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연호
한국의 연호는 고구려 광개토왕이 최초로 사용한 이래 몇 차례 사용되었다. 중국의 연호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고구려 및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발해는 건국 이후 줄곧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고려 이후에는 대부분 중국의 연호를 받아들였으나 고려 초기를 비롯하여 자주국임을 강조하던 시대 분위기에 따라 독자적인 연호가 제정되었던 시기도 있다.
청나라를 인정하기 싫어했던 조선인들은 명나라 숭정제의 연호와 영력제의 연호를 1900년대까지도 사용했다. 일부 조선의 선비들은 숭정제가 이미 사망했기에, 숭정제 사망 시점을 숭정기원 1년으로 계산해 연호를 사용했다.
개요편집
한국 최초의 연호는 고구려 광개토왕이 사용한 영락(永樂)으로, 연호를 기년으로 사용한 기록이 전하는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중국 및 일본은 연호를 사용하여 역사를 기록한 것이 다수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한국은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소수의 사례를 제외하면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고려 이후로 편찬되어 현재까지 전해지는 역사서는 국왕의 재위년 및 중국의 연호를 기년으로 사용하고 있다. 조선 말 및 대한제국 시절 고종과 순종 때에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 하였다.
한국에서 특수하게 사용된 연호로 명나라 의종의 연호인 숭정(崇禎), 영력제의 연호인 영력(永曆)이 있다. 소중화사상이 발달한 조선 후기에 내부적으로 사용된 연호로 청나라에게 멸망된 명나라의 유지를 잇고 오랑캐인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숭정 연호를 숭정제가 사용한 1628년부터 266년간 동안, 영력제의 연호를 영력제가 사용한 1649년부터 245년간 계속 사용하였다. 그러나 갑오개혁 때 이 연호는 개국으로 바뀌어 폐지됐다.
일각에서는 숭정제가 이미 죽고 없으므로 숭정제가 붕어한 기점부터 숭정기원 1년, 2년으로 계산하였다. 한편 김구의 백범일지나 윤치호의 윤치호 일기에 의하면 1910년 10월 2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에도 영력 260수년을 사용했다며, 공동묘지나 일부 선비들의 묘비명, 편지 서신 등에 영력제 연호를 1920년대까지 사용했던 것을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고구려편집
신라편집
- 건원(建元: 법흥왕, 진흥왕 연간에 사용, 536~550)
- 개국(開國: 진흥왕 연간에 사용, 551~567)
- 대창(大昌: 진흥왕 연간에 사용, 568~571)
- 홍제(鴻濟: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연간에 사용, 572~584)
- 건복(建福: 진평왕, 선덕여왕 연간에 사용, 584~633)
- 인평(仁平: 선덕여왕 연간에 사용, 634~647)
- 태화(太和: 진덕여왕 연간에 사용, 647~650)
- 이후 당의 연호를 사용
장안국편집
- 경원(慶元)이라 기록된 사료도 있다.
발해편집
- 인안(仁安: 무왕 연간에 사용, 719~736)
- 대흥(大興: 문왕 연간에 사용, 737~793)
- 보력(寶曆: 문왕 연간에 사용, 774~781?)
- 중흥(中興: 성왕 연간에 사용, 794~795)
- 정력(正曆: 강왕 연간에 사용, 796~808)
- 영덕(永德: 정왕 연간에 사용, 809~812)
- 주작(朱雀: 희왕 연간에 사용, 813~817)
- 태시(太始: 간왕 연간에 사용, 817~818)
- 건흥(建興: 선왕 연간에 사용, 819~830)
- 함화(咸和: 대이진 연간에 사용, 831~858)
- 이후 연호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없음.
- 고왕 때 천통(天統)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는 등, 발해의 다른 연호들에 관한 일부 족보 및 위서 논란이 있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나 한국사학계에서는 신빙성이 없는 기록이라 판단하고 있다.
정안국편집
흥요국편집
- 고려사에서는 연호를 천경 대신 천흥(天興)이라 기록되어 있다.
대발해편집
후백제편집
후고구려편집
고려편집
대위국편집
- 천개(天開: 묘청, 1135~1136)
조선편집
다만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에서는 1876년부터 개국기년에 따라 “조선개국 48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한제국편집
일제강점기편집
-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연호를 사용.
대한민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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