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근(한국 한자: 惠勤[2], 본명아원혜(牙元慧), 1320년 2월 24일[3]~1376년 6월 2일[4])은 고려불교 승려이며, 속명(俗名)은 아원혜(한국 한자: 牙元慧)이고, (號)는 나옹(한국 한자: 懶翁)으로, 법호(法號)는 보제 존자(한국 한자: 普濟 尊者)이며, 시호(諡號)는 선각 국사(한국 한자: 禪覺 國師)이기도 하고, 경상도 영해부(한국 한자: 寧海府, 현재의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출신이다.[5]

혜근
惠勤
문경 대승사 묘적암에 소장된 나옹 화상의 영정. 조선 순조 3년인 1803년에 제작된 것이다.
법명혜근(惠勤)
출생1320년 2월 24일(1320-02-24)
고려 경상도 영해
입적1376년 6월 2일(1376-06-02)(56세)
고려 양광도 여흥 신륵사
입적원인병사
거주지고려 개경
국적고려
속명아원혜(牙元慧)[1]
경력공민왕(왕전)의 왕사
활동 기간1339년~1376년(법랍 37세)
종파대승불교
소속고려 양광도 양주 회암사(주지승)
출가1339년 고려 충숙왕 치세 말기 시대의 서해도장연의 묘적암(妙寂庵)
저작몽산법어(蒙山法語)》
직업불교 승려(佛敎 僧侶)
스승요연
제자야운
배우자
자녀
부모아서구(부), 연일 정씨 부인(모)
웹사이트혜근(나옹 선사)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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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한(漢)족계 이주민 출신의 아버지의 아들로 출생한 그가 출생한 지역은, 고려경상도(慶尙道)의 영해(寧海)인데, 1320년(충숙왕 7년)의, 2월 24일(음력 1월 15일)에, 경상도(慶尙道)의 영해(寧海)에서 태어났으며, 원나라 셴양(咸陽)에서 출생한, 고려 이민자 출신의 아버지 아서구(牙瑞具)와, 경상도영산군(靈山郡) 출신의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 鄭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무녀독남)로 태어났다.[5][6]

혜근(惠勤) 선사는, 일단 1339년(충숙왕 후7년)의 춘삼월(春三月)에는, 병으로 인하여 일찍 죽은 고향 친구의 장례 등을 보고 나서, 20세에 출가했으며, 속세를 털어버린 이듬해 1340년(충혜왕 후1년)의 정월(正月)에, 묘적암(妙寂庵)의 요연(한국 한자: 了然)이라는 선사한테 득도했다.[5]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양광도 양주 소재 회암사에서, 지난 4년 동안 밤낮으로 홀로 앉아 정진하던 중에,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5]

1347년(충목왕 3년)에 원나라 말기 시대의 옌징(燕京(연경): 현재의 중공 베이징)으로 건너가 이름 난 승려들을 직접 찾아 가서,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었고, 특히 이듬해 1348년(충목왕 4년)에는, 원나라서역둔황(敦煌)에 잠시나마 머물러 있었던, 옛 천축국(현재의 인디아)의 불교승려 지공선사(地空禪師)의 설법(법도)을 이어받았다.[5]

그 후 1351년(충정왕 3년)부터 1354년(공민왕 3년)까지, 중국 원나라 전역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5]

1354년(공민왕 3년)에서부터 이듬해 1355년(공민왕 4년)까지는, 원(元)나라랴오닝(遼寧)의 진저우(錦州)의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승(住持僧)으로 잠시 동안 있었다.[5]

1358년(공민왕 7년)에 고려로 귀국했으며, 1360년(공민왕 9년)에 오대산에 머물렀다.[5]

1361년(공민왕 10년)에 왕(공민왕)과 태후(공원왕후)와, 궁주(덕녕공주)의 청으로 인하여, 전라도 장수 소재 신광사(新光寺)에 잠시 머물렀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사찰(장수 신광사)을 지켰다.[5]

1363년(공민왕 12년)에는 구월산에 들어갔었고, 1365년(공민왕 14년)에는 물러나는 것을 허락받았으며, 그 후 여러 산사(山寺)를 돌아다녔다. 1366년(공민왕 15)에 금강산에 있었고, 1369년(공민왕 18년)에 오대산으로 다시 들어갔다.[5]

1370년(공민왕 19년)에는 회암사(檜巖寺)에, 자신의 스승인 요연(了然, 1299년 출생~1370년 입적)이라는 선사(禪師)의 유골을 안치했고, 같은 해의 음력 9월 10일에는 공부선(功夫選)을 거행했다.[5]

1371년(공민왕 20년)에, 법복(法服)과 발우(鉢盂)를 하사받았으며, 그와 동시에 왕사(王師)이자,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이고,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이며,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로 봉해졌다. 그 후 송광사에 있었다가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또한 각 지역의 사찰(절)을 중수 및 중축했다.[5]

1376년(우왕 2년)에 낙성(落城)을 축하하는 법회를 크게 열었는데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인하여, 혜근은 밀양의 영원사(靈源寺)로 옮기게 되었다. 결국 이 때 병이 도졌다. 한강에 이르렀을 때 호송 관원이었던 탁첨(卓詹)에게 자신의 병세가 위중해 뱃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결국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7일 만에 여흥(驪興: 현재의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에 도착해 신륵사에 머물렀다. 탁첨(卓詹)이 재촉해 다시 떠나자고 말했지만, 결국 차라리 떠나지 않고, 음력 5월 15일, 진시(辰時: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에 조용히 입적(入寂)했다.[5]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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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산법어
  • 나옹화상행장(懶翁和尙行狀)》 - 종로도서관 소장 고려 후기의 선사 나옹화상 혜근(惠勤, 1320-1376)의 행장(行狀), 어록(語錄), 가송(歌頌)을 각련(覺璉)이 집록(輯錄)하고, 혼수(混修)가 교정하여 간행한 선가(禪家) 법어집(法語集)이자 유고 문집.

관련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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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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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색, 『목은문고』 권14, 보제존자 시 선각탑명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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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단, 1325년(충숙왕 12)까지의, 만5세 시절에, 한자(漢字)의 이름의 일부를 牙元개명(改名)하기 이전의 아명(兒名)은 牙元
  2. 속명(俗名)은 아원혜(한국 한자: 牙元慧)로 알려짐.
  3. 음력 1월 15일
  4. 음력 5월 15일
  5. 이색, 『목은문고』 권14, 보제 존자 시 선각의 탑명.
  6. 혜근(惠勤, 1320년생~1376년졸; 속명은 아원혜) 선사 그의 부친 아서구(한국 한자: 牙瑞具, 1288년생~1331년졸, 원래 원나라 셴양 출생.)의 경우에는, 1288년, 원(元)산시(陝西)의 셴양(咸陽)에서, 한족(漢族)의 후손(무녀독남 외동아들)으로 출생하였으며, 만6세 시절이었던, 1294년(충렬왕 20년)에, 지난날 쓰촨 청두·산둥 칭다오 등으로 시집 떠난 두 고모(姑母)들은, 아쉽게도 원나라 자국에 남기어 두고, 부모(父母)·조부모(祖父母)와 함께 모두 다섯 명(직계 일족)이서만, 원나라셴양 향리를 떠난 훗날, 같은 해(1294년)에 원나라를 아주 출국하였고, 고려(高麗)의 경상도(慶尙道)의 영해(寧海)로 건너온 이후 사실상 고려에 정착하여, 훗날 고려경상도 영해에서 조부모상(祖父母喪)과 부모상(父母喪)을 모두 치렀으며, 1331년(충혜왕 1년)에, 고려(高麗)의 경상도(慶尙道)의 영해(寧海)에서 하세(향년 44세)한, 원나라고려 이민자 출신이었다.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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