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심소
선심소(善心所, 산스크리트어: kuśala-caitasa, 영어: virtuous mental factors)는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심소법(心所法: 51가지) 그룹[位]의 6가지 세부 그룹인 변행심소(遍行心所: 5가지) ·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 선심소(善心所: 11가지) ·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 부정심소(不定心所: 4가지) 중의 하나이다.[1][2][3][4]
선심소(善心所)는 그 성질이 오로지 선(善)인 마음작용(심소법)들의 그룹을 말하는데,[5][6] 달리 말하면, 오직 선한 마음 또는 착한 마음과 상응하여 일어날 수 있는 마음작용들의 그룹을 말한다.[7][8][9][10][주해 1]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성질이 자성선(自性善) 또는 상응선(相應善)이면서 4일체(四一切)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같은 성격을 가진 마음작용(심소법)들의 그룹을 말한다. 불교에서 선(善)이란, 부파불교에서는 결과를 기준으로 보아서 편안하고 즐거운 과보[樂報]를 받을만한 것을 선(善)이라고 하며, 대승불교에서는 현재 · 미래에 걸쳐 자기와 남을 순익(順益)하는 것을 말한다.[11] 순익(順益)에서 순(順)은 '편안하게 하다, 안락하게 하다, 도리(道理)에 따르게 하다'의 뜻이며,[12] 익(益)은 '이롭게 하다, 돕다, 넉넉하게 하다, 향상되게 하다'의 뜻이다.[13] 불선(不善) 또는 악(惡)은 현세나 내세에 자기나 남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성질을 가진 것을 말한다.[14]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에 따르면, 신(信, sraddhā) · 정진(精進, vīrya) · 참(慚, hrī) · 괴(愧, apatrāpya) · 무탐(無貪, alobha) · 무진(無瞋, adveṣa, apratigha) · 무치(無癡, amoha) · 경안(輕安, praśrabdhi) · 불방일(不放逸, apramāda) · 행사(行捨, upekṣa) · 불해(不害, ahiṃsā)의 11가지 마음작용이 선심소를 구성한다.[5][6][15][16][주해 2]
한편, 《성유식론》에 따르면, 이들 11가지의 마음작용 외에도 흔(欣: 기뻐함)이나 염(厭: 싫어함)과 같은 선(善)한 성질의 다른 여러 마음작용들, 즉 기타 선심소들이 있다. 이들을 선심소 그룹에 포함시키지 않는 주된 이유는 이들의 본질적 성질이 위의 11가지 마음작용들 중 어느 하나 혹은 다수와 같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17][18]
순서
편집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주요 논서들에 속하는 세친의 《대승백법명문론》과 《대승오온론》, 무착의 《대승아비달마집론》, 안혜의 《대승아비달마잡집론》, 호법 등의 《성유식론》에서 선심소에 속한 마음작용들의 개수는 11개로 일치하지만, 순서나 명칭은 다음 표와 같이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편, 이 문서에서의 나열 순서와 주 명칭은 세친의 《대승백법명문론》을 따르고 있다.
아래 표에서 차이가 있는 부분을 빨간색으로 표시하였다.
11가지 선심소
편집선심소(善心所)는 다음의 11가지 마음작용(심소법)들을 말한다.
신 (믿음)
편집신(信)은 믿음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음을 뜻한다.[19][20][21][22][23]
- 산스크리트어: śraddhā, 팔리어: saddhā, 영어: faith
- 신(信)의 본질[自相, 性]은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을 정화시켜 청정(淸淨: 맑고 깨끗함)하게 하는 것임[24][25]
- 깊이 인정하고[深忍, 勝解] 깊이 좋아하고[深樂, 樂受] 깊이 원함[深欲, 欲]
- 실(實) · 덕(德) · 능(能)을 깊이 인정하고 좋아하고 원함
- 불신(不信)을 대치(對治: 다스림, 선법으로 번뇌를 끊음)하여 염오한 마음(염오한 8식, 즉 심왕, 즉 심법)을 정화시키고 선(善)을 닦고 증득하는 것을 좋아하게 함
정진 (수행에 용감하고 굳셈)
편집정진(精進)은 근(勤)이라고도 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음을 뜻한다.[26][27][28][29][30]
- 산스크리트어: vīrya, 팔리어: viriya, 영어: diligence, energy, perseverance, enthusiasm, sustained effort
- 선(善)을 닦고 악(惡)을 끊음에 용감하고 굳셈
- 해태(懈怠: 게으름)를 대치하여 선(善) 또는 선법(善法)을 완전히 성취하고 갖추게 함
- 피갑(被甲) · 가행(加行) · 무하(無下) · 무퇴(無退) · 무족(無足)의 5단계의 차별이 있음
- 제1단계인 피갑(被甲)은 불교 경전에서의 유세(有勢: 세력이 있는 것)를 말하는데, 갑옷[甲]을 입고[被] 군대가 진(陣)을 친 곳에 들어갈 때 두려워하지 않고 큰 위세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맹렬하고 날카롭게 즐거운 욕구를 일으키는 것을 말함
- 제2단계인 가행(加行)은 불교 경전에서의 유근(有勤: 정진하는 것)에 해당하는데, 견고하고 용감한 방편(方便)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을 견고하게 해서 스스로 책려(策勵)하는 것을 뜻함
- 제3단계인 무하(無下)는 문자 그대로의 뜻은 '낮추지 않음'으로, 불교 경전에서의 유용(有勇: 용감한 것)에 해당하는데, 증득해야 할 선법(善法)에 대해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고, 그 선법(善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함
- 제4단계인 무퇴(無退)는 문자 그대로의 뜻은 '물러나지 않음'으로, 불교 경전에서의 견용(堅猛: 견고하고 용맹한 것)에 해당하는데, 추위나 배고픔 등의 고통을 능히 인내로써 받아들이고, 열등한 선(善) 또는 선법(善法)에 대해서 혐오(嫌惡)나 만족함을 일으키지 않으며, 다음 단계의 뛰어난 공덕 등을 기쁘게 구하는 것을 말함
- 제5단계인 무족(無足)은 문자 그대로의 뜻은 '만족하지 않음'으로, 불교 경전에서 소[牛]에게 멍에를 씌움으로써 소로 하여금 도망가지 않고 능히 나아가게 하는 것과 같이 수행자에게 멍에를 지워 선법(善法)에서 벗어나지 않고 열반에 나아가게 한다는 뜻의 불사선액(不捨善軛: 선의 멍에를 버리지 않음)에 해당하는데, 이전의 무퇴(無退)의 노력과 성취에 안주하여 정체되지 않고 4성제를 관찰하는 수행인 제관(諦觀) 등의 보다 뛰어난 도(道)에 들어가는 것을 말함
참 (자신에 대한 반성)
편집참(慚)은 반성(反省)하는 것, 즉 자신의 언행(言行), 보다 정확히는, 자신의 말[口業]과 행동[身業]과 뜻[意業]에 대하여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 보는 것[31]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음을 뜻한다.[32][33][34][35][36]
- 산스크리트어: hrī, 팔리어: hiri, 영어: self-respect, conscientiousness, sense of shame, dignity
- 자증상(自增上)과 법증상(法增上)
- 자증상(自增上)은 자신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에서 생겨나는 향상력[增上]
- 법증상(法增上)은 자신이 현재 배우고 있는 선법[所學法]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에서 생겨나는 향상력[增上]
- 자증상(自增上)과 법증상(法增上)을 바탕으로 현인(賢人, 賢聖)과 선법(善法)을 받들고 존중함
- 자증상(自增上)과 법증상(法增上)을 바탕으로 자신의 잘못(허물과 악행)을 부끄럽게 여김 (반성한다는 것 또는 부끄럽게 여김이 있다는 것은 자신과 선법(善法)을 무가치한 존재 또는 존엄성이 없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역으로, 반성함이 없는 것 또는 부끄럽게 여김이 없다는 뜻의 무참(無慚)의 마음작용은 자신과 선법(善法)을 무가치한 존재 또는 존엄성이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 자증상(自增上)과 법증상(法增上)을 바탕으로 허물[過, 過失: 부주의나 태만 따위에서 비롯된 잘못[37]]과 악행[惡: 불선]에 대해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여김, 이로써 무참(無慚)을 대치하여 여러 악행(惡行)을 멈추게 함
괴 (타인에 대한 반성)
편집괴(愧)는 반성(反省)하는 것, 즉 자신의 언행(言行), 보다 정확히는, 자신의 말[口業]과 행동[身業]과 뜻[意業]에 대하여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 보는 것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음을 뜻한다.[38][39][40][41][42]
- 산스크리트어: apatrāpya, 팔리어: ottappa, 영어: decorum, shame, consideration, propriety
- 세증상(世增上)
- 세증상(自增上)은 세간의 도덕과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에서 생겨나는 향상력[增上]
- 이에 바탕하여, 세간과 다른 사람들(예를 들어, 스승, 부모, 배우자, 형제, 자매, 애인, 친구, 동료, 인터넷 댓글 등)의 꾸짖음[訶]과 싫어함[厭]을 받아들여 향상력[增上]으로 삼는 것
- 세증상(世增上)은 자신의 광포한 악[暴惡]을 좀 더 쉽게 거부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함 (즉, 다른 사람들과 세간의 도덕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김이 있는 상태에서는, 남의 꾸지람을 듣거나 남의 싫어함을 느낄 때 자신을 잘못을 좀 더 쉽게 알아차리고 거부할 수 있게 됨)
- 세증상(自增上)을 바탕으로 자신의 잘못(허물과 악행)을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럽게 여김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럽게 여김이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무가치한 존재 또는 존엄성이 없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역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럽게 여김이 없다는 뜻의 무괴(無愧)의 마음작용은 다른 사람들을 무가치한 존재 또는 존엄성이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 세증상(自增上)을 바탕으로 자신의 허물[過, 過失: 부주의나 태만 따위에서 비롯된 잘못]과 악행[惡: 불선]을 다른 사람들에게 수치스럽게 여김, 이로써 무괴(無慚)를 대치하여 여러 악행(惡行)을 멈추게 함
무탐 (무집착)
편집무탐(無貪)은 탐욕이 없는 것, 즉 무집착(無執着) 또는 비집착(非執着)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음을 뜻한다.[43][44][45][46][47]
- 산스크리트어: alobha, 팔리어: alobha, 영어: purity, not lustrous, non-attachment, without attachment, detachment
- 선근(善根, 三善根) 중의 하나[48][49]
- 유(有)와 유구(有具)에 집착하지 않음
- 유(有)와 유구(有具)에 집착하지 않음을 통해 탐(貪)을 대치하여 선(善)을 행하게 함
- 같이 보기: 4무량심(四無量心) 중 사무량심(捨無量心)[52][53]
무진 (자비의 자)
편집무진(無瞋)은 성내지 않는 것, 즉 자(慈: 사랑, 자애)를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음을 뜻한다.[54][55][56][57][58]
- 산스크리트어: adveṣa, apratigha, 팔리어: adosa, 영어: good will, non-aggression, equanimity, lack of hatred, non-hatred, imperturbability, non-anger
- 선근(善根, 三善根) 중의 하나[48][49]
- 자비(慈悲)에서 자(慈)를 본질적인 성질로 함[58]
- 자비(慈悲)에서 비(悲)를 본질적인 성질로 하는 것은 불해(不害)의 마음작용임[59]
- 자(慈)는 여락(與樂), 즉 중생을 사랑[慈愛]하여 낙(樂, 즐거움)을 주는 것을 말함[60][61][62]
- 비(悲)는 발고(拔苦), 즉 중생의 고(苦, 괴로움)에 대해 동감(同感)하고 연민(憐憫)하여 그 고(苦, 괴로움)를 덜어 주는 것을 말함[60][61][62]
- 비(悲: 동감, 연민, 발고)는 자(慈: 사랑, 자애, 여락)의 특수한 경우임, 즉, 특별히 고(苦, 괴로움)에 대해 나타나는 자(慈)를 비(悲)라고 함, 즉, 자(慈)는 비(悲)보다 더 일반적인 것임, 반대로, 비(悲)는 자(慈)를 근거로 하여 생겨나는 것임[63][64][65][66][67]
- 고(苦)와 고구(苦具)에 대하여 성내지 않음
- 고(苦)와 고구(苦具)에 대해 성내지 않음을 통해, 진(瞋, 瞋恚, 恚)을 대치하여 선(善)을 행하게 함
- 악행(惡行)에 빠지지 않게[不轉] 하는 의지처가 됨
- 같이 보기: 4무량심(四無量心) 중 자무량심(慈無量心)과 비무량심(悲無量心)[52][53]
무치 (지혜)
편집무치(無癡)는 어리석지 않은 것, 지혜로운 것[慧]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음을 뜻한다.[68][69][70][71][72]
- 산스크리트어: amoha, 팔리어: amoha, 영어: wisdom, non-delusion, non-bewilderment, lack of naivety, lack of stupidity
- 선근(善根, 三善根) 중의 하나[48][49]
- 모든 이사(理事)에 미혹하지 않은 것, 즉 모든 이사(理事)를 명료하게 아는 것[明解]을 말함
- 이사(理事)는 본체[理]와 현상[事]을 말함
- 《대승아비달마집론》과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 따르면, 보교증지(報教證智)로써 결택(決擇)하는 것을 말함
- 치(癡, 愚癡)를 대치하여 선(善)을 행하게 함
경안 (혼침이 없음)
편집경안(輕安)은 안(安)이라고도 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음을 뜻한다.[73][74][75][76][77]
- 산스크리트어: praśrabdhi, 팔리어: passaddhi, 영어: pliancy, pliability, alertness, flexibility
- 경쾌(輕快)와 평안(平安)
- 경(輕)은 몸과 마음의 무거움[麤重]을 떠남, 안(安)은 몸과 마음을 고르게 하고 잘 통하게 함
- 경(輕)과 안(安)을 통해 몸과 마음이 유연한 상태[堪任, 자재함]에 있게 함
- 경(輕)과 안(安)을 통해 선정[定]을 방해하는 등의 일체의 장애를 없앰
- 혼침(惛沈)을 대치하여 소의신(所依身: 신체, 엄밀히는 6근)을 전환시킴
- 선정[定]을 장애하는 요소[法]들을 조복시키고 없애서 소의지(所依止: 신체, 엄밀히는 6근)가 평안하고 적절하게 함
- 산심위(散心位: 산란된 마음의 상태)인 욕계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정위(定位: 선정의 상태)인 색계 · 무색계에서만 생겨남
- 색계의 초선천(初禪天)인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는 욕계를 떠남[離]으로서 생기[生]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을 느끼는 경지 또는 마음 상태이다.[78][79]
- 같이 보기: 4무량심(四無量心) 중 희무량심(喜無量心)[52][53]
불방일 (성실)
편집불방일(不放逸)은 방일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음을 뜻한다.[80][81][82][83][84]
- 산스크리트어: apramāda, 팔리어: appamada, 영어: conscientiousness, concern, prudent
- 불방일(不放逸)은 방일(放逸)하지 않는 것, 즉 성실(誠實)한 것을 말한다
- 불방일(不放逸)은 정진(精進, 勤)과 선근(善根), 즉 정진(精進, 勤) ·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의 4가지 마음작용으로 하여금 각자가 하여야 할 바를 하게 하는 마음작용임
- 이로써 방일(放逸)을 대치하여, 일체의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선한 일[善事]을 완성시킴
행사 (적정)
편집행사(行捨)는 사(捨)라고도 하는데, 적정(寂靜: 고요함)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다음을 뜻한다.[92][93][94][95][96]
- 산스크리트어: upekṣa, 팔리어: upekkhā, 영어: equanimity
- 행사(行捨)라는 말은 5온(五蘊) 중에 수온(受蘊)이 아닌 행온(行蘊)에 포함되는 사(捨)라는 뜻임
- 사(捨) 또는 '사(捨)의 상태'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정주(靜住: 고요히 머무는 것)하는 것을 말함
- 이것을 달리 말하여 '적정에 머문다[寂靜而住]'라고도 하며, 간단히 '적정(寂靜: 고요함)'이라고도 함
- 사(捨)의 상태, 즉 정주(靜住: 고요히 머무는 것), 즉 적정(寂靜: 고요함)에는 평등(平等) · 정직(正直) · 무공용주(無功用住)의 3단계가 있음
- 평등(平等)은 제1단계[初位], 정직(正直)은 제2단계[中位], 무공용주(無功用住)는 제3단계임[後位]
- 3단계의 차별이 있는 이유는 행사(行捨)의 마음작용이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과 상응한 결과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에 침몰(沈沒)된 상태를 떠난 정도에 있어서 차별이 있기 때문임
- 제1단계의 평등(平等: 차별이 없음, 모두가 동일함)을 증득한 상태가 되면,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탄력을 받아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에 침몰(沈沒)된 상태를 '멀리 떠나는 것[遠離]'을 '더욱 힘써 하게 되고[加行]' 이렇게 하여 형성된 '멀리 떠남[遠離]'의 힘이 자연히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에 상속(相續)됨
- 제2단계의 정직(正直: 바르고 곧음)을 증득한 상태가 되면,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모든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에 대해 '두려워 하는 마음[怯慮]'을 가지지 않게 됨
- 마지막, 제3단계의 무공용주(無功用住: 무공용으로도 머뭄)를 증득한 상태가 되면, 무공용(無功用)에도 불구하고, 즉 공용(功用)이 없음에도, 즉 공(功)을 쌓음[用]이 없음에도, 즉 힘써 노력함[功用]이 없음에도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언제나 자연히 사(捨)의 상태, 즉 정주(靜住: 고요히 머무는 것), 즉 적정(寂靜: 고요함)에 머물게 됨
- 사(捨)의 상태, 즉 정주(靜住: 고요히 머무는 것), 즉 적정(寂靜: 고요함)은 잡염주(雜染住), 즉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잡염(雜染)에 머무는 상태'와는 상반[相違, 相反]되는 것임, 즉 사(捨)의 상태, 즉 정주(靜住: 고요히 머무는 것), 즉 적정(寂靜: 고요함)은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잡염(雜染: 근본번뇌와 수번뇌, 즉 모든 번뇌)의 의지처[所依, 활동 공간, 놀이터]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상태임
- 이와 관련하여, 적정(寂靜)에 이르기 위한 사(捨)의 수행의 전 단계는 불방일(不放逸, 손 놓지 않음, 성실)을 통해 잡염(雜染)을 제거하는 것임
- 행사(行捨)는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사(捨)의 상태, 즉 정주(靜住: 고요히 머무는 것), 즉 적정(寂靜: 고요함)에 머물게 하는 마음작용임
- 그런데, 행사(行捨)의 마음작용은 자신이 직접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사(捨)의 상태에 머물게 하지 않음
- 즉, 행사(行捨)는 정진(精進, 勤)과 선근(善根), 즉 정진(精進, 勤) ·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의 4가지 마음작용을 작용시켜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이 사(捨)의 상태에 머물게 하는 마음작용임
- 즉, 실제로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사(捨)의 상태에 머물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정진(精進, 勤) ·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의 4가지 마음작용임
- 행사(行捨)는 도거(掉擧)를 대치하여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으로 하여금 사(捨)의 상태, 즉 정주(靜住: 고요히 머무는 것), 즉 적정(寂靜: 고요함)에 머물게 함
- 같이 보기: 4무량심(四無量心) 중 사무량심(捨無量心)[52][53]
불해 (자비의 비)
편집불해(不害)는 해치지 않음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다음을 뜻한다.[63][64][65][66][67]
- 산스크리트어: ahiṃsā, 팔리어: avihiṃsā, 영어: nonharmfulness, non-harming, nonviolence
- 자비(慈悲)에서 비(悲)를 본질적인 성질로 함[59]
- 자비(慈悲)에서 자(慈)를 본질적인 성질로 하는 것은 무진(無瞋)의 마음작용임[58]
- 자(慈)는 여락(與樂), 즉 중생을 사랑[慈愛]하여 낙(樂, 즐거움)을 주는 것을 말함[60][61][62]
- 비(悲)는 발고(拔苦), 즉 중생의 고(苦, 괴로움)에 대해 동감(同感)하고 연민(憐憫)하여 그 고(苦, 괴로움)를 덜어 주는 것을 말함[60][61][62]
- 비(悲: 동감, 연민, 발고)는 자(慈: 사랑, 자애, 여락)의 특수한 경우임, 즉, 특별히 고(苦, 괴로움)에 대해 나타나는 자(慈)를 비(悲)라고 함, 즉, 자(慈)는 비(悲)보다 더 일반적인 것임, 반대로, 비(悲)는 자(慈)를 근거로 하여 생겨나는 것임[63][64][65][66][67]
- 무진(無瞋)의 일분(一分), 즉 무진(無瞋)의 특수한 경우인 '손해[損]와 괴로움[惱]을 주지 않으려는 무진(無瞋)'을 본질로 하여 해(害: 해롭게 하는 것)를 대치하고, 중생의 고(苦, 괴로움)에 대해 동감(同感)하고 연민(憐憫)하여 그 고(苦, 괴로움)를 덜어 주고자[拔苦] 함
- 즉, 불해(不害)는 3선근 중의 하나인 무진(無瞋)의 일분(一分), 즉 무진(無瞋)의 본질적 성질인 자(慈: 사랑, 자애, 여락)의 일분(一分), 즉 자(慈)의 특수한 경우인 비(悲: 동감, 연민, 발고)를 본질적 성질로 하는 마음작용으로, 불해(不害), 즉 '해치지 않는 것'이란 곧 비(悲: 동감, 연민, 발고)를 말함
- 즉, 비(悲: 동감, 연민, 발고)는 해(害: 해롭게 하는 것)의 마음작용, 즉 '해치려는 마음'을 대치하는 작용을 함
- 달리 말하면, 자신에게 '누군가를 해치려는 마음'이 있어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비(悲: 동감, 연민, 발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그 방법임. 즉 비(悲: 동감, 연민, 발고)의 마음작용과 상응하면 됨
- 같이 보기: 4무량심(四無量心) 중 비무량심(悲無量心)[52][53]
기타 선심소
편집《성유식론》에 따르면, 위의 선심소 그룹에 포함된 11가지의 마음작용 외에도 흔(欣: 기뻐함)이나 염(厭: 싫어함)과 같은 선(善)한 성질의 다른 여러 마음작용들, 즉 기타 선심소들이 있다. 이들을 선심소 그룹에 포함시키지 않는 주된 이유는 이들의 본질적 성질이 위의 11가지 마음작용들 중 어느 하나 혹은 다수와 같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17][18]
기타 선심소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무진을 본질로 하는 경우
편집무진(無瞋)을 본질[體]로 하는 기타 선심소들, 즉 무진(無瞋)의 특수한 경우[一分]로서의 선한 마음작용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97][98]
흔 (기뻐함)
편집- 흔(欣): 기뻐함[97][98]
- 무기성(無記性)의 욕(欲)과 함께하는 무진(無瞋)을 본질로 함
- 기뻐하는 것은 욕(欲)에 속하지만, 기뻐하게 된 대상[所欣境]에 대해서는 증오[憎]나 성냄[恚]을 가지지 않으므로 무진(無瞋)에 속한 것이기도 함
- 즉, 흔(欣)은 무기성(無記性)의 욕(欲)이 선근(善根)과 자성선(自性善) 중의 하나인 무진(無瞋)과 상응하여 선(善)이 된 것으로, 따라서 흔(欣)은 상응선(相應善)임
- 요컨데, 흔(欣)하게 된 대상[所欣境]에 대해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증오[憎]나 성냄[恚]을 가지지 않으므로 흔(欣)은 무진(無瞋)의 특수한 경우[一分]임
불분 (분노하지 않음)
편집불한 (원한을 품지 않음)
편집불뇌 (괴로워 하지 않음)
편집부질 (질투하지 않음)
편집무탐을 본질로 하는 경우
편집무탐(無貪)을 본질[體]로 하는 기타 선심소들, 즉 무탐(無貪)의 특수한 경우[一分]로서의 선한 마음작용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99][100]
염 (싫어함)
편집- 염(厭): 싫어함[99][100]
- 여기의 '염'은 염세(厭世: 세상이 귀찮음, 인생이 싫어짐)나 염증(厭症: 싫증)의 염이 아님, 이러한 염은, 둘 다 자성불선(自性不善)과 중수번뇌(中隨煩惱) 중의 하나인, 자증상(自增上) · 법증상(法增上)이 없는 무참(無慚)과 세증상(世增上)이 없는 무괴(無慚)가, 불선근과 자성불선 중의 하나인, 이사(理事: 본체와 현상, 이치와 현상)에 미혹하는 것인 치(癡)와 상응하여 생겨난 것이므로 선(善)이 아니라 불선(不善, 악)임, 그것도 아주 심한 불선(不善, 악)임
- 여기의 '염'은 불교 수행의 하나로서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3계에 대한 염착(染著, 탐착, 오염으로서의 탐욕 또는 집착)을 제거하는 수행인 수염(修厭: 싫어하는 마음을 닦는 것)의 염을 말함, 이러한 염은 선(善)임
- 무기성(無記性)의 혜(慧)과 함께하는 무탐(無貪)을 본질로 함
- 싫어하는 것은 혜(慧)에 속하지만, 싫어하게 된 대상[所厭境]에 대해서는 염착(染著, 탐착, 오염으로서의 탐욕 또는 집착)을 가지지 않으므로 무탐(無貪)에 속한 것이기도 함
- 즉, 염(厭)은 무기성(無記性)의 혜(慧)가 선근(善根)과 자성선(自性善) 중의 하나인 무탐(無貪)과 상응하여 선(善)이 된 것으로, 따라서 염(厭)은 상응선(相應善)임
- 요컨데, 염(厭)하게 된 대상[所厭境]에 대해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염착(染著, 탐착, 오염으로서의 탐욕 또는 집착)을 가지지 않으므로 염(厭)은 무탐(無貪)의 특수한 경우[一分]임
불간 (인색하지 않음)
편집불교 (소유물에 대해 오만하지 않음)
편집무탐·무치를 본질로 하는 경우
편집무탐(無貪)과 무치(無癡)를 본질[體]로 하는 기타 선심소들, 즉 무탐(無貪)과 무치(無癡)의 특수한 경우[一分]로서의 선한 마음작용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101][102]
불부 (은폐하지 않음)
편집- 불부(不覆): 은폐하지 않음, 감추지 않음, 덮어두지 않음[101][102]
- 번뇌성(煩惱性)의 부(覆: 은폐, 감춤, 덮어둠)를 뒤집어 정반대로 세운 것임
- 불부(不覆)하게 된 대상[所不覆境]에 대해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염착(染著, 탐착, 오염으로서의 탐욕 또는 집착)을 가지지 않으므로 불간(不慳)은 무탐(無貪)의 특수한 경우[一分]임 또한 이사(理事: 본체와 현상, 이치와 현상)에 미혹하지 않은 것이므로 무치(無癡)의 특수한 경[一分]우임
- 다른 견해로는, 불부(不覆)는 오직 무치(無癡)의 특수한 경우[一分]라는 견해가 있음, 그 근거로는 어떤 경론에서도 부(覆: 은폐, 감춤, 덮어둠)의 마음작용이 탐(貪)의 마음작용의 특수한 경우[一分]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듦.[103][104]
불광 (속이지 않음)
편집불첨 (아첨하지 않음)
편집선과 악에 모두 통하는 경우
편집선(善)과 악(惡), 즉 선(善)과 불선(不善), 염(染, 잡염)과 불염(不染), 또는 잡염법(雜染法)과 청정법(淸淨法)에 모두 통하기 때문에 선(善)한 마음작용이 될 수도 있는 마음작용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들은 뒤집어 세울 수 있는 정반대의 마음작용이 없는 마음작용들이다.[105][106]
기타의 경우
편집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의 하나 혹은 다수를 본질[體]로 하지 않으며 또한 그 성질이 선(善)과 악(惡)에 모두 통하는 마음작용들도 아닌 마음작용들로서, 그 성질이 선(善)으로 규정되는 마음작용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불만 (거만하지 않음)
편집- 불만(不慢): 거만하지 않음, 얕보지 않음[109][110]
불의 (의심하지 않음)
편집- 불의(不疑): 의심하지 않음[114][115]
- 번뇌성(煩惱性)의 의(疑: 의심, 유예)를 뒤집어 정반대로 세운 것임
- 불의(不疑)의 본질적 성질[體]에 대해서는 다음의 3가지 견해가 있음
- 신(信)의 마음작용의 특수한 경우[一分]라고 보는 견해가 있음
- 그 근거로는, 믿게 된 대상[所信境]에 대해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유예(猶豫: 망설이고 머뭇거림, 망설여 결행하지 않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함
- 참된 승해[正勝解]의 마음작용의 특수한 경우[一分]라고 보는 견해가 있음
- 그 근거로는, 바르게 결정된 대상[所正勝解境, 所正決定境]에 대해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유예(猶豫: 망설이고 머뭇거림, 망설여 결행하지 않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함
- 참된 혜[正慧]의 마음작용의 특수한 경우[一分]라고 보는 견해가 있음, 이 견해는 호법의 견해임
- 그 근거로는, 바르게 본 대상[所正見境]에 대해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유예(猶豫: 망설이고 머뭇거림, 망설여 결행하지 않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함
- 신(信)의 마음작용의 특수한 경우[一分]라고 보는 견해가 있음
불산란 (산란하지 않음)
편집정견 (바른 견해)
편집- 정견(正見): 바른 견해, 바르게 봄[122][123]
- 번뇌성(煩惱性)의 부정견(不正見) 또는 악견(惡見)을 뒤집어 정반대로 세운 것임
- 《구사론》에 따르면, 부정견(不正見) 또는 악견(惡見)은 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의 5가지 염오견(染汚見)을 말함[124][125][126][127]
- 유신견(有身見) 또는 살가야견(薩迦耶見)은 소의신(所依身), 즉 5온의 화합체를 실유(實有)라고 집착하는 견해
- 변집견(邊執見)은 단(斷)과 상(常)의 두 극단[邊]에 집착하는 견해, 즉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 사견(邪見)은 인과의 도리, 즉 원인과 결과의 법칙, 즉 연기법(緣起法)을 부정하는 견해
- 견취(見取)는 그릇된 견해를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즉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등을 일으킨 후 이를 고집하여 진실하고 뛰어난 견해라고 집착하는 것[133]
- 계금취(戒禁取)는 그릇된 계행(戒行)을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즉 그릇된 계율이나 금지 조항을 바른 것으로 간주하여 거기에 집착하는 것, 이에 따라, 인(因) 아닌 것을 인이라 하고, 참된 해탈도(解脫道)가 아닌 것을 참된 해탈도라고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 예를 들어, 개나 소 따위가 죽은 뒤엔 하늘에 태어난다고 하여 개나 소처럼 풀을 먹고 똥을 먹으며 개와 소의 행동을 하면서 이것이 하늘에 태어나는 원인이고 바른 길이라고 집착하는 것, 또는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 갠지즈강에 목욕하거나 불속에 뛰어드는 것 등[134][135][136][137]
- 바르게 본 대상[所正見境, 여기서의 대상은 구체적 · 개별적 사람 또는 사물이 아닌 이론, 교의, 세계관 또는 견해를 말함]에 대해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잘못된 판단이나 이해, 지식, 앎 또는 간택(簡擇)을 가지지 않으므로 정견(正見)은 선혜(善慧), 즉 참된 혜(慧), 즉 선(善)한 상태의 혜(慧)의 특수한 경우[一分]임
- 같이 보기: 견(見), 별경심소(別境心所)의 혜(慧), 8정도(八正道)의 정견(正見)
정지 (바르게 앎)
편집불망념 (잊어버리지 않음)
편집성격
편집자성선·상응선 분별
편집11가지 선심소의 마음작용 중 참(慚) · 괴(愧) ·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는 본질적으로 선(善)인 자성선(自性善)에 해당하고, 나머지 6가지 마음작용들, 즉 신(信) · 정진(精進) · 경안(輕安) · 불방일(不放逸) · 행사(行捨) · 불해(不害)는 본질적으로는 무기(無記)이지만 5가지 자성선(自性善)과 상응함으로써 선(善)이 되는 상응선(相應善)에 해당한다.[144][145]
한편, 작의(作意) · 촉(觸) · 수(受) · 상(想) · 사(思)의 변행심소(遍行心所)와 욕(欲) · 승해(勝解) · 염(念) · 삼마지(三摩地, 定) · 혜(慧)의 별경심소(別境心所)와 수면(睡眠, 眠) · 악작(惡作, 悔) · 심(尋) · 사(伺)의 부정심소(不定心所)는 모두 선(善) · 악(惡) · 무기(無記)의 3성(三性)에 통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무기(無記)의 성질을 가진다. 이들은 모두 상응선(相應善)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선심소 그룹에 속하지 않고 각자의 그룹에 속한 것은 4일체(四一切)의 기준에서 선심소 그룹의 마음작용들과는 그 성격이 구별되기 때문이다.[146][147]
선근
편집11가지 선심소의 마음작용 중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의 3가지를 모든 선(善)의 뿌리라고 하여, 3선근(三善根)이라고 하며, 또한 간단히 선근(善根)이라고도 한다.[144][145][148]
선근(善根), 즉 '선(善)의 뿌리'라는 말은, 자성선이 아닌 어떤 마음작용이 선(善)이 되기 위해서는 5가지의 자성선들 중에서도 특히 이들 3가지 자성선과 상응함으로써 비로소 선(善: 좋은 과보를 낳는 것,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자신과 남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과장되이 말하면, 자성선이 아닌 어떤 마음작용이 선(善)이 되기 위해서는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 중 어느 하나 혹은 다수와 "반드시" 상응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위에서 나열된 "기타 선심소들" 중에서 다수가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 중 어느 하나 혹은 둘을 본질로 하고 있다.
자성선이 아닌 어떤 마음작용이 선(善)이 되는 경우의 예로서, 원래의 성질이 무기(無記)인 별경심소의 욕(欲: 원함, 욕구, 희망)을 들 수 있다.
욕(欲: 원함, 욕구, 희망)은 무탐(無貪: 타인의 재물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욕망이 없는 것) · 무진(無瞋: 성냄이 없는 것, 미워함과 원망이 없는 것, 탓함이 없는 것, 자비로움) · 무치(無癡: 4성제를 아는 것, 연기법을 아는 것, 인과와 공의 도리를 아는 것)의 하나 혹은 다수와 상응하면 선욕(善欲)이 된다. 그리고, 선욕(善欲)은 정진(精進, 勤, 正勤, 힘써 노력함, 바른 노력, 8정도의 정정진)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된다.[149][150][151]
불교에서 선(善)이란, 부파불교에서는 결과를 기준으로 보아서 편안하고 즐거운 과보[樂報]를 받을만한 것을 선(善)이라고 하며, 대승불교에서는 현재 · 미래에 걸쳐 자기와 남을 순익(順益)하는 것을 말한다.[11] 따라서, 선욕(善欲)이란 자신과 남에게 즐거운 과보를 가져오는 혹은 자기와 남을 이익되게 하는 욕구이다.
말하자면, 무탐과 상응함으로써 타인이 가진 것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욕구가 없으므로 스스로 벌이들이려고 하게 된다. 무진과 상응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미워함과 원망이 없기에 자신이 현재 가지지 못한 것을 남의 탓으로 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에 대해서도 미워함과 원망이 없기에 자신에 대해서도 성내는 마음이 없으므로 스스로 좌절하지 않는다. 무치와 상응함으로써 인과의 도리를 알기 때문에 자신도 원인을 쌓으면 원하는 바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반대로 3독(三毒) 즉 불선근(不善根)인 탐(貪: 타인의 재물을 자기 것으로 하려는 욕망이 있는 것) · 진(瞋: 성내는 것, 미워함과 원망이 있는 것, 탓하는 것, 자비롭지 않음) · 치(癡: 4성제를 모르는 것, 연기법을 모르는 것, 인과와 공의 도리를 모르는 것)와 상응하면 악욕(惡欲)이 된다. 그리고, 악욕(惡欲)은 정진(精進, 勤, 바른 노력)을 하지 않게 하는 요인이 된다.
불교에서 불선(不善) 또는 악(惡)은 현세나 내세에 자기나 남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성질을 가진 것을 말한다.[14] 따라서, 악욕(惡欲)은 현세나 내세에 자기나 남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성질의 욕구를 말한다.
말하자면, 탐과 상응한 경우 타인의 재물이건 지식이건 혹은 공(功)이건 간에 타인이 가진 것을 가로채거나 빼앗아서 쉽게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하게 된다. 진과 상응한 경우, 남에게 성내는 상태, 즉 남을 탓할 때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현재의 상태의 이유가 남에게 있다고 여기는 것이므로 스스로 노력할 이유가 없고, 자신에게 성내는 상태, 즉 자신을 탓할 때는 스스로 좌절하여 노력을 포기한다. 치와 상응한 경우는 원인을 쌓으면 반드시 결과가 온다는 것에 확신이 없으므로, 원인을 쌓다가 말다가를 반복하게 된다.
참고 문헌
편집- 곽철환 (2003).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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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권오민 (2003). 《아비달마불교》.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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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운허. 동국역경원 편집, 편집. 《불교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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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K.614, T.1585). 《성유식론》. 한글대장경 검색시스템 - 전자불전연구소 / 동국역경원. K.614(17-510), T.158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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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중국어) 무착 조, 현장 한역 (T.1605).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대정신수대장경. T31, No. 1605, CB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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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중국어) 세친 조, 현장 한역 (T.1558).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대정신수대장경. T29, No. 1558, CB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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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중국어) 세친 조, 현장 한역 (T.1612). 《대승오온론(大乘五蘊論)》. 대정신수대장경. T31, No. 1612, CB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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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중국어) 세친 조, 현장 한역 (T.1614).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 대정신수대장경. T31, No. 1614, CB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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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중국어) 안혜 조, 현장 한역 (T.1606).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 대정신수대장경. T31, No. 1606, CB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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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중국어)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T.1585). 《성유식론(成唯識論)》. 대정신수대장경. T31, No. 1585, CB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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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주해
편집- ↑ 《성유식론》에서 선심소를 정의하는 대목을 찾아보면 제5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에서는 선심소에 대해 "唯善心中可得生故"라고 말하고 있고 제6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에서는 "唯善心俱名善心所"라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한글 해석문들을 보면, 크게 2종의 해석이 있다. 하나는 "(선심소는) 오직 선(善)으로서 심왕 중에 일어날 수 있다" 또는 "오직 선(善)으로서 심왕과 함께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선심소란 선심(善心: 선한 마음 또는 착한 마음) 중에서만 일어나는 一類의 심소를 의미하는 것" 또는 "선심소는 착한마음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두 번째의 정의는 선심소를 오직 선한 마음 또는 착한 마음과 상응하여 일어날 수 있는 마음작용들의 그룹으로 정의하는 것인데,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동어반복적이며 다소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마음은 본래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이므로 '선한 마음' 또는 '악한 마음'이라고 말할 때, 선한 마음 또는 착한 마음이란 선과 상응하고 있는 마음을 말하고 악한 마음이란 악과 상응하고 있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선심소를 오직 선한 마음과 상응하여 일어날 수 있는 마음작용들의 그룹'으로 정의하는 것은 이미 선과 상응하고 있는 마음에만 선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이미 무탐과 상응하고 있는 마음에만 무탐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선한 마음에만 선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정의 자체로는 악한 마음의 상태에서 선한 마음의 상태로 변할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심소를 오직 선한 마음과 상응하여 일어날 수 있는 마음작용들의 그룹으로 정의하는 것'은 선심소의 개념이 좀 더 쉽게 와닿을 수 있게 하기 위한 방편적인 개략적인 표현 정도로 봐야 한다.
- ↑ 무언가를 정의하는 방법에는 그 대상의 본질적인 성질을 드러내어 정의하는 방법도 있고, 그 대상에 포함되는 모든 요소들을 나열함으로써 정의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 보통 전자만으로는 너무 개념적이어서 실제로 그 대상에 대해 잘 알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선(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전자의 방법으로 선을 정의하는 다음의 정의도 마찬가지이다: "불교에서 선(善)이란, 부파불교에서는 결과를 기준으로 보아서 편안하고 즐거운 과보[樂報]를 받을만한 것을 선(善)이라고 하며, 대승불교에서는 현재 · 미래에 걸쳐 자기와 남을 순익(順益)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 후자의 방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요소들을 일관하는 원리 또는 그 요소들이 의미하는 바를 찾기가 어려울 수 있다. 당연히, 전자의 방법과 후자의 방법이 결합될 때 그 대상은 가장 잘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간에, 여기에 나열된 11가지 선한 마음작용들은 곧 대승불교, 특히 유식유가행파에서 "선(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 한역본과 한글본에는 분명히 '참(慚)의 특수한 경우[慚一分]'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참(慚)은 자증상(自增上)과 법증상(法增上)에 근거하여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다. 즉, 자신과 자신이 배우고 있는 선법(善法)을 가치롭다고 보거나 존중하거나 존엄섬이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반성이다. 반면, 괴(愧)는 세증상(自增上)에 근거하여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이나 세상의 도덕을 가치롭다고 보거나 존중하거나 존엄성이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반성이다. 이렇게 볼 때, 한역본을 만들 때, '괴(愧)의 특수한 경우[愧一分]'를 '참(慚)의 특수한 경우[慚一分]'로 잘못 번역한 것이 아닌가 한다. '참(慚)의 특수한 경우[慚一分]'라는 번역이 정말로 맞는 것이라면, '자증상(自增上)과 법증상(法增上)에 근거하여 자신을 반성하기 때문에, 즉 자신과 자신이 배우고 있는 선법(善法)을 가치롭다고 보거나 존중하거나 존엄섬이 있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불만(不慢: 자신을 높이거나 거만하지 않음)하게 된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여전히, '다른 사람을 가치롭다고 보거나 존중하거나 존엄섬이 있는 존재라고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 불만(不慢: 자신을 높이거나 거만하지 않음)하게 된다'라는 해석보다는 부자연스러운 논리로 보인다. 다만, 진정한 참(慚), 즉 진정으로 자증상(自增上)과 법증상(法增上)에 근거하여 자신을 반성하는 것, 즉, 진정한 모습의 '자신과 자신이 배우고 있는 선법(善法)을 가치롭다고 보거나 존중하거나 존엄섬이 있는 것'이란 '자기 자신을 높이거나 하지 않는다'는 뜻에서는 '불만(不慢: 자신을 높이거나 거만하지 않음)이 참(慚)의 특수한 경우[慚一分]'라는 진술도 일정 납득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도 모자란 점이 있는데, 그것은 비교 대상이 없는데 과연 '불만(不慢: 자신을 높이거나 거만하지 않음)'이 성립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각주
편집- ↑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4, p. T31n1614_p0855b23 - T31n1614_p0855c06. 심소유법(心所有法)
"第二心所有法。略有五十一種。
分為六位。一遍行有五。二別境有五。三善有十一。四煩惱有六。五隨煩惱有二十。六不定有四。
一遍行五者。一作意二觸三受四想五思。
二別境五者。一欲二勝解三念四定五慧。
三善十一者。一信二精進。三慚四愧。五無貪六無嗔七無癡。八輕安九不放逸十行捨十一不害。
四煩惱六者。一貪二嗔。三慢四無明。五疑六不正見。
五隨煩惱二十者。一忿二恨。三惱四覆。五誑六諂。七憍八害。九嫉十慳。十一無慚十二無愧。十三不信十四懈怠。十五放逸十六惛沈。十七掉舉十八失念。十九不正知二十散亂。
六不定四者。一睡眠二惡作。三尋四伺。"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5권. p. T31n1585_p0026c25 - T31n1585_p0027a01
"諸心所法皆於所緣兼取別相。雖諸心所名義無異而有六位種類差別。謂遍行有五。別境亦五。善有十一。煩惱有六。隨煩惱有二十。不定有四。如是六位合五十一。"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5권. p. 259 / 583. 심소법(心所法)
"모든 심소법은 대상에 대해서 (전체적인 모습과) 겸하여 개별적인 모습을 취한다. 모든 심소는 명칭이나 개념[義]에 다른 것이 없지만, 여섯 가지 지위의 종류로 차별이 있다. 변행심소에 다섯 가지가 있고, 별경심소에 역시 다섯 가지가 있으며, 선심소에 열한 가지가 있고, 번뇌심소에 여섯 가지가 있으며, 수번뇌심소에 스무 가지가 있고, 부정심소에 네 가지가 있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지위를 합하면 쉰한 가지가 된다." - ↑ 星雲, "五位百法". 2012년 10월 22일에 확인.
- ↑ 가 나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29b17 - T31n1585_p0029b22. 선심소(善心所)
"善位心所其相云何。頌曰。
11善謂信慚愧 無貪等三根
勤安不放逸 行捨及不害
論曰。唯善心俱名善心所。謂信慚等定有十一。" 인용 오류: 잘못된<ref>
태그; "FOOTNOTE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T.1585제6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585_p0029b17 T31n1585_p0029b17 - T31n1585_p0029b22]. 선심소(善心所)"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 ↑ 가 나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p. 283-284 / 583. 선심소(善心所)
"선위(善位)의 심소의 양상은 어떠한가? 게송(『유식삼십송』의 제1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심소는 신(信)ㆍ참(慚)ㆍ괴(愧)와
무탐(無貪) 등 세 가지 선근2)과
근(勤)ㆍ안(安)ㆍ불방일(不放逸)과
행사(行捨) 및 불해(不害)이다.
논하여 말한다. 오직 선(善)으로서 심왕과 함께하는 것을 선심소라고 이름한다. 신(信) · 참(慚) 심소 등 반드시 열한 가지가 있다.
2) 무탐(無貪) · 무진(無瞋) · 무치(無癡)의 심소를 세 가지 선근[三善根]의 심소라고 한다." 인용 오류: 잘못된<ref>
태그; "FOOTNOTE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K.614, T.1585제6권. p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897startNum283 283-284 / 583]. 선심소(善心所)"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5권. p. T31n1585_p0027a02. 선심소(善心所)
"唯善心中可得生故。"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5권. p. 259 / 583. 선심소(善心所)
"(선심소는) 오직 선(善)으로서 심왕 중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 황욱 1999, 54. 선심소(善心所)쪽
"‘善心所’란 善心 중에서만 일어나는 一類의 심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 ↑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유식사상(唯識思想)". 네이버 지식백과. 2012년 10월 22일에 확인. 선심소(善心所).
"선심소는 착한마음에서 작용하는 것을 뜻하며 11종의 작용이 있다." - ↑ 가 나 운허, "善(선)". 2012년 10월 22일에 확인.
- ↑ "順", 《네이버 한자사전》. 2012년 10월 22일에 확인
- ↑ "益", 《네이버 한자사전》. 2012년 2012년 10월 22일에 확인
- ↑ 가 나 운허, "惡(악)". 2012년 9월 2일에 확인.
- ↑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4, p. T31n1614_p0855b27 - T31n1614_p0855b29. 선심소(善心所)
"三善十一者。一信二精進。三慚四愧。五無貪六無嗔七無癡。八輕安九不放逸十行捨十一不害。" - ↑ 황욱 1999, 53–59쪽.
- ↑ 가 나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c09 - T31n1585_p0030c10. 기타 선심소를 별도로 건립하지 않는 이유
"及顯十一義別心所。謂欣厭等善心所法。雖義有別說種種名。而體無異故不別立。" - ↑ 가 나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97 / 583. 기타 선심소를 별도로 건립하지 않는 이유
"『삼십송』의 제11게송에서 ‘및[及]’77)이라고 말하는 것은 열한 가지로부터 뜻[義]이 다른 심소가 있음을 나타낸다. 기뻐함[欣]과 싫어함[厭] 등의 착한 성품의 심소법[善心所法]을 말한다. 뜻[義]의 차이가 있으므로 갖가지 명칭을 붙이지만, 자체[體]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별도로 건립하지 않는다."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29b22 - T31n1585_p0029b28. 신(信)심소
"云何為信。於實德能深忍樂欲心淨為性。對治不信樂善為業。然信差別略有三種。一信實有。謂於諸法實事理中深信忍故。二信有德。謂於三寶真淨德中深信樂故。三信有能。謂於一切世出世善深信有力能得能成起希望故。由斯對治彼不信心。愛樂證修世出世善。"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84 / 583. 신(信)심소
"무엇을 ‘신(信)심소’3)라고 하는가? 참으로 존재함[實]과 덕(德) 및 능력[能]을 깊이 인정하고 좋아하며 원하여 심왕을 청정하게 함을 체성으로 삼고, 불신(不信)을 다스리고 선(善)을 좋아함을 업으로 삼는다. 그런데 신(信)심소를 구별하면 대략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참으로 존재함을 믿는 것이니, 일체법의 참다운 현상[事]과 본질[理]에 대해서 깊이 믿어 인정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삼보의 진실되고 청정한 덕을 깊이 믿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능력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선에 대하여 힘이 있어서 능히 얻고 능히 성취한다4)고 깊이 믿어서 희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을 다스리고, 세간과 출세간의 선을 닦고 증득함을 즐기고 좋아한다.
3) 신(信, śraddhā)심소는 ‘믿음’의 능력이다. 제법의 참다운 도리와 삼보의 덕과 선근의 뛰어난 능력을 믿고 기꺼이 원한다. 염오의 심왕 · 심소를 다스려서 청정하게 한다. 마치 탁수(濁水)에 맥반석을 넣으면 정화되듯이 이 믿음심소는 염오심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다.
4) 무위선(無爲善)을 얻고 유위선(有爲善)을 성취하는 것, 또는 세간의 선(善)을 얻고 출세간의 선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 ↑ 황욱 1999, 54. 신(信)심소쪽
"‘信’은 有體와 有德과 有能에 대하여 淨心으로 忍可하는 것으로써 體를 삼고, 不信의 장애를 끊는 것으로써 業을 삼으며, 나아가서는 菩提資糧을 원만하게 함과 自他를 이익되게 함과 善道에 나아감과 淨信을 增長하게 하는 것 등으로써 業을 삼는다. 즉, 五濁의 心心所를 대치하여 청정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173) 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體와 德과 功能에 있어서의 忍可와 淸淨한 희망을 體로 하고, 樂欲에게 의지가 되는 것을 業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174)
173) ‘信’의 性用은 實과 德과 能에 대하여 깊이 忍하고 欲해서 心心所를 청정하게 하는 작용을 의미하며, 그 業用은 不信을 對治하고 善을 願樂하는 작용을 가리킨다. 곧, ‘信’은 實在에 대한 이해와 佛·法·僧 三寶에 대한 동경과 모든 선행을 향한 의욕으로서, 이 信은 마음을 정화하는 작용이 있다.
174) 《大乘阿毘達磨集論》 1(《大正藏》 31, p. 664中). “何等為信。謂於有體有德有能忍可清淨希望為體。樂欲所依為業。”" - ↑ 안혜 조, 현장 한역 & T.1606, 제1권. p. T31n1606_p0697b19 - T31n1606_p0697b22. 신(信)심소
"信者。於有體有德有能忍可清淨希望為體。樂欲所依為業。謂於實有體起忍可行信。於實有德起清淨行信。於實有能起希望行信。謂我有力能得能成。" - ↑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2, p. T31n1612_p0848c21 - T31n1612_p0848c22. 신(信)심소
"云何為信。謂於業果諸諦寶中。極正符順心淨為性。"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29b28 - T31n1585_p0029c01. 신(信)의 본질
"忍謂勝解。此即信因。樂欲謂欲即是信果。礭陳此信自相是何。豈不適言。心淨為性。"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84 / 583. 신(信)의 본질
"[문] 인정하는 것은 승해(勝解)이니, 이것은 믿음의 원인이다. 좋아하여 원한다는 것은 욕구[欲]이니, 곧 믿음의 결과이다. 이 신심소를 확실히 말하면 자상이 어떠한가?5) [답] 어찌 적절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심왕을 청정하게 함을 체성으로 한다.
5) 외인(外人)의 질문이다. 신(信)심소의 인과는 분명히 하고, 아직 그것의 자상을 말하지 않았는데, 그 자상은 어떠한가라고 묻는다."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a23 - T31n1585_p0030b01. 근(勤)심소
"勤謂精進。於善惡品修斷事中勇悍為性。對治懈怠滿善為業。勇表勝進簡諸染法。悍表精純簡淨無記。即顯精進唯善性攝。此相差別略有五種。所謂被甲加行無下無退無足。即經所說有勢有勤有勇堅猛不捨善軛。如次應知。此五別者。謂初發心自分勝進。自分行中三品別故。"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p. 291-292 / 583. 근(勤)심소
"‘근(勤)심소’49)는 정진(精進)을 말한다. 선품을 닦고 악품을 끊는 일에 대해서 용맹스럽고 굳세게 함을 체성으로 삼는다. 게으름[懈怠]을 다스려서 착한 일을 원만하게 이루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용맹스럽다는 것은 정진하는 것을 나타내어 모든 잡염법을 가려낸다. 굳세다는 것은 지극히 순수한 것을 나타내어 청정 무구성을 가려낸다. 곧 정진은 오직 착한 성품에만 포함됨을 나타낸다. 이것의 양상의 차이는 대략 다섯 종류가 있으니 곧 맹렬함을 일으키는 것[被甲]50)ㆍ가행51)ㆍ낮추지 않음[無下]52)ㆍ물러나지 않음[無退]53)ㆍ만족하지 않음[無足]54)이다. 경전에서 말씀한, 세력이 있음[有勢] · 정진함[有勤] · 용감함[有勇]ㆍ견고하고 용맹함[堅猛] · 선의 멍에55)를 버리지 않음[不捨善軛]이니, 순차적으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다섯의 차이를 말하면 초발심 · 자분(自分) · 승진(勝進) · 자분행(自分行) 중의 세 가지 품류로서 다르기 때문이다.56)
49) 근(勤, vīrya)심소는 ‘정진’의 심리작용으로서, 용맹스럽게 선행을 닦고 악행을 끊게 한다. 해태(懈怠)심소를 다스린다.
50) 피갑(被甲)은 맹렬하고 날카롭게 즐거운 욕구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는 세력이 있는 것[有勢]이라고 이름한다. 갑옷[甲]을 입고[被] 군대가 진(陣)을 친 곳에 들어갈 때 두려워하지 않고 큰 위세가 있는 것과 같음을 일컫는다.
51) 가행(加行)은 견고하고 용감한 방편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는 정진하는 것[有勤]으로 이름한다. 마음을 견고하게 해서 스스로 책려(策勵)하는 것을 일컫는다.
52) 낮추지 않음[無下]은 증득해야 할 것에 대해서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고, 역시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는 용감한 것[有勇]으로 이름한다.
53) 물러나지 않음[無退]이란 추위나 배고픔 등의 고통을 능히 인내로써 받아들이고, 열등한 선(善)에 대해서 혐오(嫌惡)나 만족함을 일으키지 않으며, 다음 단계의 뛰어난 공덕 등을 기쁘게 구하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는 견고하고 용맹한 것[堅猛]으로 이름한다.
54) 만족하지 않음[無足]은 이후에 점차 4성제를 관찰함[諦觀] 등 뛰어난 도(道)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는 선(善)의 멍에를 버리지 않는 것[不捨善軛]으로 이름한다.
55) 소[牛]에게 멍에를 씌움으로써 소로 하여금 도망가지 않고 능히 나아가게 한다. 선법(善法)도 역시 그러해서 수행자에게 멍에를 지워 선품(善品)에서 벗어나지 않고 열반에 나아가게 하므로 이렇게 표현한다.
56) 다섯 가지 중에서 맹렬함을 일으키는 것[被甲 · 有勢]은 발심이고, 나머지 넷은 수행인데, 이 수행은 다시 자분(自分)과 승진(勝進)으로 나뉜다. 자분은 가행(加行. 有勤:下品), 낮추지 않음[無下. 有勇:中品], 물러나지 않음[無退. 堅猛:上品]의 3품이고, 만족하지 않음[無足. 不捨善]은 승진에 해당된다." - ↑ 황욱 1999, 56-57. 정진(精進)심소쪽
"‘精進’은 ‘勤’187)이 라고도 한다. 이는 마음이 용감하고 사나워[勇悍] 게으름이 없고 스스로 가볍고 천박[輕賤]하지 않는 것으로써 體를 삼고, 懈怠의 장애를 끊는 것으로써 業을 삼는다. 즉, 善品을 닦고 惡品을 끊음에 勇悍함을 性用으로 하고, 이것에 반하여 懈怠의 심소를 對治하여 선을 만족함을 業用으로 삼는다.188) 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精進’ 대신 ‘勤’으로 쓰고 있는데, 마음이 과감하고 굳센 것을 體로 삼고, 善品을 원만히 성취하는 것을 業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189}
187) 《成唯識論》 6(《大正藏》 31, p. 30上). “勤謂精進 於善惡品修斷事中勇悍爲性 對治懈怠滿善爲業.”
188) ‘精進[勤]’의 性用은 善을 닦고 惡을 끊음에 勇悍한 작용이며, 그 業用은 懈怠心所를 對治하고 모든 善을 만족하게 하는 작용을 말한다. 즉, 精進[勤]은 惡을 끊고 善을 닦는데 노력하는 것 곧, 精進心을 말한다.
189) 《大乘阿毘達磨集論》 1(《大正藏》 31, p. 664中). “何等為勤。謂心勇悍為體。或被甲或加行。或無下或無退或無足。差別成滿善品為業。”" - ↑ 안혜 조, 현장 한역 & T.1606, 제1권. p. T31n1606_p0697c04 - T31n1606_p0697c08. 근(勤)심소
"勤者。被甲方便無下無退。無足心勇為體成滿善品為業。謂如經說。有勢有勤有勇堅猛不捨善軛。如其次第應配釋被甲心勇等諸句。滿善品者。謂能圓滿隨初所入根本靜慮。成善品者。謂即於此極善修治。" - ↑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2, p. T31n1612_p0848c28. 정진(精進)심소
"云何精進。謂懈怠對治。心於善品勇悍為性。" - ↑ "반성(反省) Archived 2017년 7월 25일 - 웨이백 머신", 《네이버 국어사전》. 2012년 10월 23일에 확인.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29c13 - T31n1585_p0029c16. 참(慚)
"云何為慚。依自法力崇重賢善為性。對治無慚止息惡行為業。謂依自法尊貴增上。崇重賢善羞恥過惡。對治無慚息諸惡行。"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86 / 583. 참(慚)
"무엇을 ‘참(慚)심소’12)라고 하는가? 자신과 법의 힘에 의지해서 현인(賢人)13)과 선법(善法)14)을 받들고 존중함을 체성으로 삼고, 무참(無慚)을 다스리고 악행을 멈추게 함을 업으로 삼는다. 자신과 법을 존귀하게 여기는 증상력에 의지해서, 현인과 선법을 받들고 존중하며 잘못을 부끄럽게 여겨서, 무참을 다스리고 여러 악행을 멈추게 한다.
12) 참(慚, hrī)심소는 ‘제 부끄러움’의 작용을 하는 심소이다. 자신과 법에 의지해서 현선(賢善)을 존경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는 심리작용이다.
13) 범부와 성인을 막론하고 누구나 현덕(賢德)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14) 모든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선법(善法)을 가리킨다." - ↑ 황욱 1999, 54. 참(慚)쪽
"‘慚’은 自增上과 法增上에 의하여 過惡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으로써 體를 삼고, 無慚의 장애를 끊음으로써 業을 삼는다. 즉, 자신을 존중하고 所學의 法을 尊貴함으로써 그 增上力에 의하여 無慚을 對治하여 惡行을 止息하게 하는 것을 그 業用으로 한다.175) 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모든 허물과 악행을 스스로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을 體로 하고, 악행을 멈추는 것에 의지가 되는 것을 業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176)
175) ‘慚’의 性用은 自力을 尊愛하고 所學法을 귀중하게 여기는 增上力에 의하여 過惡을 부끄러워하고 有漏와 無漏의 賢聖과 善法을 重崇하는 작용을 말한다. 그 業用은 이것에 의하여 無慚心所를 對治하여 惡行을 止息하는 작용을 가리킨다. 곧, ‘慚’은 善을 尊崇하여 惡을 멈추게 하는 심리작용을 뜻한다.
176) 《大乘阿毘達磨集論》 1(《大正藏》 31, p. 664中). “何等為慚。謂於諸過惡自羞為體。惡行止息所依為業。”" - ↑ 안혜 조, 현장 한역 & T.1606, 제1권. p. T31n1606_p0697b23 - T31n1606_p0697b24. 참(慚)
"慚者。於諸過惡自羞為體。惡行止息所依為業。" - ↑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2, p. T31n1612_p0848c22 - T31n1612_p0848c23. 참(慚)
"云何為慚。謂自增上及法增上。於所作罪羞恥為性。" - ↑ "과실(過失)", 《네이버 국어사전》. 2012년 10월 23일에 확인.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29c16 - T31n1585_p0029c19. 괴(愧)심소
"云何為愧。依世間力輕拒暴惡為性。對治無愧止息惡行為業。謂依世間訶厭增上。輕拒暴惡羞恥過罪。對治無愧息諸惡業。"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86 / 583. 괴(愧)심소
"무엇을 ‘괴(愧)심소’15)라고 하는가? 세간의 힘에 의지해서 포악함과 악법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함을 체성으로 삼고, 무괴(無愧)를 다스리고 악행을 멈추게 함을 업으로 삼는다. 세간에서 꾸짖고 싫어하는 증상력에 의지해서 포악함과 악법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하고,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며 무괴를 다스리고 여러 악업을 멈추게 한다.
15) 괴(愧, apatrapā)심소는 ‘남부끄러움’, 즉 타인의 비방을 두려워하고 왕법(王法)의 형벌을 두려워해서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심리작용이다. " - ↑ 황욱 1999, 55. 괴(愧)심소쪽
"‘愧’는 世增上에 의하여 過惡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으로써 體를 삼고, 無愧의 장애를 끊는 것으로써 業을 삼는다. 즉 세간의 도덕적 제재에 의하여 罪過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악인과 악법을 輕拒함을 性用으로 하고, 無慚을 對治하여 惡行을 止息하게 하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177)
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모든 허물과 악행을 남들에게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을 體로 하고, 業은 ‘慚’에서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178)
177) ‘愧’의 性用은 世人들이 나무라고 헐뜯는[譏謗] 것을 두려워하고 法의 형벌을 싫어하는 등의 增上力에 의하여 罪過를 수치스러워 하고 폭력을 쓰거나 나쁜 사람을 멀리하여 이와 친하지 않고 모든 惡法을 거절하여 행하지 않는 작용이다. 그리고 그 業用은 無愧를 對治하여 惡行을 막는 작용을 가리킨다. 즉, ‘壞’는 惡을 거부하여 악행을 중지시키는 심리작용이다.
178) 《大乘阿毘達磨集論》 1(《大正藏》 31, p. 664中). “何等為愧。謂於諸過惡羞他為體。業如慚說。”" - ↑ 안혜 조, 현장 한역 & T.1606, 제1권. p. T31n1606_p0697b25. 괴(愧)심소
"愧者。於諸過惡羞他為體。業如慚說。" - ↑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2, p. T31n1612_p0848c24. 괴(愧)심소
"云何為愧。謂世增上於所作罪羞恥為性。"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a04 - T31n1585_p0030a05. 무탐(無貪)심소
"云何無貪。於有有具無著為性。對治貪著作善為業。"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p. 288-289 / 583. 무탐(無貪)심소
"무엇이 ‘무탐(無貪)심소’25)인가? 윤회의 삶[有]26)과 그 원인[有具]27)에 대해서 탐착하지 않음을 체성으로 삼고, 탐착을 다스려서 선을 행함을 업으로 삼는다.
25) 무탐(無貪, alobha)심소는 애착심을 없애는 심리작용이다. 여기에는 5취온(取)뿐만 아니라 열반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열반에 집착하면, 그 집착이 원인이 되어 3계 윤회의 과보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26) 유(有)는 3유(有:三界)의 과보[果], 즉 윤회의 삶을 말한다.
27) 유구(有具)는 3유(有), 즉 윤회의 삶의 원인[因]이다." - ↑ 황욱 1999, 55. 무탐(無貪)심소쪽
"‘無貪’은 有와 有具에 대하여 厭離하여 애착을 없게 하고 마음속에 품지도 않으며 좋아하지도 않아 집착이 없게 하는 것으로써 體를 삼으며, 貪의 장애를 끊는 것으로서 業을 삼는다. 즉, 有179)와 具有180)에 愛着이 없음으로 性用으로 하고, 이와 반대의 貪着을 대치하며 선을 짓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181) 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有와 有具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體로 하고, 악행에 빠지지 않는데 의지가 되는 것을 業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182)
179) ‘有’란 三有의 果 즉 三界의 果報, 다시 말해서 ‘有情의 五蘊’을 의미한다.
180) ‘有具’란 三有를 生할 因 즉, 涅槃[→ 有에 대한 愛着이 되어야 한다]을 말한다.
181) ‘無貪’의 性用은 有과 有具에 대하여 애착을 없게 하는 작용을 말하며, 그 業用은 貪着을 對治하고 善을 짓게 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곧, 無貪은 迷惑의 세계에 살면서 생존에 집착하지 않는 심리작용을 가리킨다.
182) 《大乘阿毘達磨集論》 1(《大正藏》 31, p. 664中). “何等無貪。謂於有有具無著為體。惡行不轉所依為業。”" - ↑ 안혜 조, 현장 한역 & T.1606, 제1권. p. T31n1606_p0697b25 - T31n1606_p0697b26. 무탐(無貪)심소
"無貪者。於有有具無著為體。惡行不轉所依為業。" - ↑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2, p. T31n1612_p0848c25. 무탐(無貪)심소
"云何無貪。謂貪對治。令深厭患無著為性。" - ↑ 가 나 다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a03 - T31n1585_p0030a04. 3선근(三善根)
"無貪等者等無瞋癡。此三名根生善勝故。三不善根近對治故。" - ↑ 가 나 다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88 / 583. 3선근(三善根)
"(『삼십송』의 제11게송에서) ‘무탐(無貪) 등’이라고 한 데서 ‘등(等)’은 무진(無瞋)과 무치(無癡)를 가리킨다. 이 셋을 근(根)이라고 이름한 것은 선을 일으키는 것이 뛰어나기 때문이고, 세 가지 불선근을 가까이 다스리기 때문이다." - ↑ 세친 조, 현장 한역 & T.1558, 제4권. p. T29n1558_p0005b08 - T29n1558_p0005b17. 윤회의 가장 큰 원인
"何緣世尊說餘心所總置行蘊。別分受想為二蘊耶。頌曰。 諍根生死因 及次第因故
於諸心所法 受想別為蘊
論曰。諍根有二。謂著諸欲及著諸見。此二受想。如其次第為最勝因。味受力故貪著諸欲。倒想力故貪著諸見。又生死法以受及想為最勝因。由耽著受起倒想故。生死輪迴。由此二因及後當說次第因故。應知別立受想為蘊。" - ↑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 K.955, T.1558, 제4권. p. 41 / 1397. 윤회의 가장 큰 원인
"어떠한 까닭에서 세존께서는 그 밖의 나머지 심소법을 설하여 모두 행온에 포섭시키고, 수(受)와 상(想)을 별도로 나누어 두 가지 온으로 삼은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쟁근(諍根)과 생사(生死)의 원인이고
아울러 순서상의 이유[次第因] 때문에
온갖 심소법 중에서
수(受)와 상(想)을 별도로 온이라 한 것이다.
諍根生死因 及次第因故
於諸心所法 受想別爲蘊
논하여 말하겠다. 쟁근(諍根, '쟁'은 騷擾의 뜻으로 번뇌의 다른 이름)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온갖 욕망에 탐착하는 것과 온갖 견해에 탐착하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이 두 가지는 순서대로 '수'와 '상'을 최승의 원인으로 삼는다. 즉 미수(味受: 맛들임)의 힘에 의해 온갖 욕망에 탐착하게 되는 것이고, 도상(倒想) 즉 전도된 관념의 힘에 따라 온갖 견해에 탐착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생사(生死)의 법은 '수'와 '상'을 최승의 원인으로 삼는다. 즉 '수'에 탐착하고 도상(전도된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생사를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의 원인과 아울러 뒤에서 마땅히 설하게 될 '순서상의 이유[次第因]'로 말미암아 '수'와 '상'을 별도로 설정하여 온으로 삼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 ↑ 가 나 다 라 마 운허, "四無量心(사무량심)". 2012년 10월 26일에 확인.
- ↑ 가 나 다 라 마 星雲, "四無量". 2012년 10월 26일에 확인.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a05 - T31n1585_p0030a09. 무진(無瞋)심소
"云何無瞋。於苦苦具無恚為性。對治瞋恚作善為業。善心起時隨緣何境。皆於有等無著無恚。觀有等立非要緣彼。如前慚愧觀善惡立。故此二種俱遍善心。"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89 / 583. 무진(無瞋)심소
"무엇이 ‘무진(無瞋)심소’28)인가? 고통과 고통의 원인[苦具]에 대해서 성내지 않음을 체성으로 삼고, 성냄을 다스려서 선을 행함을 업으로 삼는다. 착한 심왕이 일어날 때에는, 따라서 어떤 대상을 반연해도 모두 윤회의 삶[有] 등29)에 대해서 탐착하거나 성내는 일이 없다. 윤회의 삶 등에 상대해서[觀]30) 건립한다. 반드시 그것만을 반연하는 것은 아니다.31) 앞에서 참(慚) · 괴(愧) 심소를 선 · 악에 상대해서 건립한 것과 같다. 따라서 이 두 가지(무탐 · 무진)는 모두 착한 마음에 두루한다.
28) 무진(無瞋, adveṣa)심소는 성냄을 없애는 심리작용이다. 3고(苦:苦苦 · 壞苦 · 行苦)뿐만 아니라 또한 열반[苦具]에 대해서도 성내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열반을 추구하다가 뜻대로 증득하지 못하면 성내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29) 윤회하는 삶의 원인[有具]ㆍ고통[苦]ㆍ고통의 원인[苦俱]을 가리킨다.
30) 여기서 관(觀)은 관대(觀待)로서, 상대하는 것을 말한다.
31) 탐(貪)심소를 윤회의 삶[有]과 그 원인[有俱]에 관대(觀待)하고, 진(瞋)심소를 고통[苦]과 그 원인[苦俱]에 관대하여 둘의 별상(別相)을 건립한다. 그러나 반드시 무탐(無貪)심소가 유(有)와 유구(有俱)를 반연하고, 무진(無瞋)심소가 고(苦)와 고구(苦俱)를 반연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 ↑ 황욱 1999, 55. 무진(無瞋)심소쪽
"‘無瞋’은 모든 有情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慈愍하는 것으로써 體를 삼고, 瞋의 장애를 끊는 것으로써 그 業을 삼는다. 즉, 모든 有情에게 心的으로 손해 됨이 없고 慈愍하는 것으로써 體를 삼고, 瞋恚를 對治하는 것으로써 業을 삼는다.183) 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모든 有情의 苦와 苦具에 대해서 성내지 않는 것을 體로 하고, 악행에 빠지지 않는데 의지가 되는 것을 業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184)
183) ‘無瞋’의 性用은 苦와 苦具에 대하여 瞋恚心을 내지 않는 작용을 말하며, 그 業用은 瞋恚를 對治하여 善을 짓게 하는 작용을 가리킨다. 곧, 無瞋은 苦와 苦具에 대하여 노여워하는 생각을 지니지 않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184) 《大乘阿毘達磨集論》 1(《大正藏》 31, p. 664中). “何等無瞋。謂於諸有情苦及苦具無恚為體惡行不轉所依為業。”" - ↑ 안혜 조, 현장 한역 & T.1606, 제1권. p. T31n1606_p0697b27 - T31n1606_p0697b28. 무진(無瞋)심소
"無瞋者。於諸有情苦及苦具無恚為體。惡行不轉所依為業。" - ↑ 가 나 다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2, p. T31n1612_p0848c26. 무진(無瞋)심소
"云何無瞋。謂瞋對治。以慈為性。" - ↑ 가 나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2, p. T31n1612_p0849a05. 불해(不害)
"云何不害。謂害對治。以悲為性。" - ↑ 가 나 다 라 星雲, "慈悲". 2012년 10월 26일에 확인
"慈悲: 慈,梵語 maitrya,maitrī,巴利語 metti;悲,梵語 karuna,巴利語同。慈愛眾生並給與快樂(與樂),稱為慈;同感其苦,憐憫眾生,並拔除其苦(拔苦),稱為悲;二者合稱為慈悲。" 인용 오류: 잘못된<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20395DTITLEB7OB4d 慈悲]". 2012년 10월 26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 ↑ 가 나 다 라 운허, "慈悲(자비)". 2012년 10월 26일에 확인
"慈悲(자비): 중생에게 낙을 주는 것을 자, 고를 없애 주는 것은 비. 또는 고를 없애 주는 것을 자, 낙을 주는 것을 비라 하기도 함." 인용 오류: 잘못된<ref>
태그; "FOOTNOTE운허"[httpbuddhadonggukedubs_detailaspxtypedetailfromtosrchEC9E90EBB984rowno7 慈悲(자비)]". 2012년 10월 26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 ↑ 가 나 다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b28 - T31n1585_p0030c05. 불해(不害)심소
"云何不害。於諸有情不為損惱無瞋為性。能對治害悲愍為業。謂即無瞋於有情所不為損惱假名不害。無瞋翻對斷物命瞋。不害正違損惱物害。無瞋與樂不害拔苦。是謂此二麤相差別。理實無瞋實有自體。不害依彼一分假立。為顯慈悲二相別故。利樂有情彼二勝故。" 인용 오류: 잘못된<ref>
태그; "FOOTNOTE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T.1585제6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585_p0030b28 T31n1585_p0030b28 - T31n1585_p0030c05]. 불해(不害)심소"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 ↑ 가 나 다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96 / 583. 불해(不害)심소
"무엇이 ‘불해(不害)심소’73)인가? 모든 유정에 대해서 손해와 괴로움을 주지 않는 무진(無瞋)심소를 체성으로 삼는다. 해롭게 하는 것을 다스리고 연민히 여겨 고통을 없애주고자 함을 업으로 삼는다. 곧 무진(無瞋)심소가 유정에 대해서 손해나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을, 가정적으로 불해(不害)심소라고 이름한다. 무진심소는 생물의 목숨을 끊는 진(瞋)심소에 정반대이고, 불해심소는 생물을 괴롭히고 손해 입히는 해(害)심소에 정반대이다.74) 무진심소는 약을 주는 것이고, 불해심소는 고통을 없애준다. 이것을 이 두 가지의 두드러진 양상의 차이라고 한다. 참다운 이치로써 말하면, 무진심소는 참으로 자체가 있고, 불해심소는 그것의 일부에 의지해서 가립한다. 자(慈)와 비(悲)의 두 양상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유정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데, 그 두 가지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73) 불해(不害, ahiṃsā)심소는 타자(他者)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심리작용이며, 이것은 무진(無瞋)심소에 의해 생기한다.
74) 무진(無瞋) · 불해(不害) 심소를 별도로 건립해야 하는 이유를 밝힌다." 인용 오류: 잘못된<ref>
태그; "FOOTNOTE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K.614, T.1585제6권. 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897startNum296 296 / 583]. 불해(不害)심소"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 ↑ 가 나 다 황욱 1999, 58-59. 불해(不害)심소쪽
"‘不害’는 모든 유정에 대해 손해와 괴로움을 주지 않는 無瞋의 심소를 體로 삼으며, 해롭게 하는 것을 다스리고 연민히 여겨 고통을 없애주고자 하는 것을 業으로 삼는다. 즉, 無瞋을 性用으로 하여 害를 對治하고 有情을 悲愍하는 것으로써 그 業用을 삼는다.197)
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無瞋 善根의 한 부분으로서 마음에서 자비심을 내는 것을 體로 하고, 남에게 害를 입히지 않는 것을 業으로 삼는다고 설명하고 있다.198)
197) ‘不害’의 性用은 그 別體가 없이 精進 및 三善根上에서 마음을 평등하게 하고 정직하게 하여 無功用하게 하는 작용을 말하며, 그 業用은 害를 對治하여 悲愍하는 작용을 말한다. 곧, 不害는 노여워하지 않는 無瞋의 心所가 다른 사람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해치지 않고 동정하여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한다.
198) 《大乘阿毘達磨集論》 1(《大正藏》 31, p. 664中). “何等不害。謂無瞋善根一分心悲愍為體。不損惱為業。”" 인용 오류: 잘못된<ref>
태그; "FOOTNOTE황욱199958-59. 불해(不害)심소"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 ↑ 가 나 다 안혜 조, 현장 한역 & T.1606, 제1권. p. T31n1606_p0697c24 - T31n1606_p0697c26. 불해(不害)심소
"不害者。無瞋善根一分心悲愍為體。不損惱為業。當知不害不離無瞋故亦是假。" 인용 오류: 잘못된<ref>
태그; "FOOTNOTE안혜 조, 현장 한역T.1606제1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606_p0697c24 T31n1606_p0697c24 - T31n1606_p0697c26]. 불해(不害)심소"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 ↑ 가 나 다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2, p. T31n1612_p0849a05. 불해(不害)심소
"云何不害。謂害對治。以悲為性。" 인용 오류: 잘못된<ref>
태그; "FOOTNOTE세친 조, 현장 한역T.1612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612_p0849a05 T31n1612_p0849a05]. 불해(不害)심소"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a09 - T31n1585_p0030a14. 무치(無癡)심소
"云何無癡。於諸理事明解為性。對治愚癡作善為業。有義無癡即慧為性。集論說此報教證智決擇為體。生得聞思修所生慧。如次皆是決擇性故。此雖即慧為顯善品有勝功能。如煩惱見故復別說。"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89 / 583. 무치(無癡)심소
"무엇이 ‘무치(無癡)심소’32)인가? 모든 본체[理]와 현상[事]에 대해서 명료하게 이해함을 체성으로 삼고, 우치함을 다스려서 선을 행함을 업으로 삼는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33) 무치심소는 혜(慧)를 체성으로 한다. 『집론』에서 말하기를 “이것은 과보[報] · 가르침[敎] · 증득[證] · 지혜[智]를 결택함을 자체로 한다”34)고 한다. 생득의 지혜[生得] · 문혜(聞慧) · 사혜(思慧) · 수혜(修慧)에 순차적으로 같다고 말한다.35) 모두 결택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지혜이지만 선품(善品)에 뛰어난 능력[功能]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번뇌심소 중의 여러 견해[見]와 같기 때문에36) 다시 별도로 설명한다.
32) 무치(無癡, amoha)심소는 모든 사리(事理)를 밝게 이해하는 능력의 심리작용이다.
33) 제1사(第一師)의 견해를 서술한다.
34) 『대승아비달마집론』 제1권(『고려대장경』 16, p.212下:『대정장』 31, p.664中).
35) 무착(無着, Asaṅga)의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의 본문의 내용을 그 제자인 사자각(獅子覺, Buddhasiṁha)이 해석한 문장에서이다. 즉 보(報) · 교(敎) · 증(證) · 지(智)를 순서대로 생득혜(生得慧) · 문혜(聞慧) · 사혜(思慧) · 수혜(修慧)에 배대한다.
36) 여섯 가지 번뇌심소 중에서 악견(惡見)을 별도로 유신견(有身見) · 변견(邊見) · 사견(邪見) · 견취견(見取見) · 계금취견(戒禁取見)의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별도로 말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역시 그러하다는 뜻이다." - ↑ 황욱 1999, 56. 무치(無癡)심소쪽
"‘無癡’는 진실을 正了함으로써 體를 삼고, 癡의 障礙를 끊음으로써 業을 삼는다. 즉, 일체의 事理에 미혹하지 않는 것으로써 性用을 삼고, 이와 반대로 愚癡를 대치하여 作善하게 하는 것을 業用으로 한다.185) 그런데 이상의 無貪·無癡·無瞋을 三善根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선을 生起하는 성질이 수승한 까닭이며, 또한 三不善根을 對治하여 모든 正見을 生起하기 때문이다. 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敎證을 알림으로써 지혜로 決擇하는 것을 體로 삼고, 악행에 빠지지 않는 데 의지가 되는 것을 業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186)
185) ‘無癡’의 性用은 진리와 일체의 善에 대하여 明解해서 미혹하지 않는 작용을 말하며, 그 業用은 恚癡를 對治하여 善을 짓고 惡을 止息하는 작용을 가리킨다. 즉, 無癡는 진실한 실재나 온갖 현상에 대하여 분명하게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186) 《大乘阿毘達磨集論》 1(《大正藏》 31, p. 664中). “何等無癡。謂由報教證智決擇為體。惡行不轉所依為業。”" - ↑ 안혜 조, 현장 한역 & T.1606, 제1권. p. T31n1606_p0697b29 - T31n1606_p0697c03. 무치(無癡)심소
"無癡者。由報教證智決擇為體。惡行不轉所依為業。慚等易了故不再釋。報教證智者。謂生得聞思修所生慧。如次應知。決擇者。謂慧勇勤俱。" - ↑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2, p. T31n1612_p0848c27. 무치(無癡)심소
"云何無癡。謂癡對治。以其如實正行為性。"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b05 - T31n1585_p0030b07. 경안(輕安)심소
"安謂輕安。遠離麤重調暢身心堪任為性。對治惛沈轉依為業。謂此伏除能障定法令所依止轉安適故。"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93 / 583. 경안(輕安)심소
"‘안(安)심소’60)는 경안(輕安)을 말한다. 추중(麤重)을 멀리 여의고 몸과 마음을 고르고 화창하게 해서 자재함[堪任]을 체성으로 삼는다. 혼침을 다스려서 신체[所依身]를 전환함을 업으로 한다. 이것이 선정을 장애하는 법을 조복시키고 없애서, 의지처(신체)로 하여금 바뀌어 평안하고 적절하게 하기 때문이다.
60) 안(安, prasrabdhi)심소는 ‘경안(輕安)’, 즉 번뇌를 멀리하고[輕] 몸과 마음을 편안히 조절하는[安] 능력의 심리작용이다. 이것은 욕계의 산심위(散心位)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색계 · 무색계의 정위(定位)에서만 생기(生起)한다." - ↑ 황욱 1999, 57. 경안(輕安)심소쪽
"‘輕安’은 ‘安’190)이라고도 한다. 이는 麤重[Dauṣthulya]을 멀리하고 心身을 고르게 한[調暢] 것을 體로 하며, 麤重의 장애를 끊는 것으로써 業을 삼는다. 즉, 有漏煩惱의 麤重을 멀리하여 身心을 平安하게 하는 것으로써 性用을 삼고, 이것에 의하여 惛沈을 對治하고 所依의 身으로 하여금 麤重을 없애[轉去] 편안하게 함[安適]을 業用으로 한다.191) 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輕安’을 ‘安’으로 쓰고 있는데, 몸과 마음의 麤重을 쉬게 하여 몸과 마음을 조절하는 것을 體로 하고, 일체의 장애를 없애는 것을 業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192)
190) 《成唯識論》 6(《大正藏》 31, p.30中). “安謂輕安 遠離麤重調暢身心堪任爲性 對治惛沈轉依爲業.”
191) ‘輕安’의 性用은 有漏煩惱의 麤重을 여의고[輕] 身心을 평안하게[安] 하여 堪任하는 작용을 말하고, 그 業用은 惛沈을 對治하고 身心의 麤重을 없애 편안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輕安은 몸과 마음이 쾌적하고 편안한 것을 말한다.
192) 《大乘阿毘達磨集論》 1(《大正藏》 31, p. 664中). “何等為安。謂止息身心麤重身心調暢為體。除遣一切障礙為業。”" - ↑ 안혜 조, 현장 한역 & T.1606, 제1권. p. T31n1606_p0697c09 - T31n1606_p0697c11. 경안(輕安)심소
"安者。止息身心麤重身心調暢為體。除遣一切障礙為業。除遣一切障礙者。謂由此勢力依止轉故。" - ↑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2, p. T31n1612_p0848c29. 경안(輕安)심소
"云何輕安。謂麤重對治。身心調暢堪能為性。" - ↑ 운허, "九地(구지)". 2012년 10월 26일에 확인.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b07 - T31n1585_p0030b13. 불방일(不放逸)심소
"不放逸者精進三根。於所斷修防修為性。對治放逸成滿一切世出世間善事為業。謂即四法於斷修事皆能防修名不放逸。非別有體。無異相故。於防惡事修善事中。離四功能無別用故。雖信慚等亦有此能。而方彼四勢用微劣。非根遍策故非此依。"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p. 293-294 / 583. 불방일(不放逸)심소
"‘불방일심소’61)는 근(勤)과 세 가지 선근으로 하여금, 단멸하고 닦아야 할 것에 대해서 방지하고 닦는 것을 체성으로 삼는다. 방일을 다스리고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착한 일을 원만히 이루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곧 네 가지 법62)이 단멸하고 닦아야 할 것에 대해서 능히 방지하고 닦는 것을 불방일이라고 이름하고, 별도로 자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체상이 없기 때문이고, 악한 일을 방지하고 착한 일을 닦는 중에서 네 가지 능력에서 떠나서는 별도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신(信) · 참(慚) 심소 등도 역시 이러한 능력이 있지만, 그 네 가지에 비해서 세력이 미약하고, 선근에 두루 책려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것(불방일)의 의지처가 아니다.
61) 불방일(不放逸, apramāda)심소는 방일함을 없애는 심리작용, 즉 정진 · 무탐 · 무진 · 무치의 심소력으로 번뇌를 끊고 선행을 닦음에 있어서 선법을 획득하고 보존하게 하는 능력의 심소이다.
62) 근(動)심소와 세 가지 선근[三善根]의 심소를 말한다." - ↑ 황욱 1999, 57. 불방일(不放逸)심소쪽
"‘不放逸’은 無貪·無瞋·無癡·精進을 總攝하는 것으로써 體를 삼고, 惡과 不善法을 끊고 善法을 닦으며 放逸을 끊는 것으로써 業을 삼는다. 즉, 不放逸은 別體가 있는 것이 아니라 精進과 無貪·無瞋·無癡 등 三善根의 心所力으로 말미암아 惑을 끊고 善을 닦음에 있어서 防惡修善하는 것으로써 性用을 삼고, 放逸을 對治하여 일체의 有漏·無漏의 善事를 成滿하는 것으로써 業用을 삼는다.193) 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正勤·無貪·無瞋·無癡에 依止하여 모든 善法을 닦아 모든 有漏法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것을 體로 하고, 모든 世間과 出世間의 복덕을 원만히 이루는 것을 業으로 삼는다고 설명하고 있다.194)
193) ‘不放逸’의 性用은 別體가 있는 것이 아니라 精進과 三善根 등의 心所의 힘으로 惑을 끊고 善을 닦으며 惡을 막고 善根을 심는 작용을 말하며, 그 業用은 모든 有漏·無漏의 善事를 만족하게 하는 작용을 말한다. 즉, 不放逸은 앞에서 말한 精進·無貪·無瞋·無癡 등이 善을 잘 닦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194) 《大乘阿毘達磨集論》 1(《大正藏》 31, p. 664中). “何等不放逸。謂依止正勤無貪無瞋無癡修諸善法。於心防護諸有漏法為體。成滿一切世出世福為業。”" - ↑ 안혜 조, 현장 한역 & T.1606, 제1권. p. T31n1606_p0697c12 - T31n1606_p0697c16. 불방일(不放逸)심소
"不放逸者。依止正勤無貪瞋癡修諸善法。於心防護諸有漏法為體。成滿一切世出世福為業。謂由正勤等為先能修一切善法及防有漏。是故依此四法假立不放逸體。有漏法者。謂諸漏及漏處所境界。" - ↑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2, p. T31n1612_p0848c30 - T31n1612_p0849a01. 불방일(不放逸)심소
"云何不放逸。謂放逸對治。即是無貪乃至精進依止此故捨不善法。及即修彼對治善法。" - ↑ "방일(放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네이버 국어사전》. 2012년 10월 25일에 확인.
- ↑ "방종(放縱)[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네이버 국어사전》. 2012년 10월 25일에 확인.
- ↑ "방기(放棄) Archived 2016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네이버 국어사전》. 2012년 10월 25일에 확인.
- ↑ "放 Archived 2009년 8월 3일 - 웨이백 머신", 《네이버 한자사전》. 2012년 10월 25일에 확인.
- ↑ "逸[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네이버 한자사전》. 2012년 10월 25일에 확인.
- ↑ "성실(誠實) Archived 2016년 3월 5일 - 웨이백 머신", 《네이버 국어사전》. 2012년 10월 25일에 확인.
- ↑ "誠實(성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네이버 한자사전》. 2012년 10월 25일에 확인.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b21 - T31n1585_p0030b28. 행사(行捨)심소
"云何行捨。精進三根令心平等正直無功用住為性。對治掉舉靜住為業。謂即四法令心遠離掉舉等障靜住名捨。平等正直無功用住。初中後位辯捨差別。由不放逸先除雜染。捨復令心寂靜而住。此無別體如不放逸。離彼四法無相用故。能令寂靜即四法故。所令寂靜即心等故。"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p. 295-296 / 583. 행사(行捨)심소
"무엇이 ‘행사(行捨)심소’71)인가? 근(勤) · 세 가지 선근이 심왕으로 하여금 평등하고 적정하며 작용[功用]이 없이 머물게 함을 체성으로 삼는다. 도거(掉擧)를 다스려서 고요히 머물게 함을 업으로 삼는다. 네 가지 법이 심왕에서 도거 등의 장애를 멀리 여의어서 고요히 머물게 하는 것을 행사(行捨)라고 이름한다. 평등하고 적정하며 작용이 없이 머물게 한다는 것은, 처음 · 중간 · 나중의 지위에서 행사심소의 차이를 판별한 것이다. 불방일이 먼저 잡염을 제거함에 의해서, 행사 심소가 다시 심왕을 적정히 머물게 한다. 이것은 별도의 자체가 없다. 불방일처럼 그 네 가지 법72)에서 떠나서 별도의 체상과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능히 적정하게 하는 것은 네 가지 법이기 때문이다. 적정하게 된 것은 심왕 등이기 때문이다.
71) 행사(行捨, upekṣā)심소는 마음의 ‘평정’을 이루게 하는 심리작용이다. 여기서 ‘사(捨)’는 혼침이나 들뜸[掉擧]이 아닌 평정상태를 말한다. ‘행사(行捨)’란 5온(蘊) 중에 수온(受蘊)이 아닌 행온(行蘊)에 포함되는 사(捨)라는 뜻이다.
72) 근(勤)심소와 세 가지 선근의 심소를 가리킨다." - ↑ 황욱 1999, 58. 행사(行捨)심소쪽
"‘捨’는 無貪·無瞋·無癡 등의 三善根과 精進을 總攝하는 것으로써 體를 삼으며, 또 이 捨에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의 평등과 정직을 얻어서 마음에 움직임이 없고 발동의 장애를 끊게 되는 심리작용을 業으로 삼는다. 이 心所도 따로 別體가 있는 것이 아니고 精進과 無貪 등의 三善根上에 마음을 평등히 하고 또 정직하게 無功用에 머무르게 하는 것으로써 性用을 삼고, 掉擧를 對治하여 靜住하는 것으로써 業用을 삼는다. 곧, 捨는 精進과 無貪 등의 三善根이 마음의 평안을 가져오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成唯識論》에서는 이 捨를 ‘行捨’라고 하였는데195), 의미에 있어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 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正勤·無貪·無瞋·無癡에 依止하여, 雜染에 머무는 것과 서로 어긋나는, 마음의 平等性·마음의 正直性·마음의 無功用에 머무는 성품을 體로 하고, 雜染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業으로 삼는다고 설명하고 있다.196}
195) 《成唯識論》 6(《大正藏》 31, p. 30中). “云何行捨。精進三根令心平等正直無功用住為性。對治掉舉靜住為業。”
196) 《大乘阿毘達磨集論》 1(《大正藏》 31, p. 664中). “何等為捨。謂依止正勤無貪無瞋無癡。與雜染住相違。心平等性。心正直性。心無功用住性為體。不容雜染所依為業。”" - ↑ 안혜 조, 현장 한역 & T.1606, 제1권. p. T31n1606_p0697c17 - T31n1606_p0697c24. 행사(行捨)심소
"捨者。依止正勤無貪瞋癡與雜染住相違。心平等性。心正直性。心無功用住性為體。不容雜染所依為業。心平等性等者。謂以初中後位辯捨差別。所以者何。由捨與心相應離沈沒等不平等性故。最初證得心平等性。由心平等遠離加行自然相續故。次復證得心正直性。由心正直於諸雜染無怯慮故。最後證得心無功用住性。" - ↑ 세친 조, 현장 한역 & T.1612, p. T31n1612_p0849a02 - T31n1612_p0849a04. 행사(行捨)심소
"云何為捨。謂即無貪乃至精進依止此故。獲得所有心平等性心正直性心無發悟性。又由此故於已除遣染污法中無染安住。" - ↑ 가 나 다 라 마 바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c10 - T31n1585_p0030c12. 무진을 본질로 하는 경우
"欣謂欲俱無瞋一分。於所欣境不憎恚故。不忿恨惱嫉等亦然。隨應正翻瞋一分故。" - ↑ 가 나 다 라 마 바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97 / 583. 무진을 본질로 하는 경우
"기뻐함[欣]이라는 것은 욕(欲)심소와 함께하는 무진심소의 일부이다. 기뻐하게 된 대상에 대해서 증오나 성냄이 없기 때문이다. 분노하지 않음, 원한을 품지 않음, 고뇌하지 않음, 질투하지 않음 등도 역시 그러하다.79) 상응한 바에 따라서 바로 진(瞋)심소의 일부에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79) 분노하지 않음[不忿], 원한을 품지 않음[不恨], 고뇌하지 않음[不惱], 질투하지 않음[不嫉] 등은 분노[忿] · 원한[恨] · 고뇌[惱] · 질투[嫉] 등의 심소를 뒤집어 정반대로 건립된 것인데, 어느 것이나 모두 무진(無瞋)심소의 일부이다." - ↑ 가 나 다 라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c12 - T31n1585_p0030c14. 무탐을 본질로 하는 경우
"厭謂慧俱無貪一分。於所厭境不染著故。不慳憍等當知亦然。隨應正翻貪一分故。" - ↑ 가 나 다 라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97 / 583. 무탐을 본질로 하는 경우
"싫어함[厭]이라는 것은 혜(慧)와 함께하는 무탐(無貪)심소의 일부이다. 싫어하게 된 대상에 대해서 탐착[染著]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색하지 않음[不慳], 교만하지 않음[不憍] 등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상응한 바에 따라서 탐심소 일부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 ↑ 가 나 다 라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c14 - T31n1585_p0030c16. 무탐·무치를 본질로 하는 경우
"不覆誑諂無貪癡一分。隨應正翻貪癡一分故。" - ↑ 가 나 다 라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97 / 583. 무탐·무치를 본질로 하는 경우
"덮어두지 않음, 거짓으로 꾸미지 않음, 아첨하지 않음 등은 무탐 · 무치(無癡) 심소의 일부이다. 상응한 바에 따라서 탐 · 치(癡) 심소 일부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c16 - T31n1585_p0030c17. 불부(不覆)심소
"有義不覆唯無癡一分。無處說覆亦貪一分故。"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98 / 583. 불부(不覆)심소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감추지 않음[不覆]80)은 오직 무치심소의 일부이다. 어떤 경론에서도 부(覆)심소가 탐심소의 일부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80) 부(覆)심소를 뒤집은 정반대이다."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c24 - T31n1585_p0030c25. 선과 악에 모두 통하는 경우
"悔眠尋伺通染不染。如觸欲等無別翻對。"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99 / 583. 선과 악에 모두 통하는 경우
"회(悔) · 면(眠) · 심(尋) · 사(伺) 심소는 잡염법 · 청정법에 모두 통한다. 촉(觸) · 욕(欲) 심소 등이 별도로 정반대의 심소가 없는 것과 같다." - ↑ 운허, "悔(회)".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悔(회): 자기가 한 짓을 뉘우치는 정신 작용. 악작(惡作)과 같음." - ↑ 운허, "惡作(악작)".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惡作(악작): 과거에 행한 선과 악, 혹은 하지 않은 선과 악에 대하여 후회하는 정신작용. 『바사론(婆沙論)』 37에 4구(句)를 말함. (1) 이미 지은 나쁜 짓을 후회함. (2) 이미 지은 선한 짓을 후회함. (3) 이미 지은 나쁜 짓이 철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함. (4) 이미 지은 선한 짓이 철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함. 『구사론(俱舍論)』 4에는 다시 선한 짓, 나쁜 짓을 하지 아니한 것을 후회함. 2구를 더함."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c17 - T31n1585_p0030c20. 기타의 경우: 불만(不慢)
"有義不慢信一分攝。謂若信彼不慢彼故。有義不慢捨一分攝。心平等者不高慢故。有義不慢慚一分攝。若崇重彼不慢彼故。"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98 / 583. 기타의 경우: 불만(不慢)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81) 거만하지 않음[不慢]82)은 신(信)심소의 일부에 포함된다. 그것을 믿을 때에는 그것을 얕보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83) 거만하지 않음은 행사(行捨)심소의 일부에 포함된다. 마음이 평등한 자는 자신을 높이고 거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84) 거만하지 않음은 참(慚)심소의 일부이다. 그것을 받들고 존중할 때에는 그것을 거만하게 높이지 않기 때문이다.
81) 거만하지 않음[不慢]에 관한 제1사(第一師)의 견해이다.
82) 만(慢)심소를 뒤집은 정반대이다.
83) 제2사(第二師)의 견해이다.
84) 호법의 정의이다." - ↑ 운허, "慢(만).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慢(만): 심소(心所)의 이름. 구사(俱舍)에서는 8부정지법(不定地法)의 하나, 유식(唯識)에서는 6번뇌(煩惱)의 하나. 자기의 용모ㆍ재력ㆍ지위 등을 믿고 다른 이에 대해서 높은 채 뽐내는 번뇌. 7만ㆍ8만 등이 있음." - ↑ 星雲, "慢".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慢: 梵語 māna,巴利語同。心所(心之作用)之名。俱舍宗以之為四十六心所中的八不定地法之一,唯識宗則以之為五十一心所中的六根本煩惱之一。即比較自己與他人之高低、勝劣、好惡等,而生起輕蔑他人之自恃之心,稱為慢;亦即輕蔑、自負之意。"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c20 - T31n1585_p0030c23. 기타의 경우: 불의(不疑)
"有義不疑即信所攝。謂若信彼無猶豫故。有義不疑即正勝解。以決定者無猶豫故。有義不疑即正慧攝。以正見者無猶豫故。"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98 / 583. 기타의 경우: 불의(不疑)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85) 의심하지 않음[不疑]86)은 신(信)심소에 포함된다. 결정된 것[→ 한역본에는 '謂若信彼無猶豫故'라고 되어 있으므로, '믿게 된 것'으로 번역해야 함]은 유예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87) 의심하지 않음은 곧 진정한 승해(勝解)심소에 포함된다. 결정된 것은 유예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88) 의심하지 않음은 곧 진정한 혜(慧)심소에 포함된다. 바른 견해는 유예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85) 의심하지 않음[不疑]에 관한 제1사(第一師)의 견해이다.
86) 의심[疑]의 심소를 뒤집은 정반대이다.
87) 제2사(第二師)의 견해이다.
88) 호법의 정의이다." - ↑ "疑心 Archived 2016년 3월 4일 - 웨이백 머신", 《존 한자사전》.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의심(疑心)[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네이버 국어사전》.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猶豫[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존 한자사전》.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유예(猶豫) Archived 2016년 3월 4일 - 웨이백 머신", 《네이버 국어사전》.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 583. 기타의 경우: 불산란(不散亂)
"不散亂體即正定攝。"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98 / 583. 기타의 경우: 불산란(不散亂)
"산란하지 않음[不散亂]89)의 자체[體]는 진정한 정(定)심소에 포함된다.
89) 산란(散亂)심소를 뒤집은 정반대이다." - ↑ 가 나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c23 - T31n1585_p0030c24. 기타의 경우: 정견(正見)과 정지(正知)
"正見正知俱善慧攝。" - ↑ 가 나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p. 298-299 / 583. 기타의 경우: 정견(正見)과 정지(正知)
"바른 견해[正見]와 바르게 아는 것[正知]은 모두 착한 성품의 혜(慧)에 포함된다." - ↑ 세친 조, 현장 한역 & T.1558, 제2권. p. T29n1558_p0010c03 - T29n1558_p0010c16. 8견(八見)
"頌曰。 眼法界一分 八種說名見
五識俱生慧 非見不度故
眼見色同分 非彼能依識
傳說不能觀 彼障諸色故
論曰。眼全是見。法界一分八種是見。餘皆非見。何等為八。謂身見等五染污見。世間正見。有學正見。無學正見。於法界中此八是見。所餘非見。身見等五隨眠品中時至當說。世間正見。謂意識相應善有漏慧。有學正見。謂有學身中諸無漏見。無學正見。謂無學身中諸無漏見。譬如夜分晝分有雲無雲睹眾色像明昧有異。如是世間諸見有染無染。學無學見。觀察法相明昧不同。" - ↑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 K.955, T.1558, 제2권. p. 84-86 / 1397. 8견(八見)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계와, 법계의 일부인
여덟 가지를 설하여 '견(見)'이라 이름하며
5식과 함께 생기하는 혜(慧)는
비견(非見)이니, 판단[度]하지 않기 때문이다.
眼法界一分 八種說名見
五識俱生慧 非見不度故
색을 보는 것은 동분의 안근으로
그것을 의지처로 삼는 식(識)이 아니니
전설에 의하면, 은폐된 온갖 색을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眼見色同分 非彼能依識
傳說不能觀 被障諸色故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은 모두 바로 '견(見)'이며, 법계의 일부분인 여덟 가지 종류도 '견'이다. 그리고 그 밖의 것은 모두 비견(非見)이다. 어떠한 것이 여덟 가지인가? 이를테면 유신견(有身見) 등의 다섯 가지 염오견(染汚見)과 세간의 정견(正見)과 유학(有學 : 무루지를 성취한 성자)의 정견과 무학(無學 : 성도를 모두 성취한 성자, 즉 아라한)의 정견이니, 법계 가운데 바로 이러한 여덟 가지가 '견'이며, 그 밖의 법계와 나머지 16계는 모두 비견이다. 여기서 다섯 가지 염오견의 상에 대해서는 마땅히 「수면품(隨眠品)」 중에서 설하게 될 것이다.76) 그리고 세간의 정견이란, 이를테면 의식상응의 선인 유루의 뛰어난 혜(慧)를 말한다. 유학의 정견이란, 이를테면 유학의 소의신 중의 온갖 무루의 견을 말한다. 무학의 정견이란, 이를테면 무학의 소의신 중의 온갖 무루의 견을 말한다. 이를 비유하자면 한밤중과 한 낮과 구름이 끼었을 때와 구름이 없을 때에 온갖 색상(色像)을 관찰하면 밝고 어둠의 차이가 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세간의 온갖 '견'으로서 염오함이 있거나 염오함이 없는 것과, 유학의 견과 무학의 견, 그 같은 온갖 견의 법상(法相)을 관찰하면 그 밝고 어둠이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77)
76) 유신견 등의 5견이란 유신견(또는 薩迦耶見, 소의신을 실유라고 집착하는 견해), 변집견(邊執見, 斷·常 두 극단에 집착하는 견해), 사견(邪見,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견해), 견취(見取, 그릇된 견해를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계금취(戒禁取, 그릇된 계행을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를 말하는 것으로, 본론 권제19(p.867)이하에서 상론한다.
77) 즉 다섯 가지 염오견은 유루이면서 번뇌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름(번뇌)이 낀 한밤(유루) 중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고, 세간의 정견은 유루이지만 번뇌가 없기 때문에 구름이 끼지 않은 한밤 중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또한 유학의 정견은 무루지를 획득하였으나 번뇌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구름이 낀 한 낮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고, 무학의 정견은 더 이상 번뇌가 없기 때문에 구름이 끼지 않은 한낮에 색상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 星雲, "見".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星雲, "惡見".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운허, "斷見(단견)".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星雲, "斷見".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星雲, "常見".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운허, "見取見(견취견)".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운허, "戒禁取見(계금취견)".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星雲, "[1]".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권오민 2003, 192–197쪽.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c24. 기타의 경우: 불망념(不忘念)
"不忘念者即是正念。"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6권. p. 299 / 583. 기타의 경우: 불망념(不忘念)
"잊어버리지 않음[不忘念]90)은 곧바로 염(念)심소이다.
90) 실념(失念)심소를 뒤집은 정반대이다." - ↑ 운허, "失念(실념)".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운허, "四念處(사념처)".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운허, "正念(정념)".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星雲, "四念住". 2012년 10월 27일에 확인.
- ↑ 가 나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624 / 1397쪽.
- ↑ 가 나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58 / 1397쪽.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5권. p. T31n1585_p0026c27 - T31n1585_p0027a08. 4일체(四一切)
"雖諸心所名義無異而有六位種類差別。謂遍行有五。別境亦五。善有十一。煩惱有六。隨煩惱有二十。不定有四。如是六位合五十一。一切心中定可得故。緣別別境而得生故。唯善心中可得生故。性是根本煩惱攝故。唯是煩惱等流性故。於善染等皆不定故。然瑜伽論合六為五。煩惱隨煩惱俱是染故。復以四一切辯五差別。謂一切性及地時俱。五中遍行具四一切。別境唯有初二一切。善唯有一。謂一切地。染四皆無。不定唯一。謂一切性。由此五位種類差別。"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5권. p. 259 / 583. 4일체(四一切)
"모든 심소는 명칭이나 개념[義]에 다른 것이 없지만, 여섯 가지 지위의 종류로 차별이 있다. 변행심소에 다섯 가지가 있고, 별경심소에 역시 다섯 가지가 있으며, 선심소에 열한 가지가 있고, 번뇌심소에 여섯 가지가 있으며, 수번뇌심소에 스무 가지가 있고, 부정심소에 네 가지가 있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지위를 합하면 쉰한 가지가 된다. (변행심소는) 모든 심왕 중에 반드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고,(별경심소는) 갖가지 대상을 반연하여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며, (선심소는) 오직 선(善)으로서 심왕 중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번뇌심소는) 본성이 근본번뇌에 포함되기 때문이고, (수번뇌심소는) 오직 번뇌의 등류성(等流性)이기 때문이며, (부정심소는) 선과 잡염 등에 대해서 모두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가사지론』에서 여섯 종류를 합해서 다섯 종류로 한 것은,169) 번뇌심소와 수번뇌심소가 모두 잡염이기 때문이다. 다시 네 가지 일체로써 다섯 종류의 차이를 판별하니, 곧 일체의 성품[性]170) · 머무는 곳[地]171) · 시간[時]172) · 함께함[俱]173)을 말한다. 다섯 종류 중에서 변행심소에는 네 가지 일체(一切)를 갖춘다. 별경심소에는 오직 일체 성품[性]과 일체의 머무는 곳[地]이 있다. 선심소에는 오직 한 가지가 있으니, 일체의 머무는 곳을 말한다. 잡염심소(번뇌 · 수번뇌)에는 네 가지가 모두 없으며, 부정심소에는 오직 한 가지가 있으니, 일체의 성품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다섯 지위의 종류의 차이를 말하였다.
169) 『유가사지론』 제3권(『고려대장경』 15, p.483上:『대정장』 30, p.291上).
170) 선 · 악 · 무기의 3성(性)을 말한다.
171) 여기서 지(地)는 유정이 머무는 장소를 말한다. 일체지(一切地)는 3계의 9지(地) 혹은 3지(地)이다. 9지는 욕계 1지, 색계 4지, 무색계 4지를 합한 것이다. 3지는 심구[尋] · 사찰[伺] 심소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음에 따라,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 · 무심유사지(無尋有伺地) ·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로 분류한 것이다.
172) 일체의 유심(有心)의 시기, 또는 아득한 옛적부터 단절되지 않는 것, 또는 모든 대상을 반연할 때를 가리킨다.
173) 일체와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 ↑ 운허, "善根(선근)". 2012년 9월 2일에 확인.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 T.1585, 제5권. p. T31n1585_p0028a20 - T31n1585_p0028a21. 욕(欲)심소
"云何為欲。於所樂境希望為性。勤依為業。" -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 K.614, T.1585, 제5권. p. 271 / 583. 욕(欲)심소
"무엇을 ‘욕심소’231)라고 하는가? 좋아하게 된 대상에 대해서 희망하는 것을 체성으로 삼고, 근(勤)심소의 의지처[依]인 것을 업으로 삼는다.
231) 욕(欲, chanda)심소는 ‘욕구’, 즉 좋아하게 된 대상을 희망하는 심리작용이다. 특히 선욕(善欲)은 정진[勤] 작용을 일으키는 소의(所依)가 된다. " - ↑ 황욱 1999, 51. 욕(欲)심소쪽
"‘欲’은 所樂境을 희망함으로써 體를 삼고 勤의 所依가 됨으로써 業을 삼는다. 즉, 관찰하고자 희망하는 경계에 대하여 희망하는 것을 性用으로 하고, 이 희망은 善이나 惡이나 無記性은 말할 것도 없고 三性을 모두 희망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서 善欲은 正勤 즉 精進의 작용을 일으킬 所依가 되기 때문에 業用으로 삼는다.163) 한편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즐거움을 야기하기 위하여 짓는 희망을 體로 하고, 正勤에게 의지가 되어주는 것을 業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164)
163) 欲의 性用은 所樂境을 희망하는 작용을 의미하며, 그 業用은 勤[精進]이 희망에서 生起하는 작용을 뜻한다. 欲은 意慾이나 희망을 말하는 것으로 業力이나 境界勢力에 따라서 별다른 희망없이 任運히 境을 緣할 때에는 이 欲心所가 일어나지 않고 作意로서 관찰하고자 할 때 희망이 솟구쳐 欲心所가 발동하게 되는 것이다.
164) 《大乘阿毘達磨集論》 1(《大正藏》 31, p.664上). “何等為欲。謂於所樂事彼彼引發所作希望為體。正勤所依為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