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남씨
의령 남씨(宜寧 南氏)는 경상남도 의령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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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경상남도 의령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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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남군보(南君甫) |
주요 인물 | 남재, 남은, 남지, 남간, 남휘, 남이, 남효온, 남치근, 남곤, 남포, 남이공, 남이웅, 남이흥, 남구만, 남극관, 남태제, 남공철, 남병길, 남정철, 남광우, 남덕우, 남재희, 남평우, 남주홍, 남충희, 남경필 |
인구(2015년) | 162,729명 |
기원편집
시조 남민(南敏)의 본명은 김충(金忠)이며, 당나라 여남(汝南) 사람인데, 755년(경덕왕 14년)에 당나라 안렴사(按廉使)로서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영덕군 축산면에 표착(漂着)하였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은 그가 여남(汝南)에서 왔다고 하여 남(南)씨로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민(敏)이라 하였으며, 영양현(英陽縣)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남민의 7대손 진용(鎭勇)의 맏아들 홍보(洪甫)는 영양(英陽), 둘째 군보(君甫)는 의령(宜寧), 막내 광보(匡甫)는 고성(固城)에 각각 관적(貫籍)하였다고 한다.
역사편집
의령 남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46명, 상신(相臣) 6명, 대제학 6명을 배출하였다.
남군보(南君甫)의 현손인 남재(南在)가 조선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고, 1416년(태종 16년) 영의정에 올랐다. 남재의 손자 남지(南智)는 좌의정에 오르고, 남휘(南暉)는 태종의 부마(駙馬)가 되었다. 남곤(南袞)은 1523년(중종 18년) 영의정에 올랐다. 남이웅(南以雄)은 인조 때 춘성부원군(春城府院君)에 봉군되고 좌의정에 올랐다. 남재(南在)의 후손인 남구만(南九萬)은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1687년(숙종 13) 영의정에 올랐다. 남유용(南有容)이 영조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남유용의 아들 남공철(南公轍)이 순조 때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항렬자편집
- 대종중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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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履) 계(啓) |
口교(敎) 口원(元) |
종(鍾) 정(廷) |
口연(淵) 口희(熙) |
상(相) | 口우(祐) | 기(基) | 口현(鉉) | 윤(潤) | 口식(植) | 병(炳) | 口균(均) | 진(鎭) | 口구(求) | 주(柱) | 口섭(燮) | 규(奎) | 口호(鎬) | 순(淳) | 口근(根) | 영(榮) | 口찬(瓚) | 종(鍾) | 口수(洙) | 정(禎) | 口엽(燁) | 주(周) | 口일(鎰) | 영(永) | 口표(杓) | 형(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