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

고대 타밀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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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국(타밀어: சோழர்நாடு 촐레나두), 약칭 촐라(타밀어: சோழர் 촐레)는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1279년까지 남인도타밀라캄 지역에 존재하던 타밀계 왕국으로, 체라, 판디아와 함께 타밀 3왕국 중 하나인 국가이다.

Flag of Chola Kingdom.png
촐라국
சோழர்நாடு

기원전 3세기 ~ 서기 1279년
국기
왕국(기원전 3세기 ~ 서기 3세기)
소왕국(서기 3세기 ~ 848년)
제국(848년 ~ 1279년)
Rajendra map new.svg
수도우라이유르
(기원전 3세기 ~ 서기 1세기)
카베리파타남
(1세기 ~ 3세기)
탄자부르
(848년 ~ 1025년)
강가이콘다 촐라푸람
(1025년 ~ 1279년)
정치
정부 형태전제군주제
벤탄(왕)
120년 ~ 210년
차크라바르티갈(황제)
850년 ~ 870년
985년 ~ 1014년
1014년 ~ 1044년
1246년 ~ 1279년

카리칼라

비자얄라야
라자라자 1세
라젠드라 1세
라젠드라 3세
국성촐라
역사
 • 건국기원전 3세기
 • 전기기원전 3세기 ~ 250년
 • 중기848년 ~ 1070년
 • 후기1070년 ~ 1279년
 • 멸망1279년
지리
위치타밀라캄
인문
공용어타밀어, 산스크리트어[1]
공용문자타밀 문자
민족타밀족

종교
국교힌두교
기타 종교불교, 자이나교
주신시바, 비슈누
기타
현재 국가인도의 기 인도
스리랑카의 기 스리랑카
몰디브의 기 몰디브
인도네시아의 기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의 기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기 싱가포르

초기에는 체라, 판디아와 함께 타밀라캄의 패권을 겨루었으며 카리칼라때 전성기를 맞이한 후 서기 3세기경에 쇠퇴하였으나, 9세기 후반부터 비자얄라야에 의해 촐라 제국(타밀어: சோழ சாம்ராஜ்யம் 촐레 삼라젬)으로서 다시 부활하여 13세기 초까지 남아시아 남부에서 동남아시아까지 세력을 떨치는 해상 제국으로서 번영하였다.[2] 라젠드라 1세에 의한 갠지스 원정과 스리비자야 정벌은 촐라 제국의 대표적인 정복 활동이었으며,[3] 특히 스리비자야의 막강한 해군을 격파하는 등 촐라 제국은 당시 남아시아·동남아시아에서 최강의 해상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1010년부터 1153년까지, 촐라 제국은 남쪽으로는 몰디브스리랑카, 북쪽으로는 안드라프라데시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는데,[4] 라자라자 1세는 스리랑카 섬아누라다푸라 왕국인도양몰디브 제도를 정벌하였으며, 라젠드라 1세는 갠지스강 유역과 동남아시아스리비자야를 정벌하였다.[5] 그러나 1251년부터 판디아 왕국이 부흥하기 시작하며 촐라 제국은 점점 쇠퇴하였고, 결국 1279년에 판디아 왕국에 의해 멸망되면서 촐라 제국은 막을 내렸다.[6]

촐라 시대에 타밀의 예술, 종교, 음악과 문학 등은 탁월한 발전을 이룩했다.[7] 팔라바 왕국 초기에 정형화되기 시작한 타밀 문화를 발전시켜 형성된 촐라 문화는 지금의 타밀 문화의 고유한 특징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8] 팔라바식 성전 건축의 전통을 유지해 나갔으며 드라비다식 사원 형태 설계에 큰 기여를 하였다.[9] 웅장한 사원 형태의 기념비적인 건축물과 석조와 청동으로 제작한 조각품들은 인도 역사상 실현된 적 없는 기교에 이르렀다. 타밀 문학 또한 촐라 제국 시대에 황금기를 맞이하였는데, 대부분의 문헌은 시 형태로 서술되었으며 수많은 문인과 학자가 군주의 보호 아래 자신들의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촐라 제국은 중국의 여러 제국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지역 문화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10] 촐라 제국의 예술 학교가 동남아시아로 퍼지며 촐라식 힌두 문화가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다.[11][10]

기원편집

촐라는 초다(Choda)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12] 고대 타밀어 문학과 비문의 언급에서 그 고대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중세 후기 촐라는 긴 고대의 혈통을 주장하였다. 서기 150년경 초기 상감 문학[a]에 언급된 바로는 왕조의 초기 왕이 서기 100년 이전에 앞서 존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기원전 3세기의 아소카의 칙령에서 촐라는 남쪽에 존재하는 이웃 국가 중 하나로 언급되었다.[13]

7세기 이전의 촐라에 대한 문헌 자료는 거의 없으며, 사원에 대한 비문을 포함한 역사적인 기록은 그 이후의 것이다. 지난 150년 동안 역사가들은 고대 타밀어 상감 문학, 구전 전통, 종교 문헌, 사원 및 동판 비문과 같은 다양한 자료에서 주제에 대한 중요한 지식을 수집하였다. 초기 촐라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주요 사료는 상감 시대의 초기 타밀어 문학이다.[b] 또한 에리트레아해의 페리플러스(Periplus Maris Erythraei)와 후대의 지리학자 프톨레미는 촐라국의 마을, 항구 및 상업에 대한 간략한 정보들을 남겼다. 서기 5세기에 쓰여진 불교 문헌 마하밤사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일어난 실론과 촐라 주민들 사이의 많은 갈등을 설명한다.[15] 아소카의 기둥(기원전 273 년에서 기원전 232 년까지 새겨 짐) 비문에서 촐라는 아소카에게 종속되지는 않지만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있는 왕국들 중 하나라고 언급된다.[c]

정론은 촐라가 체라 및 판디아와 같이 지배층 또는 태고의 일족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주석가인 파리메라자가르는 "고대 혈통(예 : 촐라, 판디아 및 체라)을 가진 사람들의 자비는 의미가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관대합니다"라고 말했다. 촐라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다른 이름은 질리(கிள்ளி), 발라반(வளவன்), 셈비얀(செம்பியன்) 및 체니이다.[17] 질리는 아마도 타밀 단어 킬(கிள்)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단어는 땅을 파거나 쪼개는 것을 의미하며 땅을 파는 사람이나 일꾼의 생각을 전달한다. 이 단어는 종종 네둔질리, 날란질리 등과 같은 초기 촐라 인명의 필수 부분을 형성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점차 사용이 줄어들었다. 발라반은 아마도 다산과 관련이 있으며 비옥한 국가의 소유자 또는 통치자를 의미하는 " 발람 "(வளம்)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셈비얀은 일반적으로 시비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초기 촐라의 전설에서 전설적인 영웅은 매를 쫓아 비둘기를 구하기 위해 희생하며 자타카 불교 이야기 중 시비 자타카의 주제를 구성한다.[18] 타밀어 사전에서 촐라는 소아지 또는 사아이를 의미하며, 판디야 또는 옛 나라의 라인에서 새로 형성된 왕국을 나타낸다.[19] 체니는 타밀어로 머리를 의미한다.

역사편집

전기 (기원전 3세기 ~ 서기 250년)편집

 
기원전 300년경 타밀라캄의 촐라, 판디아, 체라

촐라의 기원을 신화적으로 설명한 고대 타밀어 문학상감 문학에 따르면 촐라는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가문인 수리야밤사의 후손으로 여겨진다.[20] 상감 문학에 기록되어 있는 최초의 촐라 국왕은 벨 벨 타다카이 페루비랄킬리라는 인물이었다. 또 다른 촐라 국왕으로 일라체트첸니가 기록되어 있으며, 일라체트첸니는 왐퍼와 바두가르를 이긴 사람으로 아카나누루 곡에서 칭송받고 있다.[21]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3세기경 타밀족 계통의 씨족인 촐라족이 인도 남부를 흐르는 카베리 강 유역에 우라이유르를 수도로 하여 촐라국을 세웠다. 촐라는 판디아, 체라와 함께 타밀라캄에 존재하던 3개의 군주국으로서,[22] 나머지 군주국인 판디아, 체라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자주 충돌하였다. 또한 초기 스리랑카의 역사에 대해 기록된 역사서인 마하밤사에 따르면 엘라란이라는 이름의 촐라 왕자가 기원전 205년부터 기원전 161년까지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데,[23] 이를 보아 스리랑카섬에도 영향력을 떨치던 것으로 보인다.

전기 촐라의 전성기를 이끈 왕은 서기 120년부터 210년까지 재위했다고 전해지는 카리칼라 왕으로, 그는 일라체트첸니의 아들이었다.[24] 카리칼라 촐라는 티루마발라반 또는 페루발라탄이라는 이명으로 알려져 있다. 카리칼라의 아버지는 그가 아직 태아로 있을 때 사망하였으며, 그는 태아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다. 카리칼라라는 단어는 탄 다리를 의미한다.

카리칼라는 촐라 왕조를 칸치푸람카베리 강 유역으로 확장하도록 이끌었다.[25][26] 후기 역사가들은 그의 성공과 업적이 크게 과장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왕좌에 대한 장자권을 잃었고 수년 동안 투옥되었다. 그들은 카리칼라가 감옥에서 탈출하여 권력을 장악했다고 묘사한다. 카리칼라는 감옥에서 교도관을 죽임으로써 탈출했으며 점차 명성과 영광을 얻었다. 서기 130년경 카리칼라 촐라는 베니 전투에서 체라 국왕 페루체랄라탄과 싸웠다. 상감 문학가는 베니 전투에서 페루체랄라탄이 카리칼라가 뒤에서 쏜 화살에 맞은 것을 치욕으로 여겨 전투가 끝난 이후 자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어쨋든 베니 전투에서 체라·판디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11 벨리르들을 물리친 카리칼라의 통치는 오래 지속되었다. 그는 촐라국의 수도를 카베리파타남으로 천도하였으며, 아누라다푸라 왕국에서 잡아온 포로 1만 2천여명을 동원하여 카베리 강에 160km에 이르는 거대한 제방을 쌓아 관개농사를 짓도록 하는 등 전기 촐라를 크게 성장시켰는데, 이 제방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댐이었다. 또한 당시 수도였던 카베리파타남에서 이 같은 거대한 부두의 유적이 발굴되면서 이곳이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카리칼라 왕 사후 촐라는 체라·판디아 연합군의 군세에 밀리며 점차 쇠퇴하였으며, 서기 250년경 판디아에 점령당하면서 전기 촐라는 막을 내리게 된다.

암흑기 (3세기 ~ 848년)편집

상감 시대 말기인 서기 3세기부터 판디아와 팔라바가 타밀나두를 지배하기까지 약 3세기에 걸친 과도기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타밀나두주 북부에서 새로이 출현한 타밀계 왕조인 칼라브라는 타밀 국가를 침공하여 촐라를 비롯한 기존 왕국들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통치하였으며,[27][28][29] 6세기에 팔라바판디아에 의해 추방되었다.[30][31] 9세기에 비자얄라야가 즉위할 때까지 이어지는 3세기 동안 촐라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32] 아마도 당시 촐라의 세력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버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4세기 초, 칼라브라의 왕인 아츄타 칼라팔란이 우크라푸람에서 카베리 강둑을 통치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치세 동안 촐라 영토의 지배권을 두며 칼라브라팔라바 간의 경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탄자부르 안팎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6세기부터 9세기까지 3세기 동안 무타라이야르라는 이름의 왕조가 상감 시대 촐라의 영토에 속했던 탄자부르를 통치하였으며,[33] 이들은 848년에서 851년 사이에 탄자부르에서 일랑고 무타라이야르가 비자얄라야에게 생포당하며 멸망하였다. 이 시대의 비문과 문헌에는 촐라 왕이 카베리 강둑에서 계속 살았다고 전해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역사적 정보도 찾아볼 수 없다.

촐라의 세력이 감소하고 판디아 및 팔라바가 북부와 남부로 세력을 확장하던 이 시기에,[34][35] 이 왕조는 자신들보다 더 성공적인 통치하에 있던 경쟁국들에게 피난처와 후원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36][d] 촐라는 우라이유르 인근의 축소된 영토를 계속 통치하였으나, 그 권한은 작은 수준이었다. 판디아와 팔라바는 촐라의 세력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촐라 공주를 혼인 상대로 받아들였는데, 아마도 그들의 명성에 대한 배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e] 이 시기의 수많은 팔라바 비문에는 그들이 촐라 국가의 통치자들과 싸웠다고 언급되어 있으며,[f] 이러한 영향력과 권력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비자얄라야가 우라이유르 주변 지역의 옛 수도에서 명성을 얻을 때까지 그 지역을 완전히 상실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37][39]

칼라브라무타라이야르의 지배로 인해 촐라의 위세가 약화될려고 하자 촐라의 차리칼란 3세는 칼라브라와 무타라이야르를 촐라 영토에서 몰아내고 팔라바 왕 트릴로사나 팔라바를 물리침으로써 톤다이나두를 차지하였으나, 차리칼란 3세 사후인 서기 550년에 팔라바의 왕 심하비슈누에 의해 촐라는 팔라바의 지배하에 놓였다. 이후 한 동안 촐라 왕실은 자신들의 영토인 타밀나두 남부를 떠나 팔라바에 속한 타밀나두 북부와 안드라프라데시 남부로 이주하였다. 차리칼란 3세의 아들인 난디바르마 촐라벤카타말라이 북쪽의 카다파, 찬드라기리, 아난타푸르콜라르 지역과 벤카타말라이 남쪽의 칼라티, 넬로르, 티루파티, 치토르푼가누르 지역을 통치하였으며, 난디바르마 촐라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심하비슈누 촐라는 팔라바와 전쟁을 벌였지만, 그의 후계자들인 순다라난다 촐라타난자야 촐라팔라바국에 항복하였으며, 팔라바, 찰루키아, 동강가 출신의 공주와 결혼하였는데, 이들을 이른바 레나트 촐라라고 부르며, 영토에 존재하던 숲을 벌목하고 넬로르, 치토르, 푼가누르티루파티와 같은 새로운 마을들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기 550년에 카르나타카를 통치한 강가 왕 중 하나인 드루비단 대왕은 우라가푸람을 통치한 차리칼라 촐라의 자손인 촐라 왕 파라마 차티리에의 딸로 일컬어지는 촐라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한편 7세기경에는 오늘날 안드라프라데시주에서 촐라 왕국이 번성하였는데,[37] 이 텔루구 촐라는 상감 시대 초기 촐라의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이들이 초기 촐라족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40] 아마도 타밀 촐라의 한 지파가 팔라바 시대에 북쪽으로 이주하여 판디아와 팔라바의 지배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하였을 가능성이 있다.[g] 639-640년 칸치푸람을 방문한 중국인 순례자 현장은 그 곳에서 수개월 동안 머무르며 텔루구 촐라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쿨리야 왕국"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32][42] 또한 푼니야쿠마라 촐라의 치세에 직접 쿨리야를 방문한 현장은 이들이 촐라 차리칼란 왕조에 속한다고 언급하였으며, 그가 저술한 여행기인 대당서역기에서는 촐라 왕의 영토가 탄야 카다감로부터 남서쪽으로 20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둘레는 480석이며 수도는 2석이라고 언급하였다.[43] 궁극적으로 이 시기의 촐라 왕들은 타밀나두에서 그들의 지배를 다시 확립할 때를 고대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몇 명의 하급 군주와 혼인관계를 맺어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으려 하였다.

중기 (848년 ~ 1070년)편집

8세기경 촐라 지역은 팔라바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촐라 지역의 토후이자 촐라 왕가의 후예인 비자얄라야판디아팔라바 사이의 갈등을 이용해 848년에 탄자부르를 점령하고 수도로 삼은 후 팔라바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면서 촐라 왕국이 다시 부활하였으며, 이후 촐라 제국(타밀어: சோழ சாம்ராஜ்யம்) 시대가 시작되었다.[44] 비자얄라야 사후 촐라의 황제로 즉위한 아디트야 1세는 팔라바 왕조를 멸망시키고 885년에 마두라이에서 판디아를 물리치고 칸나다 국가의 많은 부분을 점령했으며, 서강가 왕조와 결혼 관계를 맺었다. 차기 촐라 황제인 파란타카 1세는 925년에 스리랑카섬을 정벌함으로써 촐라의 남쪽 변방을 강화시켰으며, 949년에 발랄라 전투에서 크리슈나 2세 휘하의 라슈트라쿠타 왕국 군대를 물리쳐 대승을 거두면서 타밀라캄 외의 다른 지역에도 확장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45]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치세는 촐라의 최전성기로서,[10] 이 시기의 촐라는 남쪽의 스리랑카섬몰디브 제도에서부터 북쪽의 고다바리-크리슈나 강 유역, 바트칼의 콘칸 해안, 말라바르 해안(체라 국가). 동남아시아수마트라섬말레이반도까지 진출하였다. 라자라자 촐라 1세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지닌 통치자였으며 전쟁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열의로 통치 임무에 전념하였다. 그는 자신의 제국을 왕실의 통제 하에 촘촘한 행정망으로 통합함과 동시에 지방 자치를 강화하였다. 그는 제국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1000년에 토지 측량을 실시하였으며,[46] 1010년에는 오늘날 남인도 지역의 대표적인 사원들 하나인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을 짓는 등 힌두교 지원에도 힘을 쏟았다.[47] 또한 당시 아라비아 상인들의 주요 거점인 몰디브 제도를 공격해 정복하였으며, 스리랑카섬아누라다푸라 왕국을 정벌해 수도인 아누라다푸라를 파괴하는 등 정복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48] 라자라자 1세는 이외에도 강에 댐 등의 시설 등을 건설하거나 무역 지원이나 광산 및 염전 시설들을 건설하는 등 촐라 제국의 내정에도 힘썼다.

1014년부터 촐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라젠드라 1세는 1017년에 스리랑카섬아누라다푸라 왕국을 정복한 후 아누라다푸라 국왕 마힌다 5세를 생포하였다. 1019년부터 1024년까지는 북쪽의 오디샤를 정복하고 벵골 지역의 팔라 제국을 물리침으로써 갠지스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으며,[49]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025년 타밀나두 지역에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이라는 도시를 건설한 후 촐라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50] 이후 라젠드라 1세는 해군을 동원해 동남아시아 지역의 스리비자야 해군을 무찔러 인도양 지역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는데,[51] 당시 기록에 의하면 스리비자야의 수도인 팔렘방을 비롯해 탐브라링가, 케다 등 스리비자야 도시 14곳이 촐라 제국에 의해 점령되거나 약탈당했다고 한다. 라젠드라 1세의 원정은 말레이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으며, 그의 이름은 중세 말레이어 연대기 세자라 멜라유에도 기록되었다.[52][53][54] 게다가 라젠드라 1세는 칸나다 국가의 라타파티(라슈트라쿠타의 영토, 찰루키아 국가, 탈라카드, 콜라르)도 정복하였다.[55] 라젠드라의 영토에는 갠지스-후글리-다모다르 분지,[56] 스리랑카와 몰디브가 포함되었으며,[57] 인도 동부 해안을 따라 갠지스 강까지의 왕국들은 촐라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58] 1016년, 1033년, 1077년에 3개의 촐라 외교 사절이 중국에 파견되었다.[57] 또한 비라라젠드라 촐라는 다양한 장소에서 벌어진 많은 전쟁에서 서찰루키아 제국의 소메슈바라 2세를 물리치고 비크라마디트야 6세와 동맹을 맺었으며, 11세기 후반에는 스리비자야의 영토인 케다를 정복하였다.

 
촐라의 케다 침공을 묘사한 시암풍 그림.

라자라자 촐라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인 라젠드라 촐라 1세, 비라라젠드라 촐라, 쿨로퉁가 촐라 1세의 치세 동안 촐라군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남부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일부를 지배하던 스리비자야와 스리랑카 및 몰디브를 침공하였다.[59] 11세기에 라자라자 1세는 여러 해전을 치루며 스리랑카, 몰디브 및 말라바르 해안을 함락하기 시작하였다.[60] 1025년에 라젠드라 촐라는 스리비자야 항구와 미얀마의 페구 왕국에 대한 해군 공습을 시작하였다.[61] 촐라(Chola) 비문에는 그가 팔렘방(Palembang), 탐브랄링가(Tambralinga), 케다(Kedah) 로 확인되는 14곳을 점령하거나 약탈했다고 나와 있다.[62] 두번째 침공은 11세기 후반 말레이시아의 스리비자야 케다를 정복한 비라라젠드라 촐라가 이끌었다.[63] 이 같은 촐라의 침공은 스리비자야의 부를 약탈하려는 의도로 시작된 단기적인 침략이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스리비자야에 대한 직접 지배를 확립하는데 실패하였으나, 이 침공으로 스리비자야의 패권이 심각하게 약화되며 지역 왕국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무역 측면으로는 전통적으로 말레이 무역상이 지배하던 스리비자야 영역을 타밀 무역상이 잠식하고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북부 해안에서 타밀 길드의 영향력이 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후기 (1070년 ~ 1279년)편집

 
쿨로퉁가 1세 치세의 후기 촐라 강역.

동찰루키아 사이의 결혼 및 정치적 동맹은 라자라자가 벵기를 침공한 후 통치하는 동안에 시작되었다. 라자라자 촐라의 딸은 찰루키아 왕자 비말라디트야와 결혼하였고,[64] 라젠드라 촐라의 딸 암만가 데비는 동찰루키아 왕자 라자라자 나렌드라와 결혼하였으며,[65] 비라라젠드라 촐라의 아들 아티라젠드라 촐라가 1070년 내란으로 암살되자 암만가 데비와 라자라자 나렌드라의 아들인 쿨로퉁가 촐라 1세가 촐라 황제로 즉위하며 후기 촐라 왕조가 시작되었다.[66]

쿨로퉁가 1세와 비크라마 촐라와 같은 후기 촐라 황제 치하에서도 벌어지던 찰루키아와의 전쟁은 주로 카르나타카의 찰루키아 영토나 벵기, 카킨나다, 아난타푸르, 구티와 같은 텔루구 지역에서 벌어졌으며, 그 후 이전의 호이살라, 세부나, 카카티야와 같은 봉신국들을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며 마침내 찰루키아를 대체하였다.[67] 비슈누바르바나 지배하의 호이살라에 의한 북부 중앙 카르나타카에 있는 다르와르 점령과 함께, 1149년경 호이살라의 수도인 드와라사무드라를 관리하는 아들 나라심하 1세와 함께 1150년에서 1151년경까지 35년 넘게 찰루키아의 수도를 점거한 칼라추리의 대두와 함께 찰루키아 왕국은 이미 해체되기 시작하였다.[68] 쿨루퉁가 촐라 3세 지배하의 촐라는 촐라 황제의 사위인 비라 발랄라 2세가 지배하던 호이살라를 지원하며 찰루키아의 해체를 가져오는데 협력하였으며, 1185년부터 1190년까지 소메슈바라 4세와의 일련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서찰루키아를 물리쳤다. 마지막 찰루키아 왕의 영토에는 찰루키아의 이전 수도인 바다미, 만야케타 또는 칼야니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로써 1135-1140년 이후로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찰루키아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한편, 1150년에서 1280년 사이의 기간 동안 촐라의 가장 강력한 적대자는 전통적인 영토에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판디아 왕자였다. 이 기간 동안 촐라와 판디아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다. 촐라는 칼링가의 동강가와 정규전을 치렀고, 촐라의 지배에서 거의 독립적인 세력으로 남아 있던 벵기를 보호하였으며, 또한 자신의 봉신국들인 텔루구 촐라, 벨라난티 촐라, 레난두 촐라 등과 함께 동부 해안을 지배하였다. 또한 항상 촐라의 랑카 점령을 전복하려고 시도한 싱할라인들과도 지속적으로 싸웠지만 이후 촐라 황제 쿨로퉁가 1세 시대까지 촐라는 랑카에 대한 확고한 통제권을 쥐고 있었다. 이후 촐라 황제인 라자디라자 촐라 2세는 그들의 전통적인 친구인 랑카의 왕의 도움을 받은 5명의 판디아 왕자 연합을 제압할 만큼 충분히 강했다. 쿨로퉁가 촐라 3세는 랑카 및 마두라이의 반란과 소란을 진압하여 촐라의 지배를 강화하고 카루부르에서 비라 발랄라 2세 휘하의 호이살라 장군을 물리쳤으며, 타밀 국가, 동부 강가바디, 드라크샤라마, 벵기 및 칼링가의 전통적인 영토를 유지하였다. 그 후, 그는 비라 발랄라 2세와 촐라 공주를 혼인시켜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호이살라와의 우호 관계를 개선시켰다.

이처럼 후기 촐라 왕조는 쿨로툴가 촐라 1세, 그의 아들 비크라마 촐라, 라자라자 촐라 2세, 라자디라자 촐라 2세, 쿨로퉁가 촐라 3세와 같은 유능한 통치자들이 주도하였으며, 이들은 칼링가, 일람, 카타하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1218년 사이에 라자라자 촐라 2세부터 마지막 황제 라젠드라 촐라 3세까지의 후기 촐라의 지배는 850-1215년 사이의 황제들만큼 강력하지 않았다. 라자라자 촐라 2세(1146~1175년) 치하의 촐라 제국은 850~1150년만큼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영토를 거의 상실하지 않은 상태였으며, 1215년 쿨로퉁가 촐라 3세가 통치할 때까지 촐라 행정과 영토 보전은 1215년까지 안정적이었고 매우 번영하였지만, 그의 치세에 해당하는 1215~16년에 마라바르만 순다라 판디안 2세에게 패배한 후 촐라 세력의 쇠퇴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 싱할라 세력이 부활하며 랑카섬에 대한 통제권도 상실한 촐라는 랑카섬에서 쫒겨났다.[69]

판디아 왕조가 남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로서 부활하며 촐라의 쇠퇴가 계속되면서 이전 판디아 영토에 통제 가능한 중앙 행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판디아 왕좌에 대한 많은 주장자들이 민사 소송을 일으켰다. 싱할라족과 촐라족이 대리인으로 참여한 전쟁인 판디아 내전의 세부 사항과 내전에서 촐라와 싱할라가 수행한 역할은 마하밤사와 팔라바라얀페타이 비문에 나와 있다.[70][71]

라자라자 촐라 3세 이후 그의 후계자인 라젠드라 촐라 3세 치하의 촐라는 상당히 약했기 때문에 지속적인 문제를 겪었다. 한 봉건 카다바 족장인 코페룬칭가 1세(Kopperunchinga I)는 한때 라자라자 촐라 3세를 인질로 잡기까지 하였다.[72][73] 12세기 말에 찰루키아가 쇠퇴하고 호이살라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칸나다국의 주역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들 역시 찰루키아의 수도를 점령하고 있던 세우나족과 칼라추리족 등 새로운 라이벌의 출현이라는 끊임없는 문제에 직면하였다. 그러자 호이살라는 촐라 군주와 결혼 관계를 맺은 호이살라 비라 발랄라 2세를 물리쳤던 쿨로퉁가 촐라 3세 시대부터 촐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 우호 관계는 쿨로퉁가 촐라 3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라자라자 촐라 3세 시대까지 지속되었다.[69][74]

호이살라는 이 기간 동안 타밀 국가의 정치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타밀 왕국 간의 단결 부족을 철저히 이용하고 한 타밀 왕국을 다른 왕국과 교대로 지원함으로써 촐라와 판디아가 모두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게 하였다. 라자랒 3세 기간 동안 촐라 편을 들던 호이살라는 카다바 족장 코페루징가와 판디아를 물리쳤고 타밀 국가에 존재감을 확립하였다. 라자라자 3세의 뒤를 이은 라젠드라 촐라 3세는 촐라의 부를 되살리기 위해 과감한 조치를 취한 훨씬 더 나은 통치자였다. 그는 멀리 쿠다파까지 발견된 그의 비문에 의해 입증된 바와 같이 북쪽으로 성공적인 원정을 이끌었다.[75] 그는 또한 마라바르만 순다라 판디아 2세를 포함한 두 명의 판디아 왕자를 물리치고 판디아를 촐라의 지배에 잠시 복종시켰다. 비라 소메슈와라 지배하의 호이살라는 이번에는 촐라의 부활을 막기 위해 판디아의 편으로 재빠르게 개입하며 촐라를 격퇴하였다.[76] 남부의 판디아는 강대국으로 올라갔고 결국 호이살라를 말라나두나 칸나다 국가에서 추방했는데, 이들은 촐라의 동맹이던 타밀족 국가였으며 촐라 자체의 멸망은 궁극적으로 판디아에 의해 야기되었다. 판디아는 마라바르만 순다라 판디안 2세와 그의 유능한 후계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타밀 국가와 스리랑카, 남부 체라 국가, 텔루구 국가의 영토를 꾸준히 장악하였다. 자타바르만 순다라 판디안은 라자라자 촐라 3세 지배하의 촐라와 소메슈와라 지배하의 호이살라 연합군에 여러 차례 패배를 가했으며, 이는 소메슈와라의 아들 라마나타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결과적으로 판디아는 1215년부터 점차 타밀 국가의 주요 선수가 되었으며 마두라이에서 라메슈와람-일람 남부 체라 국가와 칸야쿠마리 벨트, 그리고 딘디굴-티루치-카루르-사트바만갈람 사이의 카베라 벨트와 카베리 델타 즉 탄자부르-마부람-치다바람-비리다찰람-칸치를 거쳐, 마침내 1250년까지 아르콧-티루말라이-넬로르-비사바와다이-벵기-칼링감 벨트까지 진군하며 지능적으로 그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였다.[77]

판디아는 꾸준하게 호이살라와 촐라를 모두 패주시켰으며,[78] 자타바르만 순다라 판디안은 칸나누르 쿠팜에서 호이살라를 물리치고 그곳을 탈취하였다.[79] 라젠드라의 치세 말기에 판디아 제국은 번영의 절정에 있었고 외국인 관찰자들의 눈에는 촐라 제국의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보였다.[80] 라젠드라 3세의 마지막 기록 연대는 1279년이다. 라젠드라의 뒤를 이어 다른 촐라 프린스가 곧바로 이었다는 증거는 없다.[81][82] 호이살라가 쿨라세카라 판디안에 의해 1279년경 칸나누르 쿠팜에서 패주하고 같은 전쟁에서 마지막 촐라 황제 라젠드라 3세가 패주하며 그 이후로 촐라 제국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해 촐라 제국은 판디아 제국에 의해 완전히 잠식되어 멸망하였다고 볼 수 있다.[73][82] 그러나 인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촐라 왕조가 살아남았다. 세부아노 구전 전설에 따르면 촐라 왕조의 반군 분파가 16세기까지 필리핀에서 계속 생존했으며, 세부 섬에 정착한 라자무다 스리(Rajamuda Sri)에 의해 세부 라자국이라고 불리는 인도화된 말라야-타밀계 지역 왕국이 건국되기도 하였다. 스리 루메이는 타밀인과 말레이인의 혼혈로, 이전에 촐라가 점령한 스리비자야에서 태어났다.[83] 마하라자의 명령으로 원정군의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 세부 섬으로 파견된 루메이는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독립 라자국을 건국하였으며, 인도화된 이 왕국은 스페인인과 라티노계 군인들과 함께 멕시코에서 필리핀으로 항해해 온 정복자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에 의해 정복당할 때까지 번성하였다.[84]

영토편집

타밀어 문헌에 따르면, 촐라국은 오늘날 타밀나두주티루치라팔리 지구, 티루바루르 지구, 나가파티남 지구, 아리발루르 지구, 페람발루르 지구, 푸두코카이 지구, 탄자부르 지구카라이칼 지구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카베리 강과 그 지류는 일반적으로 평평한 나라의 풍경을 지배하며 주요 언덕이나 계곡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점차 바다쪽으로 기울어진다. 폰니 ( 황금) 강으로도 알려진 이 강은 촐라 문화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카베리 강의 연간 홍수는 아디페루쿠로 알려진 축하 행사가 되었으며 전국에서 참여하였다.

카베리 강 삼각주 근처 해안에 위치한 카베리품파티남은 주요 항구 도시였다.[20] 프톨레미는 이 도시를 카베리스로 알고 있었고, 그리고 다른 항구 도시 나가파티남은 촐라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였다.[85] 이 두 도시는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불교를 포함한 많은 종교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h] 로마 선박이 이 항구로 들어가는 길을 찾았으며, 수세기에 걸친 동시대 초기 로마 동전이 카베리 강 삼각주 근처에서 발견되었다.[87][8]

다른 주요 도시는 현재 쿰바코남으로 알려져 있는 탄자부르, 우라이유르쿤단타이 등이 있다.[20] 라젠드라 1세가 촐라의 수도를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으로 옮긴 후 탄자부르는 그 중요성을 잃었다. [88]

행정편집

 
12세기초 촐라 제국의 만달람

중앙편집

촐라의 정부 체제는 전제군주제였으며,[10] 촐라의 군주는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촐라 군주들은 만디르를 자주 건설하였는데, 촐라 제국의 만디르는 단순히 종교적 시설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경제 활동의 중심지 역할 또한 수행하였다.[89]

지방편집

라자라자 촐라 이전에는 수도 근방은 촐라 황제가 통치하고 외곽 지역은 촐라 황제와 유력한 관계를 지녔던 벨리르(토후)에 의해 통치되는 봉건제 형식이었지만, 라자라자 1세 이후 촐라 제국의 행정 구역은 8개의 만달람(속주)으로 세분화되었는데,[90] 만달람발라나두(군), 발라나두는 코람(현) 등으로 세분화되었고, 코람은 행정의 가장 작은 단위인 몇 개의 촌락으로 세분화되었으며,[91] 촌락은 30여 개의 구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 행정 구역들의 지방관들은 초기에는 중앙정부에 의해 임명되었지만 후기에는 세습직으로 바뀌었다.[92] 촌락에서는 행정·물 관리·사법 등 마을에 필요한 위원회를 마련한 후, 각 위원회 운영에 참여할 만한 식견을 갖춘 사람의 이름을 나뭇잎에 적어서 어린아이가 제비뽑기를 하는 방식으로 운영 위원을 선출하였으며 촐라 제국의 이 같은 자치 제도는 마을 고유의 행정과 문화가 유지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93]

군사편집

중세 시대 라자라자 1세 황제에 의해 시작되어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남인도와 스리랑카의 일부를 통치했던 촐라 제국은 그들의 광대한 제국에서 영토를 확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육군과 해군에게 의존하였으며, 촐라 국왕 또는 황제가 촐라 군대를 총체적으로 지도하였다.

촐라의 군대 모집 방법이나 군대의 영구 병력 수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봉건 시대에 전사와 군인의 자녀는 기사도 정신과 타밀 무술 전통에 따라 쉽게 군대에 합류하였는데, 그들은 매우 강한 무술 전통을 가진 매우 의욕적이고 전문적으로 훈련된 세력이었으며, 일부 연대는 분명히 군 관습과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연대의 구성원은 높은 수준의 훈련, 자부심 및 자존심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상감 시대 타밀어에 카다감이라고 불리는 군주가 있다는 것은 정기적인 훈련과 군사 관행이 타밀 무술 전통의 일부로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팔라얌 시스템은 전사, 농부, 장인 및 상인의 봉건적 계급 구조를 기반으로 하며 구성 계급의 카스트 지위 간의 구별이 엄격하게 시행되었는데, 이들의 군사적 능력에 의해 시스템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타밀 전사들은 이 사회를 상징하기 위해 일상 생활에서 칼을 사용하였다.

육군편집

촐라 제국 시기 라자라자 1세는 강력한 상비군과 상당한 해군을 창설하였으며, 그의 아들 라젠드라 1세 아래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촐라 제국의 육군은 기병대, 전투 코끼리 군단, 보병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94] 평상시에는 전국 곳곳에 설치된 군사 시설인 코다감에 주둔하였다. 하우더를 얹은 전투 코끼리는 촐라 육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전투 코끼리에 탄 병사들은 장거리에서 화살을 쏘고 근거리에서 창으로 싸우는 역할을 하였다.[95] 고대 힌두 문학에서 발견된 전통적인 전차 군단의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궁병(빌라리갈)과 같은 다른 병과들이 있었다.

최전성기의 촐라군은 총 200만의 병사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 지리학자 조여괄은 1225년경에 쓴 글에서 촐라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국가는 인도 서부 왕국과 전쟁 중이다. 정부는 높이가 7~8 피트인 6만 마리의 코끼리를 소유하고 있다. 이 코끼리와 싸울 때 이 코끼리는 집을 등지고, 이 집은 원거리에서 화살을 쏘고 가까운 곳에서 창으로 싸우는 병사들로 가득 차 있다.[96]

촐라 제국은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몇 개의 궁전요새를 지었는데, 요새는 주로 벽돌로 만들어졌지만 돌, 나무 및 진흙과 같은 다른 재료도 사용되었으며,[97][98] 고대 타밀어 문헌인 "실라파디카람"에 따르면, 돌을 던지는 투석기, 끓는 물 또는 녹은 납의 가마솥, 고리, 사슬 및 함정으로 요새를 방어했다고 한다.[44][99]

촐라 군인들은 강철로 만든 , , 투창, 방패와 같은 무기를 사용했으며,[45] 특히 남인도는 다마스쿠스 강으로도 알려진 "우츠 강"의 주요 원산지 중 하나였기 때문에 "우츠 강"으로 만든 철제 무기 또한 사용되었다.[100] 촐라 군대는 다양한 카스트 출신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지만 카이콜라르벨라라르 카스트 출신의 전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101][102] 촐라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대인 "벨라이카라파다이갈"도 촐라 군대의 주요 구성원 중 하나였다.

해군편집

촐라 해군은 고대 인도 해군력의 절정을 상징한다. 촐라를 포함한 모든 타밀 왕국들은 무기고에 일종의 해군을 지녔으며, 촐라는 고대 전통을 이어가고 해군력을 키우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촐라 해군은 촐라 제국의 해군과 다른 여러 해군 군기로 구성되었는데, 초기에는 무역선 기반의 선박을 전함으로 사용하였지만 후기부터는 전투용으로 제작한 선박을 전함으로 사용하였으며, 정규 해군(Kappal-Padai)외에도 해상 전투에 투입되도록 편제된 보조부대가 존재하였다. 전성기 촐라 해군은 대양해군으로서의 자질과 100만의 병력을 보유한 아시아 최대의 해군이었다.[103]

중세 촐라 시기에 해당하는 9~11세기 동안 촐라 해군의 규모는 점차 커지고 지위 또한 높아지면서 촐라 해군은 당시 아시아 전역에서 강력한 해양 및 외교 부대로 성장하였고 해상 무역로 또한 아라비아에서 중국으로 확장되었다. 파란타카 1세 치세에도 스리랑카의 수많은 침략에 상당한 해군이 관여했다는 증거가 존재한다. 라자라자 1세와 그의 아들 라젠드라 1세의 치세 동안 촐라 해군에는 100만 이상의 해군 병사가 있었는데, 라자라자 1세(985-1014)의 치세 동안 촐라의 영토는 확장을 거듭해 몰디브에서 안드라프라데시고다바리 강 유역까지 뻗어 있었으며,[4] 1010년부터 1153년까지 라자라자 1세의 후계자들은 계속 확장하여 촐라 제국을 남아시아동남아시아의 군사, 경제 및 문화 강국으로 만들었다.[104] :215 이 시기 동안 촐라 해군은 갠지스 강을 따라 팔라 제국으로 해상 원정을 강행하는 동시에 스리랑카를 정복하고 1025년에는 오늘날 인도네시아에 해당하는 스리위자야를 침공하였으며,[5][105] 지속적으로 중국에 대사를 파견하는 등 제국의 확장에 기여하였다.:158 라젠드라 촐라의 해군이 스리위자야에서 거둔 승리는 수세기의 해군 전통의 절정을 상징하였으며, 이 다차원적 힘을 통해 촐라는 몰디브에서 필리핀북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해양 제국과 로마에서 중국으로 이어지는 해상 무역로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스리랑카와 몰디브의 정복 및 중국에 파견된 대사관은 촐라 해군의 성공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동시기에 수많은 동남아시아 왕국에서 촐라 제독들이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3세기부터 촐라와 남인도 안드라-칸나다 지역의 찰루키아 간의 육상전이 벌어지고 판디아 또한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촐라 해군은 점차 쇠퇴하였지만,[106] :175 이들의 활동으로 동남아시아의 언어, 예술, 건축 및 종교에 인도 문화의 유산이 지속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등 그 영향력은 여전하며, 이는 오늘날 발리 힌두교와 참 문화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제편집

촐라국의 주요 수입원은 토지세과 무역세로,[107] 수확된 농산물의 3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었다. 세금은 화폐[90]나 현물로 거두었고, 토지는 생산되는 산물에 따라 각기 다르게 분류되었으며 그에 대한 세금은 생산된 양에 의해 결정되었다.[108] 이 밖에도 무역과 광산, 염전 등을 통해 얻어지는 세금은 국가의 경제를 풍요롭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면직물은 촐라 제국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는데,[109] 초기 촐라 왕국의 수도였던 우라이유르는 면직물의 주요 생산지였으며,[44][110][90] 이곳의 면직물 산업을 담당하는 직공 길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111] 직공은 모든 도시에서 자체 주거 부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기에는 살리야르와 카이콜라르 주축의 직공 공동체들이 면직물 산업을 주도하였다.[90] 촐라 제국 시대에 실크 직물은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칸치푸람은 실크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112][113] 쳄비안 마데비와 같은 촐라 군주들이 금속 장인들에게 후원을 확대하면서 금속 산업 또한 발달하여 제철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는데,[110] 이들에 의해 가공된 우츠 강은 후에 다마스쿠스 강으로 알려지며 중동 및 유럽에도 전파되는 등 촐라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114]

농부들은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 중 하나를 차지했는데,[115] 이들은 경제적으로 강력한 카스트 집단인 벨라라르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이 벨라라르 공동체는 촐라 제국의 지배층으로서 군림하기도 하였다.[116] 이와 같이 농업이 촐라 공동체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촐라 황제들은 주요 수입원의 근간이 되는 농산물의 수확을 더 증진시키기 위하여 카베리강에 여러 개의 댐을 건설하고 호수를 만들었다.[110][117]

촐라 전국 각지에는 조직화된 상인 길드가 대내 상업을 주도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금속 산업과 보석상 예술은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해상 무역을 주도하는 길드인 나나데시스는 상선들을 보호하기 위해 용병들을 고용하였으며, 칸치푸람마말라푸람과 같은 대규모의 항구 도시에는 "나가람"이라고 불리는 상인들의 현지 조직들도 존재하였다.[118][117]

대외 무역편집

촐라 제국은 9세기 말부터 동남아시아에 광범위한 해양 및 상업 활동을 전개하였는데,[10] 이때 촐라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활동한 마니그라맘과 아야볼레 등의 길드들이 대내외 무역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117] 라젠드라 1세때 촐라 제국이 스리비자야스리랑카섬으로 진출하면서 마니그라맘과 아야볼레 등의 길드들이 촐라 본토뿐만 아니라 스리비자야 지역에도 길드 거점을 형성해 활동하기도 하였다.[119]

1025년 라젠드라 1세가 이끄는 촐라 해군이 동남아시아의 해상 강국인 스리비자야 해군을 격파한 이후 촐라는 인도양 무역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으며,[10][20] 중국, 스리비자야, 아바스 칼리파국, 칼리파트 등과 주요 교류하기 시작하였다.[11]

특히 코끼리와 말을 얻으려 촐라 제국에 방문한 중국 상인들에게 숙박시설과 선물, 경비원들을 제공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중국과의 무역이 꽤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120] 또한 송나라의 기록에는 1077년에 촐라 사신들이 중국 지역을 방문했다는 내용이 존재하는데,[10][9] 당시 촐라 제국의 황제였던 쿨리안훙가 1세에 대해서도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단순히 중국과의 무역 활동뿐만 아니라 사신들을 파견하는 외교 관계또한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촐라 제국의 사신들이 유리향신료를 포함한 공물을 조공으로 바치고 대신에 송나라 화폐를 얻어오는 방식의 조공 무역 또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121]

사회편집

촐라 시대에는 여러 길드, 지역 사회 및 카스트가 등장했다. 길드는 남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 중 하나였으며 상인들은 길드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안주반남과 발란지야르와 같은 다른 길드도 존재했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마니그라맘과 아야볼레 길드이다.[117] 농부들은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는데, 이들은 귀족층인 벨라라르 공동체를 구성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강력한 그룹이었다.[90] 벨라라르 공동체는 촐라의 지배층 세속 귀족 계급으로, 재판관들, 군 장교들, 관료제 하층 계급, 농민 상류층 대부분이 이 공동체 출신이었다.[116] 벨라라르 일부는 스리랑카 북부로 이주해 정착하기도 하였다.[122] 울라바르 공동체는 농업과 관련된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농민은 칼라마르로 알려졌다.

카이콜라르 공동체는 직조자이자 상인이었지만 군대에서도 활동하였다.[123] 촐라 제국 시기에 직공 및 상인과 같은 하위층들이 성장하면서 성전 관리와 토지 소유권에 큰 변화가 있었는데, 본래 브라만들만 담당하던 성전 관리에 비브라만 카스트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토지 소유권 또한 브라만과 벨라라르만이 아닌 다른 계급 출신의 사람들도 토지 소유권을 지닐 수 있도록 바뀌었다.[124] 촐라 제국에는 신분 제도가 존재했지만 계급 간의 통혼이 허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계속해서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었다. 여성의 지위도 비교적 좋은 편으로 사회·종교적 행사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등 힌두 사회의 수많은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상속권이 보장되어 여성도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다. 촐라 제국에서는 여성의 사티가 그리 성행하지 않았으며 결혼은 대체로 일부일처제였다.

교육편집

촐라 제국 시대에 기록된 비문은 촐라인들의 수준높은 문해력을 보여주는데, 비문의 내용은 법정 시인이 작성했으며 재능있는 장인이 새겼다. 현대적 의미의 교육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일부 마을 협의회가 학교를 조직하여 어린이들에게 읽고쓰기의 기초를 가르치도록 했다는 정황 증거가 있다.[125] 대중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의 기록은 없지만,[126] 직업 교육이 아버지가 자신의 기술을 아들에게 전수하는 훈련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기록은 존재한다. 대중을 위한 교육의 매개체로 타밀어를 활용하였으며, 힌두교 수도원은 교육의 중심지로서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8]

인프라편집

촐라 제국은 만디르 주변을 중심으로 인프라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만디르 주변에 교육 기관과 병원을 설립하고 만디르 역할의 유익한 측면을 강화했으며 인세를 매우 강력하고 성실하게 매겼다.[124] 비라라젠드라 촐라 시기의 촐라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시설들은 베다, 샤스트라, 문법 및 학생들을 위한 병원, 연구를 위한 사원 내 자난나만다파의 학교 유지와 관련이 있는데, 학생들은 토요일에 음식, 목욕용 기름 및 애완동물용 기름을 제공받았다. 병원은 정부가 그 목적을 위해 땅을 제공한 촐라 왕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티루무쿠달 비문은 비라솔란이라는 병원이 비라 촐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음을 보여주며, 촐라 여왕 쿤다바이는 탄자부르에 병원을 설립하고 영구 유지 관리를 위해 토지를 제공하기도 하였다.[127][128] 많은 질병이 병원의 의사들에 의해 치료되었으며, 주치의는 매년 80칼람의 논, 8카수스 및 토지 보조금을 지급받았다. 의사 외에 다른 유급 직원에는 간호사, 이발사(경미한 수술을 수행하는 사람) 및 뱃사공이 포함되었다.[129] 비라솔란 병원에서는 아픈 사람들을 위해 다섯 개의 침대가 제공되었으며, 편의를 위한 쌀, 의사, 외과 의사, 환자 간호를 위한 2명의 하녀 및 병원의 일반 하인들이 존재하였다.[130]

종교편집

 
촐라의 나타라자 동상

촐라의 주류 종교는 힌두교였다. 초기 촐라 시대의 힌두교도인 코센간난은 상감 문학에서 리쉬로 묘사되며 시바파 힌두교도들에 의해 칭송받았다.[8]

촐라 제국은 주신인 시바를 모시는 만디르들을 많이 지었지만 촐라 제국의 황제인 아디트야 1세가 시바비슈누를 위한 만디르를 지었다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에 촐라 제국이 시바파 힌두교만을 믿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890년대의 촐라 비문에 따르면 아디트야 1세는 서강가 왕국 서부의 스리랑가파트남에 있는 랑가 나타 사원 건축에 기여했는데, 이 지역은 그의 봉토였으며 결혼으로 연결되어 있었다.[131]

파란타카 2세는 카베리 강 유역에 있는 안빌의 기대하는 비슈누(Vadivu Azhagiya Nambi)의 신봉자로서 비슈누에게 많은 선물과 장식을 봉헌하거나 시바비슈누를 위한 수많은 만디르들을 건축하였으며,[89], 칸치와 아코트를 되찾기 위해 라슈트라쿠타를 공격하거나 판디아와 스리랑카에 대한 원정대를 파견하는 등의 전쟁을 시행하기 이전에 비슈누에게 기도했다.[20] 라자라자 1세스리비자야 왕인 스리 출라마니바르만의 요청에 따라 나가파티남에 존재하던 불교 수도원인 추다마니 비하라를 개축하기도 하였다.[11][132]

후기 촐라 시대에 비슈누파,[133] 특히 그들의 종교 지도자인 라마누자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89] 이 주장에 따르면, 크리미칸타 촐라라고 불리는 촐라 황제는 라마누자를 박해했다고 하며, <파르파난나므리탐>이라는 17세기 문학에서도 크리미칸다가 치담바람 나타라자 만디르에서 고빈다라자 신상을 제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34] 일부 학자들이 크리미칸타 촐라를 쿨루퉁가 2세와 동일시하지만, 스리랑감 사원의 기록에 따르면 쿨루퉁가 2세는 크리미칸타 촐라의 아들로 크리미칸타와 달리 비슈누파를 지지하였고,[135][136] 라마누자는 쿨루퉁가 2세를 그의 조카인 다사라티의 제자로 삼았으며 그 후 왕은 라마누자의 소원에 따라 다사라티와 그의 후손들에게 랑가나타스와미 사원의 관리를 허락했다고 한다.[137][138] 역사가 닐라칸타 샤스트리는 크리미칸타 촐라와 아디라젠드라 촐라, 비라라젠드라 촐라를 식별하였다.[139][140] 서기 1160년의 비문에 따르면 비슈누파와 사회 관계를 가진 시바파 힌두교 사원의 관리인은 재산을 몰수당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만, 이것은 촐라 황제가 공식적으로 선포한 칙령이 아닌 시바파 힌두교 공동체에서 규정한 규범으로 보인다. 촐라 황제가 시바를 위해 촐라 내에서 가장 큰 힌두교 사원을 지었고 라자라자 1세와 같은 황제가 "시바파다세카란"라는 별칭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들의 비문에서 촐라 황제는 촐라 제국이 시바파 힌두교만을 믿거나 시바파 힌두교가 촐라 제국의 국교라고 명시한 내용은 없다.[8][11][88]

건축편집

 
촐라 제국 시대에 탄자부르에 건설된 브리하디스와라 만디르

촐라는 팔라바 왕국의 만디르 건축술을 물려받아 드라비다식 만디르 건축술을 크게 발전시켰다.[20] 촐라 제국은 카베리 강변에 많은 시바파 힌두교 만디르를 지었으며, 후세 사원의 양식은 아디티야 1세와 파란타카가 공식화시켰다.[141][142][143] 촐라 사원 건축은 팔라바 왕조가 물려준 과거의 풍부한 전통을 표면적으로 계승함과 동시에 그 웅장함과 섬세한 솜씨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144] 건축 역사가 제임스 페르구손은 "촐라 예술가들은 거인처럼 잉태되어 보석상처럼 완성되었다"고 말했다.[145] 후기 드라비다 건축을 대표하는 촐라 예술의 새로운 발전은 판디아 왕조 시대에 점차 형태를 취하고 성숙해진 사원의 외곽에 고푸람이라는 거대한 관문을 추가한 것이다.[146] 촐라의 건축 및 예술은 동남아시아로 확산되며 동남아시아의 건축과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147][148]

사원 건축은 라자라라 1세와 그의 아들 라젠드라 1세의 정복 및 천재성으로 큰 자극을 받았다.[89] 촐라 건축의 성숙함과 웅장함의 발전은 탄자부르와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의 두 사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09년경에 완공된 탄자부르의 장엄한 시바파 만디르브리하디스와라 만디르는 라자라자 시대의 물질적 업적을 상징하는 적절한 기념물로, 당시 모든 인도 사원 중 가장 크고 높은 규모를 지니며 남인도 건축의 정점에 서 있다.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에 있는 강가이콘다촐리스바람 사원은 라젠드라 1세가 전임자를 능가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탄자부르 사원이 건설된지 불과 20년 후인 1030년경에 같은 양식으로 완성되었으며, 외관이 더 정교해짐에 따라 라젠드라가 통치하는 촐라 제국이 더 풍요로워진 상태임이 증명되었다.[149][150] 이 두 사원은 다라수람에 위치한 아이라바테스바라 사원과 함께 대 촐라 사원이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오늘날에도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151]

미술편집

 
얼스터 박물관의 촐라 청동상

촐라 시대는 조각품과 청동으로도 유명하다.[88][7][9] 촐라 시대의 조각품은 힌두교의 유지의 신 비슈누와 그의 배우자 락슈미나 파괴의 신 시바의 다양한 모습들을 묘사한 작품들이 대부분으로,[20] 일반적으로 오랜 전통에 의해 확립된 도상학적 관습을 따랐지만 조각품에 고전적인 우아함과 웅장함을 가미하려고 하던 11세기 및 12세기의 촐라 조각가들은 이전보다 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작품들을 조각하였으며, 이 양식으로 만들어진 작품들 중 가장 훌륭한 사례로 춤추는 나타라자 동상을 들 수 있다.[152]

문학편집

촐라 제국 시대는 타밀 문학의 황금기로서, <라자라제스바라 나타캄>, <비란우카비얌> 및 <칸니바나 푸라남> 등 수많은 문학 작품들이 만들어졌다.[11]

힌두교의 부흥은 수많은 사원의 건설을 촉진시켰고, 이들은 차례로 시바파비슈누파의 경전 문학을 낳았다.[8] 자이나교와 불교 문학가들도 존재했지만, 몇 세기 전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다.[8] 티루타카테바르의 <지바카친타마니>와 톨라몰리의 <술라마니>는 비힌두교적인 색채가 가미된 대표적인 촐라 문학이다.[88][8][153] 촐라의 불교 문학에서는 타밀어 문법에 "비라솔리얌"이라는 텍스트를 썼다.[154] 주석은 전쟁의 윤리를 언급하는 <톨카피얌>이라는 작품에 사용되었다.[155][90][156] <페리아푸라남> 또한 촐라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들 중 하나인데, 촐라의 국민 서사시인 이 작품은 촐라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서사로 엮였다.[157]

쿨라통가 촐라 통치 기간 동안 번성한 촐라 문학가인 쿨반은 발미키가 지은 라마야나를 촐라 문학으로 재구성하여 <라마바타람>이라는 작품을 저술하였으며,[158] 이 서사시에서 라마찬드라가 다스리는 코살라는 촐라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여겨졌다.[153][159][88]

자얌콘다르가 저술한 <칼링가투파라니>는 역사와 가상의 관습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그리는 서사시의 한 예로서, 이 서사시는 쿨루퉁가 1세때 칼링가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전쟁을 묘사하고 전쟁의 화려함과 전투의 상황뿐만 아니라 전쟁의 참혹함도 묘사하였다.[88][8] 또 다른 촐라 시인인 오타쿠탄은 촐라 황제들의 미덕을 칭찬하는 시인 <쿨루퉁가 촐란 울라>를 쓰기도 하였다.[160]

<난눌>은 촐라 시대의 타밀어 문법을 다루는 문학으로, 타밀어의 주요 5가지 문법을 모두 다루는 이 작품은 오늘날 가장 유명한 타밀어 문법 규범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161]

촐라 제국에서는 타밀 문학뿐만 아니라 텔루구어 문학 또한 발전하였는데, 티카나 소마야지, 아빈나바 단디 케타나, 마라나 및 소마나 등의 저명한 텔루구어 시인들이 이 시대에 활동하며 텔루구어 문학을 번성시켰다. 티카나 소마야자는 <니르바차노타라 라마얀나무>와 <안드라 마하바라타무>를, 아빈나바 단디 케타나는 <다사쿠마라차리트라무>, <비즈난네스와라무> 및 <안드라 바샤브샤나무>를 저술하였으며, 마라나는 <마르칸데바 푸라나>, 소마나는 <바사바 푸라나>를 저술하였다.[162]

주석편집

  1. The age of Sangam is established through the correlation between the evidence on foreign trade found in the poems and the writings by ancient Greek and Romans such as Periplus. K.A. Nilakanta Sastri, A History of Cyril and Lulu Charles, p 106
  2. The period covered by the Sangam poetry is likely to extend not longer than five or six generations.[14]
  3. The Ashokan inscriptions speak of the Cholas in plural, implying that, in his time, there were more than one Chola.[16]
  4. Pandya Kadungon and Pallava Simhavishnu overthrew the Kalabhras. Acchchutakalaba is likely the last Kalabhra king.[35]
  5. Periyapuranam, a Shaivite religious work of 12th century tells us of the Pandya king Nindrasirnedumaran, who had for his queen a Chola princess.[37]
  6. Copperplate grants of the Pallava Buddhavarman (late 4th century) mention that the king as the "underwater fire that destroyed the ocean of the Chola army".[38] Simhavishnu (575–600) is also stated to have seized the Chola country. Mahendravarman I was called the "crown of the Chola country" in his inscriptions.
  7. K. A. Nilakanta Sastri postulates that there was a live connection between the early Cholas and the Renandu Cholas of the Andhra country. The northward migration probably took place during the Pallava domination of Simhavishnu. Sastri also categorically rejects the claims that these were the descendants of Karikala Chola.[41]
  8. The Buddhist work Milinda Panha dated to the early Christian era, mentions Kolapttna among the best-known sea ports on the Chola coast.[86]

각주편집

  1. David Shulman (2016). 《Tamil》. Harvard University Press. 150쪽. ISBN 978-0-674-97465-4. One thing, however, is certain: the Cholas were happy to use Tamil as an official state language, along with Sanskrit... 
  2. Keay, p. 215
  3. K. A. Nilakanta Sastri, A History of South India, p. 158
  4. Majumdar (contains no mention of Maldives)
  5. Meyer, p. 73
  6. K. A. Nilakanta Sastri, A History of South India, p. 195–196
  7. Mitter (2001).
  8. Sastri (2002).
  9. Thapar (1995).
  10. Kulke & Rothermund (2001).
  11. Sastri (1984).
  12. Prasad (1988), 120쪽
  13. “KING ASHOKA: His Edicts and His Times”. 《www.cs.colostate.edu》. 2018년 10월 7일에 확인함. 
  14. Sastri (1984), 3쪽
  15. Columbia Chronologies of Asian History and Culture by John Bowman p.401
  16. Sastri (1984), 20쪽
  17. Raju Kalidos. 《History and Culture of the Tamils: From Prehistoric Times to the President's Rule》. Vijay Publications, 1976. 43쪽. 
  18. Sastri (1984), 19-20쪽
  19. Archaeological News A. L. Frothingham, Jr. The American Journal of Archaeology and of the History of the Fine Arts, Vol. 4, No. 1 (Mar., 1998), pp. 69–125
  20. Tripathi (1967).
  21. அகநானூறு 375 ஆவது பாடல்:
    .....எழாஅத் திணிதோள் சோழர் பெருமகன்
    விளங்குபுகழ் நிறுத்த இளம்பெருஞ் சென்னி
    குடிக்கடன் ஆகலின் குறைவினை முடிமார்
    செம்புஉறழ் புரிசைப் பாழி நூறி
    வம்ப வடுகர் பைந்தலை சவட்டிக்.....
  22. K.A.N. Sashtri, A History of South India, pp 109–112
  23. R, Narasimhacharya (1942). 《History of the Kannada Language》. Asian Educational Services. 48쪽. ISBN 9788120605596. 
  24. Purananuru – 266
  25. History of ancient India, page 478: ..raising the banks of the Kaveri by Parakesari Karikala Chola
  26. Proceedings of the Indian History Congress, Volume 39, page 156
  27. Sastri (2002), 130, 135, 137쪽
  28. Majumdar (1987), 139쪽
  29. Thapar (1995), 268쪽
  30. Kulke & Rothermund (2001), 104쪽
  31. Sastri (2002), 135쪽
  32. Sastri (2002), 130, 133쪽Quote:"The Cholas disappeared from the Tamil land almost completely in this debacle, though a branch of them can be traced towards the close of the period in Rayalaseema – the Telugu-Chodas, whose kingdom is mentioned by Yuan Chwang in the seventh century A.D."
  33. Indian History. Tata McGraw-Hill Education. p. B55.
  34. Tripathi (1967), 458쪽
  35. Sastri (1984), 102쪽
  36. Kulke & Rothermund (2001), 115쪽
  37. Chopra, Ravindran & Subrahmanian (2003), 95쪽
  38. Sastri (1984), 104-105쪽
  39. Tripathi (1967), 459쪽
  40. Sastri (2002), 4쪽Quote:"it is not known what relation, if any, the Telugu-Chodas of the Renadu country in the Ceded District, bore to their namesakes of the Tamil land, though they claimed descent from Karikala, the most celebrated of the early Chola monarchs of the Sangam age."
  41. Sastri (1984), 107쪽
  42. Tripathi (1967), 458-459쪽
  43. தமிழக வரலாறும் பண்பாடும்/பல்லவர் காலச் சமுதாய மாற்றங்கள் பக் 106.
  44. Eraly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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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The Dancing Girl: A History of Early India by Balaji Sadasivan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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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Sastri (2002), 195-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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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 The kings themselves used to fight in battlefields riding on such war elephants. There are a few occasions of the king dying in the battlefield on these elephants. Parantaka I's son Rajaditya died at Sripurambayam. The Chola king Rajadhiraja Chola I died on an elephant fighting the Chalukya army at Thakolam The epithet Yanai-mel-thunjiya (who died on an elephant) is attached to these kings in their inscriptions indicating their val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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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 Keay, John (12 April 2011), India - A History, Open Road + Grove/Atlantic, ISBN 978-0-8021-9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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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