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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 황씨(平海 黃氏)는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고려 때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황온인(黃溫仁)을 1세조로 한다.

평해 황씨 (平海 黃氏)
관향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시조 황온인(黃溫仁)
중시조 황진(黃璡), 황서(黃瑞), 황용(黃墉)
집성촌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우곡리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청운리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오곡리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덕산리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산야리
함경북도 명천군 상우남면 고성리
전라북도 고창군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검단리
주요 인물 황희석, 황준량, 황여일, 황선신, 황종률, 황필구, 황산덕, 황혜성, 황영시, 황대봉, 황병우, 황병태, 황윤기, 황종국, 황수관, 황병서, 황학수, 황영목, 황영기, 황병일, 황상민, 황선홍, 황영조, 황경선
인구(2015년) 168,374명

목차

역사편집

평해 황씨(平海 黃氏)는 고려 때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을 역임한 황온인(黃溫仁)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1]

3세조 황유중(黃裕中)과 4세조 황서(黃瑞)가 고려에서 문하시중을 역임했다.

황유중(黃裕中)의 손자 황희석(黃希碩)이 요동정벌 때 이성계의 부장으로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개국공신 2등에 올랐다.

공조전서 황유정(黃有定)은 정도전의 여동생과 혼인하였고, 아들인 황현(黃鉉)은 태종과 세종대에서 성균관 대제학과 대사성까지 역임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평해황씨는 쇠퇴했다. 가문의 족보는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소실되어 지금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1604년에 예천군수였던 황여일(黃汝一)이 새로이 간행한 평해황씨초간세보(平海黃氏草刊世譜)이다.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의 종사관이었던 황여일(黃汝一)의 기록에 따르면,[2]

대대로 벼슬하던 우리 세족이 천민과 노예로 흘러 떨어지고 자손이 길가에서 만난 사람처럼 남보다도 더 멀어진 것을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 끝없이 통탄함이 여기에 이르렀다.

비통함이 느껴지는 이 글은 황여일(黃汝一)이 예천군수였던 시절 전란으로 일족이 땅과 재산을 잃어 쇠퇴하게 된데다, 모든 기록까지 사라져서 사람을 만나도 같은 뿌리를 가졌는지 알 수 조차 없게 됨을 토로하며 쓴 서문으로, 평해황씨의 족보인 평해황씨세보에 수록되어 있다. 이로써 고려시대의 조상들의 기록 대부분이 소실되어 관직만 알 뿐이다.

평해 황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4명을 배출하였다.[3]

분파편집

1세 황온인(黃溫仁) ➝ 2세 황우정(黃佑精) ➝ 3세 황유중(黃裕中)

고려시대 문하시중(門下侍中) 3세 황유중(黃裕中)의 세 아들인 4세조로부터 크게 3파로 나뉘었다.

  • 검교공파(檢校公派) : 첫째 고려(高麗)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황진(黃璡)
분파 파시조
제학공파(提學公派) -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황규(黃珪) : 고려말. 중랑장.
전서공파(典書公派) 황현(黃琄) : 여말선초. 형조전서(刑曹典書).
불권헌공파(不倦憲公派) 황정(黃玎) : 조선 성종, 연산군. 사간원정언, 승문원교리, 삼남도 도사(三南道都事).
경주 황씨(慶州 黃氏) 황사청(黃士淸) : 조선 선조, 광해군. 평해황씨 검교공파 황란(黃鸞)의 5세손이며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忠佐衛) 황진운(黃進雲)의 둘째 아들.

단, 경주황씨(慶州黃氏)는 14세에서 갈라졌으므로, 세에 +13을 하면 평해황씨 검교공파 세와 일치한다.

  • 문절공파(文節公派) : 둘째 고려(高麗)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금어대(金魚袋) 첨의평리(僉議評理) 문하시중(門下侍中) 황서(黃瑞)
분파 파시조
예빈공파(禮賓公派) -
소윤공파(少尹公派) -
해월공파(海月公派) 황여일(黃汝一) : 조선 선조, 광해군. 길주목사, 동래진병마첨절제사, 이조참판 증직.
  • 충경공파(忠敬公派) : 셋째 고려(高麗)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황용(黃墉)
분파 파시조
양무공파(襄武公派) 황희석(黃希碩) : 여말선초. 조선 2등 개국공신,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추증.
부사공파(府使公派) 황곡(黃鵠) : 여말선초. 동래부사(東萊府使)
의정공파(議正公派) -
찬성공파(贊成公派) 황천상(黃天祥) : 고려말. 문하시중찬성사(門下侍中贊成事).
밀직공파(密直公派) -
관찰사공파(觀察使公派) 황천계(黃天繼) : 조선(朝鮮) 창조공신(創造功臣). 경기, 전라,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기원편집

중국의 고대신화의 제왕인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한 명인 황제(黃帝)에서부터 유래하였고, 이 후손이 세운 나라가 춘추전국시대의 황(黃)나라이다. 황하(黃河)가 있는 황토고원지대에 살던 사람들은 황토인(黃土人)이라 불렀다.

황씨의 조상은 후한(後漢)때 중국의 강하(江夏)에 살던 황씨(黃氏) 일족이다. 중국 한나라 때 각지에 살던 황씨들을 강하(江夏)로 이주시켰다. 지금도 중국 강하(江夏)지역에 황강(黄冈), 황파(黄陂), 황매(黄梅), 황석(黄石)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있다. 하지만 중국의 황씨가 어떠한 경로로 한반도로 이주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국 황씨의 시조로 알려진 인물은 후한(後漢) 강하후(江夏侯) 황락(黃洛)이다. 황락(黃洛)은 전한(前漢) 성제(成帝) 건시(建始) 3년(BC 30년) 신묘(辛卯)년에 출생하여 수화(綏和) 1년(BC 8년) 계축(癸丑)년에 입신하고,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4년(28년) 무자(戊子)년에 대장군(大將軍) 강하후(江夏侯)로 봉해졌다. 중국에서 살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한나라 때 사신으로 신라에 와서 풍랑으로 울진에 정착했다는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의 기록은 허구이다. 황락(黃洛)의 일생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울진군 기성면 척산3리에 위치한 문절공황서신도비명(文節公黃瑞神道碑名)에 기록되어 있다.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에 기록된 전설편집

중국의 사상과 문물을 흠모하던 모화사상(慕華思想)이 극에 달한 조선 후기에 정시술이 저술한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의 내용은 허구의 전설이라 신뢰성이 낮지만 많이 알려져 있다.

중국 후한 때, 육종(陸終)의 먼 후예(後裔) 중에 해(海), 락(洛), 호(湖) 3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둘째인 황락(黃洛)은 중국 후한 유신이었다. 서기 28년(후한 광무제 건무 4년, 신라 유리이사금 5년) 구대림(丘大林) 장군과 함께 교지국(交趾國, 지금의 베트남)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길을 잃고 망망대해를 헤매던 중, 신라의 동북 해변인 평해읍 월송리 굴미봉(崛尾峰) 남쪽 기슭 월송봉(越松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곳이 지금의 월송정(越松亭)이다. 그 후 황락(黃洛)은 신라에 귀화함으로써 평해에 정착하여 황장군으로 불리며 살았으며, 한국 황씨(黃氏)의 도시조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평해 월송(越松) 지역에는 황장군의 묘가 있다.

황락과 같이 신라에 온 구대림(丘大林)은 평해 구씨의 시조가 되었고, 살았다는 곳을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른다. 다만, 평해 구씨 기록으로 보면 구대림(丘大林) 장군은 당나라 사람으로 663년(신라 문무왕 3)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으로 되어있어 기록이 상이하고 월송정(越松亭)은 원래 신라시대에 화랑들이 무예를 단련하면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황락의 먼 후손에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 삼형제가 있었는데, 첫째 갑고는 기성군(箕城君), 둘째 을고는 장수군(長水君), 셋째 병고는 창원백(昌原伯)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본관편집

평해(平海)는 현재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 평해읍(平海邑)이다. 원래 고구려의 땅으로 이름이 근을어현(斤乙於縣)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인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평해(平海)로 이름이 바뀌어 유린군(有隣郡)의 영현으로 삼아 평해현(平海縣)이라 하였다. 고려 현종 때 소속을 바꾸어 예주(禮州)의 영현인 평해현(平海縣)이 되었고, 1172년(고려 명종 2년)부터는 지방관인 감무(監務)를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충렬왕 때는 문하시중 황서(黃瑞)의 공을 높이사, 본관인 평해현(平海縣)을 평해군(平海郡)으로 승격시켜주었고, 지군사(知郡事)를 파견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1466년(세조 12년)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울진군 평해면이 되었고, 1963년에는 울진군이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9월 1일 기성면(箕城面)이 평해면에서 분리되었고, 1980년 평해면이 평해읍(平海邑)으로 승격되었다.

인물편집

  • 황온인(黃溫仁) : 1세조(一世祖). 금오위(金吾衛) 대장군(大將軍)과 태자검교(太子檢校)를 역임.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당시에는 기성(箕城)으로 불렸던 평해(平海)에 세거하였다.
  • 황우정(黃佑精) : 2세조(二世祖). 황온인(黃溫仁)의 아들.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역임.
  • 황유중(黃裕中) : 3세조(三世祖). 황우정(黃佑精)의 아들.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 슬하에 황진(黃璡), 황용(黃墉), 황서(黃瑞)의 세 아들을 두었다.
  • 황진(黃璡) : 4세조. 황유중(黃裕中)의 첫째 아들.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 평해 황씨(平海 黃氏) 검교공파(檢校公派)의 파시조.
  • 황서(黃瑞) : 4세조. 황유중(黃裕中)의 둘째 아들. 평해 황씨(平海 黃氏) 문절공파(文節公派)의 파시조. 충렬왕(忠烈王)때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세 번이나 다녀옴. 이후 충렬왕(忠烈王), 충혜왕(忠惠王), 충숙왕(忠肅王), 충목왕(忠穆王)에 이르기까지 4조(朝)에서 봉사하면서 원나라를 총 31번이나 다녀옴. 이 익대공훈(翼戴功勳)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금어대(金魚袋) 첨의평리(僉議評理) 문하시중(門下侍中)의 벼슬을 역임. 함께 본관인 평해현(平海縣)이 평해군(平海郡)으로 승격. 고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문절공(文節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음. 조선이 들어서면서 고려의 기록이 많이 훼손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 울진군 기성면 척산 3리에 있는 문절공황서신도비명(文節公黃瑞神道碑名)에 문절공 윗대의 기록이 남아있어 다행히 평해황씨의 소중한 기록이 전해진다.
  • 황용(黃墉) : 4세조. 황유중(黃裕中)의 셋째 아들. 평해 황씨(平海 黃氏)의 충경공파(忠敬公派)의 파시조.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을 역임. 시호는 충경(忠敬).
  • 황희석(黃希碩, ? ~ 1394년) : 8세조. 황천록의 아들. 고려 우왕 때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냈다. 1383년 단주를 침략한 호발도(胡拔都)를 격퇴하였고, 왜구의 침략을 막는 데도 활약하였다. 1392년 정몽주가 암살됐을 때 그 지지파를 탄핵하는 일을 맡았다. 개국 이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에 제수되었다. 1392년 10월 9일 개국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는데, 같은 해 11월 19일 태조의 특지(特旨)에 따라 개국 2등공신으로 올려 책록되었다. 1394년 8월 3일 졸했다. 군호는 평해군(平海君). 시호는 양무(襄武). 아들은 황상(黃象), 황인(黃麟), 황난(黃鸞), 황곡(黃鵠) 4형제를 두었다. 사당은 평해군묘(平海君廟)로서 양무공사(襄武公祠)라 하며 충북 증평군 증평읍 죽2리(원평)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검교공파에서 분파하여 양무공파(襄武公派)의 파시조가 되었음.
  • 황근(黃瑾) : 황진(黃璡)의 증손. 고려 공민왕 때 우헌납(右獻納)을 지냈다. 공민왕 11년(1362년)에 지진(地震)의 변고에 대하여 극론(極論)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리어 옥천 수령(沃川守令)으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벼슬이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에 이르렀다.
  • 황유정(黃有定, 1343년 ~ ?) : 황근(黃瑾)의 아들.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다. 정도전의 여동생과 결혼한 정도전의 매제이다. 정도전 사후에 연좌되지 않고 벼슬을 계속하였다. 이후 경상북도 영천에 우거(寓居).
  • 황현(黃鉉, 1372년 ~ ?) : 황유정의 둘째 아들. 1393년(태조 2) 춘장문과(春場文科)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고, 1407년(태종 7)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으로서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승부소윤(敬承府少尹)에 초배(超拜)되었다. 태종과 세종대에 대사성을 지냈으며, 1428년(세종 10)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1429년 행성균대사성(行成均大司成)을 겸직하였다. 1430년 변계량(卞季良)과 함께 행성균대사성으로서 문과초시 때 강경(講經) 중 두가지 시제(試題)만을 뽑아 제술(製述)할 것을 건의, 실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여전히 초록집(抄錄集)에만 의존하고 경학(經學)을 경시한다는 건의에 따라 그 뒤 다시 과거에서 경서강독(經書講讀)이 시행되었다.
  • 황연(黃鋋) : 황유정(有定)의 셋째 아들. 선성현령(宣城縣令). 풍기로 이주하여 살았으므로 안동, 풍기, 영주, 예천, 봉화 일대에 평해 황씨가 번성하였다.
  • 황서(黃瑞, ? ~ ?) : 자는 정옥(廷玉). 황자중(自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전(詮)이고, 아버지는 황세통(世通)이며, 어머니는 윤질(尹晊)의 딸. 1552년(명종 7) 사과(司果)로서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같은 해 봉상시주부가 되어 전경(殿經)에 참여. 1555년(명종 10)에 사헌부지평. 그 후 예조정랑을 거쳐 다시 지평이 되었지만, 도망노비에 대한 처벌을 엄격하게 하지 않아 파직. 1556년 사간원헌납으로 복직. 이 후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 겸 부응교를 역임. 1559년에 경상도에 어사로 파견. 이후 홍문관응교, 의정부검상 겸 사인, 홍문관전한을 거쳐 1564년 직제학. 이후 승정원동부승지 겸 예조참의, 우부승지 겸 좌부승지, 병조참지를 거쳐 1566년(명종 21)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가 되었다.
  • 황여일(黃汝一, 1556년 ~ ?) : 해월공파의 파시조.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헌(海月軒)·매월헌(梅月軒). 황세충(世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연(璉)이며, 아버지는 유학(幼學) 응징(應澄)이다.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5년 개종계별시문과(改宗系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8년 검열이 되었는데, 하번사관(下番史官)임에도 불구하고 출입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1594년 형조정랑이 되고 곧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내려갔는데, 얼마 뒤 도원수의 허락을 받고 일시 귀가하여 도원수와 함께 추고(推考)당하였다. 1598년 사서에 이어 장령이 되고, 이듬해 장악원정을 역임하였다. 1601년 예천군수가 되고 1606년 전적을 역임, 1611년(광해군 3) 길주목사, 1617년 동래진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후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평해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조천록(朝天錄)』, 『해월집』 14권 7책이 있다.
  • 황병서(黃炳瑞, 1949년 ~ ) : 북한의 인민군 총정치국장. 당 정치국 상무위원. 황병서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므로 뉴스에 보도된 아버지 황필구에 대한 내용을 인용한다. 황병서의 아버지 황필구는 1916년 전북 고창의 평해 황씨 집성촌에서 출생. 익산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북한의 원산에서 검사. 남파공작원으로 활동하다 1985년 대전형무소에서 사망.[4]
  • 황영시(黃永時, 1926년 ~ ) : 제24대 육군참모총장. 제11·12대 감사원장.
  • 황병태(黃秉泰, 1935년 ~ ) : 제13·15대 국회의원. 대학교 총장.
  • 황영조(黃永祚, 1970년 ~ ) : 평해황씨 검교공파 26세손. 대한민국의 마라토너. 강원도 삼척.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금메달.

항렬자편집

  • 검교공파 - 고려 문하시중(高麗門下侍中) 황유중(黃裕中)의 첫째 아들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황진(黃璡)을 중시조로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