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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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원(松石園)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 옥류동 계곡에 있던 천수경이 살던 집의 이름이자, 그 주변 지역을 1700년대 중반부터 1800년대 중반까지 부르던 명칭이면서, 같은 지역에 들어선 윤덕영의 자택 벽수산장(碧樹山莊)의 원래 이름이기도 하다.

역사편집

1600년대편집

옥류동천청계천지류로, 수성동 계곡에서부터 내려오는 본류와, 누하동 77-15번지 앞에서 본류에 합류하는 옥류동(玉流洞) 계곡을 통칭한다.[1] 한편 창의문 아래 장동(壯洞)에 정착한 안동 김씨 김상용·김상헌 일파는 살던 지역의 이름에 의거하여 ‘장동 김씨’라고 불렸으며,[2][3] 이들은 장동 가운데에서도 특히 옥류동에 많은 집을 짓고 모여 살았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은 1683년에 육청헌(六靑軒)이라는 집을 지어 그곳에서 살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하여 사사(賜死)된 뒤 육청헌은 버려졌다.[4] 그 위치는 옥인동 47-73번지 일대로 추정된다.[5] 김수항은 또한 1686년 집 마당에 청휘각(淸暉閣)이라는 누각을 지었으며,[6] 이것이 건설 이후 30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 기울어지자 김창업이 같은 이름으로 새로 지었다.[7] 청휘각 뒤에는 김창업이 물을 마시던 가재우물(稼齋-)이라는 우물이 있었으며[7], 지금은 옥인동 47-376번지에 소재한 주택의 담벼락 아래 쇠창살 안쪽에 콘크리트로 덧칠되어 있기 때문에 우물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8]

1700년대편집

1700년대에 들어서자 옥류동 계곡 일대에는 장동 김씨의 집뿐만 아니라 중인들의 집이 곳곳에 생겨 이들이 혼재하게 되었다.[9] 중인 가운데 천수경은 옥류천 근처의 소나무[松] 바위[石] 아래 초라한 집[園]을 짓고 동인(同人)들을 모아 시를 읊었는데 당시 시인으로 이곳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수치로 여길 만큼 유명하였다.[10]위항시인들의 모임을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또는 서사(西社)·서원시사(西園詩社)라 하였으며, 여기에 참여한 서민 출신의 시인 장혼(張混), 조수삼(趙秀三), 차좌일(車左一), 김낙서(金洛瑞), 최북(崔北), 왕태(王太), 박윤묵(朴允默) 등은 위항문학의 대표적인 시인들이었다.[10]

송석원시사는 원래 1786년 7월 16일 결성할 당시에는 옥계시사(玉溪詩社)라고 하였다가[11], 1791년 경부터는 그 이름이 송석원시사로 바뀌어 불렸다.[9] 송석원시사에서는 매년 봄가을에 ‘백전’(白戰)을 열어, 중인이 적게는 30-50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까지 모여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12] 지금의 백일장이라고 할 수 있는 백전은 무기 대신 종잇장으로 싸운다는 뜻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13] 그 인기가 대단하여, 밤중에 순라꾼에게 잡혀도 백전에 간다고 말하면 풀려났다고 하며[13], 점차 천수경의 집 주변을 모두 송석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1800년대편집

1817년 음력 4월 김정희는 송석원시사가 모이던 뒤편 바위에 ‘송석원(松石園)’ 각자를 새기고 그 옆에 ‘정축청화월소봉래서(丁丑淸和月小蓬萊書)’라고 관지를 달았다.[14][15] 송석원 각자는 한 글자의 가로 및 세로의 폭이 4치가 되는 정방형으로 새겨졌다.[16] 이 각자의 위치는 현재 불분명한데, 김영상의 《서울 육백년》에는 ‘송석원 울 안 중간 지점쯤에 있는 꽤 큼직한 벼랑바위에 새겨져 있었다’라고만 되어 있다.[17] 아마 박노수 가옥 뒤쪽의 계단식 바위 벽에 새겨져 있다가, 현재 흙으로 묻힌 것으로 보인다.[18]

1860년대에 들어, 장동 김씨가 쇠하고 여흥 민씨가 득세하여 세도 정치의 중심점이 이동하였고, 1870년대에 이르러 민태호민규호가 송석원의 소유자가 되었다.[19] 민태호가 1884년에 죽은 뒤 그의 아들인 민영익민영린이 송석원을 경영하게 되었다.[20]

1900년대편집

송석원 일대는 1904년 순명비 민씨의 사망을 계기로 다른 이에게 매각되어, 1910년까지 몇 명의 사람이 차례로 소유하고 있었다.[20] 그러다가 윤덕영이 1910년 동지 즈음에 송석원 일대를 매입하였다.[21] 윤덕영은 점차 땅을 사들여 1917년 기준으로 옥인동에서만 16,628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는 지금은 지번이 분할된 옥인동 47번지의 거의 전부에 해당한다.[22]

윤덕영은 이 드넓은 땅에 대저택을 지었고, 이를 송석원이라고 부르다가, 일제 강점기 중반에 이르러 벽수산장으로 개칭하였다. 벽수산장은 1935년 최종 준공된 이후 줄곧 홍만자회 조선지부에서 임대하여 사용하다가, 윤덕영 사후 윤강로에 의하여 1945년 미쓰이광산주식회사에 건물과 부지 일체가 매각되었다.[23]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 직후 덕수병원에 불하(拂下)되었다가[23], 한국 전쟁 중 미8군 장교 숙소로 사용된 기간을 거쳐 1954년 6월부터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언커크)에서 사용하였다.[24] 이후 1966년 4월 5일 화재로 전소되어[24], 1973년 6월 도로정비 공사로 인하여 철거되었다.

벽수산장편집

정문에서 벽수산장 본채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벚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본채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으며, 그 주변에 단풍나무가 심겨 있었다. 본채 뒤로는 한옥이 있는데, 여기서 윤덕영의 소실이 거주하였으며 지금은 서용택 가옥으로 남아 있다. 그 뒤로도 99칸의 한옥이 있었으며, 더 뒤쪽으로 들어가면 가재우물이 매립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99칸의 한옥 앞에서 북동쪽으로 갈라지는 길로 들어서면 일양정이 있었다. 본채 앞으로는 2층으로 지어진 양옥이 있는데, 여기서 윤덕영의 딸과 사위가 살았으며 지금은 박노수 가옥으로 남아 있다. 벽수산장 경내에는 그 밖에도 큰 연못이 있었으며, 건물 주변의 숲은 소나무 등이 심어진 자연 상태였다.[25]

흔히 벽수산장으로 부르는 벽수산장 본채는 지금의 옥인동 47-479·481·487·488번지에 지상 3층·지하 1층 규모로 지어진 건물이었다.[26] 인왕산 중턱에 들어서서 경성 일대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우뚝 솟은데다가, 서양의 자재를 수입하여 10여년 동안 지은 프랑스식 호화로운 건물이었기 때문에 ‘아방궁’이라는 별칭이 있었다.[27][28] 그 밖에 큰 건물으로는 1919년 지어져 현존하는 서용택 가옥이 옥인동 47-133번지에 있고, 현재 철거된 175평의 2층 목조 건물이 옥인동 47-73번지 일대에 있었다.[5] 일양정(日陽亭)은 옥인동 47-383번지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정자로, 윤덕영이 청휘각을 계승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새로 지은 것이다.[29] 이렇게 벽수산장 안에는 크고 작은 건물을 모두 합하여 총 19 동이 있었다.[5] 한편 직사각형의 인공 연못은 옥류동천 본류의 물을 활용하여 누상동 1~3번지에 만든 것이었다.[5]

현존하는 벽수산장의 부속 건물로는 서용택 가옥박노수 가옥이 있다. 한때 순정효황후의 집으로 잘못 알려졌던 서용택 가옥은[30], 현재 일곱 가구가 나눠 거주하고 있다고 알려졌다.[31] 벽수산장 정문 기둥 4개 중 3개가 옥인동 47-27번지와 47-33번지 앞에 각각 1개, 2개 남아 있다.[32] 정문에서 벽수산장으로 들어가던 다리 오홍교(五虹橋)의 난간석 일부는 옥인동 56번지 세종아파트에 남아 있다.[32] 옥인동 62번지 소재 건물 동쪽에는 벽수산장의 벽돌담과 아치 흔적이 남아 있다. 벽수산장의 화재 이후 그 부재를 가져다가 일대의 집을 짓기도 하였으며, 그 중 하나로 태극 무늬가 그려진 돌계단 난간이 남아 있다.[33]

각주편집

  1. 김창희 & 최종현 2013, 177-178쪽.
  2. 김병기 2007, 169쪽.
  3. 최효찬 2008, 168쪽.
  4. 김창희 & 최종현 2013, 174-175쪽.
  5. 김창희 & 최종현 2013, 240쪽.
  6. 서울역사박물관 외 2010, 66쪽.
  7. 서울역사박물관 외 2010, 126쪽.
  8. 김창희 & 최종현 2013, 179-180쪽.
  9. 김창희 & 최종현 2013, 196쪽.
  10.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위항시인과 송석원시사”. 《위키문헌》. 2017년 1월 8일에 확인함. 
  11. 김창희 & 최종현 2013, 194-195쪽.
  12. 김창희 & 최종현 2013, 204쪽.
  13. 허경진 2008, 25쪽
  14. 허경진 2008, 26쪽.
  15. 김창희 & 최종현 2013, 202쪽.
  16. 김창희 & 최종현 2013, 203쪽.
  17. 김창희 & 최종현 2013, 207쪽.
  18. 김창희 & 최종현 2013, 208-211쪽.
  19. 김창희 & 최종현 2013, 236쪽.
  20. 김창희 & 최종현 2013, 237쪽.
  21. 김창희 & 최종현 2013, 235쪽.
  22. 김창희 & 최종현 2013, 233-234쪽.
  23. 김창희 & 최종현 2013, 244쪽.
  24. “『언커크』본부에큰불”. 동아일보. 1966년 4월 5일. 2017년 1월 8일에 확인함. 
  25. 윤평섭 (1984), ‘송석원에 대한 연구’, 한국정원학회지 제3권 제1호. 김상엽 (2015), ‘벽수산장과 송석원 2’에서 재인용.
  26. 김창희 & 최종현 2013, 239쪽.
  27. “경성소경 말하는샤진 (5) ◇명물아방궁”. 동아일보. 1921년 7월 27일. 2017년 1월 8일에 확인함. 
  28. 정섭 (1924년 7월 21일). “옥인동 송석원”. 동아일보. 2017년 1월 8일에 확인함. 
  29. 김창희 & 최종현 2013, 241-242쪽.
  30. 조한 2013, 190-191쪽.
  31. 조한 2013, 194쪽.
  32. 김창희 & 최종현 2013, 247쪽.
  33. 조한 2013, 193쪽.

참고 문헌편집

  • 김창희; 최종현 (2013). 《오래된 서울》. 서울: 동하. ISBN 9788996787228. 
  • 서울역사박물관 외 (2010). 《서촌. 1, 역사·경관·도시조직의 변화》.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ISBN 9788991553132. 
  • 허경진 (2008).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ISBN 9788925530086. 
  • 김병기 (2007). 《조선명가 안동김씨》. 경기: 김영사. ISBN 9788934924050. 
  • 최효찬 (2008).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경기: 위즈덤하우스. ISBN 9788960860858. 
  • 조한 (2013).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경기: 돌베개. ISBN 9788971995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