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군
경녕군 이비(敬寧君 李裶, 1395년 1월 15일 (1394년 음력 12월 13일[1]) ~ 1458년 10월 24일(음력 9월 9일))는 조선의 왕족이며 태종의 서장자이다. 어머니는 효빈 김씨(효순궁주)이다. 자(字)는 정숙(正淑)이다.
경녕군
敬寧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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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의 왕자 | |
이름 | |
휘 | 비(裶) |
별호 | 자 : 정숙(正淑) / 정윤(正尹) 원윤(元尹) |
시호 | 제간(齊簡) |
신상정보 | |
출생일 | 1395년 1월 15일(양력)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개성 |
사망일 | 1458년 10월 24일(양력) | (55세)
사망지 | 조선 충청도 충주 |
부친 | 태종 |
모친 | 효빈 김씨 |
배우자 | 청원부부인 청풍 김씨 |
자녀 | 10남 2녀 |
생애
편집출생
편집1394년(태조 3년) 12월 13일, 태종(太宗)과 효순궁주 김씨(孝順宮主)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김씨는 본래 원경왕후가 왕비가 되기 전부터 거느리던 사가의 여종[家婢]인데, 태종이 개경에 거주할 때 경녕군을 잉태하였다.1394년 12월 13일 진시(辰時: 오전 7시에서 9시 사이)에 경녕군 이비를 낳았다. 아래 태종실록 30권에 기재된 임오년(1402년) 출생설은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과 선원계보(왕실족보)와 전주이씨경녕군파족보에 기재된 바에 의하면 1395년 출생이 맞다.[1]
- 임오년 (1402년) 여름 5월에 민씨(원경왕후)의 가비(家婢)로서
- 본래부터 궁에 들어온 자가 임신하여 3개월이 되자 궁 밖에 나가 살고 있었는데,
- 민씨가 행랑방에 두고 그 계집종 삼덕(三德)과 함께 있게 하였다.
- 그 해 12월에 이르러 산삭(産朔)이 되어
- 이 달 13일 아침에 태동(胎動)하여 배가 아프기 시작하였다.
- 삼덕이 민씨에게 고하자, 민씨가 문바깥 다듬잇돌 옆에 내다 두게 하였으니,
- 죽게 하고자 한 것이다.
(중략)
- 진시(辰時)에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의 원윤(元尹) 이비(李裶)이다.
—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명 영락(永樂) 13년) 12월 15일 (무인)
효순궁주가 경녕군을 낳을 당시, 원경왕후와 그 형제들이 핍박하여 사지로 몰은 일이 있었는데, 훗날 태종은 원경왕후의 동생인 민무휼과 민무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경녕군 모자(母子)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 죄'를 물어 추국하였다.[2]
- 왕(태종)이 전지하기를,
“ 바람과 추위의 핍박과 옮겨 다니는 괴로움으로 인하여 병을 얻고 또 유종이 났으니,
경녕군 모자(母子)가 함께 산 것이 특별한 천행이었다.나는 그 때 이런일이 있었는지 미처 알지 못하였다.
지금 내가 늙고 가만히 생각하니 참으로 측은하다.
핏덩어리[赤子]가 기어다니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불쌍히 여기는데,
여러 민씨(閔氏)들이 음참(陰慘)하고 교활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꾀를 내어 기필코 사지(死地)에 두고자 하였으니,
이는 대개 그 종지(宗支, 왕의 자손)를 제거하고자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쌓아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핏덩어리(경녕군)에게 하는 짓이 또한 이와 같이 극악하였다.
그러나 천도가 밝고 어그러지지 않아서, 비록 핏덩어리가 미약함에도
보존하고 도와서 온전하고 편안하게 한 것이 지극하였다.어찌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로 하여금 그 악한 짓을 이루게 하겠느냐?
이것이 실로 여러 민씨들의 음흉한 일이니
내가 만일 말하지 않는다면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어찌 능히 알겠는가?
진실로 사책(史冊)에 상세히 적어 후세에 분명히 보여
외척으로 하여금 경계할 바를 알게 하라.”
—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명 영락(永樂) 13년) 12월 15일 (무인)
왕자 시절
편집1416년(태종 16년) 2월, 14세의 나이로 첨총제(僉摠制) 김관(金灌)의 딸과 혼인하였다.[3]
1419년(세종 1년) 상왕 태종의 명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 북경으로 향하였다. 이 때 명나라의 황제였던 영락제에게 기린·사자·복록(福祿)과 수현사와 보탑사(寶塔寺)의 상서로운 그림 5축(軸) 및 어제 서문(御製序文)이 붙은 《신수성리대전(新修性理大全)》과 《사서오경대전》 및 황금 1백 냥(兩), 백금 5백 냥, 색비단(色段羅), 채색 비단(彩絹) 각 50 필, 생 명주(生絹) 5백 필, 말(馬) 12필, 양 5백 마리를 하사받아 돌아왔다.[4]
적모(嫡母) 원경왕후의 상중에 기생 일점홍(一點紅)과 관계하여 태종의 노여움을 샀는데, 그 후에도 일점홍을 집으로 불러들여 1423년(세종 5년) 대신들의 탄핵을 받았다.[5] 그러나 세종은 형제의 정을 생각하여 그를 벌하지 않았으며 이듬해에는 출입을 금한 것을 풀어주었다.
- "생각하건대,
-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가 경자년(1420년)에 원경왕태후의 상 중에
- 무엄하게도 창기(娼妓) 일점홍(一點紅)과 관계하였으나,
- 태종대왕께서 차마 내어놓고 죄주지 못하시어 다만 견책만 하시었고,
- 일점홍을 공주(公州)로 내쫓았다가, 도로 그의 역(役)에 속하게 하였으니,
- 경녕군을 사랑하는 태종의 은혜가 지극히 깊고 또한 간절하였습니다.
- 이비(李裶)는 마땅히 태종의 명을 추념하여 전날의 마음을 고쳐 깨달아
- 조금이나마 지극한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여야 할 것인데,
- 이는 돌보지 아니하고 바야흐로 최질(衰絰, 상복을 입는) 중에 있으면서
- 슬픔도 잊고 여색에 빠져서 몰래 일점홍을 그 집으로 불러들였으니,
- 이는 참으로 사람의 자식으로서는 차마 하지 못할 일이옵니다.
- 이제 헌부에서 그 사정(事情)을 들어 재삼 거듭 청하였는데,
- 전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 신들은 생각건대, 이비(李裶)가 범한 죄가 강상(綱常)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면,
- 우애가 깊으신 전하의 지극한 인정으로 그 죄를 용서하여도
- 이에 대해 뭐라 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이제 산릉에 모신 지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유명(遺命)을 배반하여 거스르고,
- 상복도 벗기 전에 몰래 창기(娼妓)를 엿보았으니,
- 강상을 무너뜨리고 윤리를 어지럽히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고,
- 이는 진실로 국법으로 용서될 수 없는 일이며,
- 전하께서 사사로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 《세종실록》 20권,
세종 5년(1423년 명 영락(永樂) 21년) 5월 11일 (경인)
1425년(세종 7년) 숭록대부(崇祿大夫)와 1430년(세종 12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 지위에 올랐다.
1433년(세종 15년) 경녕군의 집 기둥에 벼락이 쳐서 세종이 해괴제(解怪祭)를 지내기도 했다.[6] 1449년(세종 31년) 3월에는 장남인 고양군(高陽君)이 사망하였다.
사망
편집1458년(세조 4년) 8월, 근정전 월대에서 열린 음복연에 참여하였으며, 한달 후인 9월 9일, 충주에서 사망하였다. 세조는 경녕군이 죽자 조회와 저자를 3일 동안 정지하고, 부의(賻儀)로 쌀과 콩을 합쳐 1백 석과 종이 2백 권, 정포(正布) 40필, 백저포(白苧布) 3필을 하사하였다.[7]
묘역은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음동마을 황금산(黃金山)에 있다. 묘역의 앞에는 경녕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명덕사가 있다.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이력
편집가족 관계
편집- 부왕 : 태종(太宗, 1367 ~ 1422)
- 생모 : 효빈 김씨(孝嬪 金氏, ? ~ 1454)
- 정부인 : 청원부부인 청풍 김씨(淸原府夫人 淸風 金氏, 생몰년 미상)[8]
- 적장남 : 고양군 이질(高陽君 李秩, ? ~ 1449년 3월 13일)
- 며느리 : 미상
- 적차남 : 은천군 이찬(銀川君 李穳, 1421 ~ 1481)
- 며느리 : 현부인 운봉 박씨(縣夫人 雲峰 朴氏) - 절도사(節度使) 증 찬성(贈 贊成) 박종지(朴從智)의 딸
- 며느리 : 숙부인 충주 최씨(淑夫人 忠州崔氏)
- 서손자 : 기산부수(起算副守) 이저(李櫧)
- 서손자 : 장산부수(璋山副守) 이주(李椆)
- 서손자 : 계성부수(桂城副守) 이방(李枋)
- 적3남 : 오성군 이치(梧城君 李禾+致)
- 며느리 : 현부인 초계 정씨(縣夫人 八溪 鄭氏)
- 손자 : 풍성군 이강(豊城君 李江)
- 손녀 : 평산 신씨 감역(監役) 신치(申錙)의 처
- 적4남 : 영선도정(永善都正) 이리(李利)
- 며느리 : 부사(府使) 윤경원(尹景源)의 딸 무송 윤씨
- 계부인 : 군부인 개성부 마씨(郡夫人 開城府 馬氏)
- 2계부인 : 군부인 전주 최씨(郡夫人 全州 崔氏)
- 적6남 : 단산도정(丹山都正) 이수(李穗, 1444 ~ ?)
- 며느리 : 신부인 양천 허씨(愼夫人 陽川 許氏) - 건공장군(建功將軍) 허아(許雅)의 딸
- 손자 : 은산도정(恩山都正) 이권(李權, 1457 ~ ?)
- 손자 : 소래정(蘇萊正) 이환(李桓, 1470 ~ ?)
- 손자 : 안성부수(安城副守) 이벌(李橃, 1480 ~ ?)
- 손자 : 용궁부수(龍宮副守) 이제(李梯)
- 손녀 : 김봉선(金奉先)의 처
- 손녀 : 능성 구씨 정랑(正郞) 구수복(具壽福)의 처(1491 ~ ?)
- (첩)며느리 : 양민 출신
- 서손자 : 남양령(南陽令) 이교(李橋)
- 서손녀 : 전주 이씨
- 서손녀 : 전주 이씨
- 측실 : 노비 출신
- 서장남 : 월성수(月城守) 이거(李秬)
- 며느리 : 직장(直長) 서우(徐遇)의 딸 이천 서씨
- 손녀 : 최순(崔侚)의 처
- 손녀 : 창원 정씨 현감(縣監) 정수인(丁守仁)의 처
- 서차남 : 가흥수(嘉興守 이적(李積)
- 며느리 : 영산 신씨 - 군수(郡守) 신신(辛信)의 딸
- 서3남 : 복성군 이진(福城君 李稹, 1435 ~ 1487)
- 며느리 : 신부인 이천 서씨(愼夫人 利川 徐氏) - 직장(直長) 서우(徐遇)의 딸
- 손자 : 송양부수(松陽副守) 이은산(李銀山)
- 손자 : 안양부수(安養副守) 이옥산(李玉山)
- 손자 : 금릉군 이금산(金陵君 李錦山)
- 서4남 : 가림군 이추(嘉林君 李秋, 1441 ~ ?)
- 며느리 : 미상
- 손자 : 하회정(河迴正) 이정(李禎)
- 손자 : 낙소부수(樂素副守) 이현손(李玄孫)
- 손자 : 공산군 이우(公山君 李祐)
- 서장녀 : 초계 정씨 참봉(參奉) 정석균(鄭石均)의 처
- 손자 : 주부(主簿) 정종영(鄭宗英)
- 서차녀 : 여산 송씨 현감(縣監) 송계흥(宋繼興)에게 출가
- 손녀 : 진주 정씨 정세준(鄭世俊)의 처
- 정부인 : 청원부부인 청풍 김씨(淸原府夫人 淸風 金氏, 생몰년 미상)[8]
경녕군이 등장하는 작품
편집드라마
편집같이 보기
편집참고자료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명 영락(永樂) 13년) 12월 15일 (무인)
왕비 민씨가 경녕군 모자를 사지에 둔 죄를 묻는 왕지를 춘추관에 내리다 - ↑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명 영락(永樂) 13년) 12월 21일 (갑신)
의금부에 명하여 민무휼과 민무회를 국문하게 하다
의금부에 명하여 민무휼과 민무회를 국문하게 하였다.편전에 나아가 우사간(右司諫) 조계생 · 집의(執義) 정초 ·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이천우 · 박은 · 허조를 불러,
민무회과 민무휼이 원윤 이비(李裶)의 모자를 죽이고자 한 죄와 세자(양녕대군)에게 불경한 죄를 자세히 말하고, 그 연유를 국문하여 밝게 죄안에 쓰게 하였다.
- ↑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2월 2일 (을축)
정선궁주를 우의정 남재의 손자 남휘에게 시집보내고, 원윤 이비를 장가들게 하다
제4녀 정선궁주(貞善宮主)를 우의정(右議政) 남재(南在)의 손자 남휘(南暉)에게 시집보내고,또 원윤(元尹) 이비(李裶, 경녕군)를 첨총제(僉摠制) 김관(金灌)의 딸에게 장가 들게 하고,
원윤(元尹) 이인(李䄄, 함녕군)을 중군 경력(中軍經歷)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 ↑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12월 7일 (정축)
경녕군 이비가 황제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돌아오다 - ↑ 《세종실록》 20권, 세종 5년(1423년 명 영락(永樂) 21년) 5월 11일 (경인)
우사간이 경녕군을 법대로 처형토록 상소하다 - ↑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3월 10일 (계해)
경녕군의 집 기둥에 벼락이 치니, 해괴제를 행하다 - ↑ 《세조실록》 14권, 세조 4년(1458년 명 천순(天順) 2년) 9월 9일 (계사)
경녕군 이비의 졸기 - ↑ 참의(參議) 증찬성(贈贊成) 김관(金灌)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