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복고의 대호령
왕정복고(王政復古)는 1868년 1월 3일 게이오 3년에 에도 막부와 섭정, 관백을 폐지하고, 3직(총재, 의정, 참여)의 설치로 새 정부의 수립을 선언한 정변이다. 이것을 선언한 것을 왕정복고의 대호령(王政復古の大号令)이라고 한다.

배경 편집
왕정복고에 의한 새로운 체제의 수립까지 막부 말기 개국 이후의 새로운 세계정세에 대응해 일본의 근대화, 국력 양성을 추진하기 위한 정치 체제가 구상, 모색되고 있었다.
개국과 막부의 권위 실추 편집
에도 시대 후기, 국학의 진전 등에 의해 지식인 사이에 존왕 사상이 확산되고 있었다. 한편 막부 지배의 정당성의 근거로 대정위임론에서 구했다는 견해도 있으며, 에도 초기의 금중병공가제법도 (제1조)으로부터 그 싹을 찾아볼 수 있다. 막부 정치의 구조 조정(너그러운 정치 개혁)을 주도한 노중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주자학을 권장함으로써 침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막부의 정당성의 원천을 천황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 권위는 널리 인식되어 있었다.
1853년 에도 시대 막부 말기 흑선 내항 이후 개국과 통상을 둘러싸고 국론이 양분되었다. 법으로 국시로 삼아왔던 2백 년간의 쇄국정책의 대전환이 일어났고, 그것도 서양의 군사적 위협에 굴복한 결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막부의 위신은 급락했다. 막부는 비등하게 부상한 양이론을 억제하고, 통상 조약을 체결하는데, 조정의 권위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병약한 장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 문제를 놓고 막부 내각과 다이묘 사이에 히토츠바시 파(一橋派)와 난키 파(南紀派) 사이에 대립이 생겼다. 노중 홋타 마사요시, 시마즈 나리아키라(사쓰마번), 다테 무네나리(우와지마번주), 도쿠가와 요시가츠(오와리번주), 야마우치 요도(豊信, 도사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요시나가, 에치젠 번주) 등 히토츠바시 파가 고산쿄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옹립하려 한 반면, 이이 나오스케(히코네번주) 등 난키 파는 막부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사촌 동생 도쿠가와 요시토미(기이 번주)를 지지하고 있었다. 막부에 의한 정치 밖에 놓인 신판 다이묘나 도자마 다이묘 세력도 참가하는 거국일치의 새 체제의 구축을 목표로 세력과 기존 막부 체제의 견지를 지향하는 막부 각료 신하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의 대립이었다.
1858년(안세이 5년) 4월, 이이 나오스케가 대로로 취임하였고, 6월에는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장군의 후계자로 정해지며 난키 파가 승리한다. 같은 시기부터 9월까지 〈안세이 5개국 조약〉이 체결되었다. 고메이 천황의 양이 의지는 굳건했고, 칙허를 얻은 못한 조약 체결이었기 때문에, 양이론은 존왕론과 결합하여 막부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으며, 또한 개국론자가 많은 히토쓰바시 파에서도 칙허를 얻지 못한 서명이었다고 공격받았다. 이이 나오스케는 안세이 대옥을 단행하여 이 운동을 탄압했는데, 1860년 이에 반발하는 미토 낭인들에게 암살당했다. (사쿠라다 문 밖의 변)
이이 나오스케의 사후 노중 수좌 안도 노부마사 등은 ‘존왕론’을 내세워 막부에 반발하는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공무합체에 의해 막부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검토하고 있었던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와 막부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결혼을 추진했다. 협상은 난항을 겪었지만, 시종 이와쿠라 도모미는 천황의 자문에 대해 양이를 조건으로 하는 혼약 승인을 진언했고, 천황은 이후 양이를 실행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혼인을 공인했다. 가즈노미야는 1861년(분큐 원년) 11월에 에도에서 내려가 이듬해 2월에 혼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동안 안도 노부마사는 이 정략 결혼을 반대한 미토번을 벗어나 떠돌던 낭인들에게 습격당해 부상(사카시타 문 밖의 변)을 당하고, 4월에 노중에서 파면되었다.
공의정체의 모색 편집
사쿠마 쇼잔, 요코이 쇼난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서적, 단락적인 쇄국과 양이가 통용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막부의 미온적인 자세에 의한 개국과 서양과 대등한 외교, 통상 관계를 바라지 않고, 선진적인 산업과 기술을 도입하여 경제력, 해군력을 축적하고 국력,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 실현을 위해서는 후다이 다이묘와 막부의 신하에 의해 국정이 독점되는 기존의 체제를 변화시키고 더 널리 인재, 의견을 도입하는 구조(공의정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제번, 재야 개혁파 또는 히토쓰바시 파 제후뿐만 아니라 막부 내부에서도 커지고 있었다.
조슈번은 나가이 우타가 《항해원략책》(航海遠略策)을 통해 개국통상에 의한 국력 양성, 해외 웅비를 제창하였고, 한때 번론으로 채용되었다. 게다가 막부 노중 안도 노부마사, 쿠제 히로치카 등도 이것을 지지했다. 다만 나가이의 사상은 체제 변혁 등의 구체적 방안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안도 노부마사가 사카시타 문 밖의 변으로 실각하자, 조슈번에서는 구사카 겐즈이 등의 존양파가 세력을 만회하였고, 그들의 공작에 의해 조정에서 나가이는 밀려나게 된다.
분큐(文久) 2년(1862년) 4월, 교토를 떠난 나가이와 교대하여 사쓰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 번주 시게히사의 아버지로 전임 번주 나리아키라의 동생)가 번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교토로 왔다. 사쓰마가 목적으로 한 것은 일찍이 히토쓰바시 일파가 시도했던 친번, 선진 도자마 웅번이 일본의 국정에 참여하는 체제, 그리고 조정·막부라는 이원 체제의 통합이었다. 이 무렵 교토는 가즈노미야의 하가에 자극받은 낭사들이 모여 들었고 조슈 번도 활발하게 공작을 벌이는 등 존왕양이파의 기세가 더해져 불온한 상황이 되었으며 조정은 히사미쓰에게 낭사 진무(鎮撫)의 칙명을 내렸다. 히사미쓰는 이에 응해 데라다야 소동(寺田屋騒動)으로 자번의 존왕양이 과격파도 숙청하여 신뢰를 얻었고, 이를 계기로 막정 개혁안을 조정에 제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개혁을 명하는 칙사가 히사미쓰와 함께 에도로 내려갔고 막부는 분큐의 개혁(文久の改革)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 후견직으로, 마쓰다이라 슌가쿠가 정사총재(政事総裁) 직에 취임하면서 종래 막정에 참여할 입장에 있지 않았던 도쿠가와 일문의 이들 두 사람을 정상으로 하는 체제가 우선 발족되었다.
분큐 3년(1863년) 8월 18일의 정변으로 사쓰마 번은 교토 수호직 아이즈 번과 동맹을 맺고 조슈 번 및 산조 사네토미 등 존왕양이파 공경을 교토에서 일소한다. 조정은 시마즈 히사미쓰,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쓰다이라 슌가쿠,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 야마우치 요도(山内容堂) 등 개명파 제후들에게 교토 상경을 명했고 이를 받은 제후들은 연말에 걸쳐 잇따라 입경했다. 히사미쓰는 제후 합의에 따른 공의정체 설립에 협조를 구하고 슌가쿠, 무네나리, 교토 수호직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 등도 이에 동참한다. 조정은 이들 제후를 조정참예(朝廷参預)로 임명하여 조정회의에 참석시키기로 하였다. 또 이듬해인 겐지(元治) 원년(1864년) 2월 쇼군 이에모치가 상경하자 참예 제후는 로주 방으로의 진입도 허용되었다. 이에 비로소 천황과 쇼군 아래 일원화되어 친번 · 도자마 웅번이 합의하는 공의정체가 발족되었다.
참고자료 편집
- 毛利敏彦 「幕藩体制の終焉 -微視的考察-」(藤野保先生還暦記念会編『近世日本の政治と外交』(1993年、雄山閣) ISBN 4639011954)
- 家近良樹 『徳川慶喜』(2004년, 吉川弘文館, ISBN 4-642-06281-5)
- 青山忠正 「慶應三年十二月九日の政変」『講座 明治維新2』(2011년, 有志舎, ISBN 978-4-903426-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