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
충렬왕(忠烈王, 1236년 4월 10일 (음력 2월 26일), 율리우스력 4월 3일 ~ 1308년 8월 7일 (음력 7월 13일) 율리우스력 7월 30일) 또는 경효왕(景孝王)은 고려의 제25대 국왕(재위: 1274년 7월 30일 (음력 6월 18일, 율리우스력 7월 23일 ~ 1298년 3월 9일(음력 1월 19일), 율리우스력 3월 2일, 복위 : 1298년 10월 1일(음력 8월 18일, 율리우스력 9월 24일) ~ 1308년 8월 7일)이다.
충렬왕
忠烈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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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대 고려 국왕 | |
재위 | 1274년 7월 30일 ~ 1298년 3월 9일 (양력)
1298년 10월 1일 ~ 1308년 8월 7일 (양력) |
전임 | 원종 |
후임 | 충선왕 |
고려국 왕태손 | |
재위 | 미상 ~ 1260년 9월 15일 (양력) |
전임 | 의종의 태손 |
후임 | 최후의 왕태손 |
고려국 왕태자 | |
재위 | 1260년 9월 15일[1] ~ 1274년 7월 30일 (양력) |
전임 | 왕태자 전 (원종) |
후임 | 왕세자 원 (충선왕) |
고려국 태상왕 | |
재위 | 1298년 3월 9일 ~ 1298년 10월 1일 (양력) |
전임 | 태상왕 원종 |
후임 | 태상왕 충선왕 |
이름 | |
휘 | 왕거(王昛) 왕심(王諶), 왕춘(王賰) |
별호 | 태손(太孫) |
시호 | 고려: 광문선덕순성수정상승대왕(光文宣德純誠守正上昇大王) 광문선덕경효대왕(光文宣德景孝大王) 원: 충렬왕(忠烈王) |
능호 | 경릉(慶陵) |
신상정보 | |
출생일 | 1236년 4월 10일(양력) |
출생지 | 고려 강화도 별궁 |
사망일 | 1308년 8월 7일(양력) | (72세)
사망지 | 고려 개경 신효사 |
부친 | 원종 |
모친 | 순경태후 김씨 |
형제자매 | 시양후, 순안공, 익장 경안궁주, 함녕궁주, 누이 |
배우자 | 제국대장공주, 정신부주 왕씨 |
자녀 | 4남 2녀
충선왕, 강양공, 왕자, 정녕원비, 명순원비 소군 왕서 |
휘는 거(昛), 초명은 심(諶), 춘(賰), 첫 시호는 순성수정상승대왕(純誠守正上昇大王), 원에서 내린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공민왕이 올린 시호는 광문선덕경효대왕(光文宣德景孝大王)이다. 존호는 광문선덕(光文宣德)이다. 원종과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金氏)의 맏아들이다.
원나라의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으며, 충렬왕 이후의 국왕들은 원나라 황족의 딸을 정비 또는 후궁으로 맞이하였다.
생애
편집1236년(고종 23년), 당시 태자였던 왕태자 식(원종)과, 태자비 김씨(정순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 이듬해 어머니를 여의었다.
1259년(고종 46년), 할아버지인 고종이 붕어하였는데, 당시 아버지 원종은 원나라에 있었으므로 고종의 장례를 주관하고 아버지가 귀국할 때까지 반년간 국정을 임시로 돌보았으며 관례를 치렀다.
1260년(원종 1년) 8월, 태자로 책봉되었다. 1274년(원종 15년) 5월,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원나라에서 혼인하였다. 혼인한 그해 음력 6월 원종이 붕어하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즉위한 그해 쿠빌라이의 강요로 일본 정벌에 동로군(東路軍)을 파견하였다.
1276년(충렬왕 2년) 3월, 원나라 관리 다루가치가 충렬왕에게 말하기를, "선지(宣旨)라고 일컫고, 짐(朕)·사(赦)라고 일컫는 것이 어찌 참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지적을 하자 충렬왕이 고려 관리 중찬 김방경과 좌승선 박항에게 이 지적을 해명하라고 해 "감히 참람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종(祖宗)께서 서로 전하여 오던 옛날 법을 따른 것뿐입니다."라고 해명하였다. 이 날 이후 고려는 "짐"은 "고" 또는 "과인"으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선지"는 "왕지"로 명칭이 격하 되었다.[3] 또한 원종을 마지막으로 왕의 사후 태묘에 봉안하는 위패에 올리는 묘호인 '조', '종'을 쓰지 못하고 시호만으로 칭했다. 충렬은 원에서 보낸 시호이다. 충렬왕이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으므로 몽골에서 온 칙사나 장군과 지위가 같다고 보고 국왕이 이들과 동서로 서로 마주보고 상대하는 것을 중지하고, 높은 임금의 자리에 앉아서 이들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1277년(충렬왕 3년), 원나라의 병마를 사육하기 위한 제주도에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됐다.
1280년(충렬왕 6년) 정동행중서성이 설치되자 원나라의 요구로일본 정벌을 준비하기도 했다. 1290년(충렬왕 16년) 합단(哈丹)이 내침하여 강화로 천도했으며, 김방경(金方慶)의 활약으로 수차 왜구·여진의 침입을 격퇴할 수 있었다. 1281년 원나라 쿠빌라이 카안으로부터 부마국왕(駙馬國王)으로 정식 책봉, 부마고려국왕인(駙馬高麗國王印) 도장을 수여받았다.[4].
1298년 (충렬왕 24년) 세자(충선왕)에게 선위하고 광문선덕(光文宣德)의 존호를 받아 태상왕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7개월만에 복위하였다.
고려 조정에서 처음 올린 시호는 순성수정상승대왕(純誠守正上昇大王)이며, 상국에서 시호를 받아와야 된다는 충선왕의 뜻에 따라 원나라식 시호 충렬로 불리었다. 후에 공민왕 즉위 후 공민왕이 다시 고려식 시호를 올려 광문선덕경효대왕(光文宣德景孝大王)이라 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사후 줄곧 몽골식 시호인 충렬왕으로 불리워졌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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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의 직계조상편집
부모편집
왕비편집
후궁편집
왕자편집
왕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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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이 등장하는 작품
편집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고려사 원종 원년 음력 8월 2일, 율리우스력 9월 8일
- ↑ 《고려사》 권23, 세가 권제23, 고종 23년(1236년) 2월 26일 (계축)
왕자 심이 태어나다
태자비(太子妃, 순경태후)가 아들 왕심(王諶, 충렬왕)을 낳았다. - ↑ 네이버 국역 동국통감 충렬왕 2년 3월
- ↑ 《고려사》권29〈세가〉권29 - 충렬왕 7년 3월 - 원 황제가 왕을 부마국왕으로 책봉하다
- ↑ 최충헌의 손녀
- ↑ 신종의 손자
- ↑ 《고려사》 권25, 세가 권제25, 원종 원년(1260년) 11월 28일 (신묘)
왕인의 딸을 태자비로 삼다
사도(司徒) 왕인(王絪)의 딸을 태자비로 삼았다. - ↑ 《고려사절요》 권21 충렬왕 23년(1297년) 7월 기록에 의하면 시무비의 본명은 백야단(伯也丹)이다.
- ↑ 《고려사》 권32, 세가 권제32, 충렬왕 31년(1305년)
- ↑ 《고려사》 권89, 열전2 후비2
- ↑ 《고려사》 권28, 세가28 충렬왕1 및 《동국통감》 권37 고려기
- ↑ 고종의 딸 수흥궁주의 아들
- ↑ 고종의 손자이며 안경공의 아들
제25대 고려 국왕 | ||
전 임 원종 |
1274년 ~ 1308년 | 후 임 충선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