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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왕후(成平王后, ?~1247년)는 고려 제21대 왕 희종(熙宗)의 왕후로, 성은 임(任)이다. 종실 영인후 왕진(寧仁侯 王稹)의 딸이지만 왕실과의 동성(同姓)을 피해 임씨를 사용한 듯 보인다.

책문편집

1211년(희종 7년)에 정식 왕비로 책봉되어 함평궁주(咸平宮主)로 봉해졌다. 함평궁주로 봉해질 때의 책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듣건대 주역에서 땅(坤元)의 덕을 칭찬한 것은 하늘의 굳센 도에 배합시켜 말한 것이요 왕후의 덕행을 칭송하여 쓴 것은 그것이 임금의 덕화의 기본으로 됨을 밝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산씨의 딸이 왕후로 되자 (夏)가 번영하였으며 태임(太妊)이 시집 오면서부터 (周) 왕실이 융성하여졌으니 이와 같이 왕후의 아름다운 도움을 받음으로써 국가를 훌륭하게 통치한 사실은 옛글에 실려 있어서 후세에 모범을 보이고 있다. 나는 삼가 대명을 받들어 왕업을 계승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앞서 가정부터 다스려 인륜의 근본을 소중히 하려 한다. 나의 아내도 하늘이 정하여 주었는데 어찌 적합한 배우자가 없었으랴? 아! 그대 원비 임씨는 종실의 귀한 딸로 탄생하여 일찍부터 경근 은화한 덕성이 나타났으며 편파한 마음이 없었다. 그대는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착한 아내로 되었고 내가 왕위에 오른 후부터는 더욱더 국정을 협찬하였다. 가정 단란의 경사가 트여 과연 원자를 낳았으니 그 후손이 더욱 번성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다만 종실만의 경사이랴! 실로 국가의 광휘로 될 것이다. 그대는 부덕(婦德)이 이 같으니 특히 두터운 총애와 표창을 줄 만하다. 그래서 그대에게 작호를 주어 후궁을 차지하게 하려고 지금 모관 모를 파견하여 부절(節)을 가지고 가서 그대를 왕비 함평궁주(咸平宮主)로 봉한다. 아아! 근면과 검약을 실천하여 몸을 잘 보존할지며 법도를 잘 준수하여 제사를 받들지어다. 그리고 자기의 직무를 생각하며 혹시라도 소홀히 하지 말라”

자녀와 사후편집

소생으로는 창원공(昌原公) 왕지(王祉), 시녕후(始寧侯) 왕위(王禕), 경원공(慶原公) 왕조(王祚), 대선사(大禪師) 경지(鏡智), 충명국사(沖明國師) 각응(覺膺), 고종의 왕비인 안혜태후(安惠太后)와 영창(永昌), 덕창(德昌), 가순(嘉順), 정희(貞禧)가 있다.

1247년(고종 34년)에 죽어, 소릉(紹陵)에 안장되었고, 시호는 성평왕후라 했다. 1253년(고종 40)에 정장(貞章)이라는 시호가 추가되었다. 성평왕후와 관련된 유물로는 함평궁주명 향완(제작년 미상)이 있다.

가족 관계편집

성평왕후가 등장한 작품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