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

대한민국의 남자 야구인

이종범(李鍾範, 1970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이다. 현역 시절 KBO 리그KIA 타이거즈, 일본 프로 야구주니치 드래건스에서 내야수, 외야수로 활동했다. 팀의 정신적 지주이자 구심점으로 활동했으며 '야구 천재', '종범신, '바람의 아들'로 불렸다.[1][2]

이종범
텍사스 레인저스

이종범(2015년)

기본 정보
로마자 표기 Lee Jong-beom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70년 8월 15일(1970-08-15)(53세)
출신지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주시
신장 178cm
체중 73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유틸리티 내야수, 좌익수, 중견수, 우익수, 포수, 지명타자
프로 입단 연도 1993년
드래프트 순위 1993년 1차 지명(해태 타이거즈)
첫 출장 KBO / 1993년 4월 10일
광주LG
NPB / 1998년
마지막 경기 KBO / 2011년 10월 12일
광주SK
NPB / 2001년
획득 타이틀
  • 1993년, 1997년 KBO 한국시리즈 MVP
  • 1993년~1994년, 1996년~1997년 KBO 유격수 골든 글러브
  • 1994년 KBO 타격왕, 정규 시즌 MVP
  • 1994년, 1996년~1997년, 2003년 KBO 도루왕
  • 2002년~2003년 KBO 외야수 골든 글러브
  • 2003년 미스터 올스타
경력

선수 경력

코치 경력

감독 경력

해설자 경력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WBC 2006
아시안게임 1990, 2002
월드컵 1990
대륙간컵 1989, 1991
아시아선수권 1989, 1991, 2003
이종범
한글 표기: 이종범
한자 표기: 李鍾範
개정 로마자 표기: I Jongbeom
매큔-라이샤워 표기: I Chongpŏm
예일 표기: I Congpem
공식 로마자 표기: Lee Jong-beom

1993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고 1997년 시즌 후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했다. ‘한국의 이치로’라는 평가를 받으며 기대를 받았으나, 기량 부족, 적응 실패, 팔꿈치 부상으로 부진을 거듭했고 2001년 시즌 중 국내에 복귀했다.[3] 2012년 시즌 준비 중 당시 감독이었던 선동열, 수석코치였던 이순철 및 구단에게 은퇴 권고를 받고 2012년 3월 31일에 은퇴를 선언했다.[4] 2012년 5월 26일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에서 모든 선수들이 7번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임했고, 경기 후 은퇴식을 치렀다. 그의 등번호 7번은 영구 결번으로 남았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한화 이글스의 주루코치를 담당했고, 2014년 11월 6일 MBC 스포츠플러스와 계약을 맺고 2015년 시즌에 야구 해설자로 변신했다. 2016년에 장남 이정후넥센 히어로즈에 1차 지명되자 KBO 리그 역대 최초로 1차 지명이자 리그 MVP로 프로에 입성한 부자(父子)로 화제를 모았다.[5][6]

프로 선수 경력 편집

해태 타이거스 편집

1993년에 1차 지명을 받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건국대에 앞서 한때 동국대 진학을 염두에 뒀으나 건국대로 방향을 틀었다.[7] 1993년에 공수주에서 화려한 플레이를 펼쳐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같은 해 한국시리즈에서 맹활약해 신인으로는 김정수 이후 두 번째로 시리즈 MVP에 올랐다. 아쉽게도 신인왕은 양준혁에게 밀려 수상에는 실패했다. 이후 1994년에 84도루로 역대 시즌 최다 기록을 세우고, 3할대 후반 타율, 196안타를 기록했다.

주니치 드래건스 편집

이종범은 원래 유격수였지만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한 후 외야수로 전향했다. 6월 23일에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투수 가와지리 데쓰로가 던진 120km/h대 커브에 팔꿈치를 맞아 골절상을 당한 뒤 9월에 복귀했다. 하지만 67경기 출전에 그치며 성적 부진을 겪고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원형 탈모증까지 생겼다. 결국 그는 퇴단을 결심하고 계약을 해지했다. 그 후 미국행을 추진했지만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사장이었던 정기주가 일본을 방문해 대한민국 복귀를 설득했고, 때마침 2001년 7월 현대자동차그룹이 친정 팀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해 KIA 타이거즈로 재창단한 시기에 그는 4년만에 국내로 복귀했다.[8][9] 투수 가도쿠라 겐과 동료였다.

KIA 타이거즈 편집

 
KIA 타이거즈 시절의 이종범(2011년)

이종범은 2001년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며 KBO 리그에 복귀했고 복귀한 후에도 외야수로 출장했다. 2003년에는 20-20 클럽에 가입했다. 그 해 20홈런, 50도루를 기록했고, 50도루는 2003년 시즌 도루 부문 최고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당시 최고령 20-20 클럽 가입이었다. 2006년 WBC 국가대표로 뽑혀 주장을 맡았고, 대회 후 베스트 9에 뽑히는 등 발군의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정작 2006년 시즌 중에는 부진했고, 2군으로 강등됐다. 그 해 시즌 2할대 타율, 1홈런, 21타점, 10도루 등 입단 이래 최악의 성적을 거뒀다. 이러한 부진은 2007년에도 계속돼 1할대 타율로 매우 부진하며 2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2008년에 60% 삭감된 2억원의 연봉에 재계약했다. 그 해 5월 한 달 동안 타율 0.389, 28안타, 15타점으로 월간 MVP에 선정됐고, 1루수로 출장해 투수 외 전 포지션을 소화했다. 2008년 6월 3일에 역대 8번째 1500안타 기념패를 수상했다. 2008년까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은퇴 위기에 몰렸으나 2009년 시즌에 부활했다. 2009년 6월 5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최소 경기(1439경기) 통산 500도루, 네 자릿수 득점을 달성했다.[10][11] 그 전에 그가 통산 499도루를 기록한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끝난 이후에 광주에서 기록을 세우겠다.”라고 밝히며 기록 달성을 미뤘다.[12] 복귀 후 2009년에 팀의 10번째 우승이자 그의 4번째 우승을 이끌었고, 이용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2010년 7월 9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2루타를 쳐 한일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국가대표팀 경력 편집

건국대학교 재학 시절인 1989년 6월에 처음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13] 그 해 8월에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에서 열린 1989년 인터콘티넨털컵에 참가하면서 국제 대회에 처음 출전했으며 4위로 대회를 마쳤다. 같은 해 9월에는 자국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1988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으며 일본의 뒤를 이어 중화 타이베이와 공동 준우승을 차지했다. 11월에는 중화민국 타이베이에서 열리는 국제 야구 연맹(IBA) 회장배에 참가하여 대표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1990년 8월에는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1990년 야구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예선 A조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로는 최초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다.[14] 대한민국 대표팀은 쿠바니카라과의 뒤를 이어 3위에 올랐으며, 이 공로로 1991년에 대표팀 동료 선수들과 함께 체육훈장 기린장을 받았다.[15] 같은 해 10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1990년 아시안 게임에 참가했다. 해당 대회 야구 종목은 시범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대한민국팀은 일본의 뒤를 이어 2위에 올랐다. 11월에는 타이베이에서 열린 국제 야구 연맹 회장배 대회에 참가하여 3위의 성적을 거뒀다.

1991년 6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국제 야구 연맹 회장배 대회에 참가했으며 대한민국 대표팀은 6경기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해 7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1991년 인터콘티넨털컵에 참가했고 예선에서 6승 3패의 기록으로 메달 결정전 진출에는 실패했다. 9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1990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이 대회는 1992년 하계 올림픽 야구 예선을 겸한 대회로 대표팀은 일본과 중화 타이베이의 뒤를 이어 3위를 하면서 올림픽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후 대학 4학년이 되자 프로 입문을 앞두고 국가대표팀에서 제외되었으며 프로 선수들의 국제 대회 참가가 허용된 후인 2002년 부산에서 열리는 2002년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다시 국가대표에 발탁되었다. 이종범은 이 대회에서 대표팀 주장을 맡았고 타율 0.353, 4득점, 2도루의 기록을 내면서 대표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4년 후인 2006년에 다시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자신의 마지막 국가대표 대회인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주장으로 참가했다. 이종범은 일본 대표팀과의 예선전 8회 초에 일본의 마무리 투수 후지카와 규지를 상대로 2타점 2루타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다. 대한민국팀은 이 대회에서 3위에 올랐고 이종점 자신은 대회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선수 은퇴 후 경력 편집

코치 편집

2012년 당시 한화 이글스 감독이었던 김응용의 부름을 받아 2013년부터 한화 이글스의 주루코치로 활동했다. 2014년 한화 이글스김응용에게 재계약 불가 통보를 내려 사임했다. 2019년에 LG 트윈스의 2군 총괄 및 타격코치로 활동했다.

해설위원 편집

2014년 아시안 게임에서 KBS의 객원 해설을 맡았고, 2014년 11월 6일에 MBC 스포츠플러스와 계약을 맺으며 정식 해설위원으로 발탁됐다.

개인사 편집

그의 아버지는 이계준(李啓準)[16], 어머니는 김해 김씨 김귀남[17](金貴南), 아내는 동래 정씨[18] 정연희[19] 아들은 메이저 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외야수이정후, 외조카는 KBO 리그 NC 다이노스내야수윤형준, 사위는 메이저 리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투수고우석이다.

우투우타지만 원래는 왼손잡이이다. 오른손용 글러브 밖에 없어 오른손으로 연습해 야구를 오른손으로 하게 됐다.[20]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이후 같은 팀 선배였던 선동열, 가수 양수경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Two & One'을 결성해 앨범을 냈다. 그는 MBC의 예능 프로그램인 《황금어장-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당시 해태 구단 사정이 넉넉하지 못해 우승 보너스를 주기 위해 이벤트 성으로 당시 해태 타이거즈의 감독이었던 김응용 몰래 제작했지만 의도와 달리 욕을 먹었다고 말했다.[21] 나중에 김응용에게 들켰고 음반은 20장이 팔렸다고 한다. 그 중 10장은 김응용이 사 준 것이라고 한다.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시절과 일본에서의 생활만 제외하면 전부 광주광역시에서 일생을 보낸 광주 토박이였으나 2012년에 은퇴 후 딸의 교육 문제로 서울로 이주했다.

주요 수상 기록(각종 타이틀 외) 편집

방송 출연 편집

고정 출연

게스트

광고 출연 편집

  • 1993년 해태HTB 기센비타(음료)
  • 2012년~2013년 (주)컴투스 프로야구 매니저(스포츠 시뮬레이션 게임)
  • 2016년~2017년 클라우드게이트 레전드야구존(스크린 야구) with 양준혁
  • 2018년 (주)엔씨소프트 프로야구 H2(스포츠 시뮬레이션 게임)
  • 2019년 유사나헬스사이언스코리아(건강기능식품) with 이정후
  • 2019년 화이텐(기능성 스포츠용품) with 이정후
  • 2020년 컴투스 프로야구 2020 with 이정후

출신 학교 편집

주요 기록 편집

  • 진한 바탕은 한국 프로 야구 최초 기록이다.
기록 날짜 소속 구장 상대팀 상대 투수 경기수 달성 당시 나이 기타 각주
24연속 도루 성공 1994. 6. 1 해태 광주 롯데 종전: 이호성(23도루) [22]
최고령 20-20클럽
33세 28일
2003. 9. 12 KIA 부산 롯데 손민한 5회 2사 0-0 상황 1점 홈런
종전: 이순철(해태, 31세 4개월 28일)
300도루 1997. 8. 24 해태 광주 현대 27세9일 역대 3번째
  • 1993 (16홈런 73도루 0.280- 득점 1위, 도루 2위, 타격 8위, 안타 2위, 홈런 4위, 타점 12위)
    • 단일 경기 최다 도루(6개, 1993)
    • 1번 & 유격수
  • 1994
    • 단일 시즌 최다 안타 (196개, 1994)
    • 100경기이상 시즌 최고 타율 (0.393, 1994)
    • 단일 시즌 최다 도루 (84개, 1994, 참조- 홈런 19개 (4위), 득점 1위, 타점 5위)
    • 1번 & 유격수
  • 1995 (방위복무: 126경기중 절반 63경기출장)(16홈런 (9위) 32도루 (6위) 0.326)
    • 1번 & 유격수
  • 1996 20-20 클럽 (25홈런 76도루 타율 0.332- 득점 1위, 도루 1위, 타격 2위, 안타 2위, 홈런 3위, 타점 3위)
    • 1번 & 유격수
  • 1997 30-30 클럽 (30홈런 64도루 타율 0.324- 득점 1위, 도루 1위, 타격 5위, 안타 2위, 홈런 2위, 타점 8위)
    • 프로야구 최초 3할-30홈런-30도루
    • 1번 & 유격수
  • 2003
    • 단일 시즌 최다 2루타(43개)
  • 2011
    • 포스트시즌 최고령 출전 기록 (41세 1개월 27일)
  • 역대 유일 유격수 OPS 1.0 돌파 2차례 달성 (1994, 1997)
  • 1,000득점 (역대 4번째) (2009)
  • 최소경기 200 도루, 300도루, 400도루, 500 도루 (1,439경기, 역대 2번째, 참조- 전준호(1,705경기)) (2009)
  • 역대 1회 1번 타자 (선두타자) 홈런 1위 (44개)
    • 역대 1회초 1번 타자 홈런 1위 (20개, 참조- 2위 유지현 (8개)) (2009.9.11.솔로 홈런(상대 투수:류현진)
    • 역대 1회말 1번 타자 홈런 1위 (24개, 참조- 2위 이영우 (10개))
  • 투수를 제외한 전체 야수 포지션을 정규게임에서 소화[23]

통산 기록 편집

















2

3



















O
P
S












4
1993 해태 23 126 525 475 85 133 16 4 16 53 73 19 32 35 .280 .331 .432 .762 205 11 6 8 4 2
1994 24 124 561 499 113 196 27 5 19 77 84 15 51 31 .393 .452 .581 1.033 290 2 6 1 4 14
1995 25 63 272 239 51 78 10 2 16 35 32 3 28 20 .326 .397 .586 .983 140 5 2 0 3 4
1996 26 113 525 449 94 149 28 1 25 76 57 12 67 39 .332 .425 .566 .991 254 4 7 0 2 15
1997 27 125 577 484 112 157 28 3 30 74 64 15 87 49 .324 .428 .581 1.009 281 9 3 0 3 30
1998 주니치 28 67 290 244 38 69 11 3 10 29 18 8 36 33 .283 .387 .475 .862 116 4 6 3 1 2
1999 29 123 484 424 76 101 20 5 9 33 18 7 38 62 .238 .310 .373 .683 158 6 7 13 2 1
2000 30 113 465 414 58 114 26 2 8 37 11 8 28 70 .275 .332 .406 .738 168 6 8 13 2 0
2001 31 8 13 13 2 2 1 0 0 0 0 0 0 4 .154 .154 .231 .385 3 0 0 0 0 0
2001 KIA 31 45 214 188 45 64 14 1 11 37 7 5 20 16 .340 .401 .601 1.002 113 5 1 2 3 0
2002 32 123 546 485 93 142 25 2 18 59 35 5 43 63 .293 .365 .464 .829 225 7 13 4 1 5
2003 33 132 595 524 110 165 43 1 20 61 50 10 59 58 .315 .389 .515 .904 270 8 7 1 4 5
2004 34 133 577 493 100 128 29 0 17 52 42 7 53 50 .260 .350 .422 .772 208 9 17 12 2 1
2005 35 118 495 430 69 132 25 2 6 36 28 5 47 49 .312 .393 .421 .814 181 8 11 7 0 2
2006 36 93 379 339 41 82 18 1 1 21 10 7 24 43 .242 .302 .310 .611 105 3 5 11 0 2
2007 37 84 282 253 23 44 6 0 1 18 3 2 13 25 .174 .217 .209 .426 53 6 2 10 4 0
2008 38 110 362 317 38 90 19 4 1 38 9 3 32 26 .284 .348 .379 .727 120 11 1 9 3 0
2009 39 123 449 385 63 105 21 1 6 40 11 1 41 50 .273 .346 .379 .725 146 9 5 12 6 1
2010 40 97 289 265 36 65 16 1 4 29 2 2 15 33 .245 .293 .358 .652 95 5 3 6 0 0
2011 41 97 273 235 27 65 15 1 3 24 3 2 22 35 .277 .337 .387 .724 91 6 1 12 3 1
KBO 통산: 18년 1706 6921 6060 1100 1797 340 29 194 730 510 113 634 622 .297 .369 .458 .828 2777 108 90 95 42 82
NPB 통산: 4년 311 1252 1095 174 286 58 10 27 99 47 23 102 169 .261 .334 .406 .731 445 16 21 29 5 3
  •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빨간 글씨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 기록

각주 편집

  1. 장현구 (2009년 6월 3일). “<프로야구> 이종범, 되살아난 해결사 본능”. 연합뉴스. 2017년 12월 2일에 확인함. 
  2. 손찬익 (2009년 10월 17일). “[KS]'베테랑' 이종범의 활약이 값진 이유”. OSEN. 2017년 12월 2일에 확인함. 
  3. 박승현 (2006년 3월 16일). “이종범, 일본 야구에 한풀이”. OSEN. 2017년 12월 2일에 확인함. 
  4. <프로야구> 이종범 '아들이 좌타자 한 풀어줘'《연합뉴스》 2009년 10월 17일 15:05
  5. “피는 못속여. 이종범-이정후 KBO리그 최초 부자 1차지명”. 2017년 3월 30일에 확인함. 
  6. 고유라 (2016년 6월 27일). '넥센 지명' 이정후, "아버지보다 뛰어난 선수 되겠다". OSEN. 2017년 11월 29일에 확인함. 
  7. 김종건 전문기자 (2012년 8월 23일). “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차동철, SF볼의 마술사 “야구인생도 SF””. 스포츠동아. 2022년 5월 8일에 확인함. 
  8. 김상수 (2001년 7월 26일). “[인물 포커스] 3년여만에 국내 복귀 이종범 선수”. 동아일보. 2009년 11월 26일에 확인함. 
  9. 김성원 (2001년 6월 13일). “마침내 온다, 바람의 아들”. 한겨레21. 2007년 7월 25일에 확인함. 
  10. 정철우 (2009년 6월 5일). '아버지의 이름으로'이뤄낸 이종범의 500도루”. 이데일리. 2009년 6월 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6월 6일에 확인함. 
  11. 허상욱 (2009년 6월 5일). “개인통산 500도루-1천득점 기록한 KIA 이종범”. 뉴시스. 2009년 6월 6일에 확인함. 
  12. 김은진 (2009년 6월 5일). “이종범‘역사를 훔치고 달렸다’”. 스포츠칸. 2009년 6월 6일에 확인함. 
  13. “야구대표 20명 확정 韓-美 선수권 대륙간컵 참가”. 동아일보. 1989년 6월 6일. 
  14. “李종범 사이클히트등 20안타 한국,멕시코꺾고 8강”. 조선일보. 1990년 8월 10일. 
  15. “훈·포장 받은 체육유공자”. 경향신문. 1991년 11월 16일. 
  16.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23년 12월 17일에 확인함. 
  17.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2023년 12월 17일에 확인함. 
  18. “다음 한문을 해석해 주세요.”. 2023년 12월 17일에 확인함. 
  19. 조선일보 (2022년 11월 18일). “‘남편’ 이종범 내조에 ‘아들’ 이정후 뒷바라지까지 “엄마는 아들 MVP가 더 뿌듯하네요””. 2023년 12월 17일에 확인함. 
  20. 강명석 (2012년 4월 13일). “[(이종범) 10아시아] <3> (이종범) 10아시아”. 10아시아. 2014년 2월 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6월 2일에 확인함. 
  21. 김진 (2009년 11월 26일). '특급 쌕쌕이' 이종범, 과자-앨범 제작 에피소드 공개!”. 아츠뉴스. 2009년 11월 28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2. '홈런 경쟁 - 이종범은 24연속 도루 신기록 겹경사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동아일보》 1994. 6. 2
  23. 당시 포수로 출전해 발이 빠른 김재걸을 잡아내기도 했다.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