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군
해안군(海安君, 1511년 음력 6월 15일 ~ 1573년 음력 8월 4일)은 조선의 왕족이다. 중종과 숙의 홍씨의 아들이다.
해안군
海安君 | |
---|---|
군(君) | |
이름 | |
휘 | 이기(李㟓) |
시호 | 정희(靖僖)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11년 음력 6월 15일 |
사망일 | 1573년 음력 8월 4일 (향년 63세) |
왕조 | 조선 |
가문 | 조선 왕조 전주 이씨 |
부친 | 중종 |
모친 | 숙의 홍씨 |
배우자 | 초배 진주 류씨(류홍의 딸) 계배 거창 신씨(신홍유의 딸) |
자녀 | 서릉군, 서흥군, 오천군, 오산군, 서천군, 오강군, 기타 5녀 |
생애편집
가계편집
1511년(중종 6년) 음력 6월 15일 조선의 제11대 왕 중종과 후궁 숙의 홍씨의 아들로 태어났다[4]. 인종, 명종, 덕흥대원군(선조의 생부) 등의 이복형이다.
생모 숙의 홍씨는 남양 홍씨 출신으로, 중종에게 가장 많은 총애를 입은 후궁이라고 한다[3].
왕자 시절편집
8살 때인 1518년(중종 13년) 음력 12월 28일 정식으로 해안군(海安君)에 책봉되었다[5]. 1522년(중종 17년) 중종은 자신의 자녀들의 집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사간원이 그 역사가 사치스럽다는 상소를 올려 역사 규모를 대폭 축소하였다. 이때 해안군의 집에 수축할 예정이었던 연못도 수축이 중지되었다[6].
1533년(중종 28년)에는 왕세자(훗날의 인종)의 양제와 해안군의 부인을 간택하라는 전교가 동시에 내려졌다. 그러나 해안군의 부인에 대한 간택 단자만 내고 세자의 양제 간택 단자를 내지 않은 이가 많아, 양제 간택을 먼저 한 후에 해안군의 부인을 간택하게 되었다[7]. 당시 23살이던 해안군은 이미 부인 류씨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었으나, 류씨가 1년 전인 1532년(중종 27년) 요절하는 바람에 다시 부인을 간택하게 된 것이다[3].
해안군은 1540년(중종 35년) 종부시의 제조를 지냈다. 이 해 선원전에 모셔둔 정종과 왕비 정안왕후, 고려 공민왕의 초상화 일부가 섞여 함께 종부시 제조로 있던 이성군과 함께 그 진품을 가려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8]. 이후 1549년(명종 4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으며, 사옹원과 문소전의 도제조도 지냈다[9].
한편 해안군은 1542년(중종 37년) 음력 1월 8일 3차례나 연고를 핑계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며[10], 1546년(명종 1년) 음력 2월 19일 사헌부에 의해 다시 탄핵되었으나 이때는 명종의 배려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11]. 1561년(명종 16년) 음력 4월 3일에는 해안군의 사위 김규가 강경 시험 병과에 합격하였는데, 이 사실을 두고 《명종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공정하지 못한 선발이라며 비판하였다[12].
사망과 평가편집
1573년(선조 6년) 음력 8월 4일 향년 6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해안군이 사망하자 당시 대신들은 선조에게 정조시[주 1] 하기를 청하였다[13]. 1788년(정조 12년) 정조로부터 정희(靖僖)의 시호를 받았다[14]. 묘소는 양주 신혈리에 마련되었다[4].
해안군은 항상 조용하고 책을 좋아하였으며,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또 용모도 단정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러한 해안군의 성격을 두고 중종은 "나의 아들 중에 가장 침착하고 삼가 들떠 있지 아니함에 해안군 같은 아이가 없다."라고 칭찬하였다. 또 중종은 자신의 잠저를 해안군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는데, 해안군은 항상 검소하여 사람들이 그 집 앞을 지나가도 그곳이 왕자의 집인줄 몰랐다고 한다. 또 병으로 말을 잘 하지 못하게 됐을 때에도 항상 의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명종은 해안군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어의를 보내기도 하였다[3][4].
가족 관계편집
해안군은 2명의 정부인을 두었다. 첫 번째 부인은 영의정을 지낸 진주 류씨 류순정의 손녀로, 아버지는 류홍이다. 류씨는 자녀를 낳지 못 하고 1532년(중종 32년) 2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두 번째 부인은 우찬성에 추증된 거창 신씨 신홍유의 딸이며, 딸을 하나 낳았다. 신씨는 1567년(선조 즉위년) 음력 9월 사망하였으며, 해안군의 묘소에 다른 봉분의 형태로 합장되어 있다. 해안군은 측실을 두었으며, 이 측실들이 6남 4녀를 낳았다[주 2][3][4].
- 아버지 :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재위:1506~1544)
- 어머니 : 숙의 홍씨(淑儀 洪氏, 생몰년 미상)
- 첫 번째 부인 : 류홍(柳泓)의 딸 진산군부인 진주 류씨(1506~1532)
- 두 번째 부인 : 신홍유(愼弘猷)의 딸 익창군부인 거창 신씨(1514~1567)
- 장녀 : 이예영(李禮英, 1535 ~ ?) - 희천 김씨 김규(金戣)의 처
- 첩 : 의금(義今) - 노비 출신
- 장남(서자) : 서릉군 이섬(西陵君 李銛, 1537 ~ 1601[15])
- 첩 : 태성(台成) - 노비 출신
- 차녀(서녀) : 이계환(李繼環, 1548 ~ ?) - 평산 신씨 신택(申澤)의 처
- 3녀(서녀) : 이영환(李英環, 1549 ~ ?) - 영천 신씨 직장(直長) 신상덕(申尙德)의 처
- 첩 : 복지(福只) - 노비 출신
- 첩 : 가지(加知) - 양민 출신
- 첩 : 보금(寶今) - 노비 출신
- 5남(서자) : 서천군 이금(西川君 李錦, 1554 ~ ?)
- 첩 : 복가(福加) - 노비 출신
- 4녀(서녀) : 이여환(李女環, 1558 ~ ?) - 희천 김씨 병사(兵使) 김준계(金遵階)의 처
각주편집
- 내용주
- 참조주
- ↑ 《조선왕조실록》홈페이지
-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홈페이지
- ↑ 가 나 다 라 마 “전주이씨대동종약원 - 해안군 약사”. 2005년 2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7월 17일에 확인함.
- ↑ 가 나 다 라 국조인물고 〈이희〉
- ↑ 《조선왕조실록》중종 35권, 13년(1518 무인 / 명 정덕 13년) 12월 28일(계사) 4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중종 44권, 17년(1522 임오 / 명 가정 1년) 3월 11일(무오) 1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중종 73권, 28년(1533 계사 / 명 가정 12년) 2월 14일(정해) 2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중종 94권, 35년(1540 경자 / 명 가정 19년) 10월 10일(무진) 2번째기사
- ↑ 네이트 한국학 - 해안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조선왕조실록》중종 97권, 37년(1542 임인 / 명 가정 21년) 1월 8일(기축) 2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명종 3권, 1년(1546 병오 / 명 가정 25년) 2월 19일(병오) 3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명종 27권, 16년(1561 신유 / 명 가정 40년) 4월 3일(임진) 1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선조 7권, 6년(1573 계유 / 명 만력 1년) 8월 4일(신해) 1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정조 25권, 12년(1788 무신 / 청 건륭 53년) 4월 6일(무술) 3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선조 133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 29년) 1월 19일(무오) 1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선조 139권, 34년(1601 신축 / 명 만력 29년) 7월 15일(경술) 2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