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성 (건축)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 축조한 일본식 성

왜성(倭城, 일본어: わじょう 와조 [ウェソン →웨손[*]]) 혹은 일본이 쌓은 성 일본왜성(일본어: 日本倭城)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일본군(日本軍)에 의해 한반도 남부 각지에 축조된 일본성곽을 말한다.

울산성 전투를 그린 일본의 병풍화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 위치한 서생포왜성의 성곽
전라남도 해룡면 신성리에 위치한 순천왜성의 성곽

개요편집

왜성은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 혹은 그 외 지역을 점거하고 그들의 근거지를 확보하거나 일본군내 상호 연락 등을 위해 축조한 일본성곽으로써, 그 성격으로 보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1]

첫째는 연결성(連結城)[2]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령에 의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나중에는 의주까지 히데요시 자신이 명나라로 들어갈 때의 거처(御座所)와 군수물자의 보급로 확보를 목적으로 쌓은 성곽이다. 이것은 일명 “쓰타이노시로”(つたいの城)라고도 하는데, 군대가 거의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쌓았으며, 주로 조선의 읍성을 고쳐서 사용하거나 적당한 읍성이 없는 곳에서는 새로이 간단하게 축성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그 유구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으며, 함경도길주안변 사이 등에도 쌓여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길목마다 이 연결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는 통치성(統治城)[3]인데, 대한민국 남해안(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전남 순천) 지역에 쌓은 성곽이다. 임진왜란기인 1592년부터 2년간에 걸쳐 일본으로부터의 수송로 확보와 일본군이 내륙에서 후퇴한 뒤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쌓은 20여 개의 성곽정유재란 기에 신규로 축성한 10개 등 30여 개의 성이다. 멸실된 성을 포함해서 40여 개의 왜성이 발견되었다.[4][5]

축성편집

왜성은 남해안뿐만 아니라 내륙 지역에서도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그 유구(遺構)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실상은 알 수 없다. 남해안 일대에서는 이미 조사된 것만도 32개소에 달하였다.[6][7]

내용편집

왜성은 일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침략지인 조선에 축조된 매우 특수한 사례에 속하는 성곽이었다. 왜성은 외견상으로나 축조수법, 혹은 시설에서 당시 일본의 성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침략지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방어기능 강화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거의 모두 항(港)의 확보를 위하여 총구(惣構) 시설 같은 것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 등 몇 가지 차이점이 있을 뿐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왜성은 부산진성을 비롯하여 서생포왜성·눌차왜성·창원 진해 웅천왜성 등 31개소[8]에 달한다. 이 가운데 1592~1593년 사이에 축조된 것이 부산일본성·부산진성·임랑포왜성·기장 죽성리왜성·구포왜성·김해 죽도왜성·눌차왜성·가덕도 왜성지성·서생포왜성 등 19개이고, 정유재란 당시인 1597년에 축조된 것이 (견내량왜성)·울산왜성·양산 증산리 왜성·마산일본성·고성읍성·사천선진리성·남해 선소왜성·순천왜성·(망진왜성) 등 9개이다. 그리고 기록에 있지 않고 존재가 불명인 (울포산성), (탑포산성)과 (영춘왜성), (곤양왜성) 등 4개의 성은 그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왜성은 거의 대부분 전시 상황에서 축조되었기 때문에 방어상 유리한 산성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입지상으로는 강과 바다에 인접한 독립된 구릉, 혹은 야산을 택하고 있다. 왜성은 일본군이 선박을 통한 침략이었기 때문에 보급이나 연락 관계는 배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배가 아니고서는 보급·연락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왜군 입장에서는 일본에 있는 후방기지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손쉽게 배를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아울러 일본의 산성이 대체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듯이 왜성 역시 주곽부(主郭部)를 중심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다중(多重)의 곽(郭)과 곡륜(曲輪) 배치 등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출입구는 하나같이 출입구를 통과하는 적에게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성 아래에 호즉·해자가 시공된 흔적이 남아 있다.

구조편집

남해안 일대 왜성은 30개소로 약간의 차이점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일본의 성곽 축조양식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이들 왜성은 16세기 일본에서 축조되기 시작하는 평성이 아니라 대부분 산성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정치적 지배 거점에 중점을 둔 평성보다는 전시 상황에 맞게 방어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진과 후퇴, 보급이 원활할 수 있는 강이나 바다에 인접한 곳에 축조하였다. 또, 성의 구조는 일본의 성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루와의 배치와 해자, 이중문으로 된 마스가타우마다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일본의 성의 모습은 당시 중국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과 일본인 화가가 울산성 전투를 그린 병풍화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이들 그림에서는 담에 난 총안인 사마를 통해 조명연합군에게 사격하는 일본병사와 겹겹으로 된 일본의 성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식 성곽은 대개 평야나 해안지대에 돌출한 산정(山頂)을 깎아 평평하게 하여 가장 높은 곳에 이중 삼중으로 된 본환(本丸)·이지환(二之丸)·삼지환(三之丸)을 설치하고 이 아성을 둘러싼 외곽선에 성곽을 높이 쌓되 성 전체를 몇 구획으로 나누어 각 구역이 독립하여 전투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같은 축성방식은 우리나라의 재래식 산성과는 전혀 다른 일본식 축성방법이다.[9]

구루와(曲輪, くるわ)편집

일본의 산성이 대체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듯이 왜성 역시 마찬가지로 주곽부를 중심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다중의 구루와의 배치 등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루와의 배치는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지만 구조적 원리를 간략화한다면 흔히 말하는 윤곽식(輪郭式)ㆍ제곽식(梯郭式)ㆍ와곽식(渦郭式)ㆍ연곽식(連郭式) 등으로 나눌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 변형인 경우가 많다.

고구치(虎口, こぐち)편집

일본의 성에서 출입구를 통상 고구치(虎口)라고 칭하는데, 왜성 또한 그 모양은 다양하지만 기능은 하나같이 출입구를 통과하는 적에게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한국의 경우는 옹성(甕城)이나 적대(敵臺)에 의해 주로 출입구인 성문이 보호되는 것과 비교가 된다. 그리고 구루와에 여러 모양의 각도(角度)를 주어 성벽으로 오르는 적을 원근(遠近)ㆍ좌우(左右) 등 다양한 위치에서 궁시 등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요코야가카리(일본어: 橫矢 횡시[*])이다. 이런 직선(直線)과 각(角)으로 이루어진 구루와형태는 일본 성곽의 독특한 점 가운데 하나이며, 한국의 경우 성벽이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일본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많지 않고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요코야가카리처럼 구루와에 각도를 주는 방식보다는 성곽 외각으로 사각모양의 치성(雉城)을 만드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석벽과 성루(石垣, いしがき)편집

일본의 경우 축성에 석벽방식을 도입한 것은 중세이후로 볼 때는 전국 시대 후반기이다. 물론 고대에는 조선식산성과 같은 석축성이 있지만 중세이후로는 거의 석벽이 사용되지 않았다. 석재확보나 기술적인 문제 등도 있겠지만 성곽의 항구성이나 방어력 증강의 필요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왜성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바이지만 일본성곽은 석축에 있어서 직선을 중시하는 경향이 현저하다. 따라서 구루와가 꺽이는 모서리 부분이 매끄럽게 처리되면서 전체적으로 상하석축선이 곡사선형태로 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자연석을 난적(亂積)하고 그 틈을 잔돌로 메우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또한 성루의 경우는 중세이래 산성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시설 가운데 하나이다. 구루와위에 시설하고 그위에 다시 목책이나 판벽을 설치하여 방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노보리 이시가키(登り石垣, のぼりいしがき)편집

왜성에는 일본의 근세성곽에서 보이지 않는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라는 장대한 장벽도 설치되었다. 이것은 왜성만의 특징적인 구조로, 산성부의 본성과 산기슭부의 지성이나 부속시설을 하나로 연결하여 방어선을 확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측된다. 서생포왜성이나 웅천왜성 등에서는 이 노보리이시가키가 잘 보존되어 있다.[10]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성에서도 간혹 보이는 축성방법으로 마쓰야마성, 히코네성, 스모토성 등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왜란에 참전했다 귀국한 다이묘들의 성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중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등이 쌓은 성이 대표적이다.

해자편집

왜성은 일본의 성과 마찬가지로 성 아래에 해자가 시공되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중국의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에 나타난 전투장면을 보면 왜성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왜성을 공격하는 장면을 보면 담에 뚫린 사마(?間)으로 공성군을 사격하는 모습이 있고, 넘어에는 목책이 이중으로 세워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천수각이 보이고, 그외에 숙사(宿舍)가 그려져 있으며, 안쪽에는 군데 군데 방패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판벽(板璧)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해전(海戰)을 그린 것에서는 바닷가에 목책이 세워져 있고 곳곳에 판벽으로 가설하여 이곳에 몸을 은폐하고 공격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목책과 판벽을 세운 곳이 구(構)의 일부로 추정한다.

특징편집

왜성은 배를 접선하기 좋은 해안가와 강안에 위치하면서도, 여차하면 서로를 돕기 쉽게 서로를 조망하기 좋게 밀도있게 배치되었다. 또, 동래성 같은 경우는 기존의 조선성곽에 붙여서 왜성을 축조하기도 하였다.[11]

일본군 입장에서는 타지에서 조달한 자재를 썼지만 전국시대의 오랜 전란에서 얻은 축성기술과 건축기술을 동원해 빠르게 올렸다. 이러한 왜성들은 적을 지연시키고 고립시키기 위한 특유의 구조 등으로 상당한 방어력을 보여주었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조명연합군의 대군을 막았다. 규모가 있는 왜성은 혼마루천수각(天守閣, 영어: keep, 문화어: 천수각지) 등도 있었으나 목건물은 현재는 모두 부서지고 없다.[12]

상당한 방어력을 보여준 것 치고는 현재는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 임진왜란 뒤에는 조선군이 얻은 돌을 쌓아 만든 석축을 기초해 조선식 읍성으로 고쳐 쓰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었고, 일본군의 석축은 조선식에 비해 빠르게 올릴 수는 있지만 내구력 자체는 약해 시간이 지나면서 비교적 빨리 허물어졌기 때문이다.[13][14]

이는 가택건축의 안정성과 유지력에서 분화된 다른나라의 축성술과 달리, 오로지 성을 쌓기 위해서만 방벽으로 발달한 일본식 축성술의 특징으로, 왜란 당시까진 석벽 틈새에 회반죽이나 흙을 집어넣지 않고 오로지 돌만으로 쌓아올리는 메쌓기(Dry stone/空積み,野面積み)가 주류였기 때문이다. 폭우가 내릴 시 따로 배수구를 개공할 필요없이 돌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며, 재해나 공세에 의해 무너져도 어차피 돌만으로 쌓은 벽이기에 흩어진 자재를 다시 쌓아올리면 되지만, 돌 틈새로 해충이나 쥐 등이 침범하기 쉽고, 식물들이 자라면서 이음새를 침범하거나 기반을 무너뜨리는 등 유지보수가 꾸준히 요구되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인스턴트 성벽이다.[15]

오로지 전투만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기본적으로 높은 지대를 끼고있는 산성 혹은 평산성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물자의 보급을 쉽게 하기 위해 상당수 왜성들은 해안가나 강가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평지부터 시작하여 정상부로 올라가는 구간을 여러 단계로 나누고 통행로도 미로와 같이 설계한 다음 그 구간마다 성책과 성문을 설치한 다층 방어구조를 채택하고 있어 성벽 방어선이 뚫리면 그대로 성의 함락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한국식 산성이나 읍성보다 훨씬 더 강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각 왜성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에 의해 여러번의 포위전을 겪었지만 정작 20여개 왜성 중 직접적인 전투를 통해 함락당한 왜성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왜성은 전략적인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왜성이 버려진 상태로 남게되어 현존 왜성의 경우 보존상태가 좋은 경우가 드문 편이다. 그러나 일부 왜성의 경우 꽤 좋은 길목에 자리한 경우가 있으며 이 경우 일부 구조물을 보수하여 군사 주둔지역으로 전용하여 사용한 경우가 있으나 그 사례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이다.[16]

연구편집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이 축조한 성인 왜성(倭城)의 연구 결과를 정리했다.[17]

나 팀장은 1597년 왜군 1만6천 명이 40여 일간 만든 울산 왜성이 뛰어난 방어력을 갖춘 성이었다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국내에 있는 왜성 30여 곳이 개발과 환경 변화로 훼손되고 있다고 지적했다.[17]

그는 "왜성은 400여 년 전 치열했던 동아시아 전쟁을 재구성하고 역사를 재현하는 데 있어 중요한 문화자산"이라고 강조했다.[17]

국립중앙박물관회가 공동 주관하고 KEB하나은행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이번 학술심포지엄은 22일까지 이어지는 '정유재란' 특별전과 연계해 기획됐다. 강화교섭과 정유재란 발발, 노량해전에 대한 이해의 방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순천성 전투 등에 관한 발표도 진행된다.[17]

국립진주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정유재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며 "전쟁의 실상은 물론 한국, 중국, 일본 민중의 삶과 생활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17]

정유재란 목적은 한반도 남부 정복…조선인 모조리 연행[17]

의의편집

왜성은 성곽 편년에 있어서 그 축성 연대가 확실하고 후대에 개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축성 당시 일본의 축성법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고 이는 같은 시기 일본 국내에서 축조되었던 성곽이 후대에 계속 사용됨으로써 거듭 개·보수가 이루어지게 되고 그에 따라 성곽 축성 시기의 축성법을 명확히 가려내기 어렵다는 점과 비교해 볼 때 의미가 있다.

언어판 문서편집

기타편집

2019년에 <조선일본도설(朝鮮日本圖說)>이라는 왜성 현황 지도가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5]
  • 임진왜란 때 다시 개축되었던 다대포성부산진성이나 자성(子城)처럼 왜성(倭城)이 되지 않았으며 다대포성은 왜성에서 제외되었다.[18]
  • 거제 지세포진성은 임진왜란을 통해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이끄는 일본군은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나 함락된 지세포성은 일본식으로 개축되었다는데 이후 지세포왜성 이라 명명을 했으나 왜성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 진주 망진왜성(晋州 望晉倭城)은 정유재란 때 축조되었으며 현재 박문구왜성과 멸실된 왜성이고 봉수대 주변에 목책(木柵)은 없고 꼭대기에 있던 성벽 추정지는 제5경 망진산 봉수대[19]가 있고 한국방송공사 방송탑과 망진체육공원이 있다.
  • 진주 망진왜성은 현 경남 진주시 주약동 망진산에 있었다. 한편 꼭대기에서 240m 떨어진 곳에 있는 제5경 망진산 봉수대는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0]
  • 1598년 9월 21일 남강의 망진왜성이 불타서 없어졌다.
  • 반면 기록에는 없는 영춘왜성(永春倭城)과 곤양왜성(昆陽倭城)은 사천성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대에서 중로군이 망진왜성을 점령한 이후 영춘왜성을 점령하고,
  • 다음날 1598년 9월 22일에 곤양왜성이 불타서 없어졌다.

이렇게 멸실된 왜성은 7개소(중앙동, 동삼동 (부산), 호포 (양산), 견내량 (거제), 망진, 영춘 (진주), 곤양 (사천))으로 확인되었으며 농소, 마사 (김해), 동래 (부산) 왜성은 국가나 정부 기관이나 관공서, 주민센터 관할로 관리가 지속적으로 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멸실될 것이며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관리가 되어야하고 왜성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전망이다.

문화재보호법편집

일본왜성은 한국의 성과 같이 문화재보호법(文化財保護法)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대한민국 문화재청에서 보존중이며
  •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도 왜성은 보존되어야 하며 천연보호구역과 환경보호구역으로 지정이 될 수 있다. 일본의 잔재를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는 문화재보호법에 위반될 수 있다.
  • 왜성은 그 역사의 현장으로서 보존돼야 하고, 의성터(구포왜성, 양산 증산리 왜성)와 관련한 발굴조사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 문화재로서 역사적으로도 많은 관심이 필요하고 왜성이 멸실되지 않게 왜성을 관리시설 차원에서 관리해주고 보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문화재보호법 제2조 정의

  • 왜성은 한국의 성과 같은 보호법을 적용하므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상기한다.
  • 왜성을 이유없이 협의를 하지 않고 불태우거나, 부수거나, 훼손하거나 파괴할시 재물손괴죄로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음을 명시한다.

주요 왜성 목록편집

[21] PDF 링크 참조. 정부 근거 자료 제시 Untitled 역사문화센터의 자료.[22] 웹사이트 참조. 블로그, 매거진, 도서관 근거 자료 제시.[23]

임진왜란(1592년~1598년)편집

  • 1592년 4월 임진왜란 개전 직후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바로 보급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왜성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11월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군이 평양에 왜성을 축성하였고 우키다는 한성 남쪽인 남산에 왜성을 축성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조명연합군의 반격에 쫓기기 시작한 일본군은 1593년 5월부터 지금의 경상남도 해안 일대에 20곳의 왜성을 축조하였다.
번호 사진 명칭 시기 축성 수비 소재지 관리자
(단체)
병력 참조
1   눌차왜성(訥次倭城)
(Nulcha Waeseong)
1592년 제6군
  모리 데루모토
(毛利 輝元)
6군 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6군 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제6군
  모리 히데카네(小早川秀包)
(毛利秀包)
  다치바나 무네시게
(立花 宗茂)
  시마즈 다다쓰네[24]
(島津 忠恒)
일본군[25]
(日本軍)
부산광역시 강서구 눌차동 산84-7 강서구 가덕도왜성
2   가덕도 왜성지성(加德島倭城支城) 1593년 제4군
  다카하시 모토타네
(高橋 元種)
제6군
  쓰쿠시 히로카도
(筑紫 広門)
  다치바나 무네시게
(立花 宗茂)
  모리 히데카네(小早川秀包)
(毛利秀包)
  다치바나 나오쓰구
(立花 直次)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 산43 강서구 성북왜성
3   가덕도 성북왜성(加德島城北倭城)
(Seongbuk Waeseong)
1593년 6군 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小早川隆景)
좌군 총대장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小早川秀包)
다찌바 토우코
(立花統虎)
부산광역시 강서구 성북동 산43, 53, 52번지 강서구
4   기장 죽성리왜성
(機張 竹城里倭城, 일본어: 機張城)
(Waeseong in Jukseong-ri, Gijang)
1593년 3군 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 부자
(黒田 長政)
  구로다 요시타카[26]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
(加藤 清正)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1 기장군 33,000명 [1]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호
기장성- 일본[27]
5   김해 죽도왜성(金海 竹島倭城)
(Gimhae Jukdo Japanese Castle)
1593년 제2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 直茂)
  나베시마 가쓰시게 부자
(鍋島 勝茂)
제2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 直茂)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 787번지 일원 강서구 [2]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7호
6   구포왜성
(龜浦倭城, 일본어: カードカイ城 카도카이쇼[*])
(Gupo Japanese Fortress)
1593년 1차
6군 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책임)
(小早川隆景)
제6군
  쓰쿠시 히로카도
(筑紫 広門)
  다치바나 무네시게
(立花 宗茂)
  다치바나 나오쓰구
(立花 直次)
  모리 히데카네(小早川秀包)
(毛利秀包)
2차
우군 사령관
  모리 히데모토
(毛利 秀元)
2차
3군 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
(黒田 長政)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1동 산93번지 부산광역시 북구 5,000명 [3]
부산광역시 기념물 6호
카도카이성- 일본
죽도왜성의 지성
7   김해 농소왜성지(金海 農所倭城址)[28]
(Nongso Waeseong)
1593년 제2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
(鍋島 直茂)
경남 김해시 주촌면 농소리 산22-5 농소마을회관 5,000명 농소왜성
죽도왜성의 지성
8   마사왜성지(馬沙倭城址)[29][30]
(Masa Waeseong)
1593년 제2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
(鍋島 直茂)
경남 김해시 한림면 금곡리 산61-2 김해시 5,000명 土城, 죽도왜성의 지성
9   동래왜성(동래읍성지)
(東萊倭城)
(Dongnae Waeseong)
1593년 영주
  깃카와 히로이에
(吉川 広家)
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 行長)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1-9 동래구 [4]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
10   동삼동왜성 1593년 제6군
  모리 데루모토
(毛利 輝元)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188 추목도왜성, 영도왜성
11   부산진성
(釜山鎭城, 일본어: まるやまじょう 마루야마조[*])
(Busanjinseong)
1593년 제6군
  모리 데루모토 부자
(毛利 輝元)
우군 사령관
  모리 히데모토
(毛利 秀元)
봉행
  아사노 나가마사
(浅野 長政)
(정유재란 때 수축 및 증축)
제6군
  모리 데루모토 부자
(毛利 輝元)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 (범일동) 부산광역시 동구 18,700명[31] [5]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
자성대왜성
12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
(Seosaengpo Japanese Fortress)
1593년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
(加藤 清正)
3군 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
(黒田 長政)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번지 일원 울주군 100,000명 [6]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13   임랑포왜성
(林浪浦倭城, 일본어: せいぐわん城 세이구완죠[*])
(Imrangpo Japanese Fortress)
1593년 4군 사령관
  모리 가쓰노부
(毛利 勝信)
제4군
  시마즈 도요히사
(島津 豊久)
  이토 스케타카
(伊東 祐兵)
  다카하시 모토타네
(高橋 元種)
  아키즈키 다네나가
(秋月 種長)
4군 사령관
  모리 가쓰노부
(毛利 勝信)
제4군
  시마즈 도요히사
(島津 豊久)
  이토 스케타카
(伊東 祐兵)
  다카하시 모토타네
(高橋 元種)
  아키즈키 다네나가
(秋月 種長)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 산48 기장군 세이관성- 일본[32]
14   영등왜성지(永登倭城址)
(Yeongdeungpo Waeseong)
1592년 제4군
  시마즈 요시히로 부자
(島津 義弘)
경남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산6-17번지
외성: 장목면 구영2길 34번지
거제시 2,000명 영등포왜성
구영등왜성
15   송진포왜성(松眞浦倭城)
(Songjinpo Waeseong)
1593년 5군 사령관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 正則)
제5군
  도다 가쓰타카
(戸田勝隆)
  조소카베 모토치카
(長宗我部元親)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산6-3 거제시 시루성
아명: 지세포(Jisepo)[33]
경상남도의 비지정문화재
16   거제 장문포 왜성(巨濟 長門逋 倭城)
(Geoje Jangmunpo Castle)
1594년 11월 5군 사령관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 正則)
제5군
  하치스카 이에마사
(蜂須賀 家政)
  이코마 지카마사
(生駒親正)
  도다 가쓰타카
(戸田勝隆)
제5군
  조소카베 모토치카
(長宗我部元親)
  이코마 지카마사
(生駒親正)
경남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130-43번지 거제시 [7]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3호
장목왜성
군항포왜성
17   창원 진해 자마산성(昌原 鎭海 子馬山城)
(Jama Japanese Fortress)
1593년 제1군
  소 요시토시
(宗 義智)
경남 창원시 진해구 성내동 산15 창원시 자마왜성
웅천왜성의 지성
18   진해 명동왜성(鎭海 明洞倭城)
(Myeongdong Japanese Fortress)
1593년 제1군
  마쓰라 시게노부
(松浦鎮信)
  소 요시토시
(宗 義智)
경남 창원시 진해구 명동 산13 창원시 웅천왜성의 지성
19   창원 진해 안골왜성(昌原 鎭海 安骨倭城)
(Angol Japanese Fortress)
1593년 수군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 安治)
  가토 요시아키
(加藤 嘉明)
수군 사령관
  구키 요시타카
(九鬼 嘉隆)
경남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산27번지 외 창원시 [8]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5호
일본 제1수군기지(왜수군 제1기지)
웅천 안골왜성(熊川 安骨倭城)
20   창원 진해 웅천왜성(昌原 鎭海 熊川倭城)
(Ungcheon Japanese Fortress)
1593년 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 行長)
제1군
  소 요시토시
(宗 義智)
다이묘
  우에스기 가게카쓰[34]
(上杉景勝)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산211-1번지 창원시 5,000명 [9]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일본 제2수군기지(왜수군 제2기지)
21   박문구왜성 1593년 7월 제6군
  모리 데루모토
(毛利 輝元)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하
(小西 行長)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Japanese castles in Busan (Korea) Sengoku Forum
'迫門口'[35]
22   양산 가산리 호포왜성지
(梁山 架山里 弧浦倭城址)[36]
(Hopo Waeseong in Gasan-ri, Yangsan)
1593년 일본군[37]
(日本軍)
경남 양산시 동면 가산리 산52-4, 산57
양산시 동면 호포로 26
양산시 동면 가산리 1120-6[38][39]
(양산천 하류 경부선 아래)
양산시 동면 가산리
1026-1, 1027-26, 1028-11
양산시 동면 가산리 1045-1
국유 호포성지(狐浦城址)[40][41]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42]

정유재란(1597년~1598년)편집

  • 임진왜란 강화교섭이 결렬되면서 재침공해온 일본군은 기존에 축성하였던 왜성을 재차 점거하고 일본 수군은 웅천왜성을 점거하여 근거지로 삼았다. 이 당시 일본군은 점령지를 확실하게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 본토와의 연결을 위해 기존 축성한 해안가 일대의 왜성을 보수하고 동편으로는 울산, 서쪽으로는 순천까지 전선이 확대되면서 이 일대에도 왜성이 새로 축성되었다.
번호 사진 명칭 시기 축성 수비 소재지 관리자
(단체)
병력 참조
23   고성읍성(固城邑城)
(Goseong Japanese Fortress)
1597년 영주
  깃카와 히로이에
(吉川 広家)
  가쓰라 모토쓰나[43]
(桂元綱)
제2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 直茂)
경남 고성군 고성읍 성내리, 서외리, 수남리 일대
고성왜성: 고성읍 성내로136번길 42
고성군 7,000명 [10]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
고성왜성(固城倭城),[44] 수남리왜성[45]
24   견내량왜성 1597년 제1군
  소 요시토시
(宗 義智)
와키자카 야스하루[46]
(脇坂 安治)
가라시마 세토구치[47]
(辛島瀬戸口)
  야나가와 시게노부
(柳川調信)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해안길 147-1 . 왜성동왜성
광리왜성, 토성(土城)[48]
견내량왜성 3D모델 도안만 남은 상태
견내량 왜성 답사 + 3D모델 제작
25   남해 선소왜성(南海 船所倭城)
(Namhae Castle)
1597년 수군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 安治)
제1군
  소 요시토시
(宗 義智)
제1군
  소 요시토시
(宗 義智)
경남 남해군 남해읍 선소로 149 남해군 1,000명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04
『문화유적분포지도-남해군-』.[49]
남해왜성(南海倭城)
26   부산일본성(釜山日本城)
(Busan Japanese Fortress)
1598년 제6군
  모리 데루모토
(毛利 輝元)
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 行長)
좌군 총대장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小早川秀包)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부산광역시 동구 [11]
대한민국 사적 제35호 (해지)[50]
27   마산일본성(馬山日本城)
(Masan Japanese Fortress)
1597년 초대
  다테 마사무네[51]
(伊達 政宗)
제2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鍋島 直茂)
  나베시마 가쓰시게 부자
(鍋島 勝茂)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용마산길 142 (산호동) 창원시 12,000명 [12]
대한민국 사적 제36호 (해지)
창원왜성, 용마성[52]
28   사천선진리성(泗川船津里城)
(Waeseong in Seonjin-ri, Sacheon)
1597년 4군 사령관
  모리 가쓰노부
(毛利 勝信)
제4군 (좌군)
  시마즈 요시히로[* 1]
(島津 義弘)
다이묘
  이케다 가게카쓰[* 1]
(池田景雄)
무장
  나카가와 히데시게[* 1]
(中川 秀成)
  다치바나 나오쓰구[* 1]
(立花 直次)
제4군 (좌군)
  시마즈 요시히로
(島津 義弘)
4군 사령관
  모리 가쓰노부[* 2]
(毛利 勝信)
제7군
  모리 데루모토[* 2]
(毛利 輝元)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770번지 외
용현면 선진리 1082 일원
사천시 10,000명 [13]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
선진리왜성(2005년 발굴)[53]
29   순천왜성(順天倭城)
(Suncheon Castle)
1597년 1군 사령관 (좌군)
  고니시 유키나가(선봉)
(小西 行長)
총대장 겸 7군 사령관
(좌군 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선봉)
(宇喜多 秀家)
수군
  도도 다카토라(선봉)
(藤堂 高虎)
1군 사령관 (좌군)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 行長)
수군
  도도 다카토라
(藤堂 高虎)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1번지 외 순천시 13,700명 [14]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171호
왜교성, 예교성
(2001, 2002, 2004년 발굴)
(1999년 2월 26일 지정)[54]
30   양산 증산리 왜성(勿禁 甑山里 倭城)
(Waeseong in Jeungsan-ri, Yangsan)
1597년 3군 사령관 (우군)
  구로다 나가마사
(黒田 長政)
다이묘
  다테 마사무네
(伊達 政宗)
제7군
  모리 데루모토[* 3]
(毛利 輝元)
좌군 총대장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3]
(小早川秀包)
3군 사령관 (우군)
  구로다 나가마사
(黒田 長政)
  구로다 요시타카[55]
(黒田 孝高)
경남 양산시 물금읍 증산리 산15 양산시 [15]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6호
증산리왜성(甑山里倭城)[56]
일제강점기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쇼와 14년 고적 지정 대장 지정
31   울산왜성(蔚山倭城)
(Ulsan Japanese Fortress)
1597년 12월 2군 사령관 (우군)
  가토 기요마사
(加藤 清正)
제8군
  아사노 요시나가(공사)
(淺野 幸長)
우군 사령관
  모리 히데모토(공사)[* 4]
(毛利 秀元)
감찰관 및 감독 (무사)
  오타 가즈요시[* 4]
(太田一吉)[57]
부장
시시도 모토쓰구[* 4]
(肉戸元續)
  가토 기요베에[* 5]
(加藤淸兵衛)
가토 야스마사[* 5]
(加藤安政)
오코치 히데모토[* 5]
(大河内秀元)
2군 사령관 (우군)
  가토 기요마사
(加藤 清正)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공원3길 54, 일원
(학성동)
울산광역시 중구 16,000명 [16]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학성, 도산성 (1985년 발굴)
(1997년 10월 30일 지정)[58]

참고 문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주편집

  1. 시마즈 요시히로,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이케다 히데오(池田秀雄), 나카가와 히데시게(中川秀成), 다카하시 나오쓰구(高橋直次) 등이 쌓았고, 시마즈 요시히로군 1만여 명이 주둔했다. 2020년 11월 26일 확인
  2. 조선 도공 잡아간 ‘도자기 전쟁’…왜성 터엔 한 서린 그릇 파편들 특히 모리 요시나리는 정유재란 때 경남 사천 선진리 왜성에서도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과 함께 주둔하면서 숱한 사기장과 장인들을 일본에 끌고갔다.
  3. 이 왜성은 뒤에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고쳐 쌓았다. 2020년 11월 8일 확인
  4. 이러한 울산왜성의 축조에는 임진왜란기(1593년)에 서생포왜성을 쌓았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비롯하여 여러 왜장들이 참여하였다. 입지 선정과 전체 설계는 가토가 담당하였고, 축성공사는 아사노 요시나가(淺野幸長)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의 부장인 시시도 모토츠구(肉戶元續), 기요마사의 부장 가토 키요베에(加藤淸兵衛) 등이 수행하였다. 그리고 감찰관으로 파견되었던 오타 카즈요시(太田一吉)는 입지 선정에서부터 공사까지 전 공정의 감독을 맡았다. 2021년 5월 29일 확인
  5. 울산왜성은 정유재란시기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설계하고 오타 가즈요시(太田一吉)의 감독으로 아사노 요시나가(淺野幸長) 시시도 모토츠구(肉戸元續) 가토 키요베에(加藤淸兵衛) 가토 야스마사(加藤安政) 오고우치 히데모토(大河內秀元) 등 총 1만 6천을 동원하여 울산읍성과 경상좌병영성의 석재를 이용 12월 20일까지 약 40여일의 단기간에 울산왜성을 완공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1597년 12월 12일 입성한 왜성이다. 우리땅 왜성의 천수대, 본환 실측 연구 - 김윤덕(울산성곽연구회)

외부 링크편집

“왜성”. 《네이버캐스트》. 

  1. japanese castles in korea 1592-98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축성된 성들 자세한 정보 2020년 8월 6일 확인
  2. 소위 “つなぎの城”
  3. 소위 “仕置の城”
  4. 김영식(2008) 《日本近世城郭과 倭城에 대하여》, p.25.
  5. 일본, 정유재란 당시 왜성 40여개 쌓았다, 주간경향신문
  6. 検索結果 -倭城 2020년 11월 6일 확인
  7. 朝鮮半島南岸構築の倭城に見る役割と機能 - Core 2020년 11월 6일 확인
  8. 공식적으로 31개이나 지세포진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이 패배한 이후 일본식으로 개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또한 지세포왜성(知世浦倭城)이라고 하여 포함되었다.
  9. 왜성 축소방식의 특징《한국의 산성》[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0. 김영식(2008) 《日本近世城郭과 倭城에 대하여》, p.32.
  11. 特集・倭城 | 韓国の城 2020년 11월 6일 확인
  12. [https://www.lib.pref.miyazaki.lg.jp/ct/other000000800/hiyougakizenpdf.pdf 日向記に見る文禄・慶長の役 - 宮崎県立図書館] 2020년 11월 6일 확인
  13. 倭城の保存をめぐる近況 (その2) 『日本歴史』606、110-119頁 2020년 11월 6일 확인
  14. 순천 왜교성 전투의 역사적 조명 (홍정식 - 광양관세사무소 관세사) 2020년 11월 6일 확인
  15. Japanese history and culture, Japanese Castles in Korea 2020년 11월 7일 확인
  16. 城郭電脳日記~倭城と日本の城の備忘録~ Hatena Blog 2020년 11월 6일 확인
  17. 현지 안내문 인용
  18. 부산의 성은 외롭다 2020년 9월 5일 확인
  19. 진주8경 제5경 망진산 봉수대 2020년 11월 25일 확인
  20. 왜군에 목 잘린 조·명 연합군 3만8천여 고혼 서린 곳 2020년 11월 26일 확인
  21. Untitled -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17],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시리즈[18] Archived 2018년 12월 29일 - 웨이백 머신, 한국학도서관 한국학전자도서관 [19] Archived 2018년 12월 29일 - 웨이백 머신, [鄭淳台의 역사현장 답사] 李舜臣과 島津義弘(시마즈 요시히로)의 血鬪 泗川倭城 전투와 露粱해전 [20], 420년 전 임진왜란의 전리품, 왜성을 다시 보다 [21], NAVER 학술정보 한국 남해안 왜성 축성술 연구 [22][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코리아스칼라 한국 남해안 왜성 축성술 연구 [23][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2. 方*鎭 2015年.11/28土 [24] Archived 2019년 7월 8일 - 웨이백 머신, 팬저의 국방여행 : 부산지역의 성곽(읍성,진성,왜성,산성) [25] Archived 2019년 7월 8일 - 웨이백 머신, 경향신문 문화 - 정유재란 때 전체 왜성 그린 지도 발견 [26], 팬저의 국방여행 마산왜성_03 [27] Archived 2019년 7월 10일 - 웨이백 머신, 김해박물관교재_7회차.indd 김해왜성의 축성과 그 의의 (나동욱),‘나성’은 알아도 ‘왜성’은?…잊어선 안 될 400년 전 ‘치욕의 성’[28]
  23. [29] Archived 2019년 9월 24일 - 웨이백 머신 과학의 산책|왜성 조사 편, 조선왕조실록 연계 왜성(倭城) [30][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만남의광장 역사스페셜 <임진왜란 최후의 승부처- 울산성 전투> [31]
  24.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 왜성 / YTN 사이언스 (시마즈 이에히사 등 일본군 500명 주둔) 2020년 7월 11일 확인
  25.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 왜성 / YTN 사이언스 (일본군 500명 주둔) 2020년 7월 11일 확인
  26. 조선 도공 잡아간 ‘도자기 전쟁’…왜성 터엔 한 서린 그릇 파편들 이 왜성은 왜란 초기 제3군을 지휘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와 그의 아버지 구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가 3만3000명을 동원해 쌓은 성이다.
  27. 『增補文獻備考』 豆毛浦城 臨浪浦城 備局謄錄 並有倭城.(두모포성, 임랑포성은 비 국등록에 모두 왜성이라 기록하였다.)
  28. 농소왜성,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 Google 도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19년 7월 8일 확인
  29. 마사왜성,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 Google 도서[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19년 7월 8일 확인
  30. 낙동강, 조만강의 왜성/죽도왜성, 농소왜성, 마사왜성 20210123 토
  31. 부산포 치열한 삶•저항 역사 따라 걷다
  32. 사 료 : 『增補文獻備考』 豆毛浦城 臨浪浦城 備局謄錄 並有倭城.(두모포성, 임랑포성은 비국등록에 모두 왜성이라 기록하였다.)
  33. 송진포왜성도 당시에는 지세포왜성이라는 아명이 따로 있었다. 거제 지세포진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함락된 이후 왜성으로 되었다고 하여 지세포왜성이라 했으나 왜성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송진포왜성의 아명이다.
  34. 우에스기 가케카쓰 (上杉景勝, 1556~1623) 1592년, 임진왜란 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가 웅천왜성을 지은 후, 9월에 귀국했다. 이외 나오에 가네쓰구 문서 참조.
  35. 迫門口는 일본식 지명으로 협수로의 어귀라는 뜻을 가진다. 현재 도시 개발과 항만시설, 바다의 매립 등으로 인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전형적인 왜성의 형태인 독립된 나지막한 야산의 구릉으로 한눈에 부산 앞바다를 관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용두산공원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옛 부산시청사 주변 롯데백화점 광복점으로 추측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해인 1593년 7월 27일 분로쿠 2년에 모리 데루모토가 동삼동왜성과 박문구왜성을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36. 우리땅 왜성의 천수대, 본환 실측 연구 - 울산성곽연구회 2020년 11월 6일 확인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 1185번지 일원 내 梁山 架山里遺蹟 Ⅴ. 고찰 (발행 : 2015년 9월 1일) 2020년 11월 6일 확인
  37. 일본군이 축성했지만 호포왜성 같은 경우를 볼때 제일 교역이 깊은 구포왜성과 양산 증산리 왜성에서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가 축성과 수비한 것을 보았을때 호포왜성도 구로다 나가마사가 축성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8. 지적편집도: 6답
  39. 호포왜성지와 낙동강변로 - 1. 호포왜성지(狐浦倭城址) 2020년 11월 8일 확인
  40. 대한주택공사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양산석산지구 文化遺蹟 地表調査 報告書 (발판: 2006년 12월) 2020년 11월 6일 확인
  41. 양산시 문화관광 고적 호포성지 2020년 11월 6일 확인
  42. 『大東地志』 城池 仇法谷城 狐浦城 二處倭所築. (구법곡성, 호포성 두 곳을 왜인이 쌓았다.) 『增補文獻備考』 仇法谷狐浦 備局謄錄 並有倭城. (구법곡성과 호포성은 비국등록 에서 모두 왜성이라 기록하였다.) 호포왜성지는 현재 철저하게 훼손된 상태다. 체성(體城) 구조의 일부가 잔존한 부분은 호포마을 당산나무 북편에 남은 약 30m 정도였는데 공사로 인해 파괴되었다.
  43. 고성왜성은 1597년 10월 2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 가쓰라 모토쓰나(桂元網)가 고성읍성 남부 구릉에 세운 것이다. 이 성엔 고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 다치바나 무네토라(立花總虎), 다치바나 나오쓰구(立花直次), 쓰쿠시 히로카도(筑紫廣門) 등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당시 일본군 제7군에 편성돼 조선에 쳐들어왔다가 휴전기에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왜성을 지키며 조선에 남아있었던 장수들이 옮겨와 번갈아 주둔했으며, 병력은 6000 ~ 7000명에 이르렀다. 가쓰라 모토쓰나는 고성왜성 축성 이후 울산성 축성의 공사를 맡았다고 하는데 한국사에서 왜성을 축성한 사람의 기록에선 정확하지 않다. (2020년 8월 4일 확인)
  44. 축성시기는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년(1597년)과 선조 31년(1598년) 깃카와 히로이에 등에 의해 축성되었다. 고성읍성의 남방의 설상으로 돌출한 소고지에 축성한 성으로 고성읍성과 접해 있다. 축성법은 일본식 축성으로 가장 높은 곳에 본환이 있고 서쪽에 본환보다 낮으나 규모가 조금 더 큰 2환이 확인되었으며 본환의 동부로부터 남부에 꺾어 둘러서 대곽이 있는데 이것이 3환이다. 현재도 본환과 2환, 3환 모두 확인되고 있고 성의 상당 부분이 잔존하고 있다 남은 체성은 경사도 70도 정도로 왜성의 축성 방식을 보여주며 석재는 자연석을 이용했고 틈새는 작은 쐐기들을 끼워넣었다.
  45. 高瀨哲郞, 1999, 「倭城蹟を訪ねて」 『硏究紀要』5, 佐賀縣立名護屋城博物館. 高田徹·太田秀春, 2005, 「文祿·慶長の役における日本軍の朝鮮城郭利用について-島津氏の事例を中心に」 『城館史料學』3, 城館史料學會.
  46. 일본군이 조선의 수군을 제어하기 위해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거제도에 성을 축성하여 조선의 수군에 대한 수비를 견고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견내량에 머무르면서 토성(土城)으로 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있다.)
  47. 수비장 및 성을 축성한 장수에 대한 기록은 없고, 성을 축성하고 방어한 장수로 ‘가라시마 세토근치’와 ‘소 요시토시’라는 일설이 전해지고 있다.‘가라시마 세토근치’라는 장수가 임진왜란에 참전했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지만 ‘소 요시토시’는 대마도주 정종성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출전한 기록이 있다. 특히 소 요시토시는 임진왜란 발발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훗날 조선통신사 등 일본과 조선의 외교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2020년 8월 10일 확인
  48. 둘레350m의 토성(土城)을 쌓아 견내량(見乃梁)목을 감시하던 광리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동안 왜군을 주둔하며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2020년 8월 10일 확인
  49. 高田徹, 2000, 「南海倭城の繩張り」 『倭城の硏究』4, 城郭談話會. 堀口健貳, 2005, 「畝狀空堀群を持つ倭城について」 『愛城硏報告, 愛知中世城郭硏究會』.
  50. 『增補文獻備考』21) 釜山浦城 甑山城 備局謄錄 並有倭人. (부산포성, 증산성은 비국등록에는 모두 왜인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倭城址硏究會, 1979, 『倭城』Ⅰ.高田徹·堀口健貳, 2000, 「釜山倭城の繩張りについて」 『倭城の硏究』4, 城郭談話會. 21) 1770년에 홍봉한(1713~78 조선후기 문신)이 왕명을 받아 최초로 편찬한 「동국문헌비고」가 사실과 어긋나고 누락된 점이 많아 2차 편찬, 3차 보편을 거쳐 1908년 고종의 칙명으로 간행된 掌故(장고:典禮와 故事,나라의 일과관례)로 이루어져 편찬되었다. 편찬 목적은 영조 때 김치인(1716~1790, 조선후기 문신)이 진언하였듯이 치세와 실용적인 면을 위한 것으로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백과사전으로 제도와 문물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6考 250卷.(고:분류)으로 이루어져 있다.
  51. 1958년 옛 마산시가 펴낸 <시세일람>에는 마산왜성이 “임진왜란 때 왜장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축성을 하다 미완성 상태로 두고 회군한 것을, 정유재란 때 창원 방면에 주둔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와 나베시마 카츠시게(鍋島勝茂) 부자가 절도사 영지인 환구산과 신병영의 합성에서 석재를 가져와 완성한 성”이라고 소개돼 있다. 2020년 8월 4일 확인
  52. 『大東地志』 城池 江馬山城 倭人所築. (강마산성을 왜인이 쌓았다.) 『增補文獻備考』 舊江馬山城 備局謄錄 並有倭城.
    (구 강마산성(용마산성, 또는 마산왜성)은 비국등록에 왜성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53. 지정사항 : 고적 81호(1936년 5월), 사적 50호(1963년 1월 21일 지정~1997년 1월 1일 해지), 『大東地志』 鎭堡 三千浦堡 南20里 自晉州移于通陽浦 成宗十九年築城 置權管後又移于固城縣 宣祖丁酉倭石曼子據於此 與蔚山之島山順天之倭橋稱爲三窟 堡城今稱倭甑城.(남쪽으로 20리에 있고, 진주에서 통양포(사천)로 옮긴다. 성종 19년(1488)에 쌓았다. 권관17)을 두고 있다 후에 고성현으로 옮긴다. 선조 정유년(1597) 석만자(島津義弘, 시마즈 요시히로)는 울산의 도산성, 순천의 왜교성과 더불어 삼굴18)이라 칭하였다. 보성은 지금 왜증성이라 부른다. 『增補文獻備考』 舊三千鎭倭甑城 在南二十里 備局謄錄 並有廢城.(구 삼천진왜증성(사천왜성)은 남쪽으로 20리에 있고, 비국등록에는 폐성으로 기록하였다.)
  54. 지정사항 : 고적(1938년), 사적 49호(1963년 1월 21일 지정~1997년 1월 1일 해지), 순천대학교 박물관, 1997, 『순천 검단산성과 왜성』. 高田徹, 1998, 「順天城の繩張りについて」 『倭城の硏究』2, 城郭談話會. 順天대학교 박물관, 2001, 『順天倭城의 外城遺蹟』. 전남대학교 박물관·순천시, 2006, 『순천왜성』. 순천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순천시, 2007, 『순천시의 성곽과 봉수』.
  55. 구로다 조스이(黒田如水)와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부자가 주둔했다. 2020년 11월 8일 확인
  56. 高田徹, 1998, 「梁山城の繩張り」 『倭城の硏究』2, 城郭談話會. 高瀨哲郞, 1999, 「倭城蹟を訪ねて」 『硏究紀要』5, 佐賀縣立名護屋城博物館.
  57. 우물 없던 ‘철통 요새’…독 안에 든 왜장 가토 끝내 놓쳐 가토가 설계하고 부장 오타 가즈요시(太田一吉)가 감독을 맡았으며 1만6000여명을 동원해 1597년 12월 울산왜성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40일만에 공사를 끝낸 것으로 기록됐다.
  58. 『大東地志』 城池 島山城 東五里 一云神鶴城 一云戒邊城 一云甑城 宣祖 三十年 倭人古止修築與 順天倭橋南海露梁爲三窟 明史以倭橋曳橋露梁爲老營. (동쪽으로 5리에 있고, 신학성, 또는 계변성, 또는 증성이라고도 부른다. 선조 30년(1597) 왜인이 옛것을 수리하여 쌓았고, 순천 왜교성(순천왜성), 남해 노량성(남해 선소왜성)과 더불어 삼굴이라 한다. 명나라 기록에는 왜교를 예교로, 노량을 노영이라 하였다.) 『增補文獻備考』 甑城 在東五里 一名島山 倭賊築城 於此其形如甑故名.(증성은 동쪽으로 5리에 있고 일명 도산이라고 한다. 왜적이 축성하였고 그 형상이 마치 시루같다고 하여 붙여진 옛 이름이다.) 『增補文獻備考』 伴鷗亭城 備局謄錄 並有倭城.(반구정성은 비국등록에 왜성이 있다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