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제

백인제(白麟濟, 1899년 1월 28일[1] ~ ?[1])는 대한민국의 외과의사이며, 백병원의 설립자이다.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출신으로, 백붕제의 형이며, 백낙환, 백낙청백낙서는 백인제의 조카이다.

백인제
조선총독부의 외과 전문의관
임기 1923년 6월 8일 ~ 1927년 1월 29일
군주 요시히토
히로히토
섭정 히로히토(1921~1926)
총독 사이토 마코토
총리 가토 일본 총리
우치다 일본 총리
야마모토 일본 총리
기요우라 일본 총리
가토 일본 총리
와카쓰키 일본 총리 권한대행
와카쓰키 일본 총리
신상정보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생일 1899년 1월 28일(1899-01-28)
출생지 대한제국 평안북도 정주군 부호
사망일 ?
학력 도쿄 제국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경력 외과 의사 출신
정당 무소속
부모 백희행(부), 청주 한씨 부인(모)
형제 백용제(첫째 형)
백봉제(둘째 형)
백붕제(막내 남동생)
배우자 광주 이씨 부인(사별), 최경진(재혼)
자녀 2남 5녀
친인척 백낙환(친질)
백낙청(친질)

생애편집

평안북도 정주군 부호(鳧湖) 출신이다. 관서지방 최고의 명문가인 백경한, 백경해 집안의 증손으로 아버지 백희행오산학교 초대 교장인 백이행(白彛行)과 사촌간이다. 고조부 백경해(白慶楷)는 한성부 좌윤(오늘날의 서울시 부시장에 해당)을, 증조부 백종걸白宗杰은 병조참의와 우승지를 지냈다. 이처럼 백인제의 가문은 전통적인 문신 학자 자손이었다.[2] 백인제는 1912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3월에 졸업했다. 재학 4년 동안 수석 자리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2]

백인제는 1916년 관립 의학교육 기관인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2][3] 재학 중, 학교 당국의 민족차별과 일부 일본인 교수와 학생들의 오만함에, 더 나아가 식민지라는 현실에 울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2] 그래서 3학년 학기 말에 발생한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2] 백인제는 1919년 3월 1일 서울 중심가 시위 때 경찰에 체포되어 10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겪었다.[2] 그리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2] 조선총독부경성의학전문학교의 유화조치에 힘입어 1920년 4월에 4학년으로 복학했다.[2] 그러고는 1921년 3월 전 학년 수석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1][2][3] 그러나 수석 졸업에도 불구하고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졸업과 동시에 자동 부여되는 의사면허증을 받지 못했다.[2] 백인제는 총독부의원에서 2년을 부수로 근무하고 나면 의사면허를 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2] 조선총독부의 기만책이었다.[2]

백인제는 총독부의원 외과에 입국[1][2][3]했지만 의사면허가 없는 탓에 의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2] 어쩔 수 없이, 백인제는 의사라면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마취 일을 전담할 수밖에 없었다.[2] 그런데 마취 전문의가 없던 시절의 마취는 외과의사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는 백인제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다.[2] 덕분에 백인제는 2년 동안 뛰어난 마취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고, 훗날 외과의사로 대성할 수 있었던 데는 탁월한 마취 솜씨도 한 몫 단단히 했던 것이다.[2] 백인제는 또 부수 생활 2년 동안 의학연구에 정진했으며, 그 결과, 기리하라(桐原眞) 교수와 공저로 학계 데뷔 논문인 셈인 「일선인(日鮮人) 간에 있어서 혈액속별(血液屬別) 백분율의 차이 및 혈액속별 특유성의 유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조선의학호 잡지』제 40호(1922년 12월)에 발표했다.[2] 이 논문은 학문적 가치가 우수할 뿐만 아니라 일본인 교수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2]

마침내 백인제는 1923년 5월 의사면허증을 받았다.[2] 다음 달에는 조선총독부 의원에 임명되어 온전한 의사의 자격으로 외과에서 근무하게 되었다.[2] 이후 4년 동안 「실험적 구루병(佝僂病)의 연구」등 4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수준이 대단히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2] 1926년에는 일본인 의학 단체인 조선의학회로부터 장학금과 상장을 받았을 정도였다.[2] 1927년에는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외과 강사로 발탁되었다.[2]

백인제는 1928년 4월 도쿄제국대학에서 「실험적 구루병의 연구(전편): 실험적 흰쥐 구루병의 생성 및 그 일반적 재검색」라는 학위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2] 백인제는 30세에 한국인으로는 세 번째로 도쿄제국대학의 의학박사가 된 것으로, 이 무렵만 해도 의학박사는 매우 희귀한 존재여서 일간신문이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을 정도였다.[2] 백인제는 이어서 1928년 6월 1일자로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의 주임교수가 되었다.[2] 당시에는 한국인 학생이 관립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고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한국인 주임교수는 미생물학교실의 유일준 밖에 없었는데, 백인제는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던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의 주임교수가 된 것이다.[2]

1932년 총독부의 알선으로 6개월 동안 독일의학계를 시찰하고 귀국하였다가 1934년 다시 독일에 1년 간 유학하고 1936년 돌아왔다.[1] 1935년에 조선의사협회가 조직되자 간사로 선임되었다.[3] 1936년에 다시 1년 6개월간 프랑스·독일·미국에 유학하였으며, 194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를 사임하고 백외과(白外科: 현재 인제대학교 부속 백병원)를 서울 저동에서 개업하였다.[3] 1946년 12월 국립 서울대학교 창설과 함께 의과대학 외과 주임교수로 임명, 1947년 1월에 사임하였다.[3] 또, 백인제는 1946년 대한외과학회 초대회장, 1947년 대한의학협회 상임이사, 1948년 11월 대한외과학회 제3대 회장을 지냈다. 1946년 한국 최초, 민립공익법인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하였다.[3]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4] 1948년 3월 미 군정청 군정장관 윌리엄 F. 딘 소장으로부터 5·10 총선거를 관리하기 위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48년 5.10 총선 서울 중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이후 대한외과학회 회장 등을 맡기도 했고, 수선사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김태도가 지은 서재필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6·25전쟁 중인 1950년 7월 19일 사복을 착용한 공산당 정보원 2명에게 체포되어 동생인 백붕제와 함께 납북되었다.[1][3][5] 당시 백인제는 조선일보 감사역을 맡고 있었다.[5] 피랍 이후 조카인 백낙환이 백인제의 의업을 이어 백병원인제대학교를 설립하였다.[6]

가족 관계편집

백인제가 등장한 작품편집

역대 선거 결과편집

실시년도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1948년 총선 1대 국회의원 서울 중구 무소속 5,688표
8.69%
3위 낙선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백인제”. 2020년 9월 2일에 확인함. 
  2. “백인제”. 2020년 9월 2일에 확인함. 
  3. “백인제”. 2020년 9월 2일에 확인함. 
  4.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
  5. 정진석 (2006년 8월 14일). 《6.25전쟁 납북》. 도서출판 기파랑. 81쪽. ISBN 9788991965829. 
  6. 동생인 백붕제의 처가 일찍 죽어 할아버지(백희행) 손에서 자란 백낙환을 서울의 집으로 불러들여 중학교부터 공부시킨 백인제는 백낙환의 친아버지와 다름이 없었다. 백낙환은 백인제의 권유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진학해 사실 상 백인제의 의업을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