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타 왕조

굽타(산스크리트어: गुप्त)는 서기 280년 마가다 지역에서 발흥한 후 320년부터 550년까지 북인도를 지배하였던 고전기 인도의 제국이다.

굽타 제국
गुप्त साम्राज्य

 

280년550년
 

 

 

GuptaEmpire300-550.png
수도파탈리푸트라
정치
공용어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트어
지위토후국(280 ~ 320)
제국(320 ~ 550)
정부 형태군주제
라자(토후)
280년
굽타 가문
스리 굽타
마하라자디라자(황제)
319년 ~ 335년
335년 ~ 375년
375년 ~ 415년
455년 ~ 467년
540년 ~ 550년
굽타 왕조
찬드라굽타 1세
사무드라굽타
찬드라굽타 2세(전성기)
스칸다굽타
비슈누굽타
지리
지역북인도
면적3,500,000 km2
인구
주요 민족인도아리아인

기타
국교힌두교
기타 종교불교, 자이나교

역사편집

굽타 왕조는 본래 3세기 중엽 쿠샨 제국이 쇠퇴하면서 인도 영토 대부분을 소실하고 그 자리에 신흥 중소 토후국들이 난립하는 시기에 마가다 지역을 거점으로 형성된 토후국이었으며, 토후국 지위에 있던 굽타 왕조를 제국의 규모로 확장한 최초의 황제는 찬드라굽타 1세였다. 찬드라굽타 1세서사트라프 등의 군소 왕국들을 병합하여 굽타의 지배 영역을 확장하였으며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절대적인 권한의 왕위와 세습적인 형태를 취하는 절대왕정을 기반으로 선진적인 행정 체계를 확립하였다. 이후 그의 후계자인 사무드라굽타가 20여개의 왕국들을 차례로 복속시켜 갠지스 강 상류와 그 이남지역까지 정복하며 북인도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사무드라굽타의 후계자인 찬드라굽타 2세 또한 유능한 통치자로서 계속적인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과 외교적 방법들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직접적인 통치 외에도 여러 속국들에 조공을 받아 사실상 전 인도 아대륙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왕조였다. 특히 인도 북서부의 지배자였던 사카족을 완전히 정복하여 아라비아해의 제해권을 손에 넣고 지중해의 알렉산드리아와 활발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매우 번성하였다. 당시 발행된 굽타 왕조의 주화들을 통해 당시 제국의 번영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찬드라굽타 2세의 아들 쿠마라굽타 1세 역시 이를 계승하여 1세기 이상에 걸친 전성기를 누렸다. 비록 즉위년도인 415년부터 중앙아시아 훈족의 일파인 에프탈족이 인도 서북방에서 침입해왔으나 수비를 잘하여 제국을 평화롭게 지켜냈다. 그의 아들인 스칸다굽타가 즉위하고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에프탈족의 침입에 대비했으나 잦은 침입과 전쟁, 그리고 이를 틈타 굽타 왕조에 종속해 있던 속국이 독립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굽타 왕조의 인도 내 영향력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친 외침과 더불어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내분이 심화되며 굽타 왕조는 결국 6세기 중엽 멸망하였다.

사회편집

굽타 왕조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인 풍요를 바탕으로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서 인도 역사상 힌두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할 만큼 인도의 민족주의적 성격이 드러나는 고유문화를 번영시켰으며, 이 시기에 오늘날 인도 문화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또한 이 시기 브라만교를 계승한 힌두교가 성장하면서 브라만교스므리티마누 법전 또한 인도인들의 생활 속에 깊이 침투하였으며, 브라만-크샤트리야-바이샤-수드라로 이루어진 바르나 체제와 자티 체제로 구성된 카스트 제도도 이 시기에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행정편집

굽타 왕조는 중앙집권제와 봉건번국제를 융합시킨 방식의 행정 제도를 채택하였는데, 지방에서는 정복지 출신 토후들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지방 분권적인 봉건 제도를 기반으로 통치하였으며 중앙 정부에서는 마우리아 왕조에서 시행되던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그대로 계승하는 방식으로 통치하였다.

학문편집

이 시기 인도에서는 아리아바타 등의 걸출한 수학자가 출현하였으며, 10진법이나 0의 발견 등 수학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종교편집

종래의 제식주의와 야즈나로 대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던 브라만교의 세력이 약화되자 보다 세속적인 형태로 변화하여 현재 힌두교로 칭하는 고유의 종교 및 철학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힌두교는 이 시기에 기본적인 체계를 완전히 갖추었으며 불교, 자이나교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종교 형태로 발전하여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까지 퍼져나갔다. 굽타 왕조의 왕들은 자신이 비슈누아바타라라고 주장하면서 왕권 강화를 위해 힌두교를 강력하게 숭상하였으나 불교를 보호하고자 하는 등 타종교에도 관대했다. 불교의 학문적, 교리적 연구는 계속되어 5세기 경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날란다의 불교 대학이 설립되기도 했다.

문학편집

이 시기 굽타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산스크리트어 문학이 발전을 거듭하였다. 왕실 소속의 학자와 문학가들이 구전설화를 정리한 것이 오늘날의 인도 2대 서사시로 잘 알려진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이다. 당대 저명한 산스크리트어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칼리다사를 궁정시인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사쿤탈라>, <메카투사>와 같은 훌륭한 작품들이 편찬되었다.

예술편집

 
굽타 시대 인도 불교 미술의 정점인 아잔타 석굴 벽화
 
굽타 시대의 비슈누 신상

인도 미술사에서 굽타 양식은 4세기 초엽부터 7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으며, 불교 미술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완성된 모습을 보인다. 불교의 네 군데 중요한 성지 중 하나인 부다가야에 있는 마하보디 사원이 이 무렵에 조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강력한 왕권 아래 힌두교의 부흥으로 힌두교의 조형 미술도 이 시기부터 등장하여 다양한 석조 사원과 조각 장식, 벽화 등이 남아있다. 굽타 양식으로 널리 알려진 유적 중 아잔타, 엘리펀트 섬, 엘로라의 석굴들은 당대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등 다양한 종교의 조화로운 공존을 반영한다. 대표적인 조각으로는 5세기 초 마투라 양식과 우다야기리 석굴의 조각, 5세기 말의 사르나트 싱의 조상 등이 있다. 벽화로는 아잔타 석굴의 벽화가 유명하다.

외부 링크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굽타 왕조"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