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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현재: 성남시 또는 서울특별시 강남구)의 가난한 묘지기 집안에서 태어났다. 1950년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신발을 사서 신어 본 기억이 단 한 번 뿐일 정도로 살림이 가난하여 집안이 쓸쓸한 환경에서 힘겹게 자랐다. 학교는 학비를 스스로 벌어서 고생하면서 겨우 다닐 수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로 조선인민군서울을 점령하였을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였다. 처음에는 군당의 선전부원으로 일하다가 조선인민군이 후퇴하자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월북하였다.

1956년에는 조선인민군에서 제대하고 평양김책공업종합대학에 입학하였다. 김책공대 전기공학부를 졸업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성에 소속된 영화촬영소에 기술부장으로 배치받아 영화 부문에서 활동하였다.

1960년대에 공작원으로 선발되어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었고 전향하지 않아 비전향 장기수가 되었다. 김은환은 재판 과정에서 간첩 혐의를 부인하고서 통일을 이루려고 힘쓰고자 남하하였다고 밝혔다. 총 수감 기간은 1969년에서 1999년까지 약 30년이다.

1999년 2월에 대전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1] 김은환의 가족은 1950년에 좌익 가족이라 하여 모두 살해되어 출소 후에도 돌봐줄 사람은 없었다. 경기도 과천시에서 다른 출소 장기수들과 헌책방을 함께 운영하였다.[2]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거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고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미술가동맹에 소속된 서예가로서 활동하였다.[3]

참고자료편집

  • 김만수 외 12인 (2003). 〈신념과 의지의 강자를 키운 품 (김은환)〉. 《신념과 의지의 강자들 - 비전향 장기수들의 수기 4》. 평양: 평양출판사. 

각주편집

  1. 정경렬 (1999년 2월 25일). “[장기수 8명] 30-40년 만에 본 세상…`만남의집'에 거처”. 조선일보. 2008년 9월 15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 조성곤 (1999년 5월 20일). “장기수에서 생활인으로”. 《한겨레21》 (제258호). 
  3. 함보현 (2006년 9월 1일). “북송된 ‘비전향장기수’들… 어떻게 살고있을까”. 한겨레 (연합뉴스 인용). 2008년 9월 15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