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크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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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지긴 아리크부카(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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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ǰigin Ariq Böke, 키랄문자:Аригбөх, 한국 한자孛兒只斤 阿里不哥 패아지근 아리불가, 1219년 ~ 1266년) 혹은 아리크포크(한국 한자孛兒只斤 阿里克布克 패아지근 아리극포극)는 몽골 제국의 황족으로 톨루이소르칵타니의 말자이다. 쿠빌라이 칸몽골 제국의 칸의 지위를 다툰 인물이다. 그의 형제는 몽케, 쿠빌라이, 훌라구 등이 있었다.

아리크부카(阿里不哥)

1259년 8월 몽케 칸남송 공략 도중 진중 사망하자 감국으로 섭정, 그해 11월 25일 쿠릴타이를 열고 칸으로 즉위했다. 쿠빌라이 칸은 이에 반발하여 이듬해 3월 3일 독자적으로 쿠릴타이를 열고 칸을 자처, 5년간 전쟁하였다. 몽골의 학자에 따라서는 그를 5대 대칸으로, 쿠빌라이를 6대 대칸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원나라와 쿠빌라이 정통론자들은 아리크부카를 반란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1264년 8월 항복하였으나, 1266년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1219년에 태어났다. 칭기즈 칸의 넷째 아들이자, 1227년~1229년 몽골의 임시 대칸을 맡은 툴루이와 그의 정실 소르각타니 베키 소생 넷째 아들이자, 툴루이에게는 일곱째 아들이었다. 일설에는 홀도도 역시 소르칵타니 베키의 소생이라는 설이 있어, 이 설을 취하면 그는 툴루이의 정실 소생 다섯째 아들이 된다.[1]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는 동방에 전래된 기독교의 일파 네스토리우스 신자였고, 그는 기독교에 대해 다소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아버지 툴루이가 죽자 오고타이 칸쓰촨 성 주변의 영지를 툴루이 가문의 영지로 주었다. 맏형은 몽케 칸이고, 둘째 형 홀도도는 일찍 요절했고, 셋째 형은 생모가 불분명하였으며, 동복 형제로는 쿠빌라이 칸훌라구가 있었다.

오고타이를 선출하는 쿠릴타이와 오고타이의 사후 규우크 칸을 선출하는 쿠릴타이에 그가 참여하였다. 오고타이의 아들이자 사촌 바투 칸이 죽자, 그 뒤는 툴루이 가문의 몽케 칸이 쿠릴타이를 통해 선출되었다. 형 몽케 칸중국화된 동생 쿠빌라이를 내심 불신하였고, 몽골의 보수적 부족장들 또핫 쿠빌라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아리크부카는 쿠빌라이의 한화(漢化) 정책에 반대하였다.

1258년 2월 몽케 칸은 직접 남송 정벌군을 편성하여, 쿠빌라이를 대동하고 원정길에 올랐다. 몽케 칸은 동생 아리크부카에게 카라코룸과 막북 고원 일대의 지키게 하였다. 쿠빌라이의 중국문화 수용과 친중국 정책에 반대하는, 보수적 성향의 몽골 부족장들이 아리크부카 주위에 모였다.

칸위 계승 전쟁편집

즉위 초반편집

1259년 8월 몽골 울루스 제4대 대칸인 몽케가 남송 원정 중 쓰촨 성 에서 병사하고, 몽골 원에 있던 수도 카라코룸을 수비하던 막냇동생 아리크 부케는 감국(監國) 자격으로 몽골 왕족과 부족장을 카라코룸으로 소집, 몽케파의 왕족을 모아 오르콘 강변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서부의 차가타이 가문 등 여러 왕가의 지지를 얻어 대칸의 지위를 얻었다. 원사 권4 세조본기에 의하면 1259년 11월 25일 선황 몽케 칸의 측근인 아란타르(阿藍答兒), 혼도하이(渾都海), 토쿠즈(脫火思), 토리치(脫里赤) 등이 모의하여 아리크부케를 칸으로 추대했다 한다. 바로 아란타르는 고비 사막 이북 막북 고원의 제부족 병력을, 토리치는 막남지역의 몽골 영역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혼도하이는 야율초재의 손자 야율희량(耶律希亮) 등 일부를 포섭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1260년 3월 카라코람 산맥의 서쪽 아르탄 강에서 아리크부카는 스스로를 몽골 제국 대칸으로 정식 선포하였다. 몽케 칸의 아들 아수타이, 시리기, 몽케 칸의 옥새를 소지하고 있던 몽케 칸의 차남 우룩타시(玉龍答失) 역시 아리크부카를 지지하였다. 주치 가문의 베르케, 차가타이 가문의 알루구, 몽케 가문의 왕족들이 아리크부카를 지지하였다.

이에 몽케와 함께 남송 원정 중이던 동생 쿠빌라이1259년 음력 윤11월에 군대를 되돌려 내몽골에 들어서 동쪽 3왕가(칭기즈칸의 동생 가계)등의 지지를 얻은 다음, 이듬해 3월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내몽골개평부(開平府 : 훗날의 상도)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지위에 앉았다. 이로써 몽골 제국은 사상 처음으로 몽골고원 남북에 두 명의 대칸이 들어서게 된다.

1260년 6월 아리크부카는 다시 쿠릴타이를 소집, 개최하고 다시 대칸임을 선포하게 했다. 몽케 칸의 장례를 치르고, 제도(帝都) 카라코룸에서 즉위한 아리크 부케가 대칸으로서의 정통성은 확보한 셈이었으나, 군사력을 장악한 쿠빌라이 역시 아리크 부케를 배신자로 여기고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대칸이라고 주장했다. 초기의 아리크부카의 영향력은 아르항가이, 자브항강 주변부터 몽골 고원 서부지역, 중국 감숙성, 칭하이 성 일대와 쓰촨 성북서부까지 그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동부 카자흐스탄 지역이 영역이었던 오고타이 한국카이두 역시 아리크부카 지지를 선언하였다. 한편 프랑스루이 9세가 파견한 사절 기욤 드 뤼브룩을 접견하고, 그가 십자가를 제조하는 것을 관찰하기도 했다.

1260년 차가타이 칸국의 칸위 계승이 혼란해지자, 쿠빌라이 칸은 자신의 측근이며, 차가타이 칸의 아들 모에투칸의 손자이며, 부리의 아들인 아비슈카를 칸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는 아비슈카를 체포하여 죽이고, 자신을 지지하던 알루구를 대신 차가타이 칸국의 칸위에 올렸다. 아릭 부케는 알루구에게 훌라구의 세력과 베르케 칸킵차크 칸국 세력과 대적하고, 물자와 군량을 모은 뒤 지역을 방어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알루구는 아리크 부케를 버리고 보물을 지킬 목적으로 사절을 죽였다.

오고타이 가문의 카이두는 아리크 부케에게 충성을 유지하였다. 아리크 부케는 알루구와 곧 갈등하였고, 아리크 부케는 곧 차가타이 칸국을 공격하였다. 첫 전투에서는 알루구가 승리했으나, 두번째 전투에서는 아리크 부케가 승리하고, 알루구 세력은 서부로 도망쳤다.

쿠빌라이와 전쟁편집

1260년 겨울, 쿠빌라이의 부장 차가(車駕)가 카라코룸을 점령, 아리크부카를 지지한 아란타르와 혼도하이를 처형하였다. 이때 아리크부카 부대는 겸주(謙州)에 주둔중이었다. 1261년 가을 아리크부카 군대가 카라코룸에 도착했다. 아리크부카는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쿠빌라이의 군대는 퇴각했다. 그러나 아리크부카는 뜻을 바꾸어 교전을 개시한다.

1261년 11월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양군은 여러 차례 격돌하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력과 화북의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에게 전세가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1261년카이펑 북쪽 시무토노르 호수에서 벌어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는 쿠빌라이가 승리했으나, 아리크 부케는 북서쪽 몽골의 오이라트부족의 지원을 얻어 저항을 계속했다. 바로 그는 차가타이 한국알루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아리크 부카는 다시 차가타이 한국을 공격했다. 일리 강 전투에서 알루구 군대를 물리치고, 알루구는 서쪽으로 도주, 코탄, 카슈가르 등지로 도망쳤다.

1261년 겨울, 아리크 부케 측은 몽골 고비 사막의 경계에서 쿠빌라이 칸과 교전하였으나, 기근과 식량 부족으로 패배하고 후퇴하였다. 아리크 부카는 차가타이 한국에 사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 군수물자를 조달하려고 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분개한 아리크 부카는 알루구의 휘하 장수와 병사들을 몰살시켰다.

1262년부터 다시 차가타이 한국의 알루구 칸과 전쟁하다가, 1263년 이슬람 출신으로 오고타이와 귀유크 칸 당시 투르키스탄 지역 다루가치로 있던 마수우드베이(馬思忽惕別乞占)를 강화사절로 알구칸에게 파견했다. 마수우드베이는 그길로 차가타이 한국에 귀순하였다. 1263년 겨울 이리 계곡 일대에 주둔중이던 아리크 부카의 군사들은 기근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사상자가 발생했다.

항복과 최후편집

1264년 1월 쿠빌라이 칸은 사자를 보내 아리크부카에게 항복을 종용했으나 거절했다. 1263년 봄 알루구와의 싸움 도중 병사들의 이탈로, 아리크부카는 알루구와의 교전을 중단하고 되돌아왔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 산하의 제후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오고타이의 아들 카단은 쿠빌라이의 편에 섰으며, 차가타이 가문마저 아리크 부케에 대한 지원을 끊자, 1264년 8월 21일 아리크 부케는 결국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아리크부카는 투항을 결정하고, 끝까지 자신을 따르던 우룽타시, 아수타이, 시리기 등과 함께 대도로 갔다. 원사에 의하면 아리크부카가 대도로 가 스스로 투항했다 한다. 이 일련의 전란을 승리자 쿠빌라이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아리크 부케의 난이라고 불렀다.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 휘하의 장군 10명을 처형하고, 아리크부카의 지지자들도 처형, 유배보냈다.

아리크부카의 처리를 홀로 하기 부담스러워한 쿠빌라이 칸은 아리크부카의 처리를 정하기 위한 쿠릴타이를 소집하였다. 몽골 대신들은 아리크 부케와 아수타이(阿速帶)를 사형에 처할 것을 건의했다. 훌라구, 바라크, 알루구 등도 아리크 부케의 사형을 상주하였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가 항복하자 쿠빌라이 칸은 아리크 부케의 목숨은 살려주는 대신 금고에 처했고, 아리크부케를 지지하던 왕족, 귀족들은 색출하여 참살하였다. 아리크부카는 [1266년]]에 대도(大都)에서 의문스럽게 사망했는데, 일설에는 쿠빌라이에 의한 독살로 추정된다.

사후편집

그의 후손들은 1266년 그의 사망 직후, 쿠빌라이 칸에 의해 소환되어 몽골 북서부의 일부 지역을 영지로 받았다. 매장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오고타이 칸의 손자이며 오고타이 한국의 군주 카이두가 아리크부카 계승을 선언, 일부 동몽골의 부족장들과 투르크족 족장들의 지지를 얻어 쿠빌라이 칸과 전쟁을 벌였다.

가족 관계편집

리사드 웃딘에 의하면 아리크 부카는 5명의 아들과 16명의 손자가 있었다 한다.

  • 아버지: 툴루이(拖雷)
  • 어머니: 소르칵타니(唆魯合貼尼)
  • 부인: 알리카미시(엘치크미시) 카툰 - 오이라트족 토를로시(脱劣勒赤)와, 칭기즈 칸의 다섯째 딸 체체겐의 딸
    • 아들: 요부쿠르(藥木忽兒)
    • 아들: 멜릭 테무르(明里帖木兒)
    • 며느리: 에메겐 테무르 - 오이라트족 토를로시와 칭기즈칸의 다섯째 딸 체체겐의 아들 바르스부카의 딸
    • 아들: 나마치
    • 아들: 나이라쿠부카(乃剌忽不花)
    • 아들: 라간시간(拉幹失幹)
  • 부인: 쿠툴루 카툰
  • 부인: 쿠투쿠카 카툰, 나이만족 출신
    • 딸: 네구데르 아히
    • 딸: 노모간 아히
    • 사위: 츄판 - 오이라트족 토를로시(脱劣勒赤)와 칭기즈칸의 다섯째 딸 체체겐의 손자, 부카 테무르의 아들
  • 부인: 에시타이 카툰, 콩기라트 족 타무치의 딸, 아들 요부쿠르가 수계
  • 첩 : 이라구 구이

관련 항목편집

전임
원 헌종 몽케
몽골 제국의 감국(섭정)
1259년 8월 11일 ~ 1259년11월 25일
후임
아리크부카
쿠빌라이
전임
아리크부카
(감국)
몽골 제국의 대립 대칸
1259년11월 25일/1260년 3월 ~ 1264년 8월 22일
후임
쿠빌라이
  1. 홀도도는 이름미상의 첩 소생 설과, 툴루이의 다른 첩 링쿤 카툰의 소생이라는 설이 있다.