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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탁(丁炳卓, 1942년 3월 14일 ~ 2016년 2월 10일)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며,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선수 시절 빠른 발을 앞세운 돌파력 및 지능적인 플레이에 강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1][2] 감독으로서는 정교한 숏 패스를 위주로 한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기술 축구를 선호했던 것으로 평가되었다.[3][4][5] 또한 연세대학교 감독 재임 시절 강철 등 여러 스타 선수들을 지도했으며, 특히 공격수였던 강철을 수비수로 포지션 변경시킨 것으로 유명하다.[6]

정병탁
(丁炳卓)
Football pictogram.svg
개인 정보
로마자 표기 Jung Byung-Tak
출생일 1942년 3월 14일(1942-03-14)
출생지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여수읍
사망일 2016년 2월 10일(2016-02-10) (73세)
사망지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
173cm
포지션 감독 (과거 공격수)
청소년 클럽 기록


1963-1966
여수중학교
배재고등학교
연세대학교
클럽 기록*
연도 클럽 출전 ()
1967-1969
1970-1972
양지 축구단
신탁은행 축구단

국가대표팀 기록
1963-1970 대한민국 039 0(11)
지도자 기록
1980-1981
1984-1993
1985-1986
1989
1994
1994-1996
1995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연세대학교
대한민국 U-20
한국대학축구연맹 (기술이사)
대한축구협회 (상벌위원장)
전남 드래곤즈
대한민국
* 클럽의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센다. 또한 출장수와 골은 2003년 1월 1일 기준이다.
‡ 국가대표팀의 출장수와 골은 2003년 1월 1일 기준이다.

선수 경력편집

클럽편집

일제 강점기 당시 전라남도 여수읍 출신으로 여수서초등학교, 여수중학교, 배재고등학교를 거쳤으며, 1963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1965년 와세다 대학과의 정기전에서 선제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일조했으며,[7] 그 해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 여러 차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해 팀의 대회 준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8][9][10] 그 뒤 1966년 연고전에서 패널티킥 선제골을 성공시켜 팀의 승리에 일조했으며,[11] 같은 해 있었던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는 중앙대학교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의 활약으로 팀의 공동 우승에 공헌하였다.[12]

이후 1967년 해병대 축구단에 입단한 뒤 새로 발족한 양지 축구단에 편입되었으며,[13] 해병대와 양지의 이중 등록 논란에 휘말렸으나 최종적으로 양지 소속으로 출전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14][15] 그리고 같은 해 열린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1967 출전팀 선발 대회에서 몇 차례 골을 넣으며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였으나,[16][17] 팀은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또한 1968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팀은 우승에 실패했으며,[18]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 1969 참가 명단에 포함되어 본선에 참여하였다.[19] 본선에서는 라이온스 FC과의 경기에서 1골, 베트남 경찰 축구단과의 경기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20][21] 도요 공업과의 4강전 경기에서도 배김수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회 준우승을 이끌었다.[22]

그 뒤 1970년 양지가 해체된 이후 한국신탁은행 축구단에 합류한 뒤 금융단축구협의회에서 조직한 금융단 축구 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으며,[23] 동남아시아 순회 경기에서 싱가포르의 군경합동팀, 말레이시아슬랑오르 FA, 태국의 은행연합팀, 일본의 청소년 대표팀을 상대로 득점을 올리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24][25][26][27] 또한 그 해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몇 차례 득점을 올리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나 주택은행 축구단과의 4강전에서 승부차기에 나섰으나 실축해 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며,[28][29][30]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추계 대회에서 여러 경기에서 공격 포인트를 성공시키며 팀의 준우승에 공헌하였다.[31][32][33][34][35] 하지만 그 해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당시 주심의 판정에 지나치게 항의하는 모습을 보이다 경고를 받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36]

이후 1971년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 대회에서도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며 팀을 결승 리그로 이끌었으며,[37][38] 팀은 결승 리그에서 1승 2무를 기록하며 창단 후 최초로 공식 대회 우승을 차지하였다.[39] 그리고 추계 대회에서도 몇 차례 득점포를 쏘아올리며 팀의 준우승에 일조했으며,[40][41] 그 해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상업은행 축구단과의 4강전과 조홍은행 축구단과의 결승전에서 잇달아 득점에 성공하며 팀의 일반부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나 팀은 대학부 우승팀인 고려대학교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42][43][44] 또한 전국축구선수권대회 당시 물의를 빚은 것을 사유로 대한축구협회로부터 6개월간 선수 자격 정지의 중징계 처분을 받았다.[45]

그 뒤 1972년 국가대표 B팀과의 경기에 출전했으며,[46] 동남아시아 원정 도중 열린 싱가포르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추가골을 득점하였다.[47] 그리고 그 해 선수 은퇴를 선언한 뒤 강남조기축구회에서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으며,[48] 1979년 열린 연고 OB 올스타전에 출전하였다.[49] 또한 1988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을 앞두고 진행된 40대 올스타전에 나섰으며,[50] 1989년 개최된 제2회 연고 OB 정기전에도 40대 장년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득점을 기록하였다.[51][52]

국가대표팀편집

1962년 아시안 게임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으며,[53] 1963년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54] 그리고 그 해 버마와의 친선경기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필리핀과의 1964년 하계 올림픽 2차 예선 경기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필리핀 측에서 기권을 통보함으로서 경기에 나서지 못했으며,[55][56] 베트남 공화국과의 3차 예선 경기 출전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다.[57] 그 뒤 1964년 AFC 아시안컵에 참가해 활약했으며,[58] 같은 해 국가대표 B팀으로 구성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선수 선발 대회에 출전해 좋은 모습을 보이며 최종적으로 선발되었다.[59][60] 이후 1965년에는 1966년 FIFA 월드컵 예선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대한축구협회 측에서 예선 불참을 결정함에 따라 경기에 나서지 못했으며,[61][62] 그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최종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재학중인 연세대학교 사정으로 인해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63]

그 뒤 1966년 아시안 게임 선수 후보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선발되지 못했으며,[64] 또한 같은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선수 선발 대회에서는 논란 끝에 추가 명단에 발탁되어 최종 명단에 들어가게 되었다.[65][66] 그리고 일본과의 예선 경기에서 선제골을 어시스트했으며,[67] 뒤이어 본선에서는 태국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대표팀은 4위에 머물며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8]

이후 1967년에는 국가대표팀 상비군 명단에 포함되었으며,[69] 같은 해 열린 미들섹스 원더러스 AFC와의 1차 평가전에 출전하였다.[70] 그 뒤 1968년 AFC 아시안컵 예선 및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를 대비해 소집된 명단에 들어갔으며,[71] AFC 아시안컵 예선에서는 일본,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득점을 기록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대표팀은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72][73] 또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서는 말레이시아와의 4강전에서 동점골을 넣는 등의 활약을 보였고,[74] 대표팀의 공동 우승에 기여하였다.[75] 이후 1968년 하계 올림픽 예선에도 참가했으며,[76] 레바논과의 경기에서 멀티골을 넣은 데 이어 베트남 공화국과의 경기에서도 득점을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나 대표팀은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77][78] 그리고 남베트남 인디펜던스컵에도 나섰으며,[79] 태국과의 경기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고 베트남 공화국과의 4강전에서 추가골을 기록하며 대회 준우승에 공헌하였다.[80][81]

그 뒤 1968년에는 베트남 공화국과의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 2차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해 대표팀을 본선으로 이끌었으며,[82] 같은 해 열린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도 참가했으나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대표팀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83] 이후 1969년에는 베트남 공화국과의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 1차전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해 대표팀의 본선 진출에 기여했으며,[84] 1970년 FIFA 월드컵 예선 명단에 들어간 이후 국가대표 B팀과의 평가전에서 선제골을 득점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85][86] 그리고 일본과의 첫 번째 경기에서 박수일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는 활약을 보였으나 대표팀은 2-2 무승부를 기록했으며,[87] 얼마 뒤 열린 일본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도 정강지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표팀의 2-0 승리에 일조하였다.[88] 그 뒤 같은 해 개최된 킹스컵에도 출전했으며,[89] 라오스와의 조별 라운드 경기와 베트남 공화국과의 4강전에서 득점을 올리며 국가대표팀의 대회 우승을 견인하였다.[90][91][92] 이러한 활약으로 1969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93]

이후 1970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이원화 원칙에 따라 국가대표 B팀이 신설되자 정병탁은 A팀인 청룡팀에 포함되었으며,[94] 직후 펼쳐진 CR 플라멩구와의 3차 평가전에서 이회택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다.[95] 그 뒤 같은 해 열린 올라리아 AC와의 평가전에서 선제골을 득점하였으며,[96] 뒤이어 치러진 B 1903과의 2차 평가전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97] 이후 그 해 개최된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주장으로 참가하였고,[98] 인도와의 4강전에서 2어시스트를 기록한 뒤 버마와의 결승전에서 이회택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표팀의 사상 첫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단독 우승에 크게 공헌하였다.[99][100] 그리고 얼마 뒤 성사된 SL 벤피카와의 평가전에서 팀의 선제골에 관여하는 등의 활약을 선보였으며,[101] 경기 후 체력의 한계 및 후배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등의 사유로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였다.[102] 그 뒤 국가대표 A팀인 청룡팀과 국가대표 B팀인 백호팀간의 평가전 직후 정병탁의 은퇴식이 거행되었으며, 대한축구협회 측에서 정병탁에게 공로패를 수여하였다.[103][104]

은퇴 이후편집

국민생활체육협의회 소속이었던 선수들이 창단한 60세 이상의 선수들로 구성된 '고양시 실버축구단'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105][106] 이후 2010년 새로 출범한 '서울시 실버축구단'으로 옮겨 활동하였다.[107][108][109]

또한 2002년 FIFA 월드컵 D-100일을 앞두고 진행된 '일본 간사이 지방 OB 축구회'와의 친선경기에 출전했으며,[110] 2009년 '양지 축구단 OB팀'의 일원으로 국가정보원 직원들로 구성된 '구룡회'와의 친선경기에 참가하였다.[111] 그리고 2011년 창설된 65세 이상의 축구 국가대표팀 출신 선수들로 구성된 '국가대표 OB 축우회'의 총무를 맡았다.[112]

이외에 다수의 '한국 OB 지회 축구대회'에 참가했으며,[113][114][115][116][117] 다수의 '경평 OB 대항축구전'에 '서울 OB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고,[118][119][120][121] 다수의 '한국 대학 OB 축구대회'에 '연세대 OB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122][123]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이후 1980년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으로 선임된 뒤 부위원장에 올랐으며,[124][125] 1981년 개인 업무를 사유로 사표를 제출하였다.[126][127] 그리고 한동안 회양화학에서 상무로 근무하며 축구계와 거리를 두었으며, 1984년 연세대학교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128] 그 뒤 같은 해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며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고,[129] 그 해 고려대학교 진학이 유력했던 김봉길을 스카우트하는 성과를 올렸다.[130] 또한 1985년 김현석 등 유망 선수들을 데려오는데 성공했으며,[131] 그 해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1986년 열린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의 예선을 지휘하였다.[132][133]

이후 1989년 한국대학축구연맹의 기술이사가 되었으나, 본인의 업무 소관을 침해당했다는 사유로 3개월만에 사임하였다.[134] 그리고 같은 해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팀의 우승을 견인해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고,[135] 1990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사임한 이회택의 후임 중 한 명으로 검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이차만이 낙점되었다.[136] 하지만 1992년 아주대학교와의 전국대학축구연맹전 춘계 대회 경기에서 잔디상태가 좋았던 효창운동장에서의 경기를 택하기 위해 서로 져주기 의혹을 받아 한국대학축구연맹으로부터 1년 감독 정지의 중징계를 선고받았으며,[137][138] 연세대학교에서 부진한 성적이 이어지자 퇴진을 요구하는 항의가 잇따라 결국 1993년 감독직을 사퇴하였다.[139]

그 뒤 1994년 대한축구협회 상벌위원장으로 활동했고,[140] 같은 해 창단 예정인 전남 드래곤즈의 초대 감독 후보로 물망이 올랐으며,[141] 당초 계약이 유력했던 허정무가 고사함에 따라 계약금 1억원, 연봉 6천만원의 조건으로 정병탁이 선임되었다.[142][143] 또한 1995년 개최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과 CA 보카 주니어스의 평가전 당시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으나,[144] 대한축구협회는 정병탁이 해당 1경기만을 지휘하도록 했기 때문에 국가대표팀이 원칙 없이 임시변통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145][146] 그리고 전남 드래곤즈에서는 부임 후 첫 경기인 전북 현대 다이노스와의 1995년 리그컵 개막전에서 0-3으로 패배한 뒤 해당 대회에서 1승 3무 3패로 최하위를 기록하며 고전하였으나,[147][148] 1995년 K리그에서는 전기리그 6위 (4승 2무 8패), 후기리그 5위 (4승 5무 5패)의 기대 이상의 성적을 기록하였다.[149] 하지만 부천 유공과의 1996년 리그컵 경기에서 팀의 핵심인 노상래김봉길이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폭력 및 폭언을 표출한 것에 대해 정병탁에게 선수 관리 및 지휘 통솔의 책임을 물어 연봉 30% 감봉의 구단 자체 중징계 및 한국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엄중 경고 조치를 받았으며,[150][151] 1996년 K리그 개막 이후 2연패 및 같은 해 치러진 5차례의 홈 경기 무승 등의 성적 부진으로 인해 그 해 5월 경질되었다.[152]

그리고 1995년 국민생활체육협의회에서 2002년 FIFA 월드컵의 대한민국 유치를 위한 범국민적 공감대 형성의 일환으로 개설한 '청소년 축구교실'에 참여해 전라남도 순천시 지역을 담당했으며,[153][154] 같은 해 열린 '전국 축구교실 초청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155] 또한 2002년부터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한수초등학교에서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했으며,[156] 2004년 창립된 '고양시 유소년 축구협회'에도 참여하였다.[157]

이후 2005년 대한축구협회로부터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158][159]

사망편집

2016년 2월 10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160]

기타편집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던 1960년대 당시 조윤옥, 조성달, 김호, 김호엽 등과 함께 말레이시아 현지에서 많은 팬들을 보유하였다.[161]

1972년 10월 21일 자신의 팬이었던 배우자와 결혼식을 올렸으며,[162] 이후 한 차례 더 결혼식을 올렸으나 1987년 1월 23일 강원도 평창군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인해 부인이 사망하였다.[163] 그리고 아들인 정상남 또한 축구인이다.[164][165]

1974년에 정병탁이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주장을 맡고 있던 당시 대한축구협회의 회장이었던 장덕진에게 당시 국가대표팀 소속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감사패를 마련하였다.[166]

1995년 문화방송에서 2002년 FIFA 월드컵의 대한민국 유치를 위한 축구 붐을 조성하기 위해 방영한 '비바 꼬레아 2002 월드컵'의 2부에 출연하였다.[167]

1999년 대한축구협회 측에서 역대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축구용품을 수집한 뒤 축구회관 1층에 축구박물관을 마련할 당시, 자신이 선수 시절 사용했던 축구화를 기증했으며,[168] 이는 대한축구협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축구화가 되었다.[169]

2003년 베스트일레븐 창간 33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한국축구 100년을 빛낸 55인' 중 '60년대 베스트11'에 포함되었다.[170]

2004년에 1968년 당시 이라크에서 개최된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던 양지 축구단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대한민국 U-23 대표팀과의 평가전을 위해서 서울특별시에 체류하던 이라크 U-23 대표팀 '평화의 볼'로 명명된 국제축구연맹 공인구 및 2002년 FIFA 월드컵 기념구 등 100여개의 축구공을 전달하였다.[171][172]

2008년에 서울특별시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010년 FIFA 월드컵 예선 경기에 양지 축구단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참관하였다.[173]

선수 및 지도자 기록편집

클럽편집

국가대표팀편집

지도자편집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편집

수상 경력편집

클럽편집

국가대표팀편집

감독편집

개인편집

각주편집

  1. “너무나 期待(기대)밖의 경기”. 경향신문. 1969년 10월 13일. 
  2. “한국 靑龍(청룡)·브라질 후라밍고 축구對戰(대전)”. 경향신문. 1970년 3월 28일. 
  3. “프로축구 감독들"강한인상" 심기”. 중앙일보. 1995년 3월 22일. 
  4. “湖南(호남)팀 가세 지각변동 예고”. 동아일보. 1995년 3월 23일. 
  5. “40-50대감독"누가 세냐"벤치대결 95프로축구 정규리그 내달6일 돌입”. 경향신문. 1995년 4월 30일. 
  6. “강철' “팀이 원하는 플레이를 하라””. 대한축구협회. 2008년 10월 17일. 
  7. “韓(한)·日大學蹴球(일대학축구)”. 동아일보. 1965년 4월 12일. 
  8. “延世大連勝(연세대연승) 高大(고대)·建大(건대)비겨”. 동아일보. 1965년 5월 27일. 
  9. “海士不運(해사불운)의『핸들링』”. 동아일보. 1965년 5월 28일. 
  10. “縱横無盡(종횡무진)의 慶大(경대) 趙潤玉(조윤옥)”. 동아일보. 1965년 5월 31일. 
  11. “高延戰(고연전) 無勝負(무승부) 럭비高大(고대)·蹴球(축구)는延大(연대)승리”. 동아일보. 1966년 9월 26일. 
  12. “延大(연대)·漢大(한대) 공동優勝(우승)”. 경향신문. 1966년 11월 3일. 
  13. “陽地(양지)축구팀 發足(발족)”. 경향신문. 1967년 3월 29일. 
  14. “陽地(양지)와海兵隊(해병대)팀에 二重(이중)등록선수5명”. 경향신문. 1967년 4월 5일. 
  15. “選手(선수) 없어 9名(명)만出戰(출전)”. 동아일보. 1967년 4월 12일. 
  16. “雙龍(쌍용),陽地(양지)팀을 격파 짜인팀웍·守備(수비)로 個人技(개인기)꺾어”. 경향신문. 1967년 6월 19일. 
  17. “陽地(양지)첫優勝(우승) 速攻(속공)으로 重石(중석)제압”. 경향신문. 1967년 6월 30일. 
  18. “決勝(결승)리그四(사)파戰(전)”. 동아일보. 1968년 4월 8일. 
  19. “陽地(양지)팀 멤버決定(결정)”. 동아일보. 1968년 12월 30일. 
  20. “金基福選手(김기복선수)혼자서 三點(삼점)넣어갈채받아”. 동아일보. 1969년 1월 21일. 
  21. “韓國(한국)팀,越南(월남)을制壓(제압) 아시아컵蹴球(축구) 四對一(사대일)로 四連勝(사연승)”. 동아일보. 1969년 1월 25일. 
  22. “日本(일본)도擊破(격파) 2:0”. 동아일보. 1969년 1월 29일. 
  23. “선수단 23명 선발”. 경향신문. 1969년 12월 11일. 
  24. “싱가포르팀에 大勝(대승)”. 경향신문. 1970년 1월 13일. 
  25. “金融團(금융단)팀 2연승 말聯(연)셀랑고팀 1對(대)0으로 눌러”. 경향신문. 1970년 1월 15일. 
  26. “泰(태) 은행연합팀에 5대2”. 경향신문. 1970년 1월 26일. 
  27. “6勝(승) 3무승부 금융단원정축구팀 내일 귀국”. 경향신문. 1970년 2월 1일. 
  28. “전국축구 信託銀(신탁은),中大(중대)물리쳐”. 경향신문. 1970년 9월 17일. 
  29. “축구선수권 陸軍(육군)·信託銀(신탁은)등 凖決(준결)에”. 경향신문. 1970년 9월 24일. 
  30. “축구선수권대회 陸軍(육군)·住宅銀(주택은) 결승에 승부못내 페널티·킥으로 進出(진출)”. 경향신문. 1970년 9월 25일. 
  31. “實業(실업)축구秋季(추계)리그開幕(개막) 신탁銀(은),막강陸軍(육군) 꺾어 一(일)대○”. 동아일보. 1970년 10월 19일. 
  32. “실업蹴球(축구)리그 信託(신탁)·外換銀(외환은) 白組(백조) 선두”. 동아일보. 1970년 10월 24일. 
  33. “實業(실업)축구 信託(신탁),國民銀(국민은)에 辛勝(신승)”. 경향신문. 1970년 10월 30일. 
  34. “實業(실업)축구 海兵(해병)은 自保(자보)꺾고 1승기록”. 경향신문. 1970년 11월 7일. 
  35. “實業(실업)축구 朝興銀(조흥은)에 패권”. 경향신문. 1970년 11월 17일. 
  36. “대표선수 매너나빠”. 중앙일보. 1970년 6월 9일. 
  37. “實業(실업)축구 外換(외환)·信託銀(신탁은)선두에”. 동아일보. 1971년 6월 28일. 
  38. “스포츠 실업축구 信託(신탁)·外換銀戰(외환은전) 희한한競技(경기)…골안넣기 作戦(작전)”. 경향신문. 1971년 6월 30일. 
  39. “實業(실업)축구閉幕(폐막) 信託銀創設(신탁은창설)이래첫優勝(우승)”. 경향신문. 1971년 7월 5일. 
  40. “실업축구 韓一(한일)·海兵(해병)비겨”. 경향신문. 1971년 11월 4일. 
  41. “實業蹴球(실업축구)중반 信託銀(신탁은) B組(조)단독先頭(선두)”. 동아일보. 1971년 11월 10일. 
  42. “綜合蹴球(종합축구) 丁炳卓(정병탁) 기민한 왼발슛”. 동아일보. 1971년 11월 30일. 
  43. “信託銀(신탁은)·高大(고대) 覇權(패권)걸고 격돌”. 동아일보. 1971년 12월 4일. 
  44. “종합蹴球(축구)선수권폐막 「노련」꺾은 발랄한鬪志(투지)”. 동아일보. 1971-12-612. 
  45. “蹴球(축구)코치·선수9명懲戒(징계)”. 경향신문. 1971년 12월 14일. 
  46. “信託銀(신탁은)·常備軍(상비군) 무승부 0對(대)0”. 동아일보. 1972년 4월 3일. 
  47. “信託(신탁),星港(성항)제압 東南亞(동남아)원정 축구”. 경향신문. 1972년 5월 2일. 
  48. “同好人(동호인) 스포츠클럽 (1) 早起(조기)축구회”. 경향신문. 1979년 7월 23일. 
  49. “延(연)·高(고)OB올스타戰(전) 앞으로 3일 永遠(영원)한맞수 축구半世紀(반세기) 결산”. 경향신문. 1979년 6월 14일. 
  50. “상금 1억…42팀 출전 최강자도전 왕년스타 총출동 추억의 대결도”. 중앙일보. 1988년 11월 14일. 
  51. “延高(연고)축구 OB정기전 4일 팡파르 스타 총출동 "友情(우정)" 한마당”. 경향신문. 1989년 11월 1일. 
  52. “고려대,연세에 역전승 연고축구 올스타전”. 한겨레. 1989년 11월 5일. 
  53. “蹴球代表選手選拔戰(축구대표선수선발전)에 高校(고교)팀出戰許容(출전허용)”. 동아일보. 1962년 7월 5일. 
  54. “『메르데카』蹴球代表團(축구대표단) 1日出發(일출발) 合訓選手(합훈선수)로 構成(구성)”. 동아일보. 1963년 7월 30일. 
  55. “蹴球代表選手(축구대표선수)18名(명) 選定(선정)”. 동아일보. 1964년 2월 26일. 
  56. “올림픽蹴球(축구) 2次豫選(차예선) 韓國(한국)팀不戰勝(부전승)”. 동아일보. 1964년 3월 13일. 
  57. “候補(후보)18名選定(명선정)”. 동아일보. 1964년 4월 30일. 
  58. “亞洲蹴球團歸國(아주축구단귀국)”. 경향신문. 1964년 6월 24일. 
  59. “메르데카蹴球(축구)2日(일) 延大(연대)·憲監(헌감)·漢陽(한양) 勝(승)”. 경향신문. 1964년 7월 17일. 
  60. “五輪蹴球(오륜축구)선수決定(결정)”. 경향신문. 1964년 7월 31일. 
  61. “世界蹴球(세계축구) 代表(대표)22名(명) 確定(확정)”. 동아일보. 1965년 3월 29일. 
  62. “世界蹴球豫選(세계축구예선)에 韓國(한국)「팀」不參(불참)”. 경향신문. 1965년 8월 7일. 
  63. “거의旣成(기성)·17名(명)선정”. 동아일보. 1965년 7월 7일. 
  64. “亞洲(아주)경기蹴球(축구)파견 1次(차)후보41名(명)선발”. 경향신문. 1966년 4월 8일. 
  65. “大學選手(대학선수) 4名(명)추가”. 동아일보. 1966년 7월 15일. 
  66. “메杯蹴球(배축구) 代表(대표)17名(명)을選拔(선발)”. 동아일보. 1966년 7월 18일. 
  67. “日本粉碎(일본분쇄) 메르데카蹴球(축구) 豫選(예선)2日(일)째”. 동아일보. 1966년 8월 15일. 
  68. “메杯蹴球(배축구) 韓國(한국),泰(태)도 擊破(격파)”. 동아일보. 1966년 8월 22일. 
  69. “韓國(한국) 蹴球代表(축구대표) 常備軍(상비군) 28명確定(확정)”. 경향신문. 1967년 5월 27일. 
  70. “蹴球中興(축구중흥)건 大戰(대전)”. 경향신문. 1967년 6월 2일. 
  71. “亞洲(아주)·메杯(배) 촉구 出戰(출전) 代表團(대표단)결단”. 동아일보. 1967년 7월 25일. 
  72. “韓國(한국) 日(일)팀에敗北(패배) 2:1”. 동아일보. 1967년 8월 2일. 
  73. “韓國比(한국비)를大破(대파) 亞洲蹴球東部豫選(아주축구동부예선)”. 매일경제. 1967년 8월 7일. 
  74. “韓國(한국),말聯(연)팀擊破(격파) 3對(대)1로메르데카蹴球(축구),26日(일)버머와決戰(결전)”. 경향신문. 1967년 8월 24일. 
  75. “韓国(한국)·버머共同(공동)우승 延長戰(연장전)서도 無得點(무득점)비겨”. 경향신문. 1967년 8월 28일. 
  76. “五輪(오륜)축구亞洲豫選(아주예선) 代表(대표)20명선발”. 경향신문. 1967년 9월 2일. 
  77. “韓國(한국),레바논도擊破(격파)”. 동아일보. 1967년 10월 2일. 
  78. “韓國(한국),越南(월남)도擊破(격파) 3:0”. 동아일보. 1967년 10월 5일. 
  79. “選手團(선수단) 24名出發(명출발)”. 경향신문. 1967년 11월 1일. 
  80. “韓國(한국)팀,泰國(태국)도제압 越南(월남) 건국기념 蹴球(축구)”. 경향신문. 1967년 11월 8일. 
  81. “韓國(한국),決勝戰(결승전)진출”. 동아일보. 1967년 11월 13일. 
  82. “韓國(한국)팀 本選(본선)진출”. 경향신문. 1968년 4월 23일. 
  83. “代表(대표)선수 17명確定(확정)”. 동아일보. 1968년 7월 17일. 
  84. “韓國(한국),월남팀 擊破(격파)4대2”. 동아일보. 1969년 5월 15일. 
  85. “우리팀 22명確定(확정)”. 동아일보. 1969년 9월 25일. 
  86. “代表(대표)팀,常備軍(상비군) 大破(대파) 遠征(원정)귀국환영蹴球(축구) 四(사)대○으로”. 동아일보. 1969년 10월 3일. 
  87. “韓國(한국),日本(일본)과비겨”. 동아일보. 1969년 10월 13일. 
  88. “韓國(한국),日本(일본)을격파 2:0”. 경향신문. 1969년 10월 20일. 
  89. “농구·축구 선수단 壮途(장도)에”. 경향신문. 1969년 11월 12일. 
  90. “킹스컵蹴球(축구)첫날 韓國(한국),라오스를零封(영봉)”. 동아일보. 1969년 11월 20일. 
  91. “越南大破(월남대파) 결승進出(진출) 축구 3대0”. 동아일보. 1969년 11월 27일. 
  92. “亞州頂上(아주정상)휘잡은肉彈(육탄)슛”. 동아일보. 1969년 11월 29일. 
  93. “最優秀(최우수)에金浩(김호) 蹴球(축구)베스트11選定(선정)”. 동아일보. 1969년 12월 27일. 
  94. “蹴協(축협) 두常備(상비)팀構成(구성)”. 동아일보. 1970년 2월 14일. 
  95. “招請蹴球告別戰(초청축구고별전) 李(이)회택 혼자二(이)점 청룡,플라밍고꺾어 二對一(이대일)”. 동아일보. 1970년 4월 2일. 
  96. “本社(본사)주최 韓(한)·브 蹴球(축구) 오라리아,청룡과 熱戰(열전)끝에 1대1”. 동아일보. 1970년 5월 12일. 
  97. “청룡,볼트 클루벤 눌러 韓(한)·덴蹴球(축구) 雨中競技(우중경기)강행 二(이)대一(일)”. 동아일보. 1970년 7월 6일. 
  98. “메르데카축구 선수단 결단”. 경향신문. 1970년 7월 25일. 
  99. “메盃(배) 축구 한국,印度(인도)에 극적 逆転勝(역전승) 한국3(0—23—0)2인도”. 경향신문. 1970년 8월 14일. 
  100. “메르데카 大會(대회) 韓國蹴球(한국축구),아시아制覇(제패)”. 동아일보. 1970년 8월 17일. 
  101. “맨투맨奏效(주효) 1對(대)1 벤피카·청룡 비겨”. 동아일보. 1970년 9월 7일. 
  102. “정병탁 선수 갑작스런 은퇴선언”. 중앙일보. 1970년 9월 10일. 
  103. “축구실력 평가 전, 청룡-백호 등 4팀”. 중앙일보. 1970년 9월 11일. 
  104. “팬들에 실망 안긴 청룡축구팀의 패배”. 중앙일보. 1970년 9월 14일. 
  105. “저 양반들 노인들 맞아?”. 경향신문. 2004년 9월 20일. 
  106. “축구와 ‘황혼결혼’한 사람들”. 서울신문. 2005년 6월 21일. 
  107. “평균 68.5세… 실버축구단 떴다”. 조선일보. 2010년 9월 10일. 
  108. “‘축구는 정직한 스포츠’ 몸으로 보여준 원로들”. 동아일보. 2011년 6월 9일. 
  109. “왕년의 축구스타들 그라운드 누빈다”. 헤럴드경제. 2011년 6월 22일. 
  110. “D-100 기념 20일 한일 축구원로 친선경기”. 스포츠조선. 2002년 2월 7일. 
  111. “양지팀 올드스타들, 국정원팀과 친선경기”. 연합뉴스. 2009년 9월 9일. 
  112. “국가대표 OB 축우회 창립…초대 회장 김정석씨”. 베스트일레븐. 2011년 12월 6일. 
  113. '김용식배 축구' 19일 개막”. 동아일보. 2001년 5월 18일. 
  114. “O.B지회 축구대회 12일 부산서 개막”. 연합뉴스. 2004년 6월 10일. 
  115. “어제의 용사들 '다시 뭉친다'. 스포츠조선. 2005년 6월 10일. 
  116. “제6회 김용식배한국O-B지회축구대회 개최”. 뉴시스. 2006년 6월 1일. 
  117. “故김용식배 OB축구대회 9일 경주서 개최”. 연합뉴스. 2007년 6월 7일. 
  118. “이회택씨 등 50·60代 출전”. 조선일보. 2000년 10월 21일. 
  119. “서울-평양 OB친선축구대회 제8회 KIKA배 24일 개최”. 일간스포츠. 2004년 10월 21일. 
  120. “경평 OB축구 22일 개최…박종환 감독 등 출전”. 마이데일리. 2006년 10월 19일. 
  121. “서울.평양 OB축구대회 3일 파주서 개최”. 연합뉴스. 2008년 10월 2일. 
  122. “왕년의 축구스타 총출동 OB축구대회”. 일간스포츠. 2004년 9월 30일. 
  123. “왕년의 축구스타들, 모교 명예 걸고 그라운드 총출동”. 노컷뉴스. 2010년 10월 22일. 
  124. “축구협회 분과위원회 구성”. 동아일보. 1980년 2월 1일. 
  125. “축협 기술지도위등 3개분과위를 구성”. 중앙일보. 1980년 10월 17일. 
  126. “單一行政(단일행정)체제로”. 동아일보. 1981년 12월 21일. 
  127. “「淨化(정화)」때 들어온 任員(임원) 모두 退陣(퇴진) 대수술 蹴球協(축구협)”. 경향신문. 1981년 12월 23일. 
  128. “60년대 스타 丁炳卓(정병탁)씨 延世大(연세대) 축구감독 부임”. 동아일보. 1984년 4월 24일. 
  129. “축구선수권 延世大(연세대) 36年(연)만에 頂上(정상)탈환”. 경향신문. 1984년 11월 1일. 
  130. “고교축구 새별들 어디로가나 高大(고대)와 스카웃 정면對決(대결)서 막판 大逆轉劇(대역전극)”. 경향신문. 1984년 11월 22일. 
  131. “金盃(김배)축구 끝나자마자 스카웃熱風(열풍) "金尙鎭(김상진)을 갑아라"3개大(대) 非常(비상)”. 경향신문. 1985년 6월 29일. 
  132. “축구 청소년대표 정병탁감독 선임”. 중앙일보. 1985년 11월 15일. 
  133. “청소년 축구대표 18명 확정”. 경향신문. 1986년 1월 28일. 
  134. “민속씨름협 "딴살림 나겠다". 중앙일보. 1989년 5월 9일. 
  135. “延大(연대)축구 이의없는 頂上(정상)”. 동아일보. 1989년 3월 30일. 
  136. “축구대표팀 改編(개편)불가피”. 동아일보. 1990년 6월 24일. 
  137. “延世(연세)-亞洲(아주)「져주기 추태」”. 동아일보. 1992년 5월 21일. 
  138. “대학축구「져주기 추태」 延世(연세) 亞洲(아주)감독 1년징계”. 경향신문. 1992년 5월 29일. 
  139. “李(이)진행 결승골 延世(연세)우승”. 경향신문. 1993년 4월 1일. 
  140. “丁炳卓 前연세대감독,제8구단 창단감독 내정”. 연합뉴스. 1994년 10월 24일. 
  141. “프로축구「제8구단」감독선임"진통". 동아일보. 1994년 9월 14일. 
  142. “프로축구 전남 드래곤즈 초대감독”. 한겨레. 1994년 10월 6일. 
  143. “丁炳卓 전남드래곤즈감독”. 연합뉴스. 1994년 12월 16일. 
  144. “아르헨티나팀 초청경기 감독에 丁炳卓씨”. 연합뉴스. 1995년 9월 15일. 
  145. “축구대표팀 감독, 너도나도 나눠먹기식”. 연합뉴스. 1995년 9월 15일. 
  146. “한국축구, 대표 1진 상시운영 시급하다”. 연합뉴스. 1995년 11월 1일. 
  147. “김도훈 전북 화려한 프로데뷔”. 경향신문. 1995년 3월 26일. 
  148. “丁(정)감독 용병술에 기대 전남”. 동아일보. 1995년 5월 5일. 
  149. “삼성축구 창단원년 돌풍 예고”. 한겨레. 1995년 12월 18일. 
  150. “전남, 자체 중징계 결정”. 연합뉴스. 1996년 4월 12일. 
  151. “연맹,노상래.김봉길에 중징계”. 연합뉴스. 1996년 4월 15일. 
  152. “프로축구 전남감독에 許(허)정무씨”. 동아일보. 1996년 5월 28일. 
  153. “생활체육협 청소년 축구교실”. 경향신문. 1995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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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 “유명선수 축구교실 전국대회 3일 개최”. 연합뉴스. 1997년 4월 29일. 
  156. “정병탁 전 축구국가대표 감독, 일산에 축구교실”. 한겨레. 2002년 8월 26일. 
  157. “고양시 유소년 축구협회 창립”. 연합뉴스. 2004년 7월 1일. 
  158. “축구협회, 5월말까지 법인화 완료”. 연합뉴스. 2005년 3월 21일. 
  159. “축구협회, 자문위원 첫 모임 가져”. 조이뉴스24. 2005년 3월 21일. 
  160. “전 국가대표 정병탁 원로 별세”. 대한축구협회. 2016년 2월 11일. 
  161. “말레이지아서 7년이나 한국축구팀 案內(안내)맡아 시중든 크리슈난씨”. 경향신문. 1970년 1월 29일. 
  162. “丁炳卓(정병탁)군 21일화촉”. 경향신문. 1972년 10월 20일. 
  163. “丁炳卓(정병탁) 延大(연대)축구감독 輪禍(윤화)중상 부인은숨져”. 경향신문. 1987년 1월 24일. 
  164. “26일 幕(막)오르는 金盃(김배)축구 (上(상)) 미래 韓國(한국)축구 기대주 총집합 "올 최고스타는 누구". 경향신문. 1993년 5월 24일. 
  165. “고교축구스타 大魚(대어)로 무럭무럭 金(김)범준 "대들보". 경향신문. 1993년 8월 11일. 
  166. “스포오츠短信(단신)”. 동아일보. 1974년 12월 28일. 
  167. “MBC-TV,「비바 꼬레아 2002 월드컵」방송”. 연합뉴스. 1995년 8월 23일. 
  168. “축구박물관, 19일부터 일반에 공개”. 연합뉴스. 1999년 5월 18일. 
  169. “80년 된 최고령 축구화 돌아오다”. 중앙일보. 2005년 1월 6일. 
  170. “축구팬 "설기현 가장 먼저 빅리그간다". 연합뉴스. 2003년 2월 28일. 
  171. “옛 '태극전사', 이라크팀에 '평화의 볼' 전달”. 연합뉴스. 2004년 3월 29일. 
  172. “이라크축구팀 유니폼에 양국 국기 마크 부착”. 연합뉴스. 2004년 4월 2일. 
  173. “`양지팀' 대선배들의 따끔한 충고”. 연합뉴스. 2008년 6월 22일. 
전임
  허정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95년 9월 16일 - 1995년 9월 30일
후임
  고재욱
전임
초대
제1대 전남 드래곤즈 감독
1994 - 1996
후임
허정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