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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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주(熊川州) 또는 웅주(熊州)는 신라의 광역 행정구역인 9주 5소경의 한 주(州)이다. 주치(州治)는 지금의 공주시이고 1개 소경 13개 군 29개 현이 소속되어 있으며 직접 관할하는 현은 2개이다. 영역은 지금의 충청남도 대부분 및 충청북도 일부이다.

남북국 시대 신라9주 5소경

충청남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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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과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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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이래 충청남도는 마한의 중핵지대였다. 천안일대의 목지국은 마한의 맹주로서 정치와 군사의 중심이었고 태안의 신소도국은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기 9년 온조왕의 백제는 마한을 기습공격해 패망시켰고 마한은 원산성[1] 등지에서의 최후의 저항을 끝으로 백제에 병합되었다. 단, 마한 전토가 모두 병합된 것은 아니고 노령 이남의 전남지역은 일단 백제의 맹주권을 인정하며 한동안 독립을 유지해 침미다례를 형성했다. 마한의 중핵이었던 충남지방은 향후 500년 가까이 백제의 속령으로 전락했다. 충청남도가 다시금 일국의 중핵이 된 것은 한성백제가 패망해 백제가 한성[2]에서 웅진[3]으로 급거 수도를 이전하면서였다. 백제는 웅진에서 동성왕무령왕을 거쳐 국력을 회복하여 남방의 침미다례와 가야의 영역인 섭라-기문, 대사, 사타, 달이 지방을 정복하고 북방에서 요서와 산동을 경영하면서 북위 및 고구려와 대결하는 등 다시금 황금기를 맞이했다. 성왕대에 백제는 나라이름을 남부여로 개명하고 수도를 사비로 이전했지만 이시기를 기점으로 백제는 대체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660년 백제는 의자왕을 마지막으로 신라에 패망했다.

신라치하-소부리주와 웅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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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패망과 동시에 당나라는 백제의 고토를 병탄해 웅진 도독부를 설치했다. 이에 충청남도 일대는 백제 부흥운동나당 전쟁의 전장이 되고 말았다. 나당 전쟁중인 671년 문무왕 11년에 신라는 옛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당나라로부터 탈환해 이곳을 치소로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했다. 동시에 지금의 아산시 일원을 중심으로 탕정주를 설치했다. 그 후 전쟁 뒤인 681년 신문왕 6년 주 치소가 웅진으로 옮겨지면서 사비는 치소로서의 지위를 상실해 명칭도 웅천주로 변경되었다. 동시에 탕정주도 웅천주에 합병되었다. 757년 경덕왕 16년에 전국의 행정체제및 행정단위의 명칭을 개혁하면서 웅주로 바뀌었지만 웅천주라는 명칭도 계속 사용되었다. 이 지역의 신라군으로는 황자•황청색의 만보당(萬步幢)과 고량부리정(古梁夫里停)이 주류했다. 822년 헌덕왕 14년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켜 인근의 4개주까지 세력을 확장해 장안국을 세웠다가 패사한 적이 있다.

웅천주에서 충청남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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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기에 군웅의 할거로 행정체제가 유명무실화되어 각 지역이 지방호족에 의한 자치체제로 이행했다. 웅천주는 후삼국 시대태봉고려후백제에 의해 분할되어 고려의 영역에는 운주(運州)가 설치되었고 후백제에서는 웅천주가 명칭상으로는 존속했다. 후삼시대 내내 두 나라의 각축장이 되었다. 후삼국의 통일 후 983년 고려 성종2년 중앙정부의 출장소12목 중에 공주목청주목이 설치되어 중앙정부의 직접감독이 시작되었고 이후에 995년 고려 성종 14년에 하남도로 개편되었다. 1106년 고려 예종1년 전국의 행정체제를 5도 양계로 개편하면서 양주(楊州) · 광주(廣州)의 관내도(關內道), 충주 ·청주의 충원도(忠原道)와 통폐합되어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가 되었고 나중에 분리와 재통합을 거쳐 양광도(楊廣道)가 되었다. 양광도는 1217년 고려 고종4년 충청도로 개명이래 충청도와 양광도로의 개명을 거듭하다가 조선왕조의 개국 이후 지금의 경기도지역이 분리되면서 충청도가 되었다. 1896년 전국의 행정구역이 13도로 나뉘면서 충주, 청주지역의 충청북도와 분리되면서 지금의 충청남도가 되었다.

웅천주와 충청남도의 영역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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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웅천주는 기본적으로 관할범위가 지금의 충청남도와 거의 차이가 없으나, 당시의 서원경인 지금의 청주시 일대가 웅천주에 속하고 대신 사산현(蛇山縣)이 있는 직산읍을 중심으로 한 천안시 서북구 일대와 덕은군이 있던 논산시 가야곡면 일대가 각각 한산주완산주에 속해서 웅천주 밖에 있다는 정도이다.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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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주에는 1개 소경 13개 군 29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웅주 소속 군현의 옛 지명을 대부분 백제의 지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래 표에서 특별한 표시가 없는 옛 지명은 모두 백제의 지명이다.

웅천주의 소속 군현
군의 이름 원래 군명 현재 지명 소속 현 원래 현명 현재 지명
웅주(熊州) 백제 웅진성(熊津城)[4],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신라 웅천군/웅천주(熊川州)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
이산현(尼山縣) 열야산현(熱也山縣) 논산시 노성면
청음현(淸音縣) 벌음지현(伐音支縣) 공주시 신풍면
서원경(西原京) 백제 상당현(上黨縣)[5],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6],
신라 서원소경(西原小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담명암산성동
- - -
대록군(大麓郡) 대목악군(大木岳郡)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순치현(馴雉縣) 감매현(甘買縣)[7]
또는 임천(林川)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금지현(金地縣) 구지현(仇知縣)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가림군(嘉林郡) 가림군(加林郡)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마산현(馬山縣) 마산현(馬山縣) 서천군 한산면
한산현(翰山縣) 대산현(大山縣) 부여군 홍산면
서림군(西林郡) 설림군(舌林郡) 충청남도
서천군
남포현(藍浦縣) 사포현(寺浦縣) 보령시 남포면
비인현(比仁縣) 비중현(比衆縣) 서천군 비인면
이산군(伊山郡) 마시산군(馬尸山郡)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목우현(目牛縣) 우견현(牛見縣) 홍성군 갈산면
금무현(今武縣) 금물현(今勿縣) 예산군 고덕면
혜성군(槥城郡) 혜군(槥郡)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당진현(唐津縣) 벌수지현(伐首只縣) 당진시
여읍현(餘邑縣) 여촌현(餘村縣) 서산시 운산면
신평현(新平縣) 사평현(沙平縣) 당진시 신평면
부여군(扶餘郡) 백제 소부리군(所夫里郡)
또는 사비(泗沘)
신라 사비주(泗沘州)/사비군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석산현(石山縣) 진악산현(珍惡山縣) 부여군 석성면
열성현(悅城縣) 열기현(悅己縣)[8]
또는 두릉윤성(豆陵尹城)
또는 두곶성(豆串城)
또는 윤성(尹城)
청양군 정산면
임성군(任城郡) 임존성(任存城)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청정현(靑正縣)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 청양군
오산현(烏山縣) 오산현(烏山縣) 예산군 예산읍
황산군(黃山郡)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 논산시 연산면 진령현(鎭嶺縣) 진현현(眞峴縣)
또는 정현현(貞峴縣)
대전광역시 서구
봉곡동
진동현(珍同縣) 진동현(珍同縣) 금산군 진산면
비풍군(比豊郡) 우술군(雨述郡) 대전광역시 대덕구
읍내동
유성현(儒城縣) 노사지현(奴斯只縣) 대전광역시 유성구
구성동
적조현(赤鳥縣) 소비포현(所比浦縣) 대전광역시 유성구
덕진동
결성군(結城郡) 결기군(結己郡)[9]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신읍현(新邑縣) 신촌현(新村縣) 보령시 주포면
신량현(新良縣) 사시량현(沙尸良縣) 홍성군 장곡면
연산군(燕山郡) 일모산군(一牟山郡)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연기현(燕岐縣) 두잉지현(豆仍只縣)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매곡현(昧谷縣) 미곡현(未谷縣) 보은군 회인면
부성군(富城郡) 기군(基郡) 충청남도
서산시
소태현(蘇泰縣) 성대혜현(省大兮縣) 태안군
지육현(地育縣) 지륙현(知六縣) 서산시 지곡면
탕정군(湯井郡) 탕정군(湯井郡)
신라 탕정주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현(陰峯縣) 아술현(牙述縣) 아산시 영인면
기량현(祁梁縣) 굴직현(屈直縣)
또는 굴지현(屈旨縣)
아산시 신창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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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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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주
  2. 서울 송파구
  3. 공주
  4. 주서》 백제전 등에는 고마(固麻)라고 하며, 《일본서기》 기록(웅략천황 21년 봄 3월조)에는 구마나리(久麻那利)로 등장한다.
  5.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조와 백제조에는 언급되지 않으며 고려사 56권에서 청주목이 본래 백제 상당현(上黨縣)이었다고 전한다.
  6. 삼국사기 지리지 백제조에 서원(西原)의 다른 이름이 낭비성이나 낭자곡이었다고 전하나, 이 지명들은 위치 비정에 논란이 있다.
  7. 본서 지리지 백제조에서는 기매현(其買縣)으로 나와있다.
  8. 어떤 자료에서는 기(己)을 이(已)로 쓴다.
  9. 본서 지리지 백제조에는 결이군(結已郡)으로 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