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왕(豊王, 생몰년 미상)은 백제의 왕족으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의 아들이며, 별칭은 풍장(豊璋)이다. 왜국의 인질이었다가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텐지 천황이 지원해준 왜군을 동원하여 귀국, 복신에 의해 급하게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663년 백강 전투에서 · 연합군에게 참패하였다.

풍왕
본명부여풍(扶餘豊)
출생생년 미상(生年 未詳)
?
사망몰년 미상(沒年 未詳)
?
매장지없음
성별남성
국적백제
별칭풍장(豊璋)
전임자의자왕(義慈王)
후임자없음
종교없음
배우자?
자녀부여사(扶餘絲)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구당서》, 《신당서》에서는 그를 정식 군주로 인정하지 않으며, 일본서기속일본기에서만 그를 왕으로 보았다.

생애편집

일본인 생활편집

의자왕의 아들로 정비 소생이다. , , , , 과 왜의 선광왕은 그의 형이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부여풍은 631년 외교 인질로 왜국에 30년간 거주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의자왕이 630년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1] 고 적고 있고, 《삼국사기》에서도 "일찍이 왜에 인질로 있던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2] 고 기록한다.

왕비는 다우기고(多宇氣古)의 딸이지만 생몰년대와 행적은 알려져있지 않다.[3]

백제 부흥군 전멸편집

660년 사비성이 점령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2천 명의 왕족과 귀족, 백성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무왕의 조카인 좌평 복신흑치상지, 도침 등에 의해 왜국 현지에서 급하게 왕으로 추대되어 왜군과 함께 귀국했다. 백제가 패망했다는 소식이 왜국에 알려지자 텐지 천황은 그에게 귀국하여 왕위를 이으라 하고, 왜군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곧 복신도침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부여풍은 제사만을 맡게 되었다. 결국 663년에 복신을 살해하고, 왜의 군사를 동원하여 나 당 연합군에 맞섰으나 9월 백강 전투에서 완패하고, 근신만을 거느리고 배 한 척으로 고구려로 도주하였다. 고구려에 투항한 뒤 왜국에 남아있던 아우 부여용과 내응하기도 했으나, 668년에 고구려가 나 당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 당에 끌려가 중국 남부 지방으로 유형되었다고 한다.[4]

국왕 인정 불가편집

기존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같은 정사(正史)에서는 백제의 마지막 왕을 의자왕으로 보았고, 한국의 현행 국사교과서 역시 의자왕을 끝으로 연대를 작성한다. 따라서 정식 즉위식을 치르지 못한, 중앙정부가 붕괴된 상태에서 복신과 도침에 의해 임시로 추대된 부여풍을 정식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다만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은 자신이 저술한 《동사강목》에서 부여풍을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언급하며, 660년부터 663년까지를 부여풍의 재위 기간으로 보고 백제의 멸망을 663년으로 기록하였다.[5]

가계편집

무왕
武王
의자왕
義慈王
부여융
扶餘隆[6]
은고
恩古
부여태
扶餘泰[7]
부여교기
扶餘翹岐
부여효
扶餘孝
부여연
扶餘演
부여풍
扶餘豊
부여사
扶餘絲
부여용
扶餘勇
부여충승
扶餘忠勝
부여충지
扶餘忠志
부여선광
扶餘善光

풍왕이 등장한 작품편집

참고편집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卷第廿三 舒明天皇〉.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三年...三月庚申朔、百濟王義慈入王子豐章爲質。 
  2.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義慈王)〉. 《삼국사기(三國史記)》. 迎古王子扶餘豊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古王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 
  3. 일본서기, 속일본기
  4. 자치통감』권제201, "以高藏政非己出,赦以爲司平太常伯、員外同正.(중략)扶餘豐流嶺南." 혹은 도망쳐서 어디로 갔는지 알수 없다고 한 기록도 있다.(《신당서》)
  5. 《동사강목》제4상(上), 계해(663)조
  6. 장남은 부여융 아니면 부여효이다.
  7. 의자왕의 차남이 확실하며 나머지 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