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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편집

여흥 민씨는 민칭도(閔稱道)를 시조로 한다. 백운거사 이규보가 민식(閔湜)에게 올린 시 속의 "세가전벌열(世家傳閥閱) 계출(系出) 비후현(費候賢)" (예전부터 대대로 벌열로 내려와 조상에는 비후(민자건) 같은 분을 모셨네)라는 문장에 근거하여 민칭도가 공자의 10제자 가운데 하나이자 노나라의 학자인 민자건(閔子騫)의 후손이며, 고려에 사신으로 들어와 귀화하여 여흥에 정착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또 경기도 여주 향리에 있는 영월루 민굴(閔窟 마암굴)에서 나온 것이 여흥 민씨의 시초라는 설도 있다. 두개의 민씨 유래 가설 모두 명확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특히 중국동래설은 그저 이규보가 지은 시 속의 문장을 확대해석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역사 기록에 고려 현종과 덕종 시절의 대신인 민가거와 같이 시조 민칭도(閔稱道) 이전의 민씨들이 등장하지만, 지금의 여흥 민씨와 같은 민씨인지는 불확실하다. 현재의 여흥 민씨 족보는 단지 민영모(閔令謨)가 1138년(인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동중서시랑평장사(同中書侍郞平章事) 판리부사(判吏部事)와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역임하자 그의 증조부인 민칭도(閔稱道)를 시조로 추대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4세조 민영모(閔令謨)까지는 아들 하나씩만 전해며, 민영모로부터는 보첩이 자세하다. 민영모고려 인종 16년(1138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태자태사에 올랐고, 민영모의 장남 민식(閔湜)은 고려 명종 때 과거 급제 후 형부상서를 지냈으며, 차남 민공규(閔公珪)는 판병부사와 태자소보에 지내며, 그 둘의 후손들이 다수의 고위 관료를 지속적으로 배출함으로써 고려 후기에 본격적으로 명문세족으로 성장하였다. 대체로 문반직을 역임하며 문반 사대부 가문으로서 위상을 갖추었으며, 왕실과 혼인이 가능한 재상지종 가문 중 하나로 꼽혔다.

민식(閔湜)의 증손 민지(閔漬)가 고려 원종 7년(1266년)에 문과에 올라 추성수정성보리공신이 되고 여흥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관향을 여흥(驪興)으로 삼았다. 그 이전에는 황려 민씨(黃驪閔氏)라고 불리었는데, 황려(黃驪)는 여흥(驪興)의 옛 이름이다.

조선시대편집

가계별로는 민식의 가계가 민공규의 가계보다 관료배출수나 고위직 역임자의 수에서 우세했다. 조선 전기에는 각 가문의 분파가 확대되며 내부에서 가계가 번성하는 파와 그렇지 못한 파로 확연히 구별되었고, 일반적으로 여흥민씨를 거족이라고 칭할 때 정말로 거족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가문은 적어도 조선 전기에 한정해서 보면 구체적으로 민식의 계열에서는 증손 민지의 장자 민상정 가계와 차자 민상백 가계가, 민공규 계열에서는 증손 민종유의 장자 민적의 가계가 이에 해당된다. 특히 민적의 3자 민변-민제(문도공파)로 이어지는 가계는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조선 전기에서 여흥민씨 가문 가운데 가장 명문으로 여겨진다. 조선 전기 여흥민씨 가문은 이들 가계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과거급제자와 고위관료의 배출, 공신책봉, 왕실과의 통혼으로 외척으로서의 위상 등 권력의 핵심에 근접하는 요인이나 자손의 번성 등의 요건을 두루 갖춤으로서, 조선 건국 이후에도 여전히 고려 후기 이래의 명문 거족가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왔다.

계열별로 보면, 과거급제자수는 민식-민지의 계열이 민공규-민종유의 계열보다 압도적 다수를 배출하였으나, 3품 이상의 고위직자의 배출은 오히려 민종유 계열이 월등히 우세하였는데 이는 조선조 동안 배출된 4명의 민씨 왕비 모두 민공규-민종유 계열 출신이었기에 민공규-민종유 계열 인물들의 고위직 진출 요인에 과거 보다는 왕비 배출로 인한 인척 등용이 더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통혼권에서도 조선 건국 이후 여흥민씨 가문 민공규-민종유 계열은 왕비의 외조부가로서 왕실과 연결되어 가문의 위상을 높여 갔고, 민식-민지 계열 또한 원경왕후 민씨의 남편인 태종의 즉위로 인해 왕실의 외척가문으로서 가문의 위상이 급부상하였다. 그러나 왕비로 간택된 민제 계열 출신 외손녀들의 불운이 이어지고 또한 태종의 왕권강화책과 정치운영방식에 따른 외척세력 제거에 의해 여흥민씨 가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민제의 네 아들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면서 조선 전기 여흥민씨 가문의 위세는 잠시 추락하였으나, 세종 중반 이후 완전히 복권되어 그후로도 지속적으로 왕비를 배출했다.[1]

조선시대 동안 종묘배향공신 6명, 문과 급제자 242명, 2명의 왕비, 2명의 황후, 12명의 상신(相信)을 배출하였다.

인물편집

항렬자편집

대동 항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