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선

이휘선(李徽善, 1865년(철종 16) 7월 4일 ∼ ?)은 구한말의 관료, 법관이다. 자(字)는 경오(景五)이고,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사헌부집의로 증(贈)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이재명(李在明)의 아들이며, 태화 이현상(太華 李顯相)의 증손이다. 대한제국 법부고등재판소, 평리원(平理院)에서 판사검사로 근무하였다.

이휘선
출생1865년 7월 4일
대한제국 한성부 중서 정선방 김만년계(金萬年契) 승문동(承文洞) 91통 4호
사망?
일제 강점기 경성부 중부 수은동 김만년계(金萬年契) 부락(현, 서울 종로구 수은동 56번지 일대)
국적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본관우계(羽溪)
정당무소속
종교유교(성리학)
부모이재명, 동래정씨

과거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하였으나 1887년(고종 24년)의 고종이 친히 주관한 제술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다. 1895년(고종 32년) 고등재판소서기로 명성황후 살해범 공판 당시 박선(朴銑)과 친위대 부위 윤석우(尹錫禹) 재판 및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궐석재판 선고 공판에 참여하였다. 1896년(건양 원년) 9월 19일 고등재판소검사시보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12월 6일 법부검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법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906년 김해군수로 나갔다. 준원전 수리공사에 참여한 공로로 가선대부로 승진, 중추원의관 칙임관2등이 되었다. 한일 합방 이후에는 경성부 중부 니동에서 변호사사무실을 개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00년 12월 15일 법무부의 형법교정관(刑法校正官)을 겸임, 1901년 12월 17일 다시 형법교정관에 재임명되었다가 1904년(광무 7) 10월 14일 겸임 법부 형법교정관에서 해촉되었다. 1896년 9월 고등재판소검사시보 때부터 1901년(광무 4) 11월 28일 평리원판사 재직 때까지 동학 농민 운동 관련 재판에 참여하였다.

약력편집

출생과 초기 활동편집

이휘선은 한성부 중서 정선방(中署 貞善坊) 김만년계(金萬年契) 승문동(承文洞) 91통 4호(현, 서울 종로구 수은동 56번지 일대)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장악원정(掌樂院正) 이재명(李在明)이고, 어머니 동래정씨는 장사랑 정수홍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1826년1836년 동지사 신재식의 수행원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분서 이봉녕이고, 증조부는 1811년1812년 일본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다녀온 태화 이현상이다.

10대조는 이희헌(李希憲)으로 선조~인조 때의 한의사이며, 임진왜란 직후 허준선조의 명으로 의서들을 저술, 편찬할 때 의서인출감교관으로 의서들의 영인과 발행을 감독했다. 9대조 이원빈은 영의정 이홍주의 서녀와 결혼했는데, 7대조는 이상우(李商雨)로 친척인 이영구의 양자로 입양하였다. 이상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에서 근무하였다.

어머니 동래정씨는 정광필정태화의 후손으로, 조부는 도사 정하영(鄭夏榮)이고, 증조부는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 연뢰 정극순(鄭克淳)이다. 정태화(鄭太和)의 아들 정재대(鄭載岱)의 7대손이다.

대한제국 관원이력서에 의하면 1869년부터 가학을 수학하였다 한다. 이후 사부학당에 입학하여 유생이 되었다. 1882년(고종 19) 2월 8일 고종이 관학 유생을 대상으로 한 응제시 중 부(賦)에서 초삼하(草三下)의 성적을 받았다.[1] 1882년(고종 19) 2월 8일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3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는 곧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했고, 과거 제도는 곧 폐지되었다.

법관 활동편집

검사시보, 검사 임용 초기편집

1887년 8월 고종이 친히 주관한 추도기 제술(秋到記製述)에 합격하였다.[2] 1895년 법부서기시보에 임용되고 1895년 4월 2일 법부주사 판임관 8등(法部主事 判任官八等)이 되었다.[3] 1895년(고종 32년) 고등재판소 서기로 명성황후 살해범 공판 당시 법원서기로 박선(朴銑)과 친위대 부위 윤석우(尹錫禹) 재판 및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궐석재판 선고 공판에 참여하였다.[4] 이후 을미사변 관련자들의 선고 공판에 검사시보로서 참여하였다.

1896년(건양 원년) 6월 30일 판임관 7등으로 승급되고, 1896년 9월 19일 고등재판소검사시보(高等裁判所檢事試補)에 임명되었으며[5], 같은 날 고등재판소검사시보 주임관 6등에 임명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 기간 중 불법으로 남의 무덤을 판 당진군 거주 김성원(金性元)의 재판에 검사시보로 입회하였다. 이후 그해 11월 28일까지의 재판에 검사시보로 입회, 참여하였다. 그해 11월에는 뇌물을 받고 재판을 부당하게 처리한 삭녕군수 이정석(李貞錫)의 재판에 그달 14일 최종 선고까지 검사로 참여하였다.[6]

1896년 12월 16일 법부검사(法部檢事)로 승진[7], 동년 12월 17일 법부검사에서 고등재판소검사(高等裁判所檢事)로 발령되었다.[8] 이후 1897년(건양 2년) 3월 10일까지 고등재판소에서 열린 동학 농민 운동 관련자의 재판에 입회하였다. 6월 5일 제주도에 유배된 죄수 2명이 섬을 탈출한 일로, 체포된 유배지의 군수 대정군수(大靜郡守) 채귀석(蔡龜錫)을 심문하였다.[9] 그 뒤 다시 법부검사가 되었으며, 1897년(건양 2년) 9월 29일 치사 봉조하(致仕奉朝賀) 김재현(金在顯), 정1품 이호준(李鎬俊) 외 조정 전 관원이 고종에게 황제 칭호를 올릴 것을 청하는 연명 상소에 참여하였다.[10] 1897년 10월 18일 선희궁(宣禧宮) 개수에 별단(別單)으로 참여한 공로로 6품으로 승진하였다.[11] 1897년(광무 원년) 11월 3일 법부검사에서 면관, 대한제국(大韓帝國) 수립 후에 법부주사가 되었다. 1898년(광무 2년) 2월 경비를 타인에게 임의로 대여한 일로 면직되고, 2월 7일 징계에서 사면되었다. 그 해 11월 16일 법부주사 판임관 2등(法部主事 判任官二等)에 임명되었다.

판사, 검사 생활편집

1899년(광무 2년) 4월 24일 한성부재판소 판사 주임관 5등(漢城府裁判所判事 奏任官五等)이 되고 5월 평리원재판소 판사가 되었다. 1899년 5월 22일부터 법부 법률기초위원을 겸임하였다.[12] 6월 5일 한성부재판소 검사[13] 주임관 4등(漢城府裁判所檢事 奏任官四等)으로 승서하였다. 1899년 7월 25일 한성부재판소 검사에서 의원면직하였으나[14], 같은 날 곧 평리원판사 주임관 4등이 되었다. 8월 9일 겸임 법부 법률기초위원(法部法律起草委員)에서 해임되었다.[15] 1899년 10월 21일 수릉(綏陵)과 홍릉(洪陵)에 직접 제사지낼 때의 종헌관(終獻官) 이하 관원들을 포상할 때, 종헌관으로 참여한 공로로 가자(加資)되었다.[16] 같은 날 정3품에 임명되었다.[17]

1899년 11월 25일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숭한 뒤 경모궁에 종묘로 위패를 이봉할 때 참여한 차비관(差備官)을 포상할 때, 봉을묘옥책 집사로 참여한 공로로 아마(兒馬) 1필을 하사받았다.[18]

1900년(광무 3) 4월 24일 법부주사(法部主事)에서 한성부재판소판사(漢城府裁判所判事)에 임명되었다. 그 해 5월 24일 한성부재판소판사법부법률기초위원(法部法律起草委員)에 겸임되고, 6월 5일 법부대신(法部大臣) 유기환(兪箕煥)의 청에 따라 법부(法部) 및 평리원 관제(平理院 官制)의 개정에 따라 법부의 전 민사국(民事局)·검사국(檢事局)의 직원 및 고등재판소판사 이하의 직원(職員)을 모두 해임하고, 그 후임을 기용할 때, 한성부재판소판사에서 면직, 한성부재판소검사(漢城府裁判所檢事)로 임명되었다. 1900년 6월 6일 주임관 3등(奏任官三等)으로 승급되었다. 7월 25일 한성부재판소검사에서 의원면직하였다.

1900년 7월 26일 경상북도재판소 검사시보에 임명되고[19], 그 해 평리원 판사(平理院判事)에 임명되었다. 그 날부터 동학 농민 혁명 관련자들의 재판에 주심재판장 홍종우(洪鍾宇) 외에 5인의 판사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어 동학농민군 나머지 관련자의 재판에 참여하였다.[20] 이 해 8월 9일 겸임하던 법부법률기초위원(法部法律起草委員)에서 해면되고, 1900년 평리원판사(平理院判事)에서 평리원 검사(檢事)로 전직하고[21], 뒤에 다시 판사가 되었다가 그해 12월 15일 형법교정관(刑法校正官)을 겸직했다.[22] 1901년(광무 4) 3월 15일 평리원검사 칙임관4등(勅任官四等)에 임명되었다. 바로 3월 16일부터는 겸임 특별법원 검사(特別法院檢事)를 겸직했다. 1901년(광무 4) 12월 17일 평리원판사법부참서관(法部參書官) 김윤수(金允秀), 하규일(河圭一) 등과 함께 형법교정관(刑法校正官)으로 차하(差下)되었다. 평리원판사가 된 뒤에도 1904년 11월 28일까지 동학 농민 운동 관련자들 재판에 배석판사로 재판에 참여하였다.

1902년(광무 5) 3월 15일 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가 되었고[23], 3월 16일 겸임 특별법원검사(兼任特別法院檢事)에 임명되었다.[24] 그해 4월 19일 겸임 특별법원검사에서 해임하였다.[25] 그 해 창릉(昌陵)에 화재사건이 발생하자 조사하였으나, 실화의 원인을 속히 찾지 못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 5월 31일 법부대신서리(法部大臣署理) 이재곤(李載崑)의 탄핵을 받고, 징계를 받았다. 징계로 1개월 감봉되고[26], 범인색출령을 지시받았다. 이때 법무대신 이재곤은 2개월 감봉형을 상주했으나, 고종은 1개월 감봉형으로 감형하였다.[27] 이후 그는 경상 내의 왕릉 및 황실 묘역, 황실 사당 등을 순시하며 출입자 감독, 방화예방 순찰을 하기도 했다. 그 해 7월 18일 황명으로 중추원 의관이 되고[28], 7월 18일 중추원의관 칙임관 4등(中樞院議官 勑任官四等)에 임명되었다.[29] 11월 8일 중추원 의관직을 사퇴했다.

생애 후반편집

1904년(광무 7) 10월 6일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평리원검사가 되고[30], 칙임4등(勑任四等)에 선임되었다. 10월 14일 겸임 법부 형법교정관에서 해임되었다.[31]

1905년(광무 8) 2월 20일 외직인 김해군수 주임관1등(金海郡守 奏任官一等)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광무9) 6월 2일 참정대신(參政大臣) 심상훈(沈相薰)이 경기관찰사의 보고를 받고 청을 올려, 바로 김해군수로 겸 경상남도 집포관(慶尙南道戢捕官)에 임명되었다. 이어 경상남도재판소 판사를 겸직했다. 이후 1906년 5월 15일 준원전(濬源殿) 수리공사에 감동으로 참여한 공로로 종이품(從二品) 가선대부로 승진, 중추원의관 칙임관2등이 되었다.[32]

6월 2일 경기도 각지에 도적이 출몰하여 참정대신 심상훈(沈相薰)의 건의로 경기도집포관에 임명되었다.[33] 다시 김해군수로 복직하고, 1906년 8월 2일 지방관 근무성적에서 폄하(貶下)를 받아 면직하고[34], 동년 9월 29일 징계에서 사면받았다.[35] 1906년 9월 경성부 중부 니동 102통 3호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1907년 다시 중추원의관 칙임관2등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10년(융희 4) 10월 2일 한일 합방이 되자 관작을 사퇴하였다. 이후 경성부 중부 니동 102통 3호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1911년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며, 사망년대는 미상이다.

사후편집

묘소의 위치는 미상이다.

기타편집

동학농민군 관련 재판 참여편집

1896년 9월 19일 고등재판소검사시보 주임관 6등에 임명되었으며, 동학 농민 운동 기간 중 불법으로 남의 무덤을 판 당진군 거주 김성원의 재판에 검사시보로 입회하였다. 1896년 12월 16일 법부검사, 동년 12월 17일 법부검사에서 고등재판소검사로 임명된 이후에도 1897년(건양 2년) 3월 10일까지 고등재판소에서 열린 동학 농민 운동 관련자의 재판에 입회하였다.

1900년 4월 한성부재판소판사가 된 뒤 평리원판사, 평리원검사 등으로 전직하고, 여러번 평리원검사에 임명되었다가 판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1904년 11월 28일까지 동학 농민 운동 관련자들 재판에 검사로 동학 농민군 관련 재판에 참여하거나 배석판사의 한 사람으로 동학 농민군 관련 재판 판결에 참여하였다.

황실 관련 재판에 참여편집

1895년(고종 32년) 고등재판소 서기로 명성황후 살해범 공판 당시 법원서기로 박선(朴銑)과 친위대 부위 윤석우(尹錫禹) 재판 및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궐석재판 선고 공판에는 법원서기로 참여하였다.[36] 1900년 5월 7일, 1894년의 이준용 역모사건을 고하지 않은 죄 및 1898년 황제양위 미수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안경수(安駉壽), 권형진(權瀅鎭) 등에게 교수형 판결을 내리는데는 판사로 참여했다.[37]

가족 관계편집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승정원일기 고종 20년 계미(1883) 2월 8일(기미)자 19번째기사, "과차를 하였다"
  2. 승정원일기 2973책 (탈초본 136책) 고종 25년 5월 12일 계해 20번째 기사
  3. 승정원일기 고종 32년 을미(1895) 4월 1일(임인)자 2번째기사, 칙령으로 내각 총리대신 1등에 김홍집을 임용하였다
  4. 관보 1895년 11월 14일자 1면
  5. 승정원일기 고종 33년 병신(1896) 8월 13일(을해, 양력 9월 19일)자 8번째기사, 한성부재판소 판사에 홍종억을 임용하였다
  6. 議政府 편, 《法部來文 제2책》, 건양 원년(1896) 11월 14일자 判決宣告書
  7. 승정원일기 고종 33년 병신(1896) 11월 12일(계묘, 양력 12월 16일)자 5번째기사, 법부 검사에 이휘선을 임용하였다
  8. 승정원일기 고종 33년 병신(1896) 11월 13일(갑진, 양력 12월 17일)자 4번째기사, 고등재판소 검사에 이휘선을 임명하였다
  9. 승정원일기 고종 34년 정유(1897) 5월 6일(갑오, 양력 6월 5일)자 11번째기사, 대정 군수 채귀석을 잡아다 조사한 결과에 대해 보고하는 의정부찬정 법부대신 한규설의 계
  10. 승정원일기 고종 34년 정유(1897) 9월 4일(경인, 양력 9월 29일)자 10번째기사, 타당한 여론에 따라 황제의 칭호를 올릴 것을 청하는 치사 봉조하 김재현 등의 상소
  11. 승정원일기 고종 34년 정유(1897) 9월 13일(기해, 양력 10월 8일)자 13번째기사, 선희궁을 옮겨 지을 때의 전관인 궁내부 대신 이재순 등에게 시상하라는 조령
  12. 승정원일기 고종 36년 기해(1899) 4월 13일(경인, 양력 5월 22일)자 13번째기사, 법부 법률기초위원장에 법부 협판 이근호를 임명하였다
  13. 승정원일기 고종 36년 기해(1899) 4월 27일(갑진, 양력 6월 5일)자 16번째기사, 법부 사리국장에 민영선을 임용하였다.
  14. 승정원일기 고종 36년 기해(1899) 6월 18일(갑오, 양력 7월 25일)자 5번째기사, 궁내부 참서관 진영렴 등의 본관을 의원면직하였다
  15. 승정원일기 고종 36년 기해(1899) 7월 4일(기유, 양력 8월 9일)자 5번째기사, 법부 법률기초위원에서 평리원 판사 이휘선을 해임하였다
  16.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10월 21일 양력 1번째기사 1899년 대한 광무(光武) 3년, 수릉과 홍릉에 친제 때 종헌관 이하와 황태자가 홍릉에서 작헌례를 거행할 때 배종한 관리들에게 시상하다
  17. 승정원일기 고종 36년 기해(1899) 9월 17일(임술, 양력 10월 21일)자 13번째기사, 홍릉 제조 이승응 등에게 시상하라는 조령
  18. 승정원일기 고종 36년 기해(1899) 10월 23일(정유, 양력 11월 25일)자 25번째기사, 장종대왕을 경모전에 이봉할 때의 각 차비관의 별단에 대해, 신주출납 대축인 탁지부 재무관 김병흡 등에게 시상하라는 조령
  19. 승정원일기 고종 37년 경자(1900) 7월 1일(경자, 양력 7월 26일)자 14번째기사, 한성부재판소 검사시보에 6품 유학근을 임용하였다
  20. [1]
  21.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3월 15일 양력 3번째기사 1901년 대한 광무(光武) 5년 민영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22. 승정원일기 고종 37년 경자(1900) 10월 26일(갑자, 양력 12월 17일)자 18번째기사, 형법교정관에 민영적 등을 임명하였다
  23. 승정원일기 고종 38년 신축(1901) 1월 25일(임진, 양력 3월 15일)자 9번째기사, 평리원 검사에 평리원 판사 이휘선을 제수하라는 조령
  24. 승정원일기 고종 38년 신축(1901) 1월 26일(계사, 양력 3월 16일)자 15번째기사, 겸임 특별법원검사에 평리원 검사 이휘선 등을 임용하였다
  25. 승정원일기 고종 38년 신축(1901) 3월 1일(정묘, 양력 4월 19일)자 14번째기사, 특별법원판사에서 중추원 의관 윤필 등을 해임하였다
  26.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5월 31일 양력 5번째기사 1901년 대한 광무(光武) 5년 이재곤이 창릉의 화재에 대하여 아뢰다
  27. 승정원일기 고종 38년 신축(1901) 4월 14일(기유, 양력 5월 31일)자 8번째기사, 창릉 화재를 밝히지 못한 검사 이휘선에게 2개월 감봉하는 형전을 시행할 것을 청하는 법부대신서리 법부협판 이재곤의 계
  28. 승정원일기 고종 38년 신축(1901) 6월 3일(정유, 양력 7월 18일)자 4번째기사, 중추원 의관에 평리원 검사 이휘선을 제수하라는 조령
  29.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7월 18일 양력 1번째기사 1901년 대한 광무(光武) 5년 조병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30.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10월 6일 양력 1번째기사 1904년 대한 광무(光武) 8년 이휘선을 평리원 검사에 임명하다
  31. 승정원일기 고종 41년 갑진(1904) 9월 6일(신사, 양력 10월 14일)자 9번째기사, 형법교정관에서 전 법부 협판 조민희 등을 해임하였다
  32. 고종실록 47권, 고종 43년 5월 14일 양력 4번째기사 1906년 대한 광무(光武) 10년, 종2품 민영선 등에게 가자하도록 하다
  33. 승정원일기 고종 42년 을사(1905) 4월 30일(임신, 양력 6월 2일)자 11번째기사, 광주 부윤 윤창근 등을 경기 집포관에 차하할 것을 청하는 참정대신 심상훈의 계
  34. 승정원일기 고종 43년 병오(1906) 6월 13일(무인, 양력 8월 2일)자 4번째기사, 석성 군수 오근선 등의 본관을 면직하였다
  35. 승정원일기 고종 43년 병오(1906) 8월 12일(병자, 양력 9월 29일)자 8번째기사, 전 송화 군수 장기흡 등에 대해 징계를 사면하였다
  36. 관보 1895년 11월 14일자 1면
  37. 주한일본공사관기록 & 통감부문서 제15권

참고 문헌편집

  • 고종실록
  • 고종시대사
  • 승정원일기
  • 비변사등록
  • 우계이씨 세보
  • 靑又日錄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