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타 제국

(굽타 왕조 시대에서 넘어옴)

굽타 제국(산스크리트어: गुप्त साम्राज्यम् 굽타 삼라지얌)은 서기 240년 마가다 지역에서 발흥한 굽타 왕국의 후신으로, 320년부터 550년까지 북인도를 다스린 힌두계 제국이다.

굽타 제국
गुप्त साम्राज्यम्

320년 ~ 550년
 

 

 

GuptaEmpire300-550.png
수도파탈리푸트라(초기)
아요디아(후기)
정치
정부 형태전제군주제
마하라자디라자
319년 ~ 335년
335년 ~ 375년
380년 ~ 415년
415년 ~ 455년
455년 ~ 467년
467년 ~ 473년
473년 ~ 476년
476년 ~ 495년
495년 ~ 530년
530년 ~ 540년
540년 ~ 550년

찬드라굽타 1세(초대)
사무드라굽타
찬드라굽타 2세
쿠마라굽타 1세
스칸다굽타
푸루굽타
쿠마라굽타 2세
부다굽타
나라심하굽타
쿠마라굽타 3세
비슈누굽타(말대)
왕조굽타 왕조
역사
 • 제국 성립320년
 • 멸망550년
지리
위치북인도
면적3,500,000 km2
인문
통용어고전 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트어
통용문자굽타 문자
민족인도아리아인

종교
국교힌두교
기타 종교불교, 자이나교
주신비슈누
기타
기년법굽타기원
현재 국가인도 인도
방글라데시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네팔 네팔

굽타 제국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인 풍요를 바탕으로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서 인도 역사상 힌두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할 만큼 인도의 민족주의적 성격이 드러나는 고유문화를 번영시켰으며, 이 시기에 오늘날 인도 문화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또한 이 시기 브라만교를 계승한 힌두교가 성장하면서 브라만교스므리티마누 법전 또한 인도인들의 생활 속에 깊이 침투하였으며, 브라만-크샤트리야-바이샤-수드라로 이루어진 바르나 체제와 자티 체제로 구성된 카스트 제도도 이 시기에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역사편집

굽타 왕국(240년 ~ 320년)편집

굽타 제국의 전신은 본래 3세기 중엽 사산 제국인더스강 진출로 쿠샨 제국이 쇠퇴하면서 인도 아대륙에 신흥 중소국들이 난립하는 시기에 마가다 지역을 거점으로 형성된 굽타 왕국으로, 240년부터 280년까지는 스리 굽타가 통치하였으며,[1] 280년부터 319년까지는 가톳카차굽타가 통치하였다.

찬드라굽타 1세(320년 ~335년)편집

굽타 왕국을 제국의 규모로 확장한 최초의 군주는 찬드라굽타 1세였다. 당시 바이샬리 지역에 존재하던 막강한 세력인 리차비 가문의 공주 쿠마라데비와 결혼함으로서 리차비 가문으로부터 각종 지원들을 얻어낸 찬드라굽타 1세비하르벵골, 그리고 알리하바드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정복하였고 이후 이 영토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마우리아 제국 시대의 행정 제도를 보완한 행정 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왕중왕, 즉 황제를 의미하는 마하라자디라자를 굽타 제국의 공식적인 군주 칭호로 지정함으로써 절대적인 권한의 왕위와 세습적인 형태를 취하는 절대왕정을 확립하였다.

사무드라굽타(335년 ~ 375년)편집

찬드라굽타 1세 사후 그의 왕위를 이어받은 사무드라굽타는 당시 북인도 지역에 존재하던 20여개의 소왕국들을 차례로 복속시킨 다음 갠지스 강 유역을 정복하며 북인도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였고,[2][3] 당시 남인도 지역에 존재하던 팔라바 왕국까지 진격하여 당시 팔라바 군주인 비슈누고파를 무찌르는 등 크게 위세를 떨쳤으며,[4] 이에 대해 한 비문에는 사마타타, 카마루파, 네팔라, 카트리푸라 등의 왕국과 말라바, 아르주나야나, 야우드야, 마드라카, 아비라 등의 부족이 사무드라굽타에게 굴복했다는 내용이 존재한다.[5][6][7][6] 또한 비문에는 사무드라굽타가 비슈누파 힌두교 신자라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데,[8][9] 비문에 따르면 사무드라굽타는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베다 시대의 왕들이 큰 승리를 거뒸을 때 거행했던 마제아슈바메다를 비롯한 다양한 힌두교 의식들을 수행하였다고 한다.[10] 비문에서는 사무드라굽타는 현명하고 엄격한 제정자이자 자비로운 왕인 동시에 시나 음악에 큰 재능이 있는 사람이며,[11] 시나 음악 등의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는지 그에 대해서 "시인의 왕"으로 칭송하고 있는데,[12] 굽타 제국 시대에 사무드라굽타가 비나(인도 현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담긴 주화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가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12] 이와 같이 사무드라굽타 시기에 굽타 제국은 오늘날 북인도 대부분과 인도 중부의 상당 부분을 정복하였으며,[13] 인도의 남동부 해안 지역까지 진출하는 등 급속한 영토 확장을 이루었다.[14][15]

라마굽타(375년 ~ 380년)편집

산스크리트어 연극인 데비-찬드라굽탐에 따르면 사무드라굽타찬드라굽타 2세의 공백기인 375년부터 380년까지는 라마굽타라는 군주가 굽타 제국을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 연극에 따르면 찬드라굽타 2세 사후 왕위에 오른 라마굽타는 사카족과 전쟁을 벌이다 패배할 위기에 놓였고 이때 라마굽타가 자신의 아내인 드루바데비사카족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평화 조건을 맺으려 하자 이에 화가 난 찬드라굽타 2세드루바데비로 변장해 사카족 왕을 살해하였으며, 이 사실을 안 백성들은 라마굽타를 비열하다고 비난하는 동시에 찬드라굽타 2세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신망을 잃게 된 라마굽타는 백성들의 신망을 받던 찬드라굽타 2세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찬드라굽타 2세에 의해 역으로 살해당했다고 한다.[16] 다만 역사적으로 굽타 제국에 대한 기록 가운데 라마굽타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라마굽타의 역사성은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다.

찬드라굽타 2세(380년 ~ 415년)편집

찬드라굽타 2세사무드라굽타의 영토 확장 정책을 계승하는 동시에 찬드라굽타 1세처럼 혼인 동맹을 통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 세력을 확대하고자 했는데, 당시 중앙 인도 지역에서 커다란 세력을 떨치고 있던 나가 왕국의 쿠베라나가를 왕비로 맞이하는 한편, 데칸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바카타카 왕국루드라세나 2세에게 자신의 딸인 프라바바티굽타를 시집보냄으로써 혼인 동맹을 맺었다.[17] 특히 바카타카 왕국과의 혼인 동맹은 서부 데칸 지역에 대한 정치적 안정과 지배력을 확대시키는 발판이 되었고, 이로써 전 데칸 고원 지역이 굽타 제국의 영향 아래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당시 아라비아해를 통한 알렉산드리아와의 해상 무역으로 번영하던 서사트라프국이 내부 분란으로 세력이 약화되자 찬드라굽타 2세는 이들을 정복하였는데, 이로써 굽타 제국은 동쪽의 벵골만과 서쪽의 아라비아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동서양의 해상 무역을 독점하여 경제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찬드라굽타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궁정에 존재하던 뛰어난 학자 그룹인 나바라트나를 중심으로 힌두교 예술, 문학, 문화 및 과학 등이 발전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샤쿤탈라의 저자인 칼리다사도 있었으며, 그가 저술한 문헌들 중에는 찬드라굽타 2세 비크라마디트야가 인도 안팎에 존재한 약 21개의 왕국을 정복하였다는 기록 또한 남아있다. 또한 인도를 순례한 후 불국기를 저술한 중국 동진 승려인 법현이 인도를 순례한 시기도 찬드라굽타 2세 비크라마디트야의 재위 기간 도중이었는데, 그의 저서인 불국기에 따르면 굽타 제국 치하의 인도는 안전한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고 형법은 경미하며 범죄는 벌금에 의해서만 처벌되었으며, 사람들은 살아있는 생물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술과 마늘, 양파 등을 먹지않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8]

쿠마라굽타 1세(415년 ~ 455년)편집

찬드라굽타 2세의 아들 쿠마라굽타 1세 역시 이를 계승하여 1세기 이상에 걸친 전성기를 누렸다. 비록 즉위년도인 415년부터 중앙아시아 훈족의 일파인 에프탈족이 인도 서북방에서 침입해왔으나 수비를 잘하여 제국을 평화롭게 지켜냈다. 또한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세계 최고(最古)의 사원대학인 날란다 대학이 건립되는 등 문화적·학문적 면에서도 여전히 발전을 이루었다.

쇠퇴편집

쿠마라굽타 1세 사후에 즉위한 스칸다굽타 시대에도 굽타 제국은 강성한 세력을 보였고 460년에 스칸다굽타가 에프탈로부터 대승을 거두면서 굽타 제국은 한동안은 안정세에 있었지만 스칸다굽타가 사망한 후에 푸루굽타가 자신의 조카이자 스칸다굽타의 아들인 쿠마라굽타 2세와 왕위 분쟁을 벌인 끝에 왕위에 오른 후부터 잦은 침입과 전쟁, 그리고 이를 틈타 굽타 제국에 종속해 있던 속국이 독립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굽타 제국의 인도 내 영향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쇠퇴하던 굽타 제국은 결국 550년에 멸망하였다.

행정편집

일반적으로 마우리아 제국에서 실시하던 전통적인 관료제도를 보완하며 계승하였다. 중앙 정부는 각각 재상 직책의 마하 만트리, 오늘날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마하 발라디크리타, 사법부 수반에 해당하는 마하 단다나야카, 일반 행정의 책임자 마하 프라티하라들이 최고 통치자인 황제와 함께 국정을 다스렸다. 굽타 제국은 지방을 총 26개의 부크티(속주)로 세분화시켰으며, 각 부크티는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총독직인 우파리카가 통치하였다. 부크티는 다시 비샤야(군)로 세분화되었으며,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직인 비샤야파티가 아디카르마라고 불리는 직업 조합과 협력하여 비사야를 통치하였다. 비샤야는 다시 비티(현)로 세분화되었고 비티는 다시 그라마(마을)로 세분화되었으며, 그라마카(촌장)가 판차야트의 도움을 받으며 그라마를 통치하였다. 이와 같이 굽타 제국 시기 각 지역은 대부분의 일을 중앙 정부의 지시 없이 직접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독립된 권위를 지닌 지방자치 지역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법률편집

굽타 제국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바르나와 자티 기반의 카스트 제도가 인도 사회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굽타 제국은 이 카스트 제도를 기반으로 각종 의무나 법률들을 제시한 마누 법전을 기반으로 하는 법 체계를 실시하였으며, 기존의 마누 법전을 보완하기 위하여 나라다 법전, 브라하스파티 법전, 카티야야나 법전 등의 법전들을 새로 반포하여 재판 시의 준칙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군사편집

당시 굽타 제국의 군대는 보병, 기병, 전투 코끼리 및 해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19] 또한 굽타 제국은 당시 인도의 왕국 중에서는 최초로 중장기병궁기병 부대를 도입하였는데, 이들 기병들과 전투 코끼리 부대들이 굽타 제국 군대의 핵심 전력을 이루었으며,[20] 특히 궁기병 부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21][22][23]

경제편집

굽타 제국에서는 금화가 자주 유통되어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었고 이로 인해 "아디카르마"라고 하는 대규모 길드 조합이 탄생하였는데, 이 아디카르마는 도시의 부자 또는 길드의 대표자인 "나가라 슈레스틴", 상인의 대표자인 "스타라브라하", 수공업자의 대표자인 "프라타마 쿨리카", 그리고 지방 행정의 대표자인 "프라타마 케야스타"로 구성되었으며 도시의 경제뿐만 아니라 행정에도 일정부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해외 무역으로는 인도양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무역을 통하여 동남아시아, 아랍, 알렉산드리아, 중국 등의 국가들과 주로 교역하였으며, 특히 이 시기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통해 인도 문화가 동남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동남아시아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굽타 제국에서 서기 350년경 세계 최초로 설탕을 결정화하는 방법을 확립하자 다양한 무역로를 통해 인도의 결정화된 설탕이 타 지역에 전파하기도 하였다.[24][25]

자연과학편집

굽타 제국 시대에 인도에서는 아리아바타브라마굽타 등의 걸출한 수학자가 출현하였는데, 그는 스물세 살때 아리아바티야라는 저서를 편찬하여 원주율, 삼각법, 방정식, 제곱근세제곱근기하학대수학에 대한 내용을 남겼으며, 특히 원주율의 값을 3.1416으로 정확히 계산하거나 삼각비의 "사인" 개념을 최초로 발견하는 등 인도 수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아리아바타와 더붙어 브라마굽타인도 수학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는 해가 여럿인 2차부정방정식의 정수해를 구하는 방법을 최초로 발견하였고, 브라마굽타의 방정식은 1000년이 지난 17세기에 영국의 수학자 존 펠이 연구한 2차 방정식 형태의 "펠 방정식"으로 이어졌다. 또한 브라마굽타는 원에 내접한 사각형의 넒이와 대각선의 길이를 구하는 "브라마굽타 공식"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무한대나 0의 사용 또한 인도 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도 수학과 함께 인도 천문학도 발전하였는데, 아리아바타원주율의 값을 계산한 결과를 바탕으로 지구의 둘레를 측정한 후 지구가 자전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바스카라 차리아라는 천문학자는 지구가 각 물체를 그 무게에 따라 끌어당긴다고 하는 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의학편집

굽타 제국은 베다 시대부터 존재하던 의학서인 아유르베다를 기반으로 하는 의학 체계를 확립하였으며, 아유르베다 의학서를 보완하기 위하여 나바니타캄, 하스트야아유르베다, 아슈바샤스트라 등의 새로운 의학 서적들도 등장하였다.

종교편집

굽타 시대에 접어들며 종래의 제식주의와 야즈나로 대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던 브라만교의 세력이 약화되자 보다 세속적인 형태로 변화하여 현재 힌두교로 칭하는 고유의 종교 및 철학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힌두교는 이 시기에 기본적인 체계를 완전히 갖추었으며 불교, 자이나교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종교 형태로 발전하여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까지 퍼져나갔고, 굽타 제국의 황제들은 자신이 비슈누아바타라라고 주장하면서 왕권 강화를 위해 힌두교를 강력하게 숭상하였지만, 불교를 보호하고자 하는 등 타종교에도 관대하였다. 불교의 학문적, 교리적 연구는 계속되어 5세기 경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날란다의 불교 대학이 설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힌두교가 굽타 제국의 황제들에게 강력한 후원을 받는 동시에 민중에게도 퍼져나가 대중적인 종교로 거듭난 반면, 불교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인도에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불교계에서는 민중들을 다시 불교로 포섭하기 위하여 힌두교의 의례들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인도 불교밀교화가 진행되며 힌두교와 차이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힌두화된 불교는 점차 인도 아대륙 바깥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문학편집

이 시기 굽타 황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고전 산스크리트어 문학이 발전을 거듭하였다. 굽타 제국 시대의 산스크리트어 문학힌두교적 색채가 매우 강하게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황실 소속의 학자와 문학가들이 구전설화를 정리하며 오늘날의 인도 2대 서사시로 거듭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닌 힌두교의 주요 경전 중 하나로서 기능하였다. 당대 저명한 산스크리트어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칼리다사를 궁정시인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사쿤탈라>, <메카투사>와 같은 훌륭한 작품들이 편찬되었다. 굽타 제국에서는 산스크리트어 문학 외에도 팔리어 문학이나 타밀어 문학 등의 작품들도 등장하였으며 자이나교 시인들에 의해 프라크리트어 문학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예술편집

 
굽타 시대 인도 불교 미술의 정점인 아잔타 석굴 벽화, 일명 연화수보살도
 
굽타 시대의 비슈누 신상

굽타 시대에는 문학뿐 아니라 동굴과 사원의 벽화, 탑과 사원을 비롯한 건축 등의 예술도 발달하였다. 시바비슈누 등을 묘사한 힌두교 미술이 이 시기에 처음 만들어졌지만 이 시기의 주류 미술은 여전히 불교 미술이었으며, 이 시기의 불교 미술은 이전의 간다라 미술에 비해 인도 고유의 특징이 강한데, 불상들은 인도아리아인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옷 주름이 생략되고 인체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인도 고유의 특징을 내재하고 있다. 굽타 시대에 만들어진 아잔타와 엘로라 사원은 인도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마하라슈트라 북서부에 위치한 29개의 석굴들로 이루어진 아잔타 석굴은 이 시기의 주요 건축물로써 29개 가운데 5개는 사원 형태로, 나머지는 승려들이 거주하던 승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석굴에 그려진 연화수보살도는 인도 불교 미술의 정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잔타의 남서쪽 약 9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34개의 석굴 사원들로 이루어진 엘로라 사원불교 사원인 아잔타 사원과는 달리 다종교 사원으로, 제1굴에서 제12굴까지는 불교 사원이며, 제13굴에서 제29굴까지는 힌두교 사원, 제30굴에서 제34굴까지는 자이나교 사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굽타 제국 시대 인도의 종교적 다양성을 보여준다.

각주편집

  1. Radha K. Mookerji (1995): The Gupta empire (pág. 11). Nueva Delhi: Motilal Banarsidass (5.º edición); ISBN 81-208-0440-6, ISBN 978-81-208-0440-1.
  2. Ashvini Agrawal 1989, 114쪽.
  3. Ashvini Agrawal 1989, 107쪽.
  4. Ashvini Agrawal 1989, 110쪽.
  5. Tej Ram Sharma 1989, 84쪽.
  6. Upinder Singh 2017, 343쪽.
  7. Ashvini Agrawal 1989, 112–18쪽.
  8. Tej Ram Sharma 1989, 68쪽.
  9. R.C. Majumdar 1981, 32쪽.
  10. Tej Ram Sharma 1989, 91쪽.
  11. Tej Ram Sharma 1989, 91, 94쪽.
  12. R.C. Majumdar 1981, 31쪽.
  13. R.C. Majumdar 1981, 23, 27쪽.
  14. R.C. Majumdar 1981, 22쪽.
  15. Ashvini Agrawal 1989, 112쪽.
  16. https://books.google.co.kr/books?id=fPnkDwAAQBAJ&pg=PT217&lpg=PT217&dq=%EB%9D%BC%EB%A7%88%EA%B5%BD%ED%83%80&source=bl&ots=Q95eUQegb0&sig=ACfU3U3XC5KiZyWkpvTJcLm_TAVIGTnU9g&hl=ko&sa=X&ved=2ahUKEwjIip7wo__qAhUTKaYKHa3qCZQQ6AEwAnoECAwQAQ#v=onepage&q=%EB%9D%BC%EB%A7%88%EA%B5%BD%ED%83%80&f=false
  17. H.C. Raychaudhuri 1923, 489쪽.
  18. Fa-hsien, ca 337-ca 422; Legge, James (1886). 《A record of Buddhistic kingdoms; being an account by the Chinese monk Fâ-Hien of his travels in India and Ceylon, A.D. 399-414, in search of the Buddhist books of discipline. Translated and annotated with a Corean recension of the Chinese text》. Robarts - University of Toronto. Oxford Clarendon Press. 
  19. Bimal Kanti Majumdar (1949). “Military Pursuits and National Defence Under the Second Magadhan Empire”. 《Proceedings of the Indian History Congress》 12: 105–109. JSTOR 44140516. 
  20. Roy, Kaushik (2015). 《Warfare in Pre-British India, 1500 BCE to 1740 CE》. Routledge. 56쪽. ISBN 978-1-315-74270-0. 
  21. Ganguly, Dilip Kumar (1987). 《The Imperial Guptas and Their Times》. Abhinav Publications. 92쪽. ISBN 9788170172222. 
  22. Roy, Kaushik (2015). 《Warfare in Pre-British India, 1500 BCE to 1740 CE》. Routledge. 57쪽. ISBN 978-1-315-74270-0. 
  23. Majumdar, Bimal Kanti (1960). 《The military system in ancient India》 2판. Firma K.L. Mukhopadhyay. 118쪽. 
  24. Adas 2001, 2341쪽.
  25. Adas 2001, 311쪽.

참고 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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