결과는 연관 키워드 연나라 진개 위만 주문왕등 많은 관련 위키 검색어 결과들이 있고, 그것들과 검색 결과가 맞지 않는다면, 위키다운 내용이 아닌겁니다. 이것을 수정하던가, 그것을 수정하던가 해야, 키워드 검색자가 검색 결과를 혼란스러워 하지 않을 겁니다.

호왕과 무왕편집

호왕과 무왕이 동일인물이라는 해설도 있는데, 호왕과 무왕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된 문헌을 제시하기 바랍니다. 다른 출처를 요구하는 항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jtm71 2007년 4월 24일 (수) 21:16 (KST)

호왕은 혜종의 이름과 같은 '武'자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해당 내용은 검토를 거치지 않은 '개인생각'임이 분명하므로 삭제합니다. jtm71 2007년 7월 22일 (일) 09:56 (KST)

위키백과는 남·북한 학계의 의견을 대변하는 곳이 아닙니다.편집

삭제된 양도 적지 않은데, 토론도 거치지 않고 실행되었으므로 되돌립니다. jtm71 2007년 10월 27일 (토) 11:46 (KST)

출처 불명의 내용들 삭제편집

오랫 동안 출처가 제시되지 않은 내용들을 삭제하였습니다. 그리고, '독자연구'가 의심되는 부분에 '출처 제시'를 요구하였습니다. jtm71 2007년 10월 27일 (토) 12:52 (KST)

본문으로부터 이동합니다.편집

출처가 제시되지 않아 다음 내용을 본문으로부터 이동합니다.

* 하상주 단대공정 이후 중국 학자들이 주장하는 주나라 무왕의 재위 연대는 기원전 1046년에서 기원전 1043년으로 기자가 이시기에 조선으로 건너왔다는 것과 기자조선의 첫번째 임금인 태조왕과의 연대차이가 80년정도 난다.
*《동사보감》에 인용된 《대명일통지》에는 '량국몽현에는 기자묘가 없으며, 두여는 잘못 전해들은 듯하다'는 내용이 있다.

위 내용들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내용을 조합한 것으로 독자연구에 해당됩니다. jtm71 2007년 11월 22일 (목) 00:13 (KST)

BC 1122년은 단기를 서기로 표시할 때 동일한 년도죠? 중국 사람들이 하상주 단대공정 어떤 과정을 거쳐서 1046년으로 수정했는진 알 수 없고, BC 1122년은 단기로 표시된 기록들 일치도 있을 텐데, 1046년으로 고정하는 것 보단 함께 표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1046년을 확정했던, 그것은 해석에 불과한 것, 이런식으로 그것을 인용하면 큰 차이를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년도나 날짜 기록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해석하기엔 편리하겠지만, 실제 현실에서 그렇게 날짜나 연도를 규정할만큼, 사관이 옆에서 기록했던 것은 아닌, 후기 역사가들 추론 개입 될 수 밖에 없습니다. 3421년전 얘기를 어제 일처럼 정확하게 기록 할 순 없기 때문에, 날짜가 어디 기록과 맞지 않는다 생각하면, 아마도 모든 조건 맞는 수천년전 기록은 거의 없을 겁니다.

기후방정 출처가 필요합니다편집

출처를 다셔야죠. —이 의견을 쓴 사용자는 Breathejustice(토론 | 기여)이나, 서명을 하지 않아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기자조선 긍정론의 출처필요편집

논란이 많은 기자조선에 대하여 원사료를 인용하는것은 독자연구에 해당됩니다.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 삼국유사 주 무왕의 기록
이것을 기자조선의 근거로 사용하시려면 출처를 사용하세요.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가지로 해석됩니다. 원문의 기록은 기자가 조선에 봉하여졌다는 말이지 기자가 기자조선을 건국하였다는 말은 압니다.
  • 삼국사기 기자가한신 기록
이 역시도 기자조선에 대한 근거로 부족합니다. 출처을 말하세요. 일신, 기자가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어떻게 기자조선 건국과 관련을 지을 수 있는지요. 이 역시 출처가 필요합니다. 기자가한신이 기자인지 신의 이름인지 분명하지가 않기 때문이지요.
  • 조서와 사신의 기록
정확히 어떤조서를 말하는지 언급을 하셔야지 이렇게 애매하게 하시면 안됩니다. —이 의견을 쓴 사용자는 Breathejustice(토론 | 기여)이나, 서명을 하지 않아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기자조선은 허구입니다.편집

자, 기자조선을 연구해 봅시다. 기자는 중국에서 온 인물입니다. 그럼, 중국 동북 청동기문화를 연구해 볼필요가 있는데, 먼저, 동북지역에서는 비파형동검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이런 손잡이와 칼날이 따로 제작되는 동검들은 시베리아, 특히 예니세이강 상류역에서 유행한 스타일입니다. 그리고, 무덤문화를 보자면, 석곽묘나 석관묘는 시베리아의 쿠르간과 많이 비슷하지요. 한말로, 비파형동검은 중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시베리아에서 온 북방계 유목민들이 제작하는 동검이라고 보는것이 더 옳을것입니다. 그리고, 복기대 선생은 위영자문화를 고조선문화의 한 문화라 보는데, 그것은 틀립니다. 그의 의견은, 하가점하층문화가 고조선의 문화라는 잘못된 생각에 기대고 있습니다. 하가점하층문화는 오히려 중국 은나라의 전기문화라 볼수있습니다. 하가점하층문화는 토광묘 문화이고, 채색토기를 씀으로서, 한국의 무문토기, 바위, 돌을 많이 사용한 한국 청동기문화와는 많이 다릅니다. 따라서, 한국 청동기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의 후계자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코리안루트를 찾아서"에서 더 읽어주십시오. 중국동북에서 기후, 고죽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었습니다. 특히, 객좌지역을 중심으로 발견이 되었는데, 오강원 선생님은 이 이유가 이 청동예기들이 위영자문화에서 나왔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는 위영자문화가 아무리 하한이 높아도, 기원전 12세기를 넘지 못한다고 보고계십니다. 자, 그러면, 이 위영자문화가 기자의 문화라는 뜻입니다. 이 문화는 그러나 오래지속되지 못하고 일세기 만에 망합니다. 제가 하자고자하는 말은, 만약, 기자가 존재하고, 나라를 세웠다면, 중국문화와 비슷한 문화를 동북방에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제가 연구 끝에 찾은것은, 기자의 문화는 위영자문화입니다(청동예기, 목곽묘, 기자의 동래). 허나, 이 문화는, 역사기록과는 다르게, 금방 망합니다. 기자조선은 존재했으나, 한국의 뿌리는 아닙니다. —이 의견을 쓴 사용자는 76.204.17.6(토론 | 기여)이나, 서명을 하지 않아 나중에 추가하였습니다.

위키백과의 지침인 위키백과:독자연구 금지 문서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jtm71 (토론) 2009년 3월 19일 (목) 15:59 (KST)

틀: 고조선의 왕편집

틀: 고조선의 왕문서에서 기자조선의 왕도 있는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기자조선은 역사학계에서 인정되지 않은 왕조인데 기자조선 부분은 지웠으면 좋겠습니다. (사용자: kingssj1397) --Kingssj1397 (토론) 2015년 6월 30일 (화) 22:36 (KST) Kingssj1397 (토론) 2015년 6월 30일 (화) 22:36 (KST)


기타 주장편집

기자조선 검색하면 나오는 오른쪽 연표는 위키에서 검색되는 위만 조선 건국 시기 보다 훨씬 빠르게 표시되는데, 연표에는 위만조선 밑에 부여가 표시되는 모순 있습니다. 동북아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 국가를 단일 민족 경계선 긋고 논하면 많은 오류가 발생합니다. 역사는 국가 계보도 존재하지만, 가문 혈통 계보도 존재하고, 그것이 허구라고 말하려면 상응하는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해야 합니다. 가문 혈통 계보를 허구로 말하려면, 유전자 확인 기술로 중국과 한국에 존재하는 성씨 비교하면 옛날과 달리 요즘은 얼마든지 확인 가능합니다. 북부여 관련 내용을 보면, 은나라(상나라) 달력, 은력을 썼다고 기술돼 있습니다. 기자箕子는 자子성姓 기箕씨氏로, 상商나라 마지막 왕 숙부급 계열로 사기에 기술돼있습니다. 즉, 봉건왕조 혈족 분봉지에 따른 호칭 성姓이 기자箕子, 서여 후손들이 조선후로 관작명 불리지 않았으며, 기箕성姓을 후대 왕들이 그대로 쓴 자체가 기자箕子조선朝鮮은 주周나라와 별개 국가인 것을 뜻하는데, 이유는, 지배국 상商나라 제후국 주周나라는 왕조 혈통이 다르고, 황제를 바꾸는 역성혁명으로 세운 것이 주나라로, 상商나라가 어디서 온 어떤 혈통인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데, 기자가 평양으로 5000천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간 평양은 현재 중국 랴오닝성을 뜻하는 것으로, 평양 한자 뜻은 넓고 평평한 땅이란 뜻으로, 양평으로도 불립니다. 기자箕子는 본향으로 돌아갔다 했고, 돌아간 본향 요동 요서지역은 북경과 산맥으로 확실하게 구분되는 지역적인 상황, 한중일 유전자 지도에서 나타나는 그지역 특징 있고, 본향으로 돌아 갔다는 의미는 그 지역이 상商나라 원래 근거지란 뜻도 됩니다. 상商나라가 어떻게 생성됐죠? 황하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생긴 나라로, 하夏나라 동북쪽에 있던 단군조선朝鮮 활동반경 역시, 홍산문화 옥기시대 국가 형성 가능하다는 점과, 압록강 북쪽 지역을 기반으로 겹치는 부분 생각해보면, 상商나라는 단군조선朝鮮 일부로 앞선 문명을 바탕으로 후진 황하문명 하夏나라를 치고 중원을 점령 통치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것이 주周족 주나라 역성혁명으로 본향인 조선朝鮮으로 5천 유민을 이끌고 돌아간 후, 이렇다 할 전쟁없이 함께 살아 온 이유고, 주周 문왕 희창 혈통인 희姬성姓 강康씨氏는 아홉째 아들 위卫강康숙叔 후손이고, 강고엔 나이가 어리게 묘사돼있고, 분봉지가 없었다는 얘기가 있지만, 주문왕 97살에 사망했는데, 피임도 없던 그시기에 아홉째 아들 나이가 20대는 아닌 60대 이상으로, 강康나라가 봉건분봉하는 이유, 혈족 먹고 살 정전제 노예 농민 통한 세금으로, 분봉지는 반드시 존재합니다. 최초 성姓이강康이고, 한국과 중국에서 쓰는 강康성姓은 강康나라에 근거가 있습니다. 강康숙叔, 숙은 숙부를 뜻하는 글자로, 무왕 희발 사후 성왕의 숙부란 뜻입니다. 첫째 백읍 고는 상商왕에 죽었고, 그 복수를 동력으로 역성혁명 한 둘째 주 무왕 희발 사후, 섭정을 넷째 주공단 이 했는데, 상商나라 지역에 감시자로 남겨뒀던 형제 3명, 삼감, 반란 주동자 셋째 관管숙선은 주공단 보다 형으로, 다섯째 채蔡숙 도, 여덜째 곽霍숙 처를 평정할 때, 아홉째 강康숙叔 봉封은, 서자 태생인 소공 석, 상商 왕족인 미자 계와 함께 넷째 주공 단과 협력 삼감의난을 평정했고, 상商나라를 남과 북 2개 지역으로 나눴고, 남쪽에 송宋나라는 미자 계를 분봉 상商나라 조상 제를 모시게 했고, 상商나라 수도 지역인 북쪽 위卫나라는 강康나라 아홉째 강康숙叔 봉封을 분봉했기 때문에 위卫강康숙叔으로 불리고 있고, 최초 분봉지가 강康나라인것은, 강康후侯로 불린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후侯는 관작명 5등급중 2번째 등급입니다. 위강숙 첫째 아들 아명은 백모, 둘째 아들 아명은 중모, 백모는 위卫나라 2대 군주로 종가를 이엇고, 둘째 아들 중모는 기자가 있는 조선에서 기자로 부터 강康씨 성을 하사 받았다고 문중 상계에 나오는데, 강康나라 출신이니까 강康후侯로 불렸고, 아버지 봉封 관작이 강康후侯인데, 첫째 아들 백모 관작이 후侯 보다 낮은 백인데, 둘째에게 주나라에서 후侯 관작을 내렸을리 없는데, 강康후侯로 불린 것에서, 기자箕子조선朝鮮은 주 나라와 별개 국가로 후 관작을 내렸슴을 알 수 있고, 50개국에 희성 혈족들을 왕으로 분봉한 주나라 상황을 고려하면, 삼감의 난에서 공을 세운 미자 계는 송나라 분봉할 공이 있지만, 기자 서여는 아무것도 기여한 것이 없는데, 왕으로 분봉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둘째 조카인 중모 강康후侯가 관작명 대로라면 왕이 됐어야 정상인데, 기자의 신하가 됐습니다. 그 이유는, 기자箕子 본향 조선朝鮮=상商나라 랴오닝성 평양지역은 산맥으로 경계가 뚜렷한, 상商족 활동반경 영역이기 때문에 조카를 왕으로 세우면 지역 반발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망한 상商나라 왕족이기 때문에, 중원에 대한 반란하지 못하도록, 조카를 감시자로 보냈고, 기자箕子는 그 생각을 알고 건국 공신으로 임명하면서, 희姬성姓 강康씨氏는 주周족 혈통으로, 조선朝鮮 상商나라 혈통인 기자箕子 서여 혈통 신하로 천년간 가신으로 호의호식 잘 살면서 상商혈통인 한국인이 됐습니다. 옛날은 요즘처럼 민주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한번 귀족 가문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영원한 귀족 호족입니다. 강康후侯 글자가 새겨진 군권을 상징하는 부월이 출토된 사진을 본적있는데, 그것이 둘째 조카 강康후侯를 조선후로 봉하려다 조선朝鮮=상商왕족 기자箕子 홍범구주를 무왕에게 가르쳐 준 화해 제스처로 철회나 실패한 것일 수도 있고, 둘째 조카를 공신으로 임명하면서 타협한 것에서 기자를 조선후로 봉한것으로 와전 됐을 수도 있습니다.

군권 상징인 도끼 부월은, 상商왕 제신=주왕에게 주문왕이 유리성에 7년간 갇혀있다 가신들 도움으로 풀려난 후, 주나라 땅 일부를 바치며 의심을 피했을때, 상商나라 제주는 크게 기뻐하며 부월을 주문왕 서백 희창에게 하사한 바 있습니다. 주변 국을 토벌 할 수 있는 군권이 없었다면, 아무리 강태공이라 해도 주나라는 성장 할 수 없었고, 강康후侯 부월 출토 사진만 봤고 출토 위치가 궁금한데, 라오닝성 지역이라면, 둘째 조카 강康후侯를 조선후로 보냈다가 기자箕子 홍범구주 국가운영을 주 무왕에게 알려주며 마음을 돌렸을 수 있습니다. 중원을 장악한 주나라 무왕 심기를 건드릴 상황은 아니였으니까요, 기자 서여가 기자조선 시조가 됐다는 점에서, 어찌 됐든 중국시조 주나라와 별개 국가로 평화적 교류한 것으로, 분봉한 것과 개념이 전혀 다릅니다.

기자箕子조선朝鮮을 멸망시킨 위만衛滿이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이란 주장이 이곳에 있는데, 개념없는 주장으로 생각되는 것은, 주周족族인 위卫강康숙叔 첫째 아들 백모가 2대 군주로 이어간 위卫나라 위卫성姓과 위衛성姓은 동일한 문자로 옛 글자와 현대 글자일 뿐인, 성씨에서 주周족族인 것이 명백한데, 상商계통인 조선朝鮮 인이라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성姓씨氏는 사회 지도층 1~5%의 전유물로 대다수 한국인에겐 성씨가 없었지만, 역사가 대중을 중심으로 쓰는 것은 아닌, 국가 지도계층 중심으로 쓰여졌습니다. 신라 고려 조선 왕들이 하사한 성씨들도 있지만,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성씨들도 여러 역사서에 나타나는데, 한국 성씨 역사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비 상식적으로 생각되는, 성姓씨氏는 사람들이 가족 무리를 지어 살때부터, 한자가 발생한 상나라 갑골문자부터, 혈족을 표시하는 문자로 쓰여져 내려왔습니다. 국가 흥망성쇄에 따라 사회지도층 아닌 계층에서 성씨를 새로 갖는 경우도 있었지만, 수천년전 우리 조상 주 활동반경이 현재 지역이 아닌 압록강 북쪽 지역인 점에서, 그 지역 옥기시대 주류 세력인 조선朝鮮 상商족이 쓰던 갑골문자가 있는데, 몇몇 부족에서 글자가 없었다고 모두 부정할 순 없습니다.

대한韓민국 한韓민족,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뿌리를 삼한韓에 근거를 둔 국명으로, 기자箕子조선朝鮮은 위만에 망하고, 혈통이 끝난것이 아닌, 마지막왕 기箕준準은 1만 유민을 이끌고 해로를 따라 남하 마한韓을 세웠고, 나라를 새로 세웠으므로, 한韓준準, 기箕성姓한韓씨氏, 청주한韓씨氏 시조가 됐습니다. 그 청주한韓성姓에서 파생 된 것이 기奇황후, 기奇씨氏 일족이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몇일전 은퇴한 기성용奇誠庸입니다.

이런 혈통 계보는 조선=상나라 자子성姓에서 미자 계 송宋씨氏, 기자 서여 기箕씨氏, 기자 동생 선우鮮于씨氏, 기자 후손 청주 한韓씨氏, 청주한씨 후손 기奇씨氏, 연관된 성씨 Y 유전자를 가문 별로 진짜인지 확립 한 후, 대조해서 일치 될 때, 제 주장은 합리적이지만, 일치되지 않는다면, 사실적 근거 없는 허구가 될 겁니다.

대한민국은 절대 단일 민족이 아닙니다. 동북아 지역 여러 혈족이 함께 섞여 살면서, 속한 국가명이 무엇이든 가문 연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유전자 분포도를 보면 한중일 혈통은 3국에 섞여 살고 있고, 역사는 사회지도층 중심으로 쓴 역사, 일반 대중이 모두 그들 역사와 함께 한 것은 아닙니다. 기箕준準은 1만 유민을 이끌고 남하 마한韓을 세울 때, 천년 동안 피를 섞고 함께 살아온 그 지역 모든 대중과 함께 내려온 것은 아닌, 기자箕子조선朝鮮이 위만에 망할 즈음에, 그 주변 지역은 상(은)나라 달력을 쓰는 국가 체계를 갖춘 부여가 등장했고, 고구려가 흡수했습니다. 나라 이름은 계속 바뀌지만, 민중은 그지역에서 삶을 지속하고 있고, 권력을 갖은 지도층 혈족이 번성하고, 주周족 상商족 비율이 몇% 얼마나 되냐 문제, 유전자 지역 분포를 보면 50%를 넘는 혈족이 없는데, 단일 민족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모든 국가가 마찬가지로 섞여서 삽니다. 그토록 싫어하는 일본 왕조차 백제 혈통이라 말하는 마당에, 민중은 따질 필요도 없다 생각합니다.

역사를 정리하는데 있어선 국가 주관이 개입되면 사실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는, 주관을 뺀 합리적 사실로 생각되면 정리 정돈하면 그뿐입니다. 남녀 평등 관점에서 부계 혈통 역사인 가문과 국가 역사는 여권 비중이 커지면 커질수록,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모두가 한가족됩니다. 동북아 역사는 상족과 주족 경쟁하는 상황으로, 그 경계가 북경 주변 산맥, 요하문명은 그 밖으로 우리 조상 역사 무대로, 한 때 중국을 통치하다 주족에게 밀려난 상황이 현재까지 이어질 뿐으로, 한국에는 주족 계통 성씨가 적지않은 비중으로 살고 있습니다. 미자 계 송나라를 이엇으므로, 상족 계통 역시, 14억 중국 인구 규모에선 적은 규모지만, 500년간 중국을 통치한 만큼, 큰 규모의 민중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500년간 살다가 겨우 5천 유민만 평양으로 복귀했을뿐입니다.

기자箕子조선朝鮮 중국 제후국 역사가 아닌, 단군조선朝鮮 계통의 역사로 생각됩니다. 사서에서 나타나는 상商나라 생활상은 한민족 생활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요서 요동 요하지역 옥기시대 유물이 출토, 주족 중국 역사에 편입되는 마당에, 훨씬 후 시대인 삼한시대를 민족 뿌리로 규정하는 것은 동북아 주도권을 주족에게 내주는 일이됩니다. 동북아 조상 역사를 되찾아 오려면, 한韓민족이란 용어는 쓰지 말아야 하며, 수천년 된 조선朝鮮민족 용어를 써야하고, 기자箕子조선朝鮮은 부정이 아닌, 우리 혈통, 생활상 동일함 증명, 주족 중국과 별개 영역임을 증명하는 일이 더 필요합니다.

수백년, 그 이상 된 문중 세보를 어떻게 자세한 근거 내용도 없이 모두 허구로 부정 할 수 있습니까? 노비 개명 혼선있다해도, 확인하면 될 문제로, 100% 수긍 할 수 있는, 부정하기 위한 조건은 딱 한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바꿀 수 없는 가문 계보, 성씨 Y 유전자 확립 대조하는 것입니다.

기타 주장편집

기(箕)는 중국에 있는 지역, 상나라 역대 왕들 성(姓)은 자(子) 서여(胥餘)는 28대 광왕(匡王) 자탁(子托)의 아들이고,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삼촌이며, 기(箕)지역 봉건(封建) 족읍 왕족이다.

왕족 비간과 제후들이 주왕에게 죽는 것을 본 기자(箕子)는 미친 척하고 스스로 감옥에 갇혔고, 주 무왕이 역성 혁명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섰을 때, 감옥에서 풀려났고, 5천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본향인 단군조선(檀君朝鮮) 평양=랴오닝성으로 돌아 갔다.

주(周) 무왕(武王) 희(姬) 발(發)은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 동생인 강숙(康叔) 희(姬) 봉(封) 의 둘째 아들 중모(仲髦=아명)를 조선후(朝鮮侯), 강후(康侯)로 봉했다. 조선후(朝鮮侯)로 봉한 것이 기자(箕子)가 아닌 것은, 역성혁명에 공이 있는 공신도 아니고, 주 건국 초기 반란을 걱정하던 무왕은 상 유민을 이끌고, 중원 통제력 밖에 있는 랴오닝성에서 세력 키우는 것을 방치할 수 없고, 감시자를 붙이는 것이 상식, 중국과 한국 강씨(康氏)시조 강후(康侯)로 이름이 전해지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강(康)은 강숙 희 봉 최초 분봉국이고, 후(侯)는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5등급 중에서 2번째로, 강후(康侯)는 이름이 아닌 성姓과 관직명입니다. 백중숙계(伯仲叔季)는 외자 이름에 자녀 태어나는 순서대로 붙이는 아명입니다.

랴오닝성 지역은 중원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만리장성 지형 외곽 지역에 있는, 단군조선상나라 조선족 지역입니다. 기자조선 1대 왕은 기자 서여, 주 무왕이 봉한 강후가 아니며, 기자는 희(姬) 중모 강후(康侯)를 기자조선 공신으로 임명, 중원을 장악한 무왕과 반목하기 보단 타협했고, 독립적인 국가로 세월이 흐르면서 강(康)씨는 기(箕)씨와 군신 관계를 마한이 백제 온조에 망할 때까지 함께 했습니다.

주 무왕 사후 성왕 때, 상나라 제사를 모시라고 상나라 수도 조가에 주왕의 태자 무경을 봉할 때, 감시자로 함께 뒀던, 세째 관숙 선, 채숙 도, 곽숙 처가 무경과 결탁 삼감의난을 일으켰고, 성왕 섭정 네째 주공 단이 아홉째 강숙 봉과 함께 난을 평정 한 후, 반란 지역을 남북으로 나눴고, 남쪽은 상 왕족 무경의 숙부 미자 계를 송나라 분봉 상나라 제를 모시게 했고, 북쪽 수도 조가 지역은 위(卫)나라를 세워 강숙 희봉을 봉하면서 위강숙(衛康叔), 위후(卫侯)로 불렸으며, 강숙(康叔) 희(姬) 봉(封)의 첫째 아들 백모(伯髦=아명)는, 위衛나라 2대 군주가 됐다. 위(卫)는 옛 글자로 위衛와 같은 문자다.

랴오닝성이 단군조선 세력권 추정 할 수 있는 공통점은 박달나무 단(檀)군 한자에 있습니다.

가침 박달은 장미과에 속하는 작은 나무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베이징 및 랴오닝성 일대에 분포한다.

우연치곤 너무 여러 내용이 랴오닝성에 집중됩니다.

환桓인현, 지명, 환桓인, 환桓웅, 환桓 동일한 글자,요동 선양시로부터 200Km 떨어진 졸본 부여 오녀산성에 위치, 단군조선 이전 국가는 환桓국, 랴오닝성 외곽에 위치한 산악 지형이다.

<<제왕운기》는 《본기(本記)》를 인용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손녀와 신단수(神檀樹)의 신이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박달나무 단檀 나무 수樹 귀신 신神 랴오닝성 어딘가 박달나무 숲 마을에 사는 호족, 졸본 오녀산성 환桓 산악 지역에서 내려왔으니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다.

왕검(王儉)이란 글자가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동천왕 21년(247년)조이다.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하였을 때의 기록에 세주로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이 살던 곳(원문,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으로 등장한다. 인명(人名)으로 왕검이 등장하는 것은 이 기록이 최초이다. 인명이 아닌 경우 위만이 도읍하였던 고조선의 수도에 왕검 또는 왕험(王險)이 나타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선인 왕검에 대한 기록과 함께 선인 왕검이 왕이 되어 도읍한 곳이 왕험이라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중원 통제권 밖에 있던 랴오닝성은 BC 300년 연나라 진개가 고조선 침공 2000리는 현재 랴오닝성 전체 + 현재 평양 북쪽 지역 강, 만번한(滿番汗) 현재 청천강을 경계로 삼았다. 항우의 십팔제후왕 BC 206년 지도를 참고하면, BC 194년 중국 사람 위만(衛滿)이 반란 도읍하였던 곳은 현재 평양 지역이다. 왕검성은 왕이 머무는 성이란 단순한 뜻이고, 동천왕이 말했던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 아닌, 랴오닝성 어딘가에 있는 평양성이다. 평양은 넓고 평평한 지역을 뜻한다. 고구려 사람 동천왕이 선인 왕검이 살던 곳 평양이란 언급은, 랴오닝성 양평을 의미하고, 졸본부여 오녀산성은 산악 지역이라 해당되지 않고, 요하와 산악지형 경계 어딘가에 있는 평양을 뜻하는, 고조선 도읍지를 말하고 있다.

연나라 진개 침공전 기자조선 수도는 랴오닝성 평양, 침공 후 기자조선 수도는 현재 평양입니다.

환단고기에서 환국은 약 9,000년전 국가로 묘사되고 있고, 홍산문화유적은 BC 8,000~ BC 7,000년 경에 정주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원 국가들 기원 보다 훨씬 오래전에 랴오닝성과 유목 지역에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BC 600년경 스키타이족은 이란계 기마민족인데, 동북 3성은 물론 한반도까지 후손들이 살고 있는 것은, 환국에서 언급되는 북방 유목 국가 연합 형태 존재 가능성 높여준다. 흉노, 선비족 등 북방계가 한반도로 남하하게 된 이유는, BC 500년 경 소 빙하기가 있었고, 그 지역에 살던 기마 민족이 유럽과 한반도로 유입 됐답니다.

O1b2a2b-F940 유전자 분포는 동북 3성과 청주 지역에 분포 돼있고, 홍산문화 유적 지역에 집중 분포돼있다. 한반도에 가장 많이 분포돼있는 유전자는 O2b-M176 DNA, 한반도,동북 3성, 일본에 분포돼있고, O3a3c1-M117,C3*-M217, 주로 4가지 유전자로 형성돼있습니다. 제주도엔 슬라브 계열 N1c1-M178 유전자가 제주도 22.2%나 분포돼있습니다.

구석기 시대는 유목 생활과 여자 중심 모계 사회, 신석기 시대부터 빗살무늬 토기 곡물 출토, 마을이 형성 됐고, 농작물을 지키기 위한 부계 성씨 문중이 시작 됐다고 생각합니다.

환국, 단군 조선, 기자 조선 혈통은 크게 예(濊)와 맥(貊)이 있고, BC 300년 중국 연나라 진개 침공 때, 평양과 만주로 지리적 분리, 북쪽 호족들은 상나라 달력을 쓰는 부여 BC 300년 경부터 시작 됐고, BC 194년 위만 반란으로 기자조선이 망하면서, 기자조선 왕족과 대신들은 해로를 따라 한강 이남으로 남하 마한(馬韓)을 세웠습니다. 위만 조선이 망할 때까지, 부여 마한 위만 공존했고, 마한은 더 오랫동안 존재, 부여계인 백제 온조에 멸망하는데, 마한=청동기, 백제=철기 지역 유물 구분 가능할 겁니다..

혈족을 나타내는 성씨(姓氏) 문자는 나라를 창업하거나, 망할 때 바뀌고, 기자조선 마지막 왕 기준(箕準)은 마한(馬韓) 1대 왕 한준(韓準), 청주 한씨(韓氏) 시조가 됐고, 마한 8대 원왕 아들 우성(友誠)이 BC 17년 백제 온조에 망하면서 행주 기씨(奇氏) 가 됩니다.

위키 검색에서 단국檀國을 검색하면 검색결과에 단국이 검색되지 않는데, 단국檀國을 의미하는, 단국檀國대학교가 검색 결과에 나오는 것을 보면, 참 많은 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고, 한국 사람 단국檀國에 대한 생각 알 수 있는데, 중국의 역사는 전설로 생각되는 삼황오제기까지 표시하면서, 한국의 역사는 현실에서도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는 환국桓國과 단국檀國조차, 한국인이 쓰는 한글 위키 역사에 없는 것은 이상하지 않나요?

상나라 유물중 대표적인 것이 옥기와 제사를 지내는 청동기, 유물 출토, 상나라-기자조선-마한 이동 흐름과 연관성 있고, BC1122년~BC194년 기간 동안 BC 600년부터 스키타이, 흉노, 선비족 유입 있었고, 지금처럼 국경이 분명한 시대가 아니므로, 기마 민족과 농경 민족이 섞이는 과정은 기자조선 내에 있었고, 위만에 망하면서 부여계와 마한계로 지도층은 나뉘었지만, 공존하던 위만조선 겨우 연나라 1000명으로 반란, 대다수는 랴오닝성 지역에 살았습니다.

위키 자체적으로 등록 돼있는 내용과 사기 번역 본, 공신력있는 언론사 유물 관련 기사, 한씨 강씨 상계 조상 연표 종합한 내용인데 등록 안되는 이유는? 위키 정식 등록 결정 자체가 매우 비 민주적, 토론 과정 있다 해도, 의견 충돌 있는 경우, 과학적 합리적 '사실'근거 제시하면서 토론 거친 후, 등록이나 수정은 상반되는 내용 일정 기간 게시, 투표 과정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내 생각과 상반되는 주장에 '사실' 과학적 증거가 제시되면 받아 들이고 수정 할 수 있지만, 불 분명한 근거로 내가 본 자료들에서 추론 할 수 있는 흐름에 배치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답변편집

나는 상고하건대, 기자의 뒤를 이어온 임금에 대해서는 동사(東史)에서 전혀 상고할 수가 없는데, 새로 간행(刊行)된 행주 기씨(幸州奇氏)의 족보(族譜)에 의하면 기자 이후의 세서(世序)를 자세히 열록(列錄)하고는,“우리 기씨(奇氏)로 말하면, 호남(湖南) 광주(光州)에서 도랑을 파다가 비석(碑石)을 얻었는데, 거기에 기자 이후 기씨의 세계(世系)가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하였고, 기자의 후손(後孫)이 실국(失國)한 후에 다시 마한왕(馬韓王)이 되었던 그 이후의 세계도도 매우 자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마디 한마디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기에 지금 채록(采錄)한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실린 내용입니다. 대놓고 “땅 파다가 우연히 기씨 족보가 적힌 비석을 발견했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네요. 아무리 길게 잡아도 200년 정도밖에 안 되는 내용이라는 확실한 증거죠. 이런 걸 수천년 된 문중 역사라고 하면 창세기도 그대로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역사학은 사료 비판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기자조선은 혹독한 사료 비판을 넘지 못하는 과거의 신화일 뿐입니다.--Xakyntos (토론) 2019년 3월 28일 (목) 13:32 (KST)

--Tol6560 (토론) 2019년 3월 29일 (금) 15:46 (KST) 부계 유전자 Y 검사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유전자 검사로 확인 할 수 있는 문제들인데, 저는 어디서도 유전자 확인한 결과 기자조선 기씨가 한씨가 아니라는 연구 논문 본적 없습니다. 과학적 증거 없는, 전문가 주장은 일반인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행주기씨가 상계 발견 과정이 터무니 없는 얘기라 주장하려면, 그것을 증명할 유전자 조사 선행돼야 합니다.

제가 이 문제에 집착하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강씨인데, 문중 상계를 따라 올라가다보니, 동이 조선족도 아닌 중국 주족 주나라 후손인겁니다. 3420년이란 한국 정착 시간이 흘렀고, 한국인 구분을 속지주의가 아닌 속인주의를 하다보니, 개인으로선 충격 아닙니까? 민족이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닌, 다른 요소들이 포함된 불분명한 구분인데, 그것을 국가주의 개념으로 생각하니까, 과거 역사 '사실'에 근접 할 수 없는 것이고, 1년 내내 이 문제에 대한 연구 논문이나 유물 관련 기사 찾아 보게 됐는데, 문중 상계 조상 흐름과 기자조선 기씨 마한 한씨 왕조 흐름과 거의 비슷합니다. 관련 유물 발굴 기사 내용에서도 그런 흐름 유추 충분히 가능합니다.

역사 연구에서 국가주의가 배제돼야 하는 이유는,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서 결혼 출산하면 자녀는 한국인으로 대접받아야 정상인데 그렇지 못하고, 한국인은 미국인 시민권 얻기위해서, 미국 원정 출산하는 이중적 행동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엔 크게 4~5개 Y 부계 유전자가 공존하고 있고, 특정 유전자가 50%를 넘는 경우는 없습니다. 따라서, 누가 한국 역사 주류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단지, '사실' 확인이 필요하고, 기자조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조상 상계 흐름을 볼 때, 나 자신의 뿌리가 부정되고 있는 겁니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Tol6560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유전자 검사라는 것이 가능하려면 기자조선 기씨의 유전자가 무엇인지를 특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죠. 많은 사람들이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내심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로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동안 광범위하게 벌어진 족보 조작입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적어도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족보 하나 없던 평민이었다가 족보 조작을 통해서 양반 가문이 되었다는 사실은 대부분 중고등학교 교육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단지 자신은 그런 사례에서 벗어나 있다는 자위를 하고 있을 뿐이죠. 이런 상황에서 청주 한씨의 성씨를 쓰는 사람 중 과연 몇 %나 진짜 청주 한씨인지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근대의 족보 조작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죠. 족보 조작은 중고대에도 수없이 벌어졌거든요. 잘 알려진 사례 가운데 하나로 고려 태조 왕건의 족보가 있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은 무려 당나라 숙종 황제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말도 안되는 개뻥이죠. 게다가 이 거짓말은 원나라 때 중국의 학자가 대놓고 고려 왕한테 당나라 숙종이 언제 고려에 가서 아들을 낳을 수 있었겠냐?는 태클을 걸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같이 있던 고려 학자가 간신히 얼버무린 것이 숙종이 아니라 선종이다라는 것이었고, 중국 학자도 잘못했다가는 엄청난 외교적 스캔들이 될 수 있겠다 싶어서 대충 그렇군요 하고 넘어간 사건입니다. 보시다시피 고려라는 한 나라의 왕 족보조차도 조작한 사례가 떡하니 있습니다. 그럼 다른 족보에 적힌 상고시대까지 올라가는 시조가 진짜 그들의 시조인지 무슨 수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고유 성씨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조차도 정작 6~7세기 무렵에는 중국의 유명인 중에서 金이라는 글자를 쓰는 사람을 시조로 내세웠던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소호 금천씨와 투후 김일제가 바로 그것이죠. 중국과의 관계가 중요해지고 유교가 퍼지면서 가문을 높이는데 중국의 성현을 조상으로 조작해서 써먹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성씨 중 적어도 절반 이상이 족보에 중국인이 시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내용을 보면 거의 다 “삼국통일기 또는 신라 말의 혼란기 때 시조가 건너왔고, 이후 정확한 세계는 알려져 있지 않아 수백년 후 중시조로 이어진다”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조작해도 걸리지 않을 시대를 골라서 쓴 겁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청주 한씨를 비롯해서 기자에게 혈통을 이어 붙이고 있는 성씨들 대부분이 진짜 기자의 후손인지는 그야말로 하늘만이 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료비판이라는 겁니다. 뿌리를 찾고 싶어 하시는 Tol6560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그 뿌리는 이미 수백년 전부터 썩은 뿌리입니다. 찾는 방법 자체가 불가능하고, 찾아 봤자 전부 조작된 것이니 역사로 인정될 방법 자체가 없습니다.--Xakyntos (토론) 2019년 3월 30일 (토) 10:27 (KST)
"게다가 근대의 족보 조작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죠. 족보 조작은 중고대에도 수없이 벌어졌거든요. 잘 알려진 사례 가운데 하나로 고려 태조 왕건의 족보가 있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은 무려 당나라 숙종 황제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내용에 대해선, 저와 관련 있는 일이고, 개인적으로 살펴 본 내용은, 왕건王建 = 강건康建 ?? 문중 상계 계보에 떡하니 올라와있는 다른 외가 계통 왕씨 존재 때문에 성씨 계통 살피면서, 주나라 까지 거슬러 보게 됐습니다. 어떤 것이 옳은 예절인지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변하고, 옛 국가들 창업 과정을 보면, 호족 근거 없는 1인이 창업할 순 없습니다. 나라가 망해도, 문중 혈연 호족은 여전히 남아서 힘을 발휘합니다. 블로그 내용 보시면, 고려 태조 상계가 왜 그런지 이해가 될 겁니다. 물론, 이 생각은 공인된 생각은 아니지만, 제시하신 내용을 포함 위키 문서와 그시대 관련 역사 기사들 관련 내용을 찾아서 읽고, 문중 상계에 왜 왕씨가 올라와있는지 규명하는 과정으로, 최종 확인은 역시 왕씨와 문중 유전자 대조하는 방법밖엔 없습니다.

역사학자들 관련기사를 보면, 신라시대엔 근친이 창피한 일이 아니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도 왕 어머니도 왕인 귀족이 성골인가 진골 귀족 아닙니까? 가문 권력을 지키기 위한 방법인데, 처음엔 사로 6촌장 잘 됐겠지만, 아랫대로 내려가면 갈수록 근친은 일상화 됩니다. 신천강씨 상계 흐름을 보면, 기자조선-청주한씨- 온조에 멸망 조상 전사 한 후, 백제와 함께 했던 것이 아닌, 신라에서 관직을 했고, 진주에 집성촌이 있습니다. 여기 위키엔 고구려유민 성골장군 강호경으로 묘사되는데, 편년통록은 부정확한 얘기, 강씨는 마한이 백제에 멸망한 후, 신라로 이동 성골귀족 반열에 올랐고, 신라 김유신 고구려 정벌 때, 대장군으로 참가 북상하면서 북쪽에 호족 기반이 마련된 것으로, 평양 아래쪽 신천에 집성촌 있습니다. 고구려 유민 성골장군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 위키에 있는 겁니다. 신라 마지막 여왕이 숙부와 부부관계였고, 대왕으로 추승한 것은 신라시대엔 허물이 아니였고, 고려 초기 역시 다르지 않았지만, 고려-조선이 되면서 문화가 바뀌었죠? 주족 예법이 고려에 들어오면서, 평범한 일상이 허물이 됐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말하지 못하게 됐다 생각합니다. 이처럼 그시대엔 문서에 쓰지 못할 내용이 있고, 지금은 말할 수 있는 내용 있는데, 지금도 이 내용은 문중에서 욕먹을 만한 내용이지만, 성씨가 바뀌는 과정 원리와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창피한 내용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려목종 폐위에 강씨문중과 강조 장군 개입은, 문중 권력으로 생각했던 것이고, 천추태후, 김치양 TV 드라마는 논센스, 내 문중 권력에 다른 씨가 침범하는 것이 되고, 목종을 폐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문중 선택입니다. 강조 사후 강씨 집안은 역적으로 몰락하는 과정 있었고, 강씨는 몽고 침입 강화도 몽양 호종공신으로 문하시중 강지연 신성(신천)부원군에 봉해지면서 신천강씨 중시조 토착 호족이 됐습니다. 태조 이성계 두번째 부인이자 첫 왕비인 신덕왕후를 배출했고, 이 역시 공식 왕비인 중전에 오른것은 신덕왕후 강씨지만, 정비가 아닌 계비로 위키엔 표시하고 있고, 첫번째 부인 신의왕후는 중전에 올랐던적 없지만, 이방원에 의해서 정비로 사후 추승된 것입니다. 사사로운 문중 표현이라면, 본처 후처 표현할 필요 있지만, 국가 공인 왕비를 논하는데, 왕실 많은 후궁들도 존재 할텐데, 왕비로 책봉되지 않은 사람을 정비로 표현하는 것은 논센스, 조선 첫 왕비는 신덕왕후입니다. 두번째 부인이 첫번째 부인을 제치고 첫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기본은 신천강씨 호족이 기반이고, 첫번째 부인 아들인 이방원 왕자의 난 때, 신천강씨 몰락 과정에서, 제주도 까지 강씨 집성촌 남기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성씨 호족은 국가 흥망성쇄에서 뺄 수 없는 상관 관계가 존재하고, 족보 조작이 모든 가문에 이뤄진 것은 아니며, 신천 강씨는 한국사 곳곳에서 나타나는 역사적 기반 있는 호족입니다.

왜 성씨 유전자 특정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생각하세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안하고 있는 것이고, 중국에선 활발하게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한국 법은 애매모호하지만, 암 조기 진단 관련 유전자 검사하면서 비용 추가하면 성씨 유전자 계통도 먼저 확인된 사람들과 분류 초기 단계로 알고 있습니다. Y DNA 하플로그룹 트리국제적으로 Y DNA 흐름 연구하고 있고, 분자 인류학 논단까페 미미하지만 조금씩 문중 유전자 확립 과정 중에 있습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확인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또, 조상이 노비였다 해도 그것은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성씨 문중과 국가 흥망성쇄 연관 관계를 살피다 보면, 나라가 서고 망하는 것은 흔한 일로, 수천년 과정에서, 조상은 왕족이기도 하고, 노비일 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세종 때 장영실, 노비 출신 아닙니까? 그런데, 장씨 글자를 보니 희성 장씨로, 주족 황실 성씨인 희씨에서 파생된 글자와 같습니다. 겨우 500년에 불과한 조선 시대에 노비였다 해서, 그 이전 조상들이 모두 노비 인종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Tol6560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장삼이사라는 말이 뭔지 아세요? 글자만 같다고 다 같은 성씨인 것이 아니고, 족보는 애초에 신뢰할만한 사료 자체가 아닙니다. 심지어 왕실의 족보조차도 조작한 부분이 떡하니 확인되는 마당에 귀하의 가문 족보는 무슨 수로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요? 그러니 아무 의미없는 말씀은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토론에 장문의 글을 남겨봤자 아무도 안 읽고, 아무런 의미도, 영향력도 없습니다.--Xakyntos (토론) 2019년 3월 30일 (토) 21:33 (KST)


내가 현장에서 직접 보지않은 사실을 보는 방법은, 현재는 기자가 쓰는 기사, 과거는 역사학자가 쓰는 역사인데, 전달자인 기자와 역사학자가 사실을 정확히 쓰면 문제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사실을 전달 받아야 할 최종 독자가 사실을 알기 위해선 현재는 기자와 함께 사는 시대고 현장에 있었을 경우 오류를 알 수 있지만, 역사는 현재처럼 확실한 CCTV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학자가 제시하는 내용은 참고만 해야 하는 겁니다. 다양한 증거와 논리로 주장하는 역사 학자가 있고, 독자는 역사학자가 제시하는 사실을, 시대 상황과 시간 흐름에 따라 퍼즐 맞추면서 사실에 접근합니다. 독자인 내가 맞춰 온 주변 퍼즐에 딱 맞는 퍼즐이 아니라면, 기자나 역사학자가 제시한 사실 증거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CCTV처럼 확실한 증거가 아닐 경우, 많은 추론이 개입되는 것이 역사학자들이 제시하는 증거들로, 대다수는 맞겠지만, 논란 여지가 있는 사실 증거들을 확정할 때, 단 1% 논란도 없어야 딱 맞는 퍼즐이지만 99%면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죠? 인정하던 안하던,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고, 1%나 99%나 확실하지 않기는 동일한데, 단지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삭제한다면, 오류가 발생했을 때, 아무도 진실을 찾아내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말씀하신 족보에 대한 내용은 해당 되는 족보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족보도 존재하고 있고, 족보는 Y유전자 혈통계보를 쓴 역사기 때문에, 위조된 족보는 Y유전자 대조로 검증 할 수 있습니다.

성에서 씨로 바뀌는 수천년간 써온 성씨 시스템 있고, 한자 뿌리 갑골문자 발생은 우리가 알고 싶은 5천년 역사와 연대가 거의 비슷하고, 성씨=혈족명=지역명=국가명 많은 결과 흔적 사실 증거들이 넘치는데, 검증 가능한 증거를 위조로 치부 버리는 것은 퍼즐 맞추는 독자 자세가 아닙니다.

성씨는 다른 글자로 바뀌는 과정 있고, 당연히 글자만 같다고 같은 혈통 성씨는 아니며, 다른 글자를 쓴다고 혈통이 다른 것도 아닙니다. 같은 글자를 쓰는 이씨만해도 본관은 문헌에 546본이 전해지나 현존하는 본관은 276본이나 존재합니다. 글자가 같더라도 본관이 다르면 다른 혈통이고, 우리가 아는 조선왕실 전주 이씨는 그중 일부일 뿐입니다. 검증 과정이 필요할 뿐이지, 전체 중 일부 위조가 있다 해서 모두 무시해야 할 내용이 아닙니다.

성씨 시스템이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이유는, 나라를 세우거나 망할 때 성에서 씨로 바뀌고, 수천년 역사에서 나라가 새로 서고, 망하는 과정은 문중 혈통 역사에서 몇번 안되고, 바뀐 글자 몇 개 외우는 것은 힘든 일 아닙니다. 자기 조상 혈통 숙지 후손에게 전달하는 것은 어려운 과정 아니고, 유태인은 탈무드도 문서없이 외우고 전달한다는데, 제 성씨 문자는 4천년 동안 단 2개, 계통 조상 수는 128명, 유태인 생각하면 정말 쉬운 것이 족보 관리입니다. 책이 더러운 물에 젖었다고 내용이 안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는 남자들 중심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바뀌지 않는 Y유전자=성씨족보=왕실=국가 뗄레야 뗄 수 없는 상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일부 오류로 전체를 무시 할 수 없습니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Tol6560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이미 위에 서술했던 것들이면 충분히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족보는 사료적 가치가 하나도 없다고 판단하기에 충분합니다. 대놓고 땅을 팠더니 기자조선의 계보가 적힌 비석이 나왔다는 사기를 치는 모습을 보고도 족보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조상 혈통 숙지 후손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요. 사법시험 합격하거나 돈 많이 벌어서 재벌이 되면 어느날 갑자기 없던 대동회가 생기고 갑자기 뿌리 깊은 양반댁 후손으로 조작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 솔직히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현대에도 이모양인데, 천 년 전의 보학은 어떠했을지 안봐도 비디오네요. 상황이 이런데 유전자 검사라는 것이 대체 무슨 수로 가능할까요?
귀하가 아무리 족보를 근거로 독자 연구를 해도 위키백과에서는 단 하나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기 토론 문서에 아무리 장문의 글을 남겨봤자 아무 쓸모도 없어요. 귀하가 열심히 연구해서 대한민국 역사학자들 대다수를 설득하고 중요한 학설로서 연구될 수 있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위키백과에 실릴 가치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 시간 낭비 마시고 학문의 장으로 가서 더 공부하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Xakyntos (토론) 2019년 4월 3일 (수) 13:41 (KST)
제가 강씨 족보에 표시된 다른 혈통 왕씨 때문에 의문을 갖고 연관되는 성씨에서 파생되는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고 시작하게 됐지, 족보만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며, Xakyntos님이 말씀하시는 내용도 불분명한 요소들이 많이 포함된 설명들을 하고 있는 부분 동일하게 있습니다. 문중 족보에 대해서 논하면서 문중에서 욕까지 먹어가면서 사실에 접근하려 많은 자료를 찾아 보며, 정리하고 있는데, 여러 내용중 단지 족보를 근거로 주장한다 생각하는 것 자체도 일부분만 보는 것입니다. Y DNA 하플로그룹 트리이것이 독자 연구입니까? 초기 단계라 많은 시간 필요하지만, 분자 인류학 논단 이런 자료 내용이 충분히 축척되면 얼마든지 유적에서 함께 발굴되는 인골 유전자와 과학적 성씨 계통도 작성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 자료를 보면서 역사 모자이크 맞추는 과정에 족보는 일부분 검증돼야 할 참고사항 일 뿐, 반드시 버려야 할 허위 고정된 개념이 아닙니다.--Tol6560 (토론) 2019년 4월 3일 (수) 14:29 (KST)
위키백과는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연구는 다른 곳에 가서 하십시오. 학술적으로 공인된 곳을 통해 발표되고 학계의 논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상 이런 토론 페이지에서 아무리 말씀하셔봤자 아무 쓸모 없습니다.--Xakyntos (토론) 2019년 4월 4일 (목) 13:57 (KST)
연구 성과를 발표한 것이 뭐가 있나요? 토론에 언급한 왕씨 내용을 이곳에 쓴 것이 아닌, 그것 때문에 관심 갖고 시작했다는 것이고,

위키 백과에 나오는 내용을 바탕으로 관련 내용 내부 링크 거는 것이 어떻게 개인 연구입니까? BC 300년 연나라 진개가 고조선을 침공 만번한=청천강 북쪽까지 점령했다는 위키 내용 있는데, 그 내용과 위키에 실린 BC500년 캠프리지대학 중국문화사 책에 실린 지도에 보면 중국 연나라는 만리장성까지, 요서는 서주시대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한자 평양 한글 뜻은 넓고 평평한 땅이란 뜻이고, 양평으로도 쓰고, 요동성이 전한, 삼국시대 양평으로 불렸습니다. 위만 조선이 망할 때 사마천이 사기를 썼고,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낙랑 세운곳에 조선현으로 표시했지 평양으로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위키 내용을 종합하면, 1.기자가 동쪽으로 가서 정착한 곳 평양은 현재 요양시다. 2. BC 300년 연나라 진개 침공시 점령한 곳이 북경에서 2000리 청천강 북쪽인 만번한, 따라서 요하지역을 모두 잃었는데 망하진 않았고, 위만 조선에 망할 때 위치가 현재 평양이라면, 당연히 연나라 진개 침공 BC300 년경 요하 요동성 평양에서 침공후 현재 평양으로 이전하는 것은 상식입니다. 위키 자체에 써있는 내용 시공간 개념 흐름이 그렇게 써있는데, 다른 곳에는 그렇게 써놓고, 여기만 역사서 어쩌구 저쩌구 하면, 읽는 독자는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위키 관연 단어들 링크 찾아서 쭉 읽어 보고 개인 연구 언급하는 것이 맞습니다. 제가 무슨 과학자도 아니고, 연구 자료 도구가 위키 그 자체입니다. 위키는 구글에서 제공하는 것이고, 제가 활용하는 도구들은 위키에서 제공하는 한자와 중국어 지명, 구글어스 지명 위치 확인, 관련 연관 검색어 위키 설명 확인 후, 연도별 위키 지도 확인했는데, 어떻게 개인 연구입니까? 한자 뜻 평양 양평 같은 글자 위키에서 확인했는데 그것이 개인 연구입니까? 그것은 상식입니다. 제가 본 내용 95%이상 위키에서 본 내용과 한자 뜻 확인한 내용, 구글 어스 지리 확인하면서 본 내용입니다.

상나라를 중국 상나라로 표시했는데, 동북아 지역에서 옛 국가들은 중국 조상일수도 있고, 일본 조상일수도 있고, 한국 조상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부르던간에 그렇고, 위키에 쓰여진 내용 흐름과 유물 발굴 기사, 관련 내용을 보면, 상나라가 요하지역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상식적입니다. 요하지역은 BC500년 지도에서 알수있듯이, 중국인 머리 밖에 있던 지역이고, 그곳엔 이족들 역사는 있어도 중국 역사가 존재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그곳에 하나라를 뜻하는 샤자뎬 하층문화 명명했습니다. 하층문화 정보는 중국 땅 밖이고, 유목계통 흔적 아니므로, 출토 유물 내용을 보면 우리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상나라 망할 때 수도 은허 유적과 공통점을 보면 상나라가 요하에서 시작됐다는 것은 중국이나 우리 상식입니다. 그것을 왜 중국 상나라로 부릅니까? 중국 사람이 동쪽에 해뜨는 곳이란 뜻인 조선이라 부르니까, 조선으로 부른 것처럼, 중국 사람이 동북공정 연구 해놓은 것 바탕으로, 또 따라서 하고 있는 겁니다. 홍산문화유적 상층문화가 유목흔적 있고, 그 지역에 나중에 유목 국가들이 세워졌으니 유목부족 지역으로 착각 할 수 있고, 하층문화가 용산문화하고 비슷해서 중국문화란 얘기 맞지 않는 것은, 중국 주나라 주족 발상지가 화북 지역 아닌 화남(황하 아래) 서쪽 지역, 오르도스, 홍산문화 요하는 화북(황하북쪽), 주족이 오르도스에서 장안성 서북쪽 기산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동쪽 요하하곤 아무 상관 없습니다. 하나라는 황하 유역에 있던 좁은 개념 중국, 북경 위쪽 산맥 만리장성 끝 지형적으로 요하와 분리되는 것 위성지도에서 보면 알 수 있고, 내몽고 유목 지역과도 낮은 산맥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지역이고, 요하 상류 지역에 있는 것이 홍산문화 유적으로, 상나라와 이전 국가들은 지형적으로 요하 전 지역에 걸쳐 존재 할수밖에 없습니다. 위키 내용에 한국 조상은 예맥족으로 구성돼있고, 예족=상나라=기자조선=동예=마한=서주시대송나라, 맥족=고리국=부여계=옥저=고구려=백제, 신라왕족 유전자는 다릅니다. 이것이 위키에 나와있는 내용들과 한국인 유전자 분포 유사성에서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상왕족인 미자 계가 중원 남쪽 송나라에 봉해졌고, 그지역에 한국인과 같은 유전자가 분포해있는 것이 우연은 아닐겁니다.

'중국 상나라' 에서 중국 빼고 그냥 누구 조상인지 표시 없는 '상나라' 로 표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 조상이 아닌 우리 조상일지도 모르는데, 아예 배제하고 생각하게 되고, 상나라 왕족이 본향인 요하 동쪽으로 온 사실을 중국 사람이 왔다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착각하면, 주 무왕이 조선에 봉했다는 사대주의 반감 주관 작용, 사실적 요소를 배제하게 되는 것이, 한국 주관 담은 역사서들입니다. 그러니까 위만 조선, 위만 한자를 보면, 당연히 희성위씨 명백한 중국 사람인데, 조선 출신이란 헛소리까지 하는 겁니다. 중국사람들 선조인 주문왕 아들 위강숙 후손 위만, 위씨에 대해선 위키 자체에 나와있는 것으로 개인 연구가 아닙니다. 위키 아닌 자료라 해봐야, 네이버 사기 번역 본, 학술 자료들 정도? 가침박달나무가 뭔지 모르니까 구글 검색해서 확인하는 정도? 성씨 상계가 위조란 얘기가 있으니까, 과학적 검증하고 있는 유전자 성씨 분류 흐름 같은지 확인하는 것이 개인 연구입니까? 조선시대에는 절대 할 수 없는 검증이고, 조선시대 학자들이 잘못 기술한 것 까지 수정 없이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고조선을 3조선으로 구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위만 성씨에서 증명되는 것으로, 우리가 고대 국가를 논하는 것은 가장 힘쎈 호족인 왕 씨족을 기준으로 말하지 그 밑에 통치 받는 백성이 누군지 생각하진 않고, 중국사람 위만이 한무제 말 듣지 않다 정벌 당하면서 한 4군현 설치됐고, 장기간 점령했지만, 고구려에 의해서 요하까지 완전 수복 됐습니다. 전조선=단국檀國, 상국商國, 후조선=기국箕國 구분이 맞고, 후조선 요하 왕검성이 연나라 진개 침공으로 왕검성을 현재 평양으로 이전 후, 위만에 점령 당하면서 예족은 동예, 마한 목지국으로 나뉜 겁니다. 요하 지역엔 상민商民정책 피해 온 많은 씨족들이 분포했고, 규모가 큰 그 씨족 호칭을 후대 사람들은 별개 국가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후조선 예족과 맥족이 언제 부터 함께 했는진 불분명하지만, 고리국-부여계는 주로 요하 남쪽과 동쪽 산악지형 길림성-쑹화강 유역에 분포했고, 연해주같은 더 북쪽 지역에 있었던 편발했던 숙신이 겨울엔 동굴 여름엔 나무 위 원시 생활, 문자가 없었던 반면, 부여계는 상나라 달력을 쓰는 등 예족과 같은 문명,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후조선 예맥은 요즘 같은 완벽한 국가가 아닌, 씨족 연합체 부족 형태 국가로, 기자가 상나라 유민 5,000명 이끌고 요하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는, 자성기씨 소종 자기 문중 사람들 데리고 요하로 왔다는 뜻입니다. 요즘엔 1인 가구 시대라 5,000명 한가족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주문왕 아들이 18명입니다. 성씨 씨족 5,000명 되는 것은 금방이고, 상나라 왕족인 기자는 자성기씨 문중 적장자 종손으로 자기 가문 데리고 요하 난민 발생했던 것, 삼감의 난 발생 후, 주나라는 반란 평정후 상나라 유민을 중국 각지에 노예로 나눠 보내는 상민商民정책 실시했고, 그것을 피해서 기자가 먼저 정착해있던 요하로 상나라 유민 대규모 이동하면서 기자조선이 형성된, 상나라는 기본적으로 대종 소종 문중 중심, 씨족 국가입니다. 대종=자성=왕=조상제사 모시는 사제, 대읍, 소종=기씨=제후 형태로, 주족 희성혈족을 다른 지역에 왕으로 분봉한 주나라와 전혀 다릅니다. 집성촌을 형성하고 요하에 살았기 때문에, 왕 개념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생긴 것이고, 사기를 쓴 사마천은 거의 천년이나 지난 위만 조선 망할 때, 쓴 것으로, 국가 형태나 시기가 전혀 다른, 한나라 중국 관점에서 조선기자로 이름 붙였을 뿐입니다. 예맥, 부여계와 통합되는 과정은 오랜 시간 이웃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우키 내용 참고하면 최소 300년 이상 교류한 것입니다.

?--Tol6560 (토론) 2019년 4월 16일 (화) 05:21 (KST)

1. “위키 관연 단어들 링크 찾아서 쭉 읽어 보고 개인 연구 언급하는 것”이런 것을 두고 독자연구라고 합니다. 위키백과는 공인된 출처를 통해 검증되는 것만을 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에 써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위키에 실린 내용을 토대로 스스로 추론하는 행동 자체가 독자연구입니다. 말씀하신 내용이 무슨 말인지도 알아듣기 어렵긴 합니다만, 그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위키에 쓰여진 내용 흐름과 유물 발굴 기사, 관련 내용을 보면, 상나라가 요하지역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상식적입니다.
2. 정작 위키의 상나라 항목에는 요하 지역은 언급조차 없고, 그나마 언급되는 것도 일설로, 심지어 건국 이전 신화적인 수준의 시조인 설 때의 도읍지로 겨우 언급되는 게 다입니다. 게다가 지역 역시 요하 유역과 거리가 멀죠. 역사학계의 공통된 의견 역시 상나라는 요하 유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중국의 룽산 문화를 비롯한 황하 유역의 문화권에서 성장한 나라로 봅니다. 즉, 전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스스로의 상식부터 점검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Xakyntos (토론) 2019년 4월 16일 (화) 12:55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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