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 칸

몽골 제국의 건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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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한(몽골어: ᠴᠢᠩᠭᠢ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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Činggis Qan
, 몽골어로는 발음이 '칭기스 한 [ˈt͡ɕʰiŋɡɪs χaːɴ]' 한국 한자成吉思汗 성길사한,: 1162년 음력 4월 16일(5월 31일) ~ 1227년 음력 7월 20일(8월 25일)[1])은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이다. 묘호태조(太祖), 시호법천계운성무황제(法天啓運聖武皇帝)이다.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친(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 ᠲᠡᠮᠦᠵᠢᠨ, 한국 한자孛兒只斤鐵木眞 패아지근철목진)으로,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정복하고 몽골 제국을 성립시켜 몽골과 중국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정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몽골 원어민 발음은 영어발음 표기인 칸(khan)이 아니라 '한[한~]'이며 한강의 한과 같이 크다, 위대하라라는 뜻이다. 국립국어원원 외래어표기업에 따르면 동양인 명칭은 한자로 쓰는 것을 허용하므로 철목진(鐵木眞)이 맞지만, 사용하지 않고 영어권을 통해 들어온 발음인 징기스칸(khan)이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원어민 발음을 쓰는 규칙에 따라 칸[khan]이 아니라 현지 몽골인이 발음하는 [한]으로 써야 옳다. 국립국어원 문법 검토결과와 몽골인의 수정 요청에 의해 징기스한에서 징기스한으로 교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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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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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몽골 제국의 제1대 카안
재위 1206년 봄 ~ 1227년 8월 18일
대관식 1206년 봄 오논 강쿠릴타이
전임 (신설)
후임 툴루이 칸(감국)
우구데이 카안
카묵 몽골
재위 1189년 ~ 1206년
전임 쿠툴라 칸
후임 본인
보르지긴 키야트의 수장
재위 1171년 ~ 1189년
전임 예수게이 바투르
후임 본인(칸)
이름
보르지긴 테무친
묘호 태조(太祖)
칸호 칭기즈 칸(몽골어: ᠴᠢᠩᠭᠢᠰ
ᠬᠠᠨ
, 한국 한자成吉思汗 성길사한)
시호 법천계운성무황제(法天啓運聖武皇帝)
신상정보
출생일 1162년 음력 4월 16일(5월 31일)
출생지 몽골 울루스 헨티 산
사망일 1227년 음력 7월 20일(8월 25일)[1]
가문 보르지긴
부친 예수게이
모친 호엘룬
배우자 부르테 카툰
쿨란 카툰
예수이 카툰
쿤주 카툰
예수겐 카툰
이수칸 카툰
군주 카툰
아비카 카툰
그르베스 카툰
차가 카툰
모게 카툰
종교 텡그리교

생애편집

초기의 투쟁과정편집

 
오논 강, 테무진이 태어난 곳이다.

탄생편집

훗날 칭기즈 한으로 불리는 테무친은 1160년경 오논강 인근 델리운 볼락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아버지 예수게이와 어머니 호엘룬 사이에서 태어났다. 칭기즈한의 출생년도는 역사서마다 달라서 1162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1155년, 1163년, 116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현재 몽골에서 기념하는 칭기즈 한의 탄신일은 1162년 11월 14일이다.[2] 칭기즈 한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 예수게이가 테무진 우게가 이끄는 타타르족과의 전투를 승리했는데. 예수게이는 이 테무친 우게의 이름을 따서 태어난 아이에게 테무친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손에 고대 동방 사람들에게 생명을 상징하는 피 한 움큼을 쥐고 있는 등 여러가지 상서로운 징표들이 나타났다. 예수게이는 이를 길한 징조로 생각하여 패배한 타타르 군주, 의 이름을 따서 자식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3] 칭기즈 한의 이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으로는 ‘테무진’이 ‘대장장이’라는 뜻임을 근거로 당시 유목민 사회에서 쇠가 중요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4]

불행편집

그러나 칭기즈 칸의 유년시대는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9세 때 몽골 왕족 보르지긴족의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 사람들은 예수게이와 정적인 타이치우트 일가의 사주를 받아, 예수게이의 미망인 호엘룬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했다. 이로 인해 테무진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음식양고기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토그릴 완 한과의 협상편집

테무진과 칭기즈 칸의 가족은 비록 보르지긴족들의 배척을 받긴 했지만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 북방에 사는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가 그들에게 빼앗은 여자인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메르키트족은 테무진의 아내인 보르테를 납치했다.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족의 왕인 토그릴 완 한에게 사정을 말하여 보르테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당시 토그릴 완 한은 몽골 지역 안에서 가장 강대한 통치자였다. 테무진은 결혼기념물로 받은 잘의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답례로 토그릴 완 한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토그릴 완 한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쟈무카도 설득시켜 병력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테무진 일가의 궁핍과 이웃 부족의 왕이 제공한 대규모 병력은 상반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우나, 〈몽골 비사〉, (원조비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권력자로 부상편집

메르키트족 정복편집

강력한 동맹세력의 후원을 받은 테무진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메르키트족을 패배시켰다. 또한 장래에 자신을 반역할 기미가 있는 부족은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전략에 따라 그는 메르키트족에 이어 주르킨족의 귀족들도 패배시켰다. 왜냐하면 주르킨족의 귀족들은 테무진의 동맹세력이었으나, 테무진이 타타르족 공격에 나선 틈을 이용하여 그의 재산을 약탈하는 배반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부족의 귀족들을 사회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여 모두 처형했고, 평민들은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그는 배후에 적을 남겨놓는 경우가 절대 없었다. 수년 뒤 중국을 침공하기에 앞서 먼저 등 뒤에서 자신을 찌를 유목민 통치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부족의 지도자들과의 관계편집

메르키트족을 패배시킨 이래 테무진은 스텝(기마인들이 살던 지역) 지역의 최고 실력자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다. 부족의 지도자들은 테무진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12세기말에 이르자 그들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테무진을 몽골족의 한(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그 지도자들은 전쟁과 수렵에서 테무진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부족들과의 관계에서의 한계편집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조건을 보면 테무진에게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장수가 되어달라는 것이었지, 그들을 지배하는 군왕(君王)이 되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 실제로 일부 부족의 지도자는 그를 배신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테무진은 세력이 미약한 족장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금(金)나라의 황제는 테무진을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타타르족 정복편집

초원의길 동쪽의 강자였던 금나라는 유목민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여 금나라의 우위를 유지했는데, 초원의길 서쪽 강자인 그들의 동맹세력인 타타르족을 공격했고 테부진이 속한 소수부족에게 타타르 공격을 종용했다. 토그릴과 함께 테무진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타타르족의 배후를 공격했다. 테무진의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그는 강대한 타타르족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것이다.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패배시킨 뒤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곧 어른은 모두 죽이고, 단지 아이들만 살려두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커서 자신들의 신분을 잊고 몽골의 충실한 추종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금나라 황제는 토그릴에게 왕(王)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테무진에게는 그보다 낮은 칭호인 백호장 격인 '한'을 내렸다. 실제로 그 후 몇 년 동안 금은 테무진의 존재를 전혀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테무진은 스텝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나가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중국에게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숙청작업편집

테무진은 조직적으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친구이며 오랜 동료였던 자무카가 조직한 여러 세력의 연합은 그에게 패배를 거듭하여 그 존재가 없어졌고, 타타르족은 몰살당하고 서쪽으로 이주했다. 한편 초기부터 동맹을 유지했던 케레이트족의 왕 토그릴 및 옹 한 과의 동맹관계도 마침내 붕괴되었고 테무진은 그마저도 최고권력을 잡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제거하려 했다. 토그릴은 자무카의 설득과 아들의 야망과 질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무진에게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었다. 테무진은 토그릴을 패배시킨 뒤 케레이트족을 모두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테무진은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옛 정적·귀족 들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을 속셈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들의 군대를 빼앗아 자신의 군대로 삼고, 둘째, 몽골 지역의 분열을 가져온 소속 부족 안에서의 충성심을 분쇄하고, 셋째, 모든 유목민 부족을 통일하여 테무진의 가문에만 충성을 바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케레이트는 겨레라는 뜻이며, 이때 현재의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이주하여 현재도 케에리트족으로 살고있다.

나이만족 정복편집

서부지역의 나이만족 통치자는 몽골족의 강력한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무카와 합동으로 연합세력을 형성했으나, 완전히 패배했고 나이만 왕국은 없어졌다. 한편 변덕이 심한 자무카는 마지막 순간에 나이만족 왕을 배신했다. 이같은 전쟁은 1200년대 초반에 벌어졌고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1206년 오논 강변에서 열린 족장대회의에서 테무진은 칭기즈 한('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으로 추대되었다. 1206년 모든 스텝 지역을 통치하는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수천 명에 달하는 피복속 부족의 사람들과 그 지역을 자신의 친·인척, 동료들에게 나누어 관리하게 했다. 그리하여 기존 부족·가문의 조직된 형태를 바꾸어 봉건제도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몽골족의 통일편집

칭기즈한의 지도력편집

1206년은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 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몽골 자체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칭기즈 한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통일된 몽골족이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족은 많은 변천과정(봉건적 분열, 부족간의 세력다툼 재연, 영토병합)을 거쳐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정복 사업편집

칭기즈 한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西夏, 지금의 신장위구르~카자흐스탄)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연경을 함락시켰다. 그 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이후 후손들이 금나라와 송나라를 정복했지만, 베트남, 파키스탄 정벌에서는 여러차례 실패했다.

칭기즈 한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호라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그 전쟁은 칭기즈 한의 보호하에 있던 450명의 이슬람 대상단을 몰살시킨 오트라르 시(市)의 지사(知事) 이날축 때문에 촉발되었는데, 호라즘 제국의 샤(황제)는 이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호라즘 샤와의 전쟁은 조만간 벌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 전쟁을 연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서하 정복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가는 곳마다 도시를 불태웠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이라도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이라면 모두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한이 호라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이 광경을 본 칭기스한은 1223년 철수했고 1226~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戰役)에 나설 때까지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1227년 8월 18일에 죽었다.

 
칭기즈 한의 정복활동 및 정복지역.

무자비하고 잔인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칭기즈 한은 몽골에서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다. 이 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몽골 연맹을 통합하여, 흩어져 있던 부족들에게 동질감을 형성하였다. 손자 쿠빌라이 한이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하도록 초석을 놓은 칭기즈 한은 역설적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 전쟁의 처참함을 가져온 후에 가장 분쟁이 적은 평화의 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되고 있다.

서하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호라즘 제국을 포함한 수많은 정복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나라를 합병하였다. 칭기즈 한은 몽골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몇 세기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넓은 영토를 통치했던 몽골 제국은 몽골 제국에 의한 평화시대를 이루고, 인구학지정학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 몽골 제국의 영토는 현대의 몽골, 중국,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일부, 터키 일부를 포함하는 것이다.[5] 몽골군은 1260년 봄, 훌라구 한의 부관인 키트부카의 지휘 하에 시리아다마스커스를 출발하여 오늘날 팔레스타인가자 지구까지 진출했다.[6]


서하 정복편집

서하정복에서의 전술편집

몽골을 통일한 그는 정착문명 민족에 대한 몽골인 최초의 공격을 시작했다. 서하탕구트 유목민들이 감숙, 알라샨, 오르도스에 세운 나라로, 탕구트인들은 티베트 종족에 속했으며 종교는 라마교(티베트 불교)였고 중국의 영향으로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평원에서 전쟁하는 것에 능했던 몽골인들은 서하군과의 유격전에서는 연전 연승을 거두어 여러 차례(1205년-1207년, 1209년) 서하를 약탈하고 황폐화시켰다. 몽골의 총공격이 감행된 3차 침략 때 서하군은 전차 부대와 장창 부대를 앞세워 한순간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기동력의 부족으로 몽골군의 산개 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고, 결국 총사령관 외명령공이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며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다.

서하의 항복편집

몽골군은 수도인 영하를 포위했으나 공성전의 경험이 없던 몽골군은 이를 함락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황하의 물줄기를 바꾸어 영하를 공격하려는 시도도 하였으나 건설의 경험이 없던 그들에게는 댐 건설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고, 오히려 사고로 수십명이 익사하는 피해를 보기도 했다(몽골군은 수영을 할 줄 몰랐기에 특히 피해가 심했다). 한편 양종 이안전은 농성 기간 동안 금에 구원요청을 하기도 했으나 거절당했고, 물자 부족에도 시달렸다. 결국 1207년 양종 이안전은 몽골에의 복속을 약속하고 자신의 딸을 보내 칭기즈 한과 혼인시켰다. 이후 서하는 몽골의 명령을 받아 금나라와 오랜 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양국의 국력을 쇠퇴하게 하였다.

최후의 전쟁편집

1211년 이준욱이 반란을 일으켰고, 양종은 퇴위하였으며 그 해 사망했다. 양종 역시 전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군주로, 이러한 일이 몇년 안에 잇따라 발생하자 이전의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금과의 전쟁으로 국력은 급속히 쇠퇴해갔다. 게다가 1219년, 1226년에는 연달아 칭기즈한의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하여 칭기즈 한의 분노를 샀다. 칭기스 한이 호라즘 원정에 앞서 서하에 사신을 보내 출정을 명령하자 아샤 감부라는 탕구트 고관은 이렇게 답했다.

능력도 없으면서 한은 다 무엇이냐?[7]

이는 만약 칭기스 한에게 충분한 병력이 없다면 그는 최고 권력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8] 서하인들은 당시 중앙아시아의 최강국이었던 호라즘과의 전쟁에서 몽골군이 패배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다. 그러나 호라즘이 몽골의 침입에 무력하게 무너지면서 이러한 서하의 결정은 치명적인 실수임이 드러났다. 1224년, 칭기스 한은 서하의 반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서둘러 페샤와르를 떠나 몽골 고원으로 귀환했다.[9] 1225년 봄에 그는 몽골 고원에 도착했고, 여름에는 내정을 다지고,[10] 가을에는 카라 툰의 행궁에서 묵었다.[11] 1226년 가을, 칭기스 한은 서하에 대한 원정을 개시했다. 칭기스 한은 사고로 말에서 낙마한 뒤에 열병을 겪었고, 이에 아들들은 원정을 만류했다. 하지만 칭기스 한은 원정을 강행했다. 칭기스 한은 우선 서하에 사신을 파견해 서정에 동반하지 않고 그 자신을 모욕한 것을 책망하며 항복을 제의했으나, 서하는 이를 거부했다.[12] 칭기스 한은 서하의 도시 대부분을 점령했고, 1226년 여름에는 서하 군대를 격파했다.[13][14] 이후 몽골군은 서하의 수도 흥경을 포위했다. 그때 칭기스 한은 남하하여 육반산 남쪽에서 야영했다. 라시드 앗 딘은 이 남하의 목적은 칭기스 한이 남송 정복이었다고 적었다.[15] 그때 서하는 칭기스 한에게 사신을 보내 한 달 뒤 주민들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와 항복하겠다고 제의했고, 칭기스 한은 이를 허락했다.[16] 하지만 죽음을 앞둔 칭기스 한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절대로 곡을 하거나 애도하지 말라. 탕구트의 군주와 백성들이 기간에 맞추어 밖으로 나오면 그들을 모두 없애 버려라![17]

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1227년 8월 18일[18] 또는 8월 25일[19], 칭기스 한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서하의 수도 흥경은 함락되고 그 주민들은 학살당했다.[19]

잔혹한 보복편집

칭기즈 한은 대대적인 민족 학살을 명령하고 죽었는데, 이는 서하의 호라즘전 참가 거부가 칭기즈 한을 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2차 침략에 대한 저항이 끈질겼기 때문에 칭기즈 한의 섬태멸진 방식의 정복 전쟁에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중국 국영 CCTV의 보도에 의하면, 몽골군은 서하 사람들을 매우 철저하게 살육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서하인의 유전자를 가진 서하인의 후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20] 다만 이들 중 살아남은 서하인은 원나라가 세워졌을 때 지배계급인 색목인으로 편성되었다.

비판편집

정복지 나라의 국민이 이처럼 멸족당한 예는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로, 이는 칭기즈한과 몽골 제국이 얼마나 잔학한 정복자였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며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금나라 정복편집

금과의 관계편집

칭기즈 한이 젊은 시절 케레이트족(겨레족)와 함께 당시 강국이던 금나라의 마달갈(장종, 1189-1208)의 신하로서 타타르와 싸운 적이 있었다. 그는 장종의 신하였으며, 장종은 용병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중국식 칭호를 내려주었다. 그의 종증조부 안바가이 한금나라로 끌려가 목마에 못박혀 처참하게 죽은 것을 그는 한시도 잊지 않았다. 마달갈이 죽자 그의 후계자 영제(위소왕)은 칭기즈 한에게 군신의 예를 갖추고 조공을 늘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던 칭기즈 한은 무능한 통치자인 영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정복의 기회로 이용하였다.

웅구트 사람들의 협조편집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던 투르크계 웅구트인들이 몽골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산서성 북부의 길을 금을 위해 방어하고 있었다. 1211년 웅구트의 알라쿠쉬 티긴은 금의 정복을 위해 칭기즈 한에게 이 길을 열어주었다. 고구려의 후손으로 북경의 옛 주인이었으나 금에 의해 쫓겨난 거란인들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특히 거란인 출신 장수 석말명안은 몽골군을 도와 금 황제의 목마장을 습격해 수십만 마리의 군마를 탈취하여 몽골군의 병력을 대폭 증강하는데 기여했다. 1212년에는 거란의 옛 영토인 만주 서남부의 요하에서 야율유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인들은 몽골계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퉁구스계 언어를 사용하는 금의 여진족보다는 몽골과 더 친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야율유가는 몽골의 도움으로 요양을 빼앗고 요나라를 세웠으며 1220년 죽을 때까지 몽골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몽골과 함께 하였다. 이로써 금나라 서북의 웅구트와 동북의 거란은 몽골과 연합하게 되었다.

금나라 정복시작편집

칭기즈 한의 금나라 정복은 1211년에 시작되어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시대인 1234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몽골인들은 중국의 오래된 전투방법인 공성전을 다루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그들이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학살의 방법은 인구가 많은 중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또한 여진은 정주한 지 10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목민의 용맹함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1213년에는 선화를 정복하고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평양을 빼앗았다. 이 후 남으로 기수를 돌려 하북과 산둥 평원을 가로질러 하간과 제남을 함락시켰다. 칭기즈 한이 북경을 봉쇄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분란이 일어나 폐제호사호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호사호는 폐제의 조카인 오도보(선종)을 제위에 앉혔다. 당시 북경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잇따른 실패에다 물자 부족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칭기즈 한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북경 함락편집

이후 오도보는 바로 개봉으로 천도하였고, 칭기즈 한은 그것을 반격의 준비로 생각하고 다시 북경을 쳐서 마침내 성공적으로 함락해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초원의 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를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난감함에 의하여 방화와 살육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약탈은 몽골군의 규범인 야삭에서 금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북경에 들어가서 한달 동안이나 약탈을 계속 하였다. 이것은 10세기거란이나 12세기의 여진 사람들이 살육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지 않음으로써 이전 왕조를 계승하여 차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퇴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나라 정복의 마무리편집

금은 개봉 천도 이후 섬서성의 일부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몽골이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을 하고 있어 여력이 없을 때, 금은 다시 북경을 제외한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칭기즈 한의 신하 무칼리는 중국의 작전을 일임받고 지속적인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이제 전투는 중국식 공성전으로 완전히 변해 버려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칭기즈 한은 금나라 정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인 우구데이톨루이에 의하여 1234년에야 정복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호라즘 정복편집

1차 충돌편집

금나라 정복 기간 중 칭기즈 한은 중앙아시아에서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던 호라즘 제국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몽골과 호라즘의 1차 충돌은 1218년에 있었는데, 1218년 당시 호라즘은 알라 웃딘 무함마드 샤(황제)의 통치 하에 쇠퇴하고 있던 아바스 왕조를 몰아내고 서요를 속국으로 삼으며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몽골에서는 징기스한의 아내를 납치한 후 패퇴하여 명맥만 유지하던 메르키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한 몽골군은 남은 메르키트 병사들을 서요 국경지대까지 쫓아가 전멸시켰다. 이 때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서요를 방문한 무함마드 샤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소수의 몽골군을 우습게 본 샤가 몽골군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몽골군은 호라즘군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으나 치밀한 전략과 기마술로 호라즘군 절반을 죽이고 샤의 본진을 습격해 왕실 물품을 탈취했다.

외교결렬편집

이후 칭기즈 한은 나이만전 당시 도망쳤던 나이만 족장 타양 한의 아들 쿠츨루크가 서요의 국왕이 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장수 제베를 시켜 서요를 공격해 쿠츨루크를 죽이고 서요를 점령함으로써 호라즘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전쟁 중에 호라즘과 같은 강국과 전쟁을 치를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칭기즈 한은 이후 호라즘과 통상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호라즘 샤는 편지에 쓰여진 '그대를 사랑하는 내 아들처럼 대할 것'이라는 글귀에 분노했다. 호라즘의 샤는 통상에 응하였으나 통상을 위해 방문한 450명의 상단을 오트라르 성의 성주 이날축을 시켜 붙잡아 처형했고, 항의하러 온 사신단마저 처형했다.(일각에는 칭기즈 한의 전쟁을 위한 계략이 숨어있었다고도 한다). 이는 사실상 선전 포고나 다름이 없었으니 칭기즈 한은 이에 선전 포고를 하고, 1219년 20만의 병력으로 호라즘 침공을 개시했다.

내분전략편집

침공 전 칭기즈 한은 호라즘 제국 내의 불화와 반목을 이용하는 계락을 펼쳤다. 호라즘은 알라 웃딘의 통치기간 동안 넓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내정을 안정시킬 기간이 없어 나라 안 민중귀족, 왕족들 간의 파벌 갈등이 심했다. 칭기즈 한은 호라즘 내의 여러 장수나 귀족들이 몽골과 내통하고 있는 것처럼 한 편지를 샤에게 들어가도록 했고, 몇몇 귀족이나 왕족에게 복속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불안해진 샤는 수도를 사마르한트로 옮기고, 몽골군의 몇 배가 넘던 대군을 이리저리 갈라 배치하는 실책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는 몽골군의 호라즘 정복을 쉽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아바스 왕조의 정보제공편집

아바스 왕조에서는 호라즘을 중앙아시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몽골군에게 호라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호라즘 함락편집

호라즘을 침공한 몽골군은 오트라르 성을 함락하고 샤의 명에 따라 몽골 대상단을 처형한 성주 이날축의 눈과 귀에 끓는 은물을 부어 처형했다. 이후 몽골군은 호라즘의 전 수도 부하라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내고, 샤 알라 웃딘이 숨어있던 사마르한트까지 포위해 5일만에 함락했다. 샤 알라 웃딘은 함락 전 성에서 빠져나와 달아났고, 칭기즈 한은 도망친 샤를 잡기 위해 제베와 수부타이 두 장수에게 알라 웃딘 무함마드를 추격할 것을 명했다. 이에 쫓긴 알라 웃딘은 나라 안을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고, 그가 도중 머문 성이나 마을은 몽골군에게 철저히 짓밟혔으며, 알라 웃딘 무함마드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살던 마잔다란마저 함락당하고 황태후는 몽골군에게 농락당해야 했다.

샤의 죽음편집

결국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카스피해의 작은 으로 피신했다가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샤의 아들 잘랄 웃딘이 몽골군에 항전했으나 그가 지키던 우르겐치 성은 끝내 몽골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아내와 아들을 포함한 일가족을 잃었고, 군대를 모아 파르완에서 시기 쿠투쿠가 이끄는 몽골군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패배 소식을 접한 칭기즈 한이 직접 토벌에 나서자 끝내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너 도망쳤다가 1년 뒤 쿠르드 산지에서 그곳 주민에게 살해당했다.

호라즘 정복의 의미편집

한편 호라즘 정벌을 떠나기 전 칭기즈 한은 서하에 참전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는 이후 몽골이 서하를 재침략하여 멸망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호라즘 정벌은 몽골군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아랍, 카프카스, 러시아까지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라즘 정벌전 때 호라즘을 몰아내기 위해 몽골군을 이용하려던 아바스 왕조는 이후 그 몽골군에 의해 멸망했고 바그다드칼리프 역시 살해당했으며, 이집트맘루크 왕조를 제외한 모든 이슬람권이 몽골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호라즘의 어리석음편집

무함마드 샤가 몽골의 대상단을 살해한 것에 대해 많은 이슬람 역사가들은 이슬람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직접적인 요인으로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무함마드 샤는 뛰어난 통치술로 단기간에 넓은 땅을 차지했으나, 어리석게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에게 자신에게 칼리프 자리를 넘길 것을 요구해 이슬람 형제의 반감을 샀고, 안정되지 않은 국내 사정을 무시하고 몽골을 도발하여 화를 자초하는 무모한 모습을 보여 후세에 시대착오적인 어리석은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 서술편집

중국의 징기스한에 대한 서술과 행동편집

중국은 역사의 동북공정이니 서남공정을 통해 징기스한이 중국인이고, 중화민족이며 과거 몽골의 영광도 중국의 영광이고 묵시적으로 과거 몽골의 영토를 확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현재 중국에는 몽골인이 중국인의 일원으로 살고있고, 그 결과 이들 중국인의 선조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로 본다. 같은 논리로 청나라의 만주족도 그 선조를 신라/고려라고 정사에 적고있고 현재에도 연변 등에서 살고있는 조선족이 중국인이니, 조선족으로 간도에서 독립운동하며 서시를 썻던 윤동주도 중국인이고 고구려 광개토왕도 중국 지방정권의 왕이 된다. 나아가 동이족이 분명한 황제(아버지가 동이족)와 치우도 중국인의 시조로 여겨 세계에서 제일 큰 석상을 만들어 모시고 있다. 한족과 조선족 등 56개 소수민족을 통합하여 중화민족이란 개념을 만들어 냈는데 그 중국 논리에 따르면 우리도 조선족으로서 중화민족이다. 거의 동일 지역에서 단일 민족으로 사는 우리에게는 생경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확대민족 개념이 아니면 중국 역사를 가르칠 수 없는게 현실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구의 98%인 한족(사실 대부분 피가 섞었음)은 물론 소수민족도 중국 여권가진 중국인임이 분명하며, 한족이 황화 일부지역에서만 발원했다고 그 지역만을 중국이라고 할 수도 없고, 한족이 지배한 왕조는 한/송/명 등 일부 시기이므로 그 시기만 역사를 가르칠 수도 없다. 하은주진 5호16국 금원청은 동이족/북방족이 지배계층이므로 중국은 대부분 피지배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므로 중국이 그 국민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을 100%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어렵고 그들의 이런 행동을 제재할 마땅한 방법도 없다. 현재 외국에서 징기스한을 몽골인으로 크게 기념하면 중국정부에서 행사 취소를 요청하고있다.

징기스한 당시 간지편집

칭기즈 한 원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 8년 9년 10년
서력 1206년 1207년 1208년 1209년 1210년 1211년 1212년 1213년 1214년 1215년
육십간지
(六十干支)
병인(丙寅) 정묘(丁卯) 무진(戊辰) 기사(己巳) 경오(庚午) 신미(辛未) 임신(壬申) 계유(癸酉) 갑술(甲戌) 을해(乙亥)
칭기즈 한 11년 12년 13년 14년 15년 16년 17년 18년 19년 20년
서력 1216년 1217년 1218년 1219년 1220년 1221년 1222년 1223년 1224년 1225년
육십간지
(六十干支)
병자(丙子) 정축(丁丑) 무인(戊寅) 기묘(己卯) 경진(庚辰) 신사(辛巳) 임오(壬午) 계미(癸未) 갑신(甲申) 을유(乙酉)
칭기즈 한 21년 22년
서력 1226년 1227년
육십간지
(六十干支)
병술(丙戌) 정해(丁亥)

가족 관계편집

족보편집

 
 
 
 
 
 
 
 
 
 
 
 
 
 
 
 
 
 
16. 툼비나이 세트센
 
 
 
 
 
 
 
8. 보르지긴 카불
카불 칸
 
 
 
 
 
 
 
 
 
 
 
4. 보르지긴 바르탄
바가투르
 
 
 
 
 
 
 
 
 
 
 
 
 
 
2. 보르지긴 예수게이
바가투르
 
 
 
 
 
 
 
 
 
 
 
 
 
 
 
 
 
1. 보르지긴 테무친
칭기즈 카간
 
 
 
 
 
 
 
 
 
 
 
 
 
 
 
 
 
 
 
 
3. 올코노드 호엘룬
 
 
 
 
 
 
 
 
 
 
 
 
 
 
 
 

같이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 (1994). 《몽골비사》. 유원수 역주. 서울: 혜안. ISBN 89-85905-03-1 03910.
  • 김호동. (2010).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파주: 돌베개. ISBN 978-89-7199-331-6.
  • 라시드 앗 딘. (2003). 《칭기스 한 기》 (김호동, 역주). 서울: 사계절. ISBN 89-7196-984-9.
  • 르네 그루세. (1998).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서울: 사계절. (원서출판: 1939) ISBN 978-89-7196-506-1.
  • 스기야마 마사아키. (1999). 《몽골 세계제국》 (임대희, 김장구, 양영우, 옮김). 서울: 신서원. (원서출판: 1996). ISBN 89-7940-525-1.
  • Paul Ratchnevsky. (1991). Genghis Khan: His Life and Legacy. Blackwell Publishing. ISBN 0-631-16785-4.

각주편집

  1. 라츠네프스키에 따르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칭기스 칸이 1227년 8월에 죽었다는 것이다. 칭기스 칸의 정확한 사망일에 대해서 남겨진 사료들의 기록은 모두 다르다.” Paul Ratchnevsky, 1991, p. 142; 르네 그루세는 《원사》의 기록에 따라 칭기스 칸이 1227년 8월 25일에 죽었다고 적었다. 르네 그루세, 1998, p. 361;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칭기스 칸이 8월 17일에 죽었다고 적었다. 스기야마 마사아키, 1994, p. 52; 라시드 앗 딘은 칭기스 칸이 회력 624년 라마단, 즉 서력 1227년 8월에 죽었다고 적었다. 라시드 앗 딘, 2004, p.386.
  2. 르네 그루세, 1998, p. 295의 각주 33.
  3. 라시드 앗 딘, 2003, pp. 125-126.
  4. 김호동, 2010, p. 90.
  5. 지금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주민들의 Y염색체는 그 곳의 원주민 유전자보다는 몽골 족 유전자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났는데, 결과에 의하면 이들 유전자들은 8~13세기에 존속했던 어느 몽골족 계통의 남성을 조상으로 하는 유전자들이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6. 아민 말루프,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340p
  7. 유원수 역, 《몽골비사》, 256절.
  8. 르네 그루세, 1998, p. 360.
  9. 라시드 앗 딘, 2003, p.374.
  10. 라시드 앗 딘, 2003, p.381.
  11. 유원수 역, 《몽골비사》, 264절.
  12. 유원수 역, 《몽골비사》, 265절.
  13. 유원수 역, 《몽골비사》, 266절.
  14. 라시드 앗 딘, 2003, p.382 - 83.
  15. 라시드 앗 딘, 2003, p.384 - 85.
  16. 라시드 앗 딘, 2003, p.385 - 86.
  17. 라시드 앗 딘, 2003, p.386.
  18. 스기야마 마사아키, 1994, p. 52.
  19. 르네 그루세, 1998, p. 361.
  20. 中国人种迁徙解密:DNA检测下已无纯种汉族人 --중국중앙방송, 2007年02月14日
    http://discovery.cctv.com/20070214/100813.shtml Archived 2008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외부 링크편집

전임
아버지 예수게이 바투르
보르지긴 키야트 수장
1189년~ 1206년
후임
4남 툴루이 칸
전임
-
(제국 성립)
제1대 몽골 제국
1206년~ 1227년
후임
4남 툴루이 칸 툴루이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