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정 (1552년)
이광정(李光庭, 1552년 ~ 1629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덕휘(德輝), 본관은 연안이다. 정언을 지낸 이주(李澍)의 아들로, 어머니 유씨는 유순정의 증손이다.[1]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고, 같은 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에 가봉(加封)되었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민유중의 외조부이자 숙종비 인현왕후의 진외조부이다.
생애편집
1590년(선조23)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선조를 보필했다.[2] 1593년 호종의 공을 인정받아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는데[3] 조정에 출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의 파격적인 승진이었기에 외람된 관직이라는 의견이 있었으나 선조가 듣지 않았다.[4]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군량을 담당하는 일을 맡았고 1598년에는 공을 인정받아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가자되었다.[1] 이 인사에 대해서도 사헌부와 사간원 등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과분한 가자라고 간했으나 선조가 윤허하지 않았다.[5][6] 정유재란 중에는 명나라에서 원정을 온 마귀의 접반사로 그를 수행하기도 했다.[7] 1601년 지중추부사, 1602년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다.[1][8] 같은 해에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연원 부원군(延原府院君)에 가봉(加封)되었다.[1] 청렴결백한 인물이었으나 인목대비 폐비 사건 당시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폐비론에 동조한 이후로 비난을 받았다.[9]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3등(衛聖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1623년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같은 해 공조판서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의 발발로 인조를 보필해 강화로 피신했는데 여기서 전염된 수토병이 악화되어 1629년 죽었다.[1]
묘소편집
이주·이광정 묘 및 신도비(李澍·李光庭 墓 및 神道碑)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뇌조리에 있다. 2001년 12월 21일 파주시의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 부인 : 청송 심씨 - 풍덕 군수 심순(沈荀)의 딸[1]
- 부인 : 양천 허씨 - 개성 유수 허잠(許潛)의 딸
이광정을 연기한 배우편집
각주편집
- ↑ 가 나 다 라 마 바 《국역 국조인물고》 권11 경재(卿宰) 이광정의 비명(碑銘)
- ↑ 《조선왕조실록》 인조 20권, 7년(1629년) 2월 19일 1번째 기사
- ↑ 《조선왕조실록》 선조 43권, 26년(1593년) 10월 13일 3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 선조 43권, 26년(1593년) 10월 18일 2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 선조 102권, 31년(1598년) 7월 18일 4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 선조 102권, 31년(1598년) 7월 29일 1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 선조 104권, 31년(1598년) 9월 30일 4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 선조 175권, 37년(1604년) 6월 25일 7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 인조 1권, 1년(1623년) 3월 14일 9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 광해 54권, 4년(1612년) 6월 23일 7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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