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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녕 최씨(朔寧 崔氏)는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삭녕 최씨 (朔寧 崔氏)
관향강원도 철원군
시조최천로(崔天老)
중시조최유가(崔瑜賈:價)
집성촌광주광역시 남구 구소동
원주시 지정면
경기도 광주시
전라북도 남원시
경상남도 사천시
주요 인물최사유, 최민, 최항, 최영린, 최영호, 최수언, 최흥원, 최응룡, 최영수, 최치옹, 최한기, 최병주, 최문경, 최세경, 최성석, 최희준, 최성홍, 최병학, 최명희, 최인석, 최현일(崔鉉馹), 최강희, 최진한
인구(2015년)58,142명
비고삭녕최씨 전국대종회

역사편집

시조 최천로(崔天老)는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고 한다. 시조가 대대로 살던 곳은 강원도 철원군 마장면 대전리 괴음촌이며, 현재는 휴전선 안에 위치하고 있다.

최천로(崔天老)의 후손 중시조(中始祖) 최유가(崔瑜賈:價)는 고려시대 1169년 기축방(己丑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추밀원사(樞密院使)를 거쳐 참지정사(知政事)를 지냈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다.

최유가 이전 이후 중간 세계가 전해지지 않아 상고할 수 없으므로 친어모군낭장(親禦侮軍郎將) 최선보(崔善甫)를 1세조로 하는 낭장공파(郎將公派)와 함경전부사(含慶殿副使) 최연(崔珚)을 1세조로 하는 부사공파(副使公派)의 두 계통(系統)이 존재(存在)하고 있다.

삭녕 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3명, 영의정 2명을 배출하였다.

본관편집

삭녕(朔寧)은 경기도 연천군(漣川郡)과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일부지역에 위치했던 지명이다. 고구려 때에 소읍두현(所邑豆縣)이라 불리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삭읍(朔邑)으로 개칭되어 토산군(兎山郡)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삭녕으로 이름을 바꾸고, 1018년(현종 9)에는 동주(東州: 鐵原)에 병합되었다가 1107년(예종 2)에 승령현(僧嶺縣)으로 이속되었다. 1413년(태종 14)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여 승령현을 병합하였고, 1414년에 안협현(安峽縣)을 합쳐서 안삭군(安朔郡)이 되었다. 1416년에는 안협현을 분리하여 부활시키고 삭녕군으로 개편되었다. 1896년에 경기도 삭녕군이 되었다. 1914년 삭녕군이 폐지되어 내문면(內文面), 인목면(寅目面), 마장면(馬場面)은 강원도 철원군에 속하였고, 나머지는 연천군에 병합되었다

인물편집

  • 최사유(崔士柔, 1372 공민왕 21 ~ 1455 단종 3년) : 조선전기의 문신(朝鮮前期의 文臣)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휘지(徽之). 최선보(崔善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충(崔忠)이고 아버지는 호조전서(戶曹典書) 최윤문(崔潤文)이며 어머니는 어백유(魚白游)의 손녀딸이다. 영상(領相)을 역임한 최항(崔恒)이 아들이다. 1399년(정종 1) 생원시·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02년(태종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09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지냈고, 1414년 장흥 고사(長興庫使)을 지냈고, 1432년(세종14) 사간원 좌헌납을 지냈다. 1455년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二等)에 녹훈(錄勳)되었다. 한림(翰林,) 직제학(直提學), 지사(知事),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누천(累遷)하여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퇴거하여 경사를 읽으며 세월을 보내다가 뒤에 수직(壽職:80세 이상의 노인에게 은전으로 주는 벼슬]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태어정집(太虛亭集)에 "두 고을 수령을 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는 아들 최항이 지은 태허정집(太虛亭集) 「최사유 행적」에 두 고을(의성현령義城縣令, 용담현령龍潭縣令)의 수령을 지냈던것으로 추정된다.
  • 최민(崔岷, 생ㆍ졸년 미상(生ㆍ卒年 未詳) : 본관(本貫)은 삭녕(朔寧) 이다. 태종(太宗) 5년(140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7위(17/33)로 문과에 급제하여 1421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1423년 의금부 지사(義禁府知事), 1425년 나주판관(羅州判官), 1451년 도관 정랑(都官正郞), 군수(郡守)를 역임(歷任)하였다. 참고문헌(參考文獻)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최항(崔恒, 1409년 ~ 1474년) :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에 특수된 이후, 18년간 집현전 관원으로써 훈민정음 창제시에 세종으로부터 직접 명을 받아 주관하였으며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훈민정음 해례, 경국대전 등을 찬진하였고, 각종 편찬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문물제도 정비에도 큰 공을 세웠으며, 역사, 어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고, 영의정을 두 차례나 역임하였다.
  • 최영린(崔永潾, ? ~ ? ) : 자(字)는 천명(泉明) 호(號)는 석포(石圃) 1462년(세조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64년(세조10) 9월 8일에 『의서유취(醫書類聚)』 편찬에 참여한 공으로 이미 행 사헌장령(司憲掌令)을 제수받고, 그 해 11월 23일에는 종부소윤(宗簿少尹)에까지 올랐다. 당시 3품(品) 이상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3품 고신을 다시 바쳐야 했는데, 세조는 최영린이 통정대부(通政大夫) 고신을 바치려고 하자 그럴 필요가 없다하며 받지 않았다.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으로 1466년(세조 12) 고성춘시(高城春試)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였다, 1469년(예종 1)에는 사섬시정(司贍寺正)을 역임하였으며, 1470년(성종 1)에는 예문관(藝文館)의 겸관(兼官)으로 차정(差定)되었고, 그 해 9월 16일에는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1472년(성종 3) 11월 16일에는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냈고, 1474년(성종 5) 9월 14일에는 해조당상(該曹堂上)을 맡았다.
  • 최영호(崔永灝, 1457년世祖 3 ~ 1481년成宗 12, 10月) : 자(字)는 처인(處仁) 1457(世祖3 天順 1 丁丑)년에 서울 서소문안에서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문충:문정(文忠公:文靖公)공 (崔恒)의 차자(次子)로 출생. 총명 절륜하여 장사랑(將仕郞) 藝文館(예문관) 한림(翰林)을 지내고 1477(성종 8 成化13 丁酉)년 21세 때 식년시(式年試) 춘당대시(春塘臺試) 문과(文科)에 병과1위(丙科一位)11위 소년급제(少年及第)하였다. 특명(特命)으로 사제감정(司宰監正)에 제수되고 이어서 사도시정(司導寺正)을 거쳐 사옹원정(司饔院正)에 전임되었다. 경차관(敬差官:判事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하는 특수직책으로 전곡(田穀)의 손실을 조사하고 민정을 살피는 임무)으로 경상남도(慶尙南道) 고성(固城) 임지(任地)에서 급병을 얻어 1481(成宗12)년 10월에 25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逝去)하자 성종대왕과 대신들 까지 조야(朝野)에서 그의 문재(文才)를 애석해 하였으며 후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도 "재능문고(才能文高)한 공(公)이 큰 뜻을 펴지 못하여 사람마다 애통(哀痛)"해 했다고 전(傳)한다. 조정(朝廷)에서는 증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겸 지경연 홍문관예문관대제학 성균관사 판의금부사 세자이사(贈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兼 知經筵 弘文館藝文館大提學 成均館事 判義禁府事 世子貳師)에 증직(贈職) 되었다. 묘(墓)는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 둔전골에 임좌(壬坐)로 있으며 묘비가 있다.
  • 최수언(崔秀彦, 1475년 ~ 1517년) : 자(字)는 온(溫) 중종조(中宗朝) 문인(文人)으로 진사(進士)에 급제(及第)하여 예문관 한림(藝文館 翰林)을 거쳐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를 역임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라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지경연사(知經筵事),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임(兼任)하였다. 판서공파 파조(判書公派 派祖)이다.
  • 최흥원(崔興源, 1529년 ∼ 1603년) : 최항의 증손.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영평부원군(寧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 되었으며,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추록되었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녹선(錄選)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최응룡(崔應龍 ? ~1592년 宣祖 24, 7월10일) : 조선중기(朝鮮中期)의 문신(文臣)이자 의병장(義兵將) 이다. 자(字)는 사서(士瑞). 호(號)는 송암(松巖). 본관(本貫)은 삭녕(朔寧)이다.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영의정(領儀政) 문충공(文忠公) 최항(崔恒)의 현손(玄孫)이며, 증 형조참의(贈 刑曹參議) 최경립(崔卿立)의 아들이다. 일찍이 음사(蔭仕)로 여러 관직(官職)을 역임(歷任)하고,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이후 통정대부행주부(通政大夫行主簿)로 세상(世上)이 어지러워지자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고향(故鄕)으로 낙향(落鄕)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남평(南平)에서 아들 참봉(參奉) 최영수(崔永水)와 함께 가동(家僮)을 이끌고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였다. 주부(主簿) 홍민언(洪民彦), 사인(士人) 최후립(崔厚立)ㆍ최홍립(崔弘立)형제와, 그리고 장정(壯丁)들이 자원(自願)하여 찾아와 300여명의 남평의병(南平義兵)을 창의(倡義)하였다. 그는 남평의병의 수장(首將)으로 의병장(義兵將)에 추대되어 6월 3일 월파(月波) 류팽로(柳彭老)가 이끄는 옥과의병(玉果義兵)과 합류(合流)하여 전라좌의병(全羅左義兵)의 의병진(義兵陣)이 이루워졌다. 북진하여 금산(錦山)으로 향(向)하던 중 고경명(高敬命) 의병과 연합합류(聯合合流)하였다 진산과 여산을 지나 금산(錦山)에 이르렀다. 7월 9일 왜적(倭敵)과 싸워 수백명을 무찌르고 승전(勝戰)하였다. 다음날인 7월 10일에 그는 아들 최영수(崔永水)에게 선봉(先鋒)에 나아가 왜적(倭敵)을 대적(對敵)하게 하여 왜적 수십명을 참살(斬殺)하였다. 그는 퇴각(退却)하지 않고 검(劒)을 빼들고 호령(號令)하며 수 많은 왜적(倭敵)을 참살(斬殺)하다 온 몸에 상처(傷處)를 입고 아들 최영수(崔永水)와 함께 역전분투(力戰奮鬪)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敗)하여 부자(父子)가 함께 순국(殉國)하였다. 1605년(선조 38) 조정(朝廷)에서는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부자(父子)가 함께 전사(戰死)하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하였다. 사후(死後)에 증 정헌대부 이조판서(贈 正憲大夫 吏曹判書)에 시호(諡號)는 충절(忠節)이다.
  • 최영수(崔永水, ? ~1592년 宣祖 24, 7월10일) : 자(字)는 원집(原集), 호(號)는 죽봉(竹峰),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최항(崔恒)의 5대손(五代孫)으로 송암(松巖公)공 최응룡(崔應龍)의 아들로 참봉(參奉)을 지내던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버지 최응룡(崔應龍)의 창의(倡義)에 전라도(全羅道) 남평(南平)에서 모의(募儀)하여 父親(부친)을 따라 선전관(宣傳官)으로 종군(從軍)하여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수 많은 왜적(倭敵)을 참살(斬殺)하고 역전분투(力戰奮鬪) 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敗)하여 왜적(倭敵)의 적봉(敵鋒)에 전사(戰死)하였다. 1605년(선조 38) 조정(朝廷)에서는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부자(父子)가 함께 전사(戰死)하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하였다. 사후(死後)에 증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贈 通政大夫 承政院 都承旨)에 시호(諡號)는 무열(武烈)이다.
  • 최치옹(崔致翁, 1635년 ~ 1683년) : 1660년(현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옥구현감을 거쳐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글씨를 잘 써서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보조국사감로탑비문(普照國師甘露塔碑文)」이 전한다.
  • 최한기(崔漢綺, 1803년 ~ 1877년) : 최항의 방계혈족이며, 최사렴(崔士廉)의 후손이다. 조선 말기의 실학자.
  • 최병주(崔丙柱, 1903년 ~ ?) : 대법관
  • 최희준(崔喜準, 1936년 ~ 2018년) : 가수. 제15대 국회의원.
  • 최명희(崔明姬, 1947년 ~ 1998년) : 소설가. 대표작 《혼불》의 배경인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는 삭녕 최씨의 500년 된 집성촌이다.
  • 최인석(崔寅奭, 1957년 ~ ) : 제19대 울산지방법원장
  • 최현일(崔鉉馹) 1957년 ~ ? ) : 자(字)는 백룡(伯龍),진원(眞元),상열(尙烈), 호(號)는 효암(效巖) 본관(本貫)은 삭녕(朔寧)이다.

최강희(崔康熙, 1959년 ~ ) : 前 축구 선수. 전북 현대 모터스 감독.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편집

항렬자편집

19世 우(遇), 20世 구(九), 21世 병(炳), 22世 우(宇), 23世 성(成), 24世 범(範), 25世 강(康), 26世 신(新), 27世 성(聖), 28世 규(揆)

통일항렬(統一行列)

25世 현(鉉), 26世 수(洙), 27世 상(相), 28世 환(桓), 29世 섭(燮), 30世 재(載), 31世 승(丞), 32世 운(雲), 33世 춘(春), 34世 헌(憲), 35世 오(梧), 36世 경(京), 37世 순(純), 38世 용(容), 39世 원(元), 40世 탁(卓),

집성촌편집

인구편집

  • 1985년 9,027가구 37,872명
  • 2000년 12,055가구 38,736명
  • 2015년 58,142명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