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HanKooKin/식민실증사학실태

인터넷시대에 가장 폐해중에 하나는 검증되지 않은 얘기들이 사실처럼 왜곡하여 여러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식민실증사학추종자의 그럴듯한 주장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만 논리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얘기일뿐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같은 시기를 불신의 시대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세계 4대 문명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 이집트 문명(나일 강), 황하 문명(황하 강), 인더스 문명(인더스 강)을 꼽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유적이 발견되고 있지만 그안에는 무수한 역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체 남겨진 유물이나 유적으로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하며 어렴풋이 문명역사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보다 더 오랜 역사들은 지질시대로 나눠 몇개로 구분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고생대(古生代), 중생대(中生代), 신생대(新生代)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중에 19세기에 들어 발견된 중생대공룡시대를 가장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중생대(中生代, Mesozoic era)라고 부르는 이 시대는 약 2억 2,500만 년 전부터 약 6,500만 년 전까지의 1억 6,000만 년간에 해당되는 시기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중생대'도 아닌 '신생대'에 생겨난 것입니다. 더구나 지구상에 인간이 출현한 것은 길게 잡아야 3백만 년 전이고 인류가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더욱 짧은 5천 년 ~ 6천 년 전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과학으로 증명해낸 지구의 역사입니다)

사실 기독교에서 태고적 우주의 역사까지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성서(Bible, 聖書)에서조차 몰랐던 중생대에는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의 3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중생대 무척추동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암모나이트(ammonite)이고, 척추동물로는 파충류, 특히 공룡류가 현저히 발전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육상식물로는 은행나무, 소철류, 소나무류 등의 겉씨식물이 번성하였다는 기록들이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이러한 공룡시대는 삶의 역사화석으로 확인되어 그 존재가 인정되고 있지만 인간들이 살아온 상고사 특히 신화시대에는 구전으로 내려와 바위, 대나무, 돌, 금속등에 일부 기록되거나 후에 파피루스나 종이, 모직류, 금속류 등에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록의 역사는 일부 B.C 1,500년의 기록이 있다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B.C 500년 전후를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기원신화(起源神話, origin myth)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원초기(原初期)의 자연, 인류, 문화를 설명하고, 그 생성과정을 얘기하거나 의의를 부여하는 설화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마다 분류가 다르겠지만 크게 우주기원신화, 인류기원신화, 문화기원신화, 곡물기원신화 등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것은 과학으로 증명해낸 인류의 역사입니다)

인간역사를 얘기할 때, 우선 기준이 되는 어느 시기가 필요하여 기원전, 기원후로 나누게 되었는데 기원전은 흔히들 BC(Before Christ)라고 하고 기원후는 AD(Anno Domini)라고 합니다. 다시말하면 기원전은 영어로 '그리스도 이전'을 뜻하는 '비포 크라이스트(Before Christ)의 약칭인데 서력 525년, 스키티아 출신의 연대사가(年代史家), 신학자인 디오니시우스엑시구스가 교황의 명을 받아 저술한 《부활절의 서(書)》에서 비롯하여 연대(年代) 표시의 기준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9세기 샤를마뉴 시대에 일반화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기원후라틴어로 '주님의 해'라는 뜻으로 누가 세상의 진정한 '주님'인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그리스도의 해'를 의미합니다. 기원후 역시 서력 525년, 신학자 디오니시우스엑시구스가 《부활절의 서(書)》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던 것이고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로마 건국 기원 754년에 두었지만 실제로는 3∼7년이 늦었던 것이 사실인데, 9세기샤를마뉴시대에 일반화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앙이 널리 보편화된 서구의 중심으로 이루워진 기원이어서 서력(西曆)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가 서구의 중심사상으로 자리잡은 것을 의미하기에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그보다 더 오래전에 탄생한 종교들이 그러하고 기원으로 삼을 수 있는 다른 인물에 대한 기록도 많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계인이 인정하는 기원의 설명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지금도 예수를 잘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잘알지 못합니다. 예수가 태어난 해와 날이 언제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탄절을 12월 25일로 기념하고 있지만 그것도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청년 20대에 무엇을 하였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태어난 곳이 이스라엘 베들레헴이지만 나사렛에서 오래동안 생활하여 왔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로 불렸습니다. 이스라엘유대교는 지금도 예수메시아(messiah)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서에서 구주(救主), 구세주(救世主)로 말하는 메시아가 아직도 오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물론 헤브라이어의 māša(기름을 붓다)의 명사형 masiah(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그리스어화 한 말(Christos)로 ‘그리스도’의 어원(語源)이 된 것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본래의 의미는 하느님의 대행기관으로서의 은사를 받은 자(사무상 8:7)로 왕이나 대제사장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대제사장(히브리서 9:23~28)으로, 예언자로, 왕으로 믿은 것(마태복음 16:16)도 이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역할은 하느님이스라엘 사이의 선택-계약 관계에서 그 중간을 다리 놓는 것으로, 영(靈)을 받은 자, 신(神)의 의사를 전달하는 자, 죄를 씻는 제사의 희생제물 공여자, 재판장, 새 생명을 통치하는 자 등의 의미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메시아의 개념은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시기에 점차로 개인에 대한 기대로 부각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기독교와 예수의 실태입니다)

이후 이것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와 고난이 오히려 메시아 신앙을 강건하게 하고 신학적으로 발전시키면서 메시아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메시아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7세기에 나타난 거짓 메시아 '샤베타이 체비'였는데 이와 같은 메시아에 대한 신앙과 기대는 유대교교리로 굳어졌으며, 유대교의 현대화 운동들은 더 이상 개인적인 메시아를 내세우지 않고 구원된 세계와 메시아적 미래에 대한 전통적인 신앙을 유지하려는 개념으로 변화하였습니다. 1648년 샤베타이 체비는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언하고 짧은 기간 안에 유대교 성지와 유럽,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던 유대인들로부터 재정적인 지원과 상당한 지지자들을 확보했으나 1666년초 오스만 투르크에 붙잡혀 개종이냐 죽음이냐의 양자택일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그해말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된메(Dönme) 즉 '개종자'라는 뜻의 터키어로 Dönmeh라고도 쓰는데 유대인의 한 종파로 남았지만 된메인들은 비밀스럽게 행동하고 따로 한 지역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이슬람교도들은 그들의 존재를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고 내부적으로는 성원들간의 사회적 계급 차이와 샤베타이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논쟁으로 많은 소(小)종파들로 분열되었던 것입니다.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전문직 계층 안에 많이 있었던 된메인들은 터키청년운동(Young Turk movement)과 1908년 혁명에 적극 참여했는데 데살로니카에 있던 된메인들의 중심 공동체는 1921~22년 그리스-터키 전쟁 이후 이스탄불로 옮겨가 점진적인 동화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과의 접촉은 끊어졌으며 된메인 스스로도 자신들을 유대교로 복귀시키려는 유대인들의 시도를 거부했습니다. 유대교이슬람교의 갈등은 한때 유대인팔레스타인의 전쟁으로 이어져 중동지역의 불씨가 되기도 했지만 이와같이 예수를 비롯한 메시아에 대한 논란은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개념메시아로 남게 되었습니다. (현재 유대교 메시아의 실체입니다)

한국인의 상고사는 무려 예수의 기원보다 수천년 전의 일입니다.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기에 선사시대(先史時代)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문헌사료(文獻史料)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 즉 문헌사료를 근거로하여 쓴 역사에서 취급하는 시대에 대하여, 19세기 이래 고고학의 발달에 의하여 새로이 알게 된 인류의 원시시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기에 있었던 일을 문자의 혼용이나 시대의 착오를 문제삼아 꾸며진 내용이나 허무맹랑한 사실처럼 폄훼하는 것은 신화설화의 본질을 모르고 하는 얘기입니다. 신화(神話, myth)란 무엇입니까? 어떤 신격(神格)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전승적(傳承的) 설화라고 얘기하는데 예를 들어 뉴기니의 카이족(族)은 그들의 생활양식을 바꾸기를 거절하는데, 그 이유로서 신화상의 조상인 넴이 행동한 대로 그들도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나바호족(族) 제식(祭式)에서의 영창자(詠唱者)는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까지도 태초에 성스러운 조상들이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생활양식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현실의 사물이나 행동을 신화로써 정당화하는 예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신화설화가 현실의 생활로 이어지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는 예는 인간의 정신세계에도 찾을 수 있는데 삶과 죽음에서 인간은 죽어야 할 존재로 양성(兩性)으로 나뉘었으며, 서로 싸우는 등의 현상은 초자연적 존재의 간섭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신화의 진실성은 실제로 존재하고 또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물과 현상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주창조 신화가 진실인 것은 세계가 현존함으로써 증명되며, 죽음의 기원신화(起源神話)의 진실성은 죽음이라는 사실로써 입증된다는 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문화기원신화나 곡물기원신화도 문화가 존재하고 가치를 인정함으로 인식될 수 있듯이 곡물같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의 구별을 통해 생활로 이어지고 있는 현상에서 찾을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한국인단군신화(檀君神話)는 그중에 하나로 단군의 출생과 기원에 관한 신화입니다. (이렇듯이 신화의 본질을 알아야 한민족의 단군신화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즉, 신격화된 이야기만이 신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제(天帝) 환인의 아들 환웅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무리 3,000명을 이끌고 내려와 신시(神市)를 세워 나라를 다스릴 때,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호랑이에게 마늘을 주면서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동굴 속에서 생활하라고 하였으나, 호랑이는 이 시련을 참지 못하여 나가고 은 웅녀가 되어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고, 그 단군고조선을 세웠다는 내용입니다. 한국인의 기원과 관련된 신화로서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여러 책에 실려 전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이 을 부족의 상징으로 하는 맥족(貊族)과 호랑이를 부족의 상징으로 하는 예족(濊族)을 평정하고 복속시키는 사실을 설화로서 전해주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많은 신화가 그러하듯이 상징성을 가지고 한국인의 기원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군신화』는 신들의 세계를 소재로 한 그리스 로마 신화와 달리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처럼 서로를 시기하고 다투는 것이 아닌, 세계가 하나 되어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는 한국인의 조상들의 소박하고 온화한 세계관을 엿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홍익인간(弘益人間)입니다.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국조(國祖) 단군(檀君)의 건국이념이며, 고조선 개국 이래 한국 정교(政敎)의 최고 이념이기도 합니다. 임시정부부터 한국의 건국이념이 되었고, 1949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주헌법에 바탕을 둔 교육법의 기본정신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곧 교육법 제1조에는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 공영(共榮)의 이상 실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단군을 부정한다는 것은 이러한 한국인의 기본정신과 건국이념의 근간을 해치는 일로 이율배반적인 자기모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단군을 대립관계로 볼 것이 아니라 상생의 관계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결코 우상숭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같은 기독교에서도 천주교개신교가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 것으로 조상을 우상숭배로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개신교내에서도 일부 목사들과 사학도들이 주축이 되어 모임을 만들어 단군을 한국역사의 한 인물로 보고 인정하기도 합니다. (국내 국사교과서, 백과사전 일부 인용, 참조)

몽매한 일부 식민실증사학추종자들이 단군한단고기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어떤 재야사학자를 사기꾼이라고 몰아붙입니다. 흔히 사기(詐欺)꾼은 '상습적으로 남을 속여 이득을 꾀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재야사학자가 어떤 이득을 꾀하는지 논리가 빈곤합니다. 누구는 사기사(詐欺師), 사기한(詐欺漢)으로 부르는데 단군을 찾는 것이 어떻게 상습적으로 남을 속여 이득을 얻는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내어 인세를 받는 것을 말함인지 어떤 명성을 얻고자 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강단사학자와 재야사학자를 구분하는 것조차 대한민국의 비극입니다. 송호정 교수가 단군신화는 '역사상 허구'라고 주장하는 자체가 어폐가 있지만 송교수를 예수처럼 추종하면서 사사건건 한국인의 상고사에 흠집내기를 하고 있는 실태를 보면 어이가 상실되고 맙니다. 요즘같이 수술을 통하여 얼굴을 성형하는 시대에 살면서 자신의 자식도 믿지 못해 친자확인까지 하는 현실 등에서 과연 어떤 것을 사기처럼 보는 것인지 잘못된 사관은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피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확실한 물증에 의해 허위, 날조, 왜곡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동북공정이나 독도문제에서 보듯 한국 고대사의 유물들이 수없이 나오고 증명할 기록들이 명백히 나와 있는데 중국이나 일본의 허위, 날조, 왜곡의 어거지 주장들이 계속되고 있고 사회에서 생겨나는 일들에서도 몇일, 몇개월, 몇년 전의 일도 물증이 없어 심증만으로 할 수 없는 범죄수사라고 미제사건으로 끝나는 사건들이 수두룩한데 2000년 전, 3000년 전, 4~5천년 전, 심지어 6~7천년 전의 물증과 자료를 찾는 것이 실증역사학의 기본이라면 이거야말로 넌센스가 아닙니까? 그러기에 이미 서양에서는 레오폴트 폰 랑케(1795∼1886)가 주장한 랑케사학 즉, 실증주의적 사관과 물질결정론적인 마르크스 역사학을 지나 막스 베버의 사회과학적인 정신,문화가치를 중요시하는 관점들로 수정되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이러하건대 한국에서만 유독 실증주의나 고증주의, 물증주의 같은 이러한 역사학에 몰입할 이유가 어디 있는지 한심할 따름입니다. 믿음은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생기는 법입니다.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예수를 믿고자하는 마음이 있어야 기독교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단군국조로 믿으면서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져 있는데 이같은 한국종교를 논외로 하더라도 역사신화로 몰아붙이며 정작 신화신화처럼 보지도 않는 사학계가 더 큰 문제입니다. 이렇듯이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실증사학이 또다른 식민사관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모순처럼 이중잣대들을 가지고 성서신화, 로마,그리스신화와 달리 단군신화를 폄훼하고 매도하는 것으로 이러한 실태를 만들고 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의 상고사로 상징되는 역사의 밑둥이 썩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과거의 교육법으로 제자가 스승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방법을 도제식(徒弟式)이라 했는데 일제의 그런 교육체계가 이같은 현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글들을 쓰는 사람들은 한국에 살면서 그저 '환빠'니 '일빠'니 하며 한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동족을 극우나 민족주의자로 몰아부치며 폄훼하는데 이골이 난 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국의 서안(西安)의 피라미드에 대한 고대 한국인의 조상들의 관련글에 대해 사기로 몰아붙이며 서슴없이 욕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세요. 중국인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서안의 피라미드를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있지도 않은 역사도 꾸며서 화려하게 선전하는 판에 그 호재를 왜 이용하지 않을까요? 지나인 즉, 한족(漢族)들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1980년대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요하문명 즉, 중국 만리장성 이북의 요하지역의 홍산문화(紅山文化)는 고조선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기에 충분합니다. 홍산문화(紅山文化)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문명 등 4대 문명보다 시기적으로 1000년 이상 빠른 요하(요서)문명이 세계적인 관심사로 대두하고 있는 가운데 요하문명의 '꽃'으로 조명받고 있는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국학술계에서 홍산문화를 '문명의 서광'이라고 말하면서 홍산문화황하문명을 앞지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요하지역 국가의 출현은 인류가 문명사회로 진입했다는 주요한 징표이고 5000년 전 동아시아에서 요서 우하량의 홍산문화가 유일하게 이러한 발전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홍산문화는 여신을 모신 사당, 원형 제단, 돌무더기를 쌓아 만든 돌무덤으로 대표되는데 여신과 함께 을 숭배하는 토템족이었다는 증거이고 '산해경(山海經)'에 고조선이란 나라가 있었다고 기록하여 '발해(渤海)의 모퉁이'인 요서 지역에서만 오직 이런 유적(돌무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단군고조선의 이해' '웅녀는 곰이 여자로 변한 것이 아니라 웅족의 여인' '단군은 당골 아닌 고조선의 제왕' '고조선신화가 아닌 천하를 경영한 제국' '고조선은 언제 어디서 건국되었나' '동아시아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요서에서 성립된 배경' '로마, 한(漢)왕조보다 위대한 고조선' 등에 대해 알아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또한 고조선 2000년의 역사는 세계 역사중 가장 오랜 통치기간이었고 태평성대를 구가한 시대였다는 것을 ‘논어’ 자한(子罕)편에 ‘공자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고 중국은 유사이래 23번 나라가 바뀌었지만 대한민국고조선부터 조선까지 단 7번의 나라가 바뀌었다는 것에서 여실히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록은 명나라때 오명제(吳明濟)의 ‘조선세기’에는 ‘단군은 동방 구이(九夷)의 나라 고조선의 지도자였다’는 내용과 ‘세종실록지리지’의 ‘단군고기’에는 조선(朝鮮)·시라(尸羅)·고례(高禮)·남북옥저(南北沃沮)·동북부여(東北夫餘)·예(濊)·맥(貊) 등 단군이 다스리던 구이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명된 기록과도 일치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고구려·신라·백제·고려·조선 등의 평균 통치기간이 500년을 넘는데 비해 중국의 나라들이 통치기간은 300년을 넘은 나라가 없었고 한족(漢族)으로 자부할 만큼 부강했던 한(漢)나라도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을 합쳐도 불과 231년를 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진시황(始皇帝, BC 259 ~ BC 210)으로 유명하면서 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였다가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진(秦)나라(BC 221∼BC 206)도 15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중국의 통일제국(統一帝國)으로는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던 당나라도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과도한 중화주의에 빠져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는 중국의 실체입니다)

사실이 이러하건대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 그저 흠집내기에 골몰하면서 '환빠들의 망상'이니 '환빠들의 허황된 역사'니 하며 몇몇 사람들은 재야사학자들의 연구와 동조하는 한국인의 관심을 이상한 방향으로 호도하며 사기꾼처럼 몰아대고 있는 겁니다. 더구나 이들이 하는 주장을 보면 박사학위까지 받은 재야사학자들을 마치 사기꾼인양 제멋대로 말하면서 자신들의 사관에 반하는 얘기들을 그럴 듯하게 꾸며 반박하지요. 그러나 어느 하나 올바르게 밝혀진 것도 아니고 증징자료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들의 사관만이 정의이고 실제적인 증거들들 갖고 있는양 얘기하지만 그건 교과서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저 증명할 자료가 없다는 것으로 이처럼 동족의 역사를 깍아내리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사기꾼으로 지칭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무협지나 게임스토리, 소설가에 지나지 않은 사람이 쓴 글에 내용을 정리한 것이고, 학교에서 배운 알량한 역사지식으로 제딴에는 소명의식이라 하면서 재야사학자나 환단고기고조선을 들먹이는 관심자들에게 맞공격놀이로 재미를 부친 자들에 불과합니다. 그이상 그이하도 아닙니다. 더구나 이들은 바로 실증사학의 첨병들처럼 행동 하지요. 정말 가관입니다. 어떤 글에서는 동족의 뿌리를 찾는 것마저 헛된 것처럼 얘기하며 사기극으로 몰아대는 겁니다. 그러나 무협지, 게임스토리, 환타지(fantasy)소설 작가에게 무슨 깊은 역사지식이 있어 곳곳에서 시비를 걸며 재야사학을 사기꾼으로 몰아대는지 모르겠습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내용이지만 어떤 자들은 그럴 듯하게 '유사역사학'이란 용어까지 만들어가면서 일제에 의한 식민지 근대화론에 동조하거나 동북공정을 주장하는 중국인들의 말에 항변은 고사하고 “중국의 주장이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는 모습을 볼 때는 한국사의 좀벌레같은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들은 과거 일제치하에서도 창궐했던 매국식민실증사학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모습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매국식민실증사학이야말로 이병도에서 이어진 식민사관의 사학도들이 아닙니까? 일본인(日本人)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이병도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본거지로 사용되었던 경성제국대학에서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역사의 왜곡에 앞장섰던 자들입니다. 당시 근대사의 기록에도 뚜렷이 남아 있듯이 민족를 폄훼하는 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행되고 있었던 일입니다. 일제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던 경성제대는 1922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중추원(中樞院)에서 시행(施行)하던 소위「조선반도사편찬사업(朝鮮半島史編纂事業)」에 의해 쓰여진 '조선 반도사'를 교묘하게 합리화 시켜 불순한 목적의 대학답게 '식민사학'을 맹렬히 전파하여 지금도 우린 거세된 상고사 역사를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한국민족의 활동무대였던 현재의 중국 땅을 완전히 배제시키고 일제가 서양에서 들여온 랑케의 실증사학으로 철저히 고증과 문헌, 유물을 토대로 한국의 상고사를 왜곡, 날조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미 예고된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상고사를 주도적으로 은폐, 날조, 말살했는데 어떤 근거.자료가 남아 있어 반박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런 떳떳치 못한 과거를 갖고 있기에 그나마 일부 의식있는 교수들이 앞장서 "서울대가 1924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을 기념하거나 역사적 자산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현재 알량한 역사지식으로 재야사학을 왜곡매도, 폄하하는 자들은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식민,실증사학추종무리에게 배우거나 들은 내용이 전부이고 사실 그들도 그 무리에 속해 놀아나는 자들에 불과한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저 깍아내리는 것이 정의이고 양심적인 사학도들의 모습이라는데 정말 대한민국의 사학계도 문제지만 이렇게 곳곳에 넝쿨처럼 뻗어내려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으니 심각한 문제꺼리입니다. 더구나 이들이 세상을 살리는 예수의 제자처럼 행동하니 이들이야말로 종교이지요. 이들의 행동은 정말 가관입니다. 현재 한국어로 된 위키백과의 고대 상고사와 그 이후의 한국사를 보면 그들의 시각에서 폄훼되어 편집되고 있으니 인터넷의 오독의 피해가 느껴지는 일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위키백과의 편집이 10대와 20대의 참여도가 높은 이유로 그 피해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옳은 판단을 기대합니다. 다음은 판단에 도움이 될 만한 글들입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일제에게 당한 치욕을 잊지 말고 와신상담하며 미래를 준비하라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