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만
황재만(黃在萬, 1953년 1월 24일 ~ 2010년 5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며, 포지션은 왼쪽 풀백 및 미드필더였다. 선수 시절 롱스로인의 대명사로 알려져있으며,[1] 강력한 킥을 바탕으로 한 중거리슛으로 여러 차례 득점을 만들기도 했다.[2] 또한 강력한 대인마크를 이용한 단단한 수비력을 선보였으며, 황혼기 이후로는 클럽과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으며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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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 ||||||
로마자 표기 | Hwang Jae-Man | |||||
출생일 | 1953년 1월 24일 | |||||
출생지 | 대한민국 경기도 화성군 | |||||
사망일 | 2010년 5월 28일 | (57세)|||||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키 | 172cm | |||||
포지션 | 감독 (과거 수비수 / 미드필더) | |||||
청소년 구단 기록 | ||||||
1971-1974 |
수원북중학교 중동중학교 중동고등학교 고려대학교 | |||||
구단 기록* | ||||||
연도 | 구단 | 출전 (득점) | ||||
1975-1976 1977-1979 1980-1984 |
서울신탁은행 축구단 공군 축구단 할렐루야 축구단 |
1 (0) | ||||
국가대표팀 기록‡ | ||||||
1971-1972 1972-1979 |
대한민국 U-20 대한민국 |
98 (2) | ||||
지도자 기록 | ||||||
1993 |
할렐루야 축구단 (코치) 할렐루야 축구단 한국실업축구연맹 (이사) | |||||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또한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 국가대표팀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임. |
선수 경력
편집클럽
편집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오목천리(현재의 경기도 수원시 오목천동) 출신으로[3][4] 수원북중학교, 중동중학교, 중동고등학교를 거쳤으며,[5] 1971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다.[6] 이후 1974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여러 차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해 팀의 대회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고,[7][8][9] 활약을 인정받아 대회 감투상을 수상하였다.[10] 그 뒤 1975년 한국신탁은행 축구단에 입단하였고,[11] 1976년 팀이 서울은행 축구단과 합병해 서울신탁은행 축구단으로 개편된 이후 팀의 원년 멤버가 되었다.[12] 또한 당초에는 1975년 육군 축구단에 입대할 예정이었으나,[13] 예정이 변경되어 1976년 공군 축구단에 입대하게 되었다.[14]
이후 1978년 세미프로 팀으로 창단 준비 중이던 현대 축구단으로의 이적설이 나왔으나 무산되었으며,[15] 1979년 군실업 올스타의 일원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였다.[16] 또한 같은 해 열린 고연 OB 올스타전에 출전했으며,[17][18] 그 해 공군에서 제대해 서울신탁은행으로 복귀하였다. 그 뒤 1980년 새로 창단 준비중인 할렐루야 축구단에 입단하기로 합의했으며,[19] 1979년 9월 23일 할렐루야의 일원으로 브라질의 비토리아 FC와의 자선 경기에 출전해 팀의 3-0 승리에 일조하였다.[20] 이후 1980년 할렐루야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자선경기에 나섰고, 패널티킥 기회를 얻었으나 실축해 팀의 0-2 패배를 막지 못했다.[21]
그 뒤 북미 사커 리그로의 이적설이 제기되었으나 실제 이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22] 1980년 12월 20일 할렐루야 축구단이 정식으로 창단하자 원년 멤버로 합류하였다.[23][24] 이후 1981년 3월 28일 아메리카누 FC와 창단 첫 데뷔전에서 활약하며 팀의 2-1 승리에 기여했으며,[25] 1982년 4월 22일 대한민국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 뛰었으나 팀은 1-2로 패배했다.[26][27] 그 뒤 팀의 주장이던 이영무가 팀을 무단으로 이탈하자 그 뒤를 이어서 주장을 이어받았으며,[28] 6월 6일 오페라리우 FC와의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경기에서 후반 종료 직전 롱스로인으로 오석재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극적인 무승부를 이루었다.[29] 대회 4강에서 다시 한 번 대한민국 국가대표팀과 맞붙었으나 또다시 1-2로 패해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으며,[30][31] 그 해 11월 4일 팀의 트레이너로 보직을 변경하였다.[32]
이후 1983년 수퍼리그가 창설되자 할렐루야도 참가하였으나 선수 부족 문제로 인해 당시 코치였던 황재만이 후보 선수로 등록되었고,[33] 그 해 11월 열린 올스타전에서 프로팀 코치를 맡았다.[34] 1984년에도 마찬가지로 팀의 부상자가 늘어남에 따라 코치 신분임에도 후보 선수로 등록되었고,[35] 시즌 도중 1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36]
국가대표팀
편집1971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대한민국 U-20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며,[37]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팀의 마지막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며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38] 이후 1972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다시 출전했으며, 좋은 모습을 보이며 팀의 2회 연속 준우승에 기여하였다.[39][40]
그 뒤 1972년 AFC 아시안컵에도 선발되었으며,[41] 5월 7일 이라크와의 그룹 결정전에 출전하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정식으로 데뷔했으나, 황재만은 승부차기에서 실축하였고 팀은 승부차기 결과 2-4로 패배하였다.[42] 하지만 결승까지 주전 선수로 활약해 팀의 준우승에 일조했으며, 같은 해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도 선발되어 핵심 선수로 좋은 모습을 보이며 팀의 우승에 공헌하였다.[43] 또한 같은 해 열린 제1회 한일 정기전 및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에도 참가했으나,[44][45] 두 대회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국가대표팀 또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46][47]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친선경기에서 다시 기회를 얻었으며,[48] 킹스컵에도 출전해 대표팀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49][50] 이러한 활약으로 1972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51]
이후 1973년 6월 개최된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 당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으나,[52] 좋지 못한 활약을 보였고 국가대표팀 또한 우승에 실패하였다.[53] 결국 그 해 7월 국가대표팀 선수단 개편으로 국가대표팀 선발 명단에서 제외되었고,[54] 한동안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 뒤 1974년 아시안 게임 및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를 대비해 소집된 상비군 명단에 포함되었으며,[55] 자체 평가전에서 결승골을 득점하는 등 좋은 활약을 선보이며 최종 명단에 합류해 국가대표팀에 복귀하였다.[56][57] 같은 해 열린 미들섹스 원더러스 AFC와의 평가전에서 차범근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58] 쿠웨이트와의 아시안 게임 조별 라운드 3차전에 출전해 부진한 활약으로 팀의 대패에 일부분을 담당하며 추가적인 기회를 얻지 못했다.[59] 얼마 뒤 열린 제3회 한일 정기전에는 고연전 출전으로 불참하였다.[60] 같은 해 개최된 킹스컵에 참가하였고,[61] 말레이시아와의 준결승전에서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고 태국과의 결승전에서 롱스로인으로 팀의 결승골에 관여해 팀의 2연속 우승에 기여하였다.[62][63] 국가대표팀 및 소속팀에서의 활약으로 1974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에 재차 선정되었다.[64]
이후 1975년에는 1976년 AFC 아시안컵 예선에 출전할 상비군 명단에 포함되었으며,[65] 베트남 공화국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성공시키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66] 같은 해 열린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과의 2차 평가전에서 팀의 동점골에 관여하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고,[67] 3번에 걸친 평가전 이후 좋은 평가를 받았다.[68] 그 해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연달아 참가하며 국가대표팀의 2개 대회 우승을 견인했으며,[69][70]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우승 이후 다른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여받았다.[71] 또한 킹스컵 및 1976년 하계 올림픽 예선에도 출전했으며,[72] 킹스컵에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팀의 우승에 일조했다.[73] 이러한 활약으로 1975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통산 3회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74]
그 뒤 1976년 호마 FC와의 평가전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으며,[75] 이어 개최된 육군 축구단과의 평가전에서도 선제골을 득점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76] 하지만 이 경기에서 코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고,[77] 직후 열린 중화 타이베이와의 1976년 하계 올림픽 예선 경기에 불참하였다.[78] 같은 해 있었던 맨체스터 시티 FC와의 2차 평가전에 출전했으며,[79] 직후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하였다.[80] 또한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에 화랑팀 소속으로 포함되었고,[81] 인도와의 경기에서 이영무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대회 우승에 공헌하였다.[82] 그 해 열린 제5회 한일 정기전에 나와 결승골을 득점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으며,[83][84] 킹스컵에도 출전해 싱가포르와의 경기에서 팀의 결승골에 관여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국가대표팀은 결승 진출에 실패하였다.[85] 이러한 활약으로 1976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통산 4회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86]
이후 1977년에는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명단에 포함되었으며,[87] 이스라엘과의 홈 & 원정 1라운드 경기에서 안정적인 활약을 선보였다.[88][89] 또한 일본과의 홈 & 원정 1라운드 경기 및 이란과의 최종 예선 홈 경기 등에 출전했으나,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원정 경기를 앞두고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출전하지 못했고 팀도 패했다.[90][91] 곧이어 열린 쿠웨이트와의 홈 경기에서도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으며,[92] 부상이 완치된 뒤 이란과의 원정 경기에 출전했으나 수비 상황에서 오심 논란에 휘말리며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93]
그 뒤 1978년에는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해 국가대표팀의 우승에 기여했으며,[94]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에도 출전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준결승 이후부터는 출전하지 못했다.[95] 또한 스포르팅 크리스탈과의 평가전에 나와 패널티킥 선제골을 득점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으며,[96] 1978년 아시안 게임 최종 명단에 포함되어 국가대표팀의 우승을 이끌었다.[97] 이러한 활약으로 1978년 대한축구협회 시상식에서 통산 5회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98]
이후 1979년 제7회 한일 정기전에 출전했으나, 팀은 1-2로 패했다.[99] 얼마 뒤 발표된 국가대표팀 예비명단에 포함되었으나,[100] 스포르팅 크리스탈과의 평가전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국가대표 B팀으로 이동하였다.[101][102] 이후에는 국가대표 B팀에서 활동하며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에 주장으로 참가하였고,[103][104] 대표팀의 공동 우승에 일조하였다.[105] 또한 멕시코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에 나섰고,[106][107]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 김익형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나 팀은 결선 진출에 실패하였다.[108]
지도자 경력
편집1984년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할렐루야 축구단의 코치로 활동했으며, 1988년 팀의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을 견인하였다.[109] 이후 팀의 감독이 되어 1991년 팀의 전국체육대회 및 군-실업 축구대회 2관왕을 달성했으며, 군-실업 축구대회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다.[110] 그 뒤 1992년 팀의 군-실업 축구대회 2연패를 이끌었으며, 다시 한 번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다.[111] 이후 1993년 한국실업축구연맹의 이사로 선임되었고,[112] 같은 해 팀에 전국실업축구연맹전 춘계대회 우승을 안겼으며, 지도자 감독상을 수상하였다.[113]
그 뒤 1993년 신현호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주었으며, 황재만 본인은 총감독이 되었다.[114] 이후 1998년 외환 위기로 인해 팀이 해체되자 축구계를 떠났으며, 2004년부터 한국 휠체어 럭비 협회의 회장을 맡았다.[115]
투병 및 사망
편집1986년 멕시코에 다녀온 이후 신경계통 질환인 척수염을 앓았으며,[116] 이후에는 지도자 생활과 병행하며 서울특별시 신촌동의 세브란스병원에서 재활에 매진하였다. 2000년 고려대학교 고우체육회 주최로 열린 '2000 고대 체육인의 날'에서 황재만을 위해 모금 운동을 벌였으며,[117] 2006년 중동중학교 및 중동고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이해 총동문회에서 황재만에게 '의지의 중동인상'을 수여하였다.[118] 또한 2008년에는 조동현, 박병철 등 1971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축구 선수들의 모임인 '71 동심회'에서 회비를 모아 성금을 전달하였다.[119]
2010년 7월 28일 척수신경마비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으며, 유해는 경기도 화성시 병점의 선영에 안장되었다.[120]
기타
편집1976년 3월 27일 일본과의 1976년 하계 올림픽 축구 예선 경기에서 만 23세 65일의 나이로 A매치 50회를 달성해 역대 2위를 기록하였다.[121]
1983년 3월 30일 재일교포 출신의 배우자와 결혼식을 올렸으며,[122] 차남인 황대균 또한 축구 선수이다.
2003년 베스트일레븐 창간 33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한국축구 100년을 빛낸 55인' 중 '70년대 베스트11'에 포함되었다.[123]
차범근과는 고향이 인접하고 연령이 비슷하며 고려대학교, 서울신탁은행 축구단, 공군 축구단,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인연을 쌓았으며, 차범근이 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수행할 당시 당시 황재만을 떠올렸다고 밝히기도 했다.[124]
선수 기록
편집클럽
편집- 1971년 ~ 1974년: 고려대학교
- 1975년 ~ 1976년: 서울신탁은행 축구단
- 1977년 ~ 1979년: 공군 축구단
- 1980년 ~ 1984년: 할렐루야 축구단
국가대표팀
편집- 1971년
-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 (U-20)
- 1972년
-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 (U-20)
- 1972년 AFC 아시안컵 국가대표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제1회 한일 정기전 국가대표
-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국가대표
- 킹스컵 국가대표
- 1973년
-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 국가대표
- 1974년
-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국가대표
- 1974년 아시안 게임 축구 국가대표
- 킹스컵 국가대표
- 1975년
- 1976년 AFC 아시안컵 예선 국가대표
-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국가대표
- 자카르타 창립 기념대회 국가대표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제4회 한일 정기전 국가대표
- 킹스컵 국가대표
- 1976년
- 1976년 하계 올림픽 축구 예선 국가대표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제5회 한일 정기전 국가대표
- 킹스컵 국가대표
- 1977년
- 1978년 FIFA 월드컵 예선 국가대표
- 제6회 한일 정기전 국가대표
- 1978년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1978년 아시안 게임 축구 국가대표
- 1980년 AFC 아시안컵 예선 국가대표
- 1979년
- 제7회 한일 정기전 국가대표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B팀)
- 유니버시아드 국가대표 (B팀)
- 국가대표팀 통산 기록: 98경기 2골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편집- 득점과 결과 리스트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득점을 먼저 기록
# | 일시 | 장소 | 상대 국가 | 득점 | 결과 | 경기 형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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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975년 3월 19일 | 태국, 방콕 | 베트남 공화국 | 1-0 | 1-0 | 1976년 AFC 아시안컵 예선 |
2 | 1976년 12월 4일 | 일본, 도쿄도 | 일본 | 2-1 | 2-1 | 제5회 한일 정기전 |
수상 경력
편집클럽
편집국가대표팀
편집- 아시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 2회: 1971년, 1972년
- AFC 아시안컵 준우승 1회: 1972년
- 아시안 게임 축구 우승 1회: 1978년
- 메르데카 국제축구대회 우승 4회: 1972년, 1975년, 1978년, 1979년 (B팀)
- 박대통령컵 쟁탈 국제축구대회 우승 4회: 1974년, 1975년, 1976년, 1978년
- 킹스컵 우승 2회: 1974년, 1975년
감독
편집- 전국축구선수권대회
- 준우승 1회: 1991년
-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 우승 1회: 1988년 (코치)
- 전국실업축구연맹전
- 우승 2회: 1990년 추계, 1993년 춘계
- 준우승 5회: 1986년 추계 (코치), 1987년 춘계 (코치), 1991년 춘계, 1992년 춘계, 1993년 추계
- 전국체육대회
- 우승 2회: 1991년, 1993년
- 준우승 1회: 1987년 (코치)
- 군-실업 축구대회
- 우승 2회: 1991년, 1992년
개인
편집각주
편집- ↑ “大統領杯(대통령배)축구 二次戰(이차전)첫날 大學(대학)팀,軍(군)팀 모두完破(완파)”. 동아일보. 1973년 7월 11일.
- ↑ “高大(고대),海軍(해군)꺾고 決勝(결승)토너 진출”. 경향신문. 1974년 3월 6일.
- ↑ “차붐의 신화 ⑤”. 조이뉴스24. 2005년 9월 15일.
- ↑ ““휠체어 위 작아진 몸, 희망을 키워가요””. 문화일보. 2005년 11월 12일.
- ↑ “頂上(정상) 을향한 21強豪(강호)의 격돌 대통령 金盃(김배)는 어디로 (上(상))”. 경향신문. 1970년 5월 21일.
- ↑ “高(고)·延大(연대)체육 特技者(특기자)각각30명씩 스카웃”. 동아일보. 1971년 2월 2일.
- ↑ “전국蹴球(축구)선수권 高大(고대),自保(자보) 꺾어 3대0”. 동아일보. 1974년 11월 14일.
- ↑ “전국蹴球(축구) 準決(준결)리그 大學勢(대학세) 단연頭角(두각)”. 경향신문. 1974년 11월 27일.
- ↑ “全國(전국)축구選手權(선수권) 高(고)·延大(연대) 決勝(결승)서 숙명의 再對決(재대결)”. 동아일보. 1974년 11월 29일.
- ↑ “핸들링PK宣言(선언)에 不服退場(불복퇴장) 延世棄權敗高大(연세기권패고대)우승”. 동아일보. 1974년 12월 2일.
- ↑ “올蹴球界(축구계) 스카우트現況(현황) 高校(고교)노른자위는 大學(대학)에 實業(실업)은 大學卒業(대학졸업)선수를”. 동아일보. 1974년 12월 5일.
- ↑ “「서울託銀蹴球(탁은축구)」發足(발족)”. 동아일보. 1976년 8월 31일.
- ↑ “陸軍(육군)축구팀,選手(선수) 크게交朁(교체) 黄在萬(황재만)등 스카웃”. 경향신문. 1975년 11월 25일.
- ↑ “黃在萬選手(황재만선수) 空軍(공군)에入隊(입대)”. 동아일보. 1976년 11월 8일.
- ↑ “"1億(억)들여 車範根(차범근)을 잡아라"”. 경향신문. 1976년 11월 16일.
- ↑ “軍實業(군실업)·金融團(금융단) 올스타蹴球(축구) 選手(선수)32명을 선발”. 경향신문. 1979년 4월 25일.
- ↑ “延(연)·高(고)OB올스타戰(전) 앞으로 3일 永遠(영원)한맞수 축구半世紀(반세기) 결산”. 경향신문. 1979년 6월 14일.
- ↑ “친선축구 고대올스타 연세꺾어”. 동아일보. 1979년 6월 18일.
- ↑ “국내 최초의「축구宣教(선교)」”. 동아일보. 1979년 9월 15일.
- ↑ “할렐루야 축구팀 브라질 자선競技(경기)”. 경향신문. 1979년 9월 22일.
- ↑ “韓獨(한독)축구 告別戰(고별전) 프랑크푸르트 4戰全勝(전전승) 할렐루야도 敗北(패배)2대0”. 경향신문. 1980년 6월 18일.
- ↑ “朴商寅(박상인),北美(북미)축구 진출교섭”. 동아일보. 1980년 6월 21일.
- ↑ “創團(창단)앞둔 프로蹴球(축구)「할렐루야」猛訓(맹훈)”. 경향신문. 1980년 12월 18일.
- ↑ “할렐루야팀 創團(창단)”. 동아일보. 1980년 12월 20일.
- ↑ “할렐루야,創團(창단)1百餘日(백여일)만에 데뷔戰(전)”. 경향신문. 1981년 3월 26일.
- ↑ “아마축구頂上(정상)과 프로의 첫對決(대결) 國家(국가)재표·할렐루야 내일한판”. 동아일보. 1982년 4월 21일.
- ↑ “킹스컵蹴球(축구)파견 환송評價戰(평가전) 「代表(대표)」는 역시 강했다”. 경향신문. 1982년 4월 23일.
- ↑ “할렐루야 프로축구 陣痛(진통)계속 올競技(경기) 모두취소”. 경향신문. 1982년 5월 4일.
- ↑ “치열한 攻防戰(공방전)…극적 無勝負(무승부)”. 경향신문. 1982년 6월 7일.
- ↑ “한국축구 最强者(최강자)는 누구냐 代表(대표)팀·할렐루야 必死(필사)의 한판”. 동아일보. 1982년 6월 15일.
- ↑ “대통령杯(배) 국제축구”. 동아일보. 1982년 6월 17일.
- ↑ “吳錫載(오석재)등 6명補强(보강) 프로蹴球(축구) 할렐루야”. 경향신문. 1982년 11월 4일.
- ↑ “축구슈퍼리그 돛폭에 바람이 실렸다 競技(경기)도 관중도 수준급”. 동아일보. 1983년 7월 4일.
- ↑ “축구 슈퍼 올스타전 來(내)4,5일 서울運(운)서”. 동아일보. 1983년 10월 25일.
- ↑ “할렐루야「구원의 使徒(사도)」는 어디에…치욕에 몸서리 친 90分(분)”. 동아일보. 1984년 6월 18일.
- ↑ “출범 2년 슈퍼리그 선수가 없다”. 매일경제. 1984년 10월 2일.
- ↑ “아시아青少年(청소년) 蹴球(축구)출전 代表選手(대표선수) 18명선발”. 동아일보. 1971년 3월 12일.
- ↑ “韓國(한국),日本(일본)꺾어 決勝(결승)진출亞州(아주)청소년蹴球(축구)”. 동아일보. 1971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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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 靑少年蹴球(청소년축구)대회 韓國(한국),이스라엘과 決勝(결승)”. 경향신문. 1972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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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亞州(아주)축구組編成戰(조편성전) 韓國(한국),이락에 惜敗(석패) 4對(대)2”. 동아일보. 1972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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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우수 卞鎬瑛(변호영)선정 大韓(대한)체육記者團(기자단)”. 동아일보. 1974년 12월 24일.
- ↑ “大學選手(대학선수)대폭起用(기용)”. 동아일보. 1975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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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台鎭(고태진) 前蹴協會長(전축협회장)등 25名(명)에勲章授與(훈장수여)”. 동아일보. 1975년 11월 18일.
- ↑ “올림픽예선·킹스컵축구 出戰(출전) 選手團(선수단) 25명出發(출발)”. 경향신문. 1975년 12월 12일.
- ↑ “버어마制壓(제압) 3連覇(연패) 킹스컵蹴球(축구)”. 동아일보. 1976년 1월 5일.
- ↑ “최우수 축구선수 金鎬坤(김호곤) 선정 體育記者團(체육기자단)”. 경향신문. 1976년 1월 28일.
- ↑ “韓(한)·이란축구 水中戰(수중전)서 불뿜은鬪志(투지)”. 경향신문. 1976년 2월 16일.
- ↑ “蹴球評價戰(축구평가전) 兩(양)날개活用(활용)…불붙은 슈우팅 4-0”. 동아일보. 1976년 3월 2일.
- ↑ “黃在萬(황재만) 選手重傷(선수중상)”. 동아일보. 1976년 3월 2일.
- ↑ “黃在萬(황재만) 출전못해 對中國(대중국) 2次戰(차전)에”. 경향신문. 1976년 3월 6일.
- ↑ “代表(대표)1陣(진), 맨체스터에完敗(완패)”. 동아일보. 1976년 6월 2일.
- ↑ “蹴球代表選手(축구대표선수)보강”. 동아일보. 1976년 7월 1일.
- ↑ “「朴大統領(박대통령)컵」蹴球(축구) 花郎(화랑)·忠武(충무)티임結團(결단)”. 동아일보. 1976년 9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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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日蹴球(한일축구)등 對備(대비) 常備軍(상비군)18名選拔(명선발)”. 동아일보. 1976년 11월 10일.
- ↑ “車範根(차범근)·朴商寅(박상인) 決定的(결정적)어시스트 許丁茂(허정무)·黃在萬(황재만) 殊勲(수훈)”. 동아일보. 1976년 12월 6일.
- ↑ “韓國(한국)티임,決選進出確實(결선진출확실) 킹스컵 蹴球(축구)”. 동아일보. 1976년 12월 18일.
- ↑ “76年最優秀選手(연최우수선수)에 蹴球崔鍾德(축구최종덕)을選定(선정) 體育記者團(체육기자단)”. 동아일보. 1977년 2월 8일.
- ↑ “워얼드컵蹴球(축구) 代表(대표)티임結團(결단) 12日海外訓鍊(일해외훈련)떠나”. 동아일보. 1977년 2월 22일.
- ↑ “個人技(개인기)·體力劣勢(체력렬세)를鬪志(투지)로 메워…「無勝負作戰(무승부작전)」성공”. 동아일보. 1977년 2월 28일.
- ↑ “월드컵蹴球(축구) 韓(한)·이戰(전) 詳報(상보) 終了(종료) 3분전 총알슛 2골炸裂(작렬)”. 경향신문. 1977년 3월 21일.
- ↑ “워얼드컵蹴球(축구) 本選進出(본선진출)의 最大關門(최대관문) 韓(한)·濠(호)1次戰(차전) 내일開幕(개막)”. 동아일보. 1977년 8월 26일.
- ↑ “體力(체력)달려 濠(호)에 졌다”. 동아일보. 1977년 8월 30일.
- ↑ “내일월드컵 鬪志(투지)·個人技(개인기)의 대결”. 경향신문. 1977년 10월 8일.
- ↑ “편파 심판으로「韓國(한국)의 勝利(승리)」무너뜨린 英主審(영주심) 後半(후반) 이란의2得點(득점) 모두 審判(심판)이 만들어준 祭物(제물)”. 경향신문. 1977년 11월 12일.
- ↑ “메盃(배) 蹴球(축구)선수단 오늘 壯途(장도)에”. 경향신문. 1978년 7월 8일.
- ↑ “花郎(화랑)은 모로코가 두렵다 朴(박)대통령컵蹴球(축구)대회 준결승 展望(전망)”. 경향신문. 1978년 9월 19일.
- ↑ “3차전 화랑,페루 3대1격파”. 동아일보. 1978년 10월 27일.
- ↑ “아시안게임 韓國選手團(한국선수단) 명단”. 경향신문. 1978년 11월 17일.
- ↑ “최우수선수 金在漢(김재한) 蹴球(축구)베스트11 선정 體育記者團(체육기자단)”. 경향신문. 1979년 1월 16일.
- ↑ “韓(한)·日(일)축구 花郎(화랑),日代表(일대표)에 2대1敗北(패배)”. 경향신문. 1979년 3월 5일.
- ↑ “축구대표 30명선발”. 동아일보. 1979년 4월 11일.
- ↑ “친선축구 고별전서 1대0 한국,페루에 고배”. 동아일보. 1979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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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재만과 좋은 친구들”. 중앙일보. 2008년 3월 18일.
- ↑ “70년대 대표팀 활동 황재만 씨' 지병으로 별세”. 대한축구협회. 2010년 7월 28일.
- ↑ “A매치 50경기 앞둔 손흥민, 80년대 이후 세 번째 어린 나이”. 스포탈코리아. 2016년 10월 5일.
- ↑ “축구선수 黃在萬(황재만)씨 30일 유선경양과結婚(결혼)”. 경향신문. 1983년 3월 29일.
- ↑ “축구팬 "설기현 가장 먼저 빅리그간다"”. 연합뉴스. 2003년 2월 28일.
- ↑ “`아이스버킷챌린지` 차범근 "원하면 끼얹어드려" 정몽규 축협회장 지목”. 이데일리. 2014년 8월 22일.
외부 링크
편집- 황재만 K리그 기록 – 한국프로축구연맹
- Club & Country 통계 (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