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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덕제(崇德帝, 1592년 11월 28일 ~ 1643년 9월 21일)는 후금의 제2대 한이자, 청 제국의 창업 군주이다. 아이신 교로 홍 타이지(만주어: ᠠᡳᠰᡳ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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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sin Gioro Hong Taiji). 묘호태종(太宗, 만주어: ᡨᠠᡳ‍ᡯᡠᠩ Taidzung)이다. 후금 연호는 천총(天聰, 만주어: ᠠᠪᡴᠠ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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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kai Sure, 몽골어: ᠲᠩᠷᠢ ᠶᠢ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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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gri-yin Seče)이고, 청 제국 연호는 숭덕(崇德, 만주어: ᠸᡝᠰᠢᡥ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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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ihun Erdemungge, 몽골어: ᠳᠡᠭᠡᠳᠦ
ᠡᠷᠳᠡᠮᠳᠡᠢ
Degedü Erdemtü)이다. 시호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줄여서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 만주어: ᡨᠠᡳᡯᡠᠩ
ᡤᡝᠩᡤᡳᠶᡝᠨ
ᡧ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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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idzung Genggiyen Šu Hūwangdi), 별호로는 태종한조종(太宗汗祖宗, 만주어: ᡨᠠᡳᡯᡠ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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ᠮᠠᡶᠠ
Taidzung Han Mafa)이 있다.[1][2] 생전 존호매우 관대하고 조화로우며 신성한 군주(弘德彰武皇帝, 만주어: ᡤᠣᠰᡳ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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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몽골어: ᠠᠭᠤᠳ‍ᠠ
ᠥᠷᠦᠰᠢᠶᠡᠩᠴ‍ᠢ
ᠨ‍ᠠᠶ᠋‍ᠢᠷ‍ᠠᠮᠳ‍ᠠᠭ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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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γuda Örüsiyegči Nayiramdaγu Boγda Qa'an)이다.

Picto infobox prétendant à un trône.png
숭덕제
崇德帝
清 佚名 《清太宗崇德皇帝朝服像》.jpg
지위
Crown-of-Manchu-Han.png
대청국 황제
재위 1636년 5월 15일-1643년 9월 21일
전임자 본인 (후금국 천총한)
후임자 순치제
Crown-of-Manchu-Han.png
몽골 카간
재위 1635년-1643년 9월 21일
전임자 에제이 칸
후임자 아이비어 자사크 칸
재위 1626년 10월 20일-1636년 5월 15일
전임자 천명한
후임자 본인 (숭덕제)
이름
아이신 교로 홍 타이지(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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ᡨᠠᡳᠵᡳ
)
연호 천총(天聰, 만주어: ᠠᠪᡴᠠᡳ
ᠰᡠᡵᡝ
Abka-i Sure)
숭덕(崇德, 만주어: ᠸᡝᠰᡳᡥ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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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ihun Erdemungge, 몽골어: ᠪᠣᠭᠳᠠ
ᠰᠡᠴᠡᠨ
데게렌 에르뎀트)
묘호 태종(太宗, 만주어: ᡨᠠᡳᡯᡠᠩ Taidzung)
시호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
(應天興國 弘德彰武 寬溫仁聖 睿孝敬敏 昭定隆道 顯功 文皇帝)
신상정보
출생일 1592년 11월 28일(1592-11-28)
사망일 1643년 09월 21일(1643-09-21) (50세)
왕조 청 제국
가문 아이신 교로 하라
부친 누르가치
모친 몽고저저
배우자
자녀 본문 참조

이름편집

한국 학계의 일반적인 관행은 홍타이지지만 원래는 홍 타이지라고 표기해야 한다.[3]

홍 타이지의 이름은 한문 사료에서 여러 표기로 등장하는데 황태극(皇太極)[4], 홍대시(紅歹是)[5], 홍대시(洪大時)[6], 홍태극(洪太極)[7], 홍태주(洪太主)[8], 홍태시(洪佗始)[9], 홍태시(洪台時)[10], 홍타실(洪他失)[11] 등이 있다.

사실 그의 진짜 정확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12] 현대학자들은 홍 타이지가 본명이 아니라 칭호라고 많이 여기는데, 몽골 귀족의 칭호인 콩타이지(渾台吉, 몽골어: ᠬᠤᠩ
ᠲᠠᠶᠢᠵᠢ
Qong Tayiji)에서 유래하였다고 보기도 한다.[13][14] 러시아의 한 학자인 G.V. 고르스키는 홍 타이지의 본명을 아바하이(Abakhai)라 주장하여 한때 서구 학계에서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 한문만주 문자로 서술된 문헌에 등장하지 않아 오류로 여겨진다.[15] 명대 진인석(陳仁錫)의 《산해기문(山海紀聞)》에는 홍 타이지를 갈간(중국어 정체자: 喝竿, 병음: Hēgān)이라 하였고[16], 조선의 《인조실록》에는 명 장수 서고신(徐孤臣)의 말을 인용하면서 홍 타이지를 흑환발렬(黑還勃烈)이라고 기록했다. 일본의 한 학자 미타무라 타이스케(三田村泰助)는 흑환(黑還)을 홍 타이지의 본명, 발렬(勃烈)을 만주어 버이러를 음차한 것으로 해석하여 홍 타이지의 실제 이름을 허칸(Hekan)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17]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1592년 11월 28일, 홍 타이지는 누르가치의 측복진이었던 예허나라 몽고저저의 소생으로, 누르가치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누르가치의 차남 다이샨, 누르가치의 아우인 슈르하치의 차남 아민(阿敏, (만주어: ᠠᠮᡳᠨ Amin), 누르가치의 5남 망굴타이(莽古爾泰, (만주어: ᠮᠠᠩᡤᡡᠯᡨᠠᡳ Manggūltai) 등과 함께 사대왕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치세편집

후금의 한편집

 
《만주실록(滿洲實錄, 만주어: ᠮᠠᠨᠵᡠ 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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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ju-i Yargiyan Kooli)》에 수록된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한 조선군의 항복을 받고 있는 네 버이러를 묘사한 《강공립솔병귀향도(姜功立率兵歸降圖, 만주어: ᠰᠣᠯᡥᠣ 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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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ho-i du yuwanšuwai giyang gung liyei cooha gaifi dahaha)》

1622년 4월 13일, 누르가치는 자신의 일곱 아들과 친동생 슈르가치의 아들 아민을 부른 자리에서 자신의 후계자믄 힘센 자나 강한 자는 안 되고, 팔기의 기주 여덟 명을 여덟 왕으로 삼게 하고, 여덟 왕이 논의하여 말을 잘 듣는 사람을 한으로 추대하고, 만약 한이 여덟 왕의 의견을 묵살하고 폭정을 일삼는다면 한을 교체하고, 만약 한이 교체 의견을 거부한다면 폐위할 것을 당부했다.[18]

1626년 9월 30일에, 누르가치가 병사하자, 요토가 그 동생 사하랸과 함께 다이샨에게 홍 타이지를 받들어 한의 지위를 이어받게 할 것을 청하자, 다이샨이 여러 버이러에게 홍 타이지를 강력하게 지지할 것을 선언했다.[19]

누르가치에 이어 새로운 한으로 즉위한 홍 타이지는 암바 버이러 다이샨, 아민 버이러, 망굴타이 버이러 세 버이러를 형으로 대우하며 한의 양측에 앉게 했고, 어느 곳이든지 항상 한과 나란히 앉게하고 아래에 앉도록 하지 않았다.[20]

홍 타이지는 후금의 식량과 물자의 부족을 타개 하기 위하여 조선 연해의 가도(樓島)에 근거지를 두고 배후를 위협 하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공하였으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21] 이때 홍 타이지는 조선과의 관계를 공식화하고 대명전쟁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희생(犧牲)과 맹서(盟誓) 그리고 저주(詛呪)라는 형식을 수반하는 맹약을 강요하여 체결하였고, 이 맹약을 통해 후금은 병자호란 이전까지 조선의 대외관계를 상당히 제한했다.[22] 홍 타이지는 정묘호란을 통해 하늘이 우리를 사랑하여 조선을 항복시켰다고 선언했다.[23]

1629년 홍 타이지는 문서처리 기구인 서방(書房, 만주어: ᠪᡳᡨᡥᡝᡳ
ᠪᠣᠣ
Bithei Boo)을 설립했고 이 기구에 많은 한족 관료를 기용했다. 1631년에는 전형적인 중국식 정치제도인 육부(六部, 만주어: ᠨᡳᠩᡤ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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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nggun Jurgan)을 설치함으로써 국가 기구를 완비했다. 홍 타이지에게 직속된 기구인 육부는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함으로써, 기존의 팔기의 버이러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던 국가 통치의 영역을 잠식해 나갔다. 육부의 업무를 총관한 것은 6명의 버이러였지만, 그들 가운데 아바타이(만주어: ᠠᠪᠠᡨᠠᡳ Abatai)만이 홍 타이지의 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 타이지의 아들과 조카였다.[24]

그해 12월부터 홍 타이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처음으로 명나라를 침략했다. 청군은 요서를 지나치고 몽골 지역으로 우회하여 홍산구(洪山口)로 진격했다.[25] 3개월 뒤 홍 타이지는 묵던에 있던 아민과 쇼토를 불러 영평(永平)과 천안(遷安) 등의 네 개의 성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명군의 반격에 아민을 비롯한 야전 지휘관들은 거주민들을 관대하게 다루라는 홍 타이지의 명령이 무색하게도, 천안과 영평의 주민들을 살육하고 회군해버렸다. 이 사건은 청의 대민관계에 악영향을 미쳤고, 명 변방의 백성들을 회유하려던 홍 타이지의 노력에 큰 흠집을 냈다. 이에 홍 타이지는 죄를 범한 이들을 공개적인 재판을 통해 처벌했다.[26][27]

1630년 의정왕대신회의는 아민이 명령을 거역하고, 단 한 번의 교전도 없이 적과 대치하지 않고, 많은 병력을 잃은 죄를 비롯한 16개 죄목으로 그를 사형시킬 것을 규탄했고, 홍 타이지는 이를 감형하여 그를 유폐시켰다. 이로써 홍 타이지는 양람기를 보유한 아민을 숙청하는데 성공했고,[28] 이듬해 9월 19일 대릉하성 전투의 선봉에 선 탓에 병력 손실을 본 망월타이가 정람기로의 인원 보충 요구를 거부당하자 홍 차이지에게 칼을 뽑아들자,[29] 의정왕대신회의가 소집되었으며 홍 타이지는 망굴타이를 일반 버이러로 강등하고, 정람기의 권력을 삭감하는 조치를 취하였다.[30]

1632년 1월 무렵 홍 타이지는 예부의 참정 이백용(李伯龍)의 건의를 받아들여[31] 의정왕대신회의를 소집하고 다이샨과 홍 타이지가 나란히 않는 문제를 논의하도록 했고, 다이샨으로 부터 이 자리에서 자신이 홍 타이지의 신하이며, 망굴타이와 함께 지존인 그를 보좌할 것이라는 발언을 받아냄으로써 자신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냈다.[31]

홍 타이지는 1631년 9월 초를 전후로, 외번 몽골군과 만주군을 현재의 요령성의 해안을 따라 견고하게 방어된 대릉하의 명군의 요새와 무역 도시 인근에 집결시켰다. 대릉하성의 병력이 보병 7천, 마병 7천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홍 타이지는 2만 이상의 병력으로 성을 포위했고,[32] 포르투칼에서 갓 들여온 대포로 대릉하성을 공격했고,[28] 11월 21일 대릉하성은 식량이 고갈되어 많은 아사자를 내고 항복했다.[33] 대릉하성 전투의 경제적 효과가 미미했지만,[34] 점차 새롭게 흥기하던 신흥국으로서는 중요한 승리였다.[28]

만주, 내칼카, 코르친 연합군이 릭단을 목표로 한 원정에 나섰다는 소식이 접하고[35] 후후노르 지역으로 서천하여 종교적 권위를 이용하여 통합체제를 유지하려 한 릭단 칸은 1634년 감숙 지역에서 천연두로 사망했다.[36] 이에 홍 타이지는 1635년 9월 13일 도르곤, 요토, 사하랸, 호오거 등으로 하여금 차하르를 정벌하여 릭단 칸의 아들 어르커 어저이 콩고르와 수타이 태후의 항복을 받아내고, 수타이 태후의 처소에 있던[37] 쿠빌라이 카안 이래 몽골 제국 카안의 권위를 상징하는 '제고지보(制誥之寶)'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 '대원전국(大元傳國)이라는 이름의 금으로 만든 도장[38]을 획득했다.[37]

1635년 12월 30일, 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이름을 폐기하고 '만주'를 여진 종족들의 공식적이고 유일한 이름으로 선포했다.

원문
만주어: ᡨᡝᡵᡝ ᡳᠨᡝᠩᡤᡳ᠈ ᡥᠠᠨ ᡥᡝᠨᡩᡠᠮᡝ᠈ ᠮᡠᠰᡝᡳ ᡤᡠᡵᡠᠨ ᡳ ᡤᡝᠪᡠ ᡩᠠᠴᡳ ᠮᠠᠨᠵᡠ᠈ ᡥᠠᡩᠠ᠈ ᡠᠯᠠ᠈ ᠶᡝᡥᡝ᠈ ᡥᠣᡳᡶᠠ ᡴᠠᡳ᠈ ᡨᡝᡵᡝ ᠪᡝ ᡠᠯᡥᡳᡵᠠᡴᡡ ᠨᡳᠶᠠᠯᠮᠠ ᠵᡠᡧᡝᠨ ᠰᡝᠮᠪᡳ᠈ ᠵᡠᡧᡝᠨ ᠰᡝᡵᡝᠩᡤᡝ ᠰᡳᠪᡝᡳ ᠴᠣᠣ ᠮᡝᡵᡤᡝᠨ ᡳ ᡥᡡᠨᠴᡳᡥᡳᠨ ᡴᠠᡳ᠈ ᡨᡝᡵᡝ ᠮᡠᠰᡝ ᡩᡝ ᠠᡳ ᡩᠠᠯᠵᡳ᠈ ᡝᡵᡝᠴᡳ ᠵᡠᠯᡝᠰᡳ ᠶᠠᠶᠠ ᠨᡳᠶᠠᠯᠮᠠ ᠮᡠᠰᡝ ᡤᡠᡵᡠᠨ ᡳ ᡩᠠ ᠮᠠᠨᠵᡠ ᠰᡝᡵᡝ ᡤᡝᠪᡠ ᠪᡝ ᡥᡡᠯᠠ᠈ ᠵᡠᡧᡝᠨ ᠰᡝᠮᡝ ᡥᡡᠯᠠᡥᠠ ᡩᡝ ᠸᡝᡳᠯᡝ᠈

tere inenggi. han hendume. musei gurun-i gebu daci manju. hada. ula. yehe. hoifa kai. tere-be ulhirakū niyalma jušen sembi. jušen serengge sibei coo mergen-i hūncihin kai. tere muse-de ai dalji. ereci julesi yaya niyalma muse gurun-i da manju sere gebu-be hūla. jušen seme hūlaha-de weile.

— 만문원당(滿文原檔)

해석
이 날에 한이 말하길, "우리의 나라의 이름은 본래 만주, 하다, 우라, 예허, 호이파이니라. 그것에 무지한 사람들이 주션이라 한다. 주션이라는 것은 시버의 초오 머르건의 후예이니라. 그들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로부터 앞으로 모든 이들은 우리 나라의 본래 이름인 만주라고 부르라. 주션이라고 부르면 죄이다."

이는 홍 타이지가 주션이라는 족명을 폐기함으로써 특히 건주여진해서여진간 상쟁의 기억을 일소하고, '만주'만을 사용함으로써 여진 종족들을 새로운 명칭 아래 하나로 통합하고자 한 것이었다.[39]

청 제국의 군주편집

 
평복차림의 숭덕제

1636년 홍 타이지는 각각 이부 장관 도르곤, 코르친 투시예투 지농 바다리, 도원수 공유덕으로 대표되는 만주인, 몽골인, 한인으로 이루어진 버이러와 대신, 문무 명관들로 부터 조선을 정복하고 몽골을 하나로 합쳤으며 또 옥새를 얻은 것은 천명이라는 명분으로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스스로 세 언어로 된 칭호인 어질고 관대하고 온화하고 성스러운 군주(弘德彰武皇帝, 만주어: ᡤᠣᠰᡳᠨ
ᠣᠨ᠋ᠴᠣ
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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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몽골어: ᠠᠭᠤᠳ‍ᠠ
ᠥᠷᠦᠰᠢᠶᠡᠩᠴ‍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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ᠪᠣᠭᠳᠠ
ᠬᠠᠭᠠᠨ
Aγuda Örüsiyegči Nayiramdaγu Boγda Qaγan)를 칭하였으며,[40][41] 국호를 아이신 구룬(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ᡠᡵᡠᠨ
Aisin Gurun)에서 다이칭 구룬(만주어: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Daicing Gurun)으로 개칭하고, 만주인이자 요동 한인의 황제이자 몽골인의 카안이 됐다. 이는 곧 만주족이 한인, 몽골인과 공존하겠다는 의지를 선포한 것이었고 다종족국가의 표방을 의미했다.[42] 사간 세첸의 《몽골원류》는 누르가치를 칭기스 칸의 정치적 계승자로 인정하고 숭덕제가 정권(몽골어: ᠲᠥᠷᠥ Törö)을 장악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몽골인들도 그러한 주장을 수용했음을 보여준다.[43]

같은 해, 홍 타이지는 명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감찰 기관인 도찰원(都察院, 만주어: ᡠᡥᡝᡵᡳ
ᠪᡝ
ᠪᠠᡳᠴᠠᡵᠠ
ᠶᠠᠮᡠᠨ
Uheri-be Baicara Yamun)을 설립했다. 도찰원의 임무는 황제에게 간언하고, 버이러와 대신들의 불법을 규찰하며, 육부를 감찰하고, 논의와 상주에 참여하며, 사건을 심리하는 것이었다. 도찰원도 버이러들의 권력을 잠식했다.[44] 홍 타이지는 더 이상 여러 친왕(親王, 만주어: ᠴᡳᠨ
ᠸᠠᠩ
Cin Wang)과 동등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이제 유일한 황제(천자)였고, 팔기의 소유자들은 관료의 일부분이었다. 이 움직임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했는데, 첫째는, 남쪽의 광대한 땅을 정복하는 데에 적합한 최상의 정치 조직 형태를 제공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명 황제에 대한 도전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26]

1636년 당시 홍 타이지가 제위에 올랐다고 선포하면서 들이민 근거 중 하나는 10년 전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정복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사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은 홍 타이지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거부했다. 홍 타이지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45] 인조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화의가 단절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다.[46] 홍 타이지는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홍 타이지는 조선의 사신들의 소동으로 인해 인해 '미완'에 그쳤던 자신의 '황제 즉위식'을 정축년 정월 30일 삼전도에서 '완성'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의 사신이 아니라 국왕인 인조를 출성시켜 의례의 현장에서 자신과 직접 대면하게 함으로써, 묵던의 '황제 즉위식'보다 더 완성도가 높은 의례를 구현하고자 했다.[47]

1638년 9월, 홍 타이지는 1군 우익군은 요토를 사령관으로 삼아 고북구를, 2군 좌익군은 도르곤을 봉명대장군으로 삼아 동가구를 통해 요서를 우회하여 명나라를 침략했다. 청군은 북경을 포위하고 여덟 길로 남하하여 경기 지역을 무인지경으로 휩쓸어 40성을 함락시키고 한족 25만여 명을 사로잡아 청으로 끌고 갔다.[48]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청측의 1군 사령관인 요토가 병사했는데,[49] 조카 요토의 사망을 접한 홍 타이지는 3일간 단식했다.

산해관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명전쟁을 정복 전쟁으로 확장시킬 수 없었던 홍 타이지는 산해관 외곽의 즉 금주, 송산, 행산, 탑산을 공략하고자 했다.[50]

1640년 3월 18일, 홍 타이지가 지르가랑도도를 각각 좌·우익 군의 대장으로 임명하여 금주 근방에 주둔시키고 둔전을 행하기 시작했고,[51] 이듬해 9월 홍승주가 이끄는 명군이 청군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송산(松山)·금주(錦州) 전투가 발발했고 이에 9월 23일 홍 타이지가 직접 자신의 병력을 송산에 당도했다.[52] 1642년 3월, 마침내 청군은 송산성을 함락하고,[53] 5월에 금주성의 항복도 받아냈으며[54] 7일에는 탑산성을 함락하고,[55] 19일에는 행산성이 청군에게 항복했다.[56]

청이 송금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요서 지역의 거점들을 줄줄이 확보하자, 한족 관료들은 홍 타이지에게 좀 더 과감하게 북경을 직접 공격할 것을 상주하였다.[57] 그러나 청군이 반복적으로 중국 도시들을 함락하고 밭의 곡식을 추수한 후 회군했다는 점에서 드러나듯이 청 제국은 중국 정복을 추진할 만큼 강력하지 않았다.[58] 홍 타이지는 무리해서 산해관을 장악하거나 북경을 점령할 의도가 없었고, 가능하다면 명나라와 화의를 맺고 청 내부의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다.[57]

그해 11월 초 홍 타이지는 아바타이를 봉명대장군(奉命大將軍)에 임명하여 명나라를 침공하도록 했다.[59] 청군은 8개월 간 18주, 67현 88성을 함락하고 황금 1만 2천여 량, 은 220만 량, 한족 포로 37만, 타(駝)·말·노새·당나귀·소·양 32만여 마리를 노획하였다.[60]

사망편집

 
청 소릉
원문
○是夜。亥刻。上無疾。端坐而崩。上在位十有七年。壽五十有二

— 청태종문황제실록

해석
○이날 밤 21시~23시에 상이 병이 없었는데 단정하게 앉아서 붕어하였다. 상의 재위 17년이었고 나이 52세였다.

홍 타이지는 1643년 9월 21일 밤에 급사했고 심양의 소릉(昭陵)에 안치되었다. 홍 타이지가 붕어한지 5일이 지난 후 호쇼이 머르건 친왕 도르곤이 삼관묘에 이르러 소닌을 불러 새 황제 옹립에 대해 의논하였다. 소닌은 홍 타이지의 황자 중 한 명을 옹립하는 것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하였고, 당일 밤에 홍 타이지의 1등 시위인 바아랴 투 장긴 투라이(만주어: ᡨᡠᠯᠠᡳ Tulai) 등은 황자를 옹립할 것을 결정했다.[61]

홍 타이지 직속 정황기와 양황기의 대신들이 대청문에서 맹세한 뒤, 무장한 두 황기 바야라 병력으로 하여금 궁전을 포위하고 숭정전에 이르자, 여러 왕과 대신들이 동서의 복도에 열 지어 앉았는데 소닌과 오보이는 황자를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1]

이에 도르곤이 이들을 잠시 물러나게 하였는데, 다이샨은 홍 타이지의 장남 호오거를 추천했으나 호오거는 추천을 거절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직후 도르곤의 친동생인 군왕 아지거와 친왕 도도는 도르곤이 황위에 오르길 권하였다. 도르곤은 꺼리자 도도는 누르가치의 유조에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는 점을 명분으로 자신을 옹립할 것을 주장했으나 도르곤은 파풍가 친왕 호오거의 이름 또한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였고, 도도의 추천을 받은 다이샨 또한 황위를 기피하였다. 결국 의논을 통해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의 소생이자 홍 타이지의 9남인 푸린의 옹립이 결정되었다.[61][62]

소닌·오보이·투라이·탄타이(만주어: ᡨᠠᠨᡨᠠᡳ Tantai)·궁가다이(만주어: ᡤᡠᠩᡤᠠᡩᠠᡳ Gunggadai)·시한(만주어: ᠰᡳᡥᠠᠨ Sihan)은 삼관묘에서 어린 황제를 잘 보좌할 것을 맹세했다.[61]

이후 도르곤을 비롯한 제왕(諸王), 버이러, 대신들은 함께 푸린의 즉위를 봉하였다. 제왕과 버이러 그리고 대신들은 의논을 통해 우전 친왕 지르가랑과 도르곤을 섭정으로 세웠다.[63]

가족 관계편집

정후편집

정실(가한 즉위 전)편집

봉호 시호 이름(성씨) 재위년도 생몰년도 국구(장인, 장모) 별칭 비고
대복진(大福晉)
원비(元妃)
니오후루 씨
(鈕祜祿氏)
1593년 ~ 1612년 일등홍의공(一等弘毅公)
니오후루 어이두(鈕祜祿 額亦都)
후금 건국 전에 사망함.
황후로 추봉되지 않음.
적복진(嫡福晉)
계비(繼妃)
우라나라 씨
(烏拉納喇氏)
울라나라 박도(烏拉納喇 博克多) 우라나라 아바하이의 고모.
천명제 때 폐출됨.
황후로 추봉되지 않음.

황후편집

봉호 시호 이름(성씨) 재위년도 생몰년도 국구(장인, 장모) 별칭 비고
대복진(大福晉)
황후(皇后)
효단문황후
(孝端文皇后)
보르지기트 저르저르
(博爾濟吉特 哲哲
/박이제길특 철철)
(1626년 ~ 1636년)
1636년 ~ 1643년
1600년 ~ 1649년 화석복친왕(和碩福親王)
보르지기트 망구스(博爾濟吉特 莽古思)
화석복비(和碩福妃)
군부(衮布)
중궁국군복진(中宮國君福晋)
정궁황후(正宮皇后)
모후황태후(母后皇太后)
측복진(側福晉)
장비(莊妃)
효장문황후
(孝莊文皇后)
보르지기트 붐부타이
(博爾濟吉特 布木布泰
/박이제길특 포목포태)
(추존) 1613년 ~ 1688년 화석충친왕(和碩忠親王)
보르지기트 차이상(博爾濟吉特 寨桑)
화석현비(和碩賢妃)
박리(博禮)
서영복궁복진(西永福宮福晉)
영복궁장비(永福宮莊妃)
황모장비(皇母莊妃)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
소성황태후(昭聖皇太后)
소성태황태후(昭聖太皇太后)
효단문황후의 조카.
사후 황후로 추존됨.

측실(후궁)편집

측비편집

봉호 시호(존호) 이름(성씨) 생몰년도 별칭 비고
대복진(大福晋)
신비(宸妃)
민혜공화원비
(敏惠恭和元妃)
보르지기트 하르조
(博尔濟吉特 海蘭珠
/박이제갈특 해란주)
1609년 ~ 1641년 동관저궁복진(東關雎宮福晋)
관저궁신비(關雎宮宸妃)
대복진(大福晋)
귀비(貴妃)
의정대귀비
(懿靖大貴妃)
보르지기트 나목종
(博尔濟吉特 娜木鍾
/박이제길특 나목종)
? ~ 1674년 서인지궁복진(西麟趾宮福晉)
인지궁귀비(麟趾宮貴妃)
다라대복진(多羅大福晉)
측복진(側福晋)
숙비(淑妃)
강혜숙비
(康惠淑妃)
보르지기트 바트마조
(博尔濟吉特 巴特瑪璪
/박이제길특 파특마조)
동연경궁복진(東衍慶宮福晋)
연경궁숙비(衍慶宮淑妃)

측복진편집

봉호 이름(성씨) 생몰년도 별칭 비고
측복진(側福晋) 여허나라 씨(叶赫那拉氏)
측복진(側福晋) 자루트보르지기트 씨(扎魯特博尔濟吉特氏) 신복진(新福晉)
동궁복진(東宮福晉)

소복진편집

봉호 이름(성씨) 생몰년도 별칭 비고
소복진(小福晋) 나라 씨(納喇氏)
소복진(小福晋) 차하르키러 씨(察哈尔奇壘氏) ? ~ 1645년
소복진(小福晋) 얀자 씨(顔扎氏)
소복진(小福晋) 이르건기오로 씨(伊尔根覺羅氏)
소복진(小福晋) 사인노얀 씨(賽音諾顔氏)
소복진(小福晋) 커이커러 씨(克伊克勒氏)

황자편집

- 봉호(시호) 시호 이름 별칭 생몰년도 생모 자식 비고
장남 화석숙친왕
(和碩肅親王)
무(武) 아이신기오로 호오거
(愛新覺羅 豪格
/애신각라 호격)
화석패륵(和碩貝勒) 1609년 ~ 1648년 원비 니오후루 씨 7남 1녀 원래 황위 계승자이나
도르곤 세력과의 정쟁에서 밀림.
차남 아이신기오로 로거
(愛新覺羅 洛格
/애신각라 낙격)
1611년 ~ 1621년 계비 울라나라 씨 요절함.
3남 아이신기오로 로보호이
(愛新覺羅 洛博會
/애신각라 낙박회)
1611년 ~ 1617년 원비 니오후루 씨 요절함.
4남 보국공
(輔國公)
아이신기오로 여부슈
(愛新覺羅 葉布舒
/애신각라 엽포서)
1627년 ~ 1690년 서비 얀자 씨 1남 1녀
5남 화석승택친왕
(和碩承澤親王)
유(裕) 아이신기오로 쇼서
(愛新覺羅 碩塞
/애신각라 석새)
다라승택군왕(多羅承澤郡王) 1629년 ~ 1655년 측비 여허나라 씨 3남 2녀
6남 진국공
(鎭國公)
각후(慤厚) 아이신기오로 고서
(愛新覺羅 高塞
/애신각라 고새)
1637년 ~ 1670년 서비 나라 씨 5남
7남 보국공
(輔國公)
아이신기오로 창슈
(愛新覺羅 常舒
/애신각라 상서)
1637년 ~ 1699년 서비 이르건기오로 씨 10남
8남 1637년 ~ 1638년 민혜공화원비 보르지기트 씨 요절함.
9남 패자(貝子) 아이신기오로 푸린
(愛新覺羅 福臨
/애신각라 복림)
1638년 ~ 1661년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 씨 8남 6녀 제3대 황제 순치제(順治帝).
10남 보국공
(輔國公)
아이신기오로 토우서
(愛新覺羅 韜塞
/애신각라 도새)
1639년 ~ 1695년 서비 커이커러 씨 9남
11남 화석양친왕
(和碩襄親王)
소(昭) 아이신기오로 보무보고르
(愛新覺羅 博穆博果尔
/애신각라 박목박과이)
1642년 ~ 1656년 의정대귀비 보르지기트 씨 요절함.

황녀편집

- 봉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부마 별칭 비고
장녀 고륜오한공주
(固倫敖漢公主)
1621년 ~ 1654년 계비 울라나라 씨 박이제길특 반제
(博爾濟吉特 班第)
오한군주(敖漢郡王)
차녀 고륜온장공주
(固倫溫莊公主)
마객탑(馬喀塔) 1625년 ~ 1663년 효단문황후 보르지기트 씨 에제이 칸
(額哲 可汗)
박이제길특 아포나
(博爾濟吉特 阿布奈)
고륜장공주(固倫長公主)
고륜영녕공주(固倫永寧公主)
3녀 고륜정단공주
(固倫靖端公主)
1628년 ~ 1686년 효단문황후 보르지기트 씨 박이제길특 기탑특
(博爾濟吉特 奇塔特)
고륜장공주(固倫長公主)
고륜연경공주(固倫延慶公主)
4녀 고륜옹목공주
(固倫雍穆公主)
아활(雅豁) 1629년 ~ 1678년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 씨 박이제길특 필륵탑갈이
(博爾濟吉特 畢勒塔噶爾)
고륜장공주(固倫長公主)
고륜흥평공주(固倫興平公主)
5녀 고륜숙혜공주
(固倫淑慧公主)
아도(阿圖) 1632년 ~ 1700년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 씨 박이제길특 색포등
(博爾濟吉特 色布騰)
고륜장공주(固倫長公主)
고륜화순공주(固倫和順公主)
6녀 고륜공주
(固倫公主)
1633년 ~ 1649년 측비 자루트보르지기트 씨 이이근각라 과찰
(伊爾根覺羅 夸札)
조졸함.
7녀 고륜단헌공주
(固倫端獻公主)
1633년 ~ 1648년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 씨 박이제길특 갱길이격
(博爾濟吉特 鏗吉爾格)
고륜장공주(固倫長公主)
고륜숙철공주(固倫淑哲公主)
조졸함.
8녀 고륜단정공주
(固倫端貞公主)
1634년 ~ 1692년 효단문황후 보르지기트 씨 박이제길특 파아사호랑
(博爾濟吉特 巴雅斯護朗)
고륜장공주(固倫長公主)
고륜창락공주(固倫昌樂公主)
고륜영안공주(固倫永安公主)
9녀 1635년 ~ 1652년 측비 자루트보르지기트 씨 박이제길특 합상
(博爾濟吉特 哈尙)
조졸함.
10녀 현군(縣君) 1635년 ~ 1661년 서비 나라 씨 과이가 휘새
(瓜爾佳 輝塞)
11녀 고륜단순공주
(固倫端順公主)
1636년 ~ 1650년 의정대귀비 보르지기트 씨 박이제길특 갈이마색낙목
(博爾濟吉特 葛爾瑪索諾木)
조졸함.
12녀 향군품급
(鄕君品級)
1637년 ~ 1678년 서비 사인노얀 씨 박이제길특 반제
(博爾濟吉特 班第)
13녀 1638년 ~ 1657년 서비 나라 씨 과이가 합랍
(瓜爾佳 哈拉)
조졸함.
14녀 화석각순공주
(和碩恪純公主)
아길격(阿吉格) 1641년 ~ 1704년 측비 차하르키러 씨 오응웅(吳應熊) 화석장공주(和碩長公主)
화석건녕공주(和碩建寧公主)
양녀
- 화석순철공주
(和碩肫哲公主)
1612년 ~ 1648년
- 화석공주
(和碩公主)
1615년 ~ 1637년 박이제길특 만주습례
(博爾濟吉特 曼珠習禮)
극결군왕(克勤郡王) 요토(岳託)의 독녀이자
예열친왕(禮烈親王) 다이샨(代善)의 손녀.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방송편집

각주편집

  1. 《han i araha jakūn gūsai manjusai mūkun hala be uheri ejehe bithe sioi》 "mini taidzu han mafa taidzung han mafa abkai hese be ambarme alifi, dergi oci."
  2. 《御製八旗滿洲氏族通譜序》, "我們的太祖汗祖宗太宗汗祖宗天命把大接受皇上."
  3. 구범진 (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글방. 22쪽. ISBN 9788972916826. 
  4. 《太祖武皇帝實錄》
  5. 이민환, 《건주문견록(建州聞見錄)》
  6. 광해군일기
  7. 이윤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북스펍, 2012
  8. 광해군일기
  9.  《鲁庵文集》
  10. 박지원, 《열하일기
  11. 徐慶淳, 《夢經堂日史》
  12. Crossley, Pemela Kyle. 《만주족의 역사》. 돌베게. 352쪽. ISBN 9788971995310. 
  13. Rawski, Evelyn S. (1991). 〈Ch'ing Imperial Marriage and Problems of Rulership〉. Watson, Rubie S.; Ebrey, Patricia Buckley. 《Marriage and Inequality in Chinese Societ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70–203쪽. ISBN 0-520-06930-7. 
  14. Elliott, Mark C. (2001), 《The Manchu Way: The Eight Banners and Ethnic Identity in Late Imperial China》,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397쪽, ISBN 0-8047-4684-2 
  15. Grupper SM. Manchu patronage & Tibetan Buddhism during the first half of the Ch'ing Dynasty. J. Tibet. Soc., no 4, 1984, 69쪽
  16. 《山海紀聞·一·紀名號決戰勝》:「一,奴酋名號。號憨者,主也。【四男名喝竿,稱憨,不出戰。】」
  17. 三田村泰助, 「再び清の太宗の即位事情に就いて」, 《東洋史研究》7-1, 1942
  18. 만문로당》. 1778. ilan biyai ice ilan i inenggi.jakūn juse acafi ama han de abkai buhe doro be adarame toktobumbi. adarame ohode. abkai hūturi enteheme ombi seme fonjire jakade. han hendume. ama be sirame gurun de ejen obure de. hūsungge etuhun niyalma be ume ejen obure. husungge etuhun niyalma gurun de ejen ohode. ini hūsun be dele arame banjifi. abka de waka ojorahū. emu niyalma udu bahanambi seme. geren i hebe de isimbio. jakūn juse suwe jakūn wang oso. jakūn wang emu hebei banjici. ufararakū okini. jakūn wang suweni gisun be mararakū niyalma be tuwafi. suwe ama i sirame gurun de ejen obu. suweni gisun be gaijarakū. sain jurgan be yaburakū oci. jakūn wang suweni sindaha han be suwe halame. suweni gisun be mararakū sain niyalma be sonjofi sinda. tere halara de. efime injeme hebei icihiyame halaburakū. marame cira aljaci. sini ehe niyalmai ciha obumbio. tuttu oci. ehe i halambi kai. jakūn wang suweni dolo. aika baita gurun i doro dasara de. 
  19. 청사고》. 十一年八月,太祖崩,岳託與其弟薩哈璘告代善,請奉太宗嗣位,代善曰: “是吾心也!” 告諸貝勒定策。 太宗辭讓再三,代善等請益堅,乃即位。 是冬,伐蒙古喀爾喀紥魯特部,擒貝勒巴克等,斬鄂爾齋圖,俘所屬而歸。 
  20. 만문로당》. 1778. daci manju gurun i doro hengkilere de. amba beile. amin beile. manggūltai beile. ilan beile be ahūn seme kunduleme han i juwe ashan de tebuhe. yaya bade inu han i adame tebure dabala. fejile teburakū bihe. 
  21.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제국》, 민음사
  22. 남호현, 《朝淸關係의 초기 형성단계에서 ‘盟約’의 역할》, 조선시대사학회
  23.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만문노당역주회 (2017년 9월 30일). 《만문노당역저: 태종》. 99~103쪽. 
  24.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67~168쪽. ISBN 9788994606514. 
  25. 《太宗文皇帝實錄》. 1655. ○戊寅。上督大軍入邊。攻克洪山口城。駐師城內。擢洪山口人方遇清為備禦。給與敕命。令守洪山口。招集流亡。盡心供職。俟後有功。不次擢用。又有明千總一員。把總一員。遁匿山中。聞城克。率百人擐甲執械來降。上嘉之。擢千總為備禦。把總為千總 
  26. William T. Rowe. 《China's Last Empire: The Great Qing》. History of Imperial China. An Imprint of Harvard University Press. ISBN 978-0674066243. 
  27. Frederic Wakeman (1986). 《The Great Enterpris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65쪽. ISBN 9780520235199. 
  28. Frederic Wakeman (1986). 《The Great Enterpris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64~224쪽. ISBN 9780520235199. 
  29. 만문로당》. 1778. han hendume. tuttu oci minde alaha niyalma holtohobi kai. muse mektefi fonjiki. alaha niyalma holtoci. holtoho niyalma be waki. alaha niyalma inu oci. yabuhakū niyalma be waki seme. dere fularafi jili banjime hendufi morilaha. tere gisun de manggūltai beile hendume. han serengge. siden be hendumbi dere. mimbe canggi ainu bakcin arafi gisurembi. han seme eitereme haldabaxame banjici ojorakū oci. mimbe ainci waki sembidere seme hendume. loho be julesi obufi fesin be jafame seferdere de. ini emu eme de banjiha deo degelei taiji. sini arbušara mudan waha kai seme šukilara jakade. eteretele genehe. tede beile jili banjifi. 
  30. 《大淸太宗文皇帝實錄》 卷10, p.8
  31. 《太宗文皇帝實錄》. 1655. ○丙申 上以元旦朝賀屆期諭八旗諸貝勒大臣曰禮部參政李伯龍疏奏我國朝賀行禮時不辨官職大小常有隨意排列踰越班次者應請酌定儀制等語此言誠是今元旦朝賀。應令八旗諸貝勒獨列一班行禮。外國來歸蒙古諸貝勒大臣次之八旗文武官員次之。各照旗序行禮至貝勒莽古爾泰因其悖逆。定議治罪革大貝勒稱號。自朕即位以來。國中行禮時曾與朕竝坐。今不與坐。恐他國聞之。不知彼過。反疑前後互異。彼年長於朕。可否仍令竝坐。著巴克什達海庫爾纏覺羅龍什索尼與大貝勒代善及諸貝勒會議具奏尋會議時諸貝勒執不可竝坐者半代善曰上諭誠是彼之過不足介懷即仍令竝坐亦可頃之又曰我等既戴皇上為君又與上竝坐恐滋國人之議謂我等奉上居大位又與上竝列而坐甚非禮也禮本人情人心所安。即天心所佑。各遵禮而行自求多福斯神佑之矣自今以後上南面中坐以昭至尊之體我與莽古爾泰侍坐上側外國蒙古諸貝勒坐於我等之下如此方為允協諸貝勒皆曰善於是以其議奏聞上從之 
  32. 《太宗文皇帝實錄》. 1655. ○是日。於大凌河城南。獲一漢人。訊之。言明修築大凌河城。已經半月。城牆已完。雉堞完其半。有總兵祖大壽及副將八員。參遊約二十員。馬兵七千。步兵七千。夫役商賈。約萬餘人在焉。於是大軍遂以是夜進圍其城 
  33. 《太宗文皇帝實錄》. 1655. ○戊辰。大凌河城內各官皆與祖大壽同謀歸降。獨副將何可剛不從。大壽執之令二人掖出城外於我諸將前殺之可剛顏色不變不出一言含笑而死城內饑人爭取其肉大壽遂遣副將四員遊擊二員來誓 上與諸貝勒對 天誓曰明總兵官祖大壽、副將劉天祿、張存仁、祖澤潤、祖澤洪祖可法、曹恭誠、韓大勳、孫定遼、裴國珍、陳邦選李雲鄧長春劉毓英竇承武。參將遊擊吳良輔高光輝劉士英盛忠祖澤遠胡弘先祖克勇祖邦武施大勇夏得勝李一忠劉良臣張可範、蕭永祚韓棟段學孔張廉吳奉成方一元塗應乾陳變武方獻可劉武元楊名世等今率大凌河城內官員兵民歸降。凡此歸降將士。如誑誘誅戮。及得其戶口之後。復離析其妻子。分散其財物牲畜。天地降譴奪吾紀算若歸降將士懷欺挾詐。或逃或叛。有異心者。天地亦降之譴。奪其紀算。顯罹國法如遵守此盟 天地垂佑。壽命延長。世澤久遠安享太平大壽等誓曰祖大壽等率眾築城。遇滿洲國兵。圍困三月。軍餉已盡。率眾出降傾心歸汗。毫無猜疑歸順以後官軍人民家口俱獲保全。若大壽等違心背盟天地鑒之。殃及其身。死於刀箭之下。儻汗以計詐害。亦惟汗自知之。誓畢。上遣巴克什庫爾纏覺羅龍什。詣大壽諭曰既經盟誓天地。當用何策以取錦州其急言之。大壽曰我即親至御前。商議此事。庫爾纏、龍什、回奏上復遣諭曰。盟誓雖申。民心未定。今晚且勿來。期以詰朝相見大壽曰。事已定。更何猜疑。我即至御前。議取錦州之策。庫爾纏、龍什、還奏上遂令之來命諸貝勒出迎於一里外。諸貝勒行抱見禮大壽曰。諸貝勒來迎。何以克當。諸貝勒曰。將軍親至。豈有不迎之理。一鼓盡時。方至御營。上出幄。列炬以俟。大壽欲跪見。上止之。行抱見禮。令大壽先入幄。大壽謝不敢。遂竝入。命坐於上左。設饌宴之。以金巵酌酒。親賜大壽。大壽辭。候上先上先讓大貝勒代善飲次上飲。次命大壽飲。大壽曰。我所攜之物。日久已罄。願借汗酒。奉獻御前。於是酌酒跪進。上飲畢。上以御服黑狐帽、貂裘、及金玲瓏鞓帶、緞鞾、雕鞍白馬、賜大壽曰。初來歸我。宜拜天地。以禮相見。因暮夜。不能成禮且在戎行。攜物無多。不能以嘉物相贈也。大壽奏曰蒙上優待若此夫復何言我雖至愚豈木石等耶遂定取錦州之策大壽辭入城上送出俟大壽行方入幄 
  34. 谷井陽子 (2015). 《八旗制度の研究》. 京都大學學術出版會. 223쪽. 
  35. Atwood, Christopher P. (2004). “Ligdan Khan”.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the Mongol empire》 (Facts On File): 334-335.
  36. 노기식 (2001). “만주의 몽골 차하르부 병합과 그 의미”. 《중국학논총》 14: 65~68. 
  37. 《太宗文皇帝實錄》. 1655. ○庚辰。出師和碩墨爾根戴青貝勒多爾袞、貝勒岳託、薩哈廉、豪格等征察哈爾國。獲歷代傳國玉璽。先是相傳茲璽。藏於元朝大內。至順帝為明洪武帝所敗。遂棄都城。攜璽逃至沙漠。後崩於應昌府。璽遂遺失越二百餘年。有牧羊於山岡下者。見一山羊。三日不嚙草。但以蹄跑地。牧者發之。此璽乃見。既而歸於元後裔博碩克圖汗。後博碩克圖為察哈爾林丹汗所侵。國破。璽復歸於林丹汗。林丹汗、亦元裔也。貝勒多爾袞等。聞璽在蘇泰太后福金所。索之。既得。視其文。乃漢篆制誥之寶四字璠璵為質。交龍為紐。光氣煥爛。洵至寶也。多爾袞等喜甚曰皇上洪福非常。天錫至寶。此一統萬年之瑞也。遂收其璽。攜降民渡黃河。至歸化城。時貝勒岳託有疾分兵一千駐營歸化城。防守察哈爾降民。三貝勒率眾兵。竝察哈爾汗子額爾克孔果爾額哲。及其大臣往略明山西一帶。 
  38.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민음사
  39.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2쪽. ISBN 9788994606514. 
  40. Reuven Amitai-Preiss, David O. Morgan,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 BRILL, 1999, pp. 260 - 73
  41. 《太宗文皇帝實錄》. 1655. 表曰。諸貝勒大臣文武各官及外藩諸貝勒上言。恭惟我皇上承天眷佑。應運而興。輯寧諸國。愛育群黎當天下昏亂之時體天心。行天討。逆者以兵威之。順者以德撫之。寬溫之譽。施及萬方。征服朝鮮。混一蒙古更獲玉璽受命之符昭然可見。上合天意。下恊輿情。臣等遇景運之丕隆。信大統之攸屬敬上尊號。一切儀物。俱已完備伏願俯賜俞允。勿虛眾望。讀畢。上諭曰。數年來。爾諸貝勒大臣。勸朕受尊號。已經屢奏。但朕若受尊號。恐上不協天心下未孚民志。故未允從。今內外諸貝勒大臣。復以勸進尊號。再三固請。朕重違爾等之意。弗獲堅辭。勉從眾議。朕思既受尊號。豈不倍加乾惕。憂國勤政。唯恐有志未逮。容有錯誤。唯天佑啟之。爾諸貝勒大臣。既固請朕受尊號。若不各恪共乃職贊襄國政。於爾心安乎於是令儒臣遍諭諸貝勒大臣畢。眾皆踴躍歡欣。行三跪九叩頭禮而出 
  42.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68~169쪽. ISBN 9788994606514. 
  43.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아틀라스 역사 시리즈. 사계절. 195쪽. ISBN 9788958289326. 
  44.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68쪽. ISBN 9788994606514. 
  45. 병자호란 미스터리…전쟁을 끝낸 건 천연두였다?
  46. 인조실록》 33권, 숭정 9년 7월 28일 경오 1번째 기사, 上答曰: "頃者本國差人, 適値伊賊僭號之日, 以死自守, 不參於僞賀之班, 伊賊怒逐差人。 自此和事已絶, 偵探誠未易也。 然若不以時月爲期, 則當徐爲之周旋矣。"
  47. 구범진 (2019).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글방. 300~301쪽. ISBN 9788972916826. 
  48. 청사고》. 三年,上伐喀爾喀,王留守,築遼陽都爾弼城,城成,命曰屏城; 復治盛京至遼河大道。八月,命為奉命大將軍,將左翼,岳託將右翼,伐明。自董家口毀邊牆入,約右翼兵會通州河西務。越明都至涿州,分兵八道,行略地至山西,南徇保定,擊破明總督盧象昇。遂趨臨清,渡運河,破濟南。還略天津、遷安,出青山關。克四十餘城,降六城,俘戶口二十五萬有奇,賜馬五、銀二萬。 
  49. 《太宗文皇帝實錄》. 1655. ○丙寅。征明左翼奉命大將軍和碩睿親王多爾袞、右翼多羅貝勒杜度等、自軍營遣兵部啟心郎詹霸、俄莫克圖巴圖魯、碩爾兌等、奏報。上覽右翼杜度疏、無揚威大將軍多羅貝勒岳託名。大驚。問詹霸等。詹霸等奏曰。岳託、及公馬瞻、俱病卒上慟哭久之。令且勿使禮親王知。因輟飲食者三日。左翼多爾袞疏曰。臣等率兵、毀明邊關而入。兩翼兵、約會於通州河西。由北邊過燕京。自涿州分兵八道。一沿山下。一沿運河。於山河中間、縱兵前進。燕京迤西千里內六府、俱已蹂躪。至山西界而還。復至臨清州、渡運糧河、攻破山東濟南府。至京南天津衛。仗皇上威福、大軍深入。克城三十四座。降者六城。敗敵十七陣。俘獲人口二十五萬七千八百八十。將士凱旋、無一傷者。此皆由皇上神謀睿筭指授方略。臣等謹遵奉行。故所在奏績、亦由皇上訓練有素。將士同心恊力之所致也。右翼杜度疏曰。臣等從明燕京、西至山西界。南至山東濟南府、蹂躪其地。共克十九城。降者二城。敗敵十六陣。殺其二總督及守備以上官、共百餘員。生擒一親王。一郡王。一奉國將軍。俘獲人口二十萬四千四百二十有三。金四千三十九兩。銀九十七萬七千四百六兩 
  50. 魏源 (1984). 《聖武記》 1. 中華書局. 29쪽. 
  51. 《太宗文皇帝實錄》. 1655. ○己亥。命和碩鄭親王濟爾哈朗、為右翼主帥。多羅貝勒多鐸、為左翼主帥。率官兵往修義州城駐劄屯田。令明國山海關外寧錦地方、不得耕種。將行。上率諸王貝勒貝子公等、及各官。於辰刻謁堂子。行三跪九叩頭禮畢。祭纛。復行二跪六叩頭禮。送五里。指授方略畢。鳴礮三。大軍起行。上自懷遠門入。還宮 
  52. 《太宗文皇帝實錄》. 1655. ○壬戌。上至松山。陳師於松山杏山之間。橫截大路駐營。先是上行急。鼻衄不止、承以盌。行三日、衄方止。諸王貝勒大臣、共議攻圍之策。上笑曰。朕但恐敵人聞朕親至。將潜遁耳。倘蒙天眷佑。敵兵不逃。朕必令爾等破此敵。如縱犬逐獸。易如拾取。不致勞苦也。朕所定攻戰機宜。爾等慎勿違誤。勉力識之。多羅武英郡王阿濟格、多羅貝勒多鐸、奏請聖駕徐行。臣等當先往。上曰。先軍制勝。利在神速。朕如有翼可飛。即當飛去。何可徐行也。遂晝夜遄發。於是自盛京疾馳而行者六日。將抵松山。至戚家堡駐營。遣內國史院大學士剛林、學士羅碩、往諭多羅睿郡王多爾袞、多羅肅郡王豪格等曰。朕當即至矣。可令前遣之固山額真宗室拜尹圖、多羅額駙英俄爾岱兵、及科爾沁土謝圖親王兵。察哈爾瑣諾木衛寨桑等兵。先在高橋駐營。俟朕至時。合圍松山杏山。於是剛林等往諭。王貝勒大臣、及滿洲蒙古漢人眾兵聞之。無不忻躍。恭候車駕於路。多爾袞、豪格、拜尹圖、譚泰、英俄爾岱等。復令剛林、羅碩、奏言。臣等仰藉皇上天威。豈敢畏敵。心有所怯。第軍中形勢。不得不以奏聞。今聖駕親臨。臣等勇氣增倍。惟務進攻。但為國圖功。敢陳一得。觀明兵甚眾。臣等先率兵圍錦州、累經攻戰。微有損傷。如再速戰。恐力不及。頃皇上令屯營高橋。倘敵兵為我所迫。約錦州松山兵、內外夾攻。協力死戰。萬一有失。為之柰何。皇上即欲自高橋來援。亦必待勝負少分之後。今如暫駐松山杏山之間。則臣等大有益矣。奏聞。上允之。既而復遣剛林、羅碩。諭多爾袞、豪格曰。朕今於松山杏山間駐營。敵人必速遁。恐不能多所斬獲也。於是仍率大軍進發。諸王貝勒大臣、及諸將士。遙見御前儀仗、及前隊旗纛移營。皆踴躍懽呼。上率大軍先至松山。繼於松山杏山之間、自烏欣河南山、至海。橫截大路。綿亙駐營。上諭眾曰。如敵來犯。近則迎擊之。倘敵兵尚遠。而先往迎戰。致貽累於眾。即與敗陣無異。是時敵兵於松山城北乳峰山岡、結營。其步兵於乳峰山松山城之間、掘壕、立七營。其騎兵駐於松山東西北三面。合騎步兵、共號十三萬。其領兵總督洪承疇、巡撫邱民仰、兵道張斗、姚恭、王之禎、兵部郎中張若麒、大同總兵王樸、宣府總兵李輔明、密雲總兵唐通、薊州總兵白廣恩、玉田總兵曹變蛟、山海總兵馬科、前屯衛總兵王廷臣、寧遠總兵吳三柱、及副參遊守二百餘員。見上親率大軍、環松山而營。大懼。欲戰、則力不支。欲守、則糧已竭。遂合謀退遁 
  53. 《太宗文皇帝實錄》. 1655. ○辛酉。圍守松山多羅肅郡王豪格、多羅郡王阿達禮、多羅貝勒多鐸、羅洛宏等。自軍中遣安泰、扈葉等奏報。明松山副將夏承德。自城內遣人密約我軍。可於彼守禦之處。乘夜豎梯登城。彼即在內接應。相約已定。遂以左翼雲梯一架、右翼雲梯一架、在前。八旗雲梯八架隨後。登梯軍士。一一派定。夏承德以其子夏舒為質。十八日夜子時。豎梯於城南面。阿山旗下薩爾糾牛彔下班布里、何洛會旗下耿格牛彔下羅洛科、奮勇先登。眾俱繼之。敵兵方覺。我軍巡邏於城上。詰朝。夏承德部卒、別聚一處。搜敵兵殺之。生擒明總督洪承疇、巡撫邱民仰、總兵王廷臣、曹變蛟、祖大樂、遊擊祖大名、祖大成、總兵白廣恩之子白良弼等。其兵道一員、副將十員、遊擊、都司、守備、紅旗、千總、把總等官百餘員。兵三千六十三名。盡戮之。夏承德部下男子婦女幼穉、共一千八百六十三名口。又俘獲婦女幼穉、共一千二百四十九口。馬十六匹。騾一頭。甲冑一萬一千三百副。弓九百五十張。刀三千口。玲瓏撒袋十三副。鞍四副。大小紅衣礮、鳥鎗、共三千二百七十三位。金玉等帶三條。金、珠、銀兩、共一萬五千有奇。緞疋及各色衣服、共一萬五千九百有奇。貂、豹、虎、狼等皮、共二十一。貂帽十三。貉裘、羊裘、共五十四。奏入。上諭松山諸王。將俘獲之物。酌量分賜將士。一應軍器。即於松山城內收貯 
  54. 《太宗文皇帝實錄》. 1655. ○己卯。大軍自上年三月、掘壕防守。更番出戍。圍困錦州。至是年三月。歷年一載。明援兵盡絕。城內糧盡。饑民相食。祖大壽戰守計窮。又聞松山已失。乃率眾官出城、至和碩鄭親王濟爾哈朗、多羅睿郡王多爾袞軍前。叩首乞降。王等遂遣啟心郎額爾格圖、議政大臣雅賴等、至盛京具奏。王等圍困錦州。祖澤遠、屢遣人至營。言祖澤洪若在。欲邀與語。王等詰之云。祖澤洪與爾言時。爾等不與之言。今澤洪已回。復與誰語耶。至第三日。其使復來云。此言係祖總兵遣來相告者。諸王云。祖總兵云何。答云。祖總兵言、近聞松山已失。若得見總兵祖大樂我即歸順。我若歸順。寧遠亦可得也。諸王聞此言。與眾大臣議。彼既云見祖大樂即降。何妨使之相見。待彼降後。再奏未遲也。遂令來人至祖大樂處。與之相見。次日又遣三人來云。祖總兵傳問諸王。可許與盟誓、及有用印文移否。如有之。即歸順矣。諸王怒云。爾等所言、果祖大壽之言乎。抑爾等私言乎。昨云見祖大樂即降今又何出此妄言耶。我圍困此城。旦夕可取。有何顧慮。乃與爾盟誓乎。爾欲降則降。不降則已。誰強爾降也。遂將來使二人羈留。止遣一人回。其人方回至城。祖大壽即遣中軍官高勳、副將祖澤遠、復來云。昨乃小人妄言。非祖總兵之言也。望乞寬恕。王若令今日來。則今日至。令明日來。則明日至。惟王命是聽。言畢而返。次早。祖大壽率眾官、詣軍前叩首降。即日眾固山額真率兵入城。駐於城上。守護城門。諸王議取寧遠之策。當乘大壽妻子尚未撤回、總兵吳三桂尚未更替之時。亟當前往。遂定議。至錦州城內兵、約有七千人。與祖大壽同心歸順之官屬兵丁、悉留之勿殺。其餘或誅與否。謹候上裁。是夜。上遂遣內院學士額色黑、筆帖式石圖、祁徹白等。往諭曰。總兵祖大壽部下之人。悉與留養。其他悉誅之。凡在錦州蒙古人。俱察出處斬。杏山塔山兩處。可令祖大壽人往說之降。并可令大壽所屬、有父母兄弟之人、極誠實者。前往寧遠。俟有回信來奏。其多羅武英郡王之軍。可於塔山西、連山大路、嚴行堵截。一至海邊。一至山下立軍營。松山所獲祖大樂、祖大成、帶往錦州。與伊妻子完聚。令與大壽同處。祖大名、先曾有旨誅之。若已經正法則已。若爾等至時、尚未正法。從寬宥釋。亦令依於大壽處。爾等可急往。恐祖大壽屬下之人、有誤被誅戮者。速行宣諭 
  55. 《太宗文皇帝實錄》. 1655. ○辛亥。內秘書院學士額色黑、以攻克塔山捷音奏報。和碩鄭親王濟爾哈朗、多羅睿郡王多爾袞、多羅肅郡王豪格、欽遵上諭。率右翼將士、及兩翼護軍漢軍。載火器至塔山城。列紅衣礮於西。初八日進攻。至初九日午時。城崩二十餘丈。我兵由崩處先登。遂克其城。城內三營官屬兵丁共七千。盡殲之。俘獲城內物數。俟後開報奏聞。上命於篤恭殿、集眾官宣捷 
  56. 《太宗文皇帝實錄》. 1655. ○丁卯。命學士額色黑、占代、誇代、達奇等。往諭和碩鄭親王濟爾哈朗、多羅睿郡王多爾袞、多羅饒餘貝勒阿巴泰等曰。杏山歸順官屬兵丁。可俱送來京。其餘士民。從牛莊路遣發、安插蓋州。先曾諭撥每牛彔騎兵十八人、駐防錦州杏山。今止撥滿洲蒙古漢軍每牛彔兵十人。滿洲固山額真四員。蒙古固山額真四員。如彼處無固山額真者。以梅勒章京代之。隨阿巴泰駐守錦州。其餘每牛彔八人、護送來京戶口。及往蓋州居住之人。量其多寡。分撥將士。慎謹護送。松山塔山二城。如拆毀既平。可令外藩蒙古兵還。如未畢。待畢時遣之。又杏山城內兵器諸物。運至錦州。杏山城亦令拆毀。一切事宜。俟料理既畢。和碩鄭親王濟爾哈朗、多羅睿郡王多爾袞等率護軍回京 
  57. 박민수 (2018년 6월). “홍타이지 시기(1627-1643) 만주의 對 중국 전략”. 《군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07). 
  58. 蕭一山 (1986). 《清代通史》. 中華書局. 
  59. 《太宗文皇帝實錄》. 1655. ○辛亥。命多羅饒餘貝勒阿巴泰、為奉命大將軍。與內大臣圖爾格、統領將士。往征明國。召阿巴泰、圖爾格、竝滿洲蒙古漢軍各固山額真、護軍統領等、入清寧宮。諭曰。朕命爾等統領大軍、往伐明國者。非好為黷武窮兵也。朕不忍使生靈罹害。屢欲與明修好。而彼國君臣。執迷不從。朕是以命爾等往征。爾等一入明境。遇老弱閒散之人。毋任意妄殺。不應作俘之人。毋奪其衣服。毋離人妻子。毋焚燬財物。毋暴殄糧穀。曩者兵臨山東時。有因索取財物。而嚴刑拷逼者。非仁義之師也。此朕所深惡。爾等當切以為戒。傳諭各旗知悉。至於錦州新附蒙古索倫等、令其從軍役使。伊等如有所俘獲。勿得搜取。令其攜歸。其力不能攜歸者。仍助之。儻爾等令之空返。或以貧苦來訴。朕必將爾等所有以與之 
  60. 《太宗文皇帝實錄》. 1655. ○癸卯。奉命大將軍多羅饒餘貝勒阿巴泰、內大臣圖爾格等。遣學士額色黑、甲喇章京穆成格、穆福、侍衛索泰等。以克城敗敵、竝籍俘獲數目、自軍營奏報。臣等蒙天眷佑。皇上德威。率大軍直抵明境。至兗州府。莫能拒守。將明國魯王、及樂陵、陽信、東原、安邱、滋陽諸王。及管理府事宗室等官數千人。盡皆誅戮。計攻克三府、十八州、六十七縣、共八十八城。歸順者六城。擊敗敵兵、三十九處。所獲黃金、萬有二千二百五十兩。白金、二百二十萬五千二百七十兩有奇。珍珠、四千四百四十兩。各色緞、共五萬二千二百三十疋。緞衣、裘衣、萬有三千八百四十領。貂狐豹虎等皮。五百有奇。整角、及角面、千有一百六十副。俘獲人民、三十六萬九千名口。駝、馬、騾、牛、驢、羊、共三十二萬一千有奇。外有發窖所得銀兩。剖為三分。以一分給賞將士。其眾兵私獲財物、莫可算數。謹此奏聞 
  61. 청사고249. 崇德八年,考績,進三等甲喇章京。太宗崩后五日,睿親王多爾衮詣三官廟,召索尼議册立。索尼曰:「先帝有皇子在,必立其一。他非所知也。」是夕,巴牙喇纛章京圖賴詣索尼,告以定立皇子。黎明,兩黄旗大臣盟於大清門,令兩旗巴牙喇兵張弓挾矢,環立宫殿,率以詣崇政殿。諸王大臣列坐東西廡,索尼及巴圖魯鄂拜首言立皇子,睿親王令暫退。英親王阿濟格、豫親王多鐸勸睿親王即帝位,睿親王猶豫未允,豫親王曰:「若不允,當立我。我名在太祖遺詔。」睿親王曰:「肅親王亦有名,不獨王也。」豫親王又曰:「不立我,論长當立禮親王。」禮親王曰:「睿親王若允,我國之福。否則當立皇子。我老矣,能勝此耶?」乃定議奉世祖即位。索尼與譚泰、圖賴、鞏阿岱、錫翰、鄂拜盟於三官廟,誓輔幼主,六人如一體。都統何洛會等訐告肅親王豪格,王坐廢,詔褒索尼不附王,賜鞍馬。順治元年,從睿親王入關,定京師。 
  62. 세자시강원(?). 《심양장계》. 
  63. 청사고218. 八年,太宗崩,王與諸王、貝勒、大臣奉世祖即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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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청 태조
중국의 국가 원수
1626년 ~ 1643년
후임
청 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