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도공

김양도 (양도공) (良圖公)은 (610년 ~ 670년, 풍월주 637년 ~ 640년)신라의 22대 풍월주이다.

신라 중기의 귀족ㆍ장군ㆍ관인이다. 김유신(金庾信)을 따라 백제고구려를 칠 때 참전해 공을 세웠다. 관등은 파진찬(波珍湌).

진평왕보명궁주의 딸인 양명공주하종과 미모낭주 설씨의 아들인 모종공의 아들이다.

백제를 쳐서 수도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킨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7년(660년)에 (唐)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옛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 있던 정림사의 석탑 표면에 새기게 한 『당평제비』 비문에는 "우무위중랑장(右武衛中郞將) 김양도(金良圖)"로 기재되어 있다. 문무왕(文武王) 원년(661년) 2월에는 사비성을 탈환하려는 백제 부흥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당군을 구원하기 위해 편성된 원군의 대당장군(大幢將軍)이 된 이찬(伊湌) 김품일(金品日)의 부장으로서 왕자 문왕(文王)과 함께 참전하였다. 문무왕 2년(662년)에는 김유신을 따라, 평양(平壤)을 포위한 소정방의 당군에게 군량을 가져다주기 위한 임무를 띠고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파견되었다. 문무왕 8년(668년) 6월에 고구려 공격을 위해 편성된 신라군 지휘부의 38총관 가운데 대당총관(大幢總官)으로서 신라군을 거느리고 당군과 합세해 고구려를 멸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둔 것을 계기로 현지에 대한 직접지배를 시도하는 한편, 신라왕에게도 계림주대도독이라는 작위를 주는 등 신라까지 당의 지배하에 넣으려 했다. 신라는 이에 맞서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며 옛 백제 땅에 주둔해 있던 당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나당전쟁). 당이 이를 문제삼자 해명을 위해 문무왕 9년(669년)에 각간(角干) 김흠순(金欽純)과 함께 당나라에 파견되었으나 고종(高宗)에 의해 억류되어, 흠순과 함께 장안(長安)의 감옥에 갇혔다. 이듬해(670년) 당 조정은 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했으나 양도는 그대로 억류되었고, 그곳에서 옥사했다.

당대에 문장에 뛰어났다고 알려졌으며, 생애에 모두 여섯 번 당에 파견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어려서 귀신의 장난으로 온몸이 마비되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병을 앓았다가 승려 밀본(密本)의 도움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었고, 그 일을 계기로 불교를 깊이 믿게 되어 흥륜사(興輪寺) 금당의 미륵존상과 좌우 보살의 진흙상을 빚어 모시고 그 벽에는 으로 불화(佛畵)를 그렸으며, 두 딸인 화보(花寶)ㆍ연보(蓮寶)를 불문에 귀의시키고 흥륜사의 종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생애편집

출생편집

양명공주는 본래 보종의 부인이었다. 색사에 관심이 없었던 아들 보종 때문에 고민하던 미실은 왕경의 여자들을 모아놓고 보종과 합하면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 사이에 있던 양명공주는 꾀를 내어 보종을 유혹했고 보라보량, 두 딸을 낳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보종은 또다시 색사에 무관심해졌다. 그 사이 길몽을 꾼 양명은 태몽임을 확신하고 보종에게 합하길 바라나 보종은 대자로 누워 자버렸다. 옆에서는 보종의 조카 모종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보종이 잠결에 발을 움직였고 먹물이 모종의 옷을 적셨다. 양명공주는 옷을 빨아주겠다고 했고 모종과 자연스럽게 합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도가 태어났다. 양도는 보종을 아버지로 알고 자랐다. 그래서 모종을 숙공(叔公)이라 불렀다.

성장편집

어린 양도는 어머니인 양명공주에게 자신의 작명을 어찌하였냐고 물었다. 보종을 아버지로 섬기는 어린 양도를 위하여 양명공주는 "그림을 잘 그리길 바라며 지었다"고 말했다. 사실은 양도를 잉태하던 날, 모종이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들은 양도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여 군도를 잘 그렸다고 한다. 나중에 모종이 친부임을 알게 된 양도가 모종을 아버지로 섬기려 하자, 모종은 거부하였다.

혼인편집

양명공주와 보종의 딸이었던 보량궁주는 진평왕의 후궁으로 보로전군을 낳았다. 그러나 승만황후의 투기로 궁중에서 물러난 보량궁주는 양도와 혼인하길 바랐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양도는 근친혼을 꺼려했고 보량궁주는 앓아누웠다. 그러자 양명공주가 나서서 혼인을 주선했다. 혼인 후 양도는 보량을 섬기기만 할 뿐, 아내로 대하지 않았다. 이에 보량이 화를 내자 양도는 "큰 사랑은 공경하기를 신같이 하고 작은 사랑은 희롱하기를 옥같이 한다"라는 말을 해 보량의 화를 풀었다. 감동을 받은 보량은 늘 품 속에 보도를 지니고 다니며 양도가 죽으면 자결한 뜻을 품었다고 한다. 양도도 보량을 아껴 보량이 폐신 찰의와 통정하는 것을 내버려두고, 작은 낭정을 맡겼다고 한다.

조직 개편편집

낭두 조직은 원래 7등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최하 등급에 망두가 있었고, 그 위에 신두-낭두-대낭두-낭두별장-상두-대두-도두의 등급이 있었다. 양도공은 도두 위에 대도두와 대노두를 추가로 설치하여 총 9등급으로 확대ㆍ개편하였다. 그리고 도두 이하로는 각각 별장을 두어서 벼슬길을 넓히고 지위를 높여주었다. 낭도는 나이를 기준으로 동도와 평도, 대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낭도는 낭두 조직으로 올라갈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대도 중에서 입망 절차를 거친 사람은 낭두의 최하 등급인 망두가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입망이란 낭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낭두가 되는 방법을 의미하는 ‘입망의 법’에 의하면, 상선과 상랑의 마복자가 아니면 낭두가 될 수 없었다. 마복자는 이미 임신한 여자가,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 사랑을 받은 후에 낳은 아들을 의미한다. 마복자를 얻기 위해서 낭두의 처들은 산 꿩을 예물로 바치고 선문(仙門)에 들어가 탕비(湯婢)가 되었다. 며칠 혹은 몇 달에 걸쳐서 총애를 받으면 물러나는데, 이때 남편인 낭두는 재물을 들여 예를 갖추고 이를 맞이하였다. 이것을 사함(謝函)이라고 한다. 부인이 아이를 낳고 3개월이 지나면 양과 돼지를 예물로 하여 다시 선문에 들어가는데, 이것은 세함(洗函)이라고 한다. 또 위로부터 총애를 받은 부인이 며칠 혹은 몇 달 만에 물러나면 남편이 다시 사함 의례를 통해 부인을 맞이하였다. 이렇게 낭두들이 사함-세함-사함 의식을 통해서 마복자를 얻으면, 이 마복자는 상선이나 상랑의 자식이 아니라 생부의 자식이 되었다. 이러한 마복자들만이 낭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낭두에게는 마복자 제도가 자기 자식을 대대로 낭두로 만드는 일종의 사회적 장치가 되었다. 동시에 마복자를 거느린 사람과 마복자가 된 사람은 서로에게 후견인과 지지 세력이 되어 주었다. 이렇게 입망제도를 거쳐야만 낭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낭두가 자식을 많이 낳으면 마복자를 얻기 위해 재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그리고 경박한 여자들은 입망제도를 역이용해서 거짓으로 임신했다고 속이고 선문에서 노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거짓이 탄로날까봐 선문의 예졸들과 관계를 맺거나 진짜 상선의 자식을 임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양도공은 입망의 법을 개혁하고 사함을 금지시킴으로써 이러한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봉화는 화랑에게 청례를 받지 못하면 시집을 갈 수 없었다. 낭두들 역시 부인을 맞이할 때 봉로화나 봉옥화가 아니면 처로 삼지 않았다. 이것은 마복자와 마찬가지로, 낭두가 혼인을 통해 처가 총애를 받았던 화랑을 지지 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청례를 하지 못한 봉화는 늙을 때까지 선문에서 있으면서 예졸들에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양도공은 봉화가 청례를 받아야만 시집을 가는 관행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유화는 주로 남도(南桃) 지역에 머물면서,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는데, 이 역시 양도공이 바로잡았다. 이처럼 양도공 때에는 낭두 조직을 확대하고, 낭두ㆍ낭도 조직의 폐단을 개혁함으로써 화랑도 조직이 더욱 건실해졌다.

가족 관계편집

보량과 돈독한 사이를 과시했지만 실제로 색을 좋아하여 낭두의 처들이 양도의 아이를 많이 낳았다. 또한 애첩의 친척을 아끼는 듯 옳지 못한 처사가 많았다.

선대편집

부인과 후손편집

  • 누이이자 부인: 보량궁주 설씨(寶良宮主 薛氏)
    • 아들: 양효(良孝)
    • 딸: 양시(良時)
  • 정인: 능보(能寶)
  • 정인: 춘화(春華) - 17대 풍월주 염장공(廉長公)의 딸
  • 정인: 천운(天雲)
  • 정인: 명란(明蘭)
    • 서자: 10명의 아들과 10명의 딸

양도공이 등장한 작품편집

전임
선품공
제22대 풍월주
후임
군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