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항 (1601년)

이경항(한국 한자李慶恒, 1601년 1월 12일 ~ 1643년 10월 17일)은 조선국 함경도 도사 등을 거쳐 조선국 함경도 북청 판관 직책을 지낸 조선 시대 후기의 문신 겸 정치인이다.

이경항
李慶恒
조선국의 성균관 학유
임기 1628년 2월 29일 ~ 1628년 3월 23일
군주 조선 인조 이종
조선국의 경상도 도사
임기 1633년 3월 19일 ~ 1633년 9월 19일
군주 조선 인조 이종
조선국의 함경도 도사
임기 1633년 9월 28일 ~ 1636년 8월 7일
군주 조선 인조 이종
조선국의 함경도 북청 판관
임기 1636년 8월 7일 ~ 1637년 6월 5일
군주 조선 인조 이종
신상정보
국적 조선
출생일 1601년 1월 12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일 1643년 10월 17일(1643-10-17) (42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에서 병사
본관 우계(羽溪)
학력 1627년 식년문과 을과 급제
경력 문신 겸 시인 및 학자 겸 정치인, 서예가 출신
정당 무소속
부모 이길남(부), 하동 정씨 부인(모)
배우자 전주 이씨 부인
자녀 4남 2녀
(장남 이덕우, 차남 이가우, 삼남 이희우,
사남 이서우, 장녀 이씨, 차녀 이씨)
친인척 이성헌(친조부)
이감(증조부)
이희헌(종조부)
김세렴(사돈)
유형원(사돈)
별명 자(字)는 사상(士常)·중구(中久)
종교 유교(성리학)

주요 이력편집

자(字)는 사상(士常)·중구(中久)이고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1613년(광해군 6) 생원시를 거쳐 같은 해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617년(광해군 7) 박사제자로 등용되었으며 이후 1618년 음보로 출사하여 성균관 직장, 의금부 통사랑에 이르렀다. 임숙영(任叔英)의 문인이다.

1626년 명경과(明經科) 입격으로 전격 발탁되었고, 162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성균관 권지 직책에 보임되었고 이듬해 1628년 성균관 학유 직책에 전보되었다가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성균관 감찰(成均館 監察)·형조좌랑(刑曹佐郞)·공조좌랑·종묘서령 등을 역임하는 한편, 외직으로는 신계 현령(新溪 縣令), 예안(禮安)·결성(結城)의 현감 및 경상도, 함경도도사(都事)를 지냈다. 그는 가난하고 형편이 없는 친척들도 자신이 직접 보살펴주었다. 모친의 3년상을 치루던 중 에 걸려 수척해지고,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한때 그가 지난날 북인이 자행한 사주(使嗾)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고 이는 숙종 때에 가서도 넷째아들 이서우가 출사할 때 남인청남 허적 등에 의해 의혹이 다시 제기되었다. 후에 증 자헌대부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송곡 이서우(李瑞雨)의 아버지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자(字)는 사상(士常), 중구(中久)이고 본관은 우계이다. 이감(李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주서(注書) 이성헌(李成憲)이고, 아버지는 선무랑을 지내고 승정원좌승지증직된 이길남(李吉男)이며, 어머니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영의정 문성공 정인지의 4대손이며 호조판서 하남부원군 정숭조(鄭崇祖)의 손자로 군수, 도사를 지낸 정욱(鄭彧)의 딸이다. 아버지 이길남은 본명은 영남이고 자는 석보였는데 뒤에 길남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소암 임숙영의 문하에서 글과 학문을 배웠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 보의 7대손이며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경유의 딸이자, 병마절도사 제주목사를 지낸 이경록의 조카딸이다. 인조반정의 공신 이서는 이경록의 아들로 그의 4촌 처남이 된다. 그의 서처남은 이기축인데 정조대의 시인인 문무자 이옥의 선조가 된다.

위로는 형 이경복(李慶復)이 있었는데 그가 과거에 합격할 무렵까지는 생존해 있었으나, 형 이경복은 한확의 장남 한치인(韓致仁)의 7대손 교리 한영(韓詠)의 딸 청주한씨와 결혼했으나 자녀를 얻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그의 형 이경복은 이름만 전하다가, 2000년대에 이르러 그의 넷째 아들 송곡 이서우의 문집이 재간행되면서, 이서우의 문집 중 이길남 묘갈명에서 이경복의 결혼 사실과 부인 청주한씨가 한영의 딸인 것이 알려졌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며 기송(암기)에 능하였다.[1] 미수 허목(許穆)에 의하면 그는 세속을 따르려 들지 않았고, 쉽게 남의 말을 따르면서 휩쓸리지 않았다고 한다. 유년시절부터 가깝게 지내던 인물은 전하지 않으나, 그가 살던 동리 근처에 살던 미수 허목과 교류하였다. 후일 이경항의 넷째 아들 이서우는 미수 허목의 문하에서도 글을 배웠으며, 허목은 1675년(숙종 1) 넷째 아들 이서우가 북인 대북계열이라는 이유로 허적의 공격을 받을 때 이서우를 두둔, 감싸주었다. 백강 이경여(李敬輿)와도 간혹 교류가 있었다.

그는 소암 임숙영(疎庵 任叔英)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1613년(광해군 6년) 식년사마시 생원에 3등 합격하고, 그해에 다시 식년사마시의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되었다.

관료 생활편집

관료 생활 초반편집

1613년(광해군 6년) 생원시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생원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이후 잠시 직장(直長)을 지냈다가 1616년(광해군 8년) 6월 한때 해주목사 최원행(崔源行)의 역모 가담 사건으로 해주옥사가 발생하자 잠시 연루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으나, 별 혐의가 없어 처벌받지 않았다.[2] 1617년(광해군 9년) 박사제자(博士弟子)로 등용되었으며 이후 음보로 출사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그는 관직에 있을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당색으로는 대북 계열이었으나 임숙영의 문하생이었고, 이경항의 처사촌은 인조반정 공신인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였으므로 불이익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인조 반정 직후 그가 이이첨의 문하에 드나들었다는 혐의를 받아, 한때 유생들이 그를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었다가, 처사촌인 이서(李曙)가 편지로 관학 유생들을 협박, 유벌을 중단케 하였다. 1623년(인조 1) 4월 11일 봉선전 참봉(奉先殿參奉)에 제수되었다.[3]

인조 반정 이후편집

1626년(인조 4년) 명경과(明經科)로 발탁되었고[1] 통사랑((通仕郞)으로 재직 중[4], 1627년(인조 5년) 9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 3위로 급제, 권지성균관학유로 등용되었으며, 1628년(인조 6) 성균관학유가 되고, 1629년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형조정랑, 공조좌랑, 공조정랑, 군기시 첨정, 사복시 첨정, 종묘서령(宗廟署令) 등의 내직을 지내다가 외직으로 신계현령, 북청판관, 예안현감(縣監), 결성현감, 경상도 도사, 함경도 도사 등을 지냈다.

1628년(인조 6) 1월 유효립의 옥사 사건 당시 이계선(李繼先) 등의 모의에 동참한 혐의를 받고 의금부의 형문을 받았으나[5], 별 혐의점이 없어 곧 풀려났다.

1628년(인조 6) 12월 25일 형조좌랑에 임명되었다. 그는 임숙영의 문인이었으나 대북 계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하여 서인들의 비판을 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대북 계열에 속한 그의 과거 전력이 문제시 되어 유적[6] 삭제의 대상에 회부되었으나, 처사촌인 이서(李曙)가 편지로 성균관에 압력을 행사하여 무마되었다.[7] 1629년 형조좌랑으로 있다가 그해 4월 10일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로 임명되었다. 함경도도사로 임명된 직후 1629년 4월 10일 인조는 그를 통정대부로 승진시켰으나[8], 곧 뜻을 바꾸어 승진을 취소하였다.

1630년 형조정랑, 그해 10월 14일 이조정랑, 1631년 11월 공조정랑을 거쳐 그해 11월 기주관, 12월 기사관으로 경연에 참여하였다. 1632년(인조 10)에는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는 추숭도감의 낭청으로 참여하였다. 그해 5월 김상용 이하 추숭도감 관원들을 시상할 때 낭청들은 6품으로 승진되거나, 이미 6품인 이들을 승진하게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승진하지 못했다.

1633년 3월 19일 경상도도사(都事)로 부임, 그해 9월 19일 이임하였다.

1636년 8월 7일 북청판관(北靑判官)으로 나갔다가 1637년 6월 5일 부사과가 되었다. 그해 6월 9일 금교역 찰방(金郊驛察訪)에 임명되었으나, 금교역이 있는 황해도관찰사 김세렴(金世濂)과 사돈이라 하여 이조에 체차를 청하여 허락받았다.[9] 그해 6월 9일 예안현감에 임명되어 6월 16일 도임하였다.

1637년 7월 예안현감에 부임했으나, 1638년 2월 스스로 사직서를 올리고 물러났다.[10] 예안현감 부임 직후 지역 품관(品官), 향리들을 엄하게 다루었다. 계암 김령은 이경항이 현감으로 부임하자 품관들이 보러 들어갔는데, 침묵하며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매를 맞은 하인이 매우 많았다 한다. 1638년 2월 28일 사직서를 냈는데, 계암 김령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약 그대로 유임된다면 틀림없이 좌수 윤동창(尹東昌)에게 무함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령은 이같이 떠날 결심을 한 것이었다. 윤동창의 사람됨은 이경항도 알았던 것이라 하였다. 그가 예안현감에서 물러난 뒤 그를 비판하는 말이 나왔는데, 김령은 '실제와 달리 지나치게 헐뜯은 것은 모두 관아의 아전들과 좌수 윤동창(尹東昌)이 지어낸 말'이라 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1640년(인조 18) 12월 11일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그는 세태를 따르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으며, 그러다 벼슬을 잃는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벼슬길이 멀면 때로는 부임하지 않기도 했고, 부임했다가도 사직서를 내고 바로 돌아오기도 하여 관직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는데, 부모의 나이가 고령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목에 의하면 그는 온세상이 명예를 다투고 세력을 좆는데 어찌하여 대는 우물쭈물하다가 용납되지 못하였는가 하니 나는 천성이 할수도 없지만 하려 하지도 않는다 하였다.[1] 그는 과부가 된 늙으신 큰어머니를 어머니 섬기듯이 섬겼으며, 사촌 형이 죽은 뒤에 가난으로 고생하는 서출의 딸이 둘 있었는데, 모두 비용을 대 시집보냈다. 그 밖의 친척들 가운데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계를 돌봐주었다.

1641년(인조 19) 5월 비변사 사록이 되었다가 신병을 이유로 출사하지 않다가 정순(呈旬)을 청하자, 비변사의 논계를 받고 체직되었다. 5월 9일 다시 비변사가 그가 사록직을 더러운 직책으로 생각한다며 탄핵, 파출되었다. 뒤에 복직하여 사복시첨정춘추관기주관이 되었다.

그는 오락을 좋아하지 않고 글을 좋아하여 항상 손에서 서책을 놓지 않았으며, 일이 없다면 독서로 소일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사복시첨정춘추관기주관으로 재직 중 1642년(인조 20) 모친상을 당했는데 3년상을 치루던 중 너무나 슬퍼하여 병에 걸려 누적되어 몸이 수척해지고, 1643년(인조 21년) 10월 17일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후편집

묘갈명은 미수 허목(許穆)이 찬하였고, 뒤에 (贈)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처음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사동(寺洞, 절골부락) 광주 관아 남쪽 산에 장사하였다. 그가 죽고 3년 뒤에 둘째아들인 이가우(李嘉雨)도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 다시 1667년(현종 8) 부인 전주이씨가 사망하자 광주군 언주면 신원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이지방의 묘소 왼쪽 언덕에 안장하고 부인 전주이씨를 합장했다. 그뒤 20세기에 와서 1995년 10월 19일 서울시 도시계획 확장으로 다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절골의 선영 근처로 이장하였다.

1995년 10월 9일 이장 시 구 묘소에서 넷째아들 이서우가 제작 매설한 지석 8매 중 3매가 발견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 외할아버지 : 정욱(鄭彧, 1527년 - 1570년)
  • 외할머니 : 순흥안씨(順興安氏), 별좌 안영우(安英祐)의 딸, 외조부 정욱(鄭彧)의 본처
  • 외할머니 : 창원황씨(昌原黃氏), 황윤규(黃潤奎)의 딸
    • 이모부 : 신언(愼言)
  • 장인 : 이경유(李慶裕, 1562년 - 1620년, 효령대군의 7대손, 병마절도사 역임)
  • 사돈 : 한영(韓詠, 1580년 - 1624년)

평가편집

권시중에 의하면 그는 예안현감 재직 시 강직하고 과감하여 결단력이 있었다. 영이 엄중하여 아랫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물러날 때에 모든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고 더 있기를 바랬다 한다.[13]

계암 김령(溪巖 金土+令)은 '예안 현감 이경항(李慶恒)이 처음에 부임했을 때는 치정에 대한 명성이 아주 자자했다. 조금도 잘못을 범하지 않았으며 간사한 아전들을 위엄으로 통제했다. 이 때문에 현에서는 읍민들의 마음이 쏠려 떠날 때 도로를 가로막는 일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우리 읍의 전임 수령 이경항(李慶恒)은 얼음을 채취할 때 민간에 역(役)을 부과하지 않고 지난 분기 내의 미수질(未收秩)을 기준으로 부과했기 때문에 미수질 장정 1명당 얼음 2정(丁)씩을 납부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남아돌아서 질중(秩中)에 고루 역을 부과하지 않고 그 장부를 불살라 버렸다. 지금 수령은 미수질 장정 1명당 얼음 6정씩 납부하라고 하니, 탐욕스럽고 비루하기가 날로 심하다. 아전들과 읍민들이 그를 큰 도적이라고 부른다.'는 평을 남겼다.

예안현감 재직 시 도 관찰사, 병마절도사, 사신 등이 올 때 접대하는 폐단을 없앴다 한다. 계암 김령은 그가 예안현감 재직 시 '감사가 매달 20일 이후에 우리 고을로 오는데, 이바지할 찬거리를 민간에서 거두지 말고 관에서 스스로 마련하도록 하였다. 전에는 크고 작은 사신과 빈객이 방문하면, 온갖 물목을 백성에게 내도록 요구하여 이미 고질적 폐단이 되었다. 이경항(李慶恒)이 비로소 중지시켰으나, 양원(梁榞)이 다시 되살려 그 폐단이 더욱 심하였다.' 하였다. 김령은 전임 수령인 이 군(李君, 이경항)은 병사(兵使)가 장차 올 때에 미리 관아의 하인들에게 해산물을 사오게 하여 민간에 번거롭게 하지 않았었다고도 하였다.

기타편집

그의 집 여종 하나가 부인 전주이씨의 친정 서출 동생과 사통하여 자식 몇 명을 낳았으나 가난하여 속량하지 못하자, 부인 전주이씨는 노비문서를 내주었다 한다.

둘째아들 이가우(李嘉雨)는 성암 김효원(省菴 金孝元)의 증손녀이자 동명 김세렴(東溟 金世濂)의 딸 일선김씨와 결혼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이가우는 반계 유형원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유형원은 그를 추모하는 이자시전을 썼고, 채유후는 그의 묘지명을 써주었다. 이가우의 딸은 욱헌(旭軒) 정익(鄭木+益)의 아들 정중태(鄭重泰)와 혼인하였다.

각주 및 참고자료편집

  1. 첨정이공묘갈명, 미수기언
  2. 광해군일기 104권, 1616년(광해군 8년, 명 만력 44년) 6월 29일 무진 1번째기사, "죄인 전 감찰 유회·허통·이경림 등이 진술하다"
  3. 승정원일기 인조 1년 계해(1623) 4월 11일(경오) 4번째 기사, "정찬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4.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이경항 편
  5. 승정원일기 인조 6년 무진(1628) 1월 3일(을축) 10번째기사, "정국에서 죄인 이계선 등을 나수하였다"
  6. 유생들의 명부. 유적에서 삭제되는 것을 선비로서의 치욕으로 여겼다.
  7. 인조실록 19권, 1628년(인조 6년, 명 천계 8년) 12월 25일 辛亥 3번째기사, "우승지 이경용을 황해 감사로 삼다"
  8. 승정원일기 인조 7년 기사(1629) 4월 10일(을미) 02번째기사, "정사가 있었다"
  9.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정축(1637) 6월 9일(병오) 06번째기사, "본도의 감사 김세렴과 상피 혐의가 있는 금교 찰방 이경항을 개차할 것을 청하는 이조의 계"
  10. 안동문화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國譯 永嘉誌 宣城誌)》 (안동문화원, 2007)
  11. 호주문집 7권 이군묘갈명
  12. 익양군 회-용천군 이수한(龍川君 李壽朋+鳥)-기성군 이현(箕城君 李俔)-평림군 이지윤(平林君 李祉胤)-이후석(李後奭)-이서규
  13. 안동문화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國譯 永嘉誌 宣城誌)》 (안동문화원, 2007)

관련 항목편집

관련 서적편집

  • 안동문화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國譯 永嘉誌 宣城誌)》 (안동문화원, 2007)
  • 서울대학교 출판부, 《국조인물고 (國朝人物考) 中권》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8)
  • 국역선성지발간추진위원회, 《국역) 선성지》 (국역선성지발간추진위원회, 1993)

참고 문헌편집

  • 사마방목
  • 인조실록
  • 대동야승
  • 연려실기술
  • 국조방목
  • 국조인물고
  • 계암일록
  • 선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