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인

성석인(成石因, ? ~ 1414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유(自由), 호는 상곡(桑谷)이다. 초명은 성석연(成石珚)이었으나 왕의 휘(諱)를 피하여 성석인(成石因)으로 개명하였다. 대제학을 지내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1]

생애편집

1377년(고려 우왕 3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390년(공양왕 2년) 경연(經筵) 강독관(講讀官)으로서 우왕을 비판하였다.[2]

조선에서는 예조전서(禮曹典書)를 거쳐 강원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로 나갔고, 대사헌을 거쳐 1407년(태종 7년)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랐다.[3] 이어 형조·호조·예조 등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414년(태종 14년) 예조판서로서 왕에게 공사(公事)를 아뢰다가 중풍(中風)으로 말을 하지 못하여 부축되어 나오다가 곧 절명하였다. 우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평가편집

《태종실록》의 성석인 졸기에 사신(史臣) 류사눌(柳思訥)이 다음과 같이 평했다.[4]

성석인은 천품이 바르고 밝으며, 행동이 온화하고 양순하여 청환(淸宦)과 요직(要職)을 역임하였으나, 일찍이 교만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조정(朝廷)에 봉명 사신(奉命使臣)으로 가서 독화(黷貨)의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어서 또 사리(事理)에 어둡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오히려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저서편집

  • 《상곡집(桑谷集)》

가족편집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