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왕후

조선 성종의 왕비
(자순대비에서 넘어옴)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1462년 7월 30일 (음력 6월 25일) ~ 1530년 9월 23일 (음력 8월 22일)는 조선 성종의 세번째 왕비이며 중종의 모후이다.

정현왕후
貞顯王后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인 선릉
조선 성종의 계비
재위 1480년 11월 8일 ~ 1494년 12월 25일 (음력)
전임 폐비 윤씨
후임 폐비 신씨
조선의 왕대비
재위 1494년 12월 29일 ~ 1530년 8월 22일 (음력)
전임 인수왕대비 한씨 (소혜왕후)
인혜왕대비 한씨 (안순왕후)
후임 성렬왕대비 윤씨 (문정왕후)
이름
창년(昌年)
별호 자순왕대비(慈順王大妃)
시호 정현(貞顯)
존호 자순화혜(慈順和惠)
휘호 소의흠숙(昭懿欽淑)
신상정보
출생일 1462년 7월 30일 (양력)
출생지 조선 충청도 신창 관아
사망일 1530년 9월 23일(1530-09-23)(68세) (양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경복궁 동궁 정침
가문 파평 윤씨
부친 영원부원군 윤호
모친 연안부부인 담양 전씨
배우자 성종
자녀 1남 1녀 (1남 3녀)
순숙공주 · 중종
능묘 선릉(宣陵)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100길 1

생애

편집

출생과 가계

편집

1462년(세조 8년) 6월 25일, 충청도 신창의 관아에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와 연안부부인 전씨(延安府夫人 田氏)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이며 이름은 창년(昌年)이다. 당시 아버지 윤호가 현감으로 부임중이었던 신창(新昌)에서 '창(昌)'자를 떼어 지었다.[1]

정현왕후의 할아버지인 윤삼산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6촌이며, 성종과 정현왕후는 윤척(尹陟)을 공통 조상으로 하는 10촌지간이다.

       ┌─→   윤승례   →    윤번    →    정희왕후    →    덕종    →      성종

      윤척

       └─→   윤승순   →    윤곤    →     윤삼산      →    윤호    →   정현왕후    

또한 정현왕후의 증조모이자 윤삼산의 어머니인 근순택주 한씨는 한상질의 딸이며 한명회의 고모이다. 따라서 한명회는 윤삼산의 외사촌 동생이 되고, 성종의 첫번째 왕비 공혜왕후는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와 6촌이 된다.

입궁과 왕비 책봉

편집

1473년(성종 4년) 6월 14일,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되어 입궁하였다.[2] 1478년(성종 9년)에는 순숙공주를 낳았다.

당시 왕비였던 폐비 윤씨가 투기와 미신, 저주 행위등의 부도덕함을 이유로 폐위되어 사가로 쫓겨난 후, 성종은 대신들을 불러 숙의 윤씨를 새로운 왕비로 택했음을 전교하였다. 정현왕후는 공혜왕후와 폐비 윤씨에 이어 성종의 세번째 왕비가 되었다.[3]

왕비 시절

편집

1480년(성종 11년) 11월 8일, 창덕궁 선정전에서 교명과 책보를 받고 왕비에 책봉되었다.[4] 폐비 윤씨가 사사된 이후 폐비의 아들인 연산군을 돌보았는데, 연산군은 성종의 묘지명을 읽어 보기 전까지 자신을 정현왕후의 아들로 알고 자랐다.[5]

성종과의 사이에서 순숙공주를 비롯한 공주 3명과 진성대군(중종)을 낳았는데, 공주 2명은 조졸하였고 순숙공주 또한 11세로 요절하였다.

1486년(성종 17년), 선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6] 1489년(성종 20년)과 1494년(성종 25년)에도 양로연을 베풀었으며 1492년(성종 23년)과 1493년(성종 24년)에는 내외명부를 이끌고 후원 채상단에서 친잠례를 거행했다.[7]

왕대비 시절

편집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1496년(연산군 2년), 자순(慈順)의 존호를 받았고, 이후 화혜(和惠)의 존호가 가상되었다.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지문을 읽다가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임을 알게 되었고, 이후 갑자사화를 일으켜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을 고문하고 처형하였다. 이때 계모인 정현왕후의 침전 밖으로 가서 장검을 들며 밖으로 나오라고 행패를 부렸으나, 왕비 신씨(폐비 신씨)가 연산군을 극구 말려 보호하였다.[8]

시어머니인 소혜왕후가 죽고 연산군이 상의 기간을 줄이려 하자 정현왕후는 "삼년복은 천자(天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천하의 공통된 상사인데 어찌 단상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에 연산군이 화를 내며 "부인은 삼종(三從)의 의리가 있는 법인데, 임금의 법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는가?" 하자, 마지못해 이를 따랐다.

1506년 9월, 중종반정으로 아들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즉위하였다.

1507년(중종 2년), 정현왕후는 세종세조, 소헌왕후정희왕후, 소혜왕후 등 역대 왕과 왕비들이 불교를 숭상하고 사찰을 건립한 일을 언급하며 불교를 옹호하고 사찰을 세우려 하였다.[9] 이에 대간과 홍문관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이 극렬히 반대했으나 중종은 대비의 사찰 건립을 옹호하였다.[10]

1517년(중종 12년), 병을 앓아 제안대군의 집으로 잠시 이어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도교의 영향을 받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소격서의 폐지를 두고 중종과 대신들간의 의견 차이가 벌어졌는데, 중종은 정현왕후가 소격서에 자주 행차하였음을 이유로 윤허하지 않았다.[11]

사망

편집

1530년(중종 25년) 8월 22일, 동궁의 정침에서 사망했다.

정현왕후의 졸기

신시(申時)에 대비(大妃)가 동궁의 정침에서 훙(薨)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대비는 인자하여 족속들과 화목하였으며 외척을 위해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왕세자(인종)가 탄생한 지 열흘도 못되어 장경왕후(章敬王后)가 훙서하였는데
대비가 어루만져 보호하면서 하지 않은 일 없이 다 했다.
— 《중종실록》 69권,
중종 25년(1530년 명 가정(嘉靖) 9년) 8월 22일 (기묘)

시호와 능묘

편집

시호정현(貞顯)이며, 원대한 생각을 잘 성취시킨 것이 ''(貞)이고 행실이 중외에 나타난 것이 ''(顯)이다.

존호와 휘호를 합치면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이다.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선정릉 내에 위치한 선릉(宣陵)으로, 남편 성종과 동원이강의 형태로 같이 묻혀 있다.

가족 관계

편집
   조선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   
 貞顯王后 尹氏 
이름 출생 사망
  창년 昌年[1] 1462년 7월 30일 (음력 6월 25일)
  조선 충청도 신창 관아
1530년 9월 23일 (음력 8월 22일) (68세)
  조선 한성부 경복궁 동궁 정침

부모

편집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부   영원부원군 鈴原府院君
윤호 尹壕
파평 1424년 - 1496년 윤삼산 尹三山
고성 이씨 固城 李氏
연안부부인 延安府夫人
전씨 田氏
담양 1421년 - 1500년 전좌명 田佐命
전주 이씨 全州 李氏

배우자

편집
   조선 제9대 국왕       성종 成宗    출생 사망
1457년 8월 28일 (음력 7월 30일)
  조선 한성부 세자궁
1495년 1월 29일 (음력 1494년 12월 24일) (37세)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자녀

편집
작호 이름 생몰년 배우자 비고
장녀 순숙공주 順淑公主 1478년 - 1488년 미혼
차녀 공주[12] 1485년 - 1486년
장남 중종대왕 中宗大王
진성대군 晉城大君
역 懌 1488년 - 1544년 단경왕후 신씨 端敬王后 愼氏
장경왕후 윤씨 章敬王后 尹氏
문정왕후 윤씨 文定王后 尹氏
   제11대 국왕   
3녀 공주[12] 1490년 - 1490년

정현왕후가 등장하는 작품

편집

드라마

편집

영화

편집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1. 중종실록》 69권, 중종 25년(1530년 명 가정(嘉靖) 9년) 8월 23일 (경진)
    자순 왕대비(慈順王大妃) 윤씨(尹氏)는 파주인(坡州人)이다.

    아버지 윤호(尹壕)가 신창 현감으로 있을 때인 임오년(1462년) 6월 무자일에 그 고을 관아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창(昌)자를 가지고 창년(昌年)이라고 이름을 지었었다.

  2. 성종실록》 31권, 성종 4년(1473년 명 성화(成化) 9년) 6월 14일 (계유)
    병조 참지 윤호의 딸을 들게 하여 숙의로 삼다
  3. 성종실록》 122권, (1480년 명 성화(成化) 16년) 성종 11년 10월 4일 (경술)
    부원군과 의정부 등을 불러 숙의 윤씨를 왕비로 택하였다고 전교하다
  4. 성종실록》 123권, 성종 11년(1480년 명 성화(成化) 16년) 11월 8일 (갑신)
    왕비를 책봉하고 교명과 책보, 명복을 내려 주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니, 백관이 사배를 마쳤다.

    임금이 왕비를 책봉하고 교명 · 책보 ·명복을 정사(正使)인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부사(副使)인 호조 판서 이철견(李鐵堅)에게 주어 인정문을 경유하니,

    고취(鼓吹)가 앞에서 인도하는데, 다음은 교명(敎命)이고, 다음은 옥책(玉冊)이고, 다음은 보(寶)이고, 다음은 의장(儀仗)이었다.

    사자(使者)가 수행하여 선정문 밖 막차(幕次)에 이르니, 왕비가 선정전(宣政殿) 월랑(月廊)의 배위(拜位)에 나아가 교명과 책보, 명복을 받았다.

  5. 연산군일기》 4권, 연산 1년(1495년 명 홍치(弘治) 8년) 3월 16일 (기해)
    성종의 묘지문을 읽다가 생모 윤씨가 죄를 짓고 폐위되어 죽은 사실을 알다
  6. 성종실록》 195권, 성종 17년(1486년 명 성화(成化) 22년) 9월 21일 (계해)
    왕비가 선정전에 나아가 양로연을 행하다
  7. 성종실록》 275권, 성종 24년(1493년 명 홍치(弘治) 6년) 3월 21일 (병술)
    왕비가 친잠하다
    왕비가 후원(後苑)의 채상단(採桑壇)에 나아가 왕세자빈(폐비 신씨)과 내외(內外)의 명부(命婦)를 거느리고 친잠(親蠶)의 예를 거행하였다.
  8.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3월 20일 (신사)
    왕이 손에 장검을 들고 자순 왕대비(慈順王大妃) 침전 밖에 서서 큰 소리로 연달아 외치되

    ‘빨리 뜰 아래로 나오라.’ 하기를 매우 급박하게 하니, 시녀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대비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왕비 신씨가 뒤쫓아가 힘껏 구원하여 위태롭지 않게 되었다.

  9. 중종실록》 2권, 중종 2년(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1월 7일 (신사)
    대비가 불교를 옹호하는 전교를 내리자 대신들이 논쟁하다
  10. 중종실록》 2권, 중종 2년(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1월 11일 (을유)
    홍문관과 대간이 사찰 건립을 반대하니 조종의 유교를 어길 수 없다고 이르다
  11. 중종실록》 47권, 중종 18년(1523년 명 가정(嘉靖) 2년) 2월 4일 (을해)
    소격서를 혁파하면 자전의 마음이 편치 않으므로 그럴 수 없다고 전교하다
  12. 중종실록》 69권, 중종 25년(1530년 명 가정(嘉靖) 9년) 8월 23일 (경진)
    산릉을 간심하는 것과 지문에 대해 논의하고 비망기를 예조에 내리다
    을사년(1485년) 11월에 아홉 달 만에 공주가 출생하므로 궁중이 깜짝 놀랐었고,

    무신년(1488년) 3월 기사에 대군 【곧 금상(今上, 중종)임】이 출생하였고 경술년(1490년) 11월에 공주가 출생하였으며,


전임
폐비 윤씨
조선의 역대 왕후
1480년 ~ 1494년
후임
폐비 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