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흥대원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년 4월 2일(음력 3월 5일) ~ 1559년 6월 14일(음력 5월 9일))은 조선의 왕족이며 최초의 대원군이다. 중종의 일곱째 아들로, 어머니는 창빈 안씨이다. 아들 선조가 즉위하여 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덕흥대원군
德興大院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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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대원군묘 | |
조선 중종의 왕자
조선의 대원군 | |
이름 | |
휘 | 이초(李岹) |
작호 | 덕흥군(德興君)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30년 3월 5일(음력)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별궁 |
사망일 | 1559년 5월 9일(음력) | (29세)
사망지 | 조선 한성부 도정궁 |
부친 | 중종 |
모친 | 창빈 안씨 |
배우자 | 하동부대부인 정씨 |
자녀 | 3남 2녀
하원군 · 하릉군 · 선조 광양부인 명순 · 이혜옥 |
능묘 | 덕흥대원군 · 하동부부인묘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산5-13번지 |
개요
편집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명종의 이복 형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선조)이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하였다. 최초의 방계 혈통 국왕의 즉위로 인해 국왕의 생부인 덕흥군의 추존 문제를 두고 정쟁이 발생하였는데 선조는 아버지인 덕흥군을 왕으로 추존하고 싶어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인해 왕자 군(君)보다 높은 작호인 대원군(大院君)을 신설하였다.[1]
선조 이후의 모든 조선 국왕은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조선 후기의 국왕들은 덕흥대원군의 묘를 참배하고 사당에 전배례를 행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생애
편집출생
편집1530년(중종 25년) 3월 5일, 중종(中宗)와 상궁 안씨(尙宮 安氏, 창빈 안씨)의 아들로 태어났다.[2] 중종의 여덟째 아들이며, 안씨에게는 셋째 아들이다. 친형제로는 큰형인 영양군과 어릴 때 죽은 둘째 형 이수(頤壽), 누나 정신옹주가 있다. 아명은 환수(歡壽)[2]이며 휘는 초(岹)이다.
왕자 시절
편집1538년(중종 33년) 덕흥군(德興君)에 봉해졌다. 1541년(중종 36년), 헌부가 덕흥군의 저택이 사치스러움을 비판하여 바로잡을것을 청하니 중종이 이를 따랐다.[3]
1542년(중종 37년), 정세호의 딸인 정씨(하동군부인)와 가례를 올리고 출궁하였다. 아내 하동군부인 정씨의 할머니인 정경부인 안씨는 세종의 딸인 정의공주의 손녀로, 덕흥군과 하동군부인은 세종을 공통 조상으로 하는 10촌지간이다.
1552년(명종 7년), 덕흥군은 재상을 능욕하고 사류를 구타하며 변복 차림으로 창기들과 놀러다닌다 하여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명종이 눈감아 주었다.[4]
1554년(명종 9년) 3월, 덕흥군의 노비들과 그의 장인인 정세호의 노비들끼리 시비가 붙어서 사헌부가 덕흥군과 정세호를 추고할 것을 청하니 명종은 이를 허락하였다.[5]
사망
편집1559년(명종 14년) 5월 9일 졸하였다. 그 해 9월 17일, 경기도 양주군 남면 수락산 언덕에 예장하였다. 덕흥대원군묘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 왕의 능이 아닌데도 덕릉(德陵)으로 잘못 불리기도 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인근 마을 또한 덕릉마을로 불리고 있다
사후
편집선조의 즉위
편집1567년(명종 22년) 7월,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 균(鈞)이 후사 없이 승하한 명종의 뒤를 이어 선조로 즉위하였다. 덕흥군과 하동군부인은 이때 이미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선조는 명종과 인순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덕흥군과 하동군부인은 왕의 사친(私親)으로 격하되었다.
대원군 추존
편집선조는 즉위 후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삼사의 반대와 성리학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6] 삼사는 선조가 덕흥군의 아들이 아닌 명종으로부터 후계를 지명받아 명종의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했음을 이유로 덕흥군의 추존을 반대하였다.
1569년(선조 2년) 11월 1일, 선조는 북송 영종의 생부 복왕(濮王)을 추존하는 고사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생모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으로 추숭하고, 황백부모(皇伯父母)로 칭하기로 하였다.[1]
덕흥군의 장남이며 선조의 형인 하원군은 정1품에 가하고, 4대에게 작위를 내려 덕흥대원군묘를 봉사하게 하였다. 덕흥군의 사택은 도정궁(都正宮)으로 불리며 궁가(宮家)로 격상되었다. 이후 도정궁 후원에 가묘(家廟, 덕흥궁)를 세우고 신위는 백세토록 조천하지 않는 것으로 정하였다.[1]
1577년(선조 10년), 덕흥대원군의 어머니인 소용 안씨를 창빈(昌嬪)으로 추증하고, 하동부부인의 아버지인 정세호를 영의정에 추증하였다.[7]
덕흥대원군 한시
편집
- 반세우수이작옹(半世憂愁已作翁) / 반평생 우수(憂愁) 속에 이미 반늙은이 되었는데
- 성은여해읍무궁(聖恩如海泣無窮) / 바다 같은 성은(聖恩)이 눈물로도 끝이 없네.
- 인언가여인정근(人言可與人情近) / 사람들 말과 같이 인정(人情)에 끌린 것은
- 부자군신의역동(父子君臣義亦同) / 부자(父子)와 군신(君臣)도 그 의리 같을 진저.
— 《해동서첩》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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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편집
배우자편집
측실편집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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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다 《선조수정실록》 3권, 선조 2년(1569년 명 융경(隆慶) 3년) 11월 1일 (경오)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삼고, 하원군 이정에게는 작위 1급을 가하고 전토와 장획을 주다 - ↑ 가 나 〈덕흥대원군 태지석〉
황명 가정 9년(1530년) 3월 초5일 오시(午時)에 태어난 왕자 환수(歡壽)아기씨의 태를 가정 9년(1530년) 7월 16일 묘시(卯時)에 묻음 - ↑ 《중종실록》 94권, 중종 36년(1541년 명 가정(嘉靖) 20년) 3월 25일 (신해)
헌부가 덕흥군 가택의 사치와 조계상·이귀령 등의 추고를 아뢰다 - ↑ 《명종실록》 13권, 명종 7년(1552년 명 가정(嘉靖) 31년) 4월 23일 (을해)
사헌부에서 덕흥군 이초를 파직시킬 것을 건의하다 - ↑ 《명종실록》 16권, 명종 9년(1554년 명 가정(嘉靖) 33년) 3월 30일 (경오)
사헌부에서 덕흥군과 정세호를 노비가 투탁한 죄로 추고할 것을 아뢰다 - ↑ 《선조실록》 1권, 선조 즉위년(1567년 명 융경(隆慶) 1년) 11월 4일 (을묘)
석강에서 《예기》를 강하고 이황이 선조 생부에 대한 예가 어긋남을 지적하다 - ↑ 가 나 《선조실록》 11권, 선조 10년(1577년 명 만력(萬曆) 5년) 3월 24일 (신해)
안소용을 빈으로 추봉하고 정세호를 영의정으로 추증하다 - ↑ 정인지의 손자이며, 세종의 외증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