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순신/보존문서1

활성화된 토론

이의제기

제발 백과사전 그대로 베껴오지 마세요... 이곳은 자유로운 백과사전을 만들어 나가는 곳이지 다른 사람들이 힘들게 만들어놓은 백과사전을 도둑질하는 곳이 아닙니다. -- 사용자:222.99.25.122

승리하고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연구에서 전사하지 않고 생존하여 전장을 떠났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

란 내용에 대해 들은 바가 없어서 일단 전사한 것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장난인 것 같아서요. xAOs 2006년 6월 11일 (일) 21:26 (KST)

211.221.129.35님의 편집 모욕당한 대영웅 삭제함

211.221.129.35님의 편집 모욕당한 대영웅 부분을 삭제하였습니다. 적절한 내용이 아닌 개인적인 수필형식으로 쓰여졌고 객관적인 서술의 형태를 띄지 않았기 때문이며 감정적인 언사로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히려 이순신 장군을 설명하는데 있어 부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Alfpooh 2007년 4월 13일 (금) 13:02 (KST)

추가로 211.221.129.35님. 회사에서 업무를 하라고 주어진 컴퓨터로 이런 작업을 하시다뇨... 자신의 생업에 대해 굉장히 소흘하시네요~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에 있는 (주)KT의 회사소유 컴퓨터입니다.

삼도수군통제사

글에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무신의 최고 지위라고 써 놓으셨는데, 실제로 삼도수군통제사는 종2품으로 휘하에 충청수영,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경상좌수영, 경상우수영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는 수군의 최고지휘권자로 도체찰사(정1품 :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있었습니다. 권율이 도원수(정2품)로서 육군 총지휘권을 행사할 당시 조정에서도 도원수가 삼도수군통제사를 지휘할 권한이 있는가를 놓고 의견이 매우 분분했었는데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었던 당시에는 잠잠하다가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후로 표면에 불거졌습니다. 출전에 반대하는 원균을 불러다놓고 곤장을 때려 출전시킨 일을 봐도 공식적으로는 도원수가 통제사를 지휘하나 실제로 수군의 운용은 통제사에게 일임하는 식으로 진행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임란 이후의 상황은 잘... ;;) 그 부분만 약간 수정하겠습니다 ^^ 147.46.158.43 2007년 5월 3일 (금) 19:29 (KST)

이순신 장군 조부의 기묘사화 연관 관련

"(그러나, 선조[이균, 하성군]시기에서는 기묘사화의 희생자가 대접받는 시기에서도 유성룡의 이순신 기록에서는 이와 같은 사례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띄우기를 위해서는 이 기록이 반드시 들어가야 할 텐데 기묘사화 연루는 거짓이라는 주장이 된다.)" 이 부분이 218.155.206.220 IP 사용자에 의해 첨가되었습니다. 이외에; "거기에 선조는 그동안 탄압정책에도 물러서지 않는 사실에 자신을 견제할 인물이 이순신이라는 것을 알고 더더욱 압박을 가했다" "제멋대로 항해를 하다가 공격받을 틈을 보이게 된 것을 발견한"을 추가 하였는데 이는 출처가 불분명하고 말의 의미가 분명치 않으며 또한 가필한 사용자 자신의 의견인듯 합니다. 따라서 삭제를 제안합니다. --Alfpooh 2007년 5월 10일 (목) 01:03 (KST)

연화도사와 자운선사

출처가 불확실하고 내용도 좀 황당합니다. 위키백과에 어울리지 않는듯 합니다. 다른 학술적 근거가 제시되던가 아니면 삭제해야할 부분입니다. 단순히 어느 홈페이지의 링크를 건다고 출처와 사실 증명은 되지 않습니다.--Alfpooh 2007년 9월 16일 (일) 11:19 (KST)

원문 읽어는 보셨나요? 그거 좀 많을텐데요. 그 출처도 불확실합니까?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 WonYong (토론기여총편집횟수로그e-Mail) 2007년 9월 16일 (일) 11:45 (KST)
이것은 정식적인 기록이 아니고 75년의 향토지에 나온 기록은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전설.설화의 기록이므로 이순신 문서의 내용으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원문은 전승되는 전설.설화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역사와 설화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일단 삭제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설.설화는 다른 가치가 있을 수 있으므로 따로 문서를 만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은 이순신과 관련된 전설,설화 목록을 따로 만들어 보는 것을 권합니다. 감사합니다.--Alfpooh 2007년 9월 16일 (일) 12:50 (KST)
몇시간 들여서 정성들여 써놨더니, 싹 삭제하면서 본문 글보다 적은 토론에 출처도 없는 개인 생각 하나에 컨센서스네 여러 사용자 의견도 없이 그냥 싹 1초만에 삭제하는군요. 전설 설화면 그렇게 좀 문구를 고쳐서 살려놓던가 하지, 아주 쉽게 그냥 싹 지웠군요? 성의가 없습니다. -- WonYong (토론기여총편집횟수로그e-Mail) 2007년 9월 16일 (일) 16:22 (KST)
죄송합니다만 그부분인 이순신 문서에 실릴 만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나 전승되는 설화로서는 흥미로우니 따로 만들어 보심이 어떨까요? 다시한번 말씀드리자면 전승된 설화나 이야기는 이 문서에 적합하지 않습니다.--Alfpooh 2007년 9월 16일 (일) 19:37 (KST)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불분명합니다. 참고 문헌·출처 등을 각주로 표기해 주시기 바랍니다.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의심받을 수 있으며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이 문서앞에 이런 경고문이 있습니다. 이 문서는 개인적으로도 특별히 주시하는 문서입니다. --Alfpooh 2007년 9월 16일 (일) 19:40 (KST)

이순신장군과 관련된 전승되는 설화나 야사등을 따로 문서로 묶어 만드는 것을 제안합니다.--Alfpooh 2007년 9월 16일 (일) 20:14 (KST)

뭐, 제안을 하지말고 님이 만드시던가요. 삭제는 매우 간단합니다. 클릭만 한두번 하면 될 걸요? 만드는 건 어렵지요. 어려운 건 남이 해라. 난 막 지운다. 글쎼요. 뭐 옮기던 거기 놔두던 여하튼 삭제는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삭제되야 하는 이유가 삭제 정책에 부합해야 삭제가 가능하겠죠. 난 처음 듣는다. 삭제다? 그건 수긍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살다 보면 처음 듣는 이야기야 많겠죠. 만분야 박사학위 딴 것도 아닌데요. -- WonYong (토론기여총편집횟수로그e-Mail) 2007년 9월 16일 (일) 20:27 (KST)
충분히 이해 합니다. 저의 기여목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기본적으로 삭제에 대해 대단히 신중해야한다는게 저의 입장입니다. 처음 듣는 내용이라고 지우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추가 하신 내용은 역사적 서술이 아닌 전승되는 설화,이야기,전설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본 이순신 문서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또한 서술에 있어 불교적 입장과 시각으로 설명함으로서 중립성에도 부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 추가한 내용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Alfpooh 기여2007년 9월 16일 (일) 20:31 (KST)
"이순신"에 대한 페이지에서는 적절치 않은 내용입니다. 적절한 제목의 다른 페이지로 만든 다음 "이순신에 대해 이런 설화도 있다" 하는 식으로 링크를 거는 것이 낫겠습니다. Atreyu 2007년 10월 1일 (월) 14:25 (KST)

승리의 비결?

아래의 내용은 독자 연구 아닐까요?

이순신은 항상 지형과 해로, 그리고 적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싸웠다. 또 그렇게 되도록 상황을 만들어나갔다. 이순신의 23전 23승은 그렇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출전하지 않은 칠천량 해전에서 단 1번 이순신처럼 하여 승리했을 뿐이었다. 언제나 주도 면밀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분석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칠천량에서 조선해군이 홀라당 다 타버린 다음 남은 배 열세 척으로 적을 무찌른 것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싸웠다"에 부합하는 내용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게다가 "지형과 해로, 적정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원하는 곳에서" 싸우는 것은 이순신이 아니라도 모슨 군사령관의 목표 아닙니까? 그걸 얼마나 잘 했느냐 못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이순신이 승리한 원인으로 이런 것을 드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충분한 근거 자료가 없는 이상 "잘했으니까 잘했다"라는 동어 반복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Atreyu 2007년 10월 1일 (월) 14:23 (KST)

일단 본문에서 제거했습니다. 적절한 레퍼런스를 발견하는 분이 계시다면 도로 넣어주시길... Atreyu 2007년 10월 4일 (목) 12:51 (KST)

일본어 위키백과의 기술내용 참조에 대해서

일본어 위키백과의 의견을 참고자료등의 제시없이 올려놓은 부분을 삭제했습니다. 일부,문장의 의미가 불분명한 기계번역이 의심되는 문구도 발견되었구요. 일본어 위키백과를 이용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한국관련 문서들은 대부분 심각하게 NPOV가 훼손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기사내용을 곧이 곧대로 신용,인용해서는 안됩니다. 이순신에 대한 편집도 현재 반복되는 문서훼손등으로 편집금지가 되어 있는 상태이고,이순신에 대해"비무장 수송선만을 골라 기습하여 전공을 올렸을 뿐이다"라는 내용이 버젓이 실려 있습니다. 물론 일본어판을 제외하고는 어느 언어판에도 존재하지 않는 실존사료를 무시한 괴설입니다. 토론등을 보면, 혐한 일본인들이 기본적인 증거나 사료제시도 없이 맞다고 우기면서 인신공격하는 가관이 연출됩니다. 민감한 역사나 정치문서뿐 아니라 일반적인 문서조차도 이런 경우가 한 두건이 아닙니다. 가끔 한국인의 상식으로 믿기 힘든, 악의적이고 황당한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는 문헌을 검색(일본국회도서관)등으로 살펴보면 존재하지 않는 허위문헌인 사례도 있습니다. 꼭 이순신의 일본해군보급차단 관련 일본측 주장을 실어야 한다면,적어도 인용자료-문헌-가 있는가를 반드시 살펴보고 주장했다는 학자의 실존여부, 정치성향, 책의 존재여부등을 꼼꼼히 확인한 후에 싣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Noropdoropi 2007년 10월 13일 (토) 06:29 (KST)

"사후 전 세계의 평가"

"사후 전 세계의 평가"부분이 엉망입니다. 어법도 안맞고 뒤죽박죽 섞인 리퍼런스가 엉킨 상태이고 관점 조차 일본의 입장등이 섞여 있습니다. 이런식의 찬양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본문서에 적당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단 삭제합니다만 재정리후 추가 해야 할것입니다.--Alfpooh 2007년 10월 28일 (일) 12:48 (KST)

다음이 삭제한 부분입니다.--Alfpooh 2007년 10월 28일 (일) 12:52 (KST)

←사후 전 세계의 평가 이순신은 포격전이 일상이 된 20세기에서 해군 강대국이었던 일본[1] [2][3], 영국, 미국의 대제독들에게 격찬을 받았다. 1921년 이순신에 관한 책을 펴낸 영국의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은 공정한 심판관이라면 이 인물을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에 올라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4] 그리고, 미 해군을 세계 유일의 절대적 종합군으로 만든 선각자인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미드웨이 해전을 승전으로 이끈 이후, 350년 만에 일본해군을 대파한 기록을 갖게 되었다며, 우회적으로 조선 수군, 좀 더 자세히는 이순신을 존경하는 입장을 밝혔고,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라는 말을 남겼다.[출처 필요]→

출처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확인된 몇개의 경우를 제외하고 삭제 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Ph (토론) 2009년 7월 15일 (수) 16:21 (KST)

생애에 대한 내용

이순신 장군의 생애에 관련된 내용은 전기문이라기 보다는 소설에 가깝습니다. 주관적인 판단이 들어간 부분은 과감히 삭제해도 될까요 ...? jtm71 2008년 2월 22일 (금) 21:19 (KST)

충분히 그럴만도 합니다. 부분 삭제 합시다. --Nt (토론) 2008년 2월 22일 (금) 21:40 (KST)
편집을 시작해 보았습니다. 빠진 부분이 많고 지나친 미화나 감정적 서술은 배제하였습니다.--Alfpooh 2008년 2월 23일 (토) 09:36 (KST)

노량진 앞바다

이순신 장군이 사망한 곳은 노량진 앞바다가 아닌 노량 앞바다가 아닌가요 샤아 (토론) 2008년 10월 30일 (목) 20:52 (KST)

거기서 거기입니다. 노량 앞바다의 노량진 앞입니다. 엎어치나 메치나 같은 곳입니다. --Knight2000 (토론) 2009년 1월 2일 (금) 14:13 (KST)
그래도 백과사전인데 용어선택을 주의해야할필여가있씁니다... --218.154.170.174 (토론) 2009년 2월 25일 (수) 16:17 (KST)

원균 관련 기술.

일방적으로 이순신에게 유리한 내용만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현재 조금씩 반론이 나오고 있으니 반론도 실어 주었으면 합니다. --Knight2000 (토론) 2009년 1월 2일 (금) 14:14 (KST)

쓸데없는 표식을 남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립성이든 출처여부든 필요한 부분에만 콕 찍어서 표식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 글의 일부분에만 문제가 있고 나머지 부분은 전부 양호한 글에도 문건 전체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입니까?

적어도 지성인이라면 그 정도 구분은 기본 아닌가요?--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61.40.78.107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생애 부분의 편집은 다시해야 하지 않을까요?

문서의 항목에서 임진왜란으로 묶여있는 항목은 재편집해야 할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이순신장군의 업적이지 생애부분이라 할 수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보통은 생애는 그 인물의 각 사건의 간략기술이 원칙일 겁니다. 간단하게 한산도대첩의 개요와 전투결과 만을 올리고 따로 참전해전 이런 항목을 만들어서 각 해전문서에 링크거는 것이 더 정확해보입니다. 명백한 오류가 있거나 내용을 고치지 않고 순서에 맞게 재배열하는 단순편집이 아닌 대대적인 문서편집이 필요한 사항이라 함부로 편집에 손대기가 힘드네요. 재배열 했던 문서인 김구 항목이나 직접 작성한 최윤덕 항목이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Chiwoo1 (토론) 2009년 6월 29일 (월) 16:56 (KST)

일부 인용 부분 대해서

와키자카 인용구 등의 근거를 네이버 지식인 결과에서 찾고 있고, 일부 인용 주소는 구글 단순검색 결과만을 보여주고 있으며, 학술적으로 검증된 것도 아닌 이순신 홈페이지 관리인의 한 줄 답변을 근거로 하는 등 백과사전에 싣기에는 무리라 보여집니다.--Ta183 (토론) 2009년 7월 18일 (토) 19:24 (KST)

와키자카의 인용은 수 년전부터 이어오고 또 이어온 글 중 대표적으로 가져온 글입니다.(네이버의 아하 그렇구나는 네티즌들의 많은 추천 수로 채택되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글은 삭제되었는지 오류인지 글 읽기가 안되네요. 그리고 사이트는 이순신의 기념사이트입니다. 관리자가 해당 곳에 올리거나 게시판에 답변하거나 어차피 동일인물이기 때문에 무리가 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본 내용에도 오타들이 심심치 않게 나는 법이니깐요.--부산 (토론) 2009년 7월 18일 (토) 19:28 (KST)
네이버 지식인은 대표적으로 기피해야 할 출처입니다. '정답'을 추천 수로 뽑습니까? 저도 네이버 지식인 천문 파트에서 좀 질문 답변 써 봤는데, 말도 안 되는 내용이 채택되고 최다추천을 받는 경우 비일비재합니다. 또 이순신 사이트 관리자의 말은 신뢰할만한 출처가 아닙니다. 와키자카 말에 관련된 출판물이나 도서 또는 믿을만한 기관의 발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네요.--Ta183 (토론) 2009년 7월 18일 (토) 19:32 (KST)
저는 네이버, 다음 같은 포털사이트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 링크를 올렸던 이유는 이런 게 있다는 거 보여주는 예입니다. (구글의 검색 경우도 처음에는 이 링크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구글이 경우 종합적으로 검색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추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이트는 사이트 본 내용에 글을 올리거나 게시판에 답변하는 거나 다르지 않습니다. 이게 신뢰할 수 없다고 하면 위키백과의 문서들 대다수 주석을 수정해야 합니다.--부산 (토론) 2009년 7월 18일 (토) 19:38 (KST)
대다수 주석을 물고 늘어지지 마시고, 다른 문서의 어떤 주석이 문제 인지 하나만 링크 시켜주세요.Yknok29 (토론) 2009년 7월 18일 (토) 19:40 (KST)
제가 관리자 님도 아니고 이 수많을 문서 중 일일이 찾으라는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어불성설입니다.--부산 (토론) 2009년 7월 18일 (토) 19:42 (KST)
동의할 수 없네요. 사이트 관리자가 전문가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순신 사이트에 올라온 내용들은 다들 출처가 있습니다. 관리자가 연구해서 올린 결과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용하신 부분은 마지막에 '아니라네요 쩝' 이런 한 마디만으로 답변을 끝내고 있습니다. 최소한 그 아니라는 근거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관리자가 설명은 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글링도 처음 들어간 사람이 보면 도대체 어디가 근거인지 알기 힘듭니다. 특정 부분을 찾아서 주석 처리 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요.--Ta183 (토론) 2009년 7월 18일 (토) 19:42 (KST)
검색엔진의 검색 결과나 검증되지 않은 문답 형식의 글, 게시판의 글 등은 신뢰할 수 있는 출처로 보기 어려우며, 일반적으로 위키백과에서 사용될 수 없습니다. 개인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의 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jtm71 (토론) 2009년 7월 19일 (일) 17:18 (KST)

인용부분은 되도록 더욱 줄여야 합니다. 솔직히 호남인 영남인같은 지역감정 부추기는 인용문도 별로 보기좋진 않구요. -- 윤성현 · 기여 · F.A 2009년 7월 23일 (목) 09:59 (KST)

인용이 지나치시다고 계속 말씀하시는데요. 나중에 따로 문서 만들어서 조금 더 추가 생각 두고 있지만, 현재 올라온 평들은 보시면 아시겠지만, 극히 일부뿐입니다. 그리고 거짓으로 밝혀진 평에 항목은 지역감정 부추기는 인용문이 아니라 수년 전부터 이익목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유언비어기 때문에 이것을 비판 목적의 인용문입니다.--부산 (토론) 2009년 7월 23일 (목) 10:07 (KST)

사용자:부산 님께 질문합니다

[1]이 출처의 적합성에 대한 부산님의 의견을 구합니다. 해당 블로그 글은 엄연한 낚시임이 드러난 날조문이고, 블로그 주인장은 이치에 닿지 않는 억지를 써가면서 "날조라도 나라에 유익하면 날조할 가치가 있다"라는 큰일날 말만 늘어놓고 있던데요. 이런 내용을 이순신 문서의 출처로 쓰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Ta183 (토론) 2009년 7월 21일 (화) 11:25 (KST) 제대로 본문을 읽지 않은 제기이기에 철회하겠습니다. 좀 창피하군요.--Ta183 (토론) 2009년 7월 21일 (화) 11:44 (KST)

거짓으로 판명되었고 제대로 된 원문도 찾을수 없는 날조문으로 위키백과에 올라올 가치는 없지만 특정 이용자가 몇번의 편집분쟁을 거치며 끝까지 업로드하고 있으니 별수 없습니다. 기사 내에서 날조문임을 확실히 밝힐 수밖에요. Hkwon (토론) 2009년 7월 22일 (수) 16:25 (KST)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관련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관련된 내용이 본문에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의 인기때문인듯 한데 "대중문화속의 이순신" 단원으로 빼서 편집하면 적당할듯 합니다.--Alfpooh (토론) 2009년 7월 22일 (수) 15:50 (KST)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원출처가 불멸의 이순신 공식홈페이지입니다. 방영 내내 진위논쟁으로 이슈라면 이슈 정도로 심했고 그 영향도 어마했기 때문에 위백에 올라와도 된다고 생각합니다.--부산 (토론) 2009년 7월 22일 (수) 16:30 (KST)
죄송하지만 이순신장군과는 상관이 약한 드라마 내용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역사드라마나 팩션같은 연관과 실제인물에 관련은 적절해야하나 본문자체에 서술하는 내용으로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Alfpooh (토론) 2009년 12월 21일 (월) 14:49 (KST)

이용자 '부산'의 3534099판 편집 되돌림 행위에 대해

본인은 분명 해당 이용자가 자기 손으로 올린 인용 문서에서 토씨하나 틀림없이 직접 인용되었고 이순신문서 해당 섹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내용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해당 이용자는 아무 이유없이 그 편집을 되돌렸습니다. 이것은 위키백과: 문서훼손 정책에 따라 '아무 이유 없이 내용을 부분적으로 혹은 모두 지우는 행위'에 해당되는 만큼 당연히 이러한 근거없는 되돌리기 행위를 취소할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위키백과 관리자분들에 의해 편집분쟁 행위를 자제하라는 권고를 받은 만큼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 문서에 관심있는 이용자 여러분들이 의견을 모아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Hkwon (토론) 2009년 7월 22일 (수) 16:50 (KST)

'자살설 및 은둔설' 섹션에 대해

위키백과: 독자연구 금지 정책에 따라 자설설 및 은둔설에 대한 출처없는 문단들에 독자연구 의심 주석을 추가하였습니다.

삭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본문서의 전체 내용에 어울리지 않으며 출처의 신빙성 또한 의심되고 내용 자체도 자살/은둔설이 근거없다는 내용입니다.--Alfpooh (토론) 2009년 12월 21일 (월) 15:43 (KST)

거짓 평가부분에 대해서

사실인 평가만 문서에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거짓 평가를 따로 문서를 만들고 링크를 띄우는 것이 나을거 같습니다.--Chiwoo1 (토론) 2009년 7월 23일 (목) 15:38 (KST)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거짓평인데 굳이 있어야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거짓이 아닌 평 또한 각각의 섹션에 출처가 달려 있지 않습니다. 사용자:부산님이 좀 무리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Ph (토론) 2009년 7월 23일 (목) 17:20 (KST)
동감합니다. 블로그 관련 출처는 일단 다 빼야 합니다. 거짓 평가 내용을 굳이 백과사전에 실을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오히려 자세히 읽어보지 않는 사람들은 해당 인용 부분이 마치 정말 누군가가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이라고 오판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Ta183 (토론) 2009년 7월 27일 (월) 18:50 (KST)
블로그 출처 내용과 거짓 평은 어차피 있으나 마나 한 내용이므로 일단 삭제하겠습니다.--Ph (토론) 2009년 8월 8일 (토) 11:18 (KST)

지역감정 조장 부분

경상도장졸은 모조리 오합지졸이라 하루 한놈 목을 쳐야 군률이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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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將卒 招集乃饋軍穀則默然食之 而戰鼓鳴卽 皆夜半逃散也
- 경상도 장졸은 불러 모아 놓으면 평소에는 말없이 군량을 받아 먹다가도 일단 출진의 북이 울리면 죄다 야반에 도망하여 흩어지고 마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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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徒剃頭倭裝 導倭賊侵寇忠淸全羅 殺傷擄掠放火劫姦 又甚於倭賊也 取老少婦女首及獻上倭將
- 경상도의 무리는 앞머리를 깎고 왜옷을 걸치고 왜적의 앞장서서 충청,전라지역에 침입하여 죽이고 뺏고 불지르고 강간함이 오히려 왜적보다 심한 바가 있다.

- [1]

이건 경상도지역을 비방하려는 지역감정을 조장할 우려 있습니다. 삭제가 당연합니다. --풰이뷔언 (토론) 2010년 1월 5일 (화) 11:50 (KST)


출처만 있으면 다 해결되나요

역사 가보면 부산 이란 사용자가 출처있다면서 무조건 되돌리기 하는데 그럼 출처가 있으면 지역감정이나 욕설도 해도 되나요? -- 풰이뷔언 (토론) 2010년 1월 5일 (화) 12:11 (KST)

위 인용문은 비방글이 아니라 비판하는 인용문입니다. 해당 부분만 보시지마시고 위에 표제어(이순신을 이용한 정치적 의도)와 해당 인용문 밑에 보시길 바랍니다.(위의 세 인용문은 난중일기에는 없는 내용이다.) 또한 해당 내용은 경상도가 했다는게 아니라 경상도 폄하내용입니다. 글을 단장취의가 아닌 꼼꼼히 읽어보시길바랍니다. 그리고 이순신을 이용한 정치적 의도 편집내용은 예전에도 토론 한번 했었습니다. 그리고 블로그 내용은 여기저리 자료가 한곳에 모인곳이라 소위 귀차니즘인 분들 위해 참조만하라고 해당 출처와 함께 링크한것입니다.

최근에 김대중 전 대통령 문서에 편집([2])이후로 아이피 사용자분들의 편집이 많아졌는데 단장취의이 없길 바랍니다.--부산 (토론) 2010년 1월 5일 (화) 12:26 (KST)

경상도 폄하내용인줄 알거든요. 회원 아이디가 부산인데 경상도 폄하내용을 고집하는 것을 봐도 의심스럽고요. 의도적으로 경상도를 비하하시려는것 같습니다. -- 풰이뷔언 (토론) 2010년 1월 5일 (화) 12:31 (KST)
예전에는 사용자: Hkwon 이란 분은 본 사용자 토론에서 좌파라고 본 사용자의 토론페이지를 쑥대밭으로 만드셨는데... 아무튼 미안합니다만, 본 사용자는 지역주의는 매우 혐오합니다. 단장취의 하시지마시길 바라며 내용을 다시 꼼꼼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인신 공격위키백과:차단 정책에 따라 차단될수 있습니다.--부산 (토론) 2010년 1월 5일 (화) 12:45 (KST)
본문서에 어울리지 않는 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출처의 신뢰도와 서술의 방법 (없는 것을 없다고 굳이 이야기하는 점)등이 문제입니다.--Alfpooh (토론) 2010년 1월 5일 (화) 21:07 (KST)
"이순신을 이용한 정치적 의도"부분은 본 문서와 어울리지 않는 오리지널 리서치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첫째 없는것을 굳이 없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며 둘째 후세에 있는 정치적 의도와 드라마에 관련된 사건을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입니다. 또한 해당내용이 개인 블로그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해당 내용은 삭제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집니다.--Alfpooh (토론) 2010년 1월 20일 (수) 13:52 (KST)
해당 내용은 소위 조중동,한경오 비롯해 언론들 간에 기사화되었으며 오랫동안 기정사실화 마냥 계속해서 돌고 돈 내용들입니다. 또 풰이뷔언 님은 비롯해 김대중 문서에 관련 편집으로 몇 아이피 사용자들이 편집되돌리기하다 본 사용자의 기여문서를 통해 보복성(?) 편집 되돌리기로 된것일뿐 본 내용에 의견을 제기한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풰이뷔언 님도 아이피 사용자로 시작했다가 계정을 생성후 당시 1월 5일 이후로 한번도 위키피디아 접속하지 않고 있습니다. 의견내용도 본 편집 내용과 다르게 말하기도 하고 있고요. 개인의 견해로 불출분이니 뭐니 trivia 이런 표현은 유의해주시길 바라며 판단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상대 사용자로서는 불쾌감이 듭니다. 그리고 블로그 링크는 삭제하고 깨진링크는 다시 보강하였습니다.--부산 (토론) 2010년 1월 20일 (수) 14:06 (KST)
첫째 해당내용이 이 문서에 적합한가를 봐야합니다. 둘때 해당내용이 팩트인가를 봐야합니다. 부산님은 계속 해당내용이 이 문서에 연관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본 내용과 객관적으로 어울린다고 보기 힘듭니다. 블로그나 아니면 술안주용으로 적합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해당내용은 2차적인 관련내용인 불멸의이순신드라마에 해당되며 논의된 기사또한 학술적이나 보존가치가 높지않은 가십성기사로 판단됩니다. 과연 이 내용이 이순신 장군의 역사적 인물을 이해하기위해 필요한 내용입니까? 본인이 관심있는 내용입니까? 객관적으로 잘 생각해보시고 편집하시길 부탁드립니다.--Alfpooh (토론) 2010년 1월 24일 (일) 00:40 (KST)

trivia

많은 이상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순신 문서에 적합하다기 보다는 뭔가 다른 목적 혹은 작은 연관만으로 삽입되었습니다. 이런 Trivia를 모두 담는 다는 것은 위키백과문서로 적절치 않습니다. 또한 출처의 신뢰도를 고려하는 것이 마땅하며 개인적 의견 즉 오리지널 리서치를 경계해야합니다. 더한다고 해될것 없지 않느냐 식의 편집 또한 옳지 않습니다. --Alfpooh (토론) 2010년 1월 5일 (화) 21:15 (KST)

이 문서를 걸어잠그신 분께 고합니다!

이순신을 연기한 배우 항목이 없어졌네요. 다시 만드시구요 이렇게 첨부하세요.

== 이순신을 연기한 배우 ==

주석과 인용자료의 퀄리티

이문서에 많은 주석과 인용자료가 신문등 비교적 퀄리티가 낮은 자료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블로그기사나 2차적관계의 자료 (예 불명의이순신 드라마에 대한)은 납득할수 없는 수준이며, 신문기사나 관련홈페이지도 옥석을 가려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다 학술적으로 가치있는 자료와 난중일기, 왕조실록등의 믿을 수 있는 원문 자료에서 연결된 주석으로 퀄리티를 높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Alfpooh (토론) 2010년 1월 24일 (일) 00:51 (KST)

이순신 장군 어머니 생가

"여기가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살던 곳이 맞나요?" (박형주 기자). 혹시 이 생가에 대해서 아시는 분 있습니까? 좋은 자료로 넣을 수 있습니다. Komitsuki (토론) 2010년 10월 26일 (화) 11:49 (KST)


인용자료의 퀄리티

제발 제대로 된 출처로 해서 자료를 인용하시기를 바랍니다. 보면 원균관련해서 2차자료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2차자료들 대부분은 상업적 목적으로 사실관계를 왜곡해 올려놓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원균의 아들 원사웅에 관해 이순신이 모함했다는 내용입니다. 1차사료인 실록을 살펴보면 이는 말도 안되는 거짓임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부탁이니 수정하실때 학술적으로 가치있는 사료인 실록이나 난중일기등을 인용해주시기를 바랍니다. 61.102.85.45 (토론)

원균행장은 근거가 희박하다는 근거는 있습니까? 난중일기를 무조건 신뢰하는 태도가 과연 중립적인 태도인지는 의심스럽군요. -- Lagnaqar (토론) 2011년 11월 20일 (일) 20:55 (KST)
전에 근거 말씀드렸는데요 ㅡㅡ;; 그리고 난중일기를 신뢰하는 이유는 3가지 입니다.

1.다른 사료와 교차검증할시 틀린 부분이 없다. 2.자기에게 불리한 내용이나 창피한 부분도 가감없이 기록해놓았다. 3.전문가들도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61.102.85.45 (토론) 2011년 11월 24일 (목) 00:22 (KST)

원균 행장은 거짓이고 이순신의 기록만 옳다고 보십니까? 이순신은 사람도 아닌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쓴 자료를 인용한 것은 왜 계속 되돌리기를 반복하십니까?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는 독선적인 사고방식은 버리십시오. 그런 생각을 가지셨거든 본인 블로그에서 활동하시던가요. 사용자:떠돌이님. -- Lagnaqar (토론) 2011년 11월 27일 (일) 14:21 (KST)


원균행장과 난중일기의 신뢰성에 관해서

아니 그러니까 원균행장록은 신뢰하지 않을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니까요 전에 보신것 같은데 잘 안보신것 같으니 다시 보여드릴께요

일단 원균행장록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당대사람이 기록한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도 많은데 굳이 후대사람이 지은 2차사료인 원균행장록을 인용할 필요가 없다.

2.행장자체가 현재의 위인전과 비슷한 성격으로 행장의 주인공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되므로 주인공의 과오는 삭제하고 공은 부풀리거나 없는 걸 지어넣는다.

3.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당시의 다른 사료들과 교차검증할시 틀린 내용이 너무 많다.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임진년(1592) 이때 공(원균)의 수하에는 단지 배 4척이 있을 뿐이어서[1] 군사 세력의 부족으로 혼자서는 능히 적을 섬멸할 수 없음을 예측하고 우후(虞侯) 우응진(禹應辰)으로 하여금 머물러 본영(本營)을 지키게 하고, 옥포(玉浦) 만호 이운룡(李雲龍), 영등포 만호 우치적(禹致績), 남해 현감 기효근(奇孝謹) 등으로 하여금 물러가서 곤양(崑陽)을 지키도록 하고, 비장(裨將) 이영남(李英男)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에게 보내어 힘을 합해서 적을 방어하기를 청하였으나[2] 이순신이 지키는바 각기 한계가 있다 하고 듣지 아니하므로[3] 서로 의견이 5, 6차나 오고 갔다. 이때 광양 현감 어영담(魚泳潭)과 순천 부사 권준(權俊)이 이순신에게로 달려가서 바다로 나아가 싸울 것을 힘써 권고하니[4] 이순신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공은 이순신이 도착하기 전에 수차 적과 교전하여 적선 10여 척을 불사르고 빼앗으니 군성이 점차로 떨치게 되었다.[5]

5월 6일에 이르러 비로소 이순신이 전함 24척을 거느리고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더불어 거제 앞바다로 모이었고, 7일 새벽에 삼도의 수군들이 일제히 옥포 앞바다로 진격하니,[6] 진을 치고 있는 적선이 개미떼와 같이 몰려 있었다. 공이 북을 높이 올리며 곧바로 진격하여 적의 중앙을 공격하고, 이순신 등이 일시에 승세를 타고 공격하여 적을 무너뜨리니,[7] 불태워버린 적선이 1백여 척이고,[8] 불에 타서 죽은 자와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빼앗은 적선 중에서 둥근 금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부채 한쪽면 가운데에 ‘6월 6일 수길(六月八日秀吉)’ 이라 쓰여 있고, 바른쪽 가에는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 라고 5자가 쓰여 있으니, 이는 필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우시축전수(羽柴筑前秀)에게 준 물길이 확실하며, 이날 목을 벤 적장은 곧 우시축전수가 틀림이 없었다.[9] 공이 적진으로 돌격을 잘하여 적은 병력으로 능히 많은 적을 격파하니, 공이 향하는 곳에는 대적할 적이 없었다.[10]

5월 8일에 선조께서 서울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니 온 군중(軍中)이 감동하였다. 공은 동생인 전(㙉)으로 하여금 행재소(行在所)에 들이게 하였고,[11] 이순신 등이 또한 승리의 장계를 올리니, 선조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공에게 특별히 가선(嘉善)의 벼슬을 더하여 내리시고, 전(㙉)에게는 선전관을 제수하시었으며, 유지를 내려 격려하셨다.

5월 21일에 왜선이 당포로부터 공격하여 오므로 우리 수군이 해구로 나아가서 맞아 싸우는데, 주위의 여러 섬에서 왜적의 무리가 사면으로 일제히 나오는지라 이때에 이순신 등은 본진으로 돌아갔으므로, 공은 육지로 올라가서 우선 적의 선봉을 피하고[12] 다시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하고 배들을 노량으로 옮겨 놓았다. 얼마 후 이순신이 수군을 이끌고 와서 다시 모여서 적을 곤양 근처에서 격파하고 사천 앞바다까지 적을 쫓아가서 이를 모두 섬멸해 보렸다.[13]

6월 당포에 이르니 적선이 바닷가에 나누어 정박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큰 배 한 척은 3층 누각이었고, 밖으로 붉은 장막을 드리웠는데 그 속에서 한 사람이 금관과 비단옷을 입고 적들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 보이므로 우리의 여러 장수들이 노를 재촉하여 곧바로 공격하였으며, 순천 부사 권준(權俊)이 아래로부터 치쏘아 한대의 화살로 적중시키니 금관을 쓴 자는 활촉 소리와 함께 거꾸러지고, 남은 왜적들은 놀래서 흩어지고 스스로 몸을 던져 물에 빠져 죽었다.[14] 조금 있다가 적선 40여 척이 뒤로부터 공격해 오므로 우리 군사가 노를 돌려서 이를 맞아 힘껏 싸워서 오전 10시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이르니 적들은 밤을 타고 도주해버렸다. 이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다시 와서 합세하니[15] 먼저는 여러 장수들이 적은 병력으로 적진 깊숙이 진격하는 것을 근심하다가 이억기가 도착한 것을 보고는 사기가 두 배로 되었다. 동도 앞바다까지 적을 추격하여 북을 울리며 용감하게 싸워서 적장 다섯이 함께 탄 배를 붙잡았고, 율포와 가덕 전투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전후 전투에서 공이 붙잡은 적선이 모두 55척이오, 목 벤 적이 모두 103급이었다.[16] 임금이 이 일을 들으시고 글월을 내리시어 칭찬하시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경(卿)은 나라가 허락한 간담(肝膽)이오, 세간에 다시없는 영웅호걸이라.… 당항포에서 수십 차 결전하니 참수한 적의 머리가 강을 막았고, 한산도에서는 적선 70여 척을 불태우니 고래가 머리를 바쳤도다.[17] 위급한 때을 당하여 기발(奇拔)한 계책을 냈다는 말을 옛이야기로 들었더니, 소수의 군사로써 큰 적을 무찌른 일을 오늘에 이르러서 볼 수 있었도다. 의연한 천진 절벽이요. 엄연한 일대 장상(長城)이로다. 주(周) 나라가 중흥함에 있어서는 곧 윤길보(尹吉甫)의 정벌이 있었고, 당(唐) 나라가 재건됨은 실로 곽자의(郭子儀)의 진충(盡忠)에 힘입었도다.[18]”

7월 6일에 공이 이순신 등과 또 다시 노량에 모여서 적선 63척을 불태우고,[19] 안골포 앞바다에 이르러 적선 40여 척과 마주쳐서[20] 우리 군사가 번갈아 공격하여 적의 목을 베고 빼앗은 것이 더욱 많으니, 적은 지탱하지 못하고 거제와 부산으로 도주하여 다시는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

7월 30일에 조서(詔書)가 내렸는데 이르기를, “경이 올린 네 차례의 군공장계(軍功狀啓)를 보고 그 중에서 특별히 공이 있는 자를 먼저 논상(論賞)하며 내가 기뻐하는 뜻을 보이고자 하였으나, 그때에 본직에 있던 자를 지금에 와서 승진시키려면 자리를 바꾸고 갈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으니 아직은 본직을 그대로 두고 다만 급수만을 올려 주었다가 후일에 등용하게 하라. 소록(小錄)에 기록한 왜물(倭物)은 경이 노획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뒷사람들을 권장케하라.”고 하였다.


[1] 왜적이 쳐들어오자 본인이 지레 겁을 먹고 배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는 이야기는 빠뜨리고 있다. [2] 부하들이 그렇게 하기를 청하여 마지못해 응했던 것이다. [3] 사실이 아니다. [4] 어영담과 권준이 아니라 송희립과 정운이다. [5] 전혀 사실이 아니다. 4척의 배로 10여척을 무찌른 일은 전혀 없었다. [6] 우수사 이억기는 6월 4일 당포항 싸움 후에 처음으로 합류하였다. [7] 사실이 아니다. 원균은 싸울 때 항상 이순신의 함대 뒤를 따라다니는 처지였다. [8] 제1차 출전에서 불태운 적선의 수는 42척이었다. [9] 이것은 6월 2일 당포 싸움에서 이순신의 부하 장수 이후 이몽구(李夢龜)가 왜장의 배에서 획득한 것인데 이것을 마치 원균의 공로인 것처럼 속이고 있다. [10] 그가 향하는 곳에는 항상 군사들의 인심 이탈과 패배만이 있었다. [11] 사실이 아니다. 당시 포로는 전부 이순신이 관리하였고, 적의 수급만 보냈지 포로를 행재소에 보낸 일은 전혀 없었다. [12] 왜적의 배가 쳐들어오자 그는 이번에도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났다는 이야기이다. [13] 곤양 근처가 아니라 사천포에서의 전투이고, 이것은 5월 29일에 있었던 일이다. [14] 비록 엉성하게 설명하고 있으나, 이것은 당포가 아니라 6월 5일에 있었던 당항포 전투에서의 일이고 또 원균의 전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15] 이억기 함대는 이날 처음으로 참전하였다. [16] 제2차 출동 때 원균이 거느리고 참전한 전선 수는 3척에 불과했다. 이순신 함대의 거북선이 첫 출동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동안 그는 뒤에서 죽은 적의 시체를 찾아다니면서 목 베기에만 열중하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적선 55척을 붙잡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17] 그저 허허…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허무맹랑한 내용이다. [18] 중국의 史書를 읽은 것이 죄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19] 이것은 이순신의 <견내량파왜병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불태운 것은 약 58척이고, 7월 8일의 일이다. [20] 마주친 적선은 59척이다.


잠깐 훝어만 봐도 이렇게 틀린 부분이 많습니다. 또 님께서 왜 난중일기만 옹호하시냐고 하시는데 난중일기의 경우 전문가들이 검증했습니다. 일단 난중일기 자체가 국보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세계기록유산에 등재신청중입니다.[3]님 말씀대로 엉터리로 기재해놓았으면 국보지정이나 등재대상으로 신청하지도 않았겠지요 난중일기의 신뢰성에 대해 논의하고 싶으시면 구체적인 근거를 대시고 어느어느 부분에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가급적이면 신문기사를 인용하시는 것도 삼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님 말씀대로 신문기자는 전문가가 아니니까요 Ronain (토론) 2011년 11월 29일 (화) 00:11 (KST)

그럼 본인은 전문가이신가 보군요? 이순신이 악감정을 갖고 원균을 비방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있습니까? 참으로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분이시군요. -- Drpp (토론) 2011년 11월 29일 (화) 18:30 (KST)
보장이요 물론 없지요 그런데 님이 하신 말씀은 단순한 의심에 불과합니다. 이 의심을 구체적인 사실로 만들려면 근거를 대면서 어느어느부분이 틀렸다고 구체적으로 제시하셔야지 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난중일기의 어느 어느 부분이 다른 사료와 비교해보니 잘못기록되어있더라 같은 말씀은 한번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원균과 이순신이 사이가 나쁘니 당연히 틀렸을 것이다라고 말씀만 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님의 그 논리대로라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료가 하나도 없어집니다. 님이 말하신 것은 분명히 감안해야 될 요소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난중일기에서는 그러한 오류점이 발견된 적도 없고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적은 다른 사료와 비교해보면 동일한 내용을 싣고 있으니까요 이순신이 악감정을 가지고 원균을 비난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고 이 가능성을 이유로 사료내용을 부정하는 것은 아전인수격 해석입니다.Ronain (토론) 2011년 11월 29일 (화) 23:46 (KST)

생모에 대한 한자 표기가 잘못된것 같습니다.

생모가 초계변씨로 표시되어 있는데, 초계변씨의 경우 邊(가변)자를 쓰는게 아니라 卞(조급할 변)자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정하는 것이 옳은것 같습니다.

년도 오류가 있는 듯 싶네요.

"1591년 (선조 24)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에게 우의정이 증직된 후 그 처인 방씨를 정경부인으로 봉하면서 내린 이순신처 방씨 고신교지(李舜臣妻方氏告身敎旨)는 보물 제1564-8호이다. 정경부인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정·종 1품 문무관의 처에게 내리는 명호(名號)로 외명부 부인으로서는 최상급의 품계이다."

1591년은 임진왜란 발발 전이니 시기가 잘못 기록된것 같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업적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다.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등나무 등, ㉠등나무')" on-mouseout=tooltip_off()>藤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3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충렬사팔사품(통영충렬사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네 몇개는 제가 퍼온것입니다

제가 아는거라곤

별루 없지만

대첩은 옥포해전, 사천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산도 대첩은 학익진 전법으로 왜군을 무찔렀죠..

거북선이 가장 큰 역할을 한것입니다 (출처:네이버 지식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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