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서울특별시 강서구·양천구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공암 허씨(孔巖許氏)라고도 한다.

양천 허씨
陽川許氏
양천 허씨 종문
이칭공암 허씨(孔巖許氏)
나라한국
관향서울특별시 강서구
시조허선문(許宣文)
집성촌경기도 연천군·안성시·파주시
개성시 장풍군
함경북도 김책시·길주군
평안북도 구성시
충청북도 청주시
전라북도 진안군
전라남도 순천시·담양군
주요 인물허재, 순비 허씨, 허백, 허종, 허침, 허자, 허엽, 허준, 허성, 허욱, 허봉, 허교, 허균, 허난설헌, 허완, 허후, 허목, 허적, 허윤, 허유, 허헌, 허백련, 허건, 허웅, 허근욱, 허영, 허재홍, 허경만, 허상만, 허명회, 허영만, 허정무, 허태정, 허재, 허인환
인구(2015년)149,505명
비고양천 허씨 대종회

역사 편집

양천 허씨(陽川 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가락국 수로왕과 왕비 허황옥의 후손이라고 한다. 허선문(許宣文)은 공암촌(孔巖 : 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 살면서 농사(農事)에 힘써 많은 양곡(糧穀)을 비축(備蓄)하였는데,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이 부족하여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군량(軍糧)을 보급해 주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군과의 싸움 중 말과 식량을 제공한 공으로 그를 공암촌주(孔岩村主)로 임명하여 공암촌을 식읍으로 내렸고, 허선문은 고려 건국에 대한 공으로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었다.

5세손 허재(許載)가 고려 인종 때 평장사(平章事)에 올랐고,[1] 10세손 허공(許珙)은 1258년(고려 고종 45년) 과거에 급제하여 충렬왕 때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올랐다.[2] 허공의 딸은 충선왕의 제6비 순비(順妃)로 책봉되었다.

세계 편집

1 허선문

許宣文

2 허현 許玄
3 허원 許元
4 허정 許正
5 허재 許載
6 허순 許純
7 허이섭

許利涉

8 허경 許京
9 허수 許遂
10 허공 許珙
┣━━━━━ ━━ ━━━━━━ ━━ ━━━━━━ ━━ ━━━━━━ ━━ ━━┓
11 허정 許程 허숭 許嵩 허관 許冠 허총 許寵 허부 許富
동주사공파

東州使公派

판도좌랑공파

版圖佐郞公派

대제학공파

大提學公派

분파 편집

10세손 허공(許珙)의 아들인 11세손에서 3파로 나뉜다. 허공(許珙) 맏아들 허정(許程)은 동주사공파(東州使公派), 셋째 아들 허관(許冠)은 판도좌랑공파(版圖佐郞公派), 다섯째 아들 허부(許富)는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의 파조다.

본관 편집

양천은 서울특별시 강서구, 양천구 일대의 지명이다. 고구려의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었는데, 통일신라 경덕왕 때 공암현(孔岩縣)으로 고쳤다. 공암 허씨로 불리다가 1310년(고려 충선왕 2)에 양천현(陽川縣)으로 개칭되어 양천 허씨(陽川 許氏)가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1895년(고종 32)에 양천군(陽川郡)으로 개편됐다. 1914년 경기도 김포군에 통합돼 양동면, 양서면이 됐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인물 편집

판도좌랑공파(版圖佐郞公派) 허관(許冠)의 후손들이 현달하였는데, 20세손 허엽(許曄)이 동인의 영수가 되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슬하에 허성(許筬), 허봉(許篈), 허균(許筠), 허난설헌(許蘭雪軒) 4남매가 있다. 20세손 허준(許浚)은 선조 때 명의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였으며 양평군에 봉해졌다. 22세손 허적(許積)이 1671년(현종 12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허목(許穆)은 숙종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항렬자 편집

  • 대동항렬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49세 50세 51세 52세
만(萬) 욱(旭) 회(會) 행(行) 무(茂) 범(範) 강(康) 재(宰) 정(廷) 규(揆) 학(學) 병(秉) 연(演) 경(卿) 진(振) 용(龍) 남(南) 수(洙) 창(暢) 상(商) 국(國) 곤(袞)

왕실과의 인척 관계 편집

고려 편집

조선 편집

각주 편집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