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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항(李慶恒, 1601년 1월 12일 - 1643년 10월 17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으로 자(字)는 사상(士常)·중구(中久)이고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1613년(광해군 6)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617년(광해군 7) 박사제자로 등용되었으며 이후 음보로 출사하여 직장, 통사랑에 이르렀다. 임숙영(任叔英)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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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항
李慶恒
작가 생애
출생 1601년 1월 12일
조선 한성부
사망 1643년 10월 17일(1643-10-17) (42세)
조선 한성부
직업 문신, 시인, 학자, 정치인, 서예가
국적 조선
학력 1627년 식년문과 을과 급제
종교 유교(성리학)
작가 정보
필명 자(字)는 사상(士常)·중구(中久)
가족 관계
부모 이길남(부)
하동 정씨 부인(모)
배우자 전주 이씨 부인
자녀 장남 이덕우, 차남 이가우, 삼남 이희우, 사남 이서우, 장녀 이씨, 차녀 이씨
친지 할아버지 이성헌, 증조부 이감, 사돈 김세렴, 사돈 유형원
주요 작품
영향
기타 정보

1626년 명경과(明經科)로 발탁되었고, 162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권지성균관학유가 되고 이듬해 성균관학유가 되었다가 전적(典籍)·감찰(監察)·형조 좌랑(刑曹佐郞)·공조 좌랑·종묘서령을 역임하는 한편, 외직으로는 신계 현령(新溪縣令), 예안(禮安)·결성(結城)의 현감 및 경상도, 함경도도사(都事)를 지냈다. 그는 가난하고 형편이 없는 친척들도 자신이 직접 보살펴주었다. 모친의 3년상을 치루던 중 에 걸려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한때 그가 북인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고 이는 숙종 때에 가서도 넷째아들 이서우가 출사할 때 남인청남 허적 등에 의해 의혹이 다시 제기되었다. 후에 자헌대부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송곡 이서우(李瑞雨)의 아버지이다.

목차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자(字)는 사상(士常), 중구(中久)이고 본관은 우계이다. 이감(李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주서(注書) 이성헌(李成憲)이고, 아버지는 선무랑을 지내고 승정원좌승지증직된 이길남(李吉男)이며, 어머니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영의정 문성공 정인지의 4대손이며 호조판서 하남부원군 정숭조(鄭崇祖)의 손자로 군수, 도사를 지낸 정욱(鄭彧)의 딸이다.

아버지 이길남은 본명은 영남이고 자는 석보였는데 뒤에 길남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소암 임숙영의 문하에서 글과 학문을 배웠다.

부인은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7대손이며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경유의 딸이자, 병마절도사 제주목사를 지낸 이경록의 조카딸이다. 인조반정의 공신 이서는 이경록의 아들로 그의 4촌 처남이 된다. 그의 서처남은 이기축인데 시인인 문무자 이옥의 선조가 된다.

위로는 형 이경복(李慶復)이 있었는데 그가 과거에 합격할 무렵까지는 생존해 있었으나, 형 이경복은 한확의 장남 한치인(韓致仁)의 7대손 교리 한영(韓詠)의 딸과 결혼했으나 자녀를 얻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며 기송(암기)에 능하였다. 미수 허목(許穆)에 의하면 그는 세속을 따르려 들지 않았고, 쉽게 남의 말을 따르면서 휩쓸리지 않았다고 한다. 소암 임숙영(任叔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13년(광해군 6년) 식년시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에 식년시 진사시에도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되었다.

관료 생활편집

1613년(광해군 6년) 생원시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생원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이후 잠시 직장(直長)을 지냈다가 1616년(광해군 8년) 6월 한때 해주목사 최원행(崔源行)의 역모 사건으로 해주옥사가 발생했을 때 잠시 연루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처벌받지 않았다. 1617년(광해군 9년) 박사제자로 등용되었으며 이후 음보로 출사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그는 관직에 있을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당색으로는 대북 계열이었으나 임숙영의 문하생이었고, 이경항의 처사촌은 인조반정 공신인 완풍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였으므로 불이익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인조 반정 직후 그가 이이첨의 문하에 드나들었다는 혐의를 받아 유생들이 그를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었다가, 처사촌인 이서(李曙)가 편지로 관학 유생들을 협박, 유벌을 중단케 하였다.

1626년 명경과(明經科)로 발탁되었고[1] 통사랑((通仕郞)으로 재직 중[2], 162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권지성균관학유로 등용되었으며, 1628년(인조 6) 성균관학유가 되고, 1629년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형조정랑, 공조좌랑, 공조정랑, 군기시 첨정, 사복시 첨정, 종묘서령(宗廟署令) 등의 내직을 지내다가 외직으로 신계현령, 북청판관, 예안현감(縣監), 결성현감, 경상도 도사, 함경도 도사 등을 지냈다.

1628년(인조 6) 12월 25일 형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임숙영의 문인이었으나 대북 계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하여 서인들의 비판을 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대북 계열에 속한 그의 과거 전력이 문제시 되어 유적[3] 삭제의 대상에 회부되었으나, 처사촌인 이서(李曙)가 편지로 성균관에 압력을 행사하여 무마되었다.[4]

1637년 7월 예안현감에 부임했으나, 1638년 2월 스스로 사직서를 올리고 물러났다.[5]

그는 세태를 따르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으며, 그러다 벼슬을 잃는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벼슬길이 멀면 때로는 부임하지 않기도 했고, 부임했다가도 사직서를 내고 바로 돌아오기도 하여 관직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는데, 부모의 나이가 고령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목에 의하면 그는 온세상이 명예를 다투고 세력을 좆는데 어찌하여 대는 우물쭈물하다가 용납되지 못하였는가 하니 나는 천성이 할수도 없지만 하려 하지도 않는다 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그는 과부가 된 늙으신 큰어머니를 어머니 섬기듯이 섬겼으며, 사촌 형이 죽은 뒤에 가난으로 고생하는 서출의 딸이 둘 있었는데, 모두 비용을 대 시집보냈다. 그 밖의 친척들 가운데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계를 돌봐주었다.

1641년(인조 19) 5월 비변사 사록이 되었다가 신병을 이유로 출사하지 않다가 정순(呈旬)을 청하자, 비변사의 논계를 받고 체직되었다.

그는 오락을 좋아하지 않고 글을 좋아하여 항상 손에서 서책을 놓지 않았으며, 일이 없다면 독서로 소일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사복시첨정춘추관기주관으로 재직 중 1642년(인조 20) 모친상을 당했는데 3년상을 치루던 중 너무나 슬퍼하여 병에 걸려 누적되어 몸이 수척해지고, 1643년(인조 21년) 10월 17일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묘갈명은 미수 허목(許穆)이 찬하였고, 뒤에 (贈)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추증되었다.

사후편집

처음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사동(寺洞, 절골부락) 광주 관아 남쪽 산에 장사하였다. 그가 죽고 3년 뒤에 둘째아들인 이가우(李嘉雨)도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 다시 1667년(현종 8) 부인 전주이씨가 사망하자 광주군 언주면 신원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이지방의 묘소 왼쪽 언덕에 안장하고 부인 전주이씨를 합장했다. 그뒤 20세기에 와서 1995년 10월 19일 서울시 도시계획 확장으로 다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절골의 선영 근처로 이장하였다.

1995년 10월 9일 이장 시 구 묘소에서 넷째아들 이서우가 제작 매설한 지석 8매 중 3매가 발견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 외할아버지 : 정욱(鄭彧, 1527년 - 1570년)
  • 외할머니 : 순흥안씨(順興安氏), 별좌 안영우(安英祐)의 딸, 외조부 정욱(鄭彧)의 본처
  • 외할머니 : 창원황씨(昌原黃氏), 황윤규(黃潤奎)의 딸
    • 이모부 : 신언(愼言)
  • 장인 : 이경유(李慶裕, 1562년 - 1620년, 효령대군의 7대손, 병마절도사 역임)
  • 사돈 : 한영(韓詠, 1580년 - 1624년)

평가편집

예안현감 재직 시 강직하고 과감하여 결단력이 있었다. 영이 엄중하여 아랫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물러날 때에 모든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고 더 있기를 바랬다 한다.[8]

기타편집

그의 집 여종 하나가 부인 전주이씨의 친정 서출 동생과 사통하여 자식 몇 명을 낳았으나 가난하여 속량하지 못하자, 부인 전주이씨는 노비문서를 내주었다 한다.

둘째아들 이가우(李嘉雨)는 성암 김효원(省菴 金孝元)의 증손녀이자 동명 김세렴(東溟 金世濂)의 딸 일선김씨와 결혼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이가우는 반계 유형원과 절친하게 지냈으며, 유형원은 그를 추모하는 이자시전을 썼고, 채유후는 그의 묘지명을 써주었다. 이가우의 딸은 욱헌(旭軒) 정익(鄭木+益)의 아들 정중태(鄭重泰)와 혼인하였다.

각주 및 참고자료편집

  1. 첨정이공묘갈명, 미수기언
  2. 국조방목
  3. 유생들의 명부. 유적에서 삭제되는 것을 선비로서의 치욕으로 여겼다.
  4. 인조실록 19권, 1628년(인조 6년, 명 천계 8년) 12월 25일 辛亥 3번째기사, "우승지 이경용을 황해 감사로 삼다"
  5. 안동문화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國譯 永嘉誌 宣城誌)》 (안동문화원, 2007)
  6. 호주문집 7권 이군묘갈명
  7. 익양군 회-용천군 이수한(龍川君 李壽朋+鳥)-기성군 이현(箕城君 李俔)-평림군 이지윤(平林君 李祉胤)-이후석(李後奭)-이서규
  8. 안동문화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國譯 永嘉誌 宣城誌)》 (안동문화원, 2007)

관련 항목편집

관련 서적편집

  • 안동문화원, 《국역 영가지.선성지합본(國譯 永嘉誌 宣城誌)》 (안동문화원, 2007)
  • 서울대학교 출판부, 《국조인물고 (國朝人物考) 中권》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8)

참고 문헌편집

  • 사마방목
  • 인조실록
  • 대동야승
  • 연려실기술
  • 국조방목
  • 국조인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