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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편집

허씨(許氏)는 연원을 멀리 가락국 김수로왕의 비(妃) 허황옥(許黃玉)에 두고 있다. 허황옥은 원래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16세(서기48년)때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 웅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夫人唐)으로 들어와 정박을 했는데 김수로왕이 의장(儀仗)을 갖추어 영접한 후 왕비로 맞이했다고 한다. 그 후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황후의 뜻을 살려 허씨(許氏)로 사성(賜姓)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歸依)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로 성불(成佛)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허황옥의 후손으로 공암현에서 부농으로 세거했던 허선문(許宣文)의 후손은 공암(孔巖), 허사문(許士文)의 후손은 태인(泰仁), 33세손 허강안(許康安)의 후손은 하양(河陽), 35세손 허염(許琰)의 후손은 김해(金海)로 분관(分貫)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한다.

역사편집

김해 허씨(金海 許氏)의 시조 허염(許琰)은 가락국 수로왕비인 허황후(許黃后)의 35세손으로 전하며, 고려 때 삼중대광을 지내고 가락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분파편집

  • 시중공파((侍中公派)
  • 가락군인전파(駕洛君仁全派)
  • 호은공기파(湖隱公麒派)
  • 중승공린파(中承公麟派)
  • 전직공인부파(典直公仁副派)
  • 증성군구년파(甑城君龜年派)
  • 판서공언룡파(判書公彦龍派)
  • 상서공상파(尙書公相派)
  • 제학공파(提學公派)

인물편집

  • 허유전(許有全, 1243년 ~ 1323년) : 고려 충렬왕 때 지공거(知貢擧)를 지냈으며, 충숙왕 때 가락군에 봉해지고 첨의찬성사에 이어 정승이 되었다.
  • 허옹(許邕) :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전리판서에 이르렀다.
  • 허추(許錘) : 허유전(許有全)의 증손자 허치<許錙, 異名 허추(許錘)>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간원 정언 재임시절인 1444년(세종 26) 함길도의 행성 쌓는 일을 정지할 것을 건의하였다. ‘성을 쌓는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가뭄을 만나 억지로 쌓는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바가 아닙니다. 또 진(鎭)의 백성들은 새로 옮겨 간 지가 오래 되지 않아서 이미 금년에는 다 쌓을 수 없는 일이니, 우선 풍년 들기를 기다려서 쌓아도 늦지않을 것입니다.’라고 백성의 부역을 덜어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바른 소리를 하는 선비였다. 그 후 사간원 헌납,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하였기 제학공파(提學公派)라 칭하고 파조하였다.
  • 허선(許譔, 1432 ~ ?) : 허추(許錘) 아들, 자는 자술(子述)이다. 1456년(세조 2) 식년시(式年試)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예문관 검열,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 성균관 학정, 병조정랑, 이조좌랑,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했으며 세조대왕실록 편찬에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
  • 허정(許禎) : 허선(許譔) 아들, 자가 희인(希仁)이다. 1494년(성종 25)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 청주목사(淸州牧使), 영천군수(永川郡守),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 허백기(許伯琦, 1493 ~ ?) : 허정(許禎) 아들,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한 뒤 1524년 형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내고, 1526년 형조정랑, 1528년 경상도 도사, 1541년 헌납·장령, 1544년 사간·교리·동부승지, 1545년 형조참의, 1553년(명종 8) 판결사를 지낸 다음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562년 동지중추부사로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정헌(正憲)이다.
  • 허수겸(許守謙, 1563 ~ ?) :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596년(선조 29) 부여현감(扶餘縣監)으로 있을 때,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을 토벌하지 않아 탄핵을 받았다. 얼마 뒤 사면되어 병조정랑·강진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강진현감(康津縣監)로 재임 중이던 1602년(선조 35) 명망이 좋지 않고 세금을 과도하게 거둔다는 장령 조정견(趙庭堅)의 탄핵을 받고 다시 파직되었다. 이후 복직하여 공주목사 등을 지냈다.
  • 허위(許蔿) : 한말의 의병장. 3백명의 선발대로 일본 통감부를 격파하려다 실패하고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다.
  • 독립운동가 허겸(許兼), 허빈(許斌), 허병률(許秉律), 허형(許炯)
  • 허삼수
  • 허화평
  • 허동수 : GS칼텍스 회장

과거 급제자편집

김해 허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7명을 배출하였다.[1]


문과

허눌(許訥) 허돈(許燉) 허만필(許萬弼) 허백기(許伯琦) 허석(許) 허선(許銑) 허선(許譔) 허수겸(許守謙) 허식(許湜) 허심(許鐔) 허원(許垣) 허정(許禎) 허직(許㮨) 허책(許策) 허추(許錘) 허선(許譔) 허정(許禎)

무과

허간(許侃) 허감(許玵) 허강(許𣷣) 허국(許國) 허국형(許國衡) 허권(許權) 허규(許圭) 허규(許奎) 허금산(許今山) 허당(許鏜) 허대곤(許大坤) 허대붕(許大鵬) 허대승(許大承) 허대운(許大云) 허대임(許大任) 허돌남(許乭男) 허득(許得) 허득룡(許得龍) 허민(許旻) 허복룡(許福龍) 허봉(許奉) 허선(許繕) 허성남(許成男) 허성회(許成回) 허세필(許世弼) 허숙(許淑) 허숙(許琡) 허순경(許順京) 허시일(許時逸) 허시준(許時俊) 허시환(許時還) 허심(許鐔) 허연(許演) 허영원(許榮遠) 허영한(許永汗) 허완(許浣) 허육(許稑) 허윤남(許允男) 허이충(許以忠) 허익(許榏) 허재(許榟) 허전(許銓) 허정(許楨) 허정(許珵) 허정립(許廷立) 허정은(許廷誾) 허종남(許從男) 허즙(許楫) 허즙(許楫) 허직(許稷) 허진(許鎭) 허진구(許震龜) 허집(許鏶) 허천정(許天挺) 허충남(許忠男) 허해(許諧) 허현(許俔) 허현(許鉉) 허호(許滈) 허홍립(許弘立) 허황(許璜) 허회(許澮) 허흥우(許興遇) 허희봉(許希奉)

생원시

허갑(許䘥) 허강(許堈) 허개(許介) 허건(許健) 허겸(許謙) 허관(許灌) 허광익(許光益) 허국정(許國禎) 허국필(許國弼) 허규(許䅅) 허기(許棋) 허담(許紞) 허대희(許大熙) 허돈(許暾) 허동범(許東範) 허두수(許斗壽) 허백영(許伯瑛) 허보(許俌) 허복(許輻) 허사렴(許士廉) 허사증(許思曾) 허상(許襐) 허선(許㷽) 허선(許僐) 허속(許鋉) 허숙(許宿) 허식(許烒) 허심(許諶) 허육(許堉) 허윤(許綸) 허의(許扆) 허임(許絍) 허전(許銓) 허정속(許廷㻋) 허제(許濟) 허종길(許從吉) 허주(許綢) 허준(許晙) 허충길(許忠吉) 허탁(許鐸) 허한우(許漢佑) 허흡(許㬛) 허희(許僖)

진사시

허관(許灌) 허국정(許國禎) 허눌(許訥) 허담(許橝) 허동로(許東潞) 허만섭(許萬燮) 허만필(許萬弼) 허발(許墢) 허백기(許伯琦) 허백원(許伯瑗) 허빈(許鑌) 허사렴(許士廉) 허석룡(許錫龍) 허선(許璇) 허섭(許𤫙) 허섭(許燮) 허섭(許灄) 허순(許峋) 허의경(許義卿) 허임(許恁) 허조(許祚) 허종(許綜) 허종길(許從吉) 허좌(許佐) 허찬(許瓚) 허홍경(許弘卿) 허환(許綄)


3대옥당 4대문과편집

허치(許錙), 허선(許譔), 허정(許禎) 3대가 문과 급제하여 홍문관 직제학으로 근무하였기에 ‘3대 옥당’이라 칭하고, 또 허치(許錙), 허선(許譔), 허정(許禎), 허백기(許伯琦)로 이어지는 4대가 문과에 급제하였기에 ‘4대문과’ 집안이라고 말한다. 이 가문은 선산고을의 조선 전기에는 3대 옥당, 4대 문과 집안은 유일무이하므로 명문가문으로 칭했다.


집성촌편집

조선 왕실과 인척 관계편집

  • 경안군(소현세자3남) 군부인 김해 허씨

인구편집

  • 2000년 121,031명
  • 2015년 134,068명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