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루스
루스국(고대 동슬라브어: Рѹ́сьскаѧ землѧ 루스카야 제믈랴), 통칭 키예프 루스(러시아어: Ки́евская Русь 키옙스카야 루시[*], 우크라이나어: Київська Русь 키이우스카 루시[*], 벨라루스어: Кіеўская Русь 키예우스카야 루시)는 882년부터 1240년까지 동유럽에 존재했던 중세 국가로, 오늘날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역사적 기원이 되는 국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 국가는 동슬라브족과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바이킹 계통인 바랑인(Varangians)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으며, 수도는 키예프(현재의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위치하였다. 10세기와 11세기에는 전성기를 맞이하며 유럽과 동로마 제국, 중동 지역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고, 동유럽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루스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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Рѹ́сьскаѧ землѧ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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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키예프 북위 50° 27′ 00″ 동경 30° 31′ 24″ / 북위 50.4500° 동경 30.523333° | |||
정치 | ||||
정치체제 | 군주제 | |||
벨리키 크냐지[a] 882년 ~ 912년 914년 ~ 945년 945년 ~ 963년 963년 ~ 972년 980년 ~ 1015년 1016년 ~ 1054년 1113년 ~ 1125년 1236년 ~ 1240년 | 올레크 베시(초대) 이고리 류리코비치 올가 스뱌토슬라프 1세 블라디미르 1세 야로슬라프 1세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미하일 프세볼로도비치(말대) | |||
왕조 | 류리코비치 | |||
입법부 | 베체 | |||
역사 | ||||
• 건국 | 880년경 | |||
• 하자르 정복 | 965년~969년 | |||
• 정교회 국교 제정 | 988년경 | |||
• 법전 편찬 | 1050년대 | |||
• 몽골의 침공 | 1237년~1241년 | |||
• 키예프 함락 | 1240년 | |||
지리 | ||||
위치 | 동유럽 | |||
1000년 어림 면적 | 1,330,000 km2 | |||
인문 | ||||
공용어 | 고대 동슬라브어 구 교회 슬라브어 고대 노르드어 핀란드어 | |||
데모님 | 루스인 | |||
민족 | ||||
인구 | ||||
1000년 어림 | 5,400,000명[1] | |||
경제 | ||||
통화 | 그리브나 | |||
종교 | ||||
종교 | 슬라브 이교 (슬라브족의 토속 신앙) 개혁 국가 이교 (10세기 이후 공식 국교) 동방 정교회 (10세기 이후 공식 국교) 북유럽 이교 현지 신앙 핀란드 이교 (핀란드인 토속 신앙) | |||
기타 | ||||
현재 국가 | ![]() ![]() ![]() | |||
키예프 루스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988년 블라디미르 1세가 동방 정교회를 국교로 채택한 것이다. 이는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러시아 정교회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야로슬라프 1세(재위 1019~1054) 시기에 법전인 루스카야 프라브다(Russkaya Pravda)가 제정되면서 법률 체계가 정비되었고, 학문과 예술이 발전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12세기 이후 키예프 루스는 내부 분열과 외세의 침략으로 점차 쇠퇴하였다. 특히, 13세기 중반 몽골의 침략으로 수도 키예프가 함락되면서 국가의 통합이 사실상 붕괴되었으며, 이후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공국들은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등으로 흡수되거나 발전하여 동유럽의 역사적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키예프 루스는 오늘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역사적 정체성과 관련된 논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각국에서는 이 국가의 역사적 유산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역사
편집초기(882년 ~ 964년)
편집키예프 루스의 전신은 루스 카간국의 마지막 카간이자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가 862년에 오늘날 노브고로드에 건설한 공국인 노브고로드 루스로,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추드인, 드레블랴네인, 메레인, 벱스인, 크리비치인들이 루스인들을 내쫓고 스스로 통치하려 하였으나 그 후 부족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질서를 잡기 위해 다시 루스인들을 부르게 되었고 루스인들의 수장인 류리크가 노브고로드에 정착하게 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후 류리크의 후계자인 올레크 베시가 드니프르강 유역이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노브고로드 공령의 수도를 노브고로드에서 키이우로 옮김으로서 키예프 루스가 형성되었다. 그후 올레크 베시는 키이우와 인근에 있던 여러 동슬라브족들의 영토를 정복해 나가면서 세력을 확장했고 동로마 제국 원정에 직접 나서기도 했으며, 907년에는 동로마 제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912년 올레크 베시가 사망하자 류리크의 아들이자 키예프의 올가의 남편인 이고리 류리코비치가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하였다.
이고리 류리코비치는 올레크 베시의 동로마 제국 원정을 이어받아 941년부터 944년까지 동로마 제국 원정에 나섰으며 945년에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지만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던 도중에 키예프 루스의 과도한 세금 납부 정책에 반감을 가졌던 드레블랴네인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당시 이고리 류리코비치의 아들인 스뱌토슬라프 1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이고리 류리코비치의 아내인 올가가 대신하여 키예프 대공국을 섭정 통치하였다. 올가는 남편인 이고리 류리코비치를 살해한 드레블랴네인들을 응징하였으며, 957년에 정교회로 개종하여 루스 지역의 첫번째 정교회 신자가 되었다.
중기(964년 ~ 1054년)
편집성년이 된 스뱌토슬라프 1세는 키예프 루스를 본격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스뱌토슬라프 1세는 965년부터 군사 원정에 나서기 시작했는데, 우선 볼가강 유역에 거주하던 유목민인 볼가 불가르를 복속시켜 볼가 일대의 무역로를 장악하였고, 하자르 카간국을 공격하여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발칸반도의 불가리아 제1제국을 공격하는 등 키예프 루스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972년에 스뱌토슬라프 1세가 불가리아 원정 도중에 사망하자 야로폴크 1세가 그 뒤를 이었지만, 980년에 블라디미르 1세의 반란에 의해 야로폴크 1세는 살해되었다.
그 후 정권을 장악한 블라디미르 1세는 키예프 루스의 국경 지대에 있던 동슬라브족과 발트족, 핀족 등의 여러 부족을 정벌하였다. 동시기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바실리오스 2세가 군대의 반란으로 위기에 처하면서 키예프 루스에 지원을 요청하자 블라디미르 1세는 바실리오스 2세의 여동생인 안나와 결혼하는 조건을 내걸었고, 바실리오스 2세가 이를 수락하자 블라디미르 1세는 바실리오스 2세에게 훗날 바랑기아 친위대의 전신이 되는 약 6천 명의 바랑기아인 용병들을 보내주었으며, 블라디미르 1세는 약속대로 동로마 제국의 바실리오스 2세 황제의 여동생인 안나와 결혼하였다. 이후 안나의 영향으로 정교회로 개종한 블라디미르 1세는 989년에 정교회를 키예프 루스의 국교로 선언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선진 문물들을 수용하였으며, 동시에 손녀들을 프랑스 왕국, 헝가리 왕국, 노르웨이 왕국의 왕들에게 시집보내는 등 서유럽 국가들과도 많은 관계를 유지하였다.[2]
블라디미르 1세 사후에는 야로폴크 1세의 아들인 스뱌토폴크 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스뱌토폴크 1세는 블라디미르 1세가 정교회를 국교로 선언한 이후 정교회를 믿던 거의 대부분의 루스인들과 달리 로마 가톨릭을 믿던 폴란드 왕국 출신의 아내를 둔 영향으로 정교회가 아닌 로마 가톨릭을 믿고 있었으며,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동생들인 보리스와 글렙을 살해하였다. 이로 인해 스뱌토폴크 1세는 민심을 잃었고, 결국 스뱌토폴크 1세는 1018년 바랑기아인 용병을 주축으로 반란군을 일으킨 야로슬라프 1세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한 야로슬라프 1세는 키예프 루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는데, 그는 키예프 루스의 국력을 향상시켰으며, 동슬라브인들의 관습법들을 정리하여 만든 동슬라브족 최초의 성문법전인 《루스카야 프라우다》를 편찬하였다. 또한 야로슬라프 1세는 키이우에 대규모의 정교회 성당인 스뱌토고소피아 대성당을 건립하는 등 건축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후기(1054년 ~ 1240년)
편집야로슬라프 1세가 죽은 후 1095년에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 베네치아 공화국을 통한 중개 무역이 활성화되고 볼가강을 통한 중개 무역이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키예프 루스 또한 쇠퇴하기 시작해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류리크 왕조의 분할상속제에 의해 여러 군소 공국으로 분열되기 시작하였으며, 1095년에는 흑해의 유목민족인 쿠만족의 침략으로 인해 수도인 키예프가 약탈당했다.[2] 1113년에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블라디미르 등의 신도시를 건설하는 등 내치를 안정시키는 한편, 키예프 루스를 위협하던 쿠만인을 정벌하는 등 군사 활동에도 힘을 쏟으면서 키예프 루스는 잠시나마 중흥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사후 키예프 루스는 다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12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키예프 루스는 노브고로드 공화국, 폴라츠크 공국, 블라디미르 대공국, 랴잔 대공국, 갈리치아-볼히니아, 스몰렌스크 대공국, 페레야슬라우 공국, 체르니히우 공국 등의 류리크 왕조 출신의 제후들이 다스리는 여러 공국들로 분열되어 난립하면서 사실상 이름만 남은 상태가 되며 1237년부터는 킵차크 칸국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노브고로드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루스 공국들이 킵차크 칸국에 점령되었으며, 결국 1240년에 수도인 키이우가 함락되면서 키예프 루스는 멸망하였다.
사회와 경제
편집스뱌토슬라프 1세 때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반도를 연결하는 강인 볼가강을 장악한 후에 키예프 루스는 볼가강을 통한 중개 무역으로 번성하였는데, 주변 교역국들인 동로마 제국, 스칸디나비아반도, 이슬람 제국에 밀랍, 꿀, 모피, 말, 귀금속, 무기, 갑옷, 노예 등을 수출하고 이들 국가로부터 각종 동전들을 수입하는 방식의 중개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창출하였으며, 이 중개 무역을 주도하는 상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자연스레 상승하게 되었다. 흑해와 가까운 키이우와 스칸디나비아반도와 가까운 노브고로드는 이러한 중개 무역의 중심지였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내용주
편집참조주
편집- ↑ Б.Ц.Урланис. Рост населения в Европе (PDF) (러시아어). 89쪽.
- ↑ 가 나 지오프리 파커 (2004). 《아틀라스 세계사》 2판. 사계절. 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