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아 제국

마우리아 제국(산스크리트어: मौर्य साम्राज्यम् 마우리야 삼라지얌)은 기원전 320년부터 기원전 185년까지 남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지배한 고전기 인도의 제국으로,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이자 동시에 제일 넓은 면적을 지녔던 국가이다.

마우리야 제국
मौर्य साम्राज्यम्

기원전 322년 ~ 기원전 185년
 

 

Mauryans.JPG
수도파탈리푸트라
정치
정부 형태전제군주제
입법부만트리파리샤드
삼라트 (황제)
기원전 322년 ~ 기원전 298년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73년
기원전 273년 ~ 기원전 232년
기원전 232년 ~ 기원전 224년
기원전 224년 ~ 기원전 215년
기원전 215년 ~ 기원전 202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7년
기원전 187년 ~ 기원전 185년

찬드라굽타(초대)
빈두사라
아소카
다사라타
삼프라티
샬리슈카
데바바르만
샤타단반
브리하드라타(말대)
왕조마우리야 왕조
역사
 • 건국BC 322년
 •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BC 305년 ~ BC 303년
 • 최전성기BC 273년 ~ BC 232년
 • 칼링가 전쟁BC 268년 ~ BC 265년
 • 최대 영토 확보BC 265년
 • 멸망BC 185년
지리
위치남아시아
면적5,000,000 km2
인문
통용어마가다어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박트리아어
아람어
코이네 그리스어
통용문자브라흐미 문자
민족인도아리아인
드라비다인
야바나인
사카인
인구
기원전 261년 어림50,000,000명[1]
경제
통화파나
종교
종교불교
자이나교
브라만교
아지비카교
바가바트교
그리스 다신교
조로아스터교[2]
기타
현재 국가인도의 기 인도
파키스탄의 기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기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의 기 아프가니스탄
네팔의 기 네팔

제국의 초대 황제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아르타샤스트라의 저자인 차나키야의 도움으로 군대를 키우고,[3] 기원전 322년에 난다 왕조를 전복시켰다. 그 후 찬드라굽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남긴 사트라프들을 정복함으로써 인도 중부와 서부 전역으로 빠르게 힘을 확장했으며, 기원전 317년에 마우리아 제국은 인도 북서부 지역을 완전히 점령했다.[4] 그런 다음 마우리아 제국은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 중에 디아도코이셀레우코스 제국의 창시자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를 물리쳤고 인더스 강 서쪽의 영토를 획득했다.[5][6]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중부 인도와 남인도 지역을 정벌하며 타밀라캄칼링가 왕국을 제외한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제국은 히말라야 산맥의 자연 경계를 따라 동쪽으로는 벵골, 서쪽으로는 오늘날의 발루치스탄, 파키스탄 및 오늘날의 동부 아프가니스탄힌두쿠시 산맥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7] 2대 황제인 빈두사라 치세에는 인도의 남부 지역으로 확장되었지만,[8][9] 칼링가는 아소카에 의해 정복되기 전까지 독립적인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10]

3대 황제인 아소카 치세에는 마우리아 제국의 해상 무역을 방해하던 칼링가 왕국을 정복하며 타밀라캄 지역의 촐라, 체라, 판디아를 제외한 인도 아대륙 전역을 통일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전성기 인구가 5천만에서 6천만 사이를 기록할 정도로 당시 고대 국가 중에서는 매우 많은 인구를 자랑했으며,[11][12] 면적 또한 19세기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제국을 제외한 남아시아 역사상의 국가들 중 제일 넓은 면적을 자랑했지만, 아소카 사후 암군들의 통치, 왕위 계승 분쟁, 사타바하나의 독립 등 제국 내 영토들의 독립, 최고 행정부인 소파가세누스의 부패,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과 같은 외세의 침략 등으로 점차 쇠퇴하다가 기원전 185년에 푸샤미트라 숭가의 쿠데타에 의해 왕조가 전복되면서 마우리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 그의 후임자들에 의해 인도의 대내외 무역과 농업 및 경제 활동은 단일하고 효율적인 재무, 행정 및 보안 시스템의 구축으로 인하여 남아시아 전역에서 번성하고 확장되었다. 마우리아 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무역 네트워크 중 하나인 그랜드 트렁크로드(Grand Trunk Road)를 건설하여 인도 아대륙의 북쪽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연결하였다.[13] 칼링가 전쟁이 끝난 후, 제국은 아소카 하에서 거의 반세기 동안 중앙집권화된 통치를 경험하였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자이나교 수용은 남아시아 전역의 사회 종교 개혁을 증가시켰고, 아소카의 불교 수용과 불교 선교 후원으로 스리랑카, 북서인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이집트 및 헬레니즘 유럽으로 불교 신앙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14]

마우리아 제국의 인구는 약 5천만 ~ 6천만명으로 추산되며 고대 시대에 제일 많은 인구수를 지닌 제국이었다.[15][16] 아르타샤스트라아소카의 칙령은 마우리아 시대의 주요 사료 기록이며, 사르나트에 있는 아소카의 사자상은 오늘날 인도 공화국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원편집

"마우리아"라는 이름은 아소카의 비문이나 메가스테네스의 《인디카》와 같은 현대 그리스어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자료에서 입증되었다.[17]

  • 루드라다만(서기 150년경)의 주나가드 암석 비문은 찬드라굽타아소카라는 이름에 "마우리아"라는 접두사를 붙였다.[17]
  • 푸라나(서기 4세기경)는 이 왕조를 마우리아라는 명칭으로 일컬었다.[17]
  • 불교 문헌에는 찬드라굽타가 고타마 붓다가 속한 샤캬족의 "모리야" 일족에 속했다고 명시되어 있다.[17]
  • 자이나교 문헌에 따르면 찬드라굽타는 공작의 왕실 조련사 마우리야-포샤카(mayura-poshaka)의 아들이었다.[17]
  • 타밀 상감 문헌은 난다를 언급한 이후 이들을 모리야르(moriyar)라는 이름으로 언급하였다.[18]
  • 서기 12세기의 쿤탈라 비문(마이소르 북부 반다 닉케 마을에서 유래함)은 마우리아를 이 지역을 통치한 왕조 중 하나로서 연대순으로 언급한다.[19]

일부 학자에 따르면 카라벨라의 하티굼파 비문(BC 2-1 세기)은 "무리야 칼라"(마우리아 시대)와 같이 마우리아 제국의 시대를 언급하지만[20]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DC 시카르와 같은 학자들은 이 문구를 "무키야-칼라"(주요 예술)로 읽는다.[21]

불교 전승에 따르면, 마우리아 왕조의 조상들은 공작(팔리어: Mora 모라)이 풍부한 지역으로 정착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문자 그대로 "공작의 자리에 속하는"이란 뜻을 지닌 "모리야(Moriya)"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른 불교 기록에 따르면, 이 조상들은 모리야나가라(Moriyanagara)라는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 도시가 "공작의 목처럼 착색된 벽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22]

불교자이나교 전승에서 언급되었듯이 왕조와 공작새와의 관계는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확증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난단가르의 아소카 기둥과 산치의 대스투파의 여러 조각품에서 공작 그림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 증거를 바탕으로 현대 학자들은 공작이 왕조의 상징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3]

둔디라자(무드라라크샤사)와 비슈누 푸라나의 주석가와 같은 일부 후기 저자들은 "마우리아(Maurya)"라는 단어가 무라(Mura)와 최초의 마우리아 왕의 어머니에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푸라나 자체는 무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며 난다 왕조와 마우리아 왕조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24] 둔디라자의 파생어는 독자 연구로 추측되는데, 산스크리트어 문법에 따르면 여성 이름 무라(Mura, IAST : Murā)의 파생어는 "마우레야(Maureya)"이며 "마우리아"라는 용어는 남성 이름 "무라(Mura)"에서만 파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25]

역사편집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기원전 322년 ~ 기원전 298년)편집

마우리아의 시조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본래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거대하고 군국주의적이며 경제적으로 강력한 국력을 지녔던 마가다 왕국 난다 왕조의 분가인 "마우리아"라는 크샤트리야 가문 출신으로, 탁샤실라 대학의 구루였던 차나키야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이즈음 인도 아대륙마케도니아 왕국바실레우스알렉산드로스 3세의 공격으로 차례차례 점령당하고 있었는데, 서부 펀자브 지역의 탁샤실라 왕은 알렉산드로스와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동부 펀자브 지역의 파우라바 왕국을 다스리던 왕인 포루스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저항을 시도했지만 기원전 326년에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펀자브 지역을 비롯한 북서부 인도가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정복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차나키야는 당시 북인도의 패권 국가 마가다를 다스리던 난다 왕조의 왕 다나 난다에게 마케도니아를 쳐부수자고 제의하였지만 모욕을 받음과 동시에 거절당했으며, 이후 난다 왕조를 증오하게 된 차나키야는 복수를 맹세하고 난다 왕조를 파괴하기로 결심하였다.[26] 차나키야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쳐야 했고, 저명한 배움의 중심지인 탁실라로 가서 교사로 일했다. 여행 중 차나키야는 일부 젊은이들이 시골 게임에서 투구 전투를 하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그는 젊은 찬드라굽타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통치에 적합한 사람으로 왕의 자질을 보았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인도 원정군을 이끌고 펀자브에 진출하였으나, 그의 군대는 베아스 강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동쪽으로 더 진군하는 것을 거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으로 돌아온 후 대부분의 부대를 인더스 강 서쪽에 재배치했다.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죽은 직후 그의 제국은 그의 장군들이 이끄는 독립 왕국으로 분열되었다.[27]

마우리아 제국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 그의 고문 차나키야의 지도 아래 펀자브 지역에서 설립되었다. 찬드라굽타는 차나키야에 의해 탁실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차나키야에게 국영과 통치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군대가 필요했던 찬드라굽타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에 저항했던 야두헤야와 같은 지역 군사 공화국을 포섭하거나 합병하였다. 이렇게 마우리아 군대는 인도 아대륙 북서부 지역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그 후 마우리아 군대는 마케도니아인들이 세운 사트라프를 정복하였다.[28]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차나키야의 도움을 받아 기원전 317년까지 그리스 장군 에우다모스와 페이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던 인더스 계곡을 그리스 총독들을 몰아내기 위한 반란을 조율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통제하에 가져오기도 하였다.[4]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조상은 미스터리와 각종 논란에 휩싸여 있다. 한편, 비샤카다타가 저술한 《무드라라크샤사》(Mudrarakshasa 라크샤사의 인장 반지 - 라크샤사는 당시 마가다의 총리였다.)에서는 찬드라굽타의 왕실 조상을 설명하고 심지어 난다 가문과 그를 연관짓고 있다. 마우리아(Maurya)로 알려진 크샤트리야 일족은 초기 불교 문헌인 《마하파리니바나 숙타》에서 언급되어 있으나, 이 문헌들 이외에 다른 역사적 증거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쉽불리 결론지을 수는 없다. 찬드라굽타는 그리스 기록에서 "산드로쿱토스(Sandrokottos)"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며 젊은 시절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만났다고 한다.

차나키야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 그의 군대가 마가다의 왕좌를 장악하도록 조력하였다. 찬드라굽타와 차나키야는 난다 왕조가 약해질 틈을 기다리는 동시에 정보망을 사용하여 마가다 및 다른 지방에서 많은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남자들은 다나 난다 왕의 부패하고 억압적인 통치와 그의 군대가 긴 일련의 전투를 위해 필요한 자원에 대해 분노하였다. 이들 중에는 탁실라의 전 장군 및 파르바타카 왕의 대표인 차나키야의 뛰어난 제자들, 말라야케투 및 소국의 통치자도 있었다. 마케도니아인들 또한 다른 그룹들과 함께 난다 왕조에 대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무장 봉기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29][30] 비샤카다타의 《무드라라크샤사》뿐만 아니라 자이나교 문학 《파리쉬슈타파르반》에서는 히말라야 왕 파르바타카와 찬드라굽타의 동맹 이야기, 때로는 찬드라굽타와 포루스와의 동맹 이야기를 언급하지만,[31][32]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다.[33] 히말라야 동맹은 야바나(그리스), 캄보자, 사카(스키타이), 키라타(히말라야인), 파라시카(페르시아)와 바흘리카(박트리아인) 등이 포함된 복합적이고 강력한 군대로 구성되었으며 찬드라굽타는 이들을 이끌고 파탈리푸트라(쿠스마푸라, "꽃의 도시"라고도 함)로 진격하였다.

쿠스마푸라는 파르바타와 찬드라굽타의 세력에 의해 전방향에서 포위되었다 : 사카, 야바나, 키라타, 캄보자, 파라시카, 바흘리카 등은 차나키야의 조언에 따라 모였다.

기원전 321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파탈리푸트라를 침공할 준비를 하는 동시에 한 가지 전략을 고안했다. 전투가 실시되고 마가다 군대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전장으로 이끌려 마우리아의 군대와 교전을 펼치는 사이, 마우리아 장군과 스파이는 난다 왕조의 부패한 장군을 매수하였으며, 왕위 계승자의 죽음으로 혼란의 절정에 달한 왕국에 내전 분위기를 조상하였다. 차나키야는 대중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다나 난다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권력을 넘긴 후 망명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차나키야는 총리 라크샤사에게 연락하여 그의 충성심이 난다 왕조가 아닌 마가다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고서 그가 계속 총리직에 재직할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마우리아에게 저항하는 길을 선택한다면 마가다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도시를 파괴할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라크샤사는 차나키야의 설득을 받아들였고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합법적으로 새로운 마가다의 왕으로 즉위하며 마우리아 제국이 형성되었으며, 라크샤사는 찬드라굽타의 수석고문이 되었으며 차나키야는 원로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함으로써 마케도니아 제국의 지방 권력이 와해되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이를 기회로 삼아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된 인도 지역인 니카노르, 에우다모스 등을 수복하기 시작하였는데,[36] 이러한 팽창 정책을 펼치던 찬드라굽타의 마우리아 제국과 과거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싶었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셀레우코스 제국 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서로 충돌하면서 기원전 305년에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이 발발하였지만,[37]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인더스 강을 뒤로 하여 전술적으로 불리한 지역에 위치하던 것을 파악한 마우리아 제국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였으며, 셀레우코스는 패배하여 아프가니스탄의 산악 지역으로 후퇴했다.[38] 기원전 303년에 셀레우코스 제국과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으며 마우리아 제국은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이 지배하던 인더스 강 서쪽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지역을 얻었으며,[39]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기원전 301년 입수스 전투에서 서부 헬레니즘 왕들에 대한 그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50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선물받았다. 또한 이 전쟁을 계기로 그리스 세계와의 외교 관계가 확립되며 역사가 메가스테네스, 데이마코스, 디오니시우스와 같은 몇몇 그리스인들이 마우리아 궁정에 머물렀으며,[40]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헬레니즘 문명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함으로써 마우리아 제국의 위상이 한층 격상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41]

헬레니즘 세계와 마우리아 제국 간에 교류가 지속되면서 마우리아 제국에 수많은 그리스인 사절들이 파견되었는데, 이들 중 셀레우코스 제국의 외교관이자 당시 고대 인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인 메가스테네스가 있었다. 그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궁정에서 유명한 그리스 대사였는데,[42] 아르리안에 따르면, 메가스테네스(기원전 350 년경-기원전 290 년경)는 아라코시아에서 살다가 파탈리푸트라로 여행했다고 한다.[43] 그는 마우리아 사회를 자유를 사랑하고 침략을 부정하는 사회라고 언급하였다. 메가스테네스가 저술한 역사서인 《인디카》에 따르면 찬드라굽타는 파탈리푸트라 행정부와 함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했다고 하며, 마우리아 제국의 수도인 파탈리푸트라에 대해 "64개의 성문과 570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성으로 둘러싸인 곳이자 페르시아의 궁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궁전을 지닌 도시"라고 기록된 부분이 존재한다. 엘리안은 메가스테네스를 직접적으로 인용하거나 파탈리푸트라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인도의 궁전은 페르시아의 수사 또는 엑바타나의 것보다 훌륭하다고 언급하였는데,[44] 이를 보아 파탈리푸트라의 도시 구조는 동시기의 페르시아의 도시 구조와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45]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 이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인도 아대륙 안쪽으로 관심을 돌려 북인도뿐만 아니라 중부 인도와 남인도 지역에도 확장을 시도하였는데, 상감 문학의 유명한 타밀 시인 마물라나르(Mamulanar)는 타밀 국가를 구성하는 데칸 고원 남쪽의 지역이 카르나타카의 군대를 사용하여 마우리아 군대에 어떻게 침입했는지 설명했다. 마물라나르는 바두가르(타밀나두의 북쪽에있는 안드라-카르나타카 지역에 거주한 사람들)가 마우리아 군대의 선봉대를 형성했다고 말했다.[46] [47] 또한 마우리아 제국의 궁정에는 데이마코스라는 그리스 대사가 머무르고 있었는데,[27]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찬드라굽타가 인도 전체를 정복했다고 하며 저스틴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인도를 소유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타밀나두주 티루넬 벨리 지구에 있는 포디일 언덕에서 그들의 경쟁자들을 물리친 남부 인도 동맹국들에 대한 마우리아 침략에 대해 언급한 타밀 상감 문학에 의해 입증되었다.[48][49]

결과적으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치세에 마우리아 제국은 오디샤 지역의 칼링가타밀라캄 지역의 촐라, 판디아, 체라를 제외한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통일하였지만,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재위 말기인 기원전 298년에 마우리아 제국의 영토에 발생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당시 그가 스승으로 모시던 자이나교 구루의 충고를 들은 후 정치에 손을 떼고 아들인 빈두사라에게 마우리아 제국의 황제 자리를 물려주었으며,[4][50][51] 자이나교에 귀의하여 출가한 후 고행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4]

빈두사라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73년)편집

2대 마우리아 황제 빈두사라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아들로, 그가 찬드라굽타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푸라나와 《마하밤사》,[52] 《파리쉬슈타-파르반》과 같은 자이나교 문헌들과 《비슈누 푸라나》와 같은 힌두교 문헌들을 통해 입증되었다.[53][54] 12세기 자이나교도 작가 헤마찬드라가 저술한 《파리쉬슈타-파르반》에 따르면, 빈두사라의 어머니의 이름은 두르다라였다.[55] 일부 그리스어 문헌에서도 "아미트로케테스(Amitrochates)"라는 이름으로 빈두사라를 언급하고 있다.[27][56]

빈두사라는 기원전 297년경 22세의 나이로 제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47] 즉위 당시 그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역과 발루치스탄 일부와 함께 인도 북부, 중부 및 동부 지역으로 구성된 큰 제국을 물려받았다. 빈두사라는 데칸 고원 남부의 카르나타카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동시에 해당 지역에 존재하던 16개의 왕국을 전부 정복하였으며, 칼링가남인도 지역을 제외한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57] 또한 벵골만아라비아해 사이의 반도 지역인 '두 바다 사이의 땅'을 정복했다고도 한다. 빈두사라는 일람체케니, 판디아, 체라, 촐라와 같은 타밀 왕국은 정복하지 않았으며, 이 남부 국가들과는 별도로 칼링가는 빈두사라 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지 않은 인도의 유일한 왕국으로 남아있었다.[58] 후에 그의 아들 아소카는 아버지의 통치 기간 동안 우자인의 총독으로 복무했으며, 이 도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59][60]

빈두사라의 삶은 그의 아버지 찬드라굽타 또는 그의 아들 아소카의 삶만큼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았다. 차나키야는 빈두사라의 재위 기간 동안 계속해서 총리로 일하였으며, 인도를 방문한 중세 티베트 학자 타라나타에 따르면, 차나키야는 빈두사라가 "16개 왕국의 귀족과 왕을 파괴하여 동서양 사이의 영토의 절대적인 주인이 되도록 도왔다고 한다.[61] 빈두사라 치세에는 반란도 자주 발생하였는데, 탁실라를 주도로 하는 웃타라파타(북부 속주)에서의 반란이 대표적으로 탁실라 시민들은 빈두사라의 치세 동안 2번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다. 첫 번째 반란의 이유는 그의 장남인 수시마의 잘못된 횡포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두 번째 반란의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빈두사라는 자신의 생애 동안 그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고 아소카 치세에 그 반란은 진압되었다.[62] 이와 관련하여 한 때 이 지역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아소카 황자가 웃타라파타 사람들이 이 속주를 담당하는 관리의 횡포로 인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안 후 그 관리에게 처벌을 내림으로서 평화적으로 반란을 진압하였고 이로 인해 탁실라 사람들의 지지를 얻게 되고 자신의 군대 또한 확장하였으며, 탁실라 인근에서 발생한 반란 또한 진압하며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지만,[63] 이 사건으로 아소카가 당시 제국의 황제인 빈두사라보다 시민들의 지지를 더 많이 받게 되면서 빈두사라는 아소카를 경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빈두사라는 그리스 세계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데이마코스는 셀레우코스 황제 안티오쿠스 1세의 대사로서 빈두사라의 궁정에 머물렀다.[64]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팔리보트라(파탈리푸트라)의 왕이 그리스 작가 람불루스를 환영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 왕의 정체는 빈두사라로 추정되고 있다.[64] 또한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이집트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가 디오니시우스라는 이름의 특사를 마우리아 제국에 파견하였다고 언급하였는데,[65][66] 샤일렌드라 나트 센에 따르면, 이 사건은 빈두사라의 치세 동안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64] 또한 빈두사라가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바실레우스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에게 무화과와 그리스 포도주, 그리스 수사학 교사를 사고 싶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으며, 이에 셀레우코스 제국에서는 "그리스 법에 교사 판매는 금지되어 있다"는 내용이 적힌 서신과 함께 무화과포도주를 보내주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67]

빈두사라의 아버지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자이나교를 믿었던 것과 달리, 빈두사라는 아지비카교를 믿었다. 빈두사라의 구루 핑갈라바스타는 아지비카교브라만이었으며,[68] 빈두사라의 부인인 수바드랑기는 참파(오늘날 바갈푸르) 지역의 아지비카교 브라만 출신이었다.[69] 빈두사라는 자이나교의 브라만 수도원에 여러 가지 지원금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0]

역사적 증거는 빈두사라가 기원전 270년대에 죽은 것을 암시한다. 우핀더 싱에 따르면, 빈두사라는 기원전 273년경에 사망했다고 하며,[47] 알라인 다니엘로는 그가 기원전 274년경에 사망했다고 주장한다.[56] 샤일렌드라 나트 센은 빈두사라가 기원전 273–272년경에 죽었고, 그의 죽음이 4년간의 연속적인 내전으로 이어졌으며 그 후 그의 아들 아쇼카가 기원전 269-268년에 황제가 되었다고 주장한다.[64] 마하밤사에 따르면 빈두사라는 28년간 즉위하였으며,[71] 찬드라굽타의 후임자를 "바드라사라"로 지명한 《바유 푸라나》는 빈두사라가 25년간 즉위했다고 기록하였다.[72] 한 설화에 의하면 기원전 273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을 직감한 빈두사라는 제국의 차기 황제로 아소카가 아닌 당시 웃타라파타 지역에 또다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부왕으로 파견된 수시마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 후 한 신하에게 수시마를 불러와 황위에 앉히고 대신 이전에 웃타라파타에서의 반란을 진압한 전적이 있는 아소카를 다시 파견해 반란을 재진압하도록 명령하였지만, 이 반란 자체가 그 신하가 수시마에게 앙금을 품고 당시 우자인을 주도로 하는 아반티파타(서부 속주)에 부왕으로 파견되어 있던 아소카를 황위에 앉히기 위해 웃타라파타의 시민들을 선동하여 꾸민 자작극이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아소카수시마보다 먼저 파탈리푸트라에 귀환하였다고 하며, 귀환한 아소카는 자신들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빈두사라를 찾아가 수시마가 아닌 아소카가 황위를 이어야 한다고 설득하였고 이에 빈두사라는 분노하며 이를 거절하였지만, 이 일로 화병까지 겹친 빈두사라는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소카 (기원전 273년 ~ 기원전 232년)편집

 
아소카 시대의 영토

빈두사라가 세상을 떠나며 사실상 아소카가 마우리아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되었다. 한편 반란을 진압하던 수시마는 이 소식을 들고 아소카가 있는 파탈리푸트라를 공격하였는데, 당시 마우리아 제국의 재상이었던 라다굽타파탈리푸트라의 동쪽 성문에다 여러 가지 기계 장치와 아소카의 동상과 군사들의 상을 만들고, 그 주위에 불구덩이가 덮어진 함정을 만든 후 수시마와 그의 군사들을 이쪽으로 유인해 함정에 빠뜨려 죽였다. 수시마 이외에도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대두하자 아소카는 4년에 걸쳐 99명의 이복 형제들, 자신에게 반대하는 500명의 신하들, 선왕인 빈두사라의 후궁들을 숙청하였으며, 4년후인 기원전 269년에 숙청 작업이 완료되자 대관식을 치루며 마우리아 제국의 3대 황제로 공식 즉위하였다.

아소카는 즉위 직후 행정제도 개편을 단행했으며, 웬만한 일은 신하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국정을 처리했다. 그는 자신이 식사를 하거나 침실에 있더라도 언제든지 국정 보고를 받고 일을 처리하며 국내 상황을 안정시켜나갔다.[73] 한편 당시 오디샤의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예로부터 교역에 유리한 항구들을 지녔던 칼링가 왕국은 강력한 해군을 동원하여 마우리아 제국의 주요 해상 무역로들을 차단하였는데,[74] 이로 인해 칼링가 왕국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아소카는 결국 기원전 268년에 칼링가 정벌을 개시하였다. 초기에는 칼링가의 군대를 과소평가한 나머지 소수의 군대만을 파견하여 칼링가군에게 패배를 겪었으나 이후 기원전 265년에 아소카가 직접 당시 보병 60만, 기병 10만, 코끼리 부대 9천마리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직접 원정에 나섰고 칼링가의 입구인 마하나디강에 도착하였다. 이 강을 건너가던 도중 아소카는 칼을 강물에 빠뜨렸는데, 이를 본 군사들을 불길한 예감에 철군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아소카는 부하들의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고 군대의 사기를 독려시키기 위하여 더 공격적인 자세로 진군에 나섰다. 마침내 마하나디강의 지류인 다와강에서 마우리아군과 칼링가군이 마주치면서 전면전이 발생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칼링가가 패배하며 칼링가는 마우리아 제국에 정복되었다. 이 전투로 칼링가군 10만명이 사망하고 칼링가인 15만명이 포로로 이송되었으며, 전투가 끝난 직후 칼링가의 한 마을에서 무수한 시체들과 고아가 된 아이들의 미쳐버린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은 아소카는 전쟁에 회의심을 가지게 되면서 마우리아 제국의 영토 확장을 중지하게 되었다.[75]

칼링가 전쟁이 끝난지 4년후인 기원전 261년에 불교에 귀의한 아소카는 "다르마에 의한 정복"을 표방하며 불교 기반의 통치를 시행하였는데, 마우리아 제국의 영토 전역에 약초 재배지,[76] 정신병원, 동물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을 건설하였고 병원에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하도록 하거나 곡식을 매우 싼 이자에 빌려주는 등 복지 제도를 크게 확충시켰으며, 물이 없는 마을에 노동력을 동원해 우물을 파거나 마우리아 제국의 영토 곳곳에 도로·관개(灌漑) 등의 공공사업을 시행하는 등 중앙 집권 체제를 발전시켰다. 특히 마우리아의 각 속주에 설치된 하위 행정 단위인 "아하라"(군현) 지역에 지방관직의 "프라데시카"와 토지 측정관직의 "라주카"를 5년 임기제로 지방에 파견시키는 제도를 실시하여 지방 행정을 더욱 체계화시켰으며, 이를 통해 백성들의 실제 생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지방 통치에 부조리가 없는 지를 감찰함으로써 안정적인 통치를 꾀했다. 아소카는 황궁에서 가축의 도살을 금지시킨 후 동물의 도살과 사냥에 대해 규제하는 법을 반포하였으며, 이 외에도 강제노동을 금지하거나 불교 이외의 아지비카교, 브라만교, 자이나교, 바가바트교와 같이 제국에 존재하는 다른 종교들도 허용하며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등 다르마에 기초를 둔 불교 이념을 통치 정책에 반영하면서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리를 보관하는 불탑 또한 아소카 치세부터 본격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하였는데, 석가모니 열반 직후 구성된 8개의 불탑에 안치된 사리를 꺼내 이를 고운 가루로 만들어 인도 전역에 8만 4000기의 불탑을 조성했으며,[77] 이때 산치 스투파,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붓카라 스투파 등이 건설되었다.[78]

 
아소카때의 불교 전파

아소카는 자신의 가르침과 사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구두 포고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의 동굴이나 석주에 규정들을 세긴 아소카 칙령을 선포한 후 이를 전국에 세웠다. 이 칙령들은 대부분 마가다 프라크리트어로 쓰였지만 그리스어, 아람어로도 쓰인 것들도 있는데, 이 칙령은 야바나인, 캄보자인. 간다라인들을 제국의 국경 지대에 사는 사람들로 언급하고 있으며, 아소카가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서부의 디아도코이 통치자들에게 불교 선교사들과 외교 사절을 보냈다는 것에 대한 언급도 담겨있다. 또한 칙령은 안티오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마가스 및 에피로스의 알렉산드로스 2세 등 당시 디아도코이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으며, 당시 마우리아 제국과 헬레니즘 세계 사이의 거리(약 4,000 마일)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79] 이 아소카 석주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석주인 사르나트의 4사자 석주는 오늘날 인도의 국장으로 사용될 정도로 균형미와 기법의 정교함을 인정받고 있으며,[80] 이 석주에 새겨진 법륜 문양인 아소카차크라는 오늘날 인도 국기의 정중앙에도 볼 수 있다.

쇠퇴편집

아소카 치세는 마우리아 제국의 전성기였지만, 아소카에 의해 브라만교야즈나와 같은 생명 희생 의식이 금지되며 브라만 계급의 위상이 좁혀지며 브라만 계급의 반발심을 샀으며,[81] 아소카 석주불탑의 공사 실시, 불교 교단에 면세 혜택을 주고 대규모의 재화를 보시하는 행위로 재정이 약화되었고 아소카 사후 마우리아 제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32년에 아소카가 사망하자 차기 황제로 즉위한 다사라타 마우리아의 실정으로 인하여 마우리아 제국은 전성기 시절에 확보한 영토들을 많이 상실하였으며, 삼프라티에 의해 다시 영토를 수복하여 잠시동안 중흥기를 맞이하였지만, 삼프라티 사후 암군들의 통치, 왕위 계승 분쟁, 제국 내 영토들의 독립, 최고 행정부인 소파가세누스의 부패,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침공 등이 겹치며 또다시 쇠퇴하였고 결국 기원전 185년에 마우리아 제국의 세나파티[82]였던 푸샤미트라 숭가의 쿠데타로 인해 브리하드라타 마우리아가 살해되며 왕조가 단절되면서 마우리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행정편집

 
마우리아 제국의 속주 주도가 나타나 있는 지도. 작은 별로 표시되어 있고 밑줄이 그어져 있는 도시가 각 속주의 주도이다. 큰 별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도시는 수도인 파탈리푸트라이다.

마우리아 제국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스승인 차나키야의 저서인 아르타샤스트라에 따라 인도 역사상 최초로 중앙집권적인 행정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이러한 행정 체제는 마우리아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굽타 제국 등 여러 북인도 왕조들에 의해 계승되는 등 후대 북인도 왕조의 행정 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앙편집

마우리아 제국의 중앙 행정부는 최고 통치자인 삼랏(황제), 각료 회의기구인 만트리파리샤드로 구성되었다. 삼랏은 제국의 최고 통치자로서 행정, 사법, 입법을 전부 총괄하였고, 만트리파리샤드는 제국의 최고 회의 기구로서 황제의 통치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이 기구의 구성원들은 다음과 같다.

  • 만트리파리샤드 아다크샤 - 오늘날의 의장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만트리파리샤드 회의를 총괄하였다.
  • 마하만트리 -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 세나파티 - 오늘날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제국의 국방을 총괄하였다.
  • 푸로히탐 - 최고 종교 지도자로, 제국 내부의 종교적인 사안들을 다루었다.
  • 유바라자 - 제국의 차기 후계로 황태자에 해당함.
  • 산니다타 - 왕실의 재산을 담당하는 관직
  • 그 외 20여 개의 기타 부서들을 담당하는 아다크샤(장관)들

이들중 "만트리파리샤드 아다크샤", "세나파티", "마하만트리", "유바라자"들은 높은 권한을 지녔기 때문에 이들이 만트리파리샤드의 주축을 담당하였다.

지방편집

마우리아 제국은 자국의 행정 구역을 수도인 파탈리푸트라가 위치한 마가다 지역과 그 외 4가지 "파타"(속주)로 나누었는데, 이 속주들은 다음과 같다.

각 "속주"들은 황자 출신으로 파견된 부황(副皇)이나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총독이 통치하였는데, 전자의 경우로 파견된 부왕은 "쿠마라"로 불렸으며 후자의 경우로 파견된 총독은 "아리야푸트라"로 불렸다. 특히 마우리아 제국에서는 성인이 된 황자를 각 속주로 파견하여 정치 경험을 쌓게 하는 전통이 있었는데,[83] 마우리아 제국은 처음으로 인도 아대륙을 통일했지만, 각 지역 세력을 강력하게 통제할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각 속주로 황자를 파견하여 황제를 보조하는 부황(副皇)으로서 마우리아 제국의 통치권 강화에 힘쓰도록 했다.

각 속주는 "아하라"(군현)들로 나뉘었으며 지방관직의 "프라데시카"와 토지 측정관직의 "라주카", 비서 및 지방 회계를 담당하는 관직인 "유크타" 3명이 "아하라" 지역을 담당하였는데, 이들 중 지방관인 "프라데시카"는 5년마다 중앙 정부가 있는 수도 파탈리푸트라에 방문해 근황을 보고해야만 하였으며, 이 제도는 아소카 시대부터 확립되었다.

"아하라"는 다시 "그라마"(마을)들로 나뉘었으며 마을의 회의 기구인 판차야트에서 선출된 그라미카(촌장)가 마을을 다스렸다.

시정편집

마우리아 제국의 수도인 파탈리푸트라에는 시정을 처리하기 위해 시민에 의해 선출되는 30명의 평의원으로 구성된 자치 행정 의회가 있었는데, 이 30여개의 평의원들은 각각 5명의 임원으로 구성된 6개의 위원회로 나뉘었다. 이 6개의 위원회들은 파탈리푸트라공업, 공예, 여행자나 순례자의 취급, 과세를 위한 사망 및 출생 신고의 접수, 물산 등을 관리하였으며 이들을 총괄하는 자치 행정 의회는 위생, 재정, 공원 및 공공 건축물 등을 관리하였다.[84]

사법편집

마우리아 제국에는 크게 민사재판을 담당하는 법원인 "다르마스티야"와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법원인 "칸타카소다나"라는 두 종류의 법원이 존재하였으며, 지방관이나 총독이 거주하는 도시나 마을에는 특별 법원이 있었다. 또한 메가스테네스에 따르면 마우리아 제국에서는 사소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사형당할 정도로 법률이 엄격했으며 이 때문에 범죄 또한 거의 일어나지 않아 시민들이 외출할 때 대문을 잠그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군사편집

메가스테네스에 따르면,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치세에 마우리아 제국의 군대는 해군, 군사 소송병, 보병, 기병대, 전차 사단, 전투 코끼리 등 6개의 병과로 편제되어 있었으며,[85] 보병 600,000명,[86] 기병 30,000명, 전투 코끼리 9,000마리 등 강력한 대군을 지니고 있었다.[87] 아소카 치세에 마우리아 제국의 군대는 보병 60만, 기병 10만, 전투 코끼리 부대 9천마리로 구성된 대군을 이루고 있었다.[88]

경제편집

 
마우리아 제국에서 통용된 파나

남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정치적 통일과 군사 안보를 이룬 마우리아 제국은 수자원이 풍부한 갠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수로 등을 개통하거나 농업 생산성을 높이면서 공동 경제 체계와 상업 체계를 강화하였다. 수백개의 왕국, 많은 소규모 군대, 강력한 지방 토후와 관련된 이전의 상황은 규율된 중앙 권한으로 이어졌다. 농부들은 지역 왕들로부터의 세금과 농작물 징수 부담에서 해방되었으며, 대신 아르타샤스트라의 원칙에 따라 국가적으로 관리되고 엄격하지만 공정한 과세를 납부했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 의해 파나가 인도 전역에 단일 통화로 통용되었으며, 지방 정부는 농민과 상인들을 지역 토후들로부터 보호하였다. 마우리아 군대는 지방에서 그들 자신의 우월성을 강요하려는 많은 갱단, 지방 민병대 및 강력한 토후들을 제거하였다. 마우리아 제국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공공 사업과 수로를 후원하였으며, 새로운 정치적 통합과 내부 평화로 인해 대내 무역 또한 크게 확대되었다.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 종전 이후인 기원전 303년부터 아소카 치세가 끝나는 기원전 232년까지 대외 무역 또한 크게 활성화되었는데,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사이에 위치한 항구인 카이버 패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항구로 기능하여 외부 세계와의 교역로로 작동하였으며, 마우리아 제국과의 무역 확대로 인하여 외부 세계는 새로운 과학 지식과 기술을 접하게 되었다. 서아시아의 디아도코이와 그리스 국가들은 제국의 중요한 무역 파트너가 되었으며 말레이 반도를 통한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 또한 확대되었다.

당시 마우리아 제국은 비단, 섬유, 향료 및 이국적인 음식들을 수출하였으며, 목재, 생선, 가축, 무화과, 포도주 등을 수입하였다. 또한 아소카에 의해 수천 개의 도로, 수로, 운하, 병원, 휴게소 및 기타 공공 공사의 건설이 진행되었고, 세금 및 농작물 수집과 같은 엄격한 관리 관행이 완화되면서 제국 전역의 생산성과 경제 활동이 향상되었으며, 고대 아시아에서 제일 긴 무역망 중 하나인 그랜드 트렁크로드도 마우리아 시대에 건설되었다.[89]

여러 면에서 마우리아 제국의 경제 상황은 몇 세기 후 로마 제국과 유사하였다. 둘 다 광범위한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고 유사한 조직적인 법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에는 공공 주도의 프로젝트에 주로 사용되는 조직 단체가 있지만 마우리아 제국에는 수많은 민간 상업 단체가 있었다. 이것들은 순전히 사적 상업을 위해 존재했으며 마우리아 제국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예술편집

 
마우리아 시대의 조각상
 
기원전 3세기 바라바르 동굴에 지어진 마우리아 건축물 로마스 리쉬 석굴.

마우리아 제국의 예술은 페르시아고대 그리스 미술 양식과 인도 고유의 양식이 결합되며 확립되었다.

마우리아 제국의 궁정에서는 석조 조형 예술이 발달하였는데, 아소카 시대의 석조물은 매우 다양한 양식이 있었고 높은 독립 기둥, 사리탑 난간, 사자 왕좌 및 기타 거대한 인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시기 동안 석재의 사용법은 매우 정교해져서 작은 석재 예술 조각조차도 고급 에나멜과 유사한 높은 광택을 내었으며, 아소카는 붓다의 상징을 담고있는 커다란 돔이었던 여러 개의 사리탑을 건설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탑은 산치, 바후트, 아마라바티, 보드가야 및 나가리우나콘다에 위치하고 있다. 주로 아소카 치세때 만들어진 약사여래상, 남자 토르소 조각 등이 대표적인 석조물이었으며 아시리아페르시아의 돌기둥 제작 방식을 반영해 추나르산의 사암으로 만들어져 종 모양 또는 동물 모양에 연꽃 문양으로 장식된 후 각 지역에 세워진 아소카의 기둥 또한 마우리아 궁정 예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민간에서는 나무를 재료로 하여 인도 고유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목조 조형 예술이 발달하였는데, 주로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을 조각한 미술로써 야크샤상·야크시니 여신상 등이 대표적이며, 궁정 예술보다는 예술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소박함을 지니고 있다.

이 시대에 지어진 주요 건축물로는 산치 스투파, 마하보디 사원 등의 불교 건축물들이 대부분이며 역시 석조 조형 예술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아소카 시대에 지어졌다. 예외적으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치세에 만들어진 가장 큰 건축물로 오늘날 파트나 쿰하르에 있는 파탈리푸트라 고궁이 존재한다. 발굴 작업을 통해 여러 건물의 그룹으로 여겨지는 궁전의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높은 목재 바닥 위에 지지된 거대한 기둥 홀이 존재한 것이 드러났다. 기둥은 규칙적인 열로 설정되어 홀을 여러 개의 작은 정사각형 베이로 나눈다. 기둥의 수는 80개이며 높이는 각각 약 7미터이다. 메가스테네스의 기록에 따르면, 수사엑바타나의 궁전보다 화려하고 웅장한 것으로 여겨진 이 궁전은 주로 목재로 이루어졌고 궁전의 기둥은 금색 덩굴과 은색으로 새로 장식되어 있으며, 건물은 물고기 연못이 있는 광대한 공원에 서있었고 다양한 관상용 나무와 관목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90] 카우틸랴아르타샤스트라는 이 시기의 궁전 건축 방법을 알려준다. 둥글고 가늘어지는 샤프트와 매끄러운 광택으로 거의 완성된 돌기둥 조각을 포함하여 나중에 아소카가 이전의 나무 기둥을 대체한 돌기둥의 건설을 담당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제일 널리 퍼진 마우리아 건축물은 아소카의 기둥아소카의 칙령으로, 종종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는 이 유적들은 인도 아대륙 전역에 40개 이상 세워져 있다.[91]

또한 난단가르와 산치 스투파의 아소카 기둥에 묘사되어 있는 공작은 마우리아 왕조의 상징이었다.[4]

종교편집

 
슈라바나벨라골라의 바드라바후 동굴, 이곳에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고행을 하다 사망하였다.
 
산치 단지의 중심에있는 붓다의 유물을 포함했던 스투파는 원래 마우리아 제국에 의해 지어졌지만, 그 주변의 난간은 숭가 제국 시기의 것이며, 장식용 관문은 후기 사타바하나 제국 시대에 만들어졌다.
 
현대 파키스탄 탁실라에 있는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아소카 황제가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우리아 제국에서 유행한 종교로는 자이나교불교, 브라만교 등이 있었다. 마우리아 제국에는 딱히 국교로 지정된 종교가 없었고 다른 종교를 박해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종교들이 공존하였다. 특히 아소카는 모든 종교가 공통적이고 긍정적인 본질을 공유한다는 믿음에 기초하여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장려했다.

자비로운 피야다시 왕은 모든 종교 교단들이 나의 영토들에서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 (바위 담마칙령 No.7)

지나친 자신의 교단에 대한 헌신 때문에 자신의 교단만 추켜세우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고 다른 교단을 비난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은 다만 자신의 교단을 더욱 심하게 해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알고 지내는 것은 바람직하며 다른 교단이 믿는 교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존중해야 합니다. 자비로운 피야다시 왕은 모든 교단의 사람들이 다른 교단의 훌륭한 교리에 관해 잘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각자의 교단에 집착된 사람들에게 이것을 말해야 합니다.: "자비로운 피야데시 왕은 보시나 존경은 모든 교단의 본질을 증진시키는 행위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바위 담마 칙령 No.12)

자이나교편집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왕위에서 물러난 후 자이나교를 받아들였다. 그는 방황하는 자이나교 승려 그룹에 합류하기 위해 왕좌와 물질적 소유를 포기했다. 찬드라굽타는 자이나교 수도사 아차리야 바드라바후의 제자였다. 그의 마지막 날에, 그는 카르나타카의 슈라바나벨라골라에서 자이나교의 엄격한 자기 정화 의식인 산다라 의식을 치루었다고 한다.[4][51][14][50] 아소카의 손자 삼프라티도 자이나교를 후원하였다. 수하스틴과 같은 자이나교 승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던 삼프라티는 인도 전역에 125,000개의 데라사(자이나교 사원)들을 건설하였으며,[92] 이 중 일부는 오늘날에도 아메다바드(Ahmedabad), 비람감(Viramgam), 우자인(Ujjain) 및 팔리타나(Palitana)의 도시에 여전히 남아있다. 또한 아소카가 외국에 사절들을 파견하여 불교를 전파한 것처럼 삼프라티그리스, 페르시아중동 지역 등 외국에 사절들을 파견하여 자이나교를 전파하는 등 자이나교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자세하게 이루어지진 않았다.[93][94]

그리하여 자이나교는 마우리아 통치하에서 중요한 생명력을 얻었으며, 찬드라굽타와 삼프라티는 남인도에 자이나교를 선교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십만 개의 자이나교 사원과 사리탑이 이 시기에 세워졌다고 한다.

불교편집

마우리아 제국의 중심이었던 마가다불교의 발상지였다. 처음에 아소카는 브라만교를 숭앙했지만 나중에 불교로 개종하였다. 칼링가 전쟁 이후, 그는 세금 사용과 반란군에 대한 무력, 집중적 정책, 무자비한 조치의 사용에 관한 확장주의와 침략, 그리고 아르타샤스트라의 가혹한 통치 정책을 포기했다. 아쇼카는 아들 마힌다와 딸 상하미타가 이끄는 선교사들을 스리랑카로 파견하였다. 티사 왕은 불교의 이상에 매우 매료되어 불교를 국교로 만들었다. 아소카는 서아시아, 그리스동남 아시아에 많은 불교 사절단을 보냈고 수도원과 학교의 건설뿐만 아니라 제국에서의 불교 문학의 출판을 의뢰했다. 그는 산치 및 마하보디 사원과 같이 인도 전역에 84,000 개의 스투파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태국시베리아를 포함한 북아시아에서 불교의 인기를 높였다. 아소카는 수도 근처에서 제3차 결집 및 각종 남아시아 불교 집회를 소집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집회는 불교 종교의 개혁과 확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인도 상인들은 불교를 받아 들였고 마우리아 제국에 불교를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95]

자연 보호 정책편집

인도의 동물 보호는 마우리아 왕조 시대에 실시되었다. 인도에서 통일된 정치 실체를 설립한 최초의 제국인 마우리아의 숲, 거주민 및 동물군 전반에 대한 태도가 관심을 끌고 있다.[96]

마우리아는 처음에 숲을 자원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임산물은 코끼리였는데, 그 당시 군대의 힘은 과 사람뿐만 아니라 전투 코끼리에게도 달려있었으며,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전 장군 중 한 명인 셀레우코스의 패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마우리아는 코끼리가 더 저렴하고 야생 코끼리를 기르는 것보다 길들이고 훈련하는 데 시간이 덜 걸리기 때문에 코끼리의 공급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카우틸랴의 아르타샤스트라는 고대 국가 공예에 대한 격언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코끼리 숲의 수호자와 같은 공무원의 책임을 명확하게 지정하였다.[97]

숲의 경계에 산림 관리인이 보호하는 코끼리를 위한 숲을 만들어야 한다. 코끼리 산림 관리 국장은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 모든 지형에서 코끼리를 보호해야 한다. 코끼리를 죽이면 사형에 처할 수 있다.

또한 목재를 보호하기 위해 별도의 숲을 지정하고 가죽으로 사용되는 사자호랑이도 보호하였다. 또한 다른 곳에서 동물의 수호자는 도둑, 호랑이 및 기타 포식자를 제거하여 를 방목할 수 있는 숲을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마우리아는 전략적 또는 경제적 측면에서 특정 산림 지역을 소중히 여기고 억제 및 통제하기 위한 제도를 도입하였다. 마우리아는 모든 산림 부족을 불신으로 여기고 뇌물과 정치적 정복으로 산림 부족들을 통제하였다. 그들은 국경을 지키고 동물을 가두기 위해 식량 수집가 또는 아란야카를 고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긴장되고 갈등으로 가득 찬 관계는 마우리아가 광대한 제국을 수호할 수 있게 하였다.[98]

마우리아 제국은 보호 의무를 맡은 특정 관리들과 함께 천연자원에 대한 명확한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아소카가 후기에 불교를 받아들였을 때, 그는 동물을 보호하고 심지어 당시 야생 황소, 코끼리, 코뿔소, 숫양 등의 동물들의 싸움 경연 대회인 사마자를 비롯한 왕실 사냥을 포기하는 등 통치 방식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아마도 세계 역사상 최초로 야생동물 보호 조치를 옹호한 통치자였으며, 심지어는 석조 칙령에도 규칙을 새겼다. 칙령은 많은 사람들이 동물 도살을 포기하는 왕의 모범을 따랐다고 선언하였으며, 그들 중 하나는 자랑스럽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98]

우리 왕은 동물을 거의 죽이지 않았다.

또한 이들 정책에 대한 언급은 돌기둥 담마 칙령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99][100]

자비로운 피야다시 왕은 이 담마칙령을 새기도록 하였다.

여기(내 영토 안에서는) 생명 있는 것들은 제물로 바치기 위해 죽여서는 안 된다. 또한 사마자를 열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자비로운 피야다시 왕은 이와 같은 사마자의 모임에서 여러 가지의 악함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비로운 피야다시 왕은 어떤 사마자는 허락한 것도 있다. 전에는 자비로운 피야다시 왕의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기 위해 매일 수많은 동물들이 도살되었다. 그러나 이 담마칙령이 씌여진 지금에는 단지 세 마리의 동물만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 도살된다.: 즉 두 마리의 공작새, 그리고 한 마리의 사슴이다. 그러나 이 한 마리의 사슴조차도 정기적으로 도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동물들도 장차는 도살되지 않을 것이다. (바위 담마 칙령 No.1)[101]

자비로운 피야다시 왕은 이와 같이 말한다.

내가 왕위에 오른지 26년이 되었을 때 나는 다음의 동물을 죽이는 것을 금하였다.: 앵무새, 살리카(구관조), 아루나(붉은 새의 일종), 붉은 거위, 야생 거위, 낭디무카, 겔라타, 박쥐, 여왕개미, 민물거북이, 뼈 없는 물고기, 웨다웨야카, 갠지스 강의 푸푸타카, 홍어, 바다거북, 호저, 다람쥐, 숫사슴, 야생 황소, 집에서 기르는 동물, 코뿔소, 하얀 비둘기, 집비둘기, 유용하지도 않고 먹을 수도 없는 네 발 가진 동물, 그리고 젖을 먹이거나 새끼 밴 또는 새끼 딸린 암염소, 암양, 암퇘지와 6개월도 안 된 어린 가축은 죽이는 것을 금한다. 수탉은 거세해서는 안 된다. 살아 있는 존재들이 숨어 있는 깍지(더미)를 불태우지 않으며, 정당한 이유 없이 또는 살아 있는 존재들을 죽이기 위해 숲을 불태워서는 안 된다. 동물에게 다른 동물을 먹이로 주어서는 안 된다. (돌기둥 담마칙령 No.5)[101]

아소카는 소비를 위해 죽여야 하는 동물의 도축 수효를 줄일 것을 주장했고, 그들 중 일부를 보호했으며, 일반적으로 거세과 같은 동물에 대한 폭력 행위를 규탄했다.

그러나 아소카의 칙령은 실제 사건보다 통치자의 욕구를 더 많이 반영하였으며, 왕실 사냥에서 사슴을 밀렵하는 경우 100개의 '파나'(코인)를 벌금으로 내게 하였다는 말은 아소카의 이러한 동물 보호에 대한 칙령을 위반하는 자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아소카의 법적 제한은 이후 사냥, 벌채, 낚시, 화전 등 서민들이 자유롭게 행사하는 관행과는 상충되는 것이었다.[98]

헬레니즘 세계와의 접촉편집

제국의 설립편집

헬레니즘 세계와의 관계는 마우리아 제국 초기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찬드라굽타 마우리아알렉산드로스 3세를 북서쪽의 탁실라 방면에서 만났다고 주장하였다.[102]

산드로코투스는 어렸을 때 알렉산더를 만났고, 우리는 알렉산더가 자신의 저속함과 낮은 출생으로 인해 미움과 경멸을 받았기 때문에 알렉산더가 자신을 나라의 주인으로 삼는 것을 간신히 놓쳤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북서인도 재정복(기원전 317년 ~ 기원전 316년)편집

찬드라굽타는 궁극적으로 알렉산드로스 3세 이후 서쪽 펀자브 지배자인 에우다모스가 기원전 317년에 추방될 때까지 또는 기원전 316년에 인더스 강 유역의 그리스 식민지 총독 에기노르의 아들인 페이톤이 바빌론으로 출국할 때까지 그리스인 사트라프들이랑 싸워 북서부 인도를 점령하였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인도는 마치 노예의 짐을 흔드는 것처럼 그의 지사들을 암살했다. 이 해방자는 산드라코토스(Sandracottos)였지만, 왕위를 차지한 후 자신이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한 바로 그 사람들을 억압했기 때문에 그는 승리 후 노예의 해방을 변화시켰다.

— 저스틴 XV.4.12–13[104]

나중에 알렉산더의 지사들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에 거대한 야생 코끼리가 그에게 다가가 길들인 듯 그를 등을 짊어지고 뛰어난 전사이자 전쟁 지도자가 되었다. 이렇게 왕권을 획득한 산드라코토스는 셀레우코스가 미래의 영광을 준비할 때 인도를 점령했다.

— 저스틴 XV.4.19[105]

셀레우코스와의 충돌과 동맹 (기원전 305년)편집

예전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아시아 지역의 마케도니아 사트라프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기원전 305년까지 박트리아인더스 강까지 동부 영토를 정복하고 자신의 권위 아래 두었다. 기원전 305년 그는 찬드라굽타 황제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항상 이웃 국가를 기다리며 무장하고 의회에서 설득력이 있는 셀레우코스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셀레우코스'카파도키아, 페르시스, 파르티아, 박트리아, 아라비아, 타푸리아, 소그디아, 아라코시아, 히르카니아 및 기타 인접 국가를 인수하였다. 인더스 강까지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되어 그의 제국의 경계는 알렉산더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광범위했다. 프리지아에서 인더스에 이르는 전체 지역은 셀레우코스의 관심사였다.

— 아피안, 로마의 역사, "시리아 전쟁" 55[106]

비록 충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셀레우코스가 어떤 영토도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 황제에 대해 가난하게 대항했으며, 실제로 이미 그의 것이었던 많은 것을 버려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레우코스와 찬드라굽타는 궁극적으로 합의에 도달했으며 스트라보에 따르면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05년에 체결된 조약을 통해 동부 아프가니스탄과 발루치스탄을 포함하여 찬드라굽타에 많은 영토를 양도하였다.

결혼 동맹편집

찬드라굽타와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03년에 평화 조약과 결혼 동맹을 맺었다. 찬드라굽타는 광대한 영토를 받았으며, 그 대가로 셀레우코스에게 50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주었고,[107][108][109][110][111] 기원전 301년 이프소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군사 자산을 주었다.[27] 이 조약에 더하여, 셀레우코스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메가스테네스를 그의 대사로 파견하였으며, 나중에 그의 아들 빈두사라에게는 데이마코스를 파견하여 파탈리푸트라 궁정에 머물토록 하였다. 나중에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파라오이자 아소카와 동시대 인물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디오니시우스라는 대사를 마우리아 궁정에 보낸 것으로 장로 플리니에 의해 기록되었다.[112]

주류 학설가들은 찬드라굽타가 힌두쿠시, 현대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발루치스탄 지방을 포함하여 인더스 서쪽의 광대한 영토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113] 고고학적으로, 아소카의 칙령 비문과 같은 마우리아 측의 구체적인 표시로는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칸다하르까지 차지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셀레우코스)는 인더스를 건너 인도의 왕 산드로코투스 마우리야와 전쟁을 벌였는데, 그 하천 유역에 살면서 서로 이해하고 결혼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공격 중 일부는 안티고노스가 사망하기 전과 그 이후에 수행되었다.

— 아피안, 로마의 역사, "시리아 전쟁" 55

그(산드라코토스)와 조약을 맺고 동방의 상황을 정돈한 후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와 전쟁을 벌였다.

— 주니아누스 저스티누스, Historiarum Philippicarum, libri XLIV, XV.4.15

"에피가미아 조약"은 그리스인인도인 간의 합법적인 결혼이 왕조 통치자나 일반인 또는 둘 사이에서 발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인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선물 교환편집

고전적인 소식통은 또한 그들의 조약에 따라 찬드라굽타가 다양한 최음제를 셀레우코스에게 보냈을 때와 같이 찬드라굽타와 셀레우코스가 선물을 교환했다고 기록하였다.[27]

그리고 테오프라스투스는 사람들을 더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과 같이 그러한 문제들에서 어떤 인위적인 것들이 놀라운 효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프불라추스는 인도인의 왕 산드라코투스가 셀레우코스에게 보낸 선물 중 일부를 참조하여 이 사실을 확인하였다. 멋진 애정을 불러 일으키는 매력처럼 행동하는 반면, 반대로 일부는 사랑을 버려야 했다.

그의 아들 빈두사라 '아미트라가타'(적의 학살자)는 또한 안티오쿠스 1세와 선물을 교환한 것으로 고전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27]

그러나 말린 무화과는 모든 사람들이 아주 많이 찾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아리스토파네스가 "말린 무화과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듯이) 인도인의 왕인 아미트로차테스조차도 안티오쿠스에게 무화과와 포도주, 수사학 교사를 사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헤게산더가 이 이야기를 말하며) 안티오쿠스는 그에게 "마른 무화과와 단 포도주를 우리가 당신에게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궤변가가 그리스에서 팔리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습니다."라는 답장을 보냈다.

인도의 그리스인 거주민편집

아소카의 치세에 상당한 수의 영향력 있는 그리스인 주민들이 인도 아대륙의 북서쪽에 거주하였으며, 이는 아마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인더스 강 정복의 잔재일 가능성이 있다. 아소카의 바위 칙령의 일부는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다. 아소카는 자신의 통치하에 있는 그리스인불교로 개종했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여기, 왕의 영토에서는 즉 요나 사람들, 캄보자, 나바카, 나바판디, 보자, 피티니까, 안드라, 그리고 풀리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자비로운 왕의 담마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 바위 담마칙령 Nb13

전에는 담마마하마타(법대관)가 없었다. 내가 왕위에 오른지 13년이 되었을 때에, 그들을 처음으로 임명하였다. 그들은 모든 종교 교단의 수행자들 사이에서 담마를 수립하기 위해, 담마를 증진시키기 위해, 그리고 담마에 헌신하는 사람들 즉 야바나, 캄보자, 간다라, 라스티카, 피티나카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서방 변경인 아파란타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일한다. 담마마하마타는 하인과 귀족, 브라만과 장자들, 가난한 사람과 노인들, 담마에 헌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들의 삶의 어려움을 제거하고, 복지와 행복을 얻기 하기 위해 일한다.

— 바위 담마칙령 Nb5[101]

칙령 13의 일부가 그리스어로 발견되었으며 그리스어아람어로 작성된 완전한 칙령이 칸다하르에서 발견되었다. 정교한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며 높은 수준의 고전 그리스어로 작성된 이 칙령에서 아소카는 프라크리트어로 작성된 다른 칙령에 쓰여져 있는 "다르마"를 번역할 그리스어 단어로 에우세비아("신앙심")를 사용하였다.

10년이 재위 기간이 흐르고 피야다시(아소카) 왕은 신앙심(εὐσέβεια, 에우세베이아)을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그는 사람들을 더 경건하게 만들었고 모든 것이 전 세계에서 번성하였다. 그리고 왕은 살아있는 존재를 (죽이는) 것을 삼가고, 다른 사람들과 왕의 사냥꾼과 어부들은 사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들이 부절제했다면, 그들은 그들의 부절제한 힘을 버렸다. 아버지와 어머니,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미래에도 과거와는 반대로 행동하면 더 잘하고 더 행복하게 살 것이다.

— Trans. by G.P. Carratelli

서방으로의 불교 전파 (기원전 250년)편집

아소카는 자신이 복지를 전파하기 위해 지중해까지 헬레니즘 세계의 왕들과 인도 전역의 사람들에게 사절단과 약초를 보냈다고 설명하면서 그가 말하는 '다르마'가 모든 영토에서도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칙령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사업을 계승한 당시의 헬레니즘 통치자들을 박트리아에서 그리스, 북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모두 파악하고 그 이름을 열거하였으며, 그들을 '다르마의 수혜자'로 불렀다. 이는 당시 아소카가 현지 지역에 대한 정세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19][120][121]

자비로운 왕은 담마에 의한 정복을 가장 훌륭한 정복이라고 생각한다. 자비로운 왕은 그의 영토에서뿐만 아니라 국경 지방의 사람들과 심지어는 6백 요자나(yojana) 거리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서도 이런 담마에 의한 정복을 성취해 왔다. 그 나라들은 암티요카라는 이름의 요나 왕과 암티요카의 영토 그 너머의 땅에 사는 투라마야, 앙티키니, 마카, 그리고 알리카수다라라는 이름의 네 왕들의 나라이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초다(Cholas), 판디야(Pandyas), 그리고 탕바팡니(Tamraparni) 나라만큼 멀리까지이다.

— 바위 담마 칙령 No.13.[122]

600 요자나의 거리(4,800 ~ 6,000 마일)는 대략 인도와 그리스 사이의 거리에 해당한다.[117]

아소카 석주에서 안티오코스는 "Amtiyoge nama Yona-raja"("안티오코스라는 이름의 그리스 왕"이라는 뜻이다)라고 불리는데, 그 밖에 네 명의 다른 군주들은 비문에서 "param ca tena Atiyogena cature 4 rajani Tulamaye nama Amtekine nama Makā nama Alikasudaro nama" ("그리고 안티오코스 너머, 네 명의 군주들 즉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이름의, 안티고노스라는 이름의, 마가스라는 이름의, 알렉산드로스라는 이름의").[123]로 표기되고 있다.

아소카의 바위 담마 칙령 13호에 언급된 모든 왕들은 유명한 헬레니즘 통치자들로서 아소카와 동시대에 해당한다.[117][124]

그리스측의 기록에는 아소카 대제가 그의 석주 속 비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 방면으로 파견된 이들 특사단(법대관)이 실제로 받아들여졌는지, 아니면 헬레니즘 세계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 문자와 그리스 철학적 언어로 된 칙령의 존재는 칸다하르에 존재했던 헬레니즘 공동체가 고도의 정교함을 지녔으며, 그리스 지식인과 인도 사상 사이에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한다.[125][126] 프랑스의 그리스 및 이집트사 학자 루이스 로버트(Louis Robert)는 인도 문화에 매우 익숙했던 칸다하르 지역의 그리스 교민들이 셀레우키아,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펠라 또는 키레네에서 차례로 인도 사상을 지중해 세계의 헬레니즘 철학계에 전달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하였다.[126] 그는 아소카의 바위 담마 칙령 제13호에 따라 서부 헬레니즘 지역으로 파견된 유명한 아소카의 전법 사절단이 그 사행 임무를 수행할 충분한 능력을 가진 칸다하르의 그리스인 교민과 칸다하르 주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주장하였다.[126]

또한 아소카는 인간동물을 위한 약초의 개발을 장려하였다.

자비로운 피야다시 왕의 왕국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국경 너머 사람들에게도, 즉 초다(Chodas), 판디아(Pandyas), 사티야푸타(Satiyaputa)[설명 1][127] 케랄라푸타(Kelalaputa),[설명 2][128] 그리고 저 멀리는 탐라파르니(Tamraparni)까지, 그리고 암티요카라고 부르는 야바나 왕에게까지, 그리고 암티요카 왕의 이웃 왕들에게까지, 어디든지 자비로운 피야다시 왕은 두 가지 종류의 의료 진료소를 설립하였다. 사람을 위한 의료 진료소와 동물을 위한 의료 진료소이다.

사람과 동물에게 적합한 약초를 구할 수 없는 곳은 어디든지 약초를 가져다가 심도록 하였다. 어디든지 약초 뿌리나 약초 열매를 구할 수 없는 곳은 그것들을 가져다가 심도록 하였다. 사람과 동물들의 이익을 위해 길을 따라 우물을 파고 나무를 심게 하였다. (바위 담마칙령 No. 2)[101]

다르마라크시타와 같은 아소카의 사절 중 일부는 팔리어 문헌에서 불교 개종에 적극적인 그리스인("요나") 승려로 묘사되기 때문에 인도의 그리스인은 불교 전파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XII 마하밤사[129]).

수바가세나와 안티오코스 3세 (기원전 206년)편집

소파가세누스는 기원전 3세기 인도 마우리아의 통치자로 고대 그리스 문헌에 설명되어 있으며 프라크리트어 문헌에서 수바가세나 또는 수바샤세나로 명명되었다. 그의 이름은 마우리아 왕자 명단 및 프라드윰나의 후손인 야다바 왕조 명단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는 아소카 또는 아소카의 아들 쿠날라의 손자일 가능성이 있다. 그는 아마도 간다라에 있는 힌두쿠시의 남쪽 지역을 통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셀레우코스 제국바실레우스 안티오코스 3세박트리아에서 에우티데무스와 평화 조약을 맺은 후, 기원전 206년에 인도로 방문하여 그곳에서 인도 왕과의 우정을 회복했다고 한다.

그(안티오코스)는 코카서스를 건너 인도로 내려와 인도인의 왕 소파가세누스와의 우정을 회복했고 더 많은 코끼리를 받아 총 150마리로 충원한 후 그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회군하였으며, 소파가세누스가 그에게 주기로 약속한 보물을 가져오는 일을 키지쿠스의 안드로스테네스에게 맡겼다.

— 폴리비우스 11.39

역대 황제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해편집

  1. 타밀 지역을 지배하던 아티야만 네두만 안치(Athiyamān Nedumān Añci)로 추정된다.
  2. 오늘날의 인도 서남부에 위치하는 케랄라(Kerala) 주의 프라크리트어 표기.

각주편집

  1. BOESCHE, Roger. The First Great Political Realist: Kautilya and His Arthashastra. Lanham, Maryland: Lexington Books, 2002. ISBN 0-7391-0401-2. S. 11. (anglicky)
  2. Boyce, Mary; Grenet, F. (January 1991). 《A History of Zoroastrianism, Zoroastrianism under Macedonian and Roman Rule》 (영어). BRILL. 149쪽. ISBN 978-90-04-29391-5. 
  3. Keay, John (2000). 《India: A History》. Grove Press. 82쪽. ISBN 978-0-8021-3797-5. 
  4. R. K. Mookerji 1966.
  5. Seleucus I ceded the territories of Arachosia (modern Kandahar), Gedrosia (modern Balochistan), and Paropamisadae (or Gandhara). Aria (modern Herat) "has been wrongly included in the list of ceded satrapies by some scholars ... on the basis of wrong assessments of the passage of Strabo ... and a statement by Pliny" (Raychaudhuri & Mukherjee 1996, p. 594).
  6. John D Grainger 2014.
  7. The account of Strabo indicates that the western-most territory of the empire extended from the southeastern Hindu Kush, through the region of Kandahar, to coastal Balochistan to the south of that (Raychaudhuri & Mukherjee 1996, p. 594).
  8. Sri Lanka and the southernmost parts of India (modern Tamil Nadu and Kerala) remained independent, despite the diplomacy and cultural influence of their larger neighbor to the north (Schwartzberg 1992, p. 18; Kulke & Rothermund 2004, p. 68).
  9. The empire was once thought to have directly controlled most of the Indian subcontinent excepting the far south, but its core regions are now thought to have been separated by large tribal regions (especially in the Deccan peninsula) that were relatively autonomous. (Kulke & Rothermund 2004, p. 68–71, as well as Stein 1998, p. 74). "The major part of the Deccan was ruled by [Mauryan administration]. But in the belt of land on either side of the Nerbudda, the Godavari and the upper Mahanadi there were, in all probability, certain areas that were technically outside the limits of the empire proper. Ashoka evidently draws a distinction between the forests and the inhabiting tribes which are in the dominions (vijita) and peoples on the border (anta avijita) for whose benefit some of the special edicts were issued. Certain vassal tribes are specifically mentioned." (Raychaudhuri & Mukherjee pp. 275–6)
  10. Kalinga had been conquered by the preceding Nanda Dynasty but subsequently broke free until it was re-conquered by Ashoka, c. 260 BCE. (Raychaudhuri & Mukherjee, pp. 204–209, pp. 27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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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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