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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달 (1934년)

생애편집

경상북도 영덕군에 있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1] 김영달의 가족은 가난 때문에 1937년만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학교도 다닐 수 없을 만큼 극빈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야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소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김영달은 이때 나이가 10대 중반이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여 참전하였다. 어린 나이 때문에 잠시 대기한 끝에 1951년 8월에야 참전할 수 있었고 조선인민군 제12 사단 중기 중대원이 되었다. 전쟁 중인 1953년 7월에는 조선로동당에도 입당하였다.

1957년에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었고 전향하지 않아 비전향 장기수가 되었다. 김영달은 대구형무소에 처음 수감되자 미인계를 동원한 전향 공작이 시도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대전교도소를 거쳐 1989년에 출소할 때까지 약 30년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그 사이 한 차례 만기 출소했으나 사회안전법 제정으로 재수감되었기 때문이다.

출소 후 1991년충청남도 논산시에서 만나 혼인한 부인과 함께 전라북도 부안군에 정착하여 생활하였다.[2] 사진작가 신동필의 작품 모델이 되어, 난초를 기르는 모습이 《우리 다시 꼬옥 만나요》에 실리기도 했다.[3]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거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 이때 부인은 대동하지 못하여 헤어지게 되었다.[4], 송환 후에는 평양에 정착하였고 다른 장기수들과 함께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참고자료편집

  • 김동기 외 14인 (2003). 〈신념의 기둥과 인생 (김영달)〉. 《신념과 의지의 강자들 - 비전향 장기수들의 수기 5》. 평양: 평양출판사. 

각주편집

  1. “비전향장기수 김영달에게 생일 일흔돐상”. 조선중앙통신. 2004년 3월 18일. 
  2. 최경준 (2000년 8월 26일). "아내 두고 떠나는 내 맘이 좋을 리 없지" - 북누리 곳곳마다 남누리 심으소서-북 송환 장기수 1”. 오마이뉴스. 2008년 9월 3일에 확인함. 
  3. “사진집에 담은 비전향장기수들의 모습”. 연합뉴스. 2002년 1월 16일. 
  4. “송환을 하루 앞둔 비전향 장기수 - 북악 파크텔에서 남쪽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 연합뉴스. 2000년 9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