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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李庸+戈, 1533년 - 1591년 1월)은 조선 중기의 무신, 군인으로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언선(彦善), 다른 이름은 이규(李戣)이다. 병조참판 이광식(李光軾)의 아들이자 이감, 이전의 동생이며, 임진왜란 때의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의 종조부이다. 중호(重湖) 윤탁연(尹卓然)은 그의 처남이면서, 동서간도 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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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李庸+戈
생애 1533년 ~ 1591년 1월
출생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사망지 조선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본관 우계
언선(彦善),
복무 조선군
최종 계급 병마절도사
근무 선전관, 전라좌도병영, 함경북도병영, 함경남도병영
지휘 경상우수영, 전라좌수영, 함경북도병영, 함경남도병영
주요 참전 이탕개의 난
기타 이력 1555년(명종 11년) 무과 급제
기타 길주목사, 인천군수

1550년(명종 15년)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 형조좌랑, 1567년 형조정랑 등을 거쳐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 시, 전임자 서익(徐益)의 말을 듣고 이순신을 미워하였으나 함께 근무하다 이순신의 인품에 탄복하여 뜻을 바꾸었으며, 나중에는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함경북도병마사를 거쳐 도순찰사 재직 중 1583년 이탕개의 난이 발생, 방어사에 임명되었다가 급히 남병사로 바뀌어 교전에 참여하였다. 강원도 강릉 출신.

목차

생애편집

 
함경북도병마절도사 겸 경성부사 근무 기록
(경성지역에서 첩을 솔축했다는 고산찰방의 장계로 면직되었다는 부분이 존재한다.)

1553년생으로 생일은 미상이며 강릉 출신으로 이광식의 넷째 아들이다. 할아버지는 평안도병마절도사경상좌수사를 지낸 이지방(李之芳)이며 아버지는 병조참판중추부동지사를 지낸 이광식(李光軾)이고, 어머니는 함안이씨로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강원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를 지낸 이세응(李世應)의 딸이다. 그의 셋째 형은 이전(李戩)으로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를 역임한 무인이고, 임진왜란 때 전사한 이복남(李福男), 이덕남(李德男), 이인남(李仁男)은 그의 셋째 형 이전의 손자가 된다.

부인은 여산송씨로 동지중추부사 송맹경(宋孟璟)의 딸이고, 계비는 칠원윤씨로 현령 의정부좌찬성 귀원군 윤이(尹伊)의 딸이며 칠계군 헌민공 윤탁연의 누이이다. 그는 윤탁연과 이중 인척이 된다. 이용의 본처 여산송씨는 송맹경의 장녀로 윤탁연은 송맹경의 둘째 사위이다. 본처 여산송씨 사후 칠원윤씨와 재혼했는데, 이용의 후처 칠원윤씨는 현령으로 증 좌찬성 귀원군에 추증된 윤이의 둘째 딸로, 중호 윤탁연(重湖 尹卓然)의 누이동생이 된다.

1550년(명종 15년)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2] 형조좌랑으로 재직 중 1560년(명종 15) 순회세자명나라로부터 세자 책봉을 받자, 그해 세자 책봉을 기념하는 별시무과를 시행할 때, 고경명(高敬命), 권철(權轍) 등과 함께 참고관(參考官)의 한사람이 되었다. 1567년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1580년(선조 15년) 2월 길주목사로 부임했다가 그해 8월 체직되었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하였다. 부임 직후 그는 전임자 성박(李舜臣)의 말을 듣고 이순신을 미워하여, 전라좌수사 부임 초기 좌수영 관하의 다섯 포구인 발포, 여도, 사도, 녹도, 방답진 등을 점검하였다. 이때 다른 4개의 포구 이탈자는 보고하지 않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포구의 3명만 보고하였다. 이순신은 다른 4개 포구의 결과를 조사하여 보고하려 하자, 이용은 즉시 장계를 회수하였다. 이에 이순신의 인사 고과를 낮게 매겨서 조정에 보고하였다가, 전라도도사로 온 조헌(趙憲)의 항의로 뒤에 수정하였다. 이때 그는 전임자 성박(成博) 또는 서익(徐益)의 말을 전해 듣고 이순신을 미워하였으나, 함께 근무하다가 이순신의 인품에 탄복하여 뜻을 바꾸었다. 나중에는 함경남도병마절도사 부임 시, 자신의 군관과 건원보 권관으로 이순신을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1582년(선조 16) 2월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으나, 그해 8월 경성에 첩을 솔축했다는 이유로 고산찰방(高山察訪)이 장계를 올려 탄핵, 면관시켰다.

이후 함경남도절제사와 도순찰사(都巡察使)를 거쳐 1583년(선조 16년) 1월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2월 이탕개 등 국경지대의 여진족이 기습공격하여 이탕개의 난이 발생, 경원부(慶源府)를 함락시키자 병마사 이제신(李濟臣)의 급보를 받고, 선조는 오운(吳沄)과 박선(朴宣)을 조방장으로 삼아 용사 8천 명먼저 보내고 이용은 방어사로 임명했다가, 다시 경기 감사 정언신(鄭彦信)을 우참찬 겸 도순찰사로, 이용은 남도병마사(南道兵馬使)로 삼아 지원하게 했다.[3] 그해 7월 직접 청을 올려 이순신(李舜臣)이 남병영의 군관으로 천거하여[4], 이순신을 남병사 군관으로 오게 했다.[5] 이때 이순신여진족의 부족장 중 한명인 울지내를 유인하여 생포했으나, 이순신과 사이가 안좋던 김우서는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임기만료된 이순신건원보 권관으로 추천하였다. 그 뒤 그는 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587년(선조 20) 7월 4일 인천부사로 부임하였다. 안질환을 앓던 그는 1588년(선조 21) 6월 28일 눈이 어둡다 하여 승정원의 계로 파직되었다.

청백하고 엄정하였으며 오랑캐들이 이용의 이름만 듣고도 겁을 먹었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 1월에 사망하니 향년 58세였다.

사후편집

묘는 경기도 시흥군 과천 청계 북동쪽 갑좌(甲坐)에 있다. 묘갈명은 윤탁연이 짓고 찬하였다.

그의 이름은 1990년대 컴퓨터의 유니코드 폰트에 나타나지 않았고, 일부 옥편(한자사전)에도 나타나지 않아 그의 이름을 판독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가계편집

기타편집

그의 처조부 송수의 묘갈명에 송맹경의 첫 딸이 그에게 출가한 내용이 나타나 있다.

그의 처남 윤탁연의 아들 윤길원(尹吉元)은 그의 형 이전의 외손녀이며, 서원군(西原君) 한강(韓絳)의 딸과 결혼하였다.

참고 항목편집

각주편집

  1. 그의 전처가 윤탁연의 전처와 자매간이다. 본처 사후 그는 윤탁연의 누이와 재혼하였다.
  2. 호음잡고 제7권, 有明朝鮮國 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定州牧使宋公墓碣銘
  3. 국조보감 제28권 선조조 5 16년(계미, 1583)
  4. 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 종자 정랑 분(正郞芬)
  5. 李忠武公全書 卷首, 연보

참고 문헌편집

  • 선조실록
  • 호음잡고
  • 중호문집 (윤탁연)
  • 강원도지
  • 난중일기
  • 국조보감

관련 서적편집

  • 강릉문화원, 《증수임영지》(강릉문화원 국역, 강릉문화원, 1997)
  • 박도식, 《강릉의 역사인물 자료집 江陵의 歷史人物 資料集》(강릉문화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