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케 칸

몽골 제국의 제 4대 카안
(몽케에서 넘어옴)

뭉케 카안(몽골어: ᠮᠣᠩᠺ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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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öngke qa'an, 蒙哥汗, 또는 몽케 카안, 1208년 음력 12월 3일(1209년 1월 10일) ~ 1259년 음력 7월 20일(8월 11일))은 몽골 제국의 제4대 칸(재위: 1251년 7월 1일 ~ 1259년 8월 11일)이다. 휘는 보르지긴 뭉케(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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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한자孛兒只斤夢哥 패아지근몽가), 별칭은 망래구(莽赉扣)이다.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귀위크 칸의 사촌동생이기도 하고, 쿠빌라이 카안, 아리크 부케의 형이기도 하다. 묘호헌종(憲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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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케 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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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哥汗
Audience de Möngke.jpeg
지위
몽골 카안
재위 1251년 7월 1일-1259년 8월 11일
대관식 1251년 7월 1일
전임 귀위크 칸
후임 쿠빌라이 카안
이름
보르지긴 뭉케(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
ᠮᠣᠩᠺᠡ
, 한국 한자孛兒只斤 夢哥 패아지근 몽가)
묘호 헌종(憲宗)
시호 환숙황제(桓肅皇帝)
신상정보
출생일 1208년 음력 12월 3일(1209년 1월 10일)
사망일 1259년 음력 7월 20일(8월 11일)
매장지 부르칸 칼둔
가문 보르지긴
부친 보르지긴 툴루이
모친 소르칵타니 베키
종교 텡그리교

대칸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오고타이계 황족과 갈등, 주치 가문의 바투 등의 지원에 힘입어 대칸위에 올랐다. 즉위 후 1251년부터 고려 원정을 시작, 1253년 서방 원정군을 편성해 이라크 및 서남아시아, 시리아를 원정하여 2년만에 정복했고, 1254년 대리국(현, 윈난성)과 베트남을 공략, 대리국을 정복하였다. 1252년부터는 델리 술탄령티베트를 원정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톨루이이며 어머니는 소르칵타니로 그의 형제는 쿠빌라이, 아리크 부케, 훌라구 등이 있었다. 몽케는 4대 몽골 황제가 되었다. 몽케라는 뜻은 중세 몽골어로 영원함(永遠)이라는 뜻이다.

생애편집

초기 생애편집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인 툴루이케레이트족 출신 소르칵타니 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쿠빌라이 칸, 훌라구 칸, 아리크 부케는 그의 동복 친동생들이었고, 요절한 홀도도(忽睹都)는 그의 동복 친형제라는 설과, 툴루이의 첩 링쿤 카툰의 소생이라는 설, 생모미상의 첩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기욤 드 뤼브룩에 의하면 몽케는 중간 정도 되는 키와 체구를 가진 사람이라 한다.

원사 헌종전에는 어려서 황홀탑(黃忽答) 부족의 관상가가 그가 후에 귀하게 될 관상이라 예언하였다 한다.

오고타이의 카툰 중 앙회 2황후(昻恢 二皇后)는 자녀가 없었고,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몽케를 양자로 삼아 한동안 데려다 길렀다. 오고타이 칸은 총애하던 아들 쿠추가 죽자, 몽케를 잠정적 후계자 후보로 낙점하기도 했다. 오고타이 칸페르시아 학자 이디 단 무하메드에게 몽케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치라고 지시했다. 1230년 몽케는 아버지 툴루이, 숙부 오고타이 칸을 따라 전쟁에 출정하였다. 1232년 툴루이가 독배를 마시고 죽자 몽케는 쓰촨 성 일대 툴루이의 영지로 보내져 다스렸다.

서방 원정과 귀환편집

1235년 초봄, 외게데이 칸카라코람에서 쿠릴타이를 다시 소집, 이 때의 쿠릴타이에서 주치 가문의 장손 바투를 총사령관으로하는 유럽 원정군, 귀위크의 세 동생 쿠츄, 코단 등을 총사령관과 하는 남송 원정군을 편성했으며, 고려에도 정벌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몽케는 귀위크 칸을 따라 바투의 서방 원정에 종군, 출정하였다.

몽케는 1236년 가을 귀위크를 따라 원정군에 합류하여 바투, 차가타이 가문의 부리 등과 함께 루시 원정에서 활약했다. 1237년 겨울에는 리아잔 공략전에 참여했고, 1239 년에는 귀위크와 함께 알라니족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239년 말/ 1240년 초에는 귀위크와 함께 아스인들의 거점인 메게스를 점령했다. 1240년 겨울에는 키예프 공성전에도 참여하고, 1241년 4월 11일 모히 전투에서는 바투의 휘하에 들어가 싸웠다.

그러나 차가타이 가문의 부리 등이 주치의 혈통을 문제삼아 바투를 모욕했고, 귀유크는 부리 등에 동조하면서 서방 원정군 사이에 말썽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접한 오고타이 칸은 분개하여 귀위크를 소환했으나, 귀위크가 몽골로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 칸의 죽음으로 서방 원정은 취소되고 몽케 역시 군사를 이끌고 귀환했다. 퇴레게네 카툰이 몽골 귀족을 설득하는 한편, 상황 조종으르 하여 1246년 귀위크가 칸 위에 올랐다. 몽케는 바투와 함께 귀위크 칸의 주요 경쟁자로 지목되었다.

그의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는 그에게 조언, 주치 울루스바투를 설득, 그의 지지를 얻어냈다. 1248년 구유크 칸이 죽자, 그의 처 오굴 카이미쉬 카툰이 섭정을 맡아보았다. 오굴 카이미시는 우구데이 가문에서 후계자를 세우려 했고, 툴루이 계열은 이에 반발했다. 1250년 바투의 영지에서 쿠릴타이가 열려 몽케가 칸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차가타이 가문과 오고타이 가문에서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구유크와 사이가 좋지 않던 주치바투는 툴루이 가문의 손을 들어주었다.

즉위 후의 생애편집

즉위 직후편집

1251년 6월 11일에 열린 쿠릴타이에서 귀위크 칸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쉬의 강력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툴루이계의 몽케가 대칸에 선출되었다. 몽케가 대칸에 선출되자 우구데이계 왕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귀위크 칸의 왕비 오굴 카이미쉬 카툰은 다음 칸은 시레문(失烈門)이라며 몽케를 추대하는 것은 오고타이 칸의 유지를 어기는 것이라며 반박했다. 몽케는 누가 오고타이 칸의 뜻에 어긋났느냐며 반박했다. 몽케는 이미 오고타이의 왕자들은 이전 쿠릴타이에서 귀위크를 칸으로 세운 사람들은 누구이고, 오고타이가 후계자로 세운 시레문이 대신 다른 사람을 세운 것은 누구인가, 오고타이 칸의 유언을 뒤집은 것은 오고타이 가문 사람들이며, 이제 또 시레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칸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할 자격은 있느냐며 반박했다.

시레문(失烈門)을 비롯한 우구데이계 왕자들은 대칸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음모는 금세 발각되어 음모의 주동자인 시레문을 비롯한 여러 우구데이계 왕자들과 귀위크 칸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쉬 등이 툴루이의 측근이었던 멘게사르 노얀에 의해 체포, 숙청당했다. 몽케는 오굴 카이미쉬를 고문 후 처형, 펠트에 싸서 강물에 던졌다. 그밖에도 오고타이계 인사 77명을 처형했는데, 입에 돌과 흙이 물려 있었다. 일설에는 3백여 명이 처형당했다고 한다.

그밖에 색목인 출신 재상 친친카이 등 오고타이 가문의 측근 관료들도 대거 숙청하였다.

이후 살아남은 오고타이 계 왕자들은, 카이두를 제외하고는 몽골을 떠나 차가타이 울루스, 주치 울루스로 망명하였다. 몽케는 오고타이와 차가타이의 후손들은 견제, 박해하였다. 위구르인 출신 관료 발라, 위구르족의 족장 이디쿠트 살린디 등도 몽케에 반대하다가 적발되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후일 쿠빌라이 카안은 그를 황제로 추존하였으나, 정통으로 보았는지는 의문이다. 쿠빌라이 카안1243년 4월 2일 둘째 아들 친킴을 태자로 책봉하면서 칭기즈 칸이 적통인 오고타이에게 계통을 주었다고 하였지만 이후의 군주들은 언급하지 않았다.

몽케는 조상들이 가던 길을 따라가겠다고 선언했으나 다른 나라의 길을 모방하지는 않을 것이라 했다. 즉위 직후 몽케는 차가타이계의 독립 시도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부를 강화하고 무역로 확보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무슬림중앙아시아상인들을 통해 교역로 확보 정책을 펼쳤다. 1252년 몽케는 아버지 툴루이에게 이크 카간(Ikh Khagan)의 칭호를 추서하였다.

몽케는 무역 조건을 간소화하되, 일반 상인에게 세금이 부과하였다. 또한 몽케는 몽골 부족장, 귀족들에 의한 약탈을 법으로 금지하고, 과도한 세금부과도 억제하여 교역이 증가했다. 몽케는 귀족의 사치, 상인의 미신고 밀거래를 금지하였다.

고려에 항복 요구편집

1251년 10월 몽케 칸은 고려에 특사를 보내, 자신의 즉위를 알리고, 고종이 직접 몽골로 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 고종은 동생과 왕족들을 보내기로 했다. 몽케의 특사는 고려 고종에게 수도를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강화도를 떠나지 않았고, 무신 정권은 수도 천도에 반대했다. 몽케는 다시 특사를 파견, 고려 관료들은 몽케의 특사를 일단 환대하였으나 천도하지 않았고, 몽케의 특사는 고려 관료들을 비난하고 귀국했다. 1253년 7월 몽케는 예쿠에게 군사를 딸려 고려의 강화도로 파견, 항복을 종용하였다.

북부 인도 점령편집

델리 술탄국의 내부 갈등으로 마물루크 술탄 나시루딘 마흐무드의 형제인 잘랄 알 딘 마수드는 1248년 몽골로 망명했다. 잘랄 알 딘 마수드는 몽케가 칸에 즉위하는데 참여하고, 자신의 조상의 영역을 되찾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1252년부터 1253년 몽케는 타타르족살리 노얀에게 군사를 딸려 인도로 보냈다. 그러나 히말라야 산맥을 넘었으나 인도 정복은 실패했고, 인도 북부 지역을 점령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잘랄 알 딘은 라호르, 쿠자, 소드라의 통치자로 임명하고, 인도 북부에 다루가치를 파견한다. 1254년 델리 술탄령의 쿠슐루는 몽케 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몽골 다루가치를 받아들였다.

인구 조사편집

1252년부터 몽케는 몽골 및 북부 중국,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 정복지와, 속국인 조지아, 아르메니아, 남부 러시아, 중앙 아시아 일대 공국 등의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1252년 그 해에 북부 중국의 인구 조사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동부 및 남부 러시아와 노브고로드는 1258~1259년 겨울까지는 계산되지 않았다. 1257년 노브고로드에서 몽골의 종주권에 대한 반란이 있었지만, 노브로로드 대공 알렉산드르 네브스키는 몽골의 인구 조사와 과세에 복종하도록 주민들을 설득했다. 새로운 인구 조사는 가구 뿐만 아니라 15-60 세의 남성 수, 가축, 논밭, 과수원, 포도원의 수도 계산했습니다.

대리국 원정편집

1252년 6월 몽케는 동생 쿠빌라이를 시켜 대리국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귀족, 군주들은 친중국적인 쿠빌라이를 의심하였고, 몽케 역시 친중국적인 동생 쿠빌라이를 내심 의심, 견제하였다. 동생 쿠빌라이7월에 군사를 이끌고 대리국으로 가 교전하였다. 1253년 8월 쿠빌라이의 군대는 섬서성을 점령하고 대리국을 정벌하였다. 1254년 1월 2일 대리국의 군주 단여지(段興智)는 쿠빌라이에게 투항하였다.

1256년 몽케 칸은 단여지를 대리성총관으로 임명하여 대대로 세습하게 했다.

중동아시아 원정편집

즉위 초 이슬람압바스 왕조에게 사절을 보냈으나, 압바스 왕조는 몽골의 종주권을 거부하였다. 1253년 6월 그는 훌라구에게 10만 군대를 주어 이란, 이라크 원정을 명한다. 1255년 훌라구는 몽케의 명을 받들어 대군을 이끌고 서남 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정복에 나섰다. 그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무스타심에게 몽골족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할 것을 강요했는데 아바스 칼리파가 거부했다. 그는 수십만의 몽골군을 이끌고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바그다드로 진격하여 페르시아 남부의 루어 왕조를을공격했고, 1256년 12월 서부 페르시아의 알라무트의 아사신 근거지를 파괴하고 거침없이 바그다드로 쳐들어갔다.

훌라구의 군대가 바그다드를 포위하자 칼리파 알 무스타심은 자비를 구했으나 소용없었다. 1258년 2월 10일 훌라구는 이슬람군의 항복을 받았고 이슬람군이 무장해제함과 동시에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여 거의 8만명의 바그다드 이슬람교도가 학살당했고 칼리파 알 무스타심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압바스 왕조는 멸망하고 말았다. 바그다드를 멸망시킨 뒤에 훌라국 군대는 1260년 3월 1일에는 아이유브 왕조를 사실상 궤멸시키기도 했다.

시리아를 점령 한 후, 훌라구의 1만 군대는 지중해의 동쪽 해안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도착, 이집트마물루크 술탄조와 전쟁을 준비하던 중, 몽케 칸이 쓰촨 성에서 전사한 소식을 듣고 퇴각하였다. 훌라구 군대가 퇴각하자 1260년 9월 3일, 이집트 마물루크 술탄조시리아를 점령하고, 아제르바이잔까지 공략하는 선에서 잠정 종결되었다. 몽케 칸 사후 몽골에서 아리크부카쿠빌라이 사이에 내전이 발생하자 훌라구는 관망하다가 귀국을 포기, 이라크 중서부에 눌러앉아 일 한국을 건설한다.

생애 후반편집

고려 재침공편집

1254년 고려의 무신정권 최항은 친 몽골계 인사들을 처형했다. 몽케 칸은 그해 7월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딸려 보내 고려 북부 지방을 정벌, 파괴하게 했다.

1259년 고려에서 항복 선언, 고려고종은 태자 왕전(후일의 원종)을 연경으로 보내 몽케를 알현하게 했다. 그동안 몽케는 직접, 동생 쿠빌라이, 장군 우량카다이 등과 함께 남송 원정을 추진한다. 그러나 몽케는 친중국적인 성향의 동생 쿠빌라이를 내심 의심하였고, 보수적 성향의 몽골 귀족들 역시 쿠빌라이를 의심하였다.

중국 원정과 최후편집

이윽고 1257년 10월 몽케 칸의 친정군이 출발, 배편으로 남중국해를 거쳐 1258년 2월 남송으로 원정하였다. 쿠빌라이를 친중국적인 성향으로 보고 내심 불신하던 몽케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남송의 장군 가사도쿠빌라이의 군대를 악주(무창)에서 격파한 공적으로 재상에 등용된다. 이때 가사도가 대승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골의 황제 몽케의 사망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는 가사도와 쿠빌라이와의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1252년부터 남송을 원정하던 쿠빌라이의 군대와 우량카다이의 군대는 분리되어, 쿠빌라이의 군대가 북중국으로 가는 동안 우량카다이의 군대는 티베트 각 부족을 격파하고, 베트남의 국경지대로 가 쩐 왕조에 항복을 종용하였다.

몽케는 출정 직전 아리크부카에게 섭정과 카라코룸의 진수를 맡기고 출발했다. 1258년 5월 몽케의 군사는 쓰촨성 근처 육판산에 도착했고, 7월 몽케의 군사는 쓰촨성에 당도했다. 몽케가 친히 인솔한 군대는 쓰촨성 북부를 장악하였으나 남송군대의 화살공격은 계속되고, 전황은 지지부진하였다. 일부 장수들이 퇴각을 여러번 건의하였으나 몽케는 이를 강하게 거부하였다.

1259년 여름 쓰촨성에서 남송 군과의 전투 중 투석기 돌에 맞아 부상 병석에 누웠다가, ㅣ그해 8월 11일 쓰촨성 합주(合州) 조어산(釣魚山) 근처에서 부상 후유증과 이질, 발진티푸스 등으로 사망하였다. 마르코 폴로는 그가 합주의 군사가 쏜 투석기의 돌에 맞아 중상을 입고 죽었다 한다. 몽케는 생전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아, 몽케 사후 쿠빌라이아리크부카 사이의 내란의 원인이 되었다.

사후편집

1259년 제4대 대칸인 몽케가 남송 원정 중에 병사하고, 몽골고원에 있던 수도 카라코룸을 수비하던 막내동생 아리크 부케는 몽케파의 왕족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어 서부의 차가타이 가문 등 여러 왕가의 지지를 얻어 대칸의 지위를 얻었다. 이에 몽케와 함께 남송 원정 중이던 둘째동생 쿠빌라이는 윤11월에 군대를 되돌려 내몽골에 들어서 동쪽 3왕가(칭기즈칸의 동생 가계)등의 지지를 얻은 다음, 이듬해 3월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내몽골개평부(開平府 : 훗날의 상도)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지위에 앉았다. 이로써 몽골 제국은 사상 처음으로 몽골고원 남북에 두 명의 대칸이 들어서게 된다.

몽케의 장례를 치르고, 제도(帝都) 카라코룸에서 즉위한 아리크 부케가 대칸으로서의 정통성은 확보한 셈이었으나, 군사력을 장악한 쿠빌라이 역시 아리크 부케를 배신자로 여기고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대칸이라고 주장했다.

쿠빌라이아리크 부케의 양군은 여러 차례 격돌하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력과 화북의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에게 전세가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서전인 1261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는 쿠빌라이가 승리했으나, 아리크부케는 북서쪽 몽골의 오이라트의 지원을 얻어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 산하의 제후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차가타이 가문마저 아리크 부케에 대한 지원을 끊자, 1264년 아리크부케는 결국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이 일련의 전란을 승리자 쿠빌라이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아리크부케의 난이라고 불렀다.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 사이에 내전이 발생하자, 훌라구는 귀환하지 않고 중앙아시아에 정착, 일 칸국을 세웠다.

몽케 울루스편집

툴루이에게 분봉된 영지는 쓰촨성 주변이었다. 후일 몽케의 자손들은 카이두의 난 당시 카이두의 편에 섰지만 계속해서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테무르 정권도 카이두 세력 무너뜨리위해 투항자를 우대했는데, 이때 몽케의 후예는 몽골리아 서쪽 자부항 강 유역에서 울루스를 형성 하게되었다. 그러나 천력의 내란 중 몽케 계 제왕의 유력자의 대부분이 영지를 몰수당하고 실각, 이후의 족보는 전해지지 않는다.

천문학편집

몽케 칸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난제를 몇 개를 풀었다는 천재로 동서 세계의 달력을 통일하고자 오래전부터 천문대 설치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자말 앗 딘 무하마드 타힐 이븐 하만드 알 자이디 브하리'에게 준비를 시켰고, 수학의 전문가 나시르 투시를 초빙하기 위해 훌레구에게 알라무트 산성에서 이스마일파를 섬멸할 때 그를 구출해서 데려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훌레구는 투시를 정치고문을 삼았고 또한 서북 이란의 아제르바이잔에 말라카 천문대를 개설하고 초대 소장으로 투시를 임명하였다.

기년편집

몽케 칸 원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 8년 9년
서력 1251년 1252년 1253년 1254년 1255년 1256년 1257년 1258년 1259년
육십간지
(六十干支)
신해(辛亥) 임자(壬子) 계축(癸丑) 갑인(甲寅) 을묘(乙卯) 병진(丙辰) 정사(丁巳) 무오(戊午) 기미(己未)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예종 툴루이(睿宗 拖雷) : 추존황제(追尊皇帝)
  • 어머니 : 헌의장성황후 케레이트씨(顯懿莊聖皇后 怯烈氏) : 추존황후(追尊皇后)
  • 홀도도 대왕(忽睹都 大王) : 소르칵타니 베키 소생이라는 설, 일설에는 다른 여성 소생이라는 설, 링군 카툰 혹은 링구움 카툰 소생 설이 있다.
  • 세조 쿠빌라이(世祖 忽必烈) : 몽골 제국의 5대 대칸, 원나라의 초대 황제
  • 울렬올 대왕(旭烈兀 大王) : 일 한국의 초대 대칸
  • 아리불가 대왕(阿里不哥 大王) : 몽골 제국의 대립 대칸

후비편집

  • 정절황후 옹기라트씨(貞節皇后 弘吉剌氏)
  • 야속아 황후 옹기라트씨(也速兒 皇后 弘吉剌氏)
  • 독특미 2황후 알올립씨(禿忒迷 二皇后 斡兀立氏)
  • 출비 3황후(出卑 三皇后)
  • 황후 이키레스씨(皇后 亦乞烈氏)
  • 명리홀도로 황후(明里忽都魯 皇后)
  • 화리차 황후(火里差 皇后) 화로자사씨(火魯刺思氏)
  • 실력길 비자(失力吉 妃子) 백요기씨(伯要幾氏)
  • 귀비(貴妃) 파아올진(巴牙兀眞)
  • 귀비(貴妃) 규첩니(奎帖尼)

자녀편집

아들
  1. 반독 태자(班禿 大子) - 정절황후 소생.
  2. 아속알 황자(阿速歹 皇子) - 귀비 규첩니 소생.
  3. 옥룡답실 대왕(玉龍答失 大王) - 정절황후 소생.
  4. 하평왕 시리기(河平王 昔里吉) - 귀비 파아올진 소생
  5. 변도 황자(辯都 皇子) - 정절황후 소생.
  1. 창국대장공주(昌國大長公主) 백아륜(伯雅倫) - 정절황후 소생. 창충선왕 홀린(昌忠宣王 忽鄰)에게 하가(下嫁)
  2. 실린공주(失隣公主) - 독특미 2황후 소생. 출신(朮臣)에게 하가(下嫁)
  3. 필적합 공주(必赤合 公主) 활올년(闊兀年) - 독특미 2황후 소생. 출진백(朮眞伯)에게 하가(下嫁)
  4. 미상(未詳) - 생모미상(生母未詳). 출신(朮臣)에게 하가(下嫁)

족보편집

 
 
 
 
 
 
 
 
 
 
 
 
 
 
 
 
 
 
16. 보르지긴 바르탄
바가투르
 
 
 
 
 
 
 
8. 보르지긴 예수게이
바가투르
 
 
 
 
 
 
 
 
 
 
 
4. 보르지긴 테무친
칭기즈 카간
 
 
 
 
 
 
 
 
 
 
 
 
 
 
9. 올코노드 호엘룬
 
 
 
 
 
 
 
 
 
 
 
2. 보르지긴 툴루이
감국
 
 
 
 
 
 
 
 
 
 
 
 
 
 
 
 
 
10. 온기라트 데이세첸
 
 
 
 
 
 
 
 
 
 
 
5. 온기라트 보르테
우진 카툰
 
 
 
 
 
 
 
 
 
 
 
 
 
 
11. 초탄
 
 
 
 
 
 
 
 
 
 
 
1. 보르지긴 몽케 카간
 
 
 
 
 
 
 
 
 
 
 
 
 
 
 
 
 
 
 
 
24. 케레이트 마르쿠즈 칸
 
 
 
 
 
 
 
12. 케레이트 아이샨 칸
 
 
 
 
 
 
 
 
 
 
 
6. ♂
 
 
 
 
 
 
 
 
 
 
 
 
 
 
3. 케레이트 소르칵타니 베키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각주편집


전임
사촌형 구육 카안
오굴 카이미쉬 카툰(섭정)
제4대 몽골 제국 카안
1251년 ~ 1259년
후임
동생 쿠빌라이 세첸 카안 쿠빌라이
아릭 부케
전임
아버지 툴루이 칸
제2대 툴루이 울루스의 쿠베군
1232년 ~ 1250년
후임
(대칸위에 병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