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고은(髙銀, 본명: 고은태, 본명 한자: 髙銀泰, 1933년 8월 1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으로, 1952년에서부터 어언 66년 동안 활약하였으며, 2018년에 은퇴했다.
고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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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보 | |
본명 | 고봉산(髙峯山) → 고은태(髙銀泰) → 고은(髙銀) |
출생 | 1933년 8월 1일 전라북도 옥구군 미면 미룡리 | (91세)
언어 |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
직업 | 시인, 소설가, 대학 교수 |
학력 | 군산고등보통학교 중퇴 |
경력 |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경기대학교 대학원 교수 중앙대학교 객원교수 서울대학교 초빙교수 |
본관 | 제주 |
종교 | 불교 |
필명 | |
활동기간 | 1952년~2018년 3월 |
장르 | 시문학, 소설 |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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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부(父): 고관택(髙款澤, 1901년 출생~1949년 별세.) 모(母): 장수 황씨 부인(長水 黃氏 夫人, 1904년 출생~1978년 별세.) |
배우자 | 이상화(李相華, 1947년생, 중앙대 영문과 교수 역임.) |
자녀 | 외동 딸: 고차령(髙次玲, 1984년생.) |
형제 | 3남 3녀(6남매) 중 장남(둘째) (누나 1명(어릴 때 병사) 누이동생 2명(모두 어릴 때 병몰) 남동생 2명(고충조, 고은철) |
주요 작품 | |
《오십년의 사춘기》, 《만인보》 | |
영향 | |
영향 받은 인물 | 김지하·신영복·오윤·김훈·이윤택 등에게 영향을 줌. |
영향 준 인물 | 학눌·유치환·오영수·김광주·장만영·서정주·조지훈·유낙진 등의 영향을 받음. |
웹사이트 | www.koun.co.kr(고은 문학관) |
본은 제주(濟州)이며, 어릴때에 쓴 일제 시대 일본 창씨 이름은 다카바야시 도라스케(高林虎助)이고, 이후의 한때의 10년간의 불교 승려 시절의 승명(僧名)은 일초(一超)이며, 호(號)는 파옹(波翁)이다.
생애
편집일제강점기 시대의 전라북도 옥구군 출생이다. 군산고등보통학교를 4학년 시절에 중퇴하였다. 한국 전쟁으로 인한 전란 시기였던, 1952년 일본 조동종의 군산 동국사에 출가하여 중관학 권위자인 중장혜초로부터 일초(一超)라는 법명(法名)을 받고 불교 승려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경기도 강화 전등사 등의 사찰에서 참선과 방랑을 거듭하며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958년 조지훈과 장만영과 서정주의 공동 추천으로 인하여 《현대문학》에 〈폐결핵〉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1960년대 초에 본산 주지, 불교신문사 주필 등을 지냈고,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을 내고 1962년 환속하여 본격적인 시작 활동에 몰두하게 되었다.
고은의 문학적 성향은 〈문의 마을에 가서〉를 낸 1974년을 기준으로 크게 둘로 나뉘는데, 그의 전기 시들은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이 주를 이루는 반면 후기 시들은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투쟁의지를 담고 있다. 그 뒤 '자유실천 문인협의회' 대표로 행동주의 관련 체제 면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1983년에, 14년 연하녀 이상화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와 결혼한 그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자주 거론되고 있었는데, 세계 각국에서 그가 잘 알려진 것은 오히려 노벨 문학상 후보라는 것 이전에 그의 시가 20여개국에 번역되어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결국, 한때 실제로 2005년 이후부터 여러번 노벨 문학상 후보 등로 거론되기도 하였다.[1][2] 노르웨이에서는 자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을 기린 비에른손 훈장을 받았고, 스웨덴에서도 자국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하뤼 마르틴손을 기리는 상인 동시에 동아시아권 문학에 주는 상인 시카다상을 수여하였다.
학력
편집명예 박사 학위
편집경력
편집- 1951년 군산북중학교 국어교사
- 1957년 전등사 주지, 해인사 교무 및 주지대리
- 1958년 불교신문 창간 초대주필
- 1962년 환속
- 1964년 금강고등공민학교 설립
- 1968년 신민당 당무위원
- 1976년 신민당 탈당
- 1980년 《실천문학》 창간, 노동학교 소장
- 1983년 이상화(1947년 출생) 교수와 결혼
- 1986년 《만인보》 간행 시작
- 19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민족문학작가회의 부회장
- 1987년~1991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의장
-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 회장
- 1991년 한국문학예술대학원장
- 1994년 경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교수
- 1999년 제1회 만해축전 대회장, 제4회 만해시인학교 교장
- 2001년 사단법인 세계한민족작가연합 회장
- 2007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 2008년 단국대학교 석좌교수(~2018년)
- 2010년 4월 9일 《만인보》 완간
수상
편집작품 목록
편집시집
편집- 《피안감성》 (1960)
- 《해변의 운문집》 (1964)
- 《신 언어의 마을》 (1967)
- 《새노야》 (1970)
- 《문의 마을에 가서》 (1974)
- 《부활》 (1975)
- 《제주도》 (1976)
- 《입산》 (1977)
- 《새벽 길》 (1978)
- 《고은 시선집》 (1983)
- 《조국의 별》 (1984)
- 《지상의 너와 나》 (1985)
- 《시여 날아가라》 (1987)
- 《가야 할 사람》 (1987)
- 《전원시편》 (1987)
- 《너와 나의 황토》 (1987)
- 《백두산》 (1987)
- 《네 눈동자》 (1988)
- 《대륙》 (1988)
- 《잎은 피어 청산이 되네》 (1988)
- 《그 날의 대행진》 (1988)
- 《만인보》 (연작: 1986 ~ 2010년 4월 9일)
- 《독도》 (1995)
- 《허공》 (창비, 2008) ISBN 978-89-364-2292-9
시
편집- 〈선제리 아낙네들〉: 주제는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정겨움을 잃지 않는 민중들의 삶이다.[6]
- 〈머슴 대길이〉: 역사 속에서 소외당하고 천대 받는 계급이지만,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으로 남을 위해 넉넉한 인간미를 잃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는 인간상이 그려진다.[7]
- <가을 편지>:
소설
편집- 《피안앵》 (1962)
- 《어린 나그네》 (1974)
- 《일식(日食)》 (1974)
- 《밤 주막》 (1977)
- 《산산히 부서진 이름》 (1977)
- 《떠도는 사람》 (1978)
- 《산 넘어 산 넘어 벅찬 아픔이거라》 (1980)
- 《어떤 소년》 (1984)
- 《화엄경》 (1991) 화엄경 입법계품을 소설화하였다.
에세이
편집성추문 논란 및 관여된 법정 소송
편집성추문 의혹 관련 손해배상 청구
편집성추문 의혹 제기
편집2018년 최영미 시인의 고은 성추행 폭로 이후 고은이 오래 전부터 성추행을 일삼았다는 피해자들의 구체적인 증언이 나오고 있다.[8] 2018년 3월 2일 고은은 영국의 출판사를 통해 성추행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글쓰기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9]
최영미에 따르면 고은은 '1993년경 한 술집에 들어가 천장을 보고 누운 채 자신의 바지 지퍼를 열고 아랫도리를 주물렀고, 흥분해 신음소리를 뱉었다. 한참 자위를 즐기던 고 시인은 최 시인의 일행을 향해 명령하듯 “야 니들이 여기 좀 만져줘”라고 했다.'고 한다.[10]
박진성 시인은 "2008년 4월, C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고은 시인 초청 강연회 뒤풀이 자리에서 고은 시인이 옆에 앉은 여성의 신체 부위를 더듬고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폭로했다. 박진성은 "저는 그 당시 그 자리로 저를 오게 한 K 교수에게 왜 고은 시인을 말리지 않느냐고 항의했지만, K교수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면서 "고은 시인의 추행은 이후에도 계속됐다"고 밝혔다. 이후 고은 시인은 자리에 앉으며 "너희들 이런 용기 있어?"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11]
1심
편집고은은 2018년 7월 17일 서울중앙지법에 최영미 시인과 박진성 시인, 언론사 등을 상대로 10억 7천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12] 2019년 2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는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최 시인의 글 내용과 법정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되며, 제보한 동기와 경위 등을 따져보면 허위라 의심할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한 고 시인 측 증인들이 허위 증언을 했다는 최 시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또한 고 시인의 1994년 성추행 의혹을 보도한 신문사가 고 시인에게 손해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단, 재판부는 고 시인의 2008년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박진성 시인(41)에 대해 "피해 여성을 특정하지 못했다"는 근거로 고 시인에게 1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13]
항소심
편집이후 고은은 항소했고, 2019년 11월 서울고등법원 민사13부는 고은의 손해배상청구 소송 항소를 기각했다. 단 1심 때 내려진 박진성(시인) 씨의 배상 책임은 유지되었다.[14] 2019년 12월 고은이 대법원 상고를 포기함에 따라, 고은의 손해배상 소송 패소 판결은 최종 확정되었다.[15]
같이 보기
편집- 《만인보》
참고 자료
편집각주
편집- ↑ 노벨상에 대한 오해와 진실…올해 이그노벨상 수상자는? MBC TV( 2014.10.07) 기사 참조
- ↑ 광교산 중턱… 30여년만에 삶터 옮긴 고은 시인 경인일보(2013.10.02.) 기사 참조
- ↑ 천안,이준호기자 (2010년 8월 18일). “고은 시인 단국대서 명예문학박사”. 한국일보. 2010년 8월 24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가 나 고은 시인, 스웨덴 '시카다상' 받는다 중앙일보 2006.10.25 종합 23면
- ↑ 고은 시인 스웨덴 시카다상 수상 … 바리외 대사, “고은은 세계적 시인” 동아일보 2006-11-29
- ↑ 강승원, 편집. (2009년 1월 5일).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 초판. 한국교육방송공사. 12, 해설2쪽.
- ↑ 김인봉, 편집. (2009년 1월 5일). 《EBS 수능특강 언어영역》 초판. 한국교육방송공사. 해설53쪽. ISBN 9788954711159.
- ↑ “[단독]"고은, 女대학원생 성추행하며 신체 주요부위 노출"”. 동아일보. 2018년 2월 27일.
- ↑ “고은 "부끄러운 일 안했다" 주장…최영미 "내 말과 글 사실"”. 《연합뉴스》. 2018년 3월 4일.
- ↑ “최영미 시인, ‘고은 성추행’ 폭로 “아랫도리 주무르며 만져달라고 해””. 《mk.co.kr》. 2018년 3월 4일에 확인함.
- ↑ “박진성 시인 “고은 시인, 술자리서 성추행…직접 봤다””. 《중앙일보》. 2018년 3월 6일. 2018년 3월 8일에 확인함.
- ↑ 이보배 (2018년 7월 25일). “고은 시인, '성추행 폭로' 최영미 시인에 손해배상 청구”. 《연합뉴스》.
- ↑ 이호재·김예지·이지훈 (2019년 2월 16일). “법원 “고은 성추행 허위 아니다”… 최영미 승소”. 《동아일보》.
- ↑ 김은경 (2019년 11월 8일). “'성추행 의혹' 고은 시인, 최영미 시인 상대 손배소 2심도 패소”. 《연합뉴스》.
- ↑ 이승우 (2019년 12월 5일). “최영미 "고은, 손배소 상고 안해…대법원 안가고 끝"”. 《연합뉴스》.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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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시가 걸어온 길 〈금요일의 문학이야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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