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프탈(박트리아어: ηβοδαλο),[1] 백훈족 또는 백후나족(산스크리트어: श्वेतहुन् 스웨타후나)[2][3]는 기원후 5~8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에 살았던 유목민이다. 중국 사적(史籍)에는 엽달(嚈噠), 읍달(悒怛), 혹은 활(滑)이라고 기록되었고, 서방 사료에는 Ephthalitae, Abdel, Haital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에프탈 제국이라는 제국을 형성했으며, 키다라를 물리쳤던 450년부터 돌궐 제1 카간국사산 제국의 연합군이 그들을 물리쳤던 560년까지 군사적으로 중요했다.[4] 서기 560년 이후, 그들은 서돌궐( 옥수스 북쪽 지역)와 사산 제국(옥수스 남쪽 지역)의 종주권 아래 토하리스탄 지역에 "제후국"을 세웠으며, 625년에 토하라 야브구에 의해 멸망할때까지 존속하였다.[4]

에프탈
ηβοδαλο

 

 

 

408년~710년
문장
에프탈의 상징(탐가)
수도
정치
정치체제유목제국
인문
공용어박트리아어
공통어소그드어
프라크리트어
토하라어
튀르크어
산스크리트어
종교
종교힌두교
네스토리우스교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이전 국가
다음 국가
키다라
사산 제국
고차
알촌 훈족
네자크 훈족
돌궐
사산 제국
튀르크 샤히
준빌
차가니얀 공국

박트리아에 기반을 둔 에프탈 제국은 동쪽으로는 타림 분지까지, 서쪽으로는 소그디아나까지,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까지 확장했지만, 그들은 이전에 에프탈의 확장으로 잘못 간주되었던 알촌 훈족이 점령한 힌두쿠시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들은 부족 연합체였으며 유목민과 정착 도시 공동체를 모두 포함했다.[5] 그들은 키다라족과 알촌족이 선행하고, 네자크 훈족과 돌궐 제1카간국이 계승한, 총칭 시온(Xyon) 또는 후나(Huna)로 알려진 4개의 주요 국가의 일부를 형성했다. 이 모든 훈족들은 같은 시기에 동유럽을 침략한 훈족들과 종종 연관되어 있거나 "훈족"으로 언급되어 왔지만, 학자들은 그러한 연관성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에프탈인의 본거지는 힌두쿠시 북쪽 경사면에 있는 토하리스탄(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남부와 아프가니스탄 북부)이었고, 그들의 수도는 쿤두즈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마도 동쪽의 바다흐샨 지역에서 왔을 것이다.[4] 479년까지 에프탈인들은 소그디아를 정복하고 키다라인들을 동쪽으로 몰아냈고, 493년까지 그들은 오늘날의 중가리아타림 분지(현재 중국 북서부)의 일부를 점령했다. 이전에 에프탈과 혼동되었던 알촌 훈족북인도로도 진출하였다.[6]

에프탈 역사의 출처는 매우 희박하고,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서로 다르다. 왕들의 이름과 가계도조차 없으며 역사학자들은 이 민족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처음에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 제대로 확신하지 못한다. 따라서 에프탈에 대한 자료는 그들의 침략을 받았던 주변 국가들, 특히 사산 제국이나 굽타 제국, 타림 분지 도시국가들의 기록에 의존해야 한다.

이름 편집

"에프탈"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강함"이라는 뜻의 호탄어 단어 *Hitala, 가설적 소그드어 *Heβtalak의 복수형인 Heβtalīt, 또는 중세 페르시아어 *haft āl, 7개의 아리아인)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7][8][9]

에프탈인들은 비문에서 스스로를 에보달로(Ebodalo, 박트리아어:  , 그리스어 비문: ηβοδαλο)이라고 칭했고, 동전에는 보통 '에프(박트리아어:  , 그리스어 비문: ηβ)'로 축약되어 표기되었다. 2011년 니콜라스 심스 윌리엄스가 소개한 한 독특한 인장에는, 수염이 없고 둥근 얼굴에 비스듬한 아몬드 모양의 눈을 가진 초기 에프탈 통치자가 초승달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었으며, 박트리아어로 '에프탈인들의 군주(ηβοδαλο ββγο)'라 새겨져 있었다. 위와 같은 명칭들은 에프탈인들의 행정 기능을 설명하는 롭 왕국의 동시대 박트리아 문서에서도 발견되어 신빙성을 더해준다.[10][11]

 

에프탈 군주의 인장
5~6세기 무렵 에프탈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 인장.
방추형의 초승달 장식이 있는 투구를 쓴 인물이 보이는데, 그는 아마 초기 에프탈 통치자였을 것이다.

인장에는 박트리아어로 밑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ηβοδαλο ββγο
'ēbodālo bbgo
"
에프탈인의 군주(야브구)"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 문헌들은 그들을 헤프탈리테(Hephthalitae, 그리스어 기록: Ἐφθαλῖται), 압달(Abdel) 또는 아브델(Avdel)이라고 불렀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에프탈인들은 헤프탈(Hephthal), 헵탈(Hep't'al), 테탈(Tetal) 등으로 불렸으며 때때로 쿠샨 제국쿠샨족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페르시아어 사료에는 헤프탈(Hephtal), 헤브탈(Hēvtāls) 등으로 기록되어 있고, 아랍에서는 이들을 알-하야틸라(al-Hayaṭila, 아랍어: هياطلة), 헤야텔라이트(Heyâthelites)로 불렀으며 종종 튀르크인들과 혼동하였다. 제키 벨리디 토건(Zeki Velidi Togan, 1985)의 주장에 따르면, 아랍어 -b가 -y와 유사했기 때문에, 페르시아 및 아랍측 기록에서의 'Haytal'라는 기록은 사실 'Habtal'의 문법적 오류였다.

중국의 연대기에서는 이들을 '얀다이일리투오(厭帶夷栗陀, 발음:Yàndàiyílìtuó, 염대이률타)', 더 일반적으로 축약된 형태인 '예다(嚈噠, 발음:Yèdā, 엽달)', '후아(滑, 발음:Huá, 활)' 등으로 기록하였다. 후자의 이름은 이후 예다(Yeda), 예타(Yeta), 얀다(Yanda) 등 다양한 라틴어 기록으로 남겨졌다. 현대의 표준중국어(북경어) 발음보다 중고한어 발음이 더욱 잘 보존되어 있는 광둥어(Yipdaat/teoptal)와 한국어(엽달)는 그리스어 Hepthalite와 거의 일치한다. 몇몇 중국 연대기 작가들은, '헤프타(Hephtha, 厭帶夷栗陀 or 嚈噠)'라는 기록은 엄밀히 말해서 황제에 해당하는 칭호이며, '활(Huá, 滑)'은 에프탈 내에서 지도적인 위치의 부족이었다고 주장한다.

고대 인도에서는 에프탈과 같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에프탈인들은 인도에서 '후나(Huna)' 또는 '투루쉬카(Turushkas)'로 알려진 민족들의 일부이거나 그들의 친척이었지만, 이러한 이름들은 좀 더 광범위하게 중앙아시아유목 민족들을 가르키는데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고대 산스크리트어 기록인 『프라비샤수트라』는 하비타라(Havitara)라는 이름의 민족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것이 에프탈인들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대부분의 인도 기록들은 에프탈인들을' 스웨타후나(Sveta Huna, 백훈족/백후나족, 산스크리트어: श्वेतहुन्)'로 칭하고 있다.

지리적 기원과 팽창 편집

에프탈인들은 바다흐샨이나 알타이에서 왔으며,
박트리아(토하리스탄)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수도를 쿤두즈로 삼았다.[12]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에프탈인들의 근거지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남부와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한 힌두쿠시 산맥의 북쪽 비탈에 있는 박트리아(토하리스탄)이었다. 그들의 수도는 아마도 쿤두즈였을 것이다.

에프탈인들은 동쪽의 파미르 고원을 지나 바다흐샨 지역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또는 훈족을 포함한 유목민들의 대이주 물결을 틈타 알타이 일대에서 이주해왔을수도 있다.

서쪽과 남쪽으로 팽창한 이후, 에프탈인들은 박트리아에 정착했고, 그곳에 있던 알촌 훈족을 밀어내어 그들이 북인도를 침입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들은 사산 제국과 접촉하여 페로즈 1세가 페르시아의 샤한샤로 즉위하는 데에 상당한 군사적 기여를 했다.

이후 5세기 후반에는 광활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중국 북위 왕조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된 유연 카간국으로부터 타림 분지를 빼앗아 오아시스 도시국가들로부터 많은 공물을 받았다.

기원 및 특징 편집

아프가니스탄의 고대 도시 유적 딜버진 테페(Dilberjin Tepe)에서 발견된 벽화. 초기 에프탈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 중 하나이다.[13][14][15][16]이 그림에 그려진 사람들은 '에프탈 군주의 인장'에 버금가는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17]

에프탈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란계 민족이라는 의견과[18][19][20] 알타이 지역[21][22][23][24][25][26]에서 발원한 민족이라는 설이 있다. 현재 가장 신빙성 있는 이론은, 에프탈인들이 처음에는 튀르크계 유목민에게서 기원했고 나중에 박트리아 지역에 정착하면서 박트리아어를 채택했다는 것이다.[27]

대부분의 학자들에 따르면, 에프탈인들은 박트리아(토하리스탄)에 정착한 후 이전의 쿠샨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박트리아어를 공용어로 채택했다. 박트리아는 동이란계 언어였지만, 기원전 2~3세기에 그 지역에 있었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잔재인 그리스 문자로 표기되었다. 박트리아는 공용어였을 뿐만 아니라 에프탈인들이 지배하는 토착 지역 주민들의 언어이기도 했다.

에프탈인들은 그들의 동전에 Yabghu(야브구)와 같은 칭호를 박트리아어로 새겼는데, 이러한 풍습은 중국 지역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피르다우시샤나메에 기록되어 있는 에프탈 통치자들의 이름은 페르시아어였다. 1959년, 카즈오 에노키는 고대의 사료들이 일반적으로 이들이 소그디아나힌두쿠시 산맥 사이에 위치했다고 기록한 것과 에프탈인들이 일부분이지만 이란계 민족들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근거하여, 그들이 박트리아에서 기원한 인도유럽계 동이란인이라고 제안했다. 리처드 넬슨 프라이(Richard Nelson Frye)는 에노키의 가설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에프탈인들은 아마도 혼혈 무리였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란 백과사전(Encyclopaedia Iranica)이나 이슬람 백과사전(Encyclopaedia of Islam)에 따르면, 에프탈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유래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대 유적 발할리크 테페에 있는 벽화. 화려한 연회 장면들은 당시 박트리아의 에프탈 지배층들의 삶을 보여준다.[28][29][30]

요제프 마르콰트(Josef Marquart)와 르네 그루셰(René Grousset)와 같은 몇몇 학자들은 에프탈이 초기 몽골족일 가능성을 제안했다. 유태산은 에프탈의 기원을 선비족, 더 나아가서는 고구려까지 추적하기도 했다.

드 라 바시에르(de la Vaissière)와 같은 다른 학자들은 중국측 사료에 대한 최근의 재평가를 근거로, 에프탈이 처음에는 초기 튀르크족에게서 기원했지만 나중에는 여러 목적으로 박트리아어를 채택하게 되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사실 에프탈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민족들의 연합체였을지도 모른다. 리처드 넬슨 프라이(Richard Nelson Frye)에 따르면:

후대의 유목 제국들이 수많은 민족들의 연합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잠정적으로 이 침략자들의 지배 집단이 동쪽과 북쪽에서 온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민족이거나, 적어도 그들이 이 연합에 포함되어 있다고 제안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시온(Xion)족 연합에 속한 민족들과 에프탈인들은 이란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 경우에 유목민들은 기존에 그랬던 것처럼 정주 민족들의 언어, 제도, 문화를 채택했다.[31]

유럽 훈족과의 관계 편집

마틴 쇼트키(Martin Schottky)에 따르면, 에프탈인들은 동시대에 유럽을 침공한 훈족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그들의 이동에는 인과적으로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이들은 적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스스로를 '훈'이라고 불렀다.

이와는 반대로, 드 라 바시에르(de la Vaissière)는 에프탈이 알타이 지역에서 기원하고 유럽에 도달한 4세기의 훈족 이동의 일부였으며, 이 훈족들은 '정치적, 부분적으로 흉노의 문화적 계승자'였다고 생각한다. 이 대규모 이동은 4세기의 기후 변화에 인해 촉발되었으며, 알타이 산맥과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에 영향을 미쳤다. 아만다 로마조프(Amanda Lomazoff)와 아론 랄비(Aaron Ralby)에 따르면, 훈족과 에프탈 사이에 광범위한 영토적 중복이 있었으며 서쪽의 아틸라의 '공포의 통치'와 남쪽의 에프탈 사이에는 높은 동시성이 존재했다고 한다.

6세기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전쟁의 역사, 1권 3챕터)는 에프탈인들이 유럽의 훈족과 관련이 있지만, 에프탈인들의 정교함을 강조하면서 서로의 문화적, 사회적 차이를 주장했다.

백훈족이라고 불리는 에프탈 훈족은 이름에서 훈족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혈통적으로 훈족이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알려진 어떠한 훈족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의 영토는 페르시아의 북쪽에 있다....(중략) 그들은 다른 훈족처럼 유목민은 아니고, 오랫동안 좋은 땅에서 정착 생활을 해왔다. 훈족들 중에서 추하지 않은 하얀 몸과 얼굴을 가진 사람은 오직 그들뿐이다. 또한 그들의 생활 방식이 친척들의 그것과 같지도 않고, 그들처럼 야만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들은 한 명의 왕에 의해 통치되고 있고, 합법적인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로마인들과 페르시아인에 못지 않게 서로와 이웃들간의 거래에서 옳고 그름과 정의를 준수한다.[32]

중국 연대기에서 편집

서기 600년 경 제작된 바미얀의 불상 벽화 중 일부. 에프탈 왕족의 삶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삼각형 옷깃, 헤어스타일, 얼굴과 장식 등이 발할리크 테페의 그림에 그려진 인물들과 유사한데, 이는 아마도 에프탈 고유 양식이었을 것이다. 바미얀은 에프탈 지배 하에서 크게 발전했다.

에프탈은 서기 456년에 에프탈 사절이 북위 왕조의 궁정에 도착하면서 중국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중국인들은 '엽달(嚈噠, Yèdā)', '활(滑, Huá)', '염대이률타(厭帶夷栗陀, Yàndàiyílìtuó)' 등으로 이들을 기록했다. 고대 중국 황실 연대기는 에프탈의 기원에 대해 다양한 설명을 기록해놓았다.

  • 위서』및 『북사』와 같은 초기 연대기에는, 에프탈인들이 '고차대월지의 후예'라고 기록되어 있다.
  • 후대 연대기로 갈 수록 '대월지의 후예'라는 기록이 많아진다.
  • 유송·남제 시대의 학자 배자야(裴子野)는 에프탈이 서기 2세기 무렵 투르판 일대에 존재했던 차사(車師)국 장군의 후손이라고 기록하였는데, 그 장군의 이름이 팔활(八滑)이었기 때문이다.
  • 양서 (역사서)』54권 열전 48제에 따르면

차사국의 별종인 활국(滑國)이 후한(後漢) 영건(永建) 원년(126)에 북로(北虜, 북쪽의 오랑캐)를 치는 데 공을 세웠으며...(중략) (魏)·(晉) 이래로 중국과 교통하지 않았다가, 천감(天監) 15년(516)에 이르러 그 왕 염대이률타(厭帶夷栗陀)가 비로소 사자를 보내 그 나라의 특산물을 바쳤다.

滑國者, 車師之別種也. 永建元年, 八滑從班勇擊北虜有功, 勇上八滑爲後部親漢侯. 自·以來, 不通中國. 至天監十五年, 其王厭帶夷栗陀始遣使獻方物.

  • 당나라 시대의 정서(政書)인 통전(通典)에 등장했다. 여행가 위제의 말에 따르면, 동방에 한 고차 출신 장군이 이름을 '이티안(Yitian)'이라고 지었는데, 이와 연관지어 에프탈인들이 고차의 후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기록되었다.

카즈오 에노키는 1959년 중국 출처 기록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통해, 에프탈이 박트리아(토하리스탄) 지역의 부족이며 그 기원이 히말라야 서부에 있다고 추측했다. 그는 또한 에프탈인들이 박트리아어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과, 그들이 히말라야 서부의 고유 풍습인 일부다처제를 했다는 것을 논쟁의 대상으로 삼았다.

최근 드 라 바시에르(2003)가 중국 사료를 재평가한 결과에 따르면, 에프탈의 주요 민족성을 나타내는 튀르크계 고차의 어원만 유지되어야 하며, 대월지에 대한 언급은 당시에만 존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최초의 중국 기록은 후대의 『통전(通典)』에 인용된『위서 (역사서)』에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그들이 서기 360년 경 알타이 지역에서 남쪽으로 이주했다고 보고했다.

엽달국(嚈噠國)은 대월지와 유사한 종족이며, 고차의 별종(別種)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본디 새북(塞北, 북쪽의 변방)에서 기원하였는데, 금산(金山)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우전의 서쪽 즉 오허수(烏許水) 남쪽 200리 되는 곳에 도읍을 정하였고, 그곳은 장안과 10,100리 떨어진 곳이다...(중략) 이는 북위 문성제(제위 440~465년)보다 약 80년에서 90년 전의 일이다.(즉, 360년경) 그 사람됨은 흉폭하며 싸움에 능하다. 서역의 강거, 우전, 사륵(沙勒), 안식 및 다른 소국 30여 개가 모두 그들에게 복속하며 ‘대국(大國)’이라고 칭한다. 연연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다. 태안(太安) 연간 이후 매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으며, 정광(正光) 말년에는 사신을 보내 사자 한 마리를 바쳤는데, 고평(高平)에 이르렀을 때 묵기추노(万俟醜奴)의 반란이 일어나 그로 인하여 억류되었다가, 난이 평정되자 경사로 보내졌다. 영희(永熙) 연간 이후 조공이 마침내 끊어졌다.

嚈噠國, 大月氏之種類也, 亦曰高車之別種, 其原出於塞北. 自金山而南, 在于闐之西, 都烏許水 南二百餘里, 去長安一萬一百里...(중략) 至後魏 文成帝時已八九十年矣. 其人兇悍, 能鬥戰. 西域 康居·于闐·沙勒·安息及諸小國三十許, 皆役屬之, 號爲大國. 與蠕蠕婚姻. 自太安以後, 每遣使朝貢. 正光末, 遣使貢師子一, 至高平, 遇万俟醜奴反, 因留之. 醜奴平, 送京師. 永熙以後, 朝獻遂絶.

— 『위서』102권 열전 제90 西域에서 발췌

또한『위서』는 고차와 흉노 사이의 언어적, 민족적 연관성을 언급했다. 한편 몇몇 중국의 기록들은 에프탈이 이미 대월지의 옛 영토인 박트리아에 정착했다는 점을 들어 대월지에게서 유래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후대의 중국 기록들은 에프탈의 민족적 기원에 대해 상당히 혼란스러워하는데, 이는 에프탈이 박트리아에 정착한 이후 그곳의 문화와 언어에 점진적으로 동화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북사』에서는 북위의 승려인 송운(宋雲)이 중앙아시아를 방문했을 무렵인 6세기 전반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에프탈인들의 언어는 유연이나 고차,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다른 유목 부족들의 언어와 달랐다고 설명한다. 『양서』및 『양직공도』에서는, 원래 에프탈인들은 문자가 없었고 이후 박트리아어를 받아들였다고 설명한다.

외모 편집

 
박트리아 지역의 또 다른 고대 유적지인 타브카 쿠르간에서 발견된 벽화.[33][34]
이것은 특히 '얼굴의 묘사' 부분에서 발할리크 테페의 벽화와 유사한 양식을 보여준다.[33]

에프탈인들은 박트리아 지역의 여러 벽화에 등장하는데, 특히 발할리크 테페의 연회 장면을 묘사한 벽화와 바미얀 석불의 천장에 그려진 그림이 대표적이다. 이 그림에 있는 몇몇 인물들은 튜닉의 옷깃이 오른쪽으로 접힌 띠를 두른 외투, 머리 장신구, 흰 피부, 둥근 수염 없는 얼굴과 같은 독특한 외모를 보여준다.

아마도 바미얀 석불에 그려진 인물들은 기념비적인 거대 부처 석상의 건립을 지지했던 기부자들과 권력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그림들은 '박트리아(토하리스탄)의 에프탈 지배층의 예술적 전통'에서 상징적인 위치에 있다.

에프탈과 관련된 그림들은 종종 '중앙아시아 미술사의 에프탈 시대'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었다. 매우 수준이 높은 타브카 쿠르간발할리크 테페의 그림들도 여기로 분류되는데, 옷의 묘사와 무늬, 얼굴 표현 등에서 서로 유사한 양식이 나타난다.

중앙아시아 예술에서 이 '에프탈 시대'는 오른쪽이 삼각형으로 접힌 카프탄(caftan)형 의복, 크롭컷 스타일의 머리, 초승달 모양의 장신구가 달린 왕관 등이 특징으로, 이러한 양식의 그림들이 소그디아나, 바미얀, 타림 분지의 쿠차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에프탈의 지배 하 중앙아시아의 예술 양식과 도상학 등이 정치·문화적인 측면에서 통일된 것'을 의미할수도 있다.

초기 역사 편집

 
에프탈인들은 박트리아 문자(위)를 사용했는데, 이는 그리스 문자(아래)를 변안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에보달로(ēbodālo)라고 불렀다.

에프탈인들은 5세기 초까지 유연의 지배 하에 있는 봉신국이었다. 비록 언어와 문화는 서로 달랐지만, 그들 사이에는 밀접한 접촉이 있었고, 에프탈은 그들 정치 제도의 상당 부분을 유연인들로부터 차용했다. 특히 맥거번(McGovern)에 따르면, '카간'이라는 호칭은 원래 유연의 것으로 나중에 에프탈 통치자들이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에프탈이 알타이 산맥을 넘어 남동쪽으로 이주한 이유는 유연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에프탈인들은 서기 450년경, 또는 그보다 조금 이전에 박트리아에서 제국을 형성했다. 일반적으로 에프탈은 시온족(서기 350년)과 키다라족(서기 380년)에 이어 중앙아시아로의 제 3번째 이주 물결을 형성했다고 여겨져 왔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대신 서기 350~360년 사이에 단일한 대규모 유목민 이주 물결인 '대침략(Great Invasion)'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서기 4세기부터 일어난 세계 기후의 더욱 힘겨운 방향으로의 이행, 즉 소빙기가 불러일으킨 스텝 지대의 황폐화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 무렵 에프탈은 알타이 산맥을 넘어 남하하여 중앙아시아에 진입하였고, 그곳에 있던 키다라족을 멸망시켜 트란스옥시아나를 장악하였으며 알촌 훈족을 북인도로 밀어냈다.

중앙아시아 편집

사산 제국과의 조우 편집

 
5세기 경 사산 제국의 영토.

에프탈이 최초로 역사 기록에 등장한 것은 5세기 초엽이다. 이들은 여러 부족들과 함께 사산 제국의 동부를 침공했는데, 당시 사산 황제였던 바흐람 5세는 425년 에프탈의 침공을 물리치고, 그들을 동쪽으로 몰아냈다.

고대 후기의 아르메니아인 역사가 엘리제 바르다피(Elisee Vardaped)에 의하면, 이후 그들은 페르시아 기록에 '야즈데게르드 2세(435~457)의 적'으로 언급되어 있었으며, 야즈데게르드 2세는 442년부터 에프탈 부족과 싸웠다고 한다.

453년, 야즈데게르드 2세는 에프탈을 비롯한 동부의 여러 이민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그의 궁정을 동쪽으로 옮겼다.

458년, 아크슌와르라고 불리는 에프탈 왕이 사산 황제 페로즈 1세(458~484)가 그의 형제에게서 왕위를 빼앗는 것을 도왔다. 페로즈는 에프탈과 접촉하여 도움을 요청한 첫 번째 페르시아인이었다.

또한 에프탈은 사산인들이 또다른 훈족인 키다라족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 467년, 페로즈 1세는 에프탈인들의 지원을 받아 발람(발흐로 추정)을 점령하고 트란스옥시아나에서의 키다라족의 통치를 완전히 종식시켰으며, 박트리아를 잠시 장악했다. 쇠약해진 키다라인들은 간다라 지역으로 피신해야 했다.

사산 제국과의 전쟁 편집

그러나 474년부터 페로즈 1세는 동맹이었던 에프탈과 전쟁을 벌였다. 이것은 아마도 에프탈이 키다라족을 몰아낸 뒤 박트리아를 장악하는 것을 보고, 이들이 더 크기 전에 위협을 미리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 하다. 그러나 페로즈 1세는 그들에게 2번이나 패배했다. 그 뒤 페로즈는 에프탈에게 일부 영토를 할양하고, 노새 30마리에 금화를 가득 실어서 바쳤으며, 아들 카바드 1세를 인질로 보내야 했다.

 
5세기 후반 무렵 발행된 초기 에프탈 동전. 사산 황제 페로즈 1세의 동전 유형을 모방하여 주조된 것이 확인된다.
이 주화는 일반적으로 테두리 주변 모양과 약어 '에프(ηβ)' 로 사산 왕조의 것과 구분한다.
 
6세기 전반에 발행된 희귀한 에프탈 동전.
왼쪽: 옷깃이 하나 달린 띠가 있는 카프탄을 입고 술잔을 들고 있는 에프탈 왕족.
오른쪽: 에프탈인들이 카바드 1세를 사산 양식으로 표현한 동전.

세 번째 전투인 헤라트 전투(484년)에서 그는 에프탈에게 또다시 패배한 뒤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사산 제국에 정치적·사회적·종교적인 격동의 시기를 불러왔다. 이후 니샤푸르, 헤라트, 메르브호라산의 주요 도시들이 에프탈에게 점령되었고, 제국 동부는 약 2년 동안 극심한 약탈에 직면했다. 474년부터 6세기 중반까지 페르시아 샤한샤들은 에프탈 왕의 봉신이었고, 그들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

일시적인 평화 및 협력 편집

페로즈 1세의 사망 이후 그의 형제 발라시가 사산 황제로 즉위하였고, 에프탈은 페로즈 1세의 아들 카바드 1세의 보호자이자 지원 세력이 되었다. 488년, 에프탈은 카바드 1세에게 군대를 빌려주어 그를 왕위에 올릴 수 있었다.

496~498년 사이 카바드 1세는 반란에 의해 전복되었고, 겨우 탈출하여 에프탈로 도망쳤다. 그 뒤 카바드는 에프탈 왕의 딸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지원을 받아냈고, 499년에 크테시폰으로 쳐들어가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고행자 여호수아(6세기)는 카바드 1세가 501~502년에 국경 도시 테오도시오폴리스와 인접한 아르메니아를 약탈하고, 502~503년까지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503년 9월에 에데사를 포위했을 때에도 그가 에프탈 군대와 함께 했다는 것을 기록했다.

박트리아(토하리스탄) 편집

서기 461~462년 사이, 메하마라는 이름의 알촌 훈족 통치자가 박트리아 동부에 근거지를 두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발흐를 중심으로 한 박트리아 서부의 에프탈과 박트리아 동부의 알촌 훈족 사이의 분열을 나타낸 것일수도 있다. 462년에 작성된 박트리아어 편지에서, 메하마는 자신을 '유명하고 번성한 페로즈 왕의 총독이자 남부 박트리아의 왕'이라고 묘사한다.

중요한 것은, 이 편지에서 그는 스스로를 사산 황제 페로즈 1세의 봉신으로 자처하고 있지만, 아마 나중에 사산 제국이 쇠퇴하고 알촌 훈족북인도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굽타 제국에 끔찍한 재앙이 초래되었다는 점이다.

5세기 후반에 제작된 연회를 즐기고 있는 에프탈 남녀를 표현한 은그릇.
비문에는 '데낙크, 훈(xwn)의 아들'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박트리아에서 발굴된 박트리아어 행정 문서. 아마도 롭 왕국의 사람들이 에프탈을 위해 작성했었을 것이다.
483~484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됨.

466년에 키다라인이 완전히 멸망한 이후, 알촌 훈족은 에프탈에 밀려 북인도로 이동했으며, 아마도 에프탈은 박트리아 서부로 팽창했을 것이다. 이는 484년에 롭 왕국이 에프탈 사람들을 위해 작성한 세금 영수증, 에프탈 통치자들에게 지불된 세금에 대해 언급한 문서 등이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입증되었다. 날짜가 없는 한 문서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사르투, 화데강의 아들, 에프탈 민족의 번영하는 야브구(ebodalo shabgo), 에프탈인의 통치자의 서기관 하루 롭, 토하리스탄가르치스탄의 재판관.

— 롭 노르 왕국의 문서 중 일부 발췌.

소그디아나 편집

 
사마르칸트에서 발견된 지역 주화. 뒷면에 에프탈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에프탈인들이 정확히 언제 옥수스를 넘어 소그디아나를 정복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479년 이후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479년을 마지막으로 소그드인들의 중국 사절단 방문이 끊어졌기 때문이다.『양직공도』의 기록 또한 479년에 에프탈인들이 사마르칸트 지역을 점령했다고 말한다. 다만 발흐코바디얀 같은 몇몇 소그드 도시들은 522년까지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했으므로 정확한 것은 아니다. 484년에 페로즈 1세를 죽인 에프탈 왕 아크슌와르는 소그드어로 ’xs’wnd’r'(권력자)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에프탈인들은 헤라트를 비롯한 소그디아나 지역의 주요 도시들에 직사각형 모양의 성벽을 축조하고 각 도시들을 긴밀히 연결했으며, 요새화를 주도하는 등 키다라인들이 시작한 도시화 사업을 이어갔다. 에프탈인들은 아마도 동맹을 통해 연결된 지역의 토착 세력이나 총독들의 연합체를 통치했을 것이다. 이들 중 한명은 바르단지(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통치자였는데, 그는 그 기간 동안 독자적인 자신의 동전을 발행하기도 했다.

포로의 몸값과 주변 국가들이 바치는 공물로 벌어들인 부는 아마도 소그디아나의 도시화 사업에 재투자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에서 사산 제국을 지나 비잔티움 제국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소그디아나는 에프탈의 통치 하에서 매우 번영했다. 에프탈인들은 이전의 쿠샨인들이 그랬던 것 처럼 실크로드 중개 무역을 계속했고, 중국과 사산 제국 사이의 비단 및 사치품 무역을 원활히 하기 위해 현지 소그드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에프탈의 소그디아나 정복으로, 소그디아나에서는 에프탈이 사산 제국에게 공물로 받은 사산 동전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이후 이 동전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퍼졌다. 에프탈의 상징이 들어간 동전은 500~700년 사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토착 세력 중 하나인 이흐시드족의 동전 또한 포함된다. 이후 7세기부터 시작된 아랍의 트란스옥시아나 정복 이후에는 이러한 동전들이 잘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아, 아마도 그 즈음에 에프탈의 잔재가 소그디아나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타림 분지 편집

에프탈 미술 양식으로 그려진 키질 동굴의 검객들. 탄소 연대 측정 결과 432~538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나타났다.
500년 경에 제작된 키질 동굴의 화가 그림. 오른쪽 그림의 우하단에 위치한 사각형 안에는 산스크리트어(굽타 문자)로
'투투카의 그림(Citrakara Tututkasya, तुतुका चित्रकला)'이라고 적혀져 있다.

| footer= }} 서기 5세기 후반, 에프탈인들은 비교적 건너기 쉬운 파미르 고원을 통해 동쪽으로 확장했다. 이후 그들은 북위의 공격으로 약화된 유연을 공격하여 타림 분지 서부(카슈가르호탄)를 빼앗고, 그들로부터 많은 공물을 받았다.

479년, 에프탈은 투르판 일대까지 진출하여 타림 분지의 동부 또한 장악했다.

497~509년 사이, 에프탈은 투르판우루무치 북쪽에 도달했다.

6세기 초, 에프탈인들은 타림 분지에서 중국으로 사절단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이때 북제둔황 총독 이현(李賢)과 접촉했을 것이다. 에프탈인들은 560년 그들의 중앙아시아 지배가 무너질 때까지 타림 분지를 계속 점령하고 있었다.

에프탈의 영토가 중앙아시아와 타림 분지로 확장되면서, 에프탈의 예술 양식은 소그디아나, 바미얀, 쿠차와 같이 그들이 지배하던 지역에 퍼져나갔다. 타림 분지 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키질 동굴, 쿰투라 동굴, 수바시 저수지 등이 있다. 에프탈 예술 양식의 특징은 오른쪽이 삼각형으로 접힌 카프탄, 초승달 모양의 장식/날개 모양 장식이 달린 왕관, 크롭컷과 비슷한 독특한 헤어스타일 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쿠차 지역의 그림들, 특히 키질 동굴의 검객들은 이 지역의 에프탈 통치기인 서기 480~55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500년 경의 초기 그림들 중 일부에서는 간다라 양식의 흔적이 얼핏 나타나는데, 이것은 에프탈의 지배 하에서 박트리아쿠차라는 먼 두 지역이 서로 정치·문화적으로 연결된 것을 의미한다. 그림에 있는 몇몇 토하라어 단어들은 6세기 즈음에 에프탈인들에 의해 채택되었을 수도 있다.

그 후 돌궐 제 1 카간국튀르크족들은 서기 560년 무렵 투르판쿠차 지역을 장악했고, 사산 제국과 연합하여 에프탈을 멸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에 사절단 파견 편집

 
서기 516~526년 양나라의 수도 건강(建康)에 도착한 에프탈 사절을 그린 『양직공도』의 그림과 설명문.

서기 516~526년 무렵 양나라에 도착한 에프탈(滑) 사절의 삽화는, 양나라의 4대 황제인 효원제(孝元帝) 소역(蕭繹)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전해지는 『양직공도』에 묘사되어 있다. 이후 『양직공도』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9세기 당나라의『당염립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와 11세기 송나라의 판본을 포함한 몇몇 모사본이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졌다.

에프탈 사절단의 그림과 함께 설명문이 적혀져 있는데, 이 글은 그들이 유연의 봉신국이었을 때 에프탈이 얼마나 작았는지와 함께, 어떻게 에프탈이 소그디아나를 점령한 후 사산 제국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을 정복했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원위(元魏, 북위)가 아직 상건(桑乾)주 지역에 거주할 때까지는 (滑, 에프탈)은 여전히 소국(小國)이었으며, 예예(芮芮, 유연)에 속(屬)하여 있었다. 제나라 시대에 그들은 처음으로 떠나 막사(莫獻)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중략)[35] 그 뒤에 점차 강대하여져서 주변의 파사(波斯), 반반(盤盤?), 계빈(罽賓), 언기(焉耆), 구자(龜茲), 소륵(疏勒), 고묵(姑墨), 우전(于闐), 구반(句盤) 등의 국가들을 정벌하여 땅을 천여 리나 개척하였다.
元魏之居桑乾也, 猶爲小國, 屬芮芮。後稍強大, 征其旁國波斯, 盤盤, 罽賓, 焉耆, 龜茲, 疏勒, 姑墨, 于闐, 句盤等國, 開地千餘里。

— 『양직공도』설명문 및 『양서』54권 열전 제48 제이 의 내용 중 일부 발췌

『양직공도』는 516년 이전에는 에프탈 사절이 중국에 방문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는데, 바로 그해에 '성염대명이율타(姓厭帶名夷栗陁)'라는 이름의 에프탈 왕이 '포다체(蒲多达)'라는 사절을 보냈다. 520년에 또 다른 에프탈 사절인 부하요요(富何了了)가 궁정을 방문하여 황(黃)사자, 백(白)담비갖옷, 파사산 비단(波斯錦) 등의 물품을 바쳤다. 그들의 언어는 하남국 사람들의 통역을 거쳐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양직공도』에서 에프탈 사절의 그림은 다른 나라 사절의 그림보다 앞에 위치해 있고, 가장 긴 설명문이 쓰여졌기 때문에 아마도 에프탈은 양나라에게 중요한 외교국이었을 것이다. 『양서』54권에 따르면, 에프탈 사절은 토하라인(胡蜜丹), 야르칸드(周古柯), 코바디얀(呵跋檀) 출신의 수행원들을 동행했다고 한다.

526~539년 사이에 양나라를 다녀간 각 사절단들을 묘사한『양직공도』의 그림. 현재 중국 국립박물관 소장.

중앙아시아의 사절들 대부분은 덥수룩한 수염과 비교적 긴 머리를 한 모습이지만, 에프탈 영향권 아래 있던 지역 출신의 사절들(야르칸드, 코바디얀, 쿤두즈, 발흐)은 이와 대조적으로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짧게 자른 머리를 정돈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신체적 대조는 이 무렵 중앙아시아에서 제작된 수많은 인장들에서도 확인된다.

기타 사절들 편집

중국 연대기에는 약 24개의 에프탈 대사관이 기록되어 있는데, 456년에 최초로 대사관을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507~558년까지 20개가 설치되었으며(535년까지 북위에 15개, 541년까지 양나라에 5개)가 있습니다. 마지막 세 곳은 『주서』에 언급되어 있는데, 『주서』에는 에프탈이 안서(安西), 호탄(和田) 등 서역의 20여 개국을 정복했으며 546년, 553년, 558년에 각각 서위북주의 조정에 사절단을 파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헤프탈 사람들이 '튀르크인들에 의해 박살난' 이후, 중국의 에프탈 대사관들은 폐쇄되었다.[36]

또한 에프탈은 서기 550년 무렵에 셀레우키아 크테시폰동방 교회 총대주교마르 아바 1세(Mar Aba I)로부터 기독교 주교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고, 마르 아바 1세가 이를 수락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된다.[37]

바미얀 석불 축조 편집

바미얀의 석불
38m 높이의 불상 머리 위에 그려진 천장화.
토하라 양식의 의상을 착용한 태양신을 묘사한 그림[38][39]
에프탈 양식의 의상을 착용한 인물들이 앉아 있는 부처님과
함께 천장의 태양신 주위에 줄지어 서 있다.
탄소 연대 측정 결과, 바미얀 석불의 두 불상은 각각 544~595년과 591~644년 경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아마도 이들은 이 지역이 에프탈의 지배를 받았을 때 지어졌을 것이다.
불교의 후원자로 추정되는 에프탈 통치자들의 벽화들이 불상 위의 천장에 그려진 그림들에 묘사되어 있다.[29]

바미얀 석불은 에프탈의 통치 하에서 축조되었다. 550~560년대에 비록 에프탈 제국이 멸망했지만, 에프탈인들은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해당하는 박트리아 지역에서 통치를 이어갔고, 특히 바미얀과 그 일대의 성들을 지배했다. 바미얀 석불에 대한 탄소 연대 측정 결과, 비교적 작은 38m 높이의 '동쪽 석불'은 570년 무렵(95%의 확률로 544~595년 사이)에 건설되었고, 더 큰 55m 높이의 '서쪽 석불'은 618년 무렵(95%의 확률로 591~644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 동쪽 석불이 지어진 연도는 돌궐 제 1 카간국사산 제국의 동맹을 맺고 에프탈 제국을 멸망시키기 직전, 또는 그 이후에 해당된다.
  • 서쪽 석불이 지어진 연도는 에프탈인이 제국의 멸망 이후 옥수스 남부에서 제후국을 형성하고, 625년에 서튀르크인들이 그들을 압도하여 토하라 야브구를 형성할 무렵에 해당된다.

동쪽 석불의 천장에는 말이 끄는 전차 위의 태양신 주위로 여러 에프탈인 신도들이 둘러싸고 있는 의식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태양신은 토하라 양식의 카프탄을 착용하고, 장화를 신었으며, 창을 들고 있다. 이는 소그디아나에서 숭배되는 이란 신 미트라의 도상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황금 이륜 전차를 타고 있으며, 그 옆에는 날개가 달린 수행원 두명이 서서 깃털이 달린 코린토스식 투구를 쓰고 방패를 들고 있다. 맨 위에는 하늘을 날고 있는 바람의 신들이 있다. 이 훌륭하고 독특한 구도는 간다라나 인도의 그림과 비교해보았을때 매우 이질적이지만, 키질 동굴이나 둔황에서 발견된 그림과는 유사한 부분이 많다.

중앙 그림에는 태양신뿐만 아니라 부처, 보살, 그리고 여러 에프탈 왕과 고관대작들이 그려져 있다. 옆에서 바라본 모습을 한 승려 뒤에 서있는 인물은 바미얀의 왕이었다. 그는 초승달 한개와 코림보스(Kόρυμβος)[40]로 장식된 왕관을 쓰고, 둥근 목 장식의 튜닉을 착용하고 있었다. 한편 그림에 그려진 인물들 대부분은 에프탈 왕족과 부유층들이었는데, 그들에게서 에프탈 특유의 풍습[41]이 얼핏 보인다.

안타깝게도 2001년, 바미얀 석불탈레반에 의해 파괴되면서 이 그림 또한 같이 사라져버렸다.

소그드 상인들의 무덤에 묘사된 에프탈 왕족들 편집

위르카크 무덤에서 발견된 부조.
아마도 이 인물은 에프탈의 왕족이었을 것이다.[42]

위르카크 무덤은 6세기 무렵에 활동한 소그드인 상인 위르카크의 무덤으로, 장안에서 발견되었다. 때때로 정교한 사산 양식의 왕관을 쓴 페르시아 왕족들이 궁전이나 사냥 그림에 나타나는 것처럼, 무덤의 그림 장식에는 에프탈 통치자에 대한 묘사가 보편적으로 등장한다. 에프탈 통치자들은 종종 그들의 여성 배우자들과 함께 묘사되기도 한다.

조각 묘사와 그 외의 몇몇 부분을 보았을 때, 위르카크는 상인 활동 초기에 에프탈인과 주로 거래를 했었을 것이다.(에프탈 제국이 CE 560년에 멸망할 무렵 그는 60살이었다.)

에프탈 제국 멸망 이후인 570년경에 제작된 소그드 장례 기념물 Miho funerary couch과 위르카크 무덤보다 24년 더 늦게 제작된 안자의 무덤, 그리고 후대의 모든 소그드인 무덤의 그림은 이전의 에프탈 지배기였을 때보다 다소 희화적으로 변했고, 에프탈인들이 묘사된 그림은 찾아볼 수 없으며, 그 자리는 이제 소그드인들의 주요 거래 상대가 될 튀르크인들로 대체될 것이었다.

쇠퇴 편집

제국의 멸망과 제후국 형성 편집

카바드 1세 이후 에프탈인들이 사산 제국으로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린 틈을 타서, 카바드 1세의 후계자 호스로 1세는 동쪽으로의 팽창 정책을 재개할 수 있었다. 9세기의 페르시아 역사가 알 타바리에 따르면, 호스로 1세는 그의 팽창 정책 덕분에 신드, 알-루카즈(Al-Rukkhaj),

같이 보기 편집

각주 편집

내용주 편집

참조주 편집

  1. Dani, Litvinsky & Zamir Safi 1996.
  2. Dignas, Beate; Winter, Engelbert (2007). 《Rome and Persia in Late Antiquity: Neighbours and Rivals》. Cambridge University Press. 97쪽. ISBN 978-0-521-84925-8. 
  3. Goldsworthy, Adrian (2009). 《The Fall of the West: The Death Of The Roman Superpower》. Orion. ISBN 978-0-297-85760-0. 
  4. Rezakhani 2017a.
  5. Alram 2014.
  6. Maas 2015, 287
  7. quote: "Sept Aryas".
  8. de la Vaissière proposes underlying Turkic Yeti-Al, later translated to Iranian Haft-Al
  9. de la Vaissière also cited Sims-Williams, who noted that the initial η- ē of the Bactrian form ηβοδαλο Ēbodālo precluded etymology based on Iranian haft and consequently hypothetical underlying Turkic yeti "seven"
  10. Translations of Nicholas Sims-Williams, quoted in Solovev, Sergej (20 January 2020). Attila Kagan of the Huns from the kind of Velsung. Litres. p. 313. ISBN 978-5-04-227693-4.
  11. Rezakhani 2017, p. 135.
  12. Rezakhani 2017a, pp. 208–209.
  13. Kurbanov 2010, 135–136쪽.
  14. Bernard, P. 〈DelbarjīnELBARJĪN〉. 《Encyclopaedia Iranica》. 
  15. Ilyasov 2001, 187–197쪽.
  16. Dani, Litvinsky & Zamir Safi 1996, 183쪽.
  17. Lerner & Sims-Williams 2011, 36쪽.
  18. Enoki 1959.
  19. Sinor, Denis (1990). 〈The establishment and dissolution of the Türk empire〉. 《The Cambridge History of Early Inner Asia, volume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300쪽. ISBN 978-0-521-24304-9. 2017년 8월 19일에 확인함. 
  20. “Asia Major, volume 4, part 1”. Institute of History and Philology of the Academia Sinica, University of Indiana. 1954. 2017년 8월 19일에 확인함. 
  21. M.A. Shaban (1971). 〈Khurasan at the Time of the Arab Conquest〉. C.E. Bosworth. 《Iran and Islam in memory of the late Vlademir Minorsky》. Edinburgh University Press. 481쪽. ISBN 0-85224-200-X. 
  22. Christian, David (1998). 《A History of Russia, Inner Asia and Mongolia》. Oxford: Basil Blackwell. 248쪽. 
  23. Kurbanov 2010, 14쪽.
  24. Adas, Michael (2001). 《Agricultural and Pastoral Societies in Ancient and Classical History》. Temple University Press. 90쪽. ISBN 978-1-56639-832-9. 
  25. Baumer 2018, 97–99
  26. Talbot, Tamara Abelson Rice (Mrs David (1965). 《Ancient arts of Central Asia》. Thames and Hudson. 93쪽. ISBN 978-0-19-520001-0. 
  27. Rezakhani 2017, 135쪽. "The suggestion that the Hephthalites were originally of Turkic origin and only later adopted Bactrian as their administrative, and possibly native, language (de la Vaissière 2007: 122) seems to be most prominent at present."
  28.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CH141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29. Kurbanov 2010, 67쪽.
  30. Azarpay, Guitty; Belenickij, Aleksandr M.; Maršak, Boris Il'ič; Dresden, Mark J. (1981). 《Sogdian Painting: The Pictorial Epic in Oriental Ar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9293쪽. ISBN 978-0-520-03765-6. 
  31.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Canfield49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32. Procopius, History of the Wars. Book I, Ch. III, "The Persian War"
  33.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FG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34. Rakhmanov, Shaymardankul A. (2016). “Wall Paintings from Tavka, Uzbekistan”. 《Journal of Inner Asian Art and Archaeology》 7: 31–54. doi:10.1484/J.JIAAA.4.2017003. ISSN 1783-9025. 
  35. [Illustration of Envoys Presenting Tribute at the Liang Court], 유태산(Yu Taishan), p. 102
  36. de la Vaissière 2003, 126쪽.
  37. Nicholson, Oliver (2018년 4월 19일). 《The Oxford Dictionary of Late Antiquity》 (영어). Oxford University Press. 708쪽. ISBN 978-0-19-256246-3. 
  38. Alram et al. 2012–2013. exhibit: 14. KABULISTAN AND BACTRIA AT THE TIME OF "KHORASAN TEGIN SHAH" 보관됨 25 1월 2021 - 웨이백 머신
  39. Margottini 2013, 9–10
  40. 아르다시르 1세 이후, 사산 제국의 여러 황제들이 사용했던 머리장식. 헤르츠펠트의 명명(命名)이며, 본래는 왕관 윗쪽의 원형 모양 비녀였던 것이 점차 얇은 천으로 제작된 이후 진주보석을 박는 형식으로 바뀌면서, 하늘과 땅을 통치하는 왕권의 상징으로 변모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코림보스[korymbos],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41. 오른쪽이 접혀진 카프탄, 독특한 머리 장신구, 크롭컷 헤어스타일, 수염 없는 얼굴
  42.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FG133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참고 문헌 편집

더 읽기 편집

외부 링크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